사회계약론/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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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권[편집]

제1 장 일반의지는 파괴될 수 없는 것[편집]

한 데 모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일체로 생각하는 한 그들은 단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는 그들의 보존과 복지로 향해 있다.

그 때 국가의 모든 살아 있는 세력들은 원기 왕성한 상태에 있다. 이러한 원리는 분명하고 명확하다. 그들은 양립하거나 갈등하는 이익을 동반하고 있지 않다. 평화, 단결, 평등은 지적 궤변의 적이다.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하기 때문에 속이기 어렵다.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가 그것들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속일 정도로 세련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중에는 떡갈나무 아래에서 일군의 농부들이 국사를 논의하지만 항상 현명하게 행동하는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을 알 때, 다른 국가의 세련됨을 경멸스럽게 우리가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

이와 같이 다스려지는 국가는 매우 적은 수의 법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러한 필요는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러한 법을 제안한 사람이 단지 모두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내고, 그가 모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자마자 이미 이렇게 결정된 것을 입법화 하는데 어떠한 음모나 달변도 필요가 없다.

이론가들을 잘못 이끄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 형성된 국가를 본 결과로 그들은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찌들어 있다. 그들은 교활한 웅변가가 파리나 런던의 사람들을 설득해서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는 어리석인 생각을 비웃는다. 하지만, 크롬웰이 베른[1]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노역을 하고 보퍼트 공작이 제네바[2]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국가가 약해지면, 공동의 이익은 부패해지고 반대자를 만나게 된다. 선거는 더 이상 만장일치제가 아니며 일반의지는 더 이상 모두의 의지가 아니다.

결국에는 멸망의 순간에 국가는 비어있고 환상에 젖은 형태로 유지되고 사회적 결속은 모두의 가슴 속에서 파괴되었고 가장 미천한 이익이 공공선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활보하고 다닐 때 그 때 일반의지는 침묵을 지키게 된다. 비밀스런 동기로 움직여지는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말하기를 중단하고 법으로 가장한 사적 이익을 그들의 최종 목표로 간주하는 사악한 명령을 법으로 제정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일반의지가 소멸되고 부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변화지 않고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순수하다. 단지 일반의지가 그것을 압도하는 다른 의지에 종속되었을 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이익을 공익과 분리해 내는데 있어서 완전하게 분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공공의 해악에 기여하는 부분은 배타적인 이익과 비교해서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익과 관련되지 않은 곳에서는 그 자신의 이익대로 공적인 재화를 쓰려고 한다. 심지어 그 자신의 투표권을 돈으로 팔 때도 그는 일반의지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을 침해할 뿐이다. 그가 저지른 과오는 질문의 형식을 바꾼 것이고, 그에게 질문된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을 대답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투표권으로서 국가에 가장 이익에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대신에 그는 이 사람 혹은 이 정당에 어떠한 이익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의회를 통제하는 현명한 방식은 일반의지를 지지하지 않으려고 하면 된다.

나는 여기서 주권자의 행동으로서 투표의 권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설명했다. 이러한 권리는 시민들로부터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말할 수 있고 제안할 수 있고 나누고 논쟁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정부는 그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나누는 데 신중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중요한 주제를 하나의 장으로 모든 것을 다룰 수 없어 분리된 장으로 나누어서 다루기로 한다.

제2 장 참정권[편집]

이전 장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보자면 공적인 일이 행해지는 방법은 명확하게 도덕성의 정확한 수준이 되고 국가의 건강성을 보여준다. 의회에서 이루어진 통치가 조화를 잘 이루면 이룰수록 여론은 만장일치에 가까워지고 일반의지가 우세해진다. 반면에 긴 토론과 의견의 불화 그리고 혼란은 특정 이익의 우세와 국가의 쇠락을 증명한다.

로마의 최전성기 때조차도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 사이의 다툼이 로마의 의회를 혼란하게 한 것처럼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명령이 헌법 속으로 들어갈 때는 이러한 것은 덜 명백한 듯 보인다. 그러나 통치에서의 이러한 예외는 실제보다 더 명백하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정치체 속에 잠재해 있는 본질적인 약점의 결과로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조차도 사람들의 투표는 귀족들의 방해가 없을 때는 평화롭게 잘 진행되었으며 투표권은 다수에게 주어졌다. 시민들이 하나의 이해관계를 가질 때 사람들은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

또 다른 혼란기 때 만장일치가 되살아 났다. 고역 속으로 빠져 든 시민들은 더 이상 자유도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 두려움과 아첨이 투표를 환호와 갈채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심사숙고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숭배하거나 저주하였다. 이러한 것은 귀족들이 황제 아래에서 그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비열한 방법이였다. 때때로 이것은 불합리한 예방조치로 취해지기도 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Otho 황제 치하에서 의회 원로들이 Vitellius를 감싸주었으나 동시에 아주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서 Vitellius는 그들 각자가 말한 것을 구별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고려에 의해서 투표한 것을 세고 의견을 비교해 낼 수 있는 원리를 고안해 냈다.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법, 즉 사회적 계약에 관한 것일 때였다. 왜냐하면 시민적 결사는 세계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자신의 주인이며 아무도 그의 동의 없이 그를 복종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은 노예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적 계약이 만들어진 시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면, 이러한 반대가 사회적 계약을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를 배제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들은 시민들 사이의 이방인이었다. 국가가 성립 이후에 거주자들은 동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영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권을 위임한 상태에 있었다.[3]

이러한 최초의 계약과는 별도로 투표는 항상 나머지 사람들을 묶어 내고 이것 또한 그 자체로 계약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즉시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의지에 따르도록 강요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어떻게 반대하는 소수가 자유로우면서 그가 동의하지 않는 법에 복종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이 잘못 형성된 것이라고 대답한다. 시민들은 모든 법에 동의한다. 심지어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법을 어겼을 때 그 자신을 벌하는 법 조차도 동의하는 것이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의 변함없는 의지가 일반의지이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시민이 되고 자유롭다.[4] 법이 의회에서 제안될 때, 그들이 그 안건에 대해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반의지인지 아닌지가 질문되어진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각 개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고 표를 세는 것은 일반의지의 선언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우세할 때, 이것은 내가 단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으며 내가 일반의지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개별적인 의견이 일반의지에 반하여 우세하더라도 나는 내가 의지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일반의지의 특징이 여전히 다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거기에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 내가 특정 의지가 어떻게 공공의 숙고로서 만들어진 일반의지를 대체하는지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실질적인 수단이 그러한 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했다. 일반의지를 선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투표수와 관련해서 나는 또한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숫자와 관련된 원리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한 표를 차별하는 것은 동등한 배분을 파괴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반대 목소리를 만장일치를 파괴한다. 그러나 만장일치와 동등한 배분 사이에는 수많은 불평등한 배분이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배분은 정치체의 상태와 요구에 상응해서 이러한 지점 중의 어떠한 하나로 결정될 수 있다.

두 가지의 일반적인 금언이 이러한 비율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결정되어야 할 문제가 중요하거나 심각할수록 우세한 의견이 만장일치에 가깝게 가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문제가 요구하는 결정이 더 신속해야 하면 할수록 규정된 다수가 더 적을 수도 있다. 즉시 결정되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한 명이 충분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금언들 중에서 첫 번째는 법을 제정하는 것에 더 알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행정적인 일을 빨리 해치우는 것에 더 알맞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떤 문제와 관련되어서 결정을 하기 위한 최적의 다수결 숫자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두 금언의 조합에 의해서 가능하다.

제3 장 선거[편집]

통치자와 행정관료의 선출은 내가 말한 바대로 복잡한 조치이며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즉 선택 아니면 제비뽑기이다. 양쪽 모두 다른 공화국에서 채용되고 있으며 두 개를 혼합한 것이 베니스의 통치자를 선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몽테스큐가 말하기를 민주주의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제비뽑기에 의해서 선출하게 되면 아무도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며 모든 시민들은 그가 국가를 위해서 복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훌륭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행정관료를 선출하는 것이 정부의 기능이며 주권자의 기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제비뽑기가 민주주의에 적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행정은 그들의 조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좀 더 나은 상황에 이르게 된다.

모든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는 특권층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단지 한 사람에게 정당하게 행정관료의 책무가 부과될 수 없다. 법은 단지 이러한 부담을 제비뽑기에 의해서 추첨된 사람들에게 부과할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조건은 모두에게 동등하고 선택은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법의 보편성이 어떤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는다.

귀족정에서는 통치자가 통치자를 선택하고 정부는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영구화된다. 그 때 선택에 의한 선출이 적당하다.

베니스의 통치자에 대한 선출의 예가 그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와 같은 혼합 형태는 혼합 정부에 알맞다. 베니스의 정부를 진정한 귀족정으로 보는 것은 실수이다. 왜냐하면, 베니스의 사람들은 정부에 어떤 참여도 하고 있지 않으나, 베니스의 귀족들은 그 자체로 베니스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불쌍한 바나바파는 어떤 사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귀족들은 ‘각하’라는 빈껍데기 호칭에 의존하여 대회의에 참석할 권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의회가 제네바의 일반 이사회만큼이나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것의 저명한 구성원들이 우리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은 특권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제네바의 부르주아들은 정확하게 베니스의 귀족들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원주민들은 베니스의 도시 사람들에 상응하며, 우리들의 농부들은 본토의 예속민들과 상응한다. 종합하자면, 베니스 공화국을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것의 크기와는 별도로 정부는 우리들 자신이 귀족정이 아닌 만큼 그들 또한 귀족정이 아니다. 전체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정부의 우두머리가 없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과 같은 수단에 대한 필요성이 없다.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별로 이익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재산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재능이 유사하다면 누가 선출되든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에 의한 선출과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모두 다 채용될 때, 선택에 의한 선출은 군사를 통솔하는 영역과 같이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정치의 영역과 같이 상식과 정의 그리고 통합이 충분한 곳에서 필요하다.

군주제 하에서의 정부는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이든 선택에 의한 선출이든 그것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군주가 단지 유일한 통치자이며 행정관료이기에 그의 대리인에 대한 선택은 단지 그에게 달려있다. 아베 생 피에르가 프랑스 왕의 자문회의를 늘리고 그 구성원들이 무기명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었을 때, 그는 그가 정부형태 변화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의회에서 투표를 하고 그것을 계산하는 정치 수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로마의 정치체계 역사가 내가 구성하였던 모든 원리들을 설명해 줄 것이다. 공적 혹은 사적인 일이 200,000명의 사람들이 모인 의회에서 수행된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단지 사려 깊은 독자들의 체면을 깎는 일은 아니다.

제4 장 로마의 의회[편집]

우리는 초기 로마의 역사에 대하여 믿을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이 듣는 상당수의 이야기는 우화처럼 있음직한 일일 뿐이다.[5] 사람들의 연대기 중에서 가장 교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의 역사는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경험은 매일 우리에게 제국 안에서 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으나, 사람들은 더 이상 제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제도가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할 때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발견한 성립된 관습은 최소한 그러한 관습이 기원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을 회상하게 하는 전통은 최고의 권위자의 의해서 지지되고 최상의 이유로 확신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강인한 사람이 그들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탐구함으로써 내가 따르고자 하는 원리이다.

로마의 형성 이후에 새롭게 태어난 공화국은 Albans, Sabines와 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분화에 의하여 종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부족 각각은 다시 10개의 curiae로 나뉘어져서 각각의 curiae는 다시 decuriae로 나뉘어지며 그 우두머리를 다시 curiones, decuriones로 불렀다.

이에 덧붙혀, 각각의 부족으로부터 일군의 수백의 century라고 불리는 수많은 기사들을 이끌어 냈고 이러한 기사들이 분화가 만들어 낸 순수한 의미에서의 군대였다. 그러나 위대함에 대한 본능은 이러한 작은 로마라는 도시를 시작부터 그 자신을 세계의 수도에 알맞은 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분화는 곧 하나의 불이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Albans와 Sabines 부족은 일정한 숫자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충됨에 따라 외래 부족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두 개의 부족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숫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Servius가 이러한 위험한 결점으로 인해서 발견한 해결책은 분화의 기초를 변경시키는 것이었다. 인종적 구분 대신에 그는 부족 각자에 의해서 점유되고 있는 도시의 구역에 기초하여 구분하기 시작했다. 세 부족 대신에 그는 로마의 언덕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네 가지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현존하고 있는 불평등을 보정하고 예상되는 불평등을 미리 차단하였다. 그리고 구분이 장소가 아닌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한 구역의 거주자가 다른 구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래서 인종들이 서로 합쳐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는 300명의 기사를 두 배로 증가시켜 12개의 새로운 기사 대대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이전의 이름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그는 후자의 불평없이 기사들 전체를 국민들 전체와 구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네 개의 도시 부족에 Servius는 15개의 다른 시골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더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많은 주안에 정렬되어 있는 시골의 거주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수많은 부족들이 생겨났을 때, 로마사람들은 35개 부족으로 나뉘어졌고 공화국의 멸망까지 그 숫자는 계속 유지되었다.

도시 부족과 시골 부족의 구분은 다른 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로마가 그들의 도덕성과 제국의 성장을 이끈 이유이기도 한 주목할 만한 하나의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도시의 부족들은 권력과 명예를 곧 독점하고 시골 부족의 지위를 빠르게 감소시킨 것이다. 시골 생활에 대한 초기 로마의 성향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향은 그들의 현명한 창립자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자유를 시골생활과 군사적 노역과 함께 나갈 수 있도록 하고, 도시에는 수공업, 무역, 부와 노예제도를 도시에 소속시켰다.

로마에 모든 저명한 사람들이 시골에 살고 있으면서 그 땅을 경작했으므로 시골을 공화국의 주요한 거주지로 관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은 고상한 귀족들의 것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존경받는 삶이기도 하였다. 시골에서의 단순하고 노동하는 삶이 로마의 부르주아들의 느슨하고 게으른 삶보다 선호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단지 비참한 노동자의 삶은 땅의 경작자로서 존경받는 시민이었다. Varro가 말하기를 전쟁시에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평화시에는 그들을 먹이는 건강한 사람들이 시골에서 양성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Pliny는 시골 사람들이 그들에게 속한 사람들 때문에 존경받고, 겁쟁이로 격하되려고 하면 곧장 도시의 부족들 중 하나로 이송된다면서 시골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Sabine 부족의 Appius Claudius는 로마에서 그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때 시골 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되어 존경과 함께 옮겨왔고 나중에 시골 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그의 가족 이름이 되었다.

이러한 원리는 훌륭하나 몇 가지 개선사항이 필요하게 되었다.

첫번째로, 그 자신을 시민들이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사칭하는 검열관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선택에 따라 부족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것은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시골 부족에 등록하고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 부족에서 일반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게 하였다. 그래서 부족은 점차적으로 어떤 지역적 영토적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두들 섞여서 더 이상 어떤 사람들을 등록 문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tribe라는 말이 영토적 의미 대신에 인신적 의미를 가지게 된 기원이 되었다.

중심에 가까운 도시 부족들은 그들 자신이 comitia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의회를 구성하는 천민들의 표를 사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국가를 팔아버렸다.

curiae와 관련해서는 창조자들은 각 부족들이 10개의 curiae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로마의 도시 벽 안에 살던 시대에 로마 전체 사람들은 30개의 curiae를 구성하였고 각각은 자신의 신전, 신, 사무원들, 성직자와 축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compitalia라고 불렀다. 이러한 것은 나중에 시골 부족들에 의해서 개최된 Paganalia와 유사한 것이었다.

Servius가 그의 새로운 분류안을 내어 놓았을 때, 30이라는 숫자는 그의 네 개의 부족들 사이에 동등하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curiae는 부족과는 독립적인 것이 되었으며 로마 사람들의 다른 범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시골 부족들 안에서 curiae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부족들이 시민적 제도가 되고 군대를 동원하는 다른 방식이 소개된 이후에는 Romulus의 군대 조직은 더 이상 불필요한 과잉 상태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각 시민들이 부족에 등록하였다 하더라도, curiae의 구성원이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Servius는 전체 로마 사람들을 여섯 계급으로 나누었고 그러한 분류에는 어떠한 인적인 혹은 지역적인 것이 기초하지 않았으며 단지 부에 의해서 나누었다. 그래서 첫 번째 계급은 부로 충만하였으며 중간 계급은 적정한 수준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섯 계급은 193개의 하위 집단으로 나누었으며 이를 centruries라고 불렀다. 이러한 조직은 너무 광범위해서 첫번째 계급이 그들의 절반을 책임졌고, 마지막 계급은 단지 하나의 것에만 해당되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하나가 로마 거주자의 절반 이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러한 분화의 결과를 잘 인식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Servius는 그것을 군대 형식으로 가장했다. 그는 두 번째 계급에 두 개의 기갑 centuries를 속하게 하였으며, 네 번째 계급에 두 개의 무기 제조자 centuries를 속하게 하였다. 마지막 계급을 제외한 각 계급 안에서 그는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을 분화시켰다. 즉 다시 말해서 무기를 견딜 수 있는 사람들과 법적으로 면제되는 사람들로 나누었고 이러한 분류는 부 이상으로 통계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회는 Campus Martius에서 개최되었고 모든 국방을 담당할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들은 무기를 착용하고 참석해야만 했다.

마지막 계급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분화시키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그것에 속한 보통의 사람들이 무기를 착용할 만한 명예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장간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왕의 군대를 장식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거지 무리들은 군대가 자유의 수효자인 시절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경멸로써 축출당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 안에서는 프롤레탈리아와 capite censi라는 불리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있었다. 전자는 최소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기 하였다. 하지만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단지 머릿수를 셈으로써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을 뿐이었고, 어떤 실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Marius는 그들을 등록하고자 하는 겸손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런 세 번째 분류가 좋은지 나쁜지를 여기서 결정하는 것 없이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실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초기 로마의 단순한 습관 즉 농업에 대한 관심과 상업이나 이윤 추구에 대한 경멸을 때문이다. 탐욕스럽고 음모 가득하며 부에 대한 지속적인 운동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제도들을 국가가 전복되지 않고 20년 동안 지속되도록 한 근대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로마 사람들의 도덕과 검열의 사무는 이러한 제도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뽐내게 되면 그 자신이 가난한 계급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비록 6개의 계급이 있었긴 했지만 왜 5개 이상의 로마 계급이 좀처럼 언급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 계급은 투표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Campus Martius[6]의 투표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공화국의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고려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 사람들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분류가 의회에서 가지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법적으로 소집되는 의회를 comitia라고 부르고 일반적으로 로마의 광장 즉 다시 말해 Campus Martius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은 채용되는 형태에 따라서 comitia curiata, comitia centuriata, comitia tributa 등으로 구별되었다. comitia curiata는 Romulus에 의해서 창립되었고, comitia centuriata는 Servius에 의해서, comitia tributa는 국민들의 호민관들에서 기원하였다. 어떤 법도 제재 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어떤 행정관료들도 comitia안에서를 제외하고는 선출되지 않았다. 그리고 curia, century, tribe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은 없었다. 그것은 어떤 시민들도 투표할 권리를 배제당하지 아니하며, 로마의 사람들은 법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도 진정한 주권자였다.

comitia가 법적으로 소집되고 그것의 결정이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한다. 첫 번째로 의회를 소집하는 구성원들이나 집행관료들이 필요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며, 두 번째로 의회는 법적으로 허용된 날짜들 중의 한 날에 열려야 하고, 마지막으로 점이 길해야만 한다.

이러한 규칙들 중에서 첫 번째는 설명이 필요 없다. 두 번째도 정책적 문제이다. 의회는 휴일이나 시장이 열리는 날에서는 개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업차 로마에 오는 국민들이 광장 안에서 하루를 보낼 시간이 없다. 세 번째 규칙은 원로원이 자만하고 들떠있는 국민의 감정을 억누르고 선동적인 호민관들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었다.

법과 우두머리의 선출은 comitia의 판단에 맡겨진 유일한 사항은 아니다. 로마의 사람들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침해하였음을 전제로 사람들은 유럽의 운명이 이러한 의회의 결정에 맡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공적인 사업이 comitia가 결정해야만 하는 일에 따라서 취하게 되는 여러 가지 형태들을 설명해 준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들을 비교해 보면 된다. curiae를 만든 Romulus는 인민들에 대항한 원로원과 원로원에 대항한 인민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이러한 배치 하에서 귀족들에게 주어진 ‘권력과 부의 권위’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인민들에게 ‘수에 대한 권위’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족들에게 거대한 이익을 준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숫자적 다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평민들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원자와 고객이라는 제도는 정치와 인류애의 걸작이다. 그것 없이는 공화국 정신에 반대되는 귀족계급들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고상한 예는 단지 로마의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 밖의 어느 지역에서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curiae라는 형태는 왕들 아래에서 Servius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타르퀸의 마지막 통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법은 일반적으로 leges curiatae로 알려져 있다.

공화국 하에서 여전히 네 개의 도시 부족들으로 제한되고 로마의 인구만을 포함하고 있는 curiae는 귀족들을 이끄는 원로원도 평민들이기는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을 이끄는 호민관들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처럼 curiae는 신뢰를 잃었고 격이 낮아져서 그들의 30명의 릭토르가 comitia curiae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만났다.

century로 나누어진 것은 귀족들에게는 아주 우호적인 것이어서 처음에 원로원이 하루가 지나도록 그 comitia에 머물렀고 그 곳에서 집정관과 검열관 및 중요한 행정 관료들을 선출하였다. 실제로 193개의 century 중에 첫 번째 계급이 98개를 차지하고 있었고, 투표라는 것은 단지 century 단위로 셈해 졌기 때문에 첫 번째 계급이 다른 여타의 계급보다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여기에 속한 century가 동의를 하게 되면 투표의 나머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소수의 결정이 다수의 결정으로 통과된 것이다. 그래서 century에 의해서 결성된 의회는 투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권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완화되었다. 첫 번째는 일상적으로는 호민관에 의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계급으로 첫 번째 계급 안의 귀족들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춰주었다.

두 번째는 century는 항상 계급을 따져서 항상 소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제비뽑기[7]에 의해서 임의로 소환되었다. 그 century가 선거를 진행하고 나면 다른 century가 선거를 반복하기 위하여 계급의 순서대로 소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은 그 선출의 결과를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계급보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관습은 또 다른 이점이 있다. 시골로부터 온 시민들은 선거 사이의 시간이 있어 이전에 지명된 후보의 장점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따라서 무지한 상태로 투표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절차를 속도감 있게 진행시키려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관습은 폐지되었고, 양 쪽 투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comitia tributa는 엄격하게 말하면 로마 사람들의 지방 의회였다. 그것은 단지 tribune들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었고, tribune을 선출하고 그 곳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원로원들은 그 회의체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 뿐더러 참석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그 범위에서는 가장 지위가 낮은 시민들보다 덜 자유로웠다. 모든 귀족들이 그들의 권리에 의해서 comitia에 참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투표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무산 계급들도 그 투표에서는 원로원의 통치자처럼 중요하게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표를 모아내는 다양한 제도로부터 출현한 질서 외에 이러한 몇몇 수단들은 그 자체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각각은 어떤 누구를 선출할 수 있는 여론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더 깊숙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미 설명한 것으로부터 comitia tributa가 대중적 정부에 가장 적합한 의회이며, comitia centuriata가 귀족정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대중만이 단지 다수를 형성하는 comitia curiata의 경우에는 그것들의 전체정치화 되려는 경향은 그들을 불명예로 이끌었다. 그 결과 선동적인 요소들이 이러한 의회가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인해서 되도록 피하도록 만들었다. 로마 시민의 전체 왕족들이 단지 comitia centuriata에 보여진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것만이 전체 의회이다. 왜냐하면 comitia curiata는 시골 부족들을 배제했고, comitia tributa는 원로원과 귀족들을 배제하였다.

로마인들에 의해서 사용된 투표 제도는 그들의 예절과 도덕만큼이나 단순하였다. 개인들은 구두로 투표를 하였고 사무관이 그것을 기록하였다. 각 부족에서 다수표를 얻은 것으로 결정이 났고, 부족의 다수를 통하여 국민의 의사를 결정하였다. 동일한 과정이 curiae와 centuriae 안에서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정직이 대중들 속에서 우세할 때에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는 정당하지 못한 원인으로 혹은 가치 없는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표하고 표를 사게 되면서부터 투표가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유리했고 그래서 표를 사는 사람은 파는 자의 불신에 의해서 그 자유가 제한되었다.

나는 Cicero가 이러한 방법의 변화를 비난했고 로마 제국의 쇠락에 일정정도 책임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국의 멸망을 막기에는 변화의 정도가 너무 적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식단이 환자에게는 맞지 않듯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덕성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법을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례도 베니스 공화국이 그들의 법이 사악한 사람들에게 알맞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원리를 공고히 해 주는 것은 없다.

로마의 시민들도 그들 사이에 나누어져 있는 작은 패들이 있었고, 각자는 어떤 누구도 그의 의견을 알지 못하고 투표를 하려 했다. 새로운 제도가 작은 패들을 모아서 계산하고 이를 다시 비교하는 등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결국 음모와 표의 매수를 방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공화국이 말기에 다다르게 되면서 로마인들은 자주 법의 부적정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예외적 편의를 자주 사용하게 된다. 때때로 후보자가 뇌물을 사용하기 이전에 의회가 급하게 소집되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선동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전체 회기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희망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수많은 남용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규칙 덕분에 계속해서 원로원이 그 스스로 명령을 하는 것처럼 수장을 선출하고 법을 입안하며 사건을 재판하고 사적이고 공적인 일들을 수행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제5 장 호민관[편집]

국가의 헌법적 기관 사이의 정확한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특별한 다른 행정관료들과는 분리되는 특별한 행정관료가 만들어진다. 이들에 의해서 모든 요소들이 균형이 이루고 군주와 국민 혹은 통치권과 주권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내가 tribunate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러한 실체는 법과 입법권력의 보호자이다. 그것은 정부에 대응하여 로마에서 인민의 호민관이 했던 것처럼 주권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베니스의 위원들처럼 인민들에 대항하여 정부를 지지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Ephor들처럼 양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도 한다.

tribunate는 공화국의 헌법적 기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법권 혹은 행정권 양자 중 어느 곳에서도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 자신의 힘은 더욱더 거대해 질 수 있으며, 그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보호할 수 있다. 법의 수호자로서 그것은 법을 집행하는 통치권자나 입법하는 주권자보다 신성하고 존경받는 존재이다. 이것은 로마의 경우에 가장 확실하게 보여진다. 로마에서는 자만심 강한 귀족들이 신성하지도 않고 법적인 권위도 있지 않은 인민의 평범한 사무관들 앞에서 인사하도록 강요받았다.

현명한 tribunate는 훌륭한 헌법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한 것 이상의 힘보다 약간이라도 힘을 가진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약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단지 중재자여야 하는 집행권을 침탈하려 하고, 보호해야할 입법권을 가지려고 한다면 전체주의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Ephor의 거대한 힘이 부패가 한 번 시작되자 급속히 부패가 확산되었다. Agis의 계승자가 독재자에 의해서 흘려진 Agis의 피에 대해서 복수를 하였다. Ephor의 범죄와 처벌은 동일하게 공화국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Cleomenes 이후에 스파르타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로마도 같은 식으로 멸망하였다. tribune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휘두르는 과도한 힘은 결국에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의 도움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바로 그 황제를 보호하는 격이 된다. 베니스의 10인의 위원들에 관해서 그들은 피의 trinunal이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법에 최고의 보호를 가하기는 커녕 단지 법의 격을 낮추었을 뿐이다.

정부와 같이 tribunate는 그 구성원의 증가에 따라서 약해진다. 로마의 호민관들이 처음에는 둘이였으나 그 다음에는 다섯으로 점차 그 숫자를 증가시켰을 때 원로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이것에 동의하였다.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실체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호민관의 임기를 영구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이 중단되는 시기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법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며 필요시에는 예외적인 권한 위임에 의해서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이러한 수단은 나에게는 별로 이득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민관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헌법 기관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헌법에 어떠한 손해를 끼치지 않고 제거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나에게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새로 성립된 행정관료는 그의 전임자가 가진 힘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권력을 가지고는 사무에 임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6 장 절대권력[편집]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법의 불융통성 때문에 그들은 상처받을 수 있고, 어떤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멸망에 이를 수 있다. 법적 절차의 정돈되고 점진적인 과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입법자가 예측하지 못하는 수많은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누군가가 모든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예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법의 신성한 힘은 조국이 위험상태에 처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중단될 수 없다. 이런 드물고 명백한 상황에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 그 안전에 책임감 있는 누군가를 임명하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진다. 이러한 책임은 긴급 상황의 특성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부 활동의 증가가 위험을 줄이는 데 적당하다면, 그 때에는 정부 구성원 한, 두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줄어드는 것은 법의 권위가 아니라 단지 정부의 형태이다. 그러나 위험이 법 자체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그 때에는 최고 권력자가 모든 법을 중단시키고 일시적으로 주권적 권위를 정지시키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임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일반의지에 의한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입법적 권위의 중단이 법을 폐지한다고 할 수 없고, 행정관이 그것을 중단시킨다 하더라도 법을 향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법을 만드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 중에 처음의 것은 로마의 원로원에서 그들이 집정관들에게 공화국의 안전을 내맡길 때 쓰던 방식이었다. 두 번째 것은 두 명의 집정관들 중 하나가 로마가 Alba로부터 배운 제도 중의 하나로 한 명의 독재자를 임명[8]할 때 사용되었다.

공화국 초창기에 로마는 자주 독재에 도움을 청했다. 왜냐하면 주변의 조건이 아직 국가를 그들의 헌법의 힘에 의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도덕적 성격은 그 시기에 다른 시기에 필요로 했던 만큼의 예방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독재자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다거나 자신의 임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반대로 힘은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급히 그 자신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그것은 마치 법이 정한 공식석상에 있는 것이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남용될 우려의 위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초창기에는 경솔한 임명에 의해서 그것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공화국이 말기에 다다르게 됨에 따라, 신중해진 로마 사람들은 그들이 한 때 집착했던 독재적 위임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절제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독재자는 어떠한 경우에는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그것을 방어해 낼 수 있다. 로마의 인습은 로마 그 자체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군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Marius가 Sulla에게 했던, 그리고 Pompey가 Caesar에게 했던 약한 저항들이 외부적 힘에 직면한 내부적 권위에 대해서 무엇이 기대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실수는 로마 사람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도록 했다. 예를 들어 카틸리나 사건에서 독재자를 임명하는 데 있어 실패한 사례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도시의 일, 즉 이탈리아의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법이 독재자에게 준 무제한적 권위가 우연적 사고에 의해서 진압될 수 있는 음모를 좀 더 쉽게 괴멸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임명하는 대신에 원로원은 모든 그의 권력을 집정권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Cicero는 그의 권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로마의 사람들에 그의 행위에 찬동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나중에 법의 파괴로 인해서 흘리게 된 국민들의 피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의 국가보다는 그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국가를 위해서 합법적인 어떤 수단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자신을 위해서 영광스러운 일을 찾으려고 했다.[9] 결과적으로 그는 로마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칭송되었지만, 로마의 법의 파괴자로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추방에서의 소환이 화려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지 용서의 행위였다.

어떤 방식으로 독재적 위임이 이루어졌는지 간에 결코 임기를 연장할 수 없게끔 기간을 제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비상시에 국가는 멸망하거나 구해지거나 할 것이고, 비상시의 요구가 종료된다면 독재적 권능은 폭압적이거나 무용한 것이 된다. 로마에서는 그 기간이 6개월 정도였고 독재자의 대부분은 그 기간이 넘기 전에 사임하였다. 그 기간이 더 길어진다면, 그들은 일년의 임기를 가진 로마의 10대관들처럼 자신의 임기를 더욱더 늘리려고 할 것이다. 임명을 가능하게 한 필요가 충족된다면 독재자는 더 많은 계획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제7 장 검열관의 법정[편집]

일반의지가 법에 의해서 선언되는 것처럼 공중의 재판은 검열관에 의해서 선언된다.

검열관이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중재하는 사람이기는 커녕 그는 단지 대변인에 불과하다. 검열관이 이러한 사람들의 의견과 동떨어져 있을 때, 검열관의 결정은 무효이고 효력이 없다.

국가의 도덕을 존경의 대상과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양자는 같은 원리에서 발생하였고, 필수적으로 통합된다.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행복한 선택을 통제하는 것은 본성이 아닌 여론이다. 사람들의 여론을 개혁하라. 그러면 그들의 도덕이 그 자신들을 정화시킬 것이다. 인간들은 항상 선한 것 혹은 그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에도 실수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판단은 통제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여론을 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론은 헌법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법이 도덕을 통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입법이 도덕의 탄생에 이바지하게 된다. 입법의 기능이 약화된다면 도덕도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검열관의 통치가 법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검열관을 도덕을 유지하는 데 있어 유용하나, 결코 도덕을 재건할 수는 없다. 법이 여전히 활동적일 때 검열관을 세워라. 왜냐하면, 생기를 잃어버린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법이 더 이상 힘을 가지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것 모두가 힘을 가질 수 없다.

검열관은 여론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현명한 통치로 통합성을 유지하며 불확실한 여론을 분명히 함으로서 도덕을 유지해야 한다. 결투에서 보조자를 사용하는 문제는 왕의 한 마디 칙령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공중의 판단을 미리 해 버린 것이고 그의 한 마디 말로서 해버린 것이다. 또한, 동일한 칙령이 결투를 하는 것이 비급한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공중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조롱하였다.

나는 여론은 어떠한 제약도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성립된 법정 안에서 어떠한 제한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어디에서나 말해왔다. 우리들은 이러한 도구가 로마나 스파르타인들에 의해서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서 경탄해 왔다.

제8 장 시민종교[편집]

처음에 사람들은 신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왕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정부는 신정정부였다. 그들은 Caligula처럼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그들 종 가운데 한명을 그 자신의 주인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결심을 하기 이전에는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오랜 변화가 필요했다.

신이 모든 정치적 결사체의 정점에 있다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로부터 민족만큼이나 다양한 신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서로에게 이질적이고 또한 항상 적으로 대해 온 두 개의 민족에게 같은 주인을 인식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장으로 향하는 두 개의 군대가 동일한 장수에게 명령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민족적 분열은 다신교를 낳았고 차례로 이것은 종교적 시민적 관용을 만들었다.

그들 자신의 신이 야만족에 의해서 숭배되고 있다는 아주 환상적인 생각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여러 종족들에 대한 자연적 주권자로 여기는 습성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대에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 신의 동일성을 연구하는 것은 Moloch, Saturn, Chronls가 동일한 신일 수 있다거나 페니키아 사람들의 Baal, 그리스 사람들의 Zeus, 로마 사람들의 Jupiter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마치 다른 이름을 가진 상상의 물건들이 공통성을 지닌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얀에 각 국가가 자신의 종교과 신을 가지고 있을 때 왜 종교전쟁이 발생하지 않느냐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 자신의 정부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그들의 신과 그들의 법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없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정치적 전쟁은 많은 부분 종교적 성격을 지녔다. 신의 영역은 국가적 경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민족의 신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교도의 신은 어떠한 의미로도 시샘이 많은 신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세계를 분할해서 가지고 있다. 모세와 유대인조차도 이스라엘의 신을 말하면서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한다. 그들은 멸망할 운명에 처해있고 그들의 나라는 점령당하게 될 가나안 사람들의 신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빌론의 왕에게, 나중에는 시리아의 왕에게 예속된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신 외에는 어떤 다른 신을 인식하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이러한 거부는 그들의 정복자에게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역사에서 보는 박해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박해는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이전에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각각의 종교는 국가의 법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공격당하였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외에는 그들을 개종시킬 방법이 없었으므로 유일한 선교자는 정복자였다. 그리고 믿음을 바꾸도록 하는 구속은 정복자의 법의 일부였기에, 개종을 설교하기 전에 정복이 필요로 하였다. 사람들이 신을 위해서 싸우기는 커녕 Homer에서처럼 신이 인간을 위해서 싸웠으며 각각의 민족은 신에게 자신들의 승리를 요구하였다. 로마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에게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로마 사람들은 피정복자들이 그들 자신의 신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들이 로마의 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전의 Jupiter에게 헌납된 왕관이 그들이 강요하는 유일한 공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과 신을 그들의 제국과 함께 퍼뜨렸을 때 이러한 광대한 제국의 민족들은 다양한 신과 믿음을 가진 그 자신을 점차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이교도들이 하나가 되었고 모든 알려진 세상을 통해서 동일한 믿음을 가지게 된 방법이다.

예수가 지구상에서 정신적인 왕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였다. 신학적 체계와 정치적 체계를 구분함으로써 이 왕국은 동일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부의 분열을 가져와서 크리스트교 사람들을 동요케 했다. 지금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은 이교도들의 생각 속에 결코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들은 항상 크리스쳔들을 진정한 반역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선적 순종의 망토 아래에서 그 반역자들은 그들이 독립적이고 최상의 존재가 될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교활하게 그들이 약할 때에는 존경하는 척하는 그 권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것이 박해의 원인이었다.

이교도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보잘 것 없는 크리스쳔들이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이른바 세계의 폭력적인 독재가 되고만 또 다른 왕국을 열었다.

그러나 왕과 시민들의 법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이유로 이러한 전투적 힘의 결과는 판결의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크리스쳔 국가 안에서는 불가능한 정치체를 만들었다. 즉 그것은 그들이 시민적 통치자에게 복종을 해야하는 것인지 성직자들에게 복종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유럽과 그 주변의 많은 민족들이 고대의 시스템을 보존하고 재건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완전하게 승리하였다. 종교적 열광은 항상 주권의 독립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것은 국가와의 필요한 결합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마호메트는 그의 정치적 구조에 결속을 부여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의 정부 형태가 칼리프 아래에서 유지되는 한 정부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며, 훌륭한 정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이 번영하고 부드러워지면서 다른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하였다. 그 때 두 개의 힘 사이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그 분열이 크리스쳔 사이 보다는 모슬람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덜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국 Ali의 영역과 페르시아와 같은 국가 사이로 나뉘어졌다.

우리 세계에서는 영국이 교회의 우두머리를 세웠고, 짜르 또한 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명함을 가지고도 그들은 그 자신을 주인이라기보다는 심복으로 만들었으며, 교회를 변화시킬 권리를 가지기보다는 차라리 그것들을 보존하는 권력을 가지고자 하였다. 그들은 입법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최고 집행자이다. 성직자의 하나의 구성체[10]를 결성할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서에 주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가졌다. 그 결과로 영국과 러시아는 두 개의 권력과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크리스쳔 작가들 중에서 홉스만이 그 악과 치료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 만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를 재결합하고자 제안을 하였으며 정치적 결합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결합없이는 국가도 정부도 잘 구성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쳔의 지배적인 정신은 그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군주의 이익은 국민의 이익보다 항상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홉스의 이론에서 끔찍하고 오류이기 보다는 정의롭고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역사적인 사실이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분석된다면 우리들은 Bayle과 Warburton의 반대되는 믿음을 쉽게 논박할 수 있다. 한 명은 어떤 종교도 정치체에 유용하지 않다고 했으며, 다른 한 명은 크리스쳔은 정치체의 가장 최고의 지지자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첫 번째에 대해서는 어떤 국가도 종교 없이는 그들의 기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해서, 두 번째는 크리스쳔의 법은 그 바닥에 국가의 건전한 헌법에 복무할 수 있기보다는 상처를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의해서 논박할 수 있다. 이것이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면 나는 애매한 종교적 생각에 좀 더 정밀한 생각을 보태야만 하겠다.

사회와 관련된 종교를 고려함에 있어서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간에 종교라는 것은 두 개의 범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인간의 종교와 시민의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사원, 제단, 의식 및 내부 신봉자에게 제한된 것이 없으면 복음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종교가 되며, 신성한 자연적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종교는 단 하나의 국가에서 성립된 종교이다. 그것은 그 국가에 신과 특별한 수호신을 주며, 법에 의해서 제정된 교리, 의식, 외부적 형태의 숭배 등이 존재하게 된다. 이 종교를 실행하는 한 국가에게 외적인 모든 것은 이단이며 야만적인 것이다. 종교가 종교의 제단을 확장하는 만큼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확장된다. 초기의 민족 종교가 이러한 형태를 지닌다. 우리들은 그것에 ‘시민적 혹은 궁극적인 신성한 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세 번째의 종교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두 개의 입법적 질서와 두 개의 통치자, 두 개의 고향을 주게 됨으로서 그들에게 두 개의 모순되는 의무를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동시에 교회의 사람이 되거나 시민이 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러한 것은 Lama의 종교, 일본의 종교 카톨릭의 종교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직자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것을 일종의 혼합된 반사회적인 법적 시스템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세 가지 종류의 종교 각가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는 설명할 것도 없이 명백하게 나쁘다.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자신과 불일치하게 설정하는 모든 제도는 가치가 없다.

종교에 대한 두 번째의 것은 법에 대한 사랑으로 신성한 숭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훌륭하다. 그리고 그들의 조국을 시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들에게 국가에 대한 복무가 수호신에 대한 복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신정정치의 일종이다. 그 곳에서는 군주와는 다른 제사장이 있을 수 없다. 행정관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성직자도 있지 않다. 그 결과로 한 국가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이며 법을 파괴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행동이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공공의 저주에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를 천벌에 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종교에도 나쁜 점이 있으니, 그것은 오류와 거짓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무엇이든 잘 믿게 하고 미신에 현혹케 할 수 있다. 그것은 공허한 의식으로 신에 대한 진솔한 숭배를 묻어 두게 된다. 또한 배타적이고 폭압적이게 될 때 그래서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관용을 모르게 해서 살인과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신성한 행위로 생각한다면 더욱더 문제가 된다. 이것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전쟁의 자연상태로 두게 되는 것이며 곧 이것은 우리 자신의 안위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종교가 남아 있다. 즉 그것은 크리스쳔의 종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크리스쳔의 종교는 아니다. 단지 함께 다른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복음의 종교이다. 신성하고 숭고하고 진솔한 종교 아래에서는 신의 아이처럼 인간은 모든 다른 존재들을 형제로 간주한다. 그들을 통합시키는 사회는 죽음에 의해서조차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체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러한 종교는 법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을 소유한 법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사회가 결속하는 데 있어 필요한 요소가 부족하다. 이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국가를 향하여 시민의 마음을 가지기는 커녕 이러한 종교는 국가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떨쳐버리게 한다.

크리스쳔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회를 형성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가설에 가장 큰 결점은 크리스쳔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는 이런 상상된 사회는 그와 같은 완벽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하지도 가장 지속적이지도 않다. 그것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사회적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터무니없는 결점은 그 체제의 완벽함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그의 의무를 준수한다. 사람들은 법에 복종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통치자는 정당하고 절도가 있어야 한다. 행정관료들은 정직하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군인들은 죽음을 경멸해야 한다. 허영도 사치도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이 훌륭한 것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크리스트교는 전적으로 정신적 종교이다. 단지 하늘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크리스쳔들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다. 크리스쳔들은 그의 의무를 준수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행동의 훌륭한 혹은 불충분한 성공에는 무관심하게 그러한 행동을 취한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책망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거나 잘못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번영한다면 그는 좀처럼 공중의 행복을 즐기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가 그의 국가의 영광을 자만하게 되지 않을지를 두려워 한다. 국가가 쇠망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손으로 축복을 바라게 된다.

그와 같은 사회가 평화롭고 조화가 우선시된다면, 모든 시민들은 예외 없이 동등하게 좋은 크리스쳔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불행하다면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위선자나 음모가 예를 들어 크롬웰과 같이 그의 신성한 동포들을 쉽게 이용하려고 한다. 크리스쳔들의 자선은 우리들이 쉽게 우리 이웃들을 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공적 권위의 일부를 획득하게 될 정도로 교활하게 될 때, 신이 존경받도록, 신이 복종하도록 의도하였다고 한다. 그가 힘을 남용해도 되는지 생각해 보자. 그 때 그는 신이 그의 아이들에게 내려준 천벌과 같은 존재이다. 크리스쳔들은 압제자를 몰아내는 데 양심을 가책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적인 평화를 혼란으로 내모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크리스쳔의 온화함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 자유롭거나 눈물의 골짜기에서 노예로 살거나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체념은 단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외국과의 전쟁이 발생했다고 하자. 시민들은 마지못해 전장으로 행진한다. 그들 사이의 어느 누구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그들의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대한 열정 없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정복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들이 승리자가 될 것인지 패배자가 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의 섭리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맹렬한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들의 금욕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의 크리스쳔 공화국이 스파르타나 로마에 의해서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을 해 보라. 당신의 신성한 크리스쳔들이 구타당하고 그들의 지혜를 모으기 전에 파괴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혹은 그들이 그들의 적이 그들을 향해서 가지는 모멸감에 의존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나는 나 스스로 Fabious의 군인들에 의해서 취해진 맹세를 훌륭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정복하거나 죽기를 맹세하지 않았다. 단지 정복자로부터 되돌아 올 것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켰다. 크리스쳔들은 감히 이러한 것을 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이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크리스쳔의 공화국을 말하는 것은 오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들의 각각이 다른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지 예속과 복종을 설교할 뿐이다. 그것의 정신은 폭군정에 우호적이다. 진정한 크리스쳔들은 노예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좀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짧은 인생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쳔의 군대는 훌륭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부정한다. 나에게 그러한 크리스쳔의 군대를 보여달라. 개인적으로 나는 알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십자군을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십자군의 용기를 논할 것 없이 나는 말하건대 그들은 결코 크리스쳔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직자의 군대이다. 그들은 교회의 시민이다. 그들은 정신적 고향을 위해서 싸웠다. 그 고향은 이상한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이교도의 습성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결코 어떤한 국가적 종교를 성립시키지 않기 때문에 신성한 전쟁은 크리스쳔 사이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교도들의 제국들 아래에서는 크리스쳔의 군대는 용감하다. 모든 크리스쳔의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말한다. 나는 그것들을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군인들은 이교도들의 군대에 대항해서 명예를 쌓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황제들이 크리스쳔이 됨에 따라 이러한 경쟁은 중단되었다. 십자가가 독수리(역자 주 : 로마의 상징)를 한 번 몰아내자, 모든 로마 사람들의 용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고려를 차지하여 두고 권리에 대해서 고려해 보자.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원리들을 고안해 보자. 사회적 계약이 주권자에게 준 권리는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공적인 유용성[11]의 경계를 넘어서 있지 않다. 예속인들은 주권자에게 그들의 믿을 설명할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각각의 시민들이 그가 그의 의무를 사랑하게 만들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가 국가와 그 국가의 구성원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은 주권자의 간섭없이 그들이 기꺼워하는 대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는 경쟁할 수 없다. 다가올 피지배인들의 운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이 훌륭한 시민이라면 주권자와는 관계가 없다.

결과적으로 신앙고백은 순수하게 시민적이고, 주권자의 기능은 법 조항을 결정하는 것이며 엄격하게 말하면 종교적 교리로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의 표현으로서 결정을 하는 것인데, 사회적 인식이란 그것 없이는 훌륭한 시민이라든가 황제의 신민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12] 주권자가 이러한 법 조항을 믿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해도, 주권자는 믿지 않는 그들을 국외로 추방할 수는 있다. 물론 그들 추방하는 것은 신앙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누군가가 이 같은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식한 이후에 마치 그것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때에는 그를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법 앞에서 거짓을 저지르는 엄청난 법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시민적 종교의 원리는 단순함에 틀림없고 또한 수적으로도 몇 개가 되지 않는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성의 존재, 정의로운 자의 행복, 죄를 얻은 자를 벌줌, 사회적 계약과 법의 신성스러움 등 이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교리이다. 부정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나는 한 마디로 정리하건데, 불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반대하는 종교이다.

내 생각으로는 시민적 관용과 종교적 관용을 구분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용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저주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신학적 관용이 허용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시민적 결과물을 가질 수 있다. 그 때 주권자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고, 성직자가자 주인이 되며 왕은 단순히 그 사무의 집행자일 뿐이다.

배타적인 국민 종교가 있지도 않고 더 이상 있을 수도 없으므로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모든 종교들은 시민적 의무를 수용하는 한 관용이 베풀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감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리라”라고 말한다면 국가가 교회이고 통치지가 고위 성직자가 아닌 이상 국가로부터 추방당해야 한다. 그와 같은 교리는 단지 신정 정부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정부에서는 유해할 뿐이다. 헨리 4세가 카톨릭을 포용하였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점도 있다.

제9 장 결론[편집]

정치적 권리에 대한 진정한 원리를 확립하고 그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를 성립시키려 한다면 나는 국가와 관련된 다른 연구들을 고려함으로써 완성시키려 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다른 연구는 국제법, 상법, 전쟁과 정복에 관한 권리, 행정법, 동맹, 협상, 조약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얕은 견식에 비하면 너무나 광대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의 범주 내에 있는 더 많은 것들에 나의 눈을 고정시켜 보려고 한다.

주석[편집]

  1. 문자적으로 ‘벨을 울린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베른의 관습에서 공적인 노역을 하는 노동자들로 고용된 죄수의 목 주변에 벨을 감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문자적으로 '훈련시키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제네바에서 도시의 길들이기 힘든 악한들을 위한 감옥이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3. 이것은 항상 자유로운 국가를 언급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밖의 가족, 재산, 도피처의 부족, 필요 혹은 폭력은 마지못해 그 국가에 살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의 단순한 거주는 계약에 대한 동의 혹은 계약을 파괴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4. 제노바에서는 자유라는 단어가 모든 죄수들의 문 앞, 그리고 죄수들이 노 젖는 배의 족쇄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구호의 사용은 훌륭하고 정의로운 것이다. 사실, 시민들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범죄자이다. 범죄를 저지른 그러한 사람들이 죄수들이 노 젖는 배에 갇혀 있는 국가에서는 최상의 완벽한 자유가 누려질 수 있다.
  5. Romulus라는 이름으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하는 로마는 실제로는 그리스어이다. 그것은 힘을 의미한다. 'Numa'라는 이름 또한 그리스어인데, 그것은 법을 의미한다. 그 도시의 처음 두 왕이 그들이 행한 업적과 관련하여 명백하게 그 이름이 널리 퍼지기 전에 태어났었어야만 하는 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6. 나는 comitia centuriata가 만나는 곳을 Campus Martius라고 부른다. 다른 두 가지 의회에서는 사람들은 광장과 그 외의 지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때 capite censi는 지도적 위치의 시민들 만큼의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7. 결과적으로 century는 투표를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첫 번째 절차였기 때문에 'praerogativa'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prerogative(특권 혹은 대권)'의 어원이다.
  8. 이러한 임명은 마치 그들이 법 위에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듯이 밤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9. 그가 독재자를 임명하자고 제안을 했다면 이것을 확신할 수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그 자신을 임명하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동료들이 그를 지명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10. 그것은 프랑스와 같은 성직자를 하나의 부서에 묶는 형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차라리 교회의 연합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연합과 파문은 성직자들의 사회적 계약이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통해서 왕과 국민들의 주인이고자 했다. 모든 성직자들은 그들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동료시민들이 되었다. 이러한 발명은 정치의 걸작이다. 이교도들의 성직자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직자의 단체를 결코 구성할 수 없다.
  11. Marquis d'Argenson이 ‘공화국 안에서’라는 책에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자유롭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변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저명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또한 이것을 인용하게 되어서 기쁘다. 그는 국가의 장관으로서 정의롭고 건전한 의견으로 그의 정부에 대해서 헌신을 다한,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2. Caesar가 Catilina에게 간청하면서 영혼불멸의 교리를 성립시키려고 했다. Cato와 Cicero는 그것을 비평하면서 철학을 가진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Caesar가 나쁜 시민인 것처럼 말하고 국가에 상처를 주는 이념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 그리고 이것은 상원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신학적으로는 어떠한 의문도 있지 않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