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5차 교육과정)/1. 민족 국가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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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여러 부족 국가를 이루고 흩어져 살았다. 그러다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를 형성하였으며, 통일신라 때에 하나의 민족 국가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우리 민족은 통일된 단일 민족 국가로서 문화를 발달시켜 왔으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 왔다.

우리는 이러한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면서, 우리 민족의 힘을 하나로 뭉쳐 세계에 빛나는 역사를 창조해 나가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다.

(1) 훌륭한 지도자들[편집]

우리 겨레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에 삶의 터전을 잡고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 그 동안 외세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 겨레는 그 때마다 슬기롭게 이를 이겨 내고,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여 왔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세계 속의 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역사 속의 훌륭한 지도자들이 국민들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잘 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도자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1] 단군 왕검[편집]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세운 나라와 그 때의 지도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개천절이 되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단군 왕검은 우리 나라를 처음 세운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4천 3백여 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우리 조상들이 쓴 역사책에 나온다.

단군 왕검은 나라를 세우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 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 때부터 우리 겨레는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으며, 점차 더 넓게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단군 왕검이 나라를 세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뿌리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소중히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연구

단군 왕검이 태어나고, 나라를 세운 이야기를 조사해서 발표해 보자.

단군 왕검이 나라를 세우기 전의 우리 겨레는 만주와 한반도의 곳곳에서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살아 왔다. 해안이나 강변에 집을 짓고, 돌이나 나무로 연모를 만들어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다.

나중에는 농사도 지었으며,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던 우리 조상들이 쇠붙이로 연모를 만들어 쓰게 되면서부터 농사짓기가 훨씬 편리해졌고, 생활 모습도 크게 달라져 갔다.

한 곳에 머물면서 쇠붙이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게 되자, 사회의 모습이 달라져 규모가 커지면서 힘을 가진 지도자도 나타났다.

우리 나라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이러한 지도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조선에 이어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여러 작은 나라를 세웠다.

이 때, 부족 국가의 지도자들은 부족을 이끌면서,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드리는 제사 일도 맡아 보았다.

연구

돌로 만든 연모 대신에 쇠붙이로 만든 연모를 쓰면서 생활 모습이 크게 달라진 까닭은 무엇인지 토의해 보자.

[2] 김유신[편집]

삼국의 발전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힘쓴 여러 지도자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부족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차차 세력이 강한 나라를 중심으로 뭉쳐, 더 큰 나라를 이루었다. 이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다. 삼국은 서로 나라의 힘을 키웠고,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넓히는 데 힘써, 동으로는 동해안, 서로는 요동 지방, 남으로는 한강 하류, 북으로는 북만주까지 영토를 넓혔다. 만주 지방까지 차지한 고구려는 그 후,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갔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중국, 일본과 왕래하며 넓은 지역을 백제의 세력 안에 두고 해상 무역을 하였다. 일본에 학자를 보내어 학문과 기술을 가르쳐 준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신라는, 초기에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그 세력을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연구

아래 지도를 보고 삼국의 영토가 바뀌어 간 모습에 대하여 야야기해 보자.

세 나라 가운데서 가장 늦게 발전한 신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삼국 통일의 발판을 다진 지도자는 진흥왕이었다.

진흥왕은 군사력을 길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 남도 지방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가야를 합치고, 그 일대를 통합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영토를 넓히는 데에는 화랑의 역할이 컸다. 화랑도는 청소년들이 모여 수양을 쌓는 모임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과 무술을 닦으면서 나라 사랑의 마음을 길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싸움터로 나아가 용감히 싸웠다.

화랑 출신인 김유신은 무열왕을 도와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평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삼국은 신라에 의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됨으로써, 우리 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연구

화랑 정신을 알아보고, 우리가 본받을 점을 생각해 보자.

[3] 최승로[편집]

고려의 발전을 위해 힘쓴 지도자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민족을 하나로 다지기에 힘써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석굴암, 불국사 등의 훌륭한 문화재가 이룩된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 중앙에서는 귀족들끼리 서로 왕의 자리를 다투는가 하면, 지방의 여기저기에서 난리가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여러 세력들의 다툼을 진압하고 새로 고려를 세웠다. 고려는 그 후 약 470여 년 동안 나라를 발전시켰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는 최승로다.

학식이 풍부한 최승로는 재상에 임명되어 나라 일을 맡아 보면서 신하로서 임금이 훌륭한 정치를 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최승로는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교육에 힘써 훌륭한 인물을 많이 길러냈으며, 군대도 강하게 키워서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을 못 살게 굴던 나쁜 무리를 처벌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최승로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나라의 힘이 굳세어지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또한, 밖으로는 거란이나 여진과 같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넓혀 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고려는 외적의 침입으로 몇 차례 어려움을 맞기도 하였으나, 꿋꿋하게 나라를 지키면서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인쇄술을 발달시켰으며, 세계적인 예술품인 상감청자를 구워 냈고, 팔만 대장경판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이며, 또한 나라의 기틀이 튼튼하게 다져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연구

고려 시대에는 최승로 외에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았다. 여러 가지 책을 읽고 다음 사람들이 한 일을 알아보자.

○ 최충 ○ 서희 ○ 윤관

○ 이규보 ○ 공민왕 ○ 정몽주

[4] 세종 대왕과 황희[편집]

조선 시대에 나라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을 편하게 하려고 힘쓴 지도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안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밖으로부터 외적들이 잇달아 침범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때, 이성계가 새로 조선을 세우고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의 생활을 편안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법률을 만들어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여기에는 정도전과 같은 지도자의 노력이 컸다.

조선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이 때부터 한양은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크게 발전한 것은 세종 대왕 때였다. 세종 대왕은 안으로 민족 문화를 크게 일으키고, 밖으로는 국토를 확장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우리 국토의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 대왕은 또,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글을 쉽게 익힐 수 있게 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책을 펴냈다. 장영실 등을 시켜서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 등의 과학 기구도 만들었다.

그리고 농업을 발달시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게 하려고 힘썼다.

연구

세종 대왕을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꼽는 까닭을 토의해 보자.

조선이 발전하는 데는 훌륭한 정치가, 학자, 장군 등의 역할이 컸다.

세종 대왕 때의 재상인 황희는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였고, 공과 사의 구별을 분명히 하여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매우 존중하였다.

세종 대왕은 한때 불교를 신봉하여 대궐 안에 불당을 세우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세종 대왕이 힘으로 강행하려고 하자,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라도 사람들이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면, 임금이라도 마땅히 이를 쫓아야 합니다.”

하고 황희는 자기 의견을 떳떳이 말했다.

황희는 여러 관직에서 60여 년 동안 나라일을 두루 맡아 보았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벼슬에 오래 있으면서도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아, 자신은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다. 농사 개량에 힘써 먹을 것을 풍족하게 생산하도록 하고,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여 양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이 법과 예절을 잘 지키도록 힘썼다.

세종 대왕이 훌륭한 임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이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옳은 일에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이 500년 동안 이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생각한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들이 크게 마음을 쓴 것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이었다. 그들은 늘 ‘백성들이 부담하는 세금이 많지는 않은가’, ‘억울하게 형벌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농사짓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등의 문제를 생각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돕고, 옳지 못한 벼슬아치들의 행실을 바로잡아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연구

조선 시대의 지도자들 중에서 다음의 인물들이 한 일에 대하여 알아보자.

○ 정도전

○ 조광조

○ 이황

○ 이이

○ 류성룡

학습 정리[편집]

1.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이어 온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1) 단군은 우리 겨레가 처음 세운 나라인 고조선의 지도자였다.

(2) 우리 민족은 단군의 뜻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 왔다.

2. 삼국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민족 국가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 삼국은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꽃피웠다.

(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단일 민족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3. 훌륭한 지도자들은 나라의 기틀을 잘 다지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힘썼다.

(1) 건국 초기의 지도자들은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2) 훌륭한 지도자들은 나라의 힘을 키우면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였다.

(2) 이 땅을 지켜 온 겨레[편집]

우리 나라는 기후가 알맞고, 지형이 험하지 않으며, 산물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살기 좋은 터전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주변의 다른 민족들이 우리 땅을 탐내어 침략해 올 때마다 우리 민족은 이를 용감하게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 왔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어떻게 지켜 왔으며, 우리는 앞으로 이 땅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 알아보자.

[1] 살수 대첩[편집]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알아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영토를 넓히려고 힘을 길러 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큰 세력을 떨친 나라로, 중국과 맞서 있었다.

고구려가 세력을 뻗치고 있을 때,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그 세력을 만주로 뻗어 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수나라는 백만 대군으로 고구려의 요새인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날쌘 군사 30만 명을 뽑아 평양성을 바로 공격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 군대를 지휘한 을지문덕 장군은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사람으로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 수나라 군대의 형편을 알아보았다. 적진을 빠져나온 을지문덕 장군은 시를 써 보내어 적장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그러자 분함을 이기지 못한 수나라 장군은 급히 공격하여 왔고, 고구려 군대는 패하는 척하면서 수나라의 군대를 평양성 가까이로 끌어들였다.

고구려 군대는 지친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강을 사이에 두고 앞뒤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수나라에 이어서 일어난 당나라도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 때, 연개소문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사들은 요동 반도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연개소문 장군이 죽은 후 고구려는 나라 안이 어지러워져,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땅에는 발해가 세워져 고구려의 기상과 역사를 이어 갔다.

연구

신라와 백제는 외적의 침입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조사해 보자.

[2] 삼별초[편집]

고려 때에는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어떻게 막아냈는지 알아보자.

신라 말기에 이르러 잠시 분열되었던 우리 민족을 고려가 다시 하나로 통일하였다.

고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며 상감청자, 팔만 대 장경, 금속 활자를 만드는 등 훌륭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려에 처음 쳐들어 온 외적은 만주 서북부 지방에 살던 거란족이었으며, 동북부의 여진족도 자주 국경을 넘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고려는 천리 장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고, 송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던 거란족이 침입하자, 강감찬은 이를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윤관은 함경도 지방 여러 곳에 성을 쌓아 여진족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연구

고려가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거란족과 여진족을 멀리 한 까닭을 알아보자.

몽고 사막에 여러 갈래로 흩어져 살던 몽고족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통일한 후 세력을 뻗어,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쳐들어가서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다.

몽고는 고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침입해 왔다. 그러자 고려는 온 겨레가 하나로 단결하여 그들의 침략에 맞섰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별초의 활약이 켰다. 삼별초는 본래 도적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특별 부대와 몽고군에게 잡혀 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로 몽고족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하였다.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옮겨 갔던 고려는, 마침내 몽고군과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몽고군과의 화의는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세력을 키운 삼별초는 전라도와 경상도 남쪽 해안에서 몽고군에게 계속 대항하였다.

이 때, 백성들도 삼별초를 도와 몽고군을 몰아내는 데에 힘썼다.

그러자 몽고족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진도를 공격해 왔다. 삼별초는 힘 이 모자라, 제주도로 옮겨 몽고군과 싸웠으나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쟁은 우리 민족이 외적에게 쉽게 굽히지 않았음을 잘 보여 주는 민족 정신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연구

삼별초의 항쟁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은 무엇인지 토의해 보자.

[3] 한산도 대첩[편집]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은 일본 군대를 어떻게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는지 알아보자.

예로부터 우리 나라 남부 해안에서는 일본의 해적들이 나타나 식량을 빼앗고 사람들을 해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은 1592년에 15만 명의 대군으로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총을 사용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활과 창으로 맞선 우리 군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전라좌수사의 벼슬에 있었다. 그는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하여, 미리 수군을 훈련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일본군과의 첫 싸움인 옥포 해전에서 우리 수군은 적의 배를 모두 격침시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우리 수군은 곳곳에서 적을 물리쳤다.

일본군은 세력을 되찾기 위하여 모든 함대를 모아 공격해 왔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거북선을 앞세우고 학의 날개와 같은 모양으로 배를 띄워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수군의 대포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일부가 겨우 도망갔다.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한다.

이 싸움으로 우리 군대는 큰 용기를 얻었고, 적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이 때문에 육지에서도 일본군의 힘이 약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새로 만든 거북선 때문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큰 바탕이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장군의 남다른 애국심이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군을 따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히 싸운

군사들의 힘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 후에도 여러 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 해전에서 안타깝게도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연구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면서도 쓴 난중일기와 시를 구하여 읽어 보자.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선비, 승려를 비롯하여 많은 농민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나섰다. 이들은 비록 군인은 아니었으나, 각지에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우리 군대와 의병의 활약으로 적군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고, 바닷길까지 막힌 왜적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물러갔다.

연구

임진왜란 때, 용감하게 왜적을 물리친 의병들의 이야기를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4] 척화비[편집]

조선 후기에 서양 세력이 밀려오자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알아보자.

1863년 임금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래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대신 나라일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이 때에는 왕실의 외척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이미 나라가 어지러워져 있었고, 왕의 힘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였다. 훌륭한 인재를 뽑아 나라일을 맡겼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를 엄히 처벌하고,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궁궐을 다시 지어, 왕실의 위엄을 세웠다.

이 때, 나라 밖에서는 서양의 여러 나라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그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마침내 서양 여러 나라의 배들은 우리 나라 바닷가에도 자주 나타나 무역을 하자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프랑스와 미국은 각각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를 공격해 왔다. 이 때, 강화도를 지키고 있던 우리 군대는 용감히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이를 양요라고 한다.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른 흥선 대원군은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고,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화친하지 말고 싸워서 물리치자는 내용이 쓰여 있다.

연구

흥선 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 것의 옳은 점과 옳지 않은 점을 말해 보자.

힘으로 서양의 세력을 막고 있던 흥선 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나자, 우리 나라는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의 세력을 받아들였다.

제일 먼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외국의 세력은 일본이었다. 이어서 미국,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의 세력이 들어왔다.

우리 나라는 이들 여러 나라와 외교를 맺고 이들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연구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우리 나라가 세계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한 까닭을 알아보자.

학습 정리[편집]

1. 우리 민족은 외적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이를 물리쳤다.

(1) 고구려와 고려는 온 민족이 단결하여 북방 민족의 침략을 물리쳤다.

(2) 임진왜란 때, 온 나라 백성과 군대는 힘을 합쳐 왜적을 물리쳤다.

2.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훌륭한 지도자가 앞장 서 나라를 지켰다.

(1) 적을 크게 무찌른 싸움에서는 훌륭한 인물들의 활약이 컸다.

(2)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노력하였다.

3. 우리 민족은 강한 자주 정신을 가졌다.

(1) 우리 조상들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2)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여 다른 나라를 괴롭히지 않았다.

(3) 우리 겨레의 해외 활동[편집]

우리는 지금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우리 겨레의 기상을 드높이고 있다. 이러한 해외 진출은, 우리 조상의 얼이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꿋꿋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중국, 일본, 나아가서는 서역에까지 진출하여 그 기상을 떨치기도 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해외에 나가서 기상을 떨친 모습을 자세히 알아보자.

[1] 담징과 왕인[편집]

삼국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 모습을 알아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서 불교와 학문을 받아들여 우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학교를 세우고 역사책을 만들었으며, 전국 각지에 큰 절을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발달된 우리 문화를 다시 이웃 일본에게도 전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는 일에 힘썼지만, 그 중 담징과 왕인의 활동이 컸다.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건너가 책과 공예품 등을 전하고 종이, 붓, 먹, 물감, 맷돌 등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담징은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옛 도읍지인 나라 근처에 있는 호류사라는 절에는 담징이 그린 금당 백화가 전해 왔었으나, 1948년 불에 탔다. 이 벽화는 매우 뛰어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알려졌었다.

한편, 왕인은 백제의 학자로서 천자문, 논어 등의 책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그는 그 곳에서 오래 머무르며 일본 임금과 태자의 스승이 되어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한문과 유학을 알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지금도 왕인을 높이 떠받들고 있다.

또한, 신라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져 그 곳의 학문, 기술, 예술 등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삼국이 전해 준 문화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연구

다음 사진들을 보고, 우리 나라와 일본의 문화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신라방[편집]

신라방은 어떻게 하여 생겼으며, 신라인의 해외 진출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 살림이 튼튼해지면서 나날이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특히 당나라에 많이 건너갔다. 공부를 하기 위한 유학생과 승려,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났으며, 사신들도 오고 갔다.

그리하여 당나라에는 신라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까지 생기게 되었다.

특히, 산둥성 일대에는 신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이러한 곳을 신라방이라고 하였다.

신라방에는 신라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한 신라원이라는 절도 있었고, 신라 사람 스스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신라소라는 행정 기관과 신라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신라관이라는 여관도 있었다.

신라 사람들은 신라방을 중심으로 당나라 사람들과 장사를 하기도 하고, 그 곳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 때, 당나라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들에게 신라의 문화를 전해 주기도 하고, 여러 나라의 문화를 배워 오기도 하였다.

승려 혜초는 당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돌아보며 불교를 연구하였다.

연구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장사가 번창해지자, 이들의 배를 노리는 해적들이 나타나 노략질을 하였다.

이를 분하게 여긴 장보고는 신라 왕실에 청하여, 청해진이라는 수군 기지를 설치하고 강한 수군을 길렀다. 장보고는 수군을 거느리고 해적들을 소탕하여 신라 사람들은 물론 일본이나 당나라 상인들도 편안히 항해할 수 있게 하였다.

연구

장보고의 활동을 더 자세히 조사하여 보자.

[3] 벽란도[편집]

고려 사람들은 다른 나라와 어떻게 교류하였는지 알아보자

고려자기, 팔만 대장경과 같은 훌륭한 문화재를 이룩한 고려는 거란족이나 여진족보다는 문화를 숭상하는 송나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고려에서 육로로 송나라에 가는 도중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있어 왕래하기가 위험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뱃길을 이용하였다. 예성강 하류에 있는 벽란도는 송나라와 교역하던 큰 항구로 산둥 반도로 가는 북쪽 길과 양쯔강 하구로 가는 남쪽 길이 있었다.

벽란도에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와 동남 아시아 지방의 상인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연구

근래에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을 고려의 무역과 관련지어 이야기해 보자.

고려는 금, 은, 구리, 인삼, 나전 칠기, 돗자리, 모시 등을 수출하였고, 송나라로부터 비단, 자기, 책,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 아라비아 상인들은 수은, 향료와 같은 것을 가지고 벽란도에 드나들었다. 고려라는 이름이 이들에 의해 서양에 알려져, 외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 사람들도 해외로 많이 진출하였고, 여러 학자와 승려들이 중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연구

고려 때, 중국에 건너가서 이름을 떨친 학자와 승려들이 활동을 조사해 보자.

[4] 조선 통신사[편집]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고, 일본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알아보자.

조선은 처음에 일본과 무역을 행하여 그들이 가져온 구리를 식량, 옷감과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다음에는 그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그러자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인 도쿠가와는 우리 나라와 다시 국교를 맺을 것을 간청해 왔다.

그들은 강제로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을 되돌려 보내고 선물을 보내 오면서,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조선에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어, 두 나라 사이에 다시 교류가 열렸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대체로 300명에서 500명에 이르렀는데 학문, 기술, 예술 등에 뛰어난 인물들이 선발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국빈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지날 때, 일본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얻기 위해서 길가나 숙소에 모여들어 만나 보기를 청하였다.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건네 준 한시, 그림, 글씨 등을 가보로 삼기도 하였다.

일본이 통신사 일행을 극진히 대접한 까닭은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실제로 우리 사절과 일본의 학자, 문인들 간에는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의 유학은 그들의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연구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오른쪽 사실을 중심으로 간단히 알아보자.

○ 우리 나라가 일본과 처음 교류를 시작하게 된 때

○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전해 준 문화

○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준 도움

○ 일본이 우리 나라에게 도움을 준 일과 피해를 끼친 일

학습 정리[편집]

1. 우리 조상은 일본의 고대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삼국의 예술이 일본에 전해진 자취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우리 조상은 일본 사람에게 문자와 학문을 일깨워 주었다.

2. 우리 조상은 일찍부터 해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폈다.

(1) 이웃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하기 위하여 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잡았다.

(2)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를 만드는 등 해외 진출이 활발했다.

3. 일본은 조선 시대에도 우리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1) 일본은 문화가 발달된 우리 나라와 문물의 교류를 원하였다.

(2)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문화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