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5차 교육과정)/2. 근대화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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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이어 오면서 우리 나라의 많은 지도자들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잘 살도록 힘썼다. 그리고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온 겨레가 힘을 합쳐 이를 막아내고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생산 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여, 나라 살림이 어려워졌다.

이 무렵 온 겨레가 함께 잘 살고자 하는 근대화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낡은 것은 버리고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둥 새 시대에 알맞은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1) 실학 운동[편집]

임진왜란에 이어 중국에서 새로 일어난 청나라가 쳐들어왔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한다.

왜란과 호란의 영향으로 우리 나라는 국토가 황폐하여지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라의 정치를 맡은 사람들은 세력 다툼만 하면서 백성들의 가난과 고통을 소홀히 하였다.

이 때, 뜻있는 일부 학자들과 백성들은 넉넉한 살림을 위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알아보자.

[1] 실학자 박지원[편집]

실학자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양반 세도에 남아 나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일부 양반들의 횡포로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던 모습을 빗댄 말이다. 조선 시대에 나라일을 맡아 다스린 사람은 양반들로 그 세도가 매우 컸다.

양반들은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학문을 연구했고, 과거를 거쳐 벼슬에 올라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차차 권세를 탐내고, 실생활과 거리가 먼 학문을 가지고 서로 다투게 되자,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양반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 박지원이다.

이 때, 이웃 청나라는 상공업 발달에 힘을 기울여 생산이 늘어나고 나라 살림 이 부강하였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직접 돌아보고 그들의 부강한 모습과 발전된 문화에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려면 농사짓는 일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일과 기술을 익히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이웃 나라들이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알고, 모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연구

실학을 처음으로 연구한 학자는 누구이며, 어떤 주장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정약용의 농가 월령가

농가 월령가(3월령의 일부)

울 밑에 호박이요, 처맛가에 박 심고,

담 근처에 동아 심어 가자 하여 올려 보세.

무, 배추, 아욱, 상추, 고추, 가지, 파, 마늘을

색색이 분별하여 빈 데 없이 심어 놓고,

갯버들 베어다가 개바자 둘러막아

계견을 방지하면 자연히 무성하리.

한편, 농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 본 학자들은 농민들의 살림이 넉넉해져야 나라도 튼튼해 진다고 생각하였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생각하여, 백성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생각해 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찾으려고 연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하며, 이러한 학문을 연구한 학자를 실학자라고 한다. 실학자들은 실제 생활에 이용되고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학문을 연구하였다.

실학자들 가운데는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으려는 생각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책으로 써 낸 사람도 있었다.

이 때, 김정호는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 곳곳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대동여지도를 펴냈다.

연구

실학자 중에 다음과 같은 일을 한 대표적인 사람은 누구인지 알아보자.

농사 기술에 관한 연구

상공업에 관한 연구

과학과 기술에 관한 연구

우리 나라 역사와 지리에 관한 연구

[2] 춘향전[편집]

조선 후기의 문학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고, 춘향전과 갈은 옛날 소설이 오늘날에도 널리 읽혀지는 까닭을 생각해 보자.

전라 북도 남원에서는 매년 봄에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 춘향제는 우리 나라 옛 소설의 대표작인 춘향전에 나타나 있는 춘향의 아름답고 곧은 마음씨를 기리기 위하여 열린다.

춘향전은 조선 후기 이래로 서민들에게 가장 널리 읽혀진 소설로 양반과 서민 간의 차별을 없애자는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사랑을 줄거리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소박한 감정이나 당시의 사회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춘향전과 함께 널리 읽혀진 소설로는 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 등이 있다.

연구

옛 소설 중 한 가지를 골라 읽고 줄거리와 느낌을 발표해 보자.

한글로 쓰여진 소설들은 누구나 읽기가 쉽고 그 내용도 서민들의 생활을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소설 속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생각하고 행동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조선 시대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거의 없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도 훌륭한 작품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문학 작품으로는 왕비와 궁녀들이 쓴 일기, 양반의 부녀자들이 자기의 생활을 전기 형태로 남긴 것 등이 있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은 특히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혜경궁 홍씨가 사도 세자의 비극을 소재로 쓴 한중록도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소설과 더불어 서민들의 생활을 표현한 시조도 크게 유행하였다.

연구

조선 시대에 한글로 쓴 소설책 중에는 우리들이 읽기 쉽게 고쳐 써 놓은 것이 많다. 다음 책들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 줄거리를 알아보자.

○ 심청전 ○ 홍길동전 ○ 구운몽

○ 장화홍련전 ○ 한중록 ○ 사씨남정기

[3] 모내기[편집]

왜란과 호란으로 어떻게 된 살림살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보자.

왜란과 호란으로 농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국의 농토는 몹시 황폐하여졌다. 그 때는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농업에 있었던 시대였으므로, 농사 개량에 더욱 힘써야 했다. 이에 관리, 지식인, 그러고 농민들이 함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농촌은 새로워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에서는 황폐한 농토의 개간을 장려하고, 개간한 땅의 세금을 당분간 면해 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차지하는 일을 제한하였으나, 이는 잘 시행되지 못하였다.

농사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농업에 대한 책을 많이 썼고, 이 책을 널리 알리려고 임금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 책들에는 나라에서 도와주어야 할 일, 농업의 기술, 새로운 품종, 농기구 등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연구

지식인들이 농업에 대한 책을 많이 쓴 까닭을 알아보자.

농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수리 시설이었다. 그래서 저수지를 만들고 둑을 고쳤으며, 수차를 개량하여 물을 잘 대주었다. 또한, 이 때부터 모내기하는 방법이 보급되어 생산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그리고 벼농사를 한 땅에

보리농사를 하는 이모작도 장려하였다.

흉년에 대비하여, 가뭄에 잘 견디는 감자와 고구마를 외국에서 들여와 가꾸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또, 인삼이나 약초, 과일, 목화 등 상품이 될 만한 농산물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농촌 사람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는 협동하는 마음가짐과 절약하는 생활 태도가 필요하였으므로, 향약과 계를 만들도록 장려했다.

이리하여 농촌은 점점 발전하였다.

연구

다음 그림들은 조선 후기에 달라지게 된 산업 활동의 모습이다. 이 그림들을 보고 오른쪽 일들에 관하여 알아보자.

○ 농사짓는 방법의 변화

○ 새로 재배한 농작물

○ 약초를 재배한 까닭

○ 상거래 모습의 변화

○ 농사 이외에 소득을 올리기 위해 한 일

[4] 천리경과 거중기[편집]

서양에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받아들인 과학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알아보자.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제주도 해안에 네덜란드의 벨테브레 일행 세 사람이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왔다. 이들은 장사를 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이었다.

서양 사람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들을 귀신이나 짐승으로 생각하였다. 벨테브레는 한성으로 보내어졌으며, 이름을 박연이라 고쳤다.

그는 대포를 만들어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 등으로 우리 나라에서 남은 일생을 보냈다.

연구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의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자.

이어서 하멜 등이 또 표류하여 왔다.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우리 조상들은 차츰 보다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양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된 것은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서였다.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을 하기도 하고,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를 중국에 전하기도 하였다.

중국에 건너갔던 우리 나라 사신들은 그 곳에 와 있던 서양 사람들과 사귀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이 담겨 있는 서양의 책과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구해 오기도 하였다.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볼 수 있는 천리경과 스스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 주는 자명종, 세계 지도 등 새로운 물건을 본 우리 조상들은 신기롭기만 하였다. 천리경의 이치를 알게 되면서 나라에서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데 이를 이용하였다.

서양의 문화 가운데서도 특히 과학 기술의 수준이 매우 뛰어났음을 깨닫게 된 학자들은 우리도 서양의 학술을 배워서 생활에 이용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학자 중에서 홍대용과 정약용이 특히 유명하였다.

홍대용은 천문학을 연구하여 혼천의를 만들었고, 지구가 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기술이 진보해야 생활이 향상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기계를 만들거나 설계하였다. 수원성을 쌓는 데 이용된 거중기도 정약용이 만든 것이었다. 거중기는 활차를 여러 개 사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로서, 한 번에 240킬로그램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연구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문물은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해 보자.

학습 정리[편집]

1. 학자들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자 실학 운동을 일으켰다.

(1) 실학자들은 실제 생활에 이용되는 학문을 연구하였다.

(2) 실학자들은 농민들의 살림이 넉넉해져야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생각하였다.

2. 조선 후기부터 서민 중심의 문학 활동이 크게 일어났다.

(1) 서민 생활을 내용으로 한 한글 소설이 많이 나왔다.

(2) 한글이 널리 보급되면서 여성들도 훌륭한 문학 작품을 내게 되었다.

3. 실학자들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고, 농업 기술도 연구하였다.

(1) 농촌 생활은 실학 운동에 의하여 크게 변하였다.

(2) 실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

(2) 달라지는 나라 모습[편집]

서양과의 교섭을 외면하고 있던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부터 국제 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우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자 여러 가지 요구를 내걸고 밀려왔다.

이에 우리 조상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한편, 서양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달라져 온 나라의 모습과 어려움을 이겨 나가려 했던 조상들의 노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1] 문호 개방[편집]

조선 후기에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게 된 까닭과 그 결과에 대하여 알아보자.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던 서양 여러 나라는, 마침내 우리 나라로 손길을 뻗쳐 우리 조상들이 이양선이라 불렀던 서양의 배가 자주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이양선은 우리 나라 해안에 다가와 장사를 하자고 요구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아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876년 우리 나라는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약을 맺고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어서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들도 앞을 다투어 외교 관계를 맺고 장사를 하자고 요구해 왔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의 문물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고 정치, 경제, 생활 풍습 등에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개화라고 불렀다. 나라에서는 서양의 문화를 빨리 익히기 위하여 외국에 시찰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연구

일본과 서양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우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한 까닭을 알아보자.

개화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유학을 공부한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외국과 국교를 맺는 것은 외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새 문물에 눈을 뜨고 서양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뒤떨어진 우리 나라를 하루 빨리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김옥균, 박영효 등은 정치를 개혁하여 빨리 새로운 나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우리 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던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우리 나라에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켰다.

나라 안에서는 나라의 정치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주장은 농민들에게서도 나왔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는 1894년에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게 되었으며, 이를 갑오개혁이라 한다.

갑오개혁은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문벌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시키도록 하였다. 노비도 없앴으며, 무게와 길이를 재는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갑오개혁은 비록 일본의 간섭이 있었고 성급하게 실시되어 그 폐단도 있었지만, 우리 나라가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의 움직임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상투를 자르고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근대식 학교들도 세워졌다. 그리하여 나라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연구

우리 조상들이 쓰던 옛것과 새로 들어온 것을 짝지은 아래 그림을 보고, 오른쪽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여 보자.

○ 새로 들어와 옛것과 바꾸어 쓰게 된 것

○ 새로 들어와 옛것과 함께 쓰는 것

○ 옛것이 좋은 점

○ 새것이 좋은 점

○ 새것을 받아들인 까닭

[2] 전화와 기차[편집]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고 개화가 진행되면서 생활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아보자.

나라의 문호가 열리고 개화의 움직임이 진행되면서, 서양 문물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어져 갔다.

먼저 의식주 생활에서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옷 차림에 있어서는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한편, 식생활에 있어서도 빵, 피자, 홍차, 커피 등 서양 음식이 들어와 일부 사람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모양의 집도 나타났다. 돌로 집을 짓기도 하고,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도 지어졌다. 서양식 집은 학교와 교회, 그리고 외국인의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달라진 모습은, 새로운 문화 시설들이 여기저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신 전화, 기차, 자동차, 의료 시설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옛날에는 급한 소식을 전하려면 높은 산에 올라가 불을 피워 불빛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직접 달려가거나 말을 타고 가서 전하였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우정국이 세워져, 민간인들도 편지로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쉽게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궁중에는 전화가 가설되기도 하였다.

교통 수단도 새로워졌다. 그 때까지는 말이나 가마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먼거리를 가게 되면 힘이 들고, 빨리 달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자동차, 전차, 기차가 생기면서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는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크게 넓혀진 신작로 위로는 자동차가 달렸으며, 서울과 인천 사이에 철도가 놓여 기차도 다니게 되었다.

연구

개화기와 오늘날의 교통, 통신 사정을 비교해서 이야기해 보자.

서양의 발달된 의학이 전해지자 나라에서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신식 병원을 세웠다.

이 때에 세워진 병원으로는 광혜원, 자혜 의원 등이 있다.

병의 치료뿐 아니라 예방법도 발달하였다. 지석영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종두법을 배워 와서 널리 보급하였다. 어린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무서운 병이었던 천연두를 미리 예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새로운 공장들도 많이 생겼다. 화폐나 책을 찍어 내는 인쇄소와 기계로 옷감을 짜는 공장이 생겨났다. 또 총과 같은 신식 무기도 만들어 냈다.

문화 시설로는 서울의 원각사와 같은 극장이 주요 도시에 세워져, 연극이나 영화를 보여 주었다.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만 볼 수 있었고 그 내용을 해설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연구

개화기에 사회가 변한 모습을 나타낸 사진을 모아 사진첩을 만들어 보자.

[3] 독립 협회[편집]

우리 조상들은 강대국들 틈에서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였으며, 특히 독립 협회는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문호가 개방되어 생활의 모습은 바뀌어 갔지만 나라의 힘은 강해지지 않았다. 당시 세계의 사정은, 강대국들이 다른 나라에 세력을 넓히려고 심하게 경쟁하던 때였으므로, 나라의 힘이 약하면 그 나라의 앞날에는 위험이 따랐다.

이러한 때에 일본, 청, 러시아 등은 경쟁적으로 우리 나라에 세력을 펴고자 했다.

특히, 일본의 침략 세력이 드세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나라를 넘보았다. 우리 나라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멀리 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몰래 궁궐에 침입해 왕비를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서양 여러 나라는 나라 안이 이처럼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경쟁적으로 우리 나라에서의 이권을 차지하려 들었다.

연구

일본, 청, 러시아가 우리 나라에 세력을 펴려고 서로 다툰 까닭을 알아보자.

이 때에 개화 운동을 펴다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던 서재필이 돌아왔다. 그는 나라의 힘을 키워 외국의 침략을 물리쳐야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먼저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독립 협회를 조직하고 독립 신문을 펴냈다.

독립 신문은 순 한글로 발간되었는데,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는 생각을 일깨워 나가는데 힘썼다.

또, 독립 협회에서는 백성들에게 자주 독립 정신을 심어 주는 계몽 운동을 널리 폈다.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힘을 합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 독립의 의지를 널리 읽혔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서울 종로 거리에서 만민 공동회와 같은 강연회를 자주 열었다. 그들은 나라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세우고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기도 하였다. 이 강연회는 관리, 시민, 상인, 교사, 학생 등 각계 각층이 모여 자유롭게 발언한 새롭고 활기 찬 모임이었다.

고종 황제는 이와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이라 고치고, 자주 독립 국가로서 새롭게 출발할 것임을 온 세계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 근대적인 자주 독립 국가에 알맞게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공장을 세워 국가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뜻있는 사람들은 국민의 힘을 모으기 위해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다. 계몽 운동은 주로 교육 운동이 중심이 되었는데,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 애국심을 길렀다.

연구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은 또 어떤 일을 하였는지 조사해 보자.

[4] 개화운동[편집]

우리 나라가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아보자.

약 100년 전, 외국의 문화가 밀려오고 근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의 모습도 빠른 속도로 달라져 갔다.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던 옛 습관이나 사회 제도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실천에 옮겨졌다.

우리 나라에는 오랫동안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는 계급 제도가 있어 왔다. 양반은 공부를 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으나, 상민은 농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에만 종사하였다. 상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상민으로서 일생을 마쳐야 했고, 상민과 양반은 서로 혼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 양반 행세를 하는 상민들과 가난하여 양반 행세를 하기 어렵게 된 양반들이 늘어났다.

더구나 사회가 달라지면서 계급 제도가 없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리하여 양반만을 관리로 뽑던 과거 제도의 폐단을 없애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들이 집안일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였고 사회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편이 일찍 죽어도 다시 결혼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이 많아졌다.

의복에도 변화가 일어나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남자는 상투를 잘랐다.

이러한 변화는 그 때 사정으로는 큰 개혁이었다. 그래서 오랜 관습에 익숙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이와 같은 개혁을 반대하면서 이것이 모두 서양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상투를 자르지 않으려고 산 속으로 피하여 사는 사람도 있었다.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 중에는 농민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재산을 모으는 데만 힘쓰는 사람도 있어 농민들의 불평도 컸다.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스리는 법을 만들었다.

연구

우리 조상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화에 반대하였던 까닭을 알아보자.

학습 정리[편집]

1. 우리 나라는 외국 세력이 밀려온 시기에 근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 우리 나라는 문호를 개방하면서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2) 우리 조상들 중에는 새로운 사상과 제도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2. 서양의 문물이 전해지면서 생활 모습이 크게 바뀌어 갔다.

(1) 의식주 생활이 편리하게 바뀌어졌다.

(2) 새 문화 생활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3.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주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1) 외세는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아 갔다.

(2) 우리 조상들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폈다.

4. 개화 운동으로 사회가 근대화되어 갔다.

(1) 낡은 제도와 관습을 고쳤다.

(2)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하였다.

(3) 국권의 수호[편집]

우리 나라 영토를 욕심 내던 일본은 1910년 마침내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다.

우리 겨레는 결국 일본의 억압을 받으며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야 했으나, 이에 항거하여 나라를 찾으려는 운동을 줄기차게 펴 나갔다.

우리 겨레가 광복을 맞게 된 것은 일본의 온갖 억압 속에서도 이에 굽히지 않고 나라 안팎에서 줄기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겨레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에 대해 지금 우리가 가질 자세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1] 조선 총독부[편집]

우리 민족은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 알아보자.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며 경쟁하던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지자 대한 제국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우리 나라를 전쟁터로 이용하였다.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었다.

을사조약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우리 나라를 일본의 보호 아래 둔다는 내용이었다.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해 맺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온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리고 각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장지연은 신문 사설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고,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으며, 의병들은 여기저기에서 무력 항쟁도 하였다.

연구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게 된 까닭을 토의해 보자.

이처럼 치열한 항일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마침내 총칼로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다.

일본은 우리 나라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인 총독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우리 민족을 억압하였다.

우리 민족이 이에 항거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조선 총독은 총칼로 무장한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우리 민족을 강제로 복종시키려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지도 못하게 하고, 우리글, 우리말, 우리 이름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일본인의 비위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서 괴로움을 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먼저 토지 조사라는 구실 아래 우리 농민들의 많은 땅을 빼앗아 일본 사람에게 넘겨 주었으며, 쌀의 증산을 강요하고 생산된 쌀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리 농민들에게는 만주에서 들여온 조, 수수, 콩 등을 양식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힘에 벅찬 일을 시키면서 아주 적은 품삯을 주었다. 참다못한 우리 농민과 노동자들은 일제의 부당함에 항거하였다.

일제는 대륙까지 침략하기 위해 또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을 군인이나 노무자로 삼아 강제로 끌고 갔을 뿐 아니라 많은 전쟁 물자를 가져갔다. 그들은 심지어 놋쇠로 된 밥그릇과 수저까지 빼앗아 갔다.

연구

일본이 35년 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이야기를 모아 발표해 보자.

[2] 3⋅1 운동[편집]

3⋅1 운동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보자.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우리 민족을 억압하였지만,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우리 민족의 항쟁은 나라 안팎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갔다.

국내에서는 교육과 언론 활동, 또는 비밀 조직을 통하여 나라의 독립을 꾀하였다. 만주나 간도 지방에서도 의병 투쟁을 이어받은 항일 무장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독립을 바라는 온 겨례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독립 만세 운동의 횃불이 높이 올랐다.

3⋅1 운동의 불씨는 일본에 공부하러 갔던 유학생들에 의해 먼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강압에 분노하고 있던 학생들은 그 해의 2월 8일 일본 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널리 알렸다.

그들은 곧바로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여, 국내에서도 전국적인 항일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여 우리 나라가 독립 국가임을 온 세계에 선포하였다.

만세 운동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가서 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민 등 온 겨레가 모두 참가하는 전국적인 항일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연구

우리가 3⋅1 운동을 일으킨 우리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아야 할 정신에 대하여 토의해 보자.

독립 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일제는 이를 탄압하기 위하여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로 총을 쏘았고, 닥치는 대로 잡아가서 심한 매질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한 마을 전체의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의 거센 불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3⋅1 운동 후에도 민족의 독립이 성취되지 못하자,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펴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임시 정부는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광복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연구

여러 가지 참고서를 이용하여 임시 정부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 임시 정부가 세워진 때와 장소

○ 임시 정부에서 독립을 찾기 위해 한 일

○ 우리 국민이 임시 정부를 돕기 위해 한 일

[3] 청산리 대첩[편집]

3⋅1 운동 이후에 일어난 독립군의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독립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두드러졌다. 만주와 연해주 지방은 일본인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강제로 옮겨 간 가난한 우리 농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들 중에는 독립 운동을 위하여 조국을 떠나 간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만주와 연해주의 한국인 마을은 자연히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나라를 빼앗길 무렵 국내에서 세차게 항거했던 의병들은 대개 만주나 연해주 땅으로 옮겨 가 일본군과 계속 싸우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 이들은 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어 군사 학교를 세우고, 국내에서 큰 뜻을 품고 탈출해 오는 청년들을 용맹스런 독립군으로 길러 내었다.

이들 독립군은 곳곳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찔렀다. 그 중에서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특히 유명하였다. 일찍이 의병장으로 국내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홍범도는 만주로 자리를 옮겨 대한 독립군을 조직하고,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였다.

청산리 대첩은 우리 독립군의 활동 중 가장 빛나는 큰 승리였다.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하려고, 만주에 대규모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때, 독립군을 지휘하고 있던 김좌진은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였다.

2천 8백여 명의 독립군은 총 5만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포위하고, 험한 산길을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공격하여 3천 3백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시켰다.

청산리 대첩은 실로 우리 민족의 의기를 잘 보여 준 독립 투쟁이었다.

연구

만주와 연해주 일대가 우리 나라 독립군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까닭을 알아보자.

독립 운동은 광복의 그 날까지 나라 안팎에서 계속되었다. 윤봉길 의사와 같이 자기 한 몸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민족을 구하겠다는 사람들이 잇달아 의거를 일으켰다. 한편 국내에서도 일본에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곳곳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펴거나 민족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한, 농촌 계몽 운동을 통하여 농촌 사람들에게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 안팎에서 온 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연구

학자, 종교 지도자, 학교 선생님 등은 일본에 대항하여 어떻게 독립 운동을 했는지 알아보자.

학습 정리[편집]

1.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우리 민족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 조선 총독부는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통치하였다.

(2) 일제는 우리의 재산을 마구 빼앗아 갔다.

(3) 일제는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과 정신까지도 빼앗고자 하였다.

2.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자주 독립의 의지로써 싸웠다.

(1) 3⋅1 운동은 온 겨레가 뭉친 독립 운동이다.

(2) 3⋅1 운동 이후에도 독립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3.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1) 해외에서는 독립 운동을 위한 무력 항쟁이 계속되었다.

(2) 국내에서는 민족 정신을 북돋우는 운동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