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6차 교육과정)/1. 우리 민족과 국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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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된 동욱이에게 신나는 일 중 한 가지는, 우리 나라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동욱이는 그 동안 위인전도 많이 읽었고, 요즈음 새로 나오는 우리 나라 역사 이야기책도 많이 읽었다. 할아버지께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나라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셔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동욱이가 할아버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동욱이는 할아버지만큼 재미있게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욱아,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를 잘 알아야 더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할아버지,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알아야 한다니요?”

“음, 나는 우리 민족을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생각해 봐라. 오랜 세월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방에 흩어져 살던 우리 민족은 고조선이란 최초의 국가를 이룬 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 시대를 거쳐 다시 통일 신라라는 민족 국가를 이루었지. 이 나라도 다시 세 나라로 갈라졌지만, 또 고려라는 굳건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않았니?”

“할아버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마다 이를 물리치고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 온 것도 자랑스러워요.”

“그래, 그러면서도 오늘날까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를 꽃피우고 다른 나라에도 가르쳐 주었지.”

“할아버지, 저는 역사를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나라의 역사를 많이 아는 건 매우 자랑스런 일이야. 동욱아, 그런데 한 가지 더 이야기해야 할 게 있다. 역사 공부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는 힘을 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다.”

“네, 할아버지 저도 그냥 책을 읽기보다 연표나 역사 지도, 전기 같은 것을 보여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제 스스로 알아 냈을 때 더 재미있었어요.”

“동욱아, 우리 역사를 빛낸 몇몇 인물들을 나하고 나누어 조사하고, 서로 이야기해 주기로 할까?”

“좋아요, 할아버지 열심히 해 볼게요.”

할아버지와 동욱이가 조사할 인물
시대 할아버지 동욱
고조선 단군 왕검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주몽, 온조 박혁거세
을파소
근초고왕 왕인
광개토 대왕 장수왕
무령왕
진흥왕
을지문덕
담징, 양만춘 태종 무열왕
연개소문, 김유신
통일신라, 발해 문무왕
대조영
설총
장보고
후삼국 시대
고려 왕건
최승로
서희
강감찬
최충
윤관
김부식
공민왕
최무선 문익점
조선 이성계
세종 대왕, 황희, 장영실 이천
이이
이순신,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덕령, 정인홍
정문부
허준
박지원
김정호 최제우

(1) 역사가 오랜 우리 나라[편집]

[1] 단군 왕검[편집]

우리 민족이 처음 세운 나라와 지도자, 그 때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자료를 보면서 알아보자.

동욱이는 아득한 옛날의 우리 나라에 관한 책을 읽어 보았다

그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세운 나라와 그 때의 생활 모습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기 전의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에 대한 설명도 있었는데, 그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동욱이는 책에 나온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아득한 옛날, 우리 겨레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방의 여러 곳에서 작은 마을들을 이루고 살았다. 그 때의 생활 모습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어 잘 알기가 어렵다.

이 시대를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의 시대라고 하여 선사 시대라고 한다.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은, 그 때 사람들이 살던 집터나 쓰던 연모를 보고 짐작할 수 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로 연모를 만들어 산과 들로 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식물의 열매도 따 먹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강이나 바닷가에서 고기나 조개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그 때 사람들은 어디서 살았을까? 그들은 처음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점차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는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게 되었고, 쇠로 연모를 만들어 쓰게 되면서부터 한 곳에 머물러 큰 마을들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마을에는 지도자가 있었고, 지도자가 죽으면 고인돌이라는 커다란 돌로 된 무덤을 만들었다. 좋은 기계도 없었던 때에 어떻게 그 무거운 돌을 옮겼을까?

고인돌은 그 크기로 보아, 지도자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던 것 같다.

최초의 국가 고조선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이 변하여 사람이 된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왕검은, 이 땅에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은 중국 북동쪽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점차 한반도까지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단군 왕검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 인간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고조선에는 몇 가지 법이 있었고, 청동과 철로 된 무기도 만들었다

지금도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으며, 해마다 이 곳에서 전국 체육 대회의 성화를 점화하고 있다.

동욱이는 우리 나라 역사가 깊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 왕검이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고조선 때에 있었던 법의 내용을 조사하여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2] 광개토 대왕과 문무왕[편집]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과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들에 대해 알아보자.

고조선 이후에 한반도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나라들은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로 뭉쳐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은 서로 문화를 주고받는 한편 자기 나라의 땅을 넓히기 위해 싸우기도 하였다.

세 나라가 각각 차지한 땅은 시대가 흐르면서 변하게 되었다. 다음은 각 나라의 전성기 때 왕들을 가상으로 만나 본 것이다.

백제-근초고왕

어떤 일에 특히 힘을 쓰셨습니까?

 : 우선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노력하였어요. 그러기 위해 군사를 늘려 잘 훈련시켰지요.

새로 차지한 영토는 어디입니까?

 :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탐라까지 우리 땅으로 만들었어요. 또 왜(일본)에까지도 우리의 세력을 떨쳤지요.

고구려-광개토 대왕

대왕의 업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나는 고구려 영토를 중국 북쪽까지 넓혀 고구려인의 용맹을 떨쳤지요. 그리고 나의 아들인 장수왕도 한강 이남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어요.

후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여러분의 조상은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용맹스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신라-진흥왕

나라 힘을 어떻게 기르셨습니까?

 : 우리는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였지요. 그래서 화랑도를 통하여 젊은이들을 용맹스럽고 슬기롭게 키워 내려고 하였어요.

화랑도란 무엇입니까?

 : 화랑과 낭도로 조직된 단체로, 평시에는 심신을 수련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용감하게 나가 싸우게 한 인재 양성 제도였지요. 화랑도는 우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힘이 되었어요.

통일 신라-문무왕

삼국을 통일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 처음에는 세력이 약했던 우리 신라가 힘을 합쳐 삼국을 통일하게 되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 찬란한 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지요.

삼국 통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을 말씀해 주십시오.

 : 모든 신라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요. 특히,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 통일을 이루려는 노력을 다한 나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께 이 영광을 드리고 싶습니다.

화랑도 정신을 알아보고, 우리가 본받을 점을 생각해 보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은 무너진 옛 고구려의 힘을 다시 찾기 위하여 흩어졌던 유민들을 모아 나라를 세웠다.

그는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동모산 일대에 터전을 잡고 나라를 세워,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 나라를 발해라고 한다.

발해는 신라가 통일시키지 못했던 옛 고구려 땅을 지키며 고구려인의 기상과 문화를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갔다. 발해는 해동 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그 문화가 발달하였다.

발해와 통일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동욱이는 고조선에서부터 통일 신라와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연표로 정리해 보았다.

[3] 왕건[편집]

고려의 발전을 위해 애쓴 지도자들에 대해 알아보자.

선생님께서는 철판에 연표와 지도를 걸어 두시고 고려 시대에 대한 말씀을 꺼내셨다.

“통일 신라는 평화로운 사회가 이루어지자, 매우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어요. 그러다 차차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세 나라로 나누어졌어요. 이 때 왕건은 고려라는 나라를 세워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갈라져 있는 나라를 다시 통일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까지 고려의 지도자들에 대해 조사해 봅시다.”

연표에 나타난 고려 시대 인물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조사해 보자.

동욱이네 반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에 따라 각자 관심 있는 고려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조사해 왔다. 학생들은 정리해 온 내용을 발표하며 고려에 대해 공부하였다.

왕건,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고려를 세우다.

조사자 : 장인석

통일 신라의 힘이 약해지자, 한반도는 다시 세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태봉과 후백제, 신라로 나누어진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한다.

왕건은 태봉의 장군이었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고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탁월한 지도력과 훌륭한 인품으로 세력을 키워 다시 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개경(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고려에서는 최승로, 김부식, 최충, 공민왕 등의 훌륭한 지도자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고려 청자, 팔만 대장경판, 금속 활자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백성을 위하는 재상 최승로

조사자 : 권순영

◈ 활약한 때 ; 고려 초기

◈ 직책 : 문하 시중(지금의 국무 총리)

◈ 인품 : 학식이 뛰어나고 정직하며 총명하였음.

◈ 업적 :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을 장려함.

        군사를 강하게 길러 나라를 튼튼히 함.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가 없도록 잘 감독함.
        교육에 힘써 훌륭한 인물을 길러 냄.

◈ 유품 : 유교의 정신이 담긴 건의문이 남아 있음.

그 내용에는, 왕은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대해야 하며,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과, 사치를 줄이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들어 있다.

[4] 이성계[편집]

조선의 발전을 위해 애쓴 지도자들과 그들의 공통된 노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는 여러 차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서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여 가자, 장군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이 나라를 조선이라 한다.

인호네 반에서는 조선 시대에 관한 자료를 모아 여러 자료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선생님 : 앞에 나온 다섯 가지 자료는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요?

인호 : 모두 조선 시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선생님 : 맞아요.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로, 국력이 약해진 고려를 대신하여 새로운 힘을 가진 나라로 자리잡게 되었어요.

영희 : 조선은 우리가 이미 배웠던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선생님 : 이성계는, 새로 세운 나라가 아득한 옛날, 단군 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정신과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라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어요. 이렇게 이름이 같기 때문에 단군이 세운 나라를 고조선이라 부르고 있지요.

성호 : 그러면 위 자료는 조선의 지도자들에 관한 것을 나타내고 있겠군요. 그런데 17쪽 셋째 번 자료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 조선이 세워지면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야 했어요. 17쪽 셋째 번 자료는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에 대하여 쓴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으로,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졌어요. 이와 같이, 조선에서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지도자들이 노력하였지요.

성호 : 경국대전은 백성들의 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선생님 : 옛날에는 왕이나 양반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는데, 경국대전을 만들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함으로써 더욱 올바른 정치를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하여 힘이 약한 백성들이 보호를 받게 된 것이에요.

혜진 : 아, 인제 알 것 같아요. 17쪽 자료는 모두 조선의 지도자들이 백성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애쓴 모습을 담은 것이지요? 17쪽 둘째 번 자료는 세종 대왕이 국력을 신장하고, 북쪽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성이 있던 곳을 나타낸 것이에요.

미현 : 18쪽의 왼쪽 초상화는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황희 정승입니다. 황희 정승은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늘 청렴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또, 백성들을 위한 올바른 일이라면 임금에게도 서슴지 않고 항상 바르게 이야기한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18쪽 오른쪽은 누구의 초상화이며, 무슨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왼쪽 지도에서 우리 나라의 옛 도읍지를 살펴보고, 그 곳을 도읍지로 삼은 나라의 이름을 알아보자.▶ 국내성 :

▶ 평양 :

▶ 웅진⋅사비 :

▶ 금성 :

▶ 상경 :

▶ 개경 :

▶ 한양 :

2.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세력 범위와 고구려의 세력 범위를 왼쪽 지도 위에 각각 다른 색연필로 표시해 보자.

3. 고조선으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힘쓴 지도자들을 알아보고, 그분들의 업적을 이야기해 보자.

▶ 고조선 시대 :

▶ 삼국 시대 :

▶ 고려 시대 :

▶ 조선 시대 :

(2) 나라를 지킨 조상들[편집]

[1] 을지문덕[편집]

고구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외척의 침략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알아보자.

“장군님, 큰일났습니다! 수나라 대군이 우리 나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국경을 지키던 군사의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다른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고구려이지만, 수나라 장수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 수로 보아 너무 불리한 고구려는 유도 작전을 써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기로 하였다.

여러 번의 요동성 공격에 실패한 수나라는 작전을 바꾸어 날쌘 군사 30만여 명을 뽑아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항복하는 것처럼 꾸며 적진에 들어갔다.

“나는 항복의 뜻을 전하러 온 고구려 사신이오. 먼저 군대를 철수시키면 항복을 하고 수나라의 명령에 따르겠소.”

“어림없는 소리. 항복을 먼저 해야 군대를 철수시키겠소.”

“알겠소. 그럼 내가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그렇게 아뢰겠소.”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을 나오면서 주위를 살폈다. 군사들은 지쳐 있었고, 식량을 아끼느라 한 덩이의 주먹밥을 두 사람이 나누어 먹고 있었다.

‘식량이 부족한 게 틀럼없다. 이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를 우리 나라 깊숙이 끌어들여 쳐부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지는 척하며 조금씩 후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을지문덕 장군의 작전에 말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평양성 가까이까지 처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적장의 어리석음을 비꼬는 시를 써서 수나라 장군에게 보냈다.

수나라 장군은 을지문덕 장군의 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리며 군사들을 황급히 후퇴시켰다.

을지문덕 장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다.

“드디어 수나라 군대를 전멸시킬 때가 왔다. 총공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무찔러라.”

고구려 군대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수나라 군대가 강물을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미리 막아 두었던 보를 터뜨리게 하여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뒤쫓아가 물리쳤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도망 간 수나라 군사는 겨우 27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과 양만춘 같은 훌륭한 장군들과 용감한 고구려인들은 이들을 물리쳐 민족과 국가를 지켰다.

고구려 시대에 북방 민족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의 전기를 읽어 보자.
  •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2] 강감찬[편집]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어떻게 막아 냈는지 알아보자.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려 하였다. 그런데 북방 민족들도 살기 좋은 고려 땅을 탐내어 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서로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북쪽에 있는 거란족과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넘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고려는 야만적인 거란보다는 송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은 고려마저도 그들의 땅으로 만들려고 세 번에 걸쳐 침략하였다.

첫 번째 침략에서는 서희가 능숙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거란 장군과 담판을 지어 싸우지 않고 돌려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강동 6주를 도로 찾았다. 거란의 두 번째 침략에서 고려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강화를 맺고 돌아가는 거란군의 길을 막아 크게 무찔렀다.

몇 년 후, 거란이 세 번째로 침략하였을 때, 고려의 강감찬 장군은 귀주(지금의 평안 북도 구성)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싸움에 진 거란 장군은 이렇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한평생 싸움터에서 살았지만 이번같이 비참한 꼴을 당하기는 처음이다. 강감찬이 이렇게 전략에 밝은 명장인 줄은 몰랐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무찌른 고려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튼튼히 하고 힘을 더욱 기르려고 노력하였다. 천리 장성은 바로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외척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온 겨레가 하나로 단결하여 그들과 맞섰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별초의 활약이 컸다. 삼별초는 원래 도적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특별 부대와 몽고군에 잡혀 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였다.

북쪽의 몽고가 고려까지 그 세력을 뻗치자, 이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던 고려는 몽고군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 내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강화도를 포기하는 것은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세력을 키운 삼별초는, 전라도와 경상도 남쪽 해안에서 몽고군에게 계속 대항하였다. 백성들도 삼별초를 도와 몽고군을 몰아 내는 데에 힘썼다.

그러자 몽고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진도를 공격해 왔다. 삼별초는 용감히 맞섰으나, 힘이 모자라 제주도로 옮겨 싸우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의 이러한 항쟁은 우리 민족의 꿋꿋한 기상을 잘 보여 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삼별초의 항쟁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은 무엇인지 토의해 보자.

[3] 이순신[편집]

임진왜란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알아보자.

대륙으로 세력을 뻗고자 하던 일본은 1592년에 우리 나라를 침략해 왔다.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대군을 이끌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물밀듯이 쳐들어와 서울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함경도 일부까지 점령하였다. 그들은 곳곳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많은 사람을 해치고, 잡아가며, 노략질을 하였다.

그러나 바다의 싸움에서는 우리 수군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수군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노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왜군과 첫 싸움을 하였다.

이 해선에서 우리 수군은 적의 배를 거의 모두 격침시키면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래 우리 군대가 처음으로 크게 승리한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 뒤에도 사천, 당포, 당항포 등 곳곳에서 적을 물리쳤다.

그러자 왜군은 자기네 세력을 되찾기 위해 모든 함대를 모아 공격해 왔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전선을 이끌고 왜군의 함대가 진을 치고 있는 통영 앞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곳은 섬과 곶이 많아 해전을 벌이기에 좋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적선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우리 함대를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배치하여 총공격하였다. 적 함대를 완전히 포위한 우리 수군이 사방에서 포를 쏘아 대자, 적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수군의 대포와 화살에 맞아 거의 다 쓰러지고 일부만 살아서 도망갔다.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한다.

이 싸움으로 우리 군대는 큰 용기를 얻고, 왜군은 사기가 크게 꺾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관군이 육지에서 패한 원인을 조사하여 서로 토의해 보자.

육지에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평소에 학문에 힘쓰던 선비, 불도를 닦던 승려, 논밭에서 땀 흘려 일하던 농민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섰다. 이들은 비록 정식 군인은 아니었으나, 각지에서 관군을 도우며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불리하던 싸움이 점차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육지에서는 우리 군대와 의병이 힘을 내어 싸웠다. 일본은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패하게 되자,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게 되었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승병의 활동 모습을 분단별로 나누어 조사해 보자.
  •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덕령, 정인홍, 정문부, 서산 대사, 사명당 등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고려가 북진 정책을 썼던 까닭을 알아보자.

2. 우리 고장에 있는 성이나 성터에 대하여 그 성을 만들게 된 까닭과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조사하여 보자.

3.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군의 이름을 백지도에 표시해 보자.

○ ■ 속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 쓰기

○ □ 속에 대표적인 장군이나 의병 또는 승병 장수의 이름 쓰기

4. 임진왜란을 겪는 7년 동안, 우리 나라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으로 우리 나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겠는지 생각해 보자.

5.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과 승병 용사에게 감사하는 글을 써 보자.

(3) 역사를 빛낸 조상들[편집]

[1] 세종 대왕과 장영실[편집]

우리 문화 발전에 공이 큰 조상들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그분들의 업적을 알아보자.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우리말은 쓰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우리 글자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한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쓰기가 어려워, 배우기가 힘들었다. 또, 우리말을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시대의 설총은 유학과 한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한자가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유학의 가르침이나 한문을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두를 만들었다.

이두는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우리말을 기록한 글자이다. 이두는 비록 한자를 이용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비로소 우리말을 표현하여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쓰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우리말에 알맞고,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 수는 없을까?’

세종 대왕은 이런 생각 끝에, 궁중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인 집현전에 유능한 학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 학자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며 우리글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바로 세상에 알리지 않고, 3년 동안 용비어천가를 실제로 사용하는 모범을 보인 다음에, 세상에 널리 알렸다.

세종 대왕은 학문을 장려하고 보급하기 위해 나무 활자, 구리 활자를 만들어 여러 가지 책도 편찬하였다.

이 때 나온 책으로는 부처의 공덕을 기린 노래책, 농사짓는 방법에 관한 책, 예절에 관한 책, 역사, 지리, 의학에 관한 책 등이 있다.

또, 세종 대왕은 여러 가지 과학 기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장영실, 이천 등에게 과학 기구를 발명하도록 장려하였다.

장영실은 다른 신하들과 함께 여러 가지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이들은 농사짓는 데 이용하기 위해, 비가 온 양을 재는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이 측우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560년 전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시계와 물시계도 발명하였고,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함으로써 시간을 알 수 있는 혼천의도 발명하였다.

세종 대왕은 장영실에게 시간에 따라 태양이 움직이고 계절에 따라 자연이 변화하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도록 경복궁 내에 연구실을 만들고 그 책임을 맡겼다.

장영실은 경복궁에 천문 기상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간의대를 설치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연구에 몰두하여, 간의대를 새로운 여러 가지 천문 기구들로 가득 채웠다.

다음 사진들은 세종 대왕이 장영실, 이천 등을 시켜 만든 발명품들이다. 하나를 골라, 그 발명품들을 만든 목적과 쓰임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2] 허준과 박지원[편집]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조상들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그

분들이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아보자.

임진왜란 때, 임금의 건강을 돌보던 허준은 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까지 갔다. 선조 임금은 허준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다.

“지금 백성들은 갑작스런 난리를 당하여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들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이와 같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우리 백성들이 앓고 있는 온갖 병과 그 병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책을 쓰는 일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오.”

이렇게 하여 허준은 새로운 의학책을 쓰게 되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의학책은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에게나 맞지,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잘 맞지도 않는다.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전해 오는 훌륭한 치료법이 있으니, 우리 나라 의학을 바르게 정리해야겠다.’

허준은 스스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임진왜란이 막 끝난 때였으므로, 의원들이 없어 책을 만들기에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가 이렇게 힘든 일을 시작한 지 10여 년, 새로운 의학책이 완성될 무렵에 선조 임금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준은 임금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해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연구와 책 쓰기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완성하였다.

오늘날, 이 책은 뛰어난 의학 서적으로 인정되어 중국, 일본에서도 활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영어로도 소개되어, 우리 나라 옛 의술이 세계 의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전쟁으로 우리 나라의 많은 땅이 못쓰게 되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나라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예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박지원이다.

그는 나라일로 청나라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썼다. 그는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려면 농사짓는 일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일과 기술을 익히는 일에도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이웃 나라들이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모르는 것들은 스스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연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하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을 실학자라고 한다.

실학이 발달하면서 우리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특히, 김정호는 대동여지전도와 같은 훌륭한 지도를 만들어 내었다.

실학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이 주장한 내용을 조사해 보자.
위에 나온 실학자들의 주장을 읽고, 당시의 사회와 현재의 사회를 비교하여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자.

[3] 최무선과 이이[편집]

우리 조상들은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였는지 알아보자

고려 말, 왜구들은 우리 땅에 자주 쳐들어와 백성들의 재물과 목숨을 빼앗아 갔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약을 만들어 전쟁에 쓴다는데…….’

일찍이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최무선은, 왜구를 무찌르자면 화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 만드는 법을 철저한 비밀로 하고 있었다. 최무선은 초석에 황과 숯가루를 알맞게 섞어서 화약을 만든다는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몇 년 동안 열심히 연구하였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화약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 사람이 고려에 왔다. 최무선은 그를 설득하여 화약 제조법을 알아 내었다. 나라에서도 최무선의 열성에 따라 화약을 만들어 내는 화통도감을 두어, 화약과 화포를 비롯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게 하였다.

드디어, 임금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약과 화포의 성능을 시험하게 되었다.

“우르릉 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을 뿜으며 쏜살같이 날아가는 불화살을 보고, 임금과 대신들은 크게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지금의 금강 하류에 왜구가 침략해 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와 화통으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그 후로 왜구들은 우리 나라 해안에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최무선 이외에도 나라의 힘을 기르는 데 힘쓴 사람은 많다.

신사임당의 아들인 이이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그는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 서로 뜻이 달라 싸우는 사람들끼리 화해하도록 하고,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노력을 다하였다. 이이가 병조 판서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함경도 지방을 침략해 온 오랑캐는 신립 장군이 쉽게 몰아 내어 다행이지만, 만약 왜적이 침략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잔인 무도한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나라는 불리해. 일본은 틀림없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올 거야.’

이이는 국방을 튼튼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 간곡히 아뢰었다.

“국방의 근본이 되는 것은 군사의 힘이옵니다. 장차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오니 이에 대비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도록 하시옵소서.”

그러자 대신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이 태평한 때에 그 무슨 당치않은 소리입니까? 그것은 오히려 나라의 힘을 약하게 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웃 나라에 공연한 의심만 사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울 때에 군사를 기른다는 것은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대신들은 이이의 의견에 이렇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년 후 이이가 예측한 대로, 왜적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이 침략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만일, 그 때 이이의 말대로 미리 나라의 힘을 길렀다면 그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 가운데에는 나라의 힘을 기르는 데 공이 큰 인물이 많았다. 그분들의 전기를 읽고 여러 가지 자료도 모아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그 동안 공부한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빛낸 조상들의 업적을 요약하여, 다음 연표에 정리해 보자.

내용 / 시대 정치 국방 문화
삼국 시대
500 년
통일 신라, 발해 왕건 : 고려를 세움.
1000 년
고려
최무선 : 화약, 화포를 만듦. 문익점 : 목화씨 들여 옴.
1500 년
조선

2. 역사를 빛낸 여러 조상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당시의 나라 사정, 그 인물의 업적과 역사에 미친 영향 등을 조사해 보자.

(4) 우리 민족의 해외 진출[편집]

[1] 왕인과 담징[편집]

삼국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 모습을 알아보자.

선생님께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중국에서 불교와 학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문화로 크게 발전시켰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두 장의 사진을 보여 주셨다. 얼른 보아서는 그 형태가 비슷한 미륵보살상이었다.

“두 불상의 차이점을 찾아볼까요?”

형주네 반 친구들은 두 장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왼쪽에 있는 사진은 우리 나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입니다.”

“잘 알고 있군요. 이 불상은 우리 나라 삼국 시대의 불상입니다. 그럼 오른쪽은 어떤 불상인지 알겠습니까?”

“왼쪽의 불상과 모양이 비슷합니다만, 금동 불상이 아닌 듯합니다.”

“잘 비교하였군요. 이 불상은 일본의 국보인 목조 미륵보살 반가상입니다. 두 불상의 모습이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형주네 반 친구들은 그 이유를 각자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삼국 시대에는 불교와 유학이 크게 발달하여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발달된 우리 문화를 이웃 일본에도 가르쳐 주었다고 하시며 분단별로 조사 과제를 내주셨다.

형주네 분단에서는 백제의 학자였던 왕인에 대하여 조사한 후,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백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준 왕인

왕인은 백제 문화를 일본에 가르쳐 준 학자이다. 그는 ‘천자문’과 ‘논어’ 등의 책을 일본에 전해 주고, 그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일본 왕과 왕자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한문과 유학을 알게 하였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왕인을 일본 문화의 스승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유적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고구려 문화를 일본에 전해 준 담징

일본의 옛 도읍지 나라 시에는 백제 문화의 영향으로 세워진 호류 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2층 목조 건물인 금당이 있는데, 이 금당의 여러 벽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생을 바쳐 완성한 벽화가 있다.

호류 사 금당 벽화는 금당 안 동서남북에 석가 여래상과 보살상을 그린 것으로, 구도가 웅장하고 표현 방법이 세밀하여 세계적인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벽화는, 오래 전에 화재로 타버렸고, 지금의 것은 본래 모습대로 미리 그려 두었던 것이 전해지고 있는데, 부처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담징은 일본에 들어가 한문도 가르치고, 종이, 붓, 먹, 물감, 맷돌 등을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신라에서 일본에 전해 준 문화를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2] 신라방과 벽란도[편집]

신라와 고려인들의 해외 진출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 살림이 튼튼해지면서 나날이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특히 당나라로 많이 건너갔다. 공부를 하기 위한 유학생과 승려,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났으며, 사신들도 오고 갔다.

두 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에는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사는 마을인 신라방이 생기게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신라방을 중심으로 당나라 사람들과 장사를 하기도 하고, 그 곳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인 마을이 이루어지자, 이들을 위한 절과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도 지어졌다. 또, 신라인들이 자치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행정 기관도 생겼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장사가 번창하자, 이들의 배를 노리는 해적들이 나타나 노략질을 하였다. 해적들은 심지어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힘과 재주가 뛰어나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장보고는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보고, 신라 사람을 괴롭히는 당나라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왔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할 계획을 왕에게 아뢰고, 청해(지금의 완도 일대)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여 강한 수군을 길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들을 소탕하자, 신라인들은 물론 일본, 당나라 상인들까지도 편안히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초에 전라 남도 신안군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화려한 청자를 그물로 건져 올렸다. 바다 밑에 침몰한 배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이 지역을 조사하고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많은 유물을 건져 냈는데, 거의 중국에서 만든 것이었고, 배는 중국과 일본을 오고 간 무역선으로 밝혀졌다.

고려 자기나 팔만 대장경판과 같은 훌륭한 문화재를 만든 고려는, 거란족이나 여진족보다는 문화를 숭상하는 송나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고려에서 육로로 송나라에 가는 도중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있어 왕래하기가 위험하였다. 그래서 주로 뱃길을 이용하였다.

송나라 상인들은 여름철에 고려에 찾아왔다가, 11월에 궁중에서 열리는 팔관회라는 불교 잔치에 참석해 예물을 바치고는 되돌아갔다.

고려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통하여 송나라 상인들과 교류하였다.

벽란도에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와 동남 아시아의 상인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고려는 금, 은, 구리, 인삼, 나전 칠기, 돗자리, 종이 등을 수출하였고, 송나라로부터 비단, 자기, 책,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 아라비아 상인들은 수은, 향료와 같은 것을 가지고 벽란도에 드나들었다. 고려라는 이름은 이들에 의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 조선 통신사[편집]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알아보자.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그들이 가져온 구리를 식량, 옷감과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다음에는 그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에서는 새로운 지배자가 나왔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다시 예전처럼 교섭을 허용해 주고, 전처럼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이를 조선 통신사라 한다.

조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처음에는 왜란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두 나라 사이의 믿음을 두텁게 하여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통신사 일행은 가는 목적에 따라 300명에서 500명 정도로 그 수를 조절하였다.

일본은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 대마도(쓰시마 섬)의 영주를 조선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고,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희망하였다. 이 때, 조선 조정은 일본이 또다시 욕심을 부려 조선을 공격해 올지 모르므로, 일본 사절단이 서울까지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부산에서 맞았다.

일본은 우리 나라 통신사들을 매우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본 사절단은 왜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통신사 일행이 내려가면 이들을 대마도까지 안내하였다. 대마도로부터 오늘날 도쿄까지의 안내는 대마도 영주가 맡아 하였다.

통신사 행렬도를 보고, 일본 사람들이 조선 통신사 일행을 대우한 모습을 이야기해 보자.

일본 지식인들은 우리 나라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몰려들어, 학문과 기술, 예술 등 우리 나라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절과 일본 학자들 간에는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의 유학은 그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건네 준 한시, 그림, 글씨, 책, 도자기 등을 가보로 삼는 등 조선 통신사 일행과의 접촉을 더할 수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다음은 통신사 일기 중 한 대목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 신시(오후 4시)에 항구에 들어서니 배를 끌고 갈 수많은 왜선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청색 비단으로 만든 깃발에 정⋅부⋅종 세 글자를 써서 각각 표지를 삼았다. 우리 측 사신이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왜인들은 앞다투어 축하하였다. …(중략)… 각 사신들을 2~3명의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니 온갖 것이 질서 정연하였다.

○ 왜인들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와서 글씨를 받아 갔다. 간혹 초서를 쓸 때 필체가 시원스럽게 내려가면 곁에서 보고 있던 왜인들이 모두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을 맞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역할극으로 꾸며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삼국 시대에 우리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모아 보자.

2. 고려의 무역 활동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3. 아래의 두 가지 자료를 보고, 고구려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4. 오늘날에는 일본 문화가 우리 나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이며, 일본 문화의 수입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