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6차 교육과정)/2. 근대화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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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업을 하시는 영수 아버지께서는 외국에 자주 나가신다. 가끔 외국 사람들이 집에 오기도 한다. 영수네 집에 오는 외국 사람들은 우리 음식도 좋아하고, 웃어른을 모시고 함께 사는 우리 생활 방식이 훌륭하다고 부러워한다.

영수는 그 때마다, 한복을 입고 찍은 가족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한다. 우리의 전통 예절과 풍습이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아버지, 우리 나라에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죠? 그리고 그들과의 무역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영수가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우리 영수가 학교에서 우리 나라 역사를 배우더니 궁금한 것이 많아졌구나.”

아버지께서는 흐뭇해하셨다.

“서양 사람들은 조선 중기부터 우리 나라와 교류하려고 애썼지. 하지만, 오랫동안 중국이나 일본하고만 접촉해 온 우리가 서양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기는 쉽지 않았단다. 때로는 외국 세력을 막기 위해 싸움도 했고, 서양 문화로부터 우리의 전통 문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사람도 있었지.”

영수는 우리 나라가 근대화되어 온 과정이 궁금해졌다. 또, 점차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미풍 양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기로 했다.

(1) 외국 문화와의 만남[편집]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고, 그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 나라가 서양과 교류를 많이 하고 있지만, 처음으로 서양 사람들을 만난 때는 언제였을까요?”

우리들은 각자 생각을 말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 서양 사랑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일본을 왕래하였어요. 이들은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떠밀려 오는 일도 있었지요. 어느 날, 눈이 파란 서양 사람이 제주도에 표류해 오자, 제주도 사람들은 이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어요. 이것은 그 당시 일을 역사 신문으로 꾸민 것이에요.”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신문 한 장을 보여 주셨다.

역사 신문

1653년 어느 날

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붙잡혔던 벨테브레 귀화……조선 여자와 결혼

20여 년 전,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네덜란드인 3명의 한양 생활이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 동료 3명과 함께 먹을 물을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잡혀 한양으로 보내어졌다.

현재 그들은 훈련도감에서 총포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화약과 총포 제작술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서 특히 벨테브레는 귀화하여 이름까지 박연으로 고쳤다. 또,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그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조선인과 네덜란드 인을 반반씩 섞어 놓은 모습이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큰 키에 노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벨테브레는 한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보고 들은 각국의 풍물과 천문 관측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고 한다.

하멜 등 네덜란드 인 36명 또다시 제주도에 오다!

얼마 전, 네덜란드 인들이 탄 배가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되어 36명이 한양으로 보내어졌다. 그들을 조사한 한 관리는 ‘그들은 네덜란드 총독을 타이완에 데려다 주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게 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미 25년 전에 와서 지금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를 만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양 문물은 이렇게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직접 들어오기도 했지만, 주로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서 전해졌어요. 중국에 간 우리 나라 사신들은 그 곳에 와 있던 서양 사람들과 사귀기도 하였지요. 또,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는 책과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구해 오기도 하였어요.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볼 수 있는 천리경, 스스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 주는 자명종, 세계의 여러 곳을 나타낸 지도 등은 특히 신기한 것들이었지요. 또, 천주교에 관한 책이나 십자가 등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서양 사람들이 오고, 서양에 관한 책이나 물건이 소개되면서, 우리 조상들은 차츰 그 동안 모르고 있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했지요.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학자들은, 우리도 이를 배워서 생활에 이용하려는 생각을 하였어요.”

“정약용이나 홍대용 같은 학자들 말이죠?”

철민이가 자신 있게 말하였다.

“정약용은 과학 기술을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 이용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여러 개의 도르래를 써서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거중기를 만들고, 이것을 이용하여 화성을 쌓았대요.”

“홍대용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지구가 돈다는 것을 주장했어요. 또, 농업 문제나 기술의 장려에도 관심이 많았고, 신문 제도를 없애자는 주장도 했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지숙이와 영민이도 발표하였다.

선생님께서는 흐뭇해하시며 말씀하셨다.

“그뿐 아니라, 학자들 중에는 천주교에 관한 책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를 서양 학문으로 여겨 서학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가 점차 신앙 활동을 하는 사람도 생겼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여 천주교 신자가 생겨나기도 했지요. 천주교는 오랫동안 지켜 온 우리의 관습과 다른 것이 많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어요.”

♣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생겼을지 생각해 보고, 역사 신문으로 꾸며 보자.

[2] 이양선[편집]

서양 세력은 왜 우리 나라에 통상을 요구했으며, 이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였는지 알아보자.

일찍부터 자기 나라에서 생산한 물건을 팔고,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얻기 위하여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세력을 넓히던 서양의 여러 나라는, 드디어 우리 나라에도 그 손길을 뻗쳐 왔다.

큰 돛을 여러 개 달고 대포를 실은 서양 배들은, 그 모양이 우리 나라 배와는 달리 ‘이양선’이라고 불렸다.

처음에는 해안에 다가와 먹을 물이나 식량을 요청해서 이를 들어 주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배가 부서져서 고생하는 것을 도와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그들이 장사를 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그 당시 서양 사람들이 중국을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서양에 대한 호기심을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때, 나라 안에서는 고종 임금의 아버지로서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이 질서가 없어진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정치가 잘못되어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흥선 대원군이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자, 이를 크게 환영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려 한 대원군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강화도를 점령한 다음 서울로 쳐들어오려 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는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모아 맞서 싸웠다.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약탈을 일삼으며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다가 정족산성에서 크게 패하여 결국 쫓겨가게 되었다.

이 때, 그들이 약탈해 간 옛날 책들은 우리 나라를 서양에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아직도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스군을 격퇴한 흥선 대원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무기를 더 많이 만들고 군대도 강하게 훈련시켰다. 특히, 강화도에는 포대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강화도 곳곳에는 이런 포대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와의 싸움이 있기 바로 전에,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교역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 때 미국 상선은 통상을 거부하는 우리 측 사신을 잡아 가두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우리 군대와 백성들은 미국 상선을 불태워 대동강에 가라앉혔다.

프랑스와의 싸움이 있은 지 몇 년 뒤 이를 안 미국은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를 공격해 왔다.

처음에는 우리 군대가 우수한 무기를 가진 미국 군대에게 빌렸으나, 그 동안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결과, 마침내 미국 군대를 격퇴하였다.

두 차례나 서양의 침입을 받은 우리 나라에서는 서양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다. 또, 그들의 침입을 물리친 데 대하여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서울과 전국 각지에 서양과의 교섭을 금지하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세워 서양의 침략을 일깨우고, 서양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욱 단호히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양의 기술이 앞섰다는 사실과 우리 나라가 튼튼해지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아졌다.

♣ 다음 비석에 새겨진 글의 뜻을 알아보고, 흥선 대원군이 서양 사람들과의 교섭을 금지한 이유를 찾아보자. 또, 그 생각이 옳은지 토의해 보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그들과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요, 화해를 주장하는 일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3] 수교와 통상[편집]

우리 나라는 어떤 나라들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러한 조약의 성격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흥선 대원군이 세력을 잡고 있을 때에는 어느 나라도 우리 나라와 통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문을 열고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도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해 왔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그 태도가 무례하다 하여 이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외국과의 통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와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일본은 운요 호라는 군함을 강화도 앞바다에 보내 초지진 근처에서 마음대로 닻을 내리고 바다 깊이를 재어 보는 등 의도적으로 침략 행위를 하였다. 이에, 해안을 지키던 우리 포대에서 돌아가도록 경고하는 대포를 쏘았다.

그러자 일본 군함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나라 대포보다 성능이 우수한 대포를 마구 쏘아 많은 피해를 입히고 돌아갔다. 그리고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잡아, 우리 나라에 대해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여 왔다.

이렇게 시작된 회담은 세 차례에 걸쳐 열렸는데, 처음에는 운요 호 사건의 책임 문제가 주된 내용이었고, 이어 일본은 개항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그들이 정한 조약문을 일방적으로 제시하였고, 우리가 이를 거절하자 조약이 성립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위협을 해 왔다.

이 때, 서양의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일부 대신들은, 우리 나라보다 먼저 서양과 통상을 한 일본과 교류를 하여 그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계획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행위를 야만적이고 침략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당시 우리의 힘으로는 일본의 군함과 대포를 막아 내는 일이 어렵기도 했으므로, 결국 두 나라 대표가 강화도에 모여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은 근대에 들어와서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첫 조약으로서,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조약으로 외국인과의 장사나 교섭이 가능해졌다. 또, 서양의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 여러 곳과 왕래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의 내용에는 일본이 이익을 챙기는 데 유리하도록 된 조항이 많았다. 즉,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열어 일본인이 우리 나라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장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활동하는 데 대해서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또,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에 와서도 자기 나라의 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그 후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우리 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더욱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나라가 일본과 조약을 맺고 통상의 길을 열게 되자, 서양의 다른 나라들도 앞을 다투어 조약을 맺고 장사를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 때는 이미 우리 나라도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열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조약을 맺었고, 뒤를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와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개항 때문에 우리 나라는 결국 정치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겼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촌 경제와 상공업에 어려움이 쌓이게 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로 나라 곳곳에서는 개항을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자는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 강화도 조약 내용을 찾아 읽고, 각자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과학 기술 발전에 힘쓴 인물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 그 사람의 업적과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조사해 보자.

2. 다음 글을 읽고, 내가 흥선 대원군이었다면 어떻게 결정했을 것인지 생각해 보자.

우리 나라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불평이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이 세력을 잡아 이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 때, 강화도 앞바다에는 서양 배와 일본 배들이 차례로 들어와 우리 나라와 무역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며 강력히 시위하고 있었다.

(1) 당시 나라 안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2) 당시 세계 정세는 어떠하였는가?

(3) 당시 외국의 교류 요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고, 그 생각대로 했을 때에 도움이 되는 점과 피해가 되는 점을 생각해 보자.

(4) 내가 흥선 대원군이었다면 어떻게 결정했을지 생각해 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발표해 보자.

3. 우리 나라가 서양 여러 나라와 맺은 통상 조약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2) 새로운 사회로의 움직임[편집]

[1] 개화 운동[편집]

개화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과 그 때의 사회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은 마침내 개항하였다. 일본인 외교관과 상인들은 부산, 인천, 원산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드나들게 되고, 서울에는 일본 공사관이 설치되었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 사신으로 간 사람들을 수신사라고 하는데, 일본을 돌아본 이들은 일본이 옛날에 비하여 크게 달라졌으며, 나라의 힘도 강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외국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조정에 알렸다.

이를 받아들인 조정에서는 개화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나라 의 제도를 개화 정책 실시에 도움이 되도록 고쳐 나갔다.

조정에서는 개화 사상을 가진 젊은 관리들을 많이 뽑는가 하면,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또,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무기, 화약 제조업 등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정부의 이와 같은 개화 정책으로 나라 안에는 다른 나라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과학 서적도 들어왔다. 지금도 물건의 이름 앞에 ‘양’이란 말이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그 당시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쓰이면서 생활 모습도 크게 달라져 갔다. 거리에는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으며,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쓰거나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별기군이라고 부른 신식 군대가 새 군복과 신식 총을 메고 훈련하는 모습은 매우 신기하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새로 조직한 신식 군대의 훈련은 일본 군인이 와서 맡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을 끌어들일 위험이 있다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 운동이 진행되면서 문제점도 많이 나타났다. 무명 옷감을 파는 우리 상인의 상점보다 비단 옷감을 파는 외국 상인의 상점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렸고, 냄비, 농기구, 석유 등 각종 수입품을 사기 위해서는 많은 곡식을 내야 했다.

이것을 이용해 미리 돈을 빌려 주고 추수기에 엄청난 이자를 붙여 많은 곡식을 거두어 가는 일본인도 생겼다. 그 결과, 농촌에서는 쌀이 부족하고 값이 올라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울릉도와 제주도에까지 일본 어선들이 나타나 고기잡이를 함으로써 우리 어민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를 본 일부 유생들은 나라가 망해 가고 있는 징조라고 하며 걱정을 하였다. 또, 개화파를 가리켜 외국에 나라를 파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외국과 교섭을 하지 말도록 왕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화파와 개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이러던 중, 신식 군대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반 자제들로 구성된 신식 군대는 구식 군인에 비하여 대우가 매우 좋은 반면, 구식 군인은 열석 달이나 쌀 배급을 못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래와 쌀겨가 섞인 쌀을 배급받은 구식 군인들은, 드디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구식 군인들이 반발하자, 백성들도 군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갔다. 일본 공사관은 불타고, 일본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 사건 때문에 흥선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으며, 개화는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대한 간섭을 노리고 있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감으로써, 우리 나라는 다시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나라의 자주권이 위협받게 되었다.

♣ 개화 운동으로 변화된 사회 모습을 조사하여 극화해 보자.

[2] 두 차례에 걸친 개혁 운동[편집]

개화파의 개혁 운동에서 공통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며, 당시의 생활에 나타난 변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자.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에 모인 여러 외국 고관들과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보수파 관리들은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였다. 개화파들은 밖으로 뛰쳐나온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힌 후, 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달려가 청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는 고종을 경우궁으로 데려다가 일본 군사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고, 왕을 만나러 들어오는 보수파들을 차례로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을 비롯한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고, 백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하며, 농민의 세금을 낮춘다는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개혁은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힘을 빌려 시행했다는 점은 잘못이었으나,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점에서는 큰 시도였다. 또, 지식층을 비롯하여 나라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개혁의 실패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망명의 길에 올랐으며,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또, 일본 상인과 함께 청나라 상인들도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자유롭게 장사를 하여 많은 이익을 보게 되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개화의 움직임은 그 이후에도 그치지 않고 진행되었다.

♣ 김옥균을 피고로 하여 갑신정변에 대한 모의 재판을 해 보자. 내가 김옥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각자의 생각을 발표해 보자.

1894년 1월 어느 날,

“사또, 큰일났습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농민들이 떼지어 우리 고부 관아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뭐, 농민들이 쳐들어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농민들은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에게 부탁하여 받은 진정서를 가지고 관아를 찾아갔으나,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는 등 고생만 했다. 이에 참지 못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아 관아로 쳐들어가 창고 문을 열고 곡식 등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지방은 대흉년이었고, 경기도 지방에서는 대홍수가 났다. 세상이 뒤숭숭하니 함경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 때, 백성들의 마음 속을 파고든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외세로부터 우리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 동학 농민 운동이 갑오개혁으로 발전한 과정을 조사해 보자.

동학이 퍼지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우리 나라의 정치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학군의 힘이 커지자, 나라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게 되였고,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자 일본도 뒤따라 군대를 보냈다. 관군과 일본군의 힘에 밀려 동학군이 패하고, 전봉준마저 죽게 되자 동학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 운동은 우리 역사에 빛나는 개혁 운동이었으며, 외세를 몰아 내려는 민족 운동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에 걸쳐 대대적인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것을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갑오개혁은 성급한 실시로 그 폐단도 있었지만, 우리 나라가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의 내용(예)

◉ 정치적인 면

  •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 독립한다.
  •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킨다.
  •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능력 위주로 관리를 뽑는다.

◉ 경제적인 면

  • 화폐 제도를 채택한다.
  • 도량형을 통일한다.

◉ 사회적인 면

  •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없앤다.
  • 조혼을 금한다.
  • 고문을 폐지한다.

이처럼 두 차례의 개혁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나라에서 경쟁하던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더욱 커졌다

[3] 독립 신문과 독립 협회[편집]

우리 조상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아보자.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대해 더욱 많은 간섭을 하려 들었다. 그 때는 강대국들이 다른 나라에 세력을 넓히려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의 간섭을 피하고 싶어 마침 세력을 넓히려는 러시아와 가까이하고 일본을 멀리하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우리 나라의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던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야만스런 행위를 저질렀고, 분개한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나라가 이처럼 강대국의 틈바귀에서 자주 독립을 위협당하고 있을 때, 일찍이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면 국민의 애국심과 자주 정신이 필요함을 깨닫고, 독립 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만들었다

독립 신문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발행되었다.

이 신문에는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소식과 함께 여러 가지 새로운 지식이 소개되었으며, 나라가 자주 독립하는 길에 대한 글이 실렸다. 또, 조정이 하는 일에 대하여 잘잘못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관리들의 잘못을 탓하는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그 때까지 지켜 오던 나쁜 풍속을 고칠 것도 주장하고, 특히 백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에는 정치가 잘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과 함께 백성을 계몽시키려는 서재필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독립 신문은 4쪽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중 1쪽은 영어로 인쇄하여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 사정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독립 신문은 우리 나라에서 민간인이 만든 신문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이었다. 또, 한글로 쓰여져서 한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 갔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서재필은 독립 신문 발행에 이어 독립문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였다.

서울의 서대문 밖에는 옛날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세운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헐어 버리고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우리 나라 국민들이 나라의 자주 독립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우리 나라의 이권을 차지하려 하자, 독립 협회는 온 국민이 단결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일을 주제로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열었는데, 그러한 회의의 진행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종로 거리에서 만민 공동회라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 모임에는 관리나 상인, 교사, 학생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분의 차별 없이 모여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하였다. 나라의 자주 독립을 내세우고,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그 잘잘못을 가리기도 하였다.

이 모임은 정부에 대해 외국에게 이권을 넘겨 주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백성들의 자주 독립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자,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고쳐 근대적인 자주 독립 국가로 출발을 하고, 이를 온 세계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다. 특히, 나라가 튼튼해야 독립 국가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전국의 농토를 다시 측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웠다.

♣ 독립 신문에 나타난 내용을 한 가지씩 골라 그 뜻을 해석해 보자. 또, 독립 협회가 없어지게 된 이유를 조사해 보자.

[4] 근대 교육[편집]

우리 나라의 근대화 시기에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와 근대 교육의 발달 모습을 알아보자.

세계에 눈을 뜬 지식인들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윤이 증조 할머니께서는 이화 학당을 나오셨다.

이화 학당은 미국인 선교사가 서울에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여학교로, 명성 황후가 학교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윤이는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모습을 조사하기 위해 백과 사전을 찾아보았다. 백과 사전에는 이화 학당뿐 아니라, 나라에서 세운 학교, 선교사가 세운 학교, 민간인들이 세운 학교 등 많은 근대식 학교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지윤이는 선생님께 궁금한 것을 여쭈어 보았다.

지윤 : 선생님, 이화 학당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 나라에 여성을 위한 학교가 없었습니까?

선생님 : 그래요. 그래서 여자가 신식 교육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처음에는 학생을 모집하기도 쉽지 않았대요. 단 한 명으로 시작해서 차츰 그 수를 늘려 나갔어요. 학교에서 점심이며 학용품을 대어 주기도 하였지요.

지윤 : 이화 학당 이전에는 어떤 학교들이 있었습니까?

선생님 : 근대적 학교의 시초는 원산 학사였어요. 원산은 다른 나라에 개항한 항구 중의 하나로, 일본 상인이 많이 몰려들었던 곳이었어요. 이를 못마땅히 여긴 주민들은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 국민을 일깨우고 나라를 위한 정신을 일으켜야겠다는 데 뜻을 모았지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사립 학교를 세웠어요.

영철 : 그럼 나라에서는 근대 교육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습니까?

선생님 :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고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감에 따라 나라에서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인재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겠지요? 그래서 정부에서는 ‘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정책을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는 것이 나라 발전의 기본이 된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제도와 교육 방식에 따른 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어요.

지윤 : 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운 학교는 어떤 학교였습니까?

선생님 : 육영 공원이었어요. 육영 공원에서는 새로운 문명을 들여 오고자 외국인 교사로 하여금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고, 기숙사도 마련하고 학생들도 나라에서 직접 선발하는 등 교육 열기가 대단히 높았어요. 그 후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 학교나 외국어 학교, 오늘날의 초등 학교인 소학교가 차례로 세워졌어요. 교육이 국가를 지킬 수 있는 기본임을 굳게 믿었던 거예요.

지윤이는, 그 당시 학교에서 공부하던 내용이 오늘날 우리들이 공부하는 내용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 근대 교육 초기에 세워진 학교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학교를 조사해 보자.

옛날의 소학교에서는 수신(오늘날의 도덕), 역사, 지리, 산술, 미술,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이것은 유교, 중국의 역사와 문학 등이 중심이던 옛날의 교육 내용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또, 한글,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 등도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는 애국심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서울에 세워진 배재 학당, 경신 학교, 이화 학당 등에 이어 지방에도 많은 학교들이 세워져 외국어, 수학, 지리, 역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

학교가 많이 세워지고 교육 내용이 달라지면서, 교과서도 자연히 옛날과 다르게 만들어졌다. 납 활자로 인쇄한 교과서가 이 때 나오기 시작했으며, 교과서에 그림이나 지도가 들어간 것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 근대 교육 운동 이후 우리말과 역사 연구에 힘쓴 인물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개화 운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져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의 제도를 고쳐 나갔다. 다음을 조사해 보자.

(1) 개화 운동에 찬성한 인물들의 주장과 반대한 사람들의 주장은 서로 어떻게 달랐는가?

(2) 개화 운동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 역할극을 해 보자.

2. 독립 협회와 독립 신문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1) 독립 협회의 설립 목적 :

(2) 독립 협회의 조직과 활동 :

(3) 독립 신문의 내용 :

(4) 일본인들의 반응 :

3. 갑오개혁은 우리 나라가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을 조사해 보자.

(1) 갑오개혁의 목적 :

(2) 갑오개혁으로 달라진 점 :

(3) 갑오개혁 추진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 :

4. 근대화 운동에 따라 교육 활동도 변화하여 근대식 교육 기관이 생겨났다. 소학교의 이름과 교육 방법 및 교육 내용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알아보자.

(3) 근대 문화의 발달[편집]

[1] 의식주 생활의 변화[편집]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개화가 진행되면서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우리 반에서는 개화기의 변화된 생활 모습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선생님 : 다른 나라와 교류하고 개화가 진행되면서 서양 문물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모습을 어떻게 조사할 수 있을까요?

철수 : 박물관에 가서 조사하는 것아 좋겠습니다.

정우 : 개화기의 사진 자료도 수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민주 : 도서관에 가서 역사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혜영 : 조사가 끝난 후에는 보고서를 쓰는 것이 조사 내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변화된 생활 모습을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로 나누어 분단별로 조사하였다.

♣ 개화기의 여러 가지 생활 모습을 나타낸 사진을 구하여 사진첩을 만들어 보자.

철수네 분단은 조사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개화기 의생활의 변화

1. 조사 문제 : 옷, 머리 모습 등은 어떻게 달라졌나?

2. 조사 내용 :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한복 대신 양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양복은 서양 문물에 자주 접한 사람이나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입기 시작했다. 양말이 들어온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우리 한복을 그대로 입거나 약간 개량하여 입는 사람도 많았다. 여성의 경우, 서양의 간편한 옷을 본따서 저고리를 길게 하여 입거나 치마 길이를 약간 짧게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치마저고리는 각각 다른 색으로 입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개화가 되면서 같은 색으로 입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상류 사회에서는 갓 대신 모자를 썼고, 짚신 대신 구두를 신는 사람도 늘어났다.

상투를 자르라는 나라의 명령은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상투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하여 끝끝내 자르지 않고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정부 고관들부터 상투를 자르기 시작했고, 그 후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 갔다.

3. 수집한 자료

4. 느낀 점

의생활의 변화는 크게 일어났다.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생활 태도부터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의 한복, 머리 모양 등의 전통을 오랫동안 꾸준히 지켜 온 것에 비하면, 개화기에는 매우 빠르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오랫동안 지녀 왔던 의생활 전통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어리둥절하였을까?

그 때 의생활이 변화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남자도 머리를 길게 땋고, 한복을 입은 채 체육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 식생활 및 주생할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조사하여 보고서를 써 보자.
철수네 분단에 이어서 다른 분단도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발표를 마친 다음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구분 변화된 모습
의생활 ○ 한복 대신 양복을 입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머리도 짧게 하기 시작했다.
식생활 ○ 빵, 피자, 홍차, 커피와 같은 서양 음식이 들어왔다.
○ 여자들도 남자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생활 ○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도 지었다.
○ 벽돌을 써서 짓는 집이 늘어났다.

[2] 종교 생활과 문학[편집]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변화된 종교와 문화의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의 신앙 생활도 서양 문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옛날부터 전해 오던 불교와 유교는 스스로 개혁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추려 하였다. 또, 우리의 전통과 신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민족 종교가 탄생되기도 하였다.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천도교는 동학을 계승한 종교이다. 동학은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후에 잠시 주춤했으나, 제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하여 그 세력이 다시 확장되었다. 손병희는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민족 종교로 발전시켰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중심 사상에 뿌리를 두고,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천도교는 훗날 3⋅1 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오늘날, 우리의 민족 종교는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조사해 보자.

원불교는 감사, 보은하는 생활과 근면, 저축하는 생활 둥 우리 민족의 자립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한편,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일어난 종교로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하려는 민족 정신을 심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랫동안 박해를 받던 천주교도 포교의 자유를 얻자, 신자의 수가 차츰 늘어났다. 천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지어 사회 봉사 활동을 강화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폈다.

뒤이어 전래된 기독교는 선교사의 활동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기독교는 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병원을 지어 서양 의술을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교와 교회를 통하여 서양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 종교가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민족주의 사상을 튼튼히 하는 데 이바지했다면, 기독교는 서양 사상을 들여와 자유 민주주의를 심는 데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종교는 공통적으로 민족 의식을 높이고, 어려워진 나라를 구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개화기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 학문과 서양의 학문이 만나서 새로운 학문을 싹틔우게 되었다. 학자들은 학문 연구를 통하여 우리 나라의 민족 의식을 높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어 연구와 국사 연구였다.

국어 연구는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 학자들은, 민족과 언어는 하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글을 보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학자들은 국어 연구에 힘을 기울여 한글 문법책을 만드는 한편, 한글이 널리 사용되도록 노력하였다.

국사 연구도 활발하였다. 학자들은 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 정신과 역사를 바로잡는 한편, 우리 민족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승리한 영웅들의 위인전도 많이 씌어져서 널리 보급되었다.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과 같은 책이 이 때 발간되었다. 위인전은 일본 침략에 맞서 싸우려는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사기를 북돋우었다.

♣ 역사 학자를 민족의 독립 의지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한 일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새로운 소설은 순 한글로 씌어지고, 알맞은 문장을 사용하여 누구나 읽기가 쉬웠다. 내용도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실적인 것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주제로 하였다.

또, 등장 인물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 독립과 새로운 문화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새로운 형태의 시나 노래말도 나타났다. 새로운 시나 노래말로는 애국, 독립, 새로운 문화 등을 내용으로 한 것이 많았다.

시는 점차 그 형식이 자유스러워졌으며, 노래말은 쉬운 국어로 표현되어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를 수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읽을거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외국 노래와 글을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도 있었다. 이솝 이야기,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등이 이 시기에 소개된 것이다.

♣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알고 있는 개화기의 노래나 글을 들어 보자.
애국가

우리 나라 독립을 원하고,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다짐하고 있다.

대조선 건양 원년 자주 독립 기뻐하세.

천지 간에 사람되어 진충 보국 제일이니,

임금께 충성하고 정부를 보호하세.

인민들을 사랑하고 나라 기를 높이 다세.

나라 도울 생각으로 시종 여일 동심하세.

부모 경대, 자식 교육, 사람마다 할 것이다.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음.)

권학가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학도야,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썩어지고

영목은 소생하네.

동방의 대한의 우리 청년

학도들아,

놀기를 좋아 말고

학교에 나가 보세.

(1904년, 김인식 작사⋅작곡)

[3] 전화와 기차[편집]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교통과 통신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아보자.

소희네 학교 사진반에서는 옛날 우리 나라의 교통과 통신 수단 모습이 담긴 자료를 모아 전시하기로 하였다.

통신 회사의 자료 전시관에 도움을 청하는 펀지를 썼더니, 여러 가지 자료와 함께 펀지를 보내 주었다.

소희에게

나는 통신 회사에 근무하는 나석권이라고 해요. 소희가 들어 있는 사진반 전시회 소식을 듣고, 우리 통신에 관심을 가져 준 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했어요.

조선 시대 말에는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자,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우편 제도도 크게 변하였지요.

옛날에는 파발이 주된 것이었지만, 우정국이 생겨 근대적인 우편 사무를 맡게 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편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집배원이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 사람들은 처음 보는 집배원을 벙거지꾼이라고 불렀어요. 왼쪽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 때 집배원의 모습이에요.

또,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 우편물을 주고받기도 하였어요.

전화는 먼저 궁중 안에 가설되었답니다. 그 때에는 신하들이 임금과 통화할 때 무릎을 꿇고 정중한 자세로 통화했다고 해요.

서울과 몇몇 도시 사이에 전신이 통하면서 급한 일이 생기면 전보를 칠 수 있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전보를 치는 사람을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하였대요.

시험에 합격하고도, 전보를 보내고 받는 법, 전보 치는 규칙, 외국어, 유학 등을 3년간 배운 후에야 겨우 전보를 칠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러므로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 전보치는 일을 맡은 것이지요.

전화와 전보는 우리 나라의 통신 수단을 바꿔 놓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편리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했지요. 물론 오늘날에는 통신이 훨씬 더 빠르고 편리하게 되었답니다.

내가 보내는 우편 제도에 관한 사진을 잘 살펴보아요.

이 자료들이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그럼 좋은 전시회가 되길 바랄께요.

2000년 ○월 ○일

○○ 통신 회사 자료 전시관에서 나석권 보냄.

소희네 학교 사진반 학생들은 이 편지를 받고 곧 고맙게 받았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조사를 하면서 모은 자료를 보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개화기에 우편 제도를 빨리 들여 와 국민이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그 때 벌써 만국 우펀 연합에 가입해 외국과 우편물을 교환하였다니 놀랍지 않니?”

“그래, 통신은 우리 생활에 매우 중요하지. 그러면 교통 기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도록 하자.”

조사 내용
/
교통 수단
생겨난 때 생활에 끼친 영향
기차
전차
자동차
◉ 새로워진 교통 수단

오랜 옛날에는 교통 수단으로 주로 망이나 가마를 이용하였다. 가마는 양반, 새색시와 같은 사람만이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이나 가마는 먼 거리를 가게 되면 힘이 들고, 빨리 달릴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자동차, 전차, 기차가 생기면서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는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넓은 신작로에는 자동차가 달렸으며, 서울과 인천 사이에 철도가 놓여 기차도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커먼 연기를 뿜는 쇠수레(기차)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기도 하였다. 기차를 처음 타는 사람은 기차에 오르면서 짚신을 벗어 들기도 했다고 한다.

♣ 개화기에 새로 들여 온 기차나 전차, 전화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수집해 보자

[4] 종두법과 광혜원[편집]

개화기에 들여 온 서양 의술 및 의료 시설을 알아보자.

개화가 되면서 편리한 시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양 의료 기술과 시설의 도입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석영은 처음으로 종두법을 도입하였다. 당시에는 천연두가 특히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천연두에 걸리면 열이 나고 온몸에 발진이 생겨서 목숨을 잃거나, 낫는다고 하더라도 얼굴에 흉터가 남는 일이 많았다.

지석영은 종두를 한 번만 접종하면 평생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는 종두법을 알고 있는 외국인 의사를 오랫동안 찾아다니면서 연구한 끝에, 마침내 종두법을 익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접종을 피하던 사람들도 지석영의 설득으로 종두법을 믿게 되었고, 점차 활발히 보급되어 나갔다.

종두법의 성공은 사람들에게 서양 의학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하여 서양 의학이 쉽게 들어오게 되었다.

정부에서도 근대식 병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병원 건설을 서둘렀다. 우리 나라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병원은 광혜원이다. 광혜원은 양반집의 행랑채, 사랑해, 안채, 별실 등을 개조하여 만든 병원이었지만, 외래 진찰소와 수술실, 약국, 병실을 고루 갖춘 국립 의료 기관이었다. 여기에서는 치료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뽑아 의학 실습 교육도 하게 되었다.

광혜원은 후에 이름을 제중원이라 고쳤다가 다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꾸었다.

♣ 서양 의술을 처음 들여 올 때에는 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국민들도 차츰 서양 의료 시설의 장점을 깨달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정부는 광혜원에 이어 전국 각지에는 자혜 의원을 세우고, 서울에는 대한 의원 등을 설립하여 국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신식 의료 기술을 보급하였다.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우리 고장의 주변에서 개화기 전후에 생겨난 기관을 조사하여 아래 표에 적어 보자. 또 그 중에서 1개 기관을 골라, 조사 보고서나 견학 보고서를 만들어 보자.

조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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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한 일 현재 모습 나의 의견

2. 우리 나라에 들어온 여러 가지 개화 문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개화 전후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도록 스크랩을 하고 목록을 적어 보자.

순서 자료 내용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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