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6차 교육과정)/3.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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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현아, 할아버지께 절하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자, 미현이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두 번 절을 올렸다.

미현이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다 젊으셨을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는 혼자 어린 자녀들을 키우시느라고 무척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그래, 미현이도 이제 많이 컸기 때문에 얘기를 해 주면 알겠구나. 한때 일본은 이 땅을 그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침략해 왔단다.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항했지만,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었지.”

“그래서요?”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독립군, 광복군 등을 만들어 끊임없이 저항하였단다. 할아버지께서는 주로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시며 많은 공을 세우셨지. 그러다가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게 되었단다.”

미현이는 할아버지께서 사셨던 그 때의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1) 광복을 위한 노력[편집]

[1] 의병 전쟁[편집]

일본이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배울 점을 찾아보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성준이는 이 때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였다.

“선생님, 우리 조상들은 가만히 있었나요?”

“아니에요. 우리 민족은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지요. 우선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쓴 조상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겠어요.”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자료를 칠판에 붙이셨다.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우리 조상들

☆ 순국

나라를 위해 일하던 대신들이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일본의 잘못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 민족에게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당부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의병

정식 군인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본과 맞서 싸웠다 그들은 덕망이 높은 양반 중에서 용감한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 군대를 만들었다.

☆ 신문

신학문을 익힌 사람들은 신문을 만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 일본의 잘못을 알리고 우리 민족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신문을 통해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있었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특사 파견

고종 황제는 일본의 침략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국제 회의에 우리 측 대표를 보냈다. 그 대표의 한 사람인 이준 열사는 일본의 방해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분함을 이기지 못한 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교육

신교육을 받은 개화된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 생각하고, 곳곳에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치고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웠다.

성준이는 우리 조상들이 일제 침략에 대항한 방법 중에서 의병 활동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의병들이 큰 공을 세웠다고 배웠는데, 이 때에 또 의병들이 일어섰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나라와 민족을 깊이 사랑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성준이는 도서관과 서점을 찾아다니며, 그 시기의 의병 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보았다.

의병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용감히 일어섰다. 그들은 총이나 신식 무기가 아닌 대나무로 만든 창이나 곡괭이, 삽 등 농기구까지 들고 일본의 신식 군대와 맞섰다.

의병 활동은 을사조약을 맺자 더욱 강해졌다. 을사조약은,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자신들의 허락이 없으면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하려는 속셈을 보여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이를 반대하여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의병들을 지도하였으나, 점차 평민들 중의 용감하고 전술에 뛰어난 사람들이 의병장이 되기도 하였다.

♣ 대한 제국 시대의 구국 운동에 대한 사례들을 조사해 보자.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점차 우리 나라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우리 나라 군대의 대대장 박승환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대장이 자결하자, 병사들은 더욱 비장한 마음으로 일본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박승환의 유서

군인으로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

이후로 의병은 해산된 군인과 합세하여 더욱 조직적으로 일본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신돌석은 평민으로 의병을 이끈 사람이다. 그는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침략의 우두머리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10년에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말았다.

우리 나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은 간도나 연해주, 중국 동북부 같은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독립군들은 군사 훈련을 하고 무기도 새롭게 갖추어서 곳곳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괴롭히면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중국의 봉오동과 청산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쟁도 의병들이 모여 만든 독립군의 활약이었다.

♣ 우리 조상들 일제에 항거한 여러 방법 중에서 자신은 어떤 것을 택하였겠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2] 민족의 수난[편집]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기간에 우리 민족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아 보자.
“오! 슬프도다. 개, 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의 대신들이 자기 혼자 잘살고 부귀를 누리는 데 눈이 어두워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었으니, 4천 년 강토와 5백 년의 나라를 다른 나라에게 바치고 2천만 백성 다른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아! 슬프도다. 찢어질 듯한 마음이여. 아프고 아프도다. 오늘 이 날을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

이 글은 장지연이 을사조약의 부당성에 대해 황성 신문에 실은 글이다.

을사조약은 1905년에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우리 나라와 강제로 맺은 조약으로, 그 내용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 황제는,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5년 뒤인 1910년에는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고, 그 때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를 때까지 우리 민족은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일본의 우리 나라 침략과 광복
강화도 조약 을사조약 국권 침탈 8⋅15 광복
일본은 강화도에서 무력으로 위협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하는 조약을 맺어 우리의 경제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이 조약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일본의 허락이 없으면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그들 나라와 합치고 우리 것을 모두 빼앗으며 우리 민족을 억압하였다. 일본의 억압을 물리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현이네 반에서는 일본의 침략 과정과 그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일에 대한 자료를 모아 보기로 하였다

학생들은 자료를 분류하여 정리한 후, 설명을 덧붙여 전시하기로 하였다.

〈1분단〉 일제의 침략

일본은 우리 물자를 일본으로 빨리 나르기 위해 서울과 인천 사이에 경인선 철도를 놓았다. 경인선 개통식 사진에 보이는 일본 국기는 이 철도가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또, 일본은 우리 나라 황실과 정부를 없애고,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총독은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였고, 우리 민족을 총칼로 억압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국권을 빼앗자마자, 500년간 조선의 왕이 있던 경복궁 근정전에 일본 국기를 내걸었다.

〈2분단〉 우리 물자를 빼앗아 간 일제

일본은 우리 땅에서 나는 많은 물자를 빼앗아 갔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굶주림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일본이 가장 탐내었던 것은 쌀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기름진 쌀을 가져가기 위해 군산항을 이용하였다.

일본은 우리 나라의 동해에서 잡은 명태, 정어리와 생선으로 짜낸 기름까지도 일본으로 빼앗아 갔다.

일본은 토지 제도를 개혁한다는 구실로 우리 땅을 일본인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일본인 밑에서 일을 하는 소작농으로 변하고 말았다.

〈3분단〉 증언을 통해 들어 보는 일제 침략기의 수난

일제 침략기에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모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영수 할아버지 : 나는 그 당시 중학생이었단다. 어느 날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지. 우리 민족, 우리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욕심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에 말이야. 그 때는 많은 친구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갖은 고생을 하고 목숨을 잃었단다.

철이 할머니 : 일본은 남자들만 전쟁터로 끌고 간 것이 아니란다. 군대에서 여러 가지 일을 시키기 위하여, 여자들까지 전쟁터로 끌고 가서 갖은 고생을 시켰지. 그들 중에도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단다.

〈4분단〉 우리 민족성을 없애려고 한 일제

일본은 우리의 민족성이 뿌리가 깊고 강인한 것을 알고,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서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잘못된 우리 역사

일본은 우리에게, 우리 민족은 항상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허약한 민족이라고 가르치려 하였다.

또, 일본은 우리말과 우리의 자랑스런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쳐서 부르도록 하여 우리의 민족 정신을 없애려 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에 우리 나라 사람을 강제로 참배하게 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섬기도록 강요하였다.

♣ 우리는 우리에게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토론해 보자.

[3] 3⋅1 운동[편집]

3⋅1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후의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자.

우리 겨레의 독립 선언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던 유학생들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1919년 2월 8일, 세계의 움직임을 먼저 알 수 있었던 일본 유학생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문을 일본 정부와 각국 대사관에 전달하였다. 당시, 국내의 종교 지도자들과 젊은 지식인들도 국민들의 마음과 세계 정세의 움직임에 자극되어 온 겨레가 참여하는 독립 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2⋅8 독립 선언은 국내의 이러한 움직임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 단체가 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학생들이 앞장 서서 이끄는 독립 만세 운동을 은밀히 계획하였다. 2천만 동포가 한 목소리로 독립 만세를 부르게 될 그 날은, 3월 1일로 정해졌다.

1919년 3월 1일 아침, 서울에는 흥분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날 아침부터 독립 선언식 소식이 퍼지고, 탑골 공원에서는 일본인들 몰래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천만 동포가 독립을 위해 일어설 것을 호소하는 벽보도 나붙었다.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탑골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일본 경찰과 헌병들에게 잡혀 갔다.

한편, 탑골 공원에 모인 시민,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고는 곧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 청년이 품 속에서 독립 선언서를 꺼내 낭독하였다. 장내는 더욱 엄숙해졌다. 독립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시위 군중은 봇물 터지듯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서울에서의 3⋅1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거리 곳곳에는 독립을 위해 2천만 동포가 다 함께 떨쳐 일어설 것을 재촉하는 글이 나붙었다.

“고종 황제는 일본인의 계략으로 돌아가셨다. 힘이 약한 세계 여러 민족은 스스로 힘을 모아 독립을 얻었다. 2천만 동포여! 우리도 일치 단결하여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자. 고종 황제와 명성 황후의 원한을 씻자.”

모든 시민들이 참여한 만세 운동은 한밤중이 되어도 멈출 줄을 몰랐다.

만세 운동 행렬이 온 서울 거리를 뒤덮자, 당황한 일본은 총칼로 무장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였다. 일본 경찰은 학생과 시민의 맨손 시위를 총칼로써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는, 상점이 문을 닫고 학교는 휴교한 상태에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3월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열기는 서울에서만이 아니였다. 만세 운동은 부산, 평양은 물론 전국의 주요 도시로 퍼져 나갔다.

지방 도시의 만세 시위에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주로 학생과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시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강한 독립 의지를 보여 주었다.

상인들은 상점의 문을 닫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노동자들도 일을 하지 않고 일본에 대항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순에 이르는 동안 전국의 농촌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농민들이 모이는 장터가 곧 만세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처럼, 3⋅1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앞장 서고, 상인, 노동자, 농민,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200여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의 항일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3⋅1 운동의 소식은 곧 국외의 동포들에게도 알려졌다. 간도, 연해주, 하와이 등 우리 겨레가 사는 곳마다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우리 겨레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독립 만세 운동을 막기 위하여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민가와 교회, 학교를 불태웠으며, 심지어는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다

♣ 3⋅1 운동과 관련된 고장의 유적과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조사해 보자.

유관순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을 받았다.

3⋅1 운동을 우리 민족이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하고, 독립 정신을 온 세계에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이리하여 세계는 우리 민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다른 민족의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을 얻으려는 운동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도 큰 감명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들이 우리 나라의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과 비인간적인 행위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독립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펴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한편, 일제도 3⋅1 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만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 문화 발전에 힘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우리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려는 계획일 뿐이었다.

♣ 3⋅1 운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다음은 일제 침략기에 일어난 3⋅1 운동에 대하여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글이다. 두 가지 주장을 읽고, 자신의 의견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하여 보자.

<주장 1>


3⋅1 운동은 매우 성공적인 독립 운동이었다. 일본의 혹독한 억압으로 우리 민족 모두가 움츠러들고 있을 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들이 함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그 마음과 자세, 단결력이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독립 운동을 하여 광복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장 2>


3⋅1 운동은 실패한 독립 운동이었다. 그 뜻은 좋았으나, 총과 칼을 든 일본 경찰들에게 맨손으로 시위를 한 것은 이미 실패할 것이 분명하였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의욕만 앞세운 시위 운동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좀더 조직적으로 온 국민이 무기를 들고 시위를 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이것은 3⋅1 운동 후에 민족 지도자들이 무장 독립 투쟁을 한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2. 다음은 독립군들이 싸움에 임하며 불렀던 노래의 앞부분이다. 이 노래에 당긴 충성심을 생각하며, 자신의 각오를 담은 뒷부분을 지어 보자.

(앞부분)

우린 대한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뒷부분)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독립 전쟁[편집]

[1] 대한 민국 임시 정부[편집]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운 까닭을 조사해 보고, 그 업적을 알아보자.

온 겨레가 하나가 되어 3⋅1 운동을 일으켰으나, 우리 민족은 독립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독립 운동의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장 1 : 온 민족이 함께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3⋅1 독립 운동의 커다란 성과입니다.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우리를 억압할수록 우리는 평화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사실, 그들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무력으로 그들에게 맞서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일본인들이 깨닫게 하여야 합니다.

주장 2 : 안 됩니다. 일본은 우리들의 정당한 요구이며 평화적인 독립 운동을 총칼로 막았습니다. 그들에게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력으로 싸워서 그들을 우리 땅에서 쫓아 내야 합니다. 남녀 노소 모두 각자 무기를 들고 나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웁시다.

주장 3 : 우리 겨레 모두가 단결된 힘을 보여 준 것은 큰 성과입니다. 그러나 국민 각자가 벌이는 평화적인 독립 운동만 하기에는 저들이 너무 지독합니다. 또, 변변치 않은 무기로 저들의 총칼에 대항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독립 운동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 모두의 힘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펴기 위한 방법으로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한 곳에 모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다.

♣ 가장 좋은 독립 운동은 무엇이었겠는지 토의해 보자.

임시 정부의 지도자들은 나라 이름을 ‘대한 민국’이라 정하고, 임시 정부 헌장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헌장(일부)

○ 대한 민국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이다.

○ 대한 민국의 국민이 모두가 평등하다.

○ 대한 민국의 국민은 말을 하거나, 책을 펴내거나, 모임을 갖거나 하는 데 대한 자유를 가진다.

○ 대한 민국의 국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 대한 민국의 국민에게는 교육, 납세, 병역의 의무가 있다.

○ 대한 민국은 임시 정부가 통치한다.

♣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국내나 우리 동포가 많은 간도 지방에 세우지 않고 상하이에 세운 까닭을 알아보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 최고의 독립 운동 기관이었다. 따라서, 나라 안팎의 독립 운동 단체나 민족 지도자들을 통합하여 독립 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외교 활동을 하기 위하여 세계 각지에 연락 기관을 두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의 독립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독립 신문도 만들어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 운동 소식을 전해 주었다.

비밀 연락망을 조직하여 국내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아 내었고, 독립 운동에 필요한 돈을 모으는 등의 방법으로 국내에서도 독립 운동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임시 정부는 비록 해외에 있었지만, 온 겨레의 지지를 받고 모든 동포들에게 우리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중심체가 되었다.

[2] 한인 애국단과 광복군[편집]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들을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영수네 반에서는, 일제하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학생들은 각 분단별로 조사해 온 것을 복사해서 나누어 주고 발표를 하였다.

이봉창 의사

〈1 분단〉

이봉창 의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간 이 의사는, 임시 정부에 있는 김구 선생의 지도를 받아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 운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음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폭탄 2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 국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붙잡힌 이봉창 의사는 죽음을 당하였다.

윤봉길 의사

〈2 분단〉

윤봉길 의사는 충청 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독립 운동가이다. 일본의 억압을 피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윤 의사는, 세탁소 직원, 방직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에 와 있던 일본군들은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봉길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대장부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속에 숨겨 가지고 간 폭탄을 기념식장을 향하여 힘차게 던졌다. 폭탄이 터지자,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여러 중요한 인물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세계의 여러 신문은 용감한 한국인의 소식을 전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에서 순국하였다.

〈느낀 점〉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땅을 지켜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겠다.

발표를 한 후에는 질문을 받고 아는 것을 서로 대답하였다.

동호 :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에 붙인 ‘의사’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민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고 돌아가신 분을 뜻하는 말입니다.

철수 : 한인 애국단이란 어떤 단체인가요?

수한 : 김구 선생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 단체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사람들이 일본의 중요 인물들을 무력으로 처단하려 했던 단체입니다.

선생님 : 3⋅1 운동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한 후에,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무력으로 일본을 혼내 주기 위하여 조선 총독부, 종로 경찰서 등을 공격하거나 높은 지위의 일본인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러한 활동은 우리 민족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제 여러분은 이분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싸우고 있던 독립군을 하나로 모아 광복군을 만들었다. 그러자 일본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우리 청년들도 광복군에 들어왔다.

광복군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힘든 훈련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그러자 임시 정부에서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연락하며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널리 알려지자, 세계의 강대국들도 우리의 독립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온 민족이 나라 안팎에서 힘을 합하여 일본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3] 청산리 대첩[편집]

중국과 연해주에서 일어난 독립 전쟁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특히 그 곳이 우리 나라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까닭을 알아보자.

영수네 선생님께서는 독립군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중국 동북부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특히 두만강 건너의 북간도 지방은 한때 우리 나라에 소속된 땅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더욱 많았지요. 이 땅은 일본이 을사조약 후에 자기네 마음대로 중국에 넘겨 주고 말았어요. 간도 지방과 소련의 연해주에는, 우리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길 무렵부터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의병들과 일본의 억압을 피해 조국을 떠난 애국지사들, 또 살 곳을 찾아 조국을 떠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어요. 따라서, 그 곳 한국인 마을들은 자연히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민족 지도자들이 이 곳에서 자금을 모아 땅을 구입하고 군사 학교를 세운 후, 애국심에 불타는 우리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길러 내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영수네 반 학생들은 선생님께 독립군이 싸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셨다.

우리 독립군은 곳곳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찔렀다. 그 중에서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특히 유명하다.

홍범도 장군은 을사조약 이후, 함경 북도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크게 활약하던 분이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홍범도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그는 자주 독립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와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알아채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일본군은, 더 많은 군대를 만주에 보내어, 그 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면서 그 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독립군을 돕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마구 학살하였다. 이 때, 독립군을 이끌던 사람은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일찍부터 학교를 세워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일을 하였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만주 곳곳에 흩어진 여러 독립군 부대를 모아서 일본군의 총공격에 대비 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수는 3천 명 정도이고, 무기도 일본군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적은 수의 독립군으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처음에는 패하여 달아나는 체하며 일본군 2개 사단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였다.

독립군은 6일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포위하고, 험한 산길을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33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시켜서 격퇴시켰다. 이것이 바로 독립 전쟁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청산리 대첩이다.

이 싸움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후에 안타깝게도 같은 동포인 공산당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애야 한다면서,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또 무자비하게 사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이에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흩어져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마침내 연해주 지역으로 그 터전을 옮기기도 하였다.

영수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싸우던 독립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자랑스럽고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다음 빈 칸에 가로 세로 열쇠의 설명에 맞는 말을 넣어 보자.

[가로 열쇠]

①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군대

② 중국에 세워진 우리 나라의 임시 통치 기관

③ 우리 나라 임시 정부가 세워졌던 중국의 도시

④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곳

⑤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장군

[세로 열쇠]

①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

② 일본이 우리 나라를 통치하려고 만든 기관

③ 일본 왕이 참석한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왕을 죽이려 했던 의사

2. 일제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을 지키고 독립을 되찾으려고 애쓴 독립 운동가의 이야기를 찾아 읽어 보자.

(3) 민족의 실력 양성과 문화 수호 운동[편집]

[1] 학교의 민족 운동[편집]

나라의 힘을 기르고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 겨레는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선생님께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전기문을 읽어 보자고 하셨다.

서점에는 안창호 선생에 대한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다. 영수는 그 중에서 초등 학교 학생들을 위한 책을 골라 읽고,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썼다.

안창호

6학년 ○반 박영수

안창호 선생은 조선 시대 말의 애국자였다. 선생은 당시의 세계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걱정을 많이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청나라가 대국 행세를 해 왔지만, 앞으로는 일본, 러시아, 그 밖의 서양 여러 나라들이 언제 또 대국 행세를 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이 때야말로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힘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나라를 탐내는 나라가 많습니다. 첫째도 힘이고, 둘째도 힘입니다.”

이것은 안창호 선생이 21세 때 청중들 앞에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힘을 기르는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우고 젊은이들을 교육하였다. 안창호 선생이 세운 학교에서는 정해진 과목 이외에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일과 민족성을 바로잡는 일을 교육 방침으로 삼아 민족을 위해 헌신할 인재를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안창호 선생은 우리 민족이 단결하고 독립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흥사단을 조직하였으며,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본 경찰에 잡혀 재판을 받을 때의 일이었다.

“독립 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일본 판사의 물음에 안창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 내가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이고,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내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전기문을 읽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라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점과 국가와 민족을 한없이 사랑한 그분의 정신은, 학생인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이처럼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교육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자 우리 나라의 민족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빨리 깨우치게 하기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라도 공부할 수 있는 야학을 많이 운영하였다. 야학에서 울려 나오는 “가갸 거겨!” 소리는 우리 민족이 독립의 힘을 기르는 희망의 소리였다.

일본은 갖은 핑계를 대고 야학 활동까지 탄압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도 대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뜻있는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인만을 위한 대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일은 일본의 끈질긴 방해와 대학을 세우는 데 쓸 자금 부족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 정신은 보성 전문 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 학교 교육을 통해 민족 운동에 힘쓰신 분들의 활동을 조사해 보자.

[2] 우리 물건 쓰기 운동[편집]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후, 우리 겨레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하여 어 떻게 대항하였는지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의 경제 활동 모습과 비교해 보자.

다음 글은 우리 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벌인 조선 물건 쓰기 운동의 회장 조만식 선생과 기자가 나눈 이야기의 일부이다.

영수네 반에서는 그 내용을 간단한 역할극으로 꾸며 보았다.

기자 : ○○ 일보 기자입니다. 이번에 조선 물건 쓰기 장려회를 만들게 된 까닭에 대하여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조만식 회장 :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우리 민족이 운영하는 회사를 키우고, 우리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애용하는 데 있습니다. 즉, 우리 조선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은 우리 조선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써야 합니다. 이와 같은 노력 없이 어찌 조선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고 조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기자 :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 뜻을 살리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입니까?

조만식 회장 : 첫째, 조선 사람이 하는 산업을 장려하여 민족 기업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둘째,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많이 사서 쓰도록 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그래야만 조선 사람의 기업이 커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조선 사람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더 나아지도록 지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열 계획입니다.

기자 : 감사합니다. 우리 신문에서도 이 사업을 열심히 후원하겠습니다.

3⋅1 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기업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조선 물건 쓰기 운동은 국산품을 애용하고, 근검 절약을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특히, 우리 민족이 만든 물건을 애용하도록 권장하였는데, 그 예로 남자와 여자의 의복을 두루마기와 치마로 정하고, 일본인이 만든 양복은 입지 않기로 하였다.

♣ 조선 물건 쓰기 운동과 오늘날 우리 농산물 먹기 운동을 비교하는 토론회를 열어 보자.

이렇게 하여 조선 물건 쓰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자, 일본은 이 운동을 독립 운동의 한 가지로 보고 강연회 허가를 내주지 않거나 강연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가고, 강연을 듣는 사람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드러내 놓고 탄압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켰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운동은 농촌과 공장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은 땅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우리 농민에게서 많은 농토를 빼앗았다. 그 결과, 우리 농민들은 땅을 잃고 불리한 조건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고, 많은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농민들 중에는 견디다 못하여 살 길을 찾아 만주나 연해주 등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다. 한편, 우리 농민들은 우리 농토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인과 일본에 협조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하여 항거하는 운동을 벌였다.

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올리고 근로 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3] 조선어 학회의 한글 보급[편집]

일본의 침략 속에서 우리 겨레는 한글 보급을 위하여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알아보자.

조선 말기에 우리 한글을 보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분이 주시경 선생이다.

주시경 선생은 독립 신문 발간 일을 하면서 한글 문법과 맞춤법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많은 제자들은 후에 한글 연구의 발전에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우리 민족의 각종 활동을 억압하였다. 즉, 우리 나라 사람이 마음대로 모일 수 없게 하였고, 책이나 신문 발간도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여러 사람에게 마음대로 말을 할 수도 없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한글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3⋅1 운동 이후에는 국어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 한글을 연구하는 단체인 조선어 학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가갸날’이라고 정하고, 해마다 기념식을 올렸다. 그러자 우리 나라의 각 신문사와 출판사들도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연 야학에서도 한글을 열심히 가르쳤다.

조선어 학회에서 무엇보다도 큰 힘을 기울여 추진한 일은 우리말 사전을 펴냄으로써 민적의 얼이 담긴 국어를 보호하려 한 것이었다.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조선어 사전을 펴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리 나라 최초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정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 모두가 한글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어 학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 국내의 각 기관은 물론, 해외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오도록 하였다.

일본은 침략 전쟁을 아시아 각지로 점점 넓혀 가면서, 우리 나라를 전쟁을 위한 기지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더욱 많은 사람과 물자를 전쟁터로 끌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민족 정신을 일깨우고 조선 말과 글을 지키려는 운동을 벌이는 조선어 학회의 활동이 일본으로서는 못마땅하였다.

일본은 마침내 조선어 학회가 독립 운동을 한다는 트집을 잡고, 회원들은 물론 이들과 관계 있는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갔다. 그리고는 모진 고문을 하여 거짓으로 자백을 하도록 만들었다. 고문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조선어 학회는 광복 후까지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일을 꾸준히 이어와서 마침내 우리말 사전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 일본이 조선어 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한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발표해 보자.

[4]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킨 분들[편집]

일제 침략기에 우리 겨레는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일제 침략기 동안 우리 나라 학자들 중에는 우리 역사를 연구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는 내용의 책을 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 과정과 이에 대항하여 싸운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자세히 기록한 책도 있었고, 우리 나라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가르치는 일본의 잘못된 점을 연구한 책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한 노인의 사진을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분은 박은식 선생이십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 대통령까지 하시며 독립 운동을 하신 분이에요.”

“선생님, 전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일제 침략기에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노력도 하셨지요?”

“그래요. 다음 글은 박은식 선생이 쓰신 한국 통사라는 역사책의 머리말이에요.”

한국은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져 문화가 일찍부터 열렸고, 그 백성들은 착하여 천하 사람들이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었다. 역사는 면면히 흘러 4300여 년이나 되었다.

오호라! 옛 문화가 일본에 펴져, 저들(일본)의 음식, 의복, 가옥이 우리에게서 나갔고, 종교와 학술 또한 우리에게서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일찍이 우리를 스승으로 삼아 왔음에도 이제는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 하는가?

………(중략)………

아름다운 산천이여, 우리 조상들이 여기에 살았고, 울창한 산림이여, 우리 조상들이 이를 심었으며, 금, 은, 동, 철도 우리 조상들이 채취했고, 가축과 물고기도 우리 조상들이 길러 왔다. 이 땅의 모든 문명이 다 우리 조상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략)………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져도 민족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은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곧게 남아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한 까닭이다.

우리는 글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윗글로 보아 한국 통사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이분은 어떤 생각으로 한국 통사라는 책을 지었을까?”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박은식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말씀해 주셨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 통사를 통하여 일제 침략기 동안 억압받고 침체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어 민족 정신만은 지키도록 격려하였어요.”

♣ 일제 침략기에 민족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한 분들을 찾아 업적을 조사해 보자.

선생님께서는 일제 침략기에 우리 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신 분들과 그 노력에 대하여 알아보자고 하셨다. 우리 반에서는 각자 조사한 내용을 모아 읽어 보았다.

일제 침략기에 우리 문화를 지킨 노력

우리 민족은 음악, 연극, 영화 등 여러 방면의 예술 활동을 통해서도 우리의 민족 의식을 일깨워 나가는 데에 힘썼다.

시인 윤동주는 빼앗긴 나라를 걱정하는 시를 썼고, 음악가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연극 분야]

토월회라는 극단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연극 단체들이 생겨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농촌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계몽 운동을 하였다.

[영화]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여 민족의 슬픔을 달래고, 일본에 대항하는 정신을 불러일으키며 한국 영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일본이 우리 말과 글을 없애려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 일제 침략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분들을 더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더 공부해 보기[편집]

1. 다음은 일제 침략기 때 야학에서 많이 부르던 노래의 가사이다. 이 노래에 담긴 뜻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귀 있고 못 들으면 귀머거리요, 입 가지고 말 못 하면 벙어리라지.

눈 뜨고 못 보는 글의 소경은, 소경에다 귀머거리, 또 벙어리라.

듣는 대신 보란 글을 보도 못 하니, 귀머거리 아니고 그 무엇이뇨?

말하듯이 써낸 글을 쓰도 못 하니, 벙어리가 아니고 그 무엇이뇨?

2. 일제 침략기에 우리 물건 쓰기 운동을 벌인 것과 관련지어서 다음 중에서 가장 옳은 주장을 선택하고,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 보자.

주장 1 : 우리 나라는 외국에 진 빚이 많다. 매년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서 빚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외국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절대로 외국 물건을 사서는 안 될 것이다.

주장 2 : 무조건 외국 물건을 사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다. 그러나 품질이 좋은 것과 값이 싼 것을 사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또, 우리도 외국에 상품을 수출하기 때문에 세계화가 되어 가는 오늘날, 외국 물건의 사용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주장 3 : 소비자가 값싸고 질이 좋은 물건을 선택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외국 물건만 사 쓰게 되면, 우리 기업이 망하여 결국 우리는 가난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되도록 국산품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3. 다음 인물 중 한 명의 시집을 찾아 읽고, 친구들 앞에서 낭독해 보자.

○ 김소월 ○ 이육사 ○ 한용운 ○ 윤동주 ○ 김영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