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7차 교육과정)/1. 우리 민족과 국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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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봅시다[편집]

유미는 외국에 파견 근무를 나가신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몇 해를 살았다. 그 곳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어린이들과 사귀면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미는 외국의 친구들이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6학년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 유미는 사회 시간에 우리 나라의 역사를 배우게 되었다. 이 시간을 통해 유미는 우리 조상들이 어떤 나라들을 이루었고, 어떻게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아왔는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1) 하나로 뭉친 겨레[편집]

우리 겨레는 최초의 나라 고조선을 세우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이어 통일 신라와 발해를 거치면서 발전해 왔다 우리 겨레가 발전해 온 과정을 역사적 인물과 문화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처음으로 세운 나라 고조선[편집]

●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조사해 보자.[편집]

이 사진에 나타난 것들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 3장의 사진을 보여 주시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옛날에 사용하던 도구예요.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유미가 대답했다.

“맞아요. 선사 시대에 사용했던 도구들이에요. 그런데 이런 도구로 무엇을 했을까요? 또, 이런 도구를 사용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선사 시대란, 글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를 뜻합니다.

선생님의 물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유미네 반 아이들은 그 때의 생활 모습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로 했다.

■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돌을 깨뜨리거나 떼내어 만든 뗀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동굴에서 살면서 열매를 따거나 사냥을 하여 먹을 것을 구했으며, 불을 이용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음식을 익혀 먹었다.

■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도구가 다양해지고 모양이나 쓰임새도 좋아졌다.

돌괭이, 돌보습 등을 사용하여 밭을 갈고 돌낫으로 곡물의 이삭을 따서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다. 하지만,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계속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불에 구운 빗살무늬 토기에 곡물을 쪄 먹거나 식량을 저장하였으며,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등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생산 도구는 더욱 발전하였다. 이전에 사용하던 석기를 더 사용하기 좋게 만든 돌괭이 등으로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심었으며, 반달 돌칼로 추수를 하였다. 그리고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가 있는데, 왜 석기를 농기구로 사용하였을까?

이 시대의 사람들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평야나 하천이 가까운 곳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평등했던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다. 지배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동원해 큰 무덤을 만들었다.

▶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을 그림이나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보자(사회과 탐구 4, 5쪽).

●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어떤 나라였는지 알아보자.[편집]

단군의 건국 이야기

‘하느님(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왔다. 환웅은 이 곳을 신시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이들에게 마늘과 쑥을 주며,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랑이는 이를 이겨 내지 못했으나 곰은 잘 참아 내어 마침내 여인이 되었다. 환웅은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분이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중에서

우리 조상들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 윗글은 고조선의 건국을 알려 주는 단군 이야기이다. 유미네 반에서는 단군 이야기를 읽고, 고조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나중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의 건국 이야기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유미네 반 학생들은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본 후, 고조선과 그 이후에 일어난 나라들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 고조선의 건국
나라를 세운 분 : 단군왕검

나라가 세워진 때 : 기원전 2333년

도읍지 : 아사달

나라를 다스린 정신 :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

■ 고조선의 발달

고조선은 초기에 서쪽의 요령 지방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중국과의 충돌이 있은 뒤에는 그 중심지가 한반도 북서쪽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의 고조선에는 왕 밑에 여러 관직이 있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8개조의 법도 있었다.

8개조의 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 고조선에 뒤이어 일어난 나라들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가 일어났다.

쇠로 만든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이들 나라가 일어날 무렵에는 이미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철을 중심으로 나라 사이에 무역도 이루어졌다.

[2] 힘을 겨루며 성장한 세 나라[편집]

●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성장 과정을 비교해 보자.[편집]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 온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이 낸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주몽의 아들로서, 역시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처음에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를 정복하면서 점차 큰 나라로 성장해 갔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 때, 백제는 근초고왕 때, 그리고 신라는 진흥왕 때에 나라의 힘을 크게 떨쳤다.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와 건국 이야기를 조사해 보고, 이를 간단한 역할극으로 나타내어 보자.
■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서 일어난 나라였는데,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소수림왕 때에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길렀다.

국가로서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만주로 영토를 크게 넓혔고,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였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영토를 크게 넓혔지.

이처럼 강한 나라인 고구려는 계속된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침략을 살수(오늘날의 청천강)에서 물리친 것이나,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물리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백제의 성장과 발전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백제는 넓은 평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북쪽으로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을 모두 통합하여 그 영토를 남해안까지 넓혔으며,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도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경에 고구려의 힘에 밀려 세력이 약해졌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 넘겨주고 금강 유역의 웅진(오늘날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백제는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그 후에 도읍을 사비(오늘날의 부여)로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서울 특별시 석촌동의 돌무지무덤과 부근의 토성들은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지요. 또, 무령왕릉은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였음을 보여 주는 문화재입니다.
■ 신라의 성장과 발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달이 늦었고, 전성기도 삼국 중에 가장 늦게 맞이하였다.

법흥왕은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한 후, 불교를 내세워 왕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진흥왕은 인재 양성을 위해 화랑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신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였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이 한강 유역을 얻기 위해 계속 다툰 까닭은 무엇일까?
▶ 삼국의 각 전성기 때의 왕인 광개토 대왕, 근초고왕, 진흥왕과 각각 가상 대담을 해 보자(사회과 탐구 13, 16, 17쪽).
  • 나라의 발전을 위해 특히 힘을 기울인 일은 무엇입니까?
  • 기억에 남는 전쟁은 어떤 것입니까?
▶ 가야가 큰 나라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에 통합된 까닭에 대하여 알아보자(사회과 탐구 19쪽).

신라가 성장할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작은 나라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가야는 처음에 수로왕이 세운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뛰어난 철기 문화를 일으켰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힘을 잃은 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았으나,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신라에 정복되었다.

이처럼 가야는 큰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야 문화는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삼국 문화의 특징을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조사해 보자.[편집]

삼국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공부한 유미는 컴퓨터 통신망의 가상 공간에서 삼국의 문화 유적을 견학하였다.

나는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국내성(오늘날의 중국 집안) 부근의 고구려 고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무용총이라 불리는 이 고분의 천장에는 커다란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고, 벽면에는 남녀가 춤추는 모습, 무사들이 사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말을 탄 무사들이 활을 쏘며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에서 고구려인들의 씩씩하고 굳센 기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탐방을 마치고, 백제 탐방을 시작합니다. 부여의 중심부에 절터가 있고, 그 중앙에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보입니다. 석탑 앞에 서서 지붕돌을 눈여겨봅니다.

지붕돌의 끝이 살짝 들린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날렵해 보입니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온화함과 섬세함이 이 석탑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백제 문화는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신라 탐방을 시작합니다. 신라의 천년 도읍지였던 경주에서는 가는 곳마다 거대한 왕릉과 석탑, 불상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3층 건물 높이쯤 되는 무덤이 여러 개 모여 있는 유적 앞에 서 있습니다. 무덤의 규모를 크게 만들어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 한 듯합니다.

무덤에서 나온 금관, 금귀걸이 등 여러 가지 공예품이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상들이 하늘을 관측했던 첨성대와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안압지를 둘러본 다음, 골짜기마다 석탑과 불상이 늘어서 있는 남산을 살펴보는 것으로 가상 공간에서의 견학을 끝냈습니다.

[3] 삼국을 통일한 신라,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편집]

● 통일 신라의 발전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경주 남산 기슭에 세워진 통일전에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하류 지역을 얻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계속된 공격으로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신라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을까? 또, 위의 세 역사적 인물들은 삼국 통일을 위해 어떤 일을 하였을까?

▶다음의 역사 지도와 연표를 보고 삼국 통일 과정에 대하며 설명해 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나라의 제도를 바꾸고, 불교를 내세워 백성들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였다. 불교의 발전에는 원효가 큰 공헌을 하였다.

통일 신라는 신라 문화의 전통 위에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 전통을 합하여 찬란한 민족 문화를 이룩하였다.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 대왕 신종과 같은 문화재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보고는 황해 바다를 위협하는 중국의 해적으로부터 신라와 신라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여 신라인의 진취적 기상을 떨쳤다.

통일 신라는 200여 년 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시작되면서 점차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 통일 후 신라의 발전 모습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역사 신문으로 꾸며 보자.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발해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편집]

고구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한데다가 그 뒤에 계속된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게다가 지배층의 세력다툼으로 혼란해져 있던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나라를 잃은 고구려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지 30여 년이 지나서 옛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세워,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를 이어 갔다.

발해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였으나,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 발해의 영토를 옛 고구려 영토와 비교해 보고, 발해 건국의 의의를 생각해 봅시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발해에서도 불교가 융성하였다. 발해의 문화⋅예술은 매우 세련되었는데, 이는 고구려 문화의 특색 위에 당나라 문화의 특색을 더했기 때문이다.

발해 문화의 특징은 수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중경, 동경, 남경, 서경 등 5경 주변의 유적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이어받은 무덤과 기와, 벽돌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선택 학습[편집]

선택 1

삼국의 성장 및 발전과 관계되는 역사적 인물들의 업적을 알아보고, 아래의 기준에 따라 분류해 보자.

역사적 인물들 : 광개토 대왕, 을지문덕, 왕인, 진흥왕, 무열왕, 원효, 김유신, 근초고왕, 아직기
영토를 크게 넓힌 왕
나라를 지킨 장수
문화를 빛낸 인물
선택 2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각각 한 가지씩 정하고, 정한 까닭을 이야기해 보자.

문화재 까닭
고구려
백제
신라
선택 3

내가 고구려나 백제 말기의 왕이었다면,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했을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2) 민족을 다시 통일한 고려[편집]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정치적으로 더욱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고려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면서 뛰어난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려의 발전과 외침 극복 과정을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1] 고려의 건국으로 달라진 정치[편집]

●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안동에는 차전놀이 또는 동채싸움이라고 하는 민속 놀이가 전해 오고 있다. 차전놀이는 통일 신라 말에 고려의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왕 견훤이 안동에서 싸웠던 모습을 놀이로 꾸민 것인데, 왕건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여러 개의 커다란 들것을 만들어 타고 견훤의 군대를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한다.

귀족들의 왕위다툼으로 신라 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고 이어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우리 나라가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로 나누어진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한다.

궁예는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가혹한 정치로 민심을 잃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덕이 높고 지혜로운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라를 계속 공격하였고, 고려와 충돌하였다.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크게 패한 일도 있었으나, 마침내 신라를 합치고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셋으로 나뉘었던 우리 민족을 다시 통일하였다.

▶ 궁예, 견훤, 왕건의 세 역사적 인물을 예로 들어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인품에 대하여 토의해 보자(사회과 탐구 30쪽).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세금을 줄이고, 지방 세력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진 정책을 펼쳤다.

고려의 이러한 정책으로, 발해가 망한 후에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로 모여들었다.

● 통일 신라에 비하여 고려는 어떤 점이 발전했는지 알아보자.[편집]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뜻은 후대의 왕들에게도 이어져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제가 실시되었고, 지방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지방의 학교를 통해 유학이 널리 보급되었다.

뛰어난 유학자로 높은 관직에 오른 최승로는 임금에게 정치 개혁안인 ‘시무 28조’를 올렸다.

▶ 최승로의 정치 개혁안인 ‘시무 28조’를 찾아 읽고 최승로가 바라는 바른 정치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어 보자(사회과 탐구 32쪽).
▶ 고려의 대외 관계와 무역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였으나 송과는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다. 특히, 바닷길을 이용한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다.

또, 일본과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이 때에는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가 무역의 중심지였고, 개경에는 수백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무역 활동을 하였다.

고려는 주로 바다를 이용하여 송나라, 일본 등과 무역을 하였구나.

고려는 송나라에 금, 은, 구리, 인삼, 종이, 나전 칠기, 화문석 등을 수출하였고, 책, 약재, 비단 등을 수입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의 이름을 서양에 전한 것이 오늘날 우리 나라가 코리아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2] 역경을 이겨 내며 꽃피운 고려 문화[편집]

●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알아보자.[편집]

일요일에 유미는 부모님과 함께 낙성대를 찾아가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이 곳에서 태어난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고려 시대에는 외적의 침략이 많았나요?”

“그랬지. 특히, 북방 민족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단다. 고려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힘을 모아 이겨 냈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유미는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먼저, 유미는 국사 연표에서 고려가 겪은 외침과 고려의 항쟁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 서희의 외교 담판

고려가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자 거란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거란 군대가 청천강까지 공격해 오자, 서희는 당당하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땅이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군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한 것으로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다.

서희의 정당한 주장을 들은 소손녕은, 마침 식량이 떨어지기도 한 참이라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고려의 영토를 인정하고 대군을 돌려 물러갔습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

서희의 외교 담판이 있은 지 20여 년 후, 힘이 더욱 강해진 거란이 고려를 세 번째로 침입해 왔다

거란의 10만 대군을 막기 위해 압록강으로 출전한 강감찬 장군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조금씩 후퇴를 하였다.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계속 돌진해 왔다.

개경 가까이 온 거란군은 그제야 고려군의 작전을 눈치채고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거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후퇴하는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10만 명의 군사 중에 살아서 돌아간 거란의 군사는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잘 막아 낸 고려는 여기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치⋅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 윤관의 여진 정벌

고려와 송나라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을 때, 여진족이 또 다시 고려를 괴롭혔다.

여진족은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들은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말이나 모피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옷감, 농기구 등으로 바꾸어 갔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자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였고, 결국 고려와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게 하였다. 윤관은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물리치고 그 곳에 9성을 쌓았다.

여진족을 무찌른 윤관(가상 대담)

기자 : 여진족을 이기게 된 큰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윤관 : 훈련받은 기병이 있어 기동력이 우수하였고, 우리 군사들이 모두 열심히 싸웠기 때문입니다.

기자 : 왜 기병을 훈련시킬 생각을 하셨나요?

윤관 : 여진족의 군대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중심이었으므로 기병 없이 는 고려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 9성을 쌓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윤관 : 여진족이 다시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 함경도 지역이 고려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자 : 그런데 왜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9성을 돌려주었나요?

윤관 : 살 곳을 잃은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돌려 달라고 간청하여 나라에서 돌려주었습니다.

■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중국을 정복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유럽의 일부까지 지배했던 몽고가 고려를 침략해 왔다. 압록강을 건넌 몽고군은 귀주성이 무너지지 않자, 귀주성을 내버려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려의 군대와 백성들은 힘을 합쳐 몽고군에 맞서 싸웠다. 충주성이 몽고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 내자, 몽고군은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고려와 타협하고 물러갔다. 이 때, 고려는 계속 몽고와 싸우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몽고는 다시 쳐들어왔지만 처인성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갔으며, 세 번째 침략 때에도 죽주성에서 패하고 물러갔다.

그 후에도 몽고는 계속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려는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고려는 약 40년간의 항쟁을 끝으로 몽고와 강화하였고, 이후 몽고의 간섭을 받았다.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고려는 자주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하여, 공민왕 때에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까닭을 당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해 보자(사회과 탐구 36 쪽).

고려가 승리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 장군
고려의 병사
백성들
적군(거란, 여진, 몽고)의 병사

● 고려의 문화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편집]

고려 시대에도 신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나라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승려들은 왕실의 고문 역할을 하였고, 대각국사 의천과 같이 왕자이면서 승려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불교는 고려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몽고의 침략을 막으려는 소망으로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다. 팔만대장경판은 글자의 모양이 고르고 아름다워 일찍부터 발달한 우리 나라의 목판 인쇄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그 규모와 보존 기술도 세계 최고의 솜씨로 인정받고 있다.

목판 인쇄술에서 뛰어난 문화 유산을 남긴 우리 조상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였다.

1972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은 세계 여러 나라의 책을 전시하였다. 여기에 금속 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책이 전시되었는데, 이 책은 고려 시대에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당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를 만든 나라가 독일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독일보다 약 70년 앞서서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한다.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고려청자라고 하는 찬란한 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투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선의 흐름이 부드러우면서도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실물이나 사진을 통하여 감상해 보고, 그 느낌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옛 시인의 느낌과 비교하며 보자(사회과 탐구 40쪽).
푸르게 빛나는 옥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한번 보는 내 눈조차

맑아지는 것 같아라.

목은 이색

선택 학습[편집]

선택 1

고려 시대에 관한 낱말 맞히기를 해 보자.

○ 가로 열쇠

②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뽑는 제도

④ 후고구려를 세웠으나 가혹한 정치로 민심을 잃은 사람

⑥ 차전놀이가 전해 내려오는 지역

⑨ 귀주에서 외적을 물리친 장군

⑩ 고려를 세운 사람

⑪ 고려가 친하게 지낸 나라

○ 세로 열쇠

① 후백제를 세운 사람

③ 고려를 자주 침입한 북방 민족

⑤ 벽란도가 있는 강

⑦ 차전놀이의 다른 말. ○○싸움

⑧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에 자주 운동을 한 고려의 왕

선택 2

고려의 문화재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고려의 문화를 소개하는 홍보 책자를 만들어 보자.

선택 3

고려 시대 위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 중의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보자.

(3)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편집]

우리 조상들은 조선을 건국하고 민족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으나, 거듭되는 외침으로 시련을 겪었다. 조선의 정치⋅문화적 발전이 백성들의 생활 모습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이 두 차례의 전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알아보자.

[1] 정치 개혁으로 새로운 나라를[편집]

● 조선이 건국된 후에 실시한 여러 정책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조선을 세운 사람은 태조 이성계이다. 이성계는 고려 말에 우리 나라를 침범해 온 홍건적과 왜구를 무찔러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이성계를 따르는 사람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요동 땅을 정벌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를 위화도에서 되돌려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반대파를 물리치고 새 나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모습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한양은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육로 교통과 수로 교통이 모두 편리하고, 한반도의 중앙에 있어서 새로운 중심지가 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새 왕조는 한양 둘레에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경복궁, 종묘, 관청, 시장, 학교 등을 세웠다. 한양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에 여러 개의 다리를 놓고 사방으로 길을 내었으며, 많은 민가가 들어서도록 하였다. 이후 500여 년 동안 한양은 조선 왕조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 한양을 둘러싼 성곽의 4대문과 궁궐의 위치를 찾아보자.
4대문의 이름
  • 동 : 흥인지문
  • 서 : 돈의문
  • 남 : 숭례문
  • 북 : 숙정문

조선 왕조는 유교의 정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유교에서는, 왕은 정치를 잘 하기 위해 충직하고 현명한 신하의 바른말에 귀 기울이고, 나랏일을 맡은 관리들은 오직 의로움을 따져 행하며 사리사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양반과 선비들은 바른 행실로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는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유교 정치의 가르침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조선 왕조는 정치⋅경제⋅사회 제도를 정비하였다.

▶ 그림을 보고, 유교 정신이 추구하는 정치와 백성들의 생활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한편, 새 왕조는 영토 확장과 국방 강화에 힘썼다. 태종은 압록강 이남 지역에까지 백성을 이주시켜 이 지역을 개발하였다.

백성을 압록강 이남 지역에 이주시키는 일은 이후 세종, 세조, 성종 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 때에는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들어와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 내고, 이 지역에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

조선은 고려 말 이후로 우리 나라 해안 지역을 계속 침입하는 왜구(일본 해적)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세종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이종무를 대장으로 하는 원정군을 보내어,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그 후 평화적인 교역을 원하는 일본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해안의 세 항구를 열어 무역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곳으로 구리, 황 등을 가져와 곡물, 옷감, 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부산에는 일본 사신들이 머무르는 곳이 있었구나.

● 조선이 세워진 후, 백성들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편집]

조선 왕조의 새로운 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나라와 지방, 고을의 살림 모두를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가 법에 따라 처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을 기록한 책인 ‘경국대전’을 만들었다. 재산 상속, 토지나 집의 매매, 혼인까지도 나라가 정한 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리고 16세 이상의 남자들은 신분 증명패인 ‘호패’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했다.

경국대전을 만든 세조(가상 대담)

▶ 경국대전을 만드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세조 : 중국 법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맞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 고려 시대의 법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세조 : 고려 시대의 법은 죄인을 다스리는 내용이 중심이었으나, 경국대전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본 규범을 담은 종합적인 법이지요.

▶ 법률 제정 과정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입니까?

세조 :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법률을 만들었지요. 또, 백성의 권리와 의무를 밝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격히 벌을 주어 모두가 잘 살도록 했습니다.

또, 유교가 국가 통치의 근본이 됨에 따라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유교 경전을 잘 알아야 했으며, 백성들도 유교의 가르침에 맞게 살아야 했다. 백성들은 오랜 기간 불교와 민간 신앙을 믿으며 생활했기 때문에 유교의 가르침이 백성들 사이에 생활화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 예절과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오륜의 다섯째 내용을 알아보고, 빈 칸에 어떤 내용의 그림을 그려야 할지 말해 보자.

삼강

•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오륜

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②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③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④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⑤ []

[2] 문화의 발달과 백성들의 생활 모습[편집]

● 조선 초기의 문화와 과학 기술의 발달이 백성들의 생활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세종 대왕은 한글을 만들어 우리 민족 문화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세종 대왕의 여러 가지 업적은, 조선 초기의 개혁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종 대왕은 정치⋅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집현전의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 학문과 우리글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세종 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만들었는데, 훈민정음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고, 뜻을 알아야만 쓸 수 있는 한자보다 익히기가 훨씬 쉬웠다.

이처럼,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우리말을 중국 문자로 표현하는 불편을 없애고 우리 문화의 자주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쓴 여러 종류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양반들보다는 평민과 부녀자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 대왕(가상 대담)

▶ 훈민정음을 만드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세종 대왕 : 무엇보다 우리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익히기가 어려워서 백성들이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지요.

▶ 훈민정음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세종 대왕 : 한자와는 달리 모든 소리를 소리나는 대로 적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 훈민정음 사용을 반대하는 소리도 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종 대왕 : 아마 중국 문화에 너무 깊이 젖어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글이 필요했지요.

▶ 훈민정음은 당시 백성들의 생활과 우리 나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사하여 보자.
세종 대왕은 연구를 열심히 하였으며, 집현전 학자들이 근심 없이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습니다.

조선은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농사를 장려했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에 힘입어 농업 기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농업의 과학화를 이룰 수 있는 많은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났고, 농민들의 살림이 전보다 넉넉해졌다.

농사에 도움이 되는 책의 간행과 과학 기구의 발명은 주로 세종 대왕 때에 집현전 학자들과 장영실 같은 과학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노력으로 물시계(자격루), 해시계(앙부일구), 측우기와 간의,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구 및 달력이 만들어졌고, 이것들은 백성들의 일상 생활과 농사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연구한 책인 ‘농사직설’이 보급되어 지역에 적합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 농민들의 생활 모습을 바꾼 ‘농사직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농민들이 1년 동안 농사짓는 모습을 살펴보자.
음력
1월 농기구를 정리하고 소를 길러 거름을 만들어, 밤이면 새끼를 꼰다.
2월 물길을 정리하고 밭을 간다.
3월 도량을 막아 물을 대고, 모판을 만들어 날마다 살펴본다.
4월 목화를 많이 심고 수수, 녹두 참깨도 심으며, 퇴비로 쓸 풀도 벤다.
5월 문 앞의 터를 닦고 낫을 손질한다. 보리를 추수하고 나면 집안이 풍성하다.
6월 밀과 콩, 그리고 팥과 조, 수수도 가꾼다.
7월 김매기에 열중하고, 퇴비로 쓸 풀을 많이 베어 쌓아 놓는다.
8월 온갖 곡식의 이삭이 나온다. 마당 안팎을 닦아 놓고 목화도 한 아름 딴다.
9월 추수가 급하다. 벼 타작이 끝난 후에는 틈을 내어 콩밭도 돌본다.
10월 무, 배추를 뽑아서 김장을 준비한다.
11월 벼의 일부를 볍씨로 남긴다. 땅값과 품삯도 갚아야 한다.
12월 떡쌀은 몇 말이요, 술쌀은 몇 말인지. 건강에 유의하라.

● 조선 시대의 양반과 상민의 생활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사람과 나귀 위에서 여유 있는 모습으로 인사를 받는 사람이 등장하는 윗그림에는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각 어떤 신분을 가졌을까?

조선 시대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신분에 따라 가지게 되는 권리와 의무가 달랐다. 양반은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중인은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였다. 상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였는데,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가장 많았다. 천민에는 ‘종’이라고 불린 노비들과 천하게 여겼던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다.

양반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랏일에 참여하였다. 관리가 되지 않은 양반은 글공부를 주로 하였고, 자기 땅의 농사는 노비와 소작농에게 맡겼다.

양반은 유교를 숭상하여 충효를 중시하였고, ‘사서삼경’이라 불리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거나 시짓기, 활쏘기 등을 하였다. 이러한 양반들 중에 학식과 인품이 높은 사람을 선비라 불렀다.

▶ 다음 그림들을 통해 조선 시대 선비의 생활을 생각해 보고, 그 때의 선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하루의 생활을 일기로 써 보자.

상민 중에서 농민은 조선 시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는 등 나라를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벼슬을 할 수 있는 길도 거의 막혀 있었다.

많은 농민이 조그마한 자기 땅이나 지주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땅을 많이 가진 부유한 농민의 수는 적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도 상민 신분이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상인으로는 서울의 시전에서 관청과 일반 백성의 필수품을 판매하는 시전 상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수공업 제품과 생활필수품 등을 파는 보부상이 있었다. 이들은 상업 활동을 하는 대가로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 주거나 나랏일에 동원될 의무가 있었다. 한편, 수공업자는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3] 두 차례의 전란 극복[편집]

●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이겨 냈는지 조사해 보자.[편집]

어느 날, 적의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방송을 듣게 된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놀랄까?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어느 날, 한양의 백성들은 남산 봉수대에서 평소와는 달리 다섯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파발마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왜적이 쳐들어온다.”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설마 하는 눈치였다.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무너뜨리면서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다. 우리 군대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여기저기서 패하고 말았다.

▶ 오른쪽 글을 읽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의 우리 나라 정세에 대하여 토의해 보자.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 일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왜구는 우리 나라 해안 지역을 자주 침범했으나, 조선은 그 때마다 이들을 물리쳤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율곡은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것을 염려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 대비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 일본은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나자 그 동안에 길러진 군사력을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왜군이 한양 부근까지 밀려오자,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피란하였고, 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바다에서는 경상도 해안을 지키던 우리 수군이 패하였으나,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선을 정비해 두었기 때문에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 바다 해전에서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몇 차례의 해전에서 진 일본 수군이 모든 함대를 모아 총공격에 나서자,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함대를 배치하는 진법을 폈다. 포위당한 왜군은 많은 군사와 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해전이 한산도 대첩이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은 물론, 거북선과 화포 등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바다에서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육지에서도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왜군과 독자적으로 전투를 하거나,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관군을 도왔다.

의병들은 10여 명에서부터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에 차이가 있었지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은 한결같았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였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 의해 보급로가 끊기고, 육지에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관군에 패하자, 왜군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었다. 이리하여 일본과의 전쟁은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고 다시 외교를 하자고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이 요청하는 학문과 기술, 그리고 문화를 전해 주었다.

▶ 인원도 적고 무기도 충분하지 못하였던 의병들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보자(사회과 탐구 58쪽).

● 병자호란과 북벌 정책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인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개입하여 그들의 힘을 조선에 쏟는 동안, 이번에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후금이라는 나라를 일으켰다.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왔다가 곧 물러갔다.

그 후,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을 야만족이라고 멸시해 왔던 조선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나라는 다시 조선에 쳐들어왔는데,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또 다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조는 한양이 청군에 점령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하였으나,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 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효종이다.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고,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북벌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청나라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어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 효종의 북벌 정책을 다음 인물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보자.

선택 학습[편집]

선택 1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선 시대의 유교적 전통을 찾아보고, 그것에 담긴 유교의 가르침을 써 보자.

예) 조상님께 제사를 지낸다. →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선택 2

다음 그림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의 행렬도이다. 만일 지금 내가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통신사로 간다면, 우리 나라의 무엇을 전해 주고 그 나라의 무엇을 받아들여 올 것인지 이야기해 보자.

선택 3

만일 내가 태조 이성계 때에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관료였다면 새로운 나라를 위하여 어떤 정책을 왕에게 건의했을지 시무책의 형식으로 써 보자.

시무 ○조

전하! 신 ○○○는(은) 삼가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지금 나라의 사정은…….

따라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아뢰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받아들이소서.

첫째, …….

둘째, …….

신하 ○○○

단원 정리 학습[편집]

1. 무엇을 배웠나요?

활동 : 우리 민족은 선사 시대 이래 다음과 같은 나라들을 세우면서 발전해 왔다. 이 단원에서 배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나라 고조선 삼국 시대 통일 신라와 발해 고려 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나라를 세운 사람
도읍지
문화재
2. 재미있어요!

활동 : 다음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전투에 참가한 모습을 나타낸 민족 기록화이다. 내가 그 전투에 참가한 의병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싸웠는지 글로 써 보자.

3. 우리 힘으로 해결해요

활동 1 : 다음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다. 도구가 발달함에 따라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써 보자.

예)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을 것이다.

활동 2 : 다음은 고려 시대에 최승로가 올린 정치 개혁안인 ‘시무 28조’의 일부이다. 이 중에서 오늘날에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조항을 찾아보고, 그 까닭에 대하여 말해 보자.

  • 임금은 체통을 지켜야 한다.
  • 지방 호족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례가 많으니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 관리의 의복과 백성의 의복을 달리 해야 한다.
  •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는 중국의 것을 따른다.
  • 국가의 큰 행사는 백성의 부담이 크므로 삼간다.
  • 임금이 성실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큰 위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관리를 공정히 선발한다.
  • 궁중에는 꼭 필요한 만큼의 노비와 말만 둔다.
  • 양인과 천인의 구별을 뚜렷이 하여 미천한 자가 윗사람을 모욕하지 못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