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1 (7차 교육과정)/2. 근대 사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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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봅시다[편집]

무역 회사에 다니시는 진수 아버지께서는 가끔 외국 손님을 모시고 집에 오신다. 그럴 때면 진수네 가족은 한복을 입고, 김치나 불고기 같은 음식을 대접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외국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놓는다.

진수는 우리 생활 속에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서양의 생활 방식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였다. 언제부터 우리가 서양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것일까?

진수는 사회 시간에 우리가 서양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지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진수는 우리 나라가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변화해 온 과정과 우리 문화를 이어 온 과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

(1) 새로운 사회로의 움직임[편집]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조선 후기의 서민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농사 기술, 문화, 예술, 종교 등의 측면에서 조사해 보자.

[1] 사회 변화를 위한 서민들의 노력[편집]

● 조선 후기의 농업과 상업의 변화 모습을 알아보자.[편집]

조선은 서민의 대다수가 농민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였다. 위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킨 농사법인 모내기법을 나타낸 것이다.

모내기법이 발달하면서 농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모내기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왜란과 호란,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백성들의 생활 터전인 농촌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다. 나라와 백성들은 농촌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라에서는 농토를 늘리고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를 만들었고, 농민들은 개량된 여러 가지 농사법을 실천해 보는 등 좁은 땅에서 다양한 작물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자 개량에도 힘써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들이 새로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 모내기법과 골뿌림법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까닭은 무엇인지 조사해 보자(사회과 탐구 66쪽).
▶ 다음 자료들을 통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농사 모습을 살펴보자.
1770년대 말 5월, 이병모가 말하였다. “‘직파법’으로 불과 10두락의 농사를 짓던 사람이 ‘모내기법’으로 하면 족히 40두락의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같은 힘으로 많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넓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경작할 토지조차 얻기 어려워 근심하고 있습니다.”

안정복의 ‘일성록’ 중에서

  • 윗글은 어떤 농사법을 나타내고 있는지 말해 보자.
  • 윗글에 나타난 농사법에서 어떤 문제점이 생겼는지 찾아보자.
두락이란, ‘마지기’라고도 하며, 한 말의 씨앗을 뿌려 농사짓는 땅을 말합니다.
서울 부근과 각 지방 대도시 주변의 파밭, 마늘밭, 오이밭에서는 10무(4두락)의 땅으로 수백 냥을 번다. 서북 지방의 담배밭, 관북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은 논농사가 가장 잘 되었을 때의 벌이와 비교하더라도 그 이익이 열 배나 된다. 요즈음은 인삼도 모두 밭에서 재배하는데, 이익이 수십만 냥이나 된다고 하니 토지의 질이 문제가 아니다. 약재 재배도 이익이 매우 많다. 목화벌이만이 쌀농사에 비해 이익이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 중애서

  • 윗글에서 당시에 재배한 농작물들을 찾아보자.
  • 윗글은 어떤 농사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 말하여 보자.

조선 후기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공업자들이 관청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생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들 수공업자로부터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 제품을 사들인 후 나라에 팔아 이익을 얻거나,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도매업을 하는 등 커다란 규모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커다란 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청⋅일본과도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무역상 중에서는 ‘송상’이라 불린 개성 상인들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상업의 발달로 전국적으로 시장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물건을 교환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금속 화폐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 금속 화폐의 발달은 당시 서민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토의해 보자.

● 조선 후기의 서민 문화를 살펴보자.[편집]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서민들은 차츰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그림, 시조, 소설 등의 예술 활동이 주로 양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서민이란, 양반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일반 평민을 뜻합니다.
양반과 서민의 예술⋅문화 활동은 어떻게 달랐을까?

서민들이 즐겼던 문화⋅예술에는 판소리, 탈놀이, 민화 등이 있다.

놀부놈의 거동 봐라. 지리산 몽둥이를 번쩍 들고, 네 이놈, 흥부놈아. 잘사는 것도 네 복이요, 못사는 것도 네 팔자니라. 굶고 먹는 것 내 모른다. 볏섬 내준다 한들 마당의 뒤주 안에 들었으니 너 주자고 뒤주 헐며, 싸래기 주자고 하면, 황계, 백계 수백 마리가 턱턱하고 꼬꼬 우니 너 주자고 닭 굶기랴. 몽둥이를 둘러메고, 네 이놈 강도 놈. 좁은 골 벼락치듯……,

담에 걸린 구렁이 치듯 후다닥 철퍽. 아이고, 박 터졌소. 이놈, 후다닥. 아이고, 다리 부러졌소, 형님.

▶ 위의 내용은 놀부와 형님 집에 먹을 것을 얻으러 온 흥부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담은 ‘흥부가’의 한 대목이다. 위의 내용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 놀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 당시의 서민들은 위의 내용을 듣고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겠는가?
말뚝이 : 쉬이! 양반 나가신다, 양반! 덩덩 덩더러쿵.(장단에 맞추어 양반 3형제를 인도하여 등장한다.)

쉬이, 양반이라고 하니까, 삼정승 육판서를 다 지내시고 물러나와 계신, 아 이런 양반인 줄 아시지들 마시오. 개잘량이라고 하는 ‘량(양)’자에 개다리소반 ‘반’자를 쓰는, 아 이런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들 : 뭐라고? 무엇이 어쩌고 어째?

말뚝이 : 아하하! 아따, 이 양반, 어찌 듣는지 모르겠소. 삼정승 육판서를 다 지내시고 물러나와 계신, 아 이 생원네 3형제분이 나오신다고 그리하였소.

양반들 : 이 생원이라네.(어색하게 춤을 춘다.)

개잘량이란, 개나 고양이 털로 만든 탈로서, ‘동래 야유’라는 탈놀이에 나오는 탈, 또는 그 탈을 쓴 사람을 말합니다.
▶ 위의 내용은 봉산 탈춤 중에서 양반춤의 한 대목이다. 위의 내용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 말뚝이가 양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 양반들은 말뚝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 위에 제시한 그림을 잘 살펴보고,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 까치와 호랑이, 봉황, 화조(꽃과 새)는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 서민들은 어떤 목적으로 그림을 샀을까?

[2] 잘사는 백성, 부강한 나라로[편집]

● 실학의 뜻과 생겨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편집]

옛날 우리 조상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어려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장을 내세웠으며, 연구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백성들이 잘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연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하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을 실학자라고 한다.

▶ 조선 시대 실학자들의 주장과 오늘날 학자의 주장을 비교하여 보고,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 백성들을 잘살게 하려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주고, 아무도 그 땅을 함부로 팔거나 사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 이젠 농사만 잘 지어서는 안 됩니다. 장사도 하고 외국과 무역도 해야 합니다.

〈1800년대 어느 실학자의 주장〉

외국에서 빌려 쓴 외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은 사치와 낭비를 자제해야 합니다. 또, 기업은 이익이 많이 남는 제품을 수출해야 합니다. 정부는 수출을 많이 하려는 기업을 위해 여러 가지 지원을 해 주어야 합니다.

〈2000년대 어느 학자의 주장〉

■ 실학이 생겨난 배경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치가 문란해지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론과 학설에 치우쳐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실학자들은 당시의 학문이 백성들의 삶에서 멀어진 것을 염려하고 비판하면서, 실제로 백성들이 잘살도록 하고, 또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 실학자들은,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실학자들의 주장과 활동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해 보자.[편집]

실학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개혁을 주장하였다.

내가 당시의 실학자였다면 어떤 주장을 했을까?
(생략) 청나라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들은 기술을 실생활에 이용하여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들을 초청하여 청년들이 천체의 움직임이나 각종 도량 형기, 농업과 양잠, 의약, 가뭄과 수해 등에 관한 내용, 벽돌을 만들어 성이나 다리를 쌓는 방법, 구리 등 광석을 캐는 방법, 대포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게 합시다.(생략)

박제가의 ‘북학의’ 중에서

무릇 땅덩어리는 하루에 한 번씩 돈다. 지구의 둘레는 9만 리, 하루는 12시각이다.

9만 리의 큰 땅덩어리가 12시각에 맞추어 움직이면 빠르기가 번개나 포탄보다 더하다

홍대용의 ‘의산문답’ 중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루를 12시각으로 나누었습니다.

중국을 다녀온 실학자 박제가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 실학자 홍대용은 지동설을 주장하는 등 서양의 근대적인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김정호는 직접 해안을 걸어다니고 높은 산에 오르며 우리 나라 지도를 완성하였는데, 이 지도는 과학적인 측량 방법을 이용하여 만든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정확하고 산맥, 하천, 도로망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정약용은 실학 연구를 집대성하였다. 그는 과학 기술이 백성들을 보다 잘살게 하는 데에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학의 연구로 얻은 새로운 기술로 화성을 설계하였고, 거중기를 만들어 빠른 시일 안에 성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잘못된 점을 짚어 내면서 관리들은 백성을 위해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실학자들은 어떤 주장을 했을까?

이처럼 실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연구하여 실용적인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의 반대로 정치 개혁안은 국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3] 복을 빌고, 평등한 세상을 바라고[편집]

● 조선 후기에 민간 신앙이 성행하였던 까닭을 알아보자.[편집]

두메 산골의 백성들은 화전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자르느라 열 손가락이 모두 무지러지고, 해진 솜옷을 10년 넘게 입고 있었습니다. 집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고, 연기에 그을리고 흙으로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어진 주발에 밥을 담았으며, 소금도 치지 않은 나물이 반찬이었습니다. 부엌에는 나무 숟가락과 물동이만 있어 그 까닭을 물어 보니, 쇠가마와 놋숟가락은 빌린 쌀 대신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박제가의 ‘북학의’ 중에서

윗글은 조선 후기에 화전민이 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떠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또,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해가 계속되고 전염병마저 돌아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나 나라는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해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 지방 관리들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았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가난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농민들은 무엇인가에 빌고 의지하여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마을 뒷산의 큰 나무나 바위에 빌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등 세상이 살기 좋게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민간 신앙에 의지하게 되었다.

▶ 백성들 사이에 민간 신앙이 이전보다 성행한 까닭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 천주교와 동학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까닭을 알아보자.[편집]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퍼졌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서양 학문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조 때에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신앙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신앙 활동이 상민이나 부녀자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상민이 양반과 함께 한 교회 안에서 평등한 지위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다.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수가 빠르게 늘어나, 철종 때에는 2만여 명에 이르렀다.

▶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까닭은 무엇인지 토의하여 보자.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순조 때에는 나라에서 법으로 천주교를 금하였다. 천주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내려진 후, 천주교를 믿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가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 다음 그림을 보고,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한 까닭이 무엇인지 토의하여 보자.
186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경상도 어느 고을의 한 농가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농민이 대부분이었지만 양반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양반과 농민들이 서로 높임말을 쓰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 집에 모인 사람들은 책을 읽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모임은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집회였다.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져 교도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집안이 기울어진 양반도 있었지만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동학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에서는 동학을 금하고, 동학 교주인 최제우와 제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이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노력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여러 도인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세상은 너무 혼란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있습니다. 인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 속의 한울님을 섬기십시오. 서학(천주교)도 하늘의 뜻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동학을 믿어야 합니다.

〈동경대전〉

사람이 곧 하늘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하고 천함을 나누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모든 차별을 없애고 스승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최시형의 법설〉

역사 신문

동학 교주 최제우 체포되다!

1863년 11월, 경상도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2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속인 죄가 적용될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서는 ‘인내천’과 ‘후천 개벽’ 사상을 내세우는 등 사실상 신분제를 부정하고 나라에 도전하는 측면이 있어서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어 체포했다고 한다. 현재, 동학은 교도의 수가 날로 늘어 각 지방에 13개의 접소를 두고 3천여 신도를 거느린 큰 종교 조직으로 성장해 있다.

‘후천 개벽’이란, 지금의 세상은 운이 다해서 끝나고, 백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뜻입니다. 후천 개벽 사상은 현세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동학을 믿은 까닭과 동학을 믿은 사람들 중에 농민이 많았던 까닭은 무엇인지 이야기하여 보자(사회과 탐구 83쪽).

선택 학습[편집]

선택 1

조선 후기에 나타난 사회 변화를 경제⋅문화⋅종교면에서 정리해 보자.

경제 문화 종교
선택 2

다음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생각해 보자.

  • 그림에 어울리는 제목을 붙여 보자.
  •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 이 그림의 상황을 짧은 역할극으로 나타내어 보자.
선택 3

실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서 관심 있는 주제를 선정하여, 실학에 관한 역사 신문을 만들어 보자.

(2) 외세의 침략과 우리 민족의 대응[편집]

130여 년 전, 우리 나라는 서양 세력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휘말리는 위기에 처하였다. 이들한테 나라를 개방한 이후 우리 나라에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화를 그 때의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1] 척화비를 세운 까닭[편집]

● 흥선 대원군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자.[편집]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나라 안은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둘러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하였고, 나라 밖으로는 ‘이양선’이라 불린 서양 배들이 나타나 무역을 하자며 위협하였다. 이 시기에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 흥선 대원군의 생애와 업적을 조사한 후 연표를 만들고, 흥선 대원군과의 가상 대담 활동을 해 보자.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흥선 대원군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인재를 고루 뽑아 썼으며, 붕당의 근거지이고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였다. 또, 의복을 간소화하였으며, 양반도 세금을 내게 하여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 공사에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고, 세금도 많이 거두어들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였는지 알아보자.[편집]

이양선의 출현과 함께 서양인들이 조선에 찾아와 장사를 하자고 요구하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그들은 처음에는 식량이나 물을 요구하였으나 점차 무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서양인들은 군함을 앞세우고 침략해 왔다. 당시 흥선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조정은 서양인들의 침략에 강력하게 대응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라의 힘이 강해진 다음에 해도 늦진 않을 것이오.
▶ 이양선이 해안에 나타나 나라가 어수선하였던 때, 대외 정책을 결정하는 조정 회의를 역할극으로 꾸며 보자.

• 등장 인물 : 고종, 흥선 대원군, 신하 1, 신하 2

병인양요

병인년(1866)에 강화도에서 프랑스 함대와 우리 군대가 출동한 사건을 병인양요라 합니다.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면서 프랑스 신부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쳐들어와 한 달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빼앗아 갔다. 그러나 양헌수를 중심으로 한 우리 군대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용감히 싸워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다.

신미양요

신미년(1871)에 강화도에서 미국 군함과 우리 군대가 충돌한 사건을 신미양요라 합니다.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의 군민과 충돌하여 불태워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미국은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미군은 초지진 등을 점령하였으나,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마침내 물러갔다.

▶ 척화비를 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이야기해 보자.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전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긴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그들과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요,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여러분은 척화비의 내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흥선 대원군은 백성들에게 서양의 침략을 일깨우고,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서양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는 서양의 기술을 익혀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갔다.

[2] 조선, 어디로 가야 하는가[편집]

● 강화도 조약과 그 후의 개화 정책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를 막기 위해 대포를 쏘자, 이를 기다렸던 운요호는 함포 사격을 하여 초지진 포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양민들을 죽이고 관청을 불태웠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였다. 강화도에서 양국 대표가 만나 체결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부산포 외에 다른 두 항구를 연다는 것이 중심 내용으로,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었으나, 우리나라의 권익이 지켜지지 못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을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강화도 조약의 내용(사회과 탐구 91쪽)을 살펴보고, 내가 만일 강화도 조약 체결 회담에 참석하여 일본의 대표와 담판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 보자.

우리 나라 조정은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에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우세해져 개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국가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명성 황후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개화란,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관제를 만들었고, 신식 무기를 갖춘 신식 군대도 창설하였다. 또, 중국과 일본에 젊은이들을 보내 근대 문물을 배워 오게 하였다. 중국에 간 사람들은 근대식 무기 제조업을 배워 왔고, 일본에 간 사람들은 군사, 공업, 철도, 우편 등 여러 분야의 근대 문물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개화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신식 군대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구식 군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이 개화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세력다툼을 벌이며 간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하루빨리 개화하자고 서두르던 사람들은 정변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고 개혁안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안에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 한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가상 대담)

김옥균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생각해 보세요.

조사자 : 왜 정변을 일으킬 생각을 하였습니까?

김옥균 : 조정의 개화 정책이 청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합니다.

조사자 : 일반 백성들은 정변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던데요?

김옥균 : 개화 사상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사자 : 정변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왜 끌어들였습니까?

김옥균 : 일본은 청나라보다 근대화에 성공하여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갑신정변 때의 개혁안(일부)
  •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을 폐지함.
  • 신분 제도를 폐지함.
  •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함.
  •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함.
  •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함.

●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아보자.[편집]

외세의 침략과 조정의 자주적 개혁의 실패는, 종교로 시작된 동학이 사회⋅경제적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 교도들은 처음에는 교주인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으로 더욱 큰 경제적 피해를 입어야 했던 농민들이 동학에 참여함으로써, 동학은 사회적으로는 신분 제도를 없애고, 경제적으로는 세금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동학 교도들이 조정에 요구한 내용이 바뀐 까닭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초기의 주장 : 동학을 종교로 인정해 주시오. 동학을 만든 최제우를 인정해 주시오.

후기의 주장 : 동학을 인정해 주고,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으며, 이 땅에서 일본과 서양 세력을 몰아 냅시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그 뜻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해 내고 국가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다. 안으로는 부정한 관리들을 벌하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적의 무리를 쫓아 내기 위한 것이다.

〈동학 농민 운동 지도자의 격문〉 중에서

▶ 윗글을 읽고,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까닭을 정리하여 보자.

동학 교도들의 집회가 농민 봉기로 번진 것은 전라도 고부 군수의 횡포를 참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고부 농민들은 군수를 몰아 내자고 외치며 관아를 점령하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동학군은 개혁안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조정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농민의 봉기가 오래 계속되자, 중국과 일본도 동학 농민군 진압에 가담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지도자였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군이 바라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학 농민군이 내놓은 정치 개혁 요구(일부)
  • 탐관오리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
  • 노비 문서를 불태워 없앨 것.
  •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
  •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계속되자 조정에서도 적극적으로 개혁을 서둘렀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갑오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면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제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우리 나라는 갑오개혁을 통하여 근대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과정에 일본이 간섭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의 완전한 자주적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일본 세력이 우리 나라를 쉽게 침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법적으로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이 없어져 평등한 사회로 한 걸음 내딛게 되었고, 근대식 교육 덕분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더욱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
정치 교육
  • 청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자주 독립을 지향함.
  • 과거제를 없애고 신분 차별 없이 관리를 뽑기로 함.
  • 나라의 공식 문서에 한글을 사용함.
  • 서울에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를 세움.
  • 각 지방에도 소학교를 세움.
경제 사회
  • 근대식 화폐 제도를 채택함.
  • 도량형을 통일함.
  •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을 없앰.
  • 조혼을 금지함.
  • 과부의 재혼을 허용함.

[3] 대한 제국을 선포한 뜻은[편집]

● 외국과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맺게 된 이후, 우리 조상들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아보자.[편집]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 청나라를 청⋅일 전쟁으로 물리친 일본은 승리한 대가로 중국의 요동 반도를 차지하였고, 조선에 대한 침략의 손길을 더욱 노골적으로 뻗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 나라는 서양 여러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하였다. 명성 황후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러시아로 하여금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고 조선에 대한 침략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불리해진 정세를 되돌려놓기 위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비의 처소인 옥호루를 포위한 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는데,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합니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 겪은 고종은 1896년 초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고, 다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물리칠 방법을 찾았다.

이러한 때에 갑신정변 당시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독립 협회를 설립하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한 구국 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다.

▶ 독립 협회를 이끈 사람들의 주장과 활동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사회과 탐구 97쪽).

국민의 여론에 따라 1년 만에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 제국은 자주 국가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상공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실업 학교도 세웠다. 또,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근대적 군대를 갖추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 개화 정책의 추진과 근대 문물의 도입으로 달라진 사회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자.[편집]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근대적인 조약을 맺었다. 그 후, 세계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선교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무역을 통한 경제적 침략을 걱정하여 교역 자체를 반대하거나 서양 문물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지키려고 하였다.

▶ 당시 사람의 입장이 되어 개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토론하여 보자.
유학자 최익현의 주장

서양인들이 욕심내는 것은 무역을 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의 상품은 대부분이 사치스럽고 이상한 물건으로 공장에서 쉽게 만들 수 있어 그 양이 무한하고, 우리의 상품은 백성의 생명이 달려 있는 땅에서 나는 것으로 그 양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무역이 이루어지면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최익현의 ‘면암집’ 중에서

단발령과 백성들의 저항

1895년에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졌다. 고종이 먼저 머리를 깎고,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은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으나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령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서양 여러 나라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고, 그러자면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화폐, 신문이 발행되고, 우체국이 설립되었으며, 서양식 병원이 문을 열었다. 또, 전기와 전화가 가설되었으며, 전차와 기차, 자동차 등 새로운 교통 수단이 등장하였다.

연대 근대 문물과 제도의 시작
1883
  • 근대 사립 학교 설립(원산 학사)
  • 근대 화폐 발행(전환국)
  • 근대 신문 발행(박문국)
1884 우체국 설립(우정국)
1885 서양식 병원 설립(광혜원)
1887 전기 사용(경복궁)
1895 근대 소학교 설립
1896 궁내부에 전화 설치
1899 전차 운행(한양)
1899 철도 개통(경인선)

한편, 신식 교육을 위한 근대적인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인 사립 학교가 먼저 세워졌고, 갑오개혁 이후에는 나라에서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워 근대적인 교육을 하였다.

▶ 신식 학교인 소학교와 오늘날 초등 학교의 교과목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신식 학교의 교과목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지리, 역사, 이과, 도화, 재봉, 자수, 외국어

연도 소학교 개교 현황
1895
  • 서울에 여러 개의 관립 소학교를 세움.
1896
  • 지방의 관찰부(오늘날의 도청) 소재지와 주요 고장에 공립 소학교를 세움.
▶ 새로운 문물의 도입에 따른 급격한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고, 달라진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선택 학습[편집]

선택 1

개화기 때의 주요 사건들을 다양한 형태의 연표로 정리해 보자.

주요 사건 : 갑신정변, 강화도 조약,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운요호 사건
선택 2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의 개혁안을 살펴본 후, 각각의 사건들을 통해 개화기의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했는지 정리하고, 공통점을 찾아보자.

사건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만들고자 했던 사회
  • 신분 제도가 없는 사회
공통점
선택 3

보기와 같은 서양 문물이 우리 나라에 처음 전해졌을 때에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조사해 보고, 그렇게 부른 까닭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보기 : 자동차, 전화기, 기차, 전등, 영화

단원 정리 학습[편집]

1. 무엇을 배웠나요?

활동 : 조선 후기 사람들의 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생각되는 것 다섯 가지만 찾아 써 보자.

2. 재미있어요!

활동 : 다음과 같은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지 상상하여 글로 써 보자.

3. 우리 힘으로 해결해요

활동 1. 내가 기자가 되어 보기 중의 한 사람과 대담했다고 가정하고 질문과 대답을 정리한 기사를 써 보자.

보기
  • 거중기를 이용하여 화성을 쌓은 날의 정약용
  •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날의 흥선 대원군
  • 천주교 집회에 처음으로 참가한 농민
  • 탈놀이를 구경한 양반
  •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 있었던 신하
  •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한 농민
  • 신식 학교에 입학한 어린이

활동 2. 보기에 제시한 소설 중에서 하나를 읽고, 그 내용과 거기에 나타난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이나 서민들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보기 : 허생전, 양반전,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