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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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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시인 / 산협(山峽)의 노래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의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나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樹林)의 어둠 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을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배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 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 이삭이 솟아났노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