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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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은 어느 날 아침, 아래와 같은 아우의 급한 편지를 받고 한곡리로 돌아왔다.

사업이 첫째구, 연애는 둘째 셋째라고 하시던 형님이 여태 돌아오지를 않으니, 대체 웬일인지요? 그 동안 집에는 별고가 없지만 강기천이가 형님 안 계신 동안에 회원들을 농락해 가지고, 우리 회관을 뺏어 들려구 허니 이 편지 받으시는 대로 즉시 오세요. 건배 씨는 벌써 여러 날째 종적을 감추고 말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허면 좋을까요?

황급히 연필로 갈겨 쓴 동화의 편지를 읽은 형은 얼굴빛이 변하도록 흥분이 되어서,

"까땍허면 십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테니까 곧 가봐야겠어요."

하고 영신의 붕대 교환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 영신이도,

"한 일주일만 더 있으면 퇴원을 헐걸요. 괜히 나 때문에……."

하면서도 이번에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이 저렇게 번차례루 와서 간호를 해주시니까, 난 안심을 허구 가겠에요. 자아, 이번엔 우리 또 한곡리서 만납시다!"

하고 굳게 악수를 한 후 병실문을 홱 열고는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나와 버렸다. 영신은 침대 위에 엎드려 미안과 감사와 섭섭함에 몸둘 곳을 모르고 한 시간 동안이나 울었다. 두 눈이 붓도록 울었다. 곁엣 사람들이,

"인제 두 분이 혼인만 하면 한평생 이별 없이 살 걸 이러지 마슈. 우리 다른 얘기나 헙시다."

하고 간곡히 위로를 해주건만, 영신은,

"어쩐지 또 다신 못 만날 것만 같어요. 이번이 마지막인가 봐요!"

하고 베갯모서리를 쥐어뜯어 가며 느껴느껴 울었다.

동혁이도 무한히 섭섭하였다.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않는 것을, 영신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고 거머리를 잡아떼듯 하고 나오기는 했어도,

'이렇게 급히 떠날 줄 알었드면 우리 개인의 장래에 관한 것도 좀더 이야기를 해둘걸.'

하는 후회가 길게 남았다. 그 동안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손가락 셋을 펴들어 보이며 입을 막았다. 그것은 '삼 개년 계획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동혁은,

'저이가 앞으로 어떡헐 작정인가. 무슨 꿍꿍이셈을 치구 있나?'

하고 매우 궁금히 여기는 영신의 표정을 몇 번이나 분명히 읽었었다. 그렇건만,

'그런 얘기는 건강이 회복된 뒤에 해두 늦지 않다.'

하고 일부러 손가락 셋을 펴들어 보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 저런 궁리에 동혁은 눈살을 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쪽 노자는 준비해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빨리 돌아올 수는 있었어도 아버지 어머니는 대뜸 이해 없는 꾸지람을 하는데, 동화의 이야기를 듣고는 더한층 우울해졌다. 저녁때에 들어온 사람이 밥상은 윗목에다 물려 놓고,

"그래, 기천이가 어떡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또 어디서 술을 먹었는지 눈의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이 된 아우를 불러 앉히고 물었던 것이다.

"누가 알우. 기천이가 건배 씨를 자꾸만 찾어다니구 장에꺼정 데리구 가서 아주 곤죽이 되두룩 술을 먹이는 걸 두 차례나 봤는데, 지난번 일요회에는 떡 이런 소릴 꺼내겠지요."

"뭐라구?"

"암만해두 우리 회원 열두 사람만으론 너무 적은데, 회관두 이렇게 새루 짓구 했으니 회원들을 더 모집허세. 그 김에 회를 대표허는 회장두 한 사람 유력자루 내야 관청 같은 데 신용을 얻기가 좋지 않겠나? 그러니 내 의견에 찬성허는 사람이면 손을 들라구 그러겠지요."

"그래서, 몇이나 손을 들었단 말이냐?"

"나허구 정득이허군 그런 일은 급헐 게 없으니 성님의 말을 들어 보구 다시 의논두 해봐야 경계가 옳지 않느냐구 끝까지 우기면서 손을 안 들었지만……."

"누구누구 들었단 말야? 온 갑갑허구나."

"석돌이가 맨 먼첨 드니깐, 칠룡이, 삼복이 할 거 없이 여섯이나 들드군요."

"건배는 도대체 어느 편이야?"

동혁은 시꺼먼 눈썹을 일으켜 세우고 아우가 무슨 일이나 저지른 것처럼 노려본다.

총회와 같은 형식을 밟지 않고도 '회원 중 반수 이상의 추천이 있으면 입회를 할 수 있다'는 규약이 있기 때문에, 열두 사람 중에 반수가 이미 손을 들었으니까 건배 한 사람이 어느 편으로 기울어지기만 하면, 좌우간에 작정이 될 형세다. '삼십 세 이하의 남자'라는 규정도 과반수의 의견이면 뜯어고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 건배는 어느 편으루 손을 들었단 말야?"

동혁은 버쩍 다가앉으며 꾸짖듯이 묻는다.

"물어 볼 게 뭐 있수? 으레 강기천이를 입회시키는 데 찬성이지."

동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동화는,

"인젠 고 강기천이란 불가사리가 우리 회의 회장이유, 회장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먼지가 나도록 주먹으로 기직 바닥을 친다. 그 동안 기천에게 매수를 당한 건배는 이른바 합법적으로 기천이를 회장으로까지 떠받들어 주고 어디로 피신을 한 것이 틀림없다. 동화는 끝까지 반대를 하고 회관 마루청을 구르며,

"너희놈들은 돈을 처먹구 논마지기가 떨어질까 봐 겁이 나서 그 따위 수작을 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해서 지어 논 집을 만만히 내놓을 듯싶으냐? 죽어 봐라, 죽어 봐. 어느 놈이 우리 회관엘 들어서게나 허나. 강기천이 아니라 강기천이 하라비래두 다리 옹두라질 부러트려 놀 테다!"

하고 이빨을 뿌드득뿌드득 갈며 고함을 쳤었다. 그 중에도 동혁에게 절대 복종을 하는 정득이는 분을 못 참고,

"우리는 회장이 일없다! 우리 선생님 하나면 고만이다!"

하고 입에 게밥을 짓는데, 회관의 쇳대를 맡은 갑산이는,

"이 의리부동헌 놈들 같으니라구,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만큼이나 깼느냐? 누구 덕분에 이만큼이나 단체가 됐느냐? 아 그래, 우리 선생님이 없는 동안에, 피땀을 흘려서 지은 집을 고리가시허는 놈헌테 팔어먹어?"

하고 맨 먼저 손을 든 석돌이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볼치를 후려갈겼다. 건배는 어느 틈에 꽁무니를 뺐는데, 석돌이와 찬성파는 침 먹은 지네 모양으로 꿈쩍도 못 하고 머리를 사추리에다 틀어박고 앉았다. 칠룡이는 손을 들어 놓고도 양심에 찔리는지 훌쩍훌쩍 울고 앉았다. 찬성파는 하나도 빼어 놓지 않고 강도사 집의 소작인들인 것이다.

갑산이는 허리띠를 끄르더니 쇳대를 세번 네번 이빨로 매듭을 지어 꼭꼭 옭매면서,

"우리 선생님 말이 없인 목이 베져두 안 내놀 테다!"

하고는 회원들이 나갈 때까지 지키고 섰다가 회관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 그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었다.

아우에게서 자세한 경과를 들은 동혁은 영신에게 오래 있었던 것을 몇 번이나 후회하였다. 놀러 갔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연애와 사업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양립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보다도 금방 분통이 터질 듯이 분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기천이가 조만간 그러한 휼책을 써서 회관을 점령하려는 눈치는 짐작 못 했던 것도 아니니, 도리어 괴이쩍을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같은 지식분자로 손을 잡고 동네 일을 시작하였고, 함께 온갖 고생을 참아 오던 건배가 마음이 변해서 강기천의 주구 노릇까지 하게 된 데는 피를 토하고 싶도록 분하였다. 과거의 자별하던 우정으로서 이번 행동을 호의로 해석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고 하면서도, 오직 원수의 구복 때문에 참다못해서 지조를 팔고, 다만 하나뿐이었던 동지를 그나마 출타한 동안에 배반한 생각을 하니 눈물이 뜨끈하게 솟았다. 비록 중심은 튼튼치 못하나마 지사적(志士的) 기개가 있고 낙천가이던 건배로 하여금 환장이 되게까지 만든 이놈의 환경이…….

동혁은 금세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설마 건배가 그다지 쉽게 마음이 변했을라구.'

하고 두번 세번 아우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동혁은 불도 아니 켜고 누워서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무슨 짓을 하든지 유일한 단체인 농우회를, 삼사 년이나 근사를 모아 지은 회관째 기천의 손에 빼앗길 수는 없다. 건배를 불러다가 책망을 하고, 기천이를 직접 만나 단단히 따지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회원의 반수 이상이 울며 겨자 먹기로 생활 문제 때문에 그편에 가 들러붙게 된 이상 일시의 혈기로써 분풀이를 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더 옭혀들어 갈지언정 원만히 해결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성미가 관솔같이 괄괄한 동화가,

"아 고놈의 자식을 그대루 두구 본단 말유. 내 눈에만 띄어 보. 뒈지지 않을 만큼 패주구 말 테니. 징역 사는 게 농사 짓는 것버덤 수월허다는데 겁날 게 뭐유."

하고 팔을 뽐내는 것을,

"아서라. 그건 모기를 보구 환도를 뽑는 격이지, 그버덤 더 큰 적수를 만나면 어떡허련? 완력으루 될 일이 있구 안 되는 일두 있는 걸 알어야 한다. 넌 아직 나 하라는 대루 가만히 있어."

하고 타일렀다. 그것도 폭력으로는 되지 않을 성질의 일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별별 생각을 다 해보다가,

"한 가지 도리밖에 없다!"

하고 부르짖으며 발길로 벽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그들의 빚을 갚어 주는 것이다. 강가의 집 소작을 아니 해먹고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다. 단 두 마디밖에 아니 된다. 그러나 그 간단한 말은 동혁의 어깨가 휘도록 무거웠다. 현재의 저의 미약한 힘으로는 도저히 실행할 가능성이 없는 일일 것 같았다.

그 근본책을 알고도 손을 대지 못하는 동혁의 고민은 컸다.

"결국은 한 그릇의 밥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 더군다나 농민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고 옛날부터 일러 내려오지 않었는가."

이것이 흔들어 볼 수 없는 철칙인 이상 이제까지는 그 철칙을 무시는 하지 않았을망정, 첫손가락을 꼽을 만치 중대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만은 스스로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농촌의 태생이면서도 아직까지 밥을 굶어 보지 못한 인텔리 출신인 까닭이다.'

하고 동혁은 저 자신을 비판도 하여 보았다.

'이제까지 단체를 조직하고 글을 가르치고 회관을 번듯하게 지으려고 한 것은, 요컨대 메마른 땅에다가 암모니아나 과린산석회 같은 화학비료를 주어 농작물이 그저 엄부렁하게 자라는 것을 보려는 성급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동혁은 냉정히 제가 해온 일을 반성하는 나머지에,

'먼저 밑거름을 해야 한다. 흠씬 썩은 퇴비를 깊숙이 주어서 논바닥이 시꺼멓도록 걸게 한 뒤에 곡식을 심는 것이 일의 순서다. 그런데 나는 그 순서를 바꾸지 않었던가?'

하고 혼자말을 하며 또다시 눈을 딱 감고 앉았다가,

'집 한 채를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다. 동지가 배반한 것을 분하게만 여기고 흥분할 것이 없다.'

하고 무릎을 탁 치고 일어서서 좁은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이번 기회에 영신에게도 선언한 것처럼, 제일보부터 다시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적인 문화운동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으로.'

결론을 얻은 동혁은 방으로 들어가 그제야 불을 켜고 서랍 속에서 동리 사람과 회원들의 수입 지출이며, 빚을 진 금액까지 상세히 적어 넣은 이세일람표(里勢一覽表)를 꺼냈다. 그것은 회원들이 여러 달을 두고 조사해 온 것으로 매우 정확한 통계였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생님 오셨지요?"

하고 반대파의 회원들이 정득이를 앞장 세우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가득 들어앉은 회원들의 입에서 비분에 넘치는 호소를 받을 때, 동혁이도 다시금 흥분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건만,

"참세, 참어. 참을 수 없는 걸 참는 게 정말 참을 줄 아는 거라네."

하고,

"아무튼 너무 떠들면 일이 되레 크게만 벌어지는 법이니, 얼마 동안 모든 걸 내게 맡겨 주게. 따루 생각허는 일두 있으니……."

하고 거듭 제가 그 동안에 동리를 떠나 없었던 것을 사과하였다. 그러나 정득의 입에서,

"건배 씨는 기천이 지시루 군청에 서기가 돼서 아주 이사를 간대요. 한 달에 월급이 삼십 원이라나요."

하는 말을 들을 때, 동혁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면서도,

"설마 그렇기야 헐라구. 자네들이 잘못 들었지."

하고 그 말까지는 믿지를 않으니까,

"잘못 알다께요. 오는 길에 안에서 이삿짐꺼정 싸는 걸 봤는데요."

그 말을 듣고도 동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군서기가 그렇게 짧은 시일에 용이하게 되는 것도 아니요, 또는 건배가 오래 전부터 뒷구멍으로 운동을 하였으리라고는,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또는 그에게는 소학교 교원 노릇을 할 자격까지 빼앗긴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그럴 리는 만무허지."

하면서도 실지를 검사하듯이, 이삿짐을 싼다는 건배의 집에는 가보기가 싫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동혁은 평일과 조금도 다름없이 일어나 회관으로 올라가서 기상나팔을 불었다. 새벽녘부터 철 아닌 궂은비가 오는 까닭인지, 회원은 물론 다른 조기회원도 올라오는 사람은 그전의 오분의 일도 못 된다. 그 분요통에 건배까지 종적을 감추어서 조기회조차 지도자를 잃고 흐지부지 해산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동혁은 웃통을 벗어붙이고 비를 맞으며 체조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이불 속에서,

"에에키, 동혁이가 왔군."

하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동혁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같이 우울해진 머리를 떨어뜨리고 내려왔다.

'어쨌든 나 헐 도리는 차려야 한다.'

하고 내려오는 길에 건배의 집에를 들렀다.

"건배―---"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마당으로 들어서 보니 시렁 위에 있던 헌 고리짝을 내려서 빨랫줄로 묶어 놓은 것과 바가지와 귀 떨어진 옹솥을 떼어서 돈대 위에다 올려놓은 것을 보고, 그제야,

'정말 이사를 가려는 게로구나.'

하고 다시 한번,

"건배 있나?"

하고 안방으로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난 누구시라구요. 그저께 나가서 그저 안 들어왔어요."

하고 젖을 문 어린애를 안고 나오는 것은 건배의 아내다. 세수도 아니 해서 머리는 쑥방석 같고 그 동안에 더 찌들어 보이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그 동안에 속이 상해서 저 꼴이 됐나 보다.'

하고 동혁은,

"어딜 갔어요?"

하고 물어 보았다. 건배의 아내는 떼어다만 놓고 닦지도 않아서 거멍이 시꺼멓게 앉은 옹솥을 내려다보더니,

"이 정든 고장을 어떻게 떠난데요?"

하고 금세 목이 멘다.

"아, 떠나다께요?"

동혁은 짐짓 놀라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뭘, 벌써 다 들으셨을걸……."

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마당만 내려다보더니,

"참 영신 씨가 병이 대단하다죠?"

하고 딴전을 부리듯 한다.

"인젠 많이 나었어요."

동혁은 의형제까지 한 두 사람의 정의를 생각하며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더 자세한 말을 묻기도 싫고, 그렇다고 그대로 갈 수도 없어서, 잠시 추녀 밑에서 빗발을 내려다보며 서성거리는데,

"주호야―---"

하고 어린것의 이름을 부르며 비틀거리고 들어서는 사람!

그는 앞을 가누지 못하도록 술이 취한 이 집의 주인이었다.

썩은 생선의 눈처럼 뻘겋게 충혈이 된 건배의 눈이 동혁의 실쭉해진 눈과 딱 마주치자, 그는 전기를 맞은 것처럼 우뚝 섰다. 한참이나 억지로 몸을 꼬느고 섰다가, '죽여 줍시사' 하는 듯이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여보게 동혁이!"

하고 와락 달려들어 손을 잡는다. 동혁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진다.

"여보게 동혁이! 나 술 먹었네, 술 먹었어. 자네 덕분에 끊었던 술을, 삼 년째나 끊었던 술을 먹었네. 그저께 저녁버텀 죽기 작정허구 막 들이켰네. 참 정말 죽겠네, 죽겠어. 이 사람 동혁이 팔어먹은 양심이 안직두 조끔은 남었네그려!"

하고 앙가슴을 헤치고 주먹으로 꽝꽝 치더니 동혁의 어깨에 가 몸을 턱 실리며,

"여보게, 내 이 낯짝에 침을 뱉어 주게! 어서 똥물이래두 끼얹어 주게! 난 동지를 배반헌 놈일세. 우리 손으루 진, 피땀을 흘려서 진 회관을, 아아 그 집을, 그 단체를 이놈의 손으루 깨뜨린 셈일세!"

하고 진흙 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더니 흑흑 느끼면서,

"내가 형편이 자네만만 해도, 두 가지 맘은 안 먹었겠네. 내 딴엔 참기두 무척 참었지만 원수의 목구녁이 포도청이니 어떡허나?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허구 하나 둘두 아닌 어린 새끼들허구, 이 입살에두 풀칠을 해야 살지 않겠나?"

하고 사뭇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우리 내외는 남몰래 굶기를 밥 먹듯 했네. 못 먹구두 배부른 체허기란 참 정말 심드는 노릇이데. 허지만 어른은 참기나 허지, 조 어린것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우리 같은 놈헌테 태어난 죄밖에 이승에 무슨 큰 죄를 졌단 말인가? 그것들이 뻔히 굶네그려. 고 작은 창자를 채지 못해서 노랑방통이가 돼가지구 울다울다 지쳐 늘어진 걸 보면, 눈에서, 이 아비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네그려!"

하고 떨리는 입술로 짭짤한 눈물을 빨면서 문지방에다가 머리를 들부비더니 눈물 콧물로 뒤발을 한 얼굴을 번쩍 쳐들며,

"여보게 동혁이, 자넨 인생 최대의 비극이 무엇인 줄 아나? 끼니를 굶구 늘어진 어린 새끼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세! 그것들을 죽여 버리지두 못허는 어미 아비의 속을 자네가 알겠나?"

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는다.

동혁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건배의 독백을 들었다. 적덩어리 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듯한 것을 억지로 참고 섰으려니 건배만치나 마음이 괴로웠다. 비록 술은 취했으나마 그 기다란 몸을 진흙 바닥에다 굴리면서 통곡을 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때, 달려들어 마주 얼싸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말대꾸도 못 하였다. 아내가 듣다못해서 마당으로 내려오며,

"이거 창피스레 왜 이러우! 어서 들어갑시다. 제발 방으루나 들어가요."

하고 잡아 끌어도 건배는 막무가내로 뻗딩긴다. 동혁은 그제야 건배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보게 건배! 어서 일어나게. 가을이 돼두 벼 한 섬 못 들여놓구 지낸 자네 사정을 어째 내가 모르겠나. 이런 경우에 자네를 힘껏 붙잡지를 못허는 게 무한히 슬플 뿐일세. 이번에 가면 아주 가겠나! 또다시 모일 날이 있겠지. 더 단단히 악수를 헐 날이 있겠지. 난 이 마당에서 다른 말은 하기가 싫으이. 기왕 그렇게 된 일이니 자네의 맘이 다시는 변치 말구 있다가, 더 큰 일을 헐 때 만날 것만 믿구 있겠네!"

건배는 동혁이가 뜻밖에 조금도 저의 탓을 하거나 몰아대지를 않는 것이 고마워서 동혁의 손을 힘껏 잡으며,

"아 손을 어떻게 놓나, 응? 이 손을 어떻게 놔. 이 한곡리를 차마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정을 베는 칼은 없어! 없나? 인정을 베는 칼은 없어?"

하고 손을 벌리더니 연기에 시꺼멓게 걸고 밑둥이 반이나 썩은 마룻기둥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어라.
이 목숨이 끊지도록
북돋우며 나가자!

하고 '애향가' 끝 구절을 목청껏 부르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며 헉헉 느끼기만 한다. 그의 머리와 등허리에는, 찬비가 어느덧 진눈깨비로 변해서 질금질금 쏟아져 내린다.

건배가 떠나는 날 동혁은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몇 해 전 교원 노릇을 할 때에 입던 것인지 무릎이 나가게 된 쓰메에리 양복을 입고 흐느적흐느적 풀이 죽어서 걸어가는 뒷모양을 동혁은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밝기도 전에 도망구니와 다름없이 떠나는 길이라, 작별의 인사나마 정다이 하러 나온 사람도 두엇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것들을 이끌고, 눈에 잠이 가득한 작은애를 들쳐 업은 건배의 아내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걷지를 못하다가,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마루터기 위까지 올라가서는 서리 찬 풀밭에 펄썩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자기가 살던 동리의 산천과 오막살이들을 넋을 잃고 내려다보다가, 남편에게 끌려서 그 고개를 넘으면서도 돌려다보고 돌려다보고 하는 것이 먼 광으로 보이더니, 그나마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안계(眼界)에서 사라져 버렸다.

기천이가 건배의 빚을 갚아 주고 신분까지 보증을 하여서 하루 일 원씩 일급을 받는 임시 고원이 되어 간다는 것은, 그의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았다. 군청에 사람이 째어서 몇 달 동안 서역을 시키려고 임시로 채용한 것이니까 그나마 언제 떨어질는지 모르는 뜨내기 벌이다. 그러나 조만간 끊어질 줄 알면서도 건배는 그만한 밥줄이나마 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동리로 돌아오면서,

'오는 자를 막기도 어렵고, 가는 자를 억지로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고 긴 한숨을 짓고는, 그 길로 회원의 집을 따로따로 호별 방문을 하였다. 그것은 강기천이와 겯고 틀려는 음모를 하려는 것도 아니요, 반대운동을 일으키려고 책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자아, 우리 기왕에 그렇게 된 일을 가지구 왁자지껄 떠들기만 허면 무슨 소용이 있나? 누가 잘허구 잘못헌 것두 따지지 말구, 어느 시기꺼정은 우리가 헐 일만 눈 딱 감구 허세."

하고는 미리 불평을 막았다. 그는 기천에게 매수된 회원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임하였다. 석돌이와 칠룡이 같은 회원은 동혁을 보더니 질겁을 해서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려고 드는 것을,

"허어 이 사람, 내 얼굴을 바루 쳐다보지 못헐 짓들은 누가 허랬나?"

하고 너그러이 웃어 보이면서 전일과 조금도 다름없이 은근하게,

"난 이런 생각을 허는데, 자네들 의향은 어떨는지?"

하고 조끼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놓으며,

"자, 누구누구 헐 것 없이 우리 어떻게 빚버텀 갚을 도리를 차려 보세. 빚진 죄인이라구 남의 앞에 머리를 들구 살려면 위선 빚버텀 벗어넘겨야 허지 않겠나?"

"그야 이를 말씀이에요."

어느 회원은 동혁이가 은행의 담이나 뚫어 가지고 온 것처럼 그 말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 눈치다.

"그렇게만 되면사, 우리두 다리를 뻗구 자겠지만……."

하면서도 무슨 방법으로 갚자는지를 몰라서 동혁의 턱을 쳐다본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강도사 집에 농채(農債)나 상채(喪債)루, 또는 혼채(婚債)루 진 빚을 쳐보니까, 본전만 거진 사백 원이나 되네그려. 그러니 또박또박 오 푼 변을 물어 가면서 기한에 못 갖다 바치면, 그 변리꺼정 추켜매서 그 원리금에 대한 오 푼 변리를 또 물고 있지 않은가? 허구 보니 자네들의 빚이 벌써 얻어 쓴 돈의 삼 배두 더 늘었네그려. 주먹구구루 따져 봐두 천사백 원 턱이나 되니, 자네들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겨서 그 엄청난 빚을 갚어 보겠나!"

"어이구, 일천사백 원!"

갑산이가 새삼스러이 놀라며 혀를 빼문다.

"그게 또 자꾸만 새끼를 칠 테니 어떻게 되겠나? 몸서리가 쳐지두룩 무섭지가 않은가?"

"그러니, 세상 별별 짓을 다 해두 갚을 도리가 있어야죠. 그저 텃도지도 못 물구 있는 사람이 반이나 되는데요."

"그러길래 말일세. 그 빚을 어떻게 갚든지 내게다만 죄다 맡겨 주겠나? 그것버텀들 말허게."

"그야 두말헐 게 있에요. 빚만 갚게 해주신다면 맡기구 여부가 없읍죠."

하는 것이 이구동성이다.

"그럼, 나 허는 대루 꼭 해야 허네. 나중에 두말 못 허느니."

하고 동혁은 두번 세번 뒤를 다졌다.

동혁은 회원이 빚을 얻어 쓴 날짜와 금액을 적은 장부를 꺼내더니,

"그러면 우리 이럭허세. 우리가 삼 년 동안 공동답을 짓구, 닭 돼지를 쳐서 모은 것하구, 이용조합과 이발조합에서 저금헌 걸 따져 보니까, 회관을 지은 것은 말구두, 사백육십여 원이나 되네."

하고 일 전 일 리도 틀림없이 꾸며 놓은 회의 여러 가지 장부와 대조를 시켜 보인다.

"야아, 그런 줄 몰랐더니 꽤 많구나!"

하고 회원들은 저희들이 저금한 액수가 뜻밖에 많은 데 놀란다.

"그러길래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 허지만 그걸 열둘루 쪼개면 한 사람 앞에 삼십팔 원 각수밖에 더 되나."

동혁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결코 많달 것이 없는 금액이다. 동혁은 회원들의 기색을 살펴보며,

"우리 그 동안 비럭질(거저 일을 해주는 것)을 해준 셈만 치구, 그걸루 몽땅 빚을 갚어 버리세. 나는 간신히 그 집에 빚을 안 졌지만, 내 몫허구 동화 몫이 남는데 건배군은 취직을 헌 모양이니까, 세 사람 몫은 거저 내놓겠네. 그럼 그걸루 많이 얻어 쓴 사람허구 적게 얻어 쓴 사람허구 액수를 평균허게 만들 수가 있지 않은가?"

회원들은 얼른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좋고 그르다는 것은, 그네들의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아서는 모른다. 몇몇 해를 두고 쪼들리던 부채를 갚아 준다니 귀가 번쩍 뜨이나 죽을 애를 써서 모은 것을 송두리째 내놓는다는 데는 여간 섭섭지가 않은 눈치다. 어린애는 배기도 전에 포대기 장만부터 한다고, 그 돈을 눈 딱 감고 늘여서 돈 백 원이나 바라보면 토담집이라도 짓고 나와서 남의 도짓집을 면해 보려고 벼르고 있는 회원이 거지반이었던 것이다.

"섭섭헐 줄은 아네. 허지만 눈앞에 뵈는 게 아니라구 그 빚을 그대루 내버려두면, 나중에 무슨 수루 갚어 보겠나? 칠룡이 같은 사람은, 돌아간 아버지 술값까지 짊어졌으니까, 억울헌 줄은 모르는 게 아닐세만…… 억지루 허자는 게 아니니 싫다면 더 우기진 않겠네."

하고 동혁은 슬그머니 을러도 보았다. 그런 잇속에는 셈수가 빠른 석돌이는,

"선생님이 첫해버텀 우리허구 똑같이 고생을 허신 것꺼정 내놓으신다는데 두말헐 사람이 누구예요? 너무나 고맙구 염치없는 일입죠."

하고 동혁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럼 변리는 어떡허구 본전만 갚나요?"

한다. 그 말에 정득이와 칠룡이도 매우 궁금하였다는 듯이,

"그러게 말씀예요. 배버덤 배꼽이 커졌는데……."

하고 거진 동시에 질문을 한다.

"궁금헐 줄두 알었네. 그러길래 그건 무슨 수단을 쓰든지 내게다만 맡겨 달라구 허지 않었나?"

"안 될걸요. 이마에 송곳을 꽂어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인데 애당지 생의두 마시지요."

"아, 노린전 한푼에 치를 떨구, 사촌간에두 꼭꼭 변리를 받는 사람이 더군다나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놓지를 못해허는 우리들의 변리를 탕감해 주겠에요? 어림없지, 어림없어."

하고 머리를 내젓는 것을 보고 동혁은,

"이 사람, 경우에 따러선 병법을 가꾸루 쓰는 수두 있다네."

하고 자신 있는 듯이 간단히 대답하고 나서,

"헌데, 한 가지 꼭 지켜야 헐 게 있네. 내가 그 집엘 댕겨오기 전엔, 누구헌테나 이 말을 입 밖에두 내선 안 되네. 그 사람이 미리 알면 다 틀릴 테니 명심들 허게. 그런데 온 전화통이 있어서……."

하고 슬쩍 석돌이를 흘겨본다. 정득이도 석돌이와 칠룡이를 노려보며,

"천엽에 가 붙구 간에 가 붙구 허는 놈은 이젠 죽여 버릴 테야! 죽여 버려!"

하고 이를 뿌드득 갈며 벼른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를 해도 저녁 안으로 그 말이 새어서 기천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을 동혁이가 모를 리는 없다. 건배를 작별하고 오다가, 기천이가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로 달려가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고, 기만이가 형이 술에 취해서 자는 사이에 빚을 놓아 먹으려고 금융조합에서 찾아온 돈을 오백 원이나 훔쳐 가지고 도망을 가서 형이 서울로 쫓아 올라갔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하게 났기 때문에 적어도 사오 일 내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동안 여러 날을 두고 동혁은 사방에 흩어진 돈을 모아들이느라고 자전거를 얻어 타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조합에 예금했던 것은 손쉽게 찾았지만, 그 나머지는 받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요행으로 추수를 한 뒤라, 다른 때보다는 융통이 잘 되어서 기천이가 내려오기 전날까지 그 액수가 거진 다 들어섰다.

기천이는, 조끼 안주머니에다가 똘똘 뭉쳐서 넣고 자던 돈을 아우에게 감쪽같이 도적을 맞고 눈이 발칵 뒤집혀서 으레 서울로 갔으려니 하고 뒤를 밟아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서울은 공진회 때와 박람회 때에 구경을 했을 뿐이라, 생소해서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어 경찰서에 수색원까지 제출했건만, 친형제간에 돈을 훔친 것은 범죄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찾게 되면 통지할 테니 내려가 있으라'는 주의를 받고 그 아까운 노자만 쓰고 내려왔다. 집에 와서는 콩 튀듯 팥 튀듯 하며, 문문한 집안 식구에게만 화풀이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동혁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화에게 석돌이나 그 집에 가까이 다니는 사람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으로 머슴애를 꾀송꾀송해서 물어 보면 단박에 염탐을 할 수가 있다.

'화가 꼭두까지 오른 판인데 잘 들어 먹을까.'

하면서도 동혁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에 큰마을로 기천이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도,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허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이 속아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를 써야 하겠다.'

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 보리라 하였다.

사랑마당에서 으흠, 으흠 기침을 하니까,

"누구냐?"

하고 되바라진 소리를 지르며 내다보는 것은, 바로 기천이다.

"그 동안 경행을 허셨드라지요?"

하고 동혁은 뻣뻣한 허리를 될 수 있는 대로 굽혀 보였다.

"아, 동혁인가? 그러잖어두 좀 만나려구 했더니……."

기천은 마루로 나오며 한 십 년 만에나 만나는 친구처럼,

"어서 이리 들어오게."

하면서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제가 한 깐이 있고, 반대파의 회원들이 저의 집을 습격이나 할 듯이 형세가 위룽위룽한데, 그 질색할 놈의 동화는 저를 보기만 하면 죽이느니, 다리를 분질러 놓느니 하고 벼른다는 소문을 벌써 듣고 앉았다. 속으로는 겁이 잔뜩 나서 동네 출입도 못 하고 들어앉았는 판에, 몇 번씩 불러도 오지를 않던 동혁이가 떡 들어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달칵 내려앉았다. 그렇건만 그 순간에,

'옳지, 마침 잘 왔다. 너만 구슬러 노면야 다른 놈들쯤이야.'

하고 얕잡고는 친절을 다해서 동혁을 붙들어 올린 것이다. 동혁이가,

"계씨두 서울 가셨다지요? 풍편에 놀라운 소식이 들리드군요. 그래 얼마나 상심이 되세요."

하고 화평한 낯빛으로 동정해 주니까,

"허어, 거 온 첫대 창피스러워서…… 속 상허는 말이야 다 해 뭘 허겠나. 그야말루 아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지."

하고 매우 아량이 있는 체를 한다. 동혁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기를 누르려고,

"참 이번 저 없는 동안에 귀찮은 일을 맡으시게 됐드군요."

하고 아픈 구석을 꾹 찔러 보았다. 기천은 의외로 동혁의 말씨가 부드러운 데 안심이 되는 듯,

"하 이 사람, 자네가 먼저 말을 끄내네그려. 난 백죄 꿈두 안 꾼 일을, 건배랑 몇몇이 누차 찾어와서 벼락 감투를 씌우데그려. 자네네 일까지 덧붙이기루 해달라니 젊은 사람들이 떠맡기는 걸 이제 와서 마자는 수두 없구…… 그래서 자네허구 얘기를 좀 허려구 만나려던 찬데, 참 마침 잘 왔네."

하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듯이 뾰족한 발끝을 달달달 까분다.

"그야 인망으루 되는 일이니까요. 진작 일을 봐줍시사구 여쭙질 못헌 게 저희들의 불찰이지요."

그 말에 기천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가만있게. 우리 오늘 같은 날이야 한잔 따뜻이 마시면서 얘기를 허세."

하고 요릿집에서 하던 버릇인지 안으로 대고 손뼉을 딱딱 친다.

전일과 똑같은 대중의 술상이 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어란과 육포 조각까지 곁들여 내온 것을 보니, 특별 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여보게, 오늘은 한잔 들게. 사람이 너무 고집이 세두 못 쓰느니."

하고 권하는 대로,

"그럼, 나 먹는 대루 잡수실 테지요."

하고 동혁은 커다란 주발 뚜껑으로 밥풀이 동동 뜬 노오란 전국을 주르르 따랐다.

"자 먼저 한 잔 드시지요."

"어 이 사람, 공복인데 취허면 어떡허나. 요새 연일 과음을 해서……."

하면서도 기천은 동혁이가 먹는다는 바람에 숨도 아니 쉬고 쪼옥 들이켰다. 이번은 동혁이가 불가불 마셔야 할 차례다. 동혁은,

"이거 정말 파계를 허는군요."

하고 주발 뚜껑이 찰찰 넘치도록 받아 놓았다. 동혁은 원체 주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등농림의 축구부의 주장으로 시합에 우승하던 때에는 응원대장이 권하는 대로 정종을 두 되 가량이나 냉수 마시듯 하고도 끄떡도 아니 하던 사람이다.

"어서 들게."

"네, 천천히 들지요."

그러나 이만 일로 여러 회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굳게 지켜 오던 약속을 깨뜨릴 수도 없고, 그 잔을 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어름어름하고 안주만 집는 체하는데, 안에서 계집애가 나오더니,

"아씨가 잠깐 들어옵시래유."

한다. 기천은,

"왜?"

하고 일어서며,

"아 이 사람, 어서 들게."

하고 마시는 것을 감시하려고 한다. 동혁은 술잔을 들었다. 돌아앉으며 단숨에 벌떡벌떡 들이켜는 것을 보고야 기천은,

"허어, 어지간허군."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저녁상을 내보낼까 물어 보려고 불러들이는 눈치다. 동혁은 씽긋 웃으며 술잔을 입에서 떼는데 술은 고대로 있다. 능청스럽게 소매로 입을 가리고 들이마시는 시늉만 내어 보인 것이다. 그 술을 얼른 주전자에다 도로 따르고 이번에도 안주를 드는 체하고 있는데, 기천은 벌써 얼굴이 술기운이 돌아 가지고 나온다. 동혁은,

"무슨 술이 이렇게 준헙니까? 벌써 창자 속까지 찌르르헌데요."

하고 진저리를 치는 흉내를 낸다.

"기고(忌故)두 계시구 해서, 가양(家釀)으루 조금 빚어 넌 모양인데, 품주(品酒)는 못 돼두 그저 먹을 만허이."

"이번엔 주인 어른께서 드셔야지요."

"온, 이거 과헌걸."

"못 먹는 저두 먹었는데요. 참 제가 술 먹은 걸 회원들이 알아선 안 됩니다."

"그야 염려 말게. 내가 밀주해 먹는 소문이나 내지 말게. 겁날 건 없네만……."

하고 기천은,

"핫 하하하."

하고 간드러지게 웃으며 잔을 들더니 엄지손가락을 제친다.

"이왕이면 곱배기루 한잔 더 허시지요. 저두 따러 먹을 테니……."

동혁은 석 잔째 가득히 따라 올렸다.

"아아니, 자네 사람을 잡으려나? 이렇게 폭배를 허군 견디는 수가 있어야지."

하면서도,

'어디 누가 못 배기나 보자!'

는 듯이 상을 찌푸리고 꼴딱꼴딱 마셔 넘긴다. 동혁은 기천의 목줄띠에 내민 뼈끝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번엔 어떡하나.'

하면서도 그 술잔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서 들게 들어. 입에 안 댔으면 모르거니와 사내 대장부가 그만 술이야 사양해 쓰겠나."

독촉이 성화 같다. 기천은 벌써 말이 어눌해지도록 취했다.

"온 이건 너무 벅차서……."

하고 동혁은,

'이런 때 누가 오지나 않나.'

하고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마침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나더니,

"나리께 여쭙니다. 큰덕미 선인이 들어왔는뎁쇼. 내일 아침에 뱃짐을 내시느냐구 헙니다."

하는 것은 머슴의 목소리다. 기천은,

"뭐? 뱃놈이 들어왔어?"

하더니,

"자,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 툇마루로 나간다. 그 틈에 주전자 뚜껑은 또 소리 없이 열렸다. 기천이가 벼를 실릴 분별을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혁은,

"어이구, 벌써 가슴이 다 두근두근허는걸요."

하고 가슴에다 손을 대며 금방 술을 마시고 난 것처럼 알코올 기운을 내뿜는 듯이 후우 하면서 술잔을 주인의 앞에다 놓았다.

남포에 불을 켜는데 밥상이 나왔다. 반주가 또 한 주전자나 묵직하게 나오고, 어느 틈에 닭을 다 볶아서 주인과 겸상을 하였다. 기천이가 상놈하고 겸상을 해보기는 생후 처음이리라.

'아무리 요새 세상이기루 볼 건 봐여지. 우리네허구야 원판 씨가 다르니까…….'

하고 남의 집 잔치 같은 데를 가서도 자리를 골라 앉는 사람으로는 크게 용단을 내었고 실로 융숭한 대접이다. 동혁은,

'놈이 발이 제려서…….'

하면서도,

"전 저녁을 먹구 왔지만, 세잔갱작(洗盞更酌)이라는데 자 이번엔 반주루 한잔 더 드시지요."

하고 이번에는 공기에다 가득히 따라서 권하니까,

"이거 자네 협잡을 했네그려. 그저 끄떽없는 게 수상쩍은걸."

하면서도 기천은 인음증(引飮症)이 대단한 사람이라 인제는 술이 술을 끌어들여서, 동혁이가 받아 든 술은 제 눈앞에서 한 방울도 아니 남기고 주전자에다가 짓는 것을 멀거니 보면서도,

"과헌걸 과해."

해가며 연거푸 마신다. 그만하면 온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보일 만치나 거나해졌다.

"참 이렇게 술에 고기에 주셔서 잘 먹습니다만, 특청 하나 헐 게 있어서 왔는데, 들어주시겠에요?"

그제야 동혁은 취한 체하면서 본론을 끄집어냈다.

기천은 몽롱한 눈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상대자를 보더니, 다 붙은 고개를 내밀며 귓속말이나 들으려는 듯이,

"무슨 특청? 왜 아쉰 일이 있나?"

하고 귀를 갖다가 댄다. 특청이라면 으레 돈을 취해 달라는 줄 알고 취중에도,

'너두 그예 나헌테 아쉰 소리를 헐 때가 왔구나.'

하는 듯이 연거푸,

"왜 돈이 소용이 되나?"

하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똥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은근히 묻는다.

"돈이 소용이 되는 게 아니라 빚을 갚으러 왔에요."

"응? 빚을 갚으러 오다께? 자네가 언제 내 돈을 썼든가?"

"전 댁의 돈을 다 갚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위임을 맡어 가지구 왔는데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누구 말인가?"

"이번에 주인 어른께서 새루 회장이 되신 우리 농우회의 회원들이 진 빚인데요. 저희들은 와 뵙구 말씀드리기가 어렵다구 제게다 맡겨서 심부름을 온 셈입니다."

"허, 자네두 호사객일세그려. 더러들 썼지만 몇 푼 된다구. 하두 오래 돼서 나두 잊어버렸는걸."

하면서도 기천은,

'너희들이 무슨 돈이 생겨서 한꺼번에 갚는다느냐.'

는 듯이 고개를 까땍까땍하면서 따개질을 하듯이 동혁의 눈치를 살핀다.

"수고스러우시지만 뭐 적어 두신 게 있을 테니 좀 끄내 보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을 듣자 기천은 딴전을 부리듯,

"여보게, 우리 그런 얘긴 뒀다 허세. 술이 취해서 지금 옹송망송헌데……."

하고 고리대금업자는 살금살금 꽁무니를 뺀다. 동혁은 버쩍 다가앉으며,

"아니올시다. 일이 좀 급헌데요. 참 술김에 비밀히 여쭙는 말씀이지만, 주인 어른께서 우리 회의 회장이 되신 데 대해서 불평을 품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줄은 짐작허시겠지요? 그 중에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루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허게 인심을 써주셔야 과격헌 행동꺼정 허려구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 볼 수가 있겠에요. 사세가 매우 급허길래 이렇게 찾어뵙구 무사히 타첩을 허시두룩 허는 게니, 나중에 후회가 없으시두룩 허시는 게 상책일 것 같어요. 점잖으신 처지에 혹시 길거리에서래두 젊은 사람들헌테 단단히 창피를 당허시면 거 모양이 됐습니까?"

하고 타이르듯 하니까, 기천은,

"아아니, 자네가 날 위협을 허는 셈인가?"

하며 빨끈하고 쇤다. 동혁은 정색을 하며,

"온 천만에, 위협이라뇨. 그렇게 오해를 허신다면 무슨 일이 생기던 저버텀 발을 뺄 터니 맘대루 해보세요."

하고 정말 슬그머니 을러메었다. 기천은 상을 물리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숨이 가쁜 듯 벽에가 기대어 쌔근쌔근하며 한참이나 대 물뿌리만 잘강잘강 씹다가,

"그야 웃음엣말일세만 내 귀에두 이런 말 저런 말 들리네. 저희들이 날 어쩌기야 허겠나만, 아닌게아니라 모두 마구 뚫은 창구녁 같아서 걱정일세. 나 없는 새 회관 문짝을 걷어차서 떼어 놨다니 온 그런 무지막지헌 놈들이 있나. 허나, 자네 같은 체면두 알구 지각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두룩 무마를 시켜 줄 줄 믿네."

하고 금세 한풀이 꺾인다.

"그러니까 뒷일은 제게다만 맡겨 주시구, 그 대신 제 말씀은 들어 주셔야 헙니다."

하고 동혁은 바짝 들러붙었다.

제아무리 깐죽깐죽한 사람이라도, 술이 잔뜩 취한데다가 말을 아니 들으면 당장에 저를 엎어 누를 듯한 형세를 보이는 동혁의 위품에는, 한 손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변의 위험을 모면하려는 것뿐 아니라 저 딴에는 술기운에 마음이 커져서,

"어디서 돈들이 생겨서 한몫 갚는다는 건가?"

하며 머리맡의 문갑을 열고 극비밀로 넣어 둔 치부책을 꺼내는데, 열쇠가 제 구멍을 찾지 못할 만치나 수전증이 나서 이구멍 저구멍 허투루 꽂다가 열었다.

동혁은 그 돈이 삼사 년 동안이나 죽을 애를 써서 모은 돈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서류를 꺼내서 채권자가 적어 둔 것과 차용증서를 일일이 대조를 해서 금액을 맞추어 본 뒤에 수건에 꼭꼭 싸서 허리에 차고 온 지전 뭉치를 꺼내더니,

"자아, 세보시지요."

하고 밀어 놓는다.

기천의 눈은 버언해졌다. 담배진이 노랗게 앉은 손가락에 침칠을 해가며 지전을 세어 보더니,

"이걸루야 빠듯이 본전밖에 안 되네그려?"

하고 변색을 한다. 동혁은,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하고 위엄 있게 기천을 똑바로 쏘아보며,

"아아니, 그럼 오 푼 변으루 놓은 걸 변리까지 다 받으실 줄 아셨든가요? 법정 이자두 두 푼 오 리밖에 아니 되는데 그 사람들의 사폐를 봐줍시사구 제가 일부러 온 게 아니겠에요? 그 사람들이 안 내겠다구 버티면 어떡허실 텝니까? 그 여러 사람을 걸어 재판을 허려면 소송 비용이 얼마나 들지두 따져 보면 아시겠지요?"

하고 무릎이 마주 닿도록 더 부쩍 다가앉는다. 기천은 바윗덩이만한 사람에게 짓눌릴 것 같아서,

'저눔이 여차직허면 날 한구석에다 몰아넣구 목줄띠라두 조르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는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여보게, 내가 자선사업으루 돈놀이를 허는 줄 알었나? 인제 와서 천 원 돈에 가까운 이자를 한 푼두 받지 말라는 거야 될 뻔이나 헌 수작인가?"

하고 실토를 하면서 앙버틴다. 동혁은 그 말에 정말로 흥분이 되어서,

"아, 그래 회장 체면에 앞으루두 고리대금을 해자실 텝니까? 그만큼 긁어모았으면 흡족허지, 죽지 못해 사는 회원들의 고혈까지 긁구두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을까요? 그 돈인즉슨 조합에 근저당을 해놓구 한 푼두 못 되는 변리루 얻어다가 오 푼씩, 심허면 장변까지 논 게 아닙니까?"

하고 목소리를 버럭 높이며 목침을 들어 장판 바닥이 움쑥 들어가도록 탁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기천의 가슴도 쿵 하고 울렸다. 그래도 기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노랑 수염만 배틀어 올리면서 꽁꽁 하고 안간힘을 쓰더니 최후로 용기를 내어 발악한 듯,

"난 헐 수 없네!"

하고 똑 잡아뗀다. 기한을 몇 번만 넘기면 채무자를 불러다 세워 놓고 '이놈아, 이 목을 베고 재칠 놈 같으니라구. 외손씨아에 불알을 넣고는 배겨두 내 돈을 먹군 못 배길라' 하고 진땀이 나도록 기름을 짜던 솜씨라, 아무리 동혁의 앞이라도 돈에 들어서만은 저의 본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엉 헐 수 없을까요?"

동혁의 얼굴이 뻘개졌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두 번 말헐 게 있나. 헐 수 없으니깐 헐 수 없다는 게지."

그 말을 듣자 동혁은,

"그럼 나 역시 헐 수 없쇠다. 우격으루 될 일이 아니니까요."

하고 기천의 앞에 내놓았던 지전 뭉치를 도루 집어 꼭꼭 싸서 허리춤에다 차며,

"허지만 이 돈은 졸연히 받지 못헐 줄 아세요. 앞으루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책임을 질 수두 없구요."

하고 목침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동혁이가 장지를 탁 닫고 나갈 때까지 기천은 달싹도 아니 하고 앉았다. 신발 소리가 어둑침침한 마당으로 내려가는 것을 듣고야 발딱 일어나서,

"여게, 날 좀 보게."

하고 쫓아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동혁의 말따나 까딱하면 본전도 건지기가 어렵고, 두고두고 녹여서 받는대도 여간 힘이 들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기만이에게 오백 원이나 급전을 도적맞아서 그 벌충을 대야만 되게 된 형편인데, 또 한편으로는 동혁이가 감정이 잔뜩 난 회원들을 선동해 가지고 밤중에 습격이라도 할 것 같아서 미상불 겁이 났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동혁의 대답은 매우 퉁명스럽다.

"이리 잠깐만 들어오게."

"들어감 뭘 허나요."

"글쎄, 잠깐만 들어와. 이 사람, 왜 그렇게 변통수가 없나?"

동혁은 못 이기는 체하고 따라 들어갔다.

"그거 이리 내게. 오입해 없앤 셈만 치지."

하고 기천은 손을 벌린다. 동혁은,

"그럼 그 차용증서 모아 둔 걸 이리 주시지요."

하고 돈과 차용증서를 바꾸어 들었다. 그러고는 눈을 꿈벅꿈벅하더니,

"매사는 불여튼튼이라는데, 돈을 한 푼두 안 남기구 다 받었다는, 표를 하나 써주시지요."

해서 빚 갚은 증서를 씌우고 도장까지 찍게 하였다. 동혁은 그제야 수십 장이나 되는 인찰지를 구겨 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재떨이 위의 성냥을 집어 확 그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