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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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살포라뇨?"

영신이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대추나무가 얼크러진 큰마을 편을 바라본다. 옥색 저고리를 입은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안경을 번쩍거리며 기다란 살포를 지팡이삼아 짚고 언덕길을 어슬렁거리고 내려온다.

"살포는 감농이래두 헐 줄 아는 사람이 물꼬나 보러 댕기는 데 쓰는 건데요, 저 사람은 일년 감이 열린 걸 보구 '거 감자 탐스럽게 열렸군' 허던 출신이, 살포를 건성 휘두르며 댕겨서 건살포라구 별명을 지었어요."

입바른 소리 잘 하는 동화의 대답이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영신은 새신랑처럼 옥색 저고리를 입은 인물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물었다.

"성님헌테 들으셨겠지만, 저 강도사 집의 둘째아들 기만(基萬)이에요. 동경 가서 어느 대학엘 댕기다가 무슨 공부를 그렇게 지독허게 했는지 신경쇠약이 걸려 나왔다나요."

"네, 그래요? 그럼 이 근처선 제일 공부를 많이 헌 청년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헌데 자제가 아주 노새예요."

"아아니, 노새가 뭐야요?"

하고 영신이가 채쳐 묻는 말에 동화는 무심결에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놓고는 말대답을 얼른 못 하고 픽픽 웃기만 한다. 노새는 말과 당나귀 사이에 난 튀기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물건이 명색만 달렸지 생식은 못 하는 동물이라는 것까지는 영신이가 모르고 있었다. 이 동리 청년들끼리 엇먹는 수작으로 허울만 좋지그려, 아무짝에 소용이 닿지 않는 인물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영신은 어렴풋이 '기만'이란 사람을 놀리는 말이거니 하고 더 묻지를 않았다.

기만이는 언덕에 살포를 꽂고 왼팔은 하느르르한 회색 바지를 입은 허리춤에 찌르고 서서 여러 사람의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섰다. 무슨 풍경화나 감상하는 듯한 자세를 짓고 선 것이 몹시 아니꼬워 보여서 그것만 보아도 비위가 뒤집히는 듯,

"병이 났습네 허구 영계만 실컨 과먹구 나니까 게트림이 나는 게지. 저 작자가 어슬렁거리구 댕기는 꼴은 뒀다가 봐두 눈꼴이 틀리드라."

하고 동화는 저 혼자 투덜거린다. 곁에서 말뚝을 박고 있던 형은,

"아서라, 오다가 다 들을라. 귀먹은 욕두 그만큼 먹였으면 고만이지 그렇게 원수 치부를 헐 게야 뭐 있니? 제 딴엔 우리헌테 허느라구 허는걸."

하고 아우의 험구를 틀어막는다. 이번에는 건배가 영신의 곁으로 와서 바지에 흙탕물이 튀어서 말라붙은 것을 부벼 털면서 기만이가 앉은 언덕 위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래두 저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저의 아버지나 형헌테 대면 없는 사람들을 꽤 동정허는 셈이에요. 이 논 닷 마지기를 우리헌테 도지루 얻어 주려구, 담배씨루 뒤웅박을 파려고 드는 제 형허구 쌈을 다 했으니까요. 겉탈인지 몰라두, 우리가 허는 일을 여간 찬성을 허지 않어요. 이따금 우릴 청해서 그 집엘 가는 날이면 이밥에 고기 반찬에 한밥 잘 먹여서 소복을 단단히 허구 나오는데, 저 동화허군 아주 옹치거든요. 술만 먹으면 '요샛세상에 양반이 무슨 곤장을 맞을 양반이냐'구 들이대기를 일쑤하는데 그뿐이면 좋게요. 실컨 얻어먹구 나선 들어 두라는 듯이 허는 소리가 '제에길 요까짓 걸루 어름어름 우리 비위를 맞추려구, 몇 대를 두구서 저희가 우리를 빨어먹은 게 얼만데…… 그걸 다 토해 노려면 안직 신날두 안 꼬았다' 허구 건주정을 한바탕씩 허니 누가 듣기 좋다나요. 저 사람두 동화라면 딱 질색이건만, 그럴수록 극성맞게 쫓어다니며 성화를 받쳐서 아주 학질을 떼지요, 여간한 심술패기라야지……."

"그렇게 혈기 있는 청년두 있어야 해요. 급헌 때면 그런 사람이 앞잡이 노릇을 하니깐요."

하고 영신은 동화가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칭찬 비슷이 하고는,

"그런데 여긴 지금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하고 묻는데, 어느 틈에 기만이가 언덕을 내려와서 영신이가 앉은 맞은편 논둑에 가 버티고 섰다. 여학생이 동혁이를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기만이가 가까이 오자 동혁의 형제는 못 본 체하고 돌아섰는데, 일하던 사람 중의 반수 이상은 그 앞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고,

"구경 나오셨에유?"

하고 손길을 마주 부빈다. 그들은 강도사 집의 작인들이나 그렇지 않으면 돈을 얻어 쓴 사람의 자질들인 것이다.

기만이는 바지춤에 손을 찌른 채 여러 사람이 인사를 하는 대로,

"응, 응."

하고 코대답을 할 뿐이다. 논 귀퉁이에다가 살포를 꽂고 우두커니 섰다가 석돌이란 회원을 손짓을 해서 부른다. 영신의 편으로 눈짓을 하며 무어라고 수군거리는 것이 '저게 동혁이를 찾아온 여자냐'고 묻는 눈치다. 석돌이는 말대답하기가 거북한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다가 일자리로 돌아간다.

영신이는 기만이가 맞은짝에서 안경 너머로 똑바로 건너다보고 섰는 것이 면구스러워서,

"난 저리루 거닐다 오겠어요."

하고 일어선다.

"나 허던 일은 다 했는데, 혼자 다니시다 길이나 잊어버리시게요."

하고 건배가 뒤를 대선다. 동혁은 책임상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영신이 혼자 돌아다니라고 내버려두기도 안됐고 하던 이야기도 남아서 건배는 입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기만의 등뒤를 돌아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논과 밭이 눈앞에 질펀히 깔렸는데 여기저기서 두레로 물을 푸는 소리와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서너 군데서나 못자리를 만드느라고 흰 옷 입은 농군들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 보인다.

영신은 바위 틈에 홀로 피었다가 이운 진달래 잎사귀를 어루만져 주다가,

"참, 아까 양반 얘길 하다가 중동무이를 했죠?"

하고 먼저 말을 꺼내더니,

"그런데 저 기만이란 사람의 아버지, 무슨 도산가 허는 이는 뭘 하는 사람이야요?"

하며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남들은 다 벗고 들어서서 일을 하는데 저 혼자 외톨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듯 하기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료하기도 해서 이말 저말 묻는 것이다.

"합방 전해꺼정 금부의 도사라는 벼슬을 다녔다나요."

"금부라뇨?"

"지금으루 치면 경무국쯤 되겠는데, 도사란 건 경부 같은 거라지요. 아무튼 그 늙은이는 여태 노루꼬리만헌 상투를 달고 체수는 조그만히 빠쭈한 노랑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사리구 앉어서, 에헴에헴 헛기침을 허면서 위엄을 부리는 게 여불없는 염소지요. 헌데 체격은 고 모양이래두 목구녁 하나는 크거든요. 한참 망해 들어가는 판에, 부자들이나 장사치를 사뭇 도적놈으로 몰아서 옭아다가는, 주리를 틀구 기왓장 꿇림을 시켜서, 박박 긁어 모아 이 고장에 전장(田庄)을 장만해 가지구 내려왔대요. 내려와선 심심허다구 돈놀이를 허구, 장릿벼를 놔서, 이 근동에서 강도사의 돈을 안 얻어 쓴 사람이 하나두 없다고 해두 과언이 아니에요."

"멀쩡한 고리가시(고리대금업자)로군요."

"고리가시구말구요. 그 취리허는 법이나 장릿벼를 놔먹는 수단이 알구 보면 기막히지요. 그런데, 근자엔 '인젠 이 세상에 더 두구 볼 게 없다'구 매일 술로만 장복을 허다가 간이 뚱뚱 부었다나요. 그래서 살림두 기천(基千)이란 큰아들헌테 내맡기구선 꼼짝못허구 누웠에요."

"그래 저 오입쟁이 같은 사람이, 그 늙은이의 둘째아들이군요?"

"저 기만이라는 인물만은 그래두 해외 바람을 쏘여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짐작은 허는지 저 딴엔 우리가 허는 일을 찬성두 허구 추렴두 몇 곱절이나 내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용허면 좋지 않아요? 가끔 기부금이나 뜯어 오구요. 청석골 근처에두 대학이니 전문학교니 졸업을 허구 와서, 저 건살포 모양으로 번들번들 놀면서 장거리루 술추렴이나 다니는 사람이 서넛이나 돼요. 우리가 허는 일을 헤살이나 놀지 말었으면 헐 뿐이지, 그 따위 고등 유민들헌테 기대허는 건 없지만요, 논밭 팔어 가며 공부헌 청년들이 다 그 뻔새로 건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여간 한심허지가 않어요."

하는데, 기만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그 백납같이 흰 얼굴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올라온다. 아마 영신이와 인사를 청하려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많지요. 저 사람이 첨엔 자꾸만 우리 회엘 들겠다구 허니까, 동혁이 말이 '어느 시기까지는 누구나 다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구 찬성을 해서 입회를 시켰더니 얼마 동안은 '나두 상일을 해보겠다'구 저 딴엔 열심으로 따러댕겼는데……."

"그래서요?"

"저의 부형은 양반의 체면을 더럽히는 미친 자식이라구 야단을 치다못해, 아주 내버려두게까지 됐었에요. 장에서 새루 사온 괭이를 뻔쩍거리며 그루를 가는 데 덤벼들어서 하룻동안 덥적거리더니 이튿날은 고만 몸살이 나서 한 댓새나 된통으루 앓았대요. 저의 집에선 '이거 생자식 잡겠다'구 자동차를 가시키리(대절)해서 읍내의 공의를 다 불러오구 한참 야단법석을 했에요."

"참 정말 혼이 났군요."

"그뿐이면 좋게요. 저의 집 앞 채마전에서 한 반나절만 꿈지럭거리면, 그날 밤엔 행랑 계집들을 불러다가 '다리를 주물러라', '허리를 밟어라' 허구 죽는 시늉을 헌대요. 그나 그뿐인가요, '나두 농군들이 단꿀 빨듯 허는 걸 먹어 봐야 헌다'구 머슴들이 두레를 놀던 이월 초 하룻날은 지푸래기를 꽂아두 안 넘어가는 그 틉틉헌 수수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들이켜군 그만 배탈이 나서 한 사날 동안이나 설사를……."

하는데, 영신은 웃음을 참다못해서,

"고만요, 고마안."

하고 허리를 잡으며 손을 내젓는다. 건배의 수다에는 또다시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기만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자 앞질러 두 사람이 앉은 데로 올라왔다.

"자, 그만 우리집으루 내려가십시다."

하는데, 기만이는 살폿자루를 내두르며 뒤미처 올라왔다.

기만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동혁이더러 소개를 해달래서 영신이와 인사를 했다. 기만이는 영신이가 초면이건만 M대학 정경과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쇠약이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벽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까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 만치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영신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세요? 네, 그러시구말구요."

하고 말대꾸를 해준다. '동지'라는 말만 해도 귀에 거친데, 함께 일까지 한다는 데는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응달에서만 지내서 하얀 살결과 안경 속에서 사람을 깔보는 듯한 조그만 눈동자며, 삶아 논 게발같이 가냘픈 손가락을 보니, 어쩐지 말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명주 옥색 저고리를 입은 것과 부사견 회색 바지를, 또 구두가 덮이도록 사복을 치뜨려 입은 것이 바로 보기 싫을 만치나 눈꼴이 틀렸다.

기만은 안 보는 체하면서도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심심허신데 우리집으로 놀러 가시지요."

하면서 동혁을 돌려다보고,

"우리 동지들끼리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좋은 얘기나 듣구 싶은데……."

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는 영신이가 먼 데서 찾아온 귀한 손님이라고 대접을 하려는 것보다도, 몸이 비비 틀리도록 심심한 판에 동리에 처음으로 떠들어온 신여성을 불러다 놓고 하루 저녁 소견이나 하고 싶은 눈치다.

제가 거처하는 작은 사랑채를 말끔 중창을 하고 유리를 붙이고 실내를 동경 같은 데의 찻집을 본떠서 모던식으로 꾸며 논 것과, 또는 새로 사온 유성기를 틀면서 '이 시굴 구석에도 이만치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또 한편으로는 몇 해를 두고 이혼을 못 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던 본처를 월전에 쫓아보내서 영신이 같은 여자를 저의 집으로 한번 끌고 들어가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혁이가 얼른 말대답을 아니 하는 것을 보고 영신은,

"오늘 저녁은 저 동혁 씨 댁으루 가기로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하고 두말 못 하게 똑 잡아떼었다. 기만은 자존심을 상한 듯,

"그럼 여러 날 계실 테니까, 일간 다시 한번 청허지요."

하고 머리를 까딱해 보이더니 무색해서 내려간다.

"난 우리집에까지 따러 내려올 줄 알았더니…… 제가 헐 일 없는 생각만 허구, 줄줄 따러댕기는 덴 학질이야."

하고 동혁은 앞을 섰다. 건배는 휘적거리고 동혁의 뒤를 따라오다 말고 멋쩍은 듯이,

"여보게, 약국의 감초두 빠질 차롄가?"

하고 일부러 돌아서는 체를 한다.

"아따 이 사람, 화젓가락 윗마디 꼬듯 허지 말구 어서 사발 농사나 지러 오게그려."

하고 동혁은 건배를 돌려다보고 손짓을 한다.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면 인사를 허자마자 대뜸 저의 집으루 가재요?"

"그러니깐 자제가 노새지요."

동혁도 영신을 돌려다보며 웃다가,

"그 사람은 문제가 없에요. 잘 구슬려 주기만 허면 고만이니까. 허지만 기천이라는 그 형 때문에 큰 걱정이에요. 우리 일엔 덮어놓구서 반대니까요. 반대만 하면 좋겠는데 머리악을 쓰구 훼방을 놀아서 마구 대들어 싸울 수두 없구. 큰 두통거린걸요."

하고는 쩍 하고 입맛을 다신다. 영신이가,

"형은 뭘 허는 사람인데요?"

하니까, 입이 궁금하던 건배가 다가선다.

"대대로 곱사등이라구, 그자두 고리대금을 허지 뭘 해먹겠에요. 여러 해 면서기를 댕기다가 요샌 명정거리나 장만을 허려는지 면협의원을 선거허는 데 출마를 했다나요. 저의 아버지버텀두 더 옹충맞게 생겨먹은 게, 얼리지 않는 양복을 뻐질르구 자전거를 타구서 유권자를 찾어댕기는 화상이란 참 장관이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루 청년들이 허는 일을 반대허는 건가요?"

하고 영신이가 묻는데 어느덧 동혁의 집 앞까지 당도하였다. 동혁의 어머니는 싸리문 밖으로 내달으며,

"어서 오우."

하고 여러 해 보아 오던 사람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그는 치마를 갈아입고 새 버선까지 꺼내 신었다.

동혁은 저의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영신에게 보여 주기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짐작대로 영신을 저의 색싯감으로 알고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 싫어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얘야, 좀 가까이 보자꾸나. 먼 광으루만 보구 어디 알 수 있니? 색싯감을 서넛째나 퇴짜를 놓더니만 연분이 따루 있는 줄이야 누가 알었겠니? 으뭉스레 굴지 말구 저녁엔 꼭 데리구 오너라."

하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며느릿감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사실 정분이, 차순이, 필례 할 것 없이 동네의 색시들은 동혁이를 믿고 있었는데, 당자가 '안직 장가를 아니 들겠다'고 쇠고집을 세워서 다른 데로 혼인을 한 뒤에 벌써 아들딸들을 낳고 사는 중이다. 근동에서도 여러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건만, 아무리 사윗감을 탐을 내어도, '글쎄 갓서른까진 장가를 안 든다니까…… 암만 해보구려' 하고 막무가내로 말을 안 들어 왔다. 어제 저녁에는 동화도 형과 겸상을 해서 밥을 푹푹 퍼넣다가,

"성님, 사람이 썩 무던해 뵈는데…… 쇠뿔두 단결에 빼랬다우. 그 덕에 나두 고만 장가나 들어 봅시다."

하고 뒤퉁그러진 소리를 해서, 형은,

"너두 날 놀리는 셈이냐? 그렇게 급헌데 누가 너 먼첨 장가를 들지 말라든."

하고 씁쓸히 웃었다.

한편으로 영신이도 동혁의 생활이 보고 싶었다. 오래 두고 머릿속에 그려 보던 것과 같은가, 또한 얼마나 틀릴까―--- 하고 적지 않이 궁금히 여기다가 동혁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차한 살림이요, 더구나 홀앗이라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학교까지 다니던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는 너무나 검소하다. 흙바닥에다가 그냥 기직대기를 깔았는데, 눈에 새틋하게 뜨이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윗목에 놓인 책상에는 학교에 다닐 때 쓰던 노트 몇 권이 꽂혔고, 신문 잡지가 흐트러졌을 뿐이요, 아랫목에는 발길로 걷어차서 두르르 말아 놓은 듯한 이불 한 채가 동그마니 놓였다. 참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마분지로 도배를 한 벽에 붙은 사기 등잔인데, 그것도 오늘 지나다니며 들여다본 다른 농가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무엇을 장하게 차리는 것도 아니나, 눈 어둔 어머니는 부엌 속에서 데그럭거리며 어둡도록 꾸물거린다. 조금 있자, 건배의 아낙이 달걀 한 꾸러미를 행주치마로 감추어 가지고 노인의 응원을 하러 왔다.

"그 색시 복성스럽게 생겼습죠? 조금두 신식 여자 티가 없구, 아주 서글서글헌 게 속터진 사내 같어요."

하더니,

"인제야 부엌일을 면하시나 봅니다."

하고 밥을 푸는 동혁의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두 김칫국버텀 마시는 셈인지 누가 아나. 내 뱃속으루 났어두 당최 그눔의 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팔자에 살아생전 그런 며느리를 얻어 보겠나."

하고 마누라는 한숨을 내쉰다. 박첨지와 동화는 자리를 내어 주느라고 마실을 갔는데, 윗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농촌 문제를 토론하고, 요새 한참 떠드는 중에 있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을 비판하는데, 건배의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참 정말 미안허군요. 이렇게 여기꺼정 출장을 허셔서……."

하고 영신이가 일어나며 상을 받아 들었다. 동혁의 어머니가 문 밖까지 따라와 눈을 찌긋 하고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숫제 찬 없는 밥을 대접헌답시구…… 온, 시굴 구석이라 뭐 있어야지. 늙은 사람이 헌 거라구 숭을랑 보지 말구 많이 자슈."

한다. 영신은 일어서며,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허십니다. 들어오십시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괜찮소. 어서 자슈."

하고 여전히 '허우'를 하니까, 영신은,

"말씀 낮춰 허십쇼."

하고 정말 색시처럼 조심스러이 앉았다. 건배의 아낙은 남편을 보고,

"그런데 두 분이 얘기두 조용히 못 허게시리 뭣 허러 줄줄 따라댕기는 거요? 집에 가서 어린애나 봐주지 않구?"

하니까,

"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자리를 가려서야 되나."

하고 건배는 소매를 걷으며 젓가락을 집는다.

*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아직 힘드는 운동은 허지 말구 편히 쉬시지요."

하고 동혁이가 말려도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는 것을 대기하는 영신은 맨 뒷줄에 서서 끝까지 체조를 하고,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애향가를 불렀다.

"얘, 동혁이헌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헌다드라."

하는 소문이 쫙 퍼지자 이삼 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삑삑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운동꾼이 아니요 구경꾼인 것은 물론이다.

"허, 이거 장꾼버덤 엿장수가 많다더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나."

하면서도 건배는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헙시오. 아침 일찍이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 허면 정신이 쇄락해지구, 첫째 소화가 잘 됩니다."

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

"체증이나 나거든 옴세."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 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영신은 농우회원들끼리만 모이는 일요회에도 방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뒷줄에 가 앉아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건배의 동의와 만장의 찬성으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청석골에서는 저 한몸으로 분투하는 이야기며, 남의 강제나 또는 일종의 유행으로 하는 소위 농촌운동과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농촌운동을 구별해 가면서 그 성질을 밝히고,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를 물론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단결할 필요와 언제나 연락을 취하자는 부탁을 하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나, 영신의 말은 억양이 심해서 유창하지는 못해도 조리가 닿고 열이 있어서 농우회원들은 물론 동혁이도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허구 수양도 어지간히 했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헌 것두 많은걸' 하고 속으로 혀를 빼물 정도였다.

건배의 아낙도 문 밖에서 동리 여편네들과 엿듣고는 매우 감동이 되어,

"여자두 저만큼이나 났어야 사내들헌테 코큰 소리를 해보지."

하고 자기가 보통학교 졸업밖에 하지 못하고 시집이라고 와서, 살림과 어린것들에게 얽매여 늙어만 가는 것을 분하고 절통히 여겼다.

온 지 나흘 되는 날 저녁에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앞장 세우고, 동네에 말귀 알아들을 만한 여인네들을 그 집 마당에 모아 놓고 또 한 번 일장연설을 하였다.

"내가 이 한곡리에 와서 며칠이라도 지내게 된 걸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네에도 부인들끼리의 회를 하나 모아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그런 모임을 조직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부인회를 모은대야, 그네들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터이요, 남자들처럼 금주 단연을 하거나 도박 같은 것은 금할 필요도 없고 살림살이를 이 이상 더 조리차를 해서 저축을 할 여지도 없지만, 당분간은 여자들의 글눈을 뜨여 주는 강습회 일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힘을 빌지 말고 여자들끼리 자치를 해서, 지금부터 하루에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줌씩을 모아서라도 농한기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경비를 써나갈 것을 힘있게 말하였다.

마당 가득히 모인 여인네들은 손 하나 들 줄은 모르면서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영신은 회 같은 것을 조직하는 데 훈련을 받아 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격으로 추천해서 '한곡리 부인근로회'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유지해 나아갈 방법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 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몹시 거북한 것은 식사를 할 때는 물론 농우회 석상에서나 마당과 행길에서까지 회원들과 동네 여자들이 이구석 저구석에서 수군거리며, 뒤를 쫓아다니면서까지 동혁이와 영신의 행동과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털끝만치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 대하는 손님과 다름없이 더면더면하게 굴었다.

그 뒤로 기만이는 영신을 청하려고 몇 번이나 동혁의 집으로 행랑아범을 보내고, 머슴을 시켜 청좌하는 편지까지 보내고 하였다. 동혁은,

"그분이 왜 우리집에 있는 줄 아나?"

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전해 달라는 편지는 받아 두고도 영신에게 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영신이가 그런 편지를 직접 받았더라도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하든지 해서 이른바 초대회에 까닭 없는 주빈 노릇 하기를 거절하였으리라. 동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나 무슨 집회 같은 데는 자발적으로 출석을 하였지만, 기만의 심심풀이를 해주거나 그런 사람이 자랑하는 생활을 보기 위해서, 더구나 홀로 지낸다는 남자를 찾아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소갈데 말갈데 없이 다니나, 이러한 경우에는 처녀로서의 처신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기만이는 매우 분개하였다.

"제가 얼마나 도고헌 계집이길래 내가 여러 번 청허는데 안 온단 말이냐!"

하고 하인을 세워 놓고 몰아대다가,

"동혁이버텀 못생긴 자제지. 저헌테 온 여자를 내가 어쩔 줄 아나.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고 벼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낮이 훨씬 겨워서 기만은 자회색 봄 양복을 말쑥하게 거들고 도금으로 장식을 한 단장을 휘두르며 바닷가 영신이가 유숙하는 집으로 찾아갔다. 영신은 잡지를 보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하고 달갑지 않게 맞았다.

"하두 여러 번 청해두 안 오시길래, 몸이 편치 않으신가 허구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하며 꾸며 대는 말에, 영신은,

'지나는 길이라니 바닷속에 볼일이 있었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러한 궁벽한 촌에서 빳빳한 칼라에 자줏빛 넥타이를 매끈하게 매고 나온 것이 옥색 저고리에 부사견 바지를 입었던 것만치나 눈허리가 시었다. 방으로 들어오라고만 하면 마냥 늑장을 부리고 앉을 것 같아서 멀리 신작로 편짝을 바라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 서넛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게 뭘 허러 쏘다니는 사람들인가요?"

하고 한마디를 물었다. 기만이는 문지방에 가 걸터앉으며, 안경 속에서 실눈을 짓고 맨 앞에 곡마단의 원숭이처럼 허리를 발딱 제치고 자전거를 저어 가는 사람을 가리키더니,

"저게 우리 아니키(형)예요. 저 아니키 때문에, 원 창피해서……."

하고 기만은 고개를 돌리며 소태나 먹은 듯이 입맛을 다신다. 영신은 건배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형제분이 뜻이 맞지 않으시는 게로군요."

하고 아우의 편을 드는 체하니까, 기만이는 피죤을 꺼내 피어 물며,

"아니키는 당최 이마빼기에 송곳을 꽂아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에고이스트야요. 돈푼 긁어모으는 것밖에는 아무 취미두 모르는 인간인데, 게다가 면협의원인가 허는 게 큰 벼실이나 되는 줄 알구 뽐내는 화상이야 요란허지요. 이래저래 나허군 매사에 충돌이니까요. 오늘 아침에두 대판으루 싸웠는걸요."

한다.

"왜요?"

"아, 엊저녁엔 공직자 부스럭지들을 대접헌다구 주막의 갈보까지 불러다가 밤새두룩 술상을 벌여 놓구 뚱땅거려서 잠두 못 자게 굴길래 그래서 한바탕 야단을 쳤지요."

하고 백판 아무 상관도 없는, 더구나 초면의 여자를 대해서 제 형을 개 꾸짖듯 한다. 영신은 담배 연기를 피하느라고 외면을 하면서,

'참 정말 별 쑥스런 자제를 다 보겠군.'

하면서도 하는 소리를 들어 보느라고,

"그래두 그만치 유력허신 분이니까 동네 일은 열성 있게 보시겠지요?"

하고 넘겨짚었다. 기만은 핥아 놓은 것처럼 지꾸(머릿기름)를 바른 머리를 홰홰 내저으며,

"말씀 마세요. 박동혁이 김건배 헐 것 없이 이 동네의 젊은 사람들은 아주 원수 치부를 허는걸요."

"왜요? 퍽 건실헌 분들인데요."

"그 속이야 뻐언허지만…… 그까짓 게 무슨 얘깃거리나 되나요?"

하고 기만은 일본말로,

"도니가쿠 안나 진부쓰가 무라니 오루카라 난니모 데키코 아리마셍요(아무튼 저 따위 인물이 동네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구 될 턱이 없지요)."

하고 결론을 짓더니, 조츰조츰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든다. 영신은 어이가 없어,

'대체 당신은 얼마나 낫소?'

하고 입 밖까지 나오는 말을 마른침으로 꼴깍 삼키고, 솜털 하나 없이 면도질을 한 기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건배의 아낙이 꽃게를 서너 마리나 들고, 새로 조직된 부인근로회의 회원들을 대여섯 사람이나 데리고 왔다. 영신은 구원병이나 만난 듯이 그네들을 반기는데, 기만은,

"그럼 내일 저녁에래두 놀러 와 줍시오. 꼭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어물어물하다가 멋쩍게 꽁무니를 빼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동혁이와 건배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숙식이 부드러이 지내서 영신은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다. 처음부터 어느 한 귀퉁이에 병이 깊이 들었던 것이 아니요, 영양 부족과 과로한 탓으로 전신이 매우 쇠약해졌던 터이라, 불과 며칠 동안에 눈에 보이는 듯이 피부가 윤택해지고 혈색이 좋아졌다. 영신이 자신도 동지들의 자별한 정의에 눈물이 날 만치나 고마워서, 아침 저녁으로 한곡리 청년들의 건강과 그네들의 사업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처음에는 고작해야 사나흘만 견습도 할 겸 쉬어 가자던 것이 '하루만 더, 이틀만 더' 하고 간곡히 붙잡는 통에 자별한 호의를 매몰스러이 뿌리치고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건배의 아낙은,

"아우님, 우리가 한번 작별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하고 눈물을 흘려 가며 붙잡아서, 차마 떼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신은 하루라도 더 남의 신세를 지며 저 혼자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죄나 짓는 것처럼 청석골 사람들에게 미안하였다. 영신이가 청석골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뒤에 야학의 교장 겸 소사의 일까지 겹쳐 하고, 어린애들에게는 보모요 부녀자들에게는 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교회의 관계로 전도 부인 노릇도 하고 간단한 병이면 의사 노릇까지 하여 왔다. 그렇게 몸 하나를 열에 쪼개 내도 감당을 못 할 만치나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여러 날 나와 있으니 모든 사세가 하루라도 더 머무르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눈에 암암한 것은 저녁마다 손목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던 어린이들이요, 귀에 쟁쟁한 것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다. 엄동설한에도 홑고쟁이를 입고 다니던 계집아이들―---그러면서도 으슥한 구석으로 선생을 무작정 끌고 가서 황률이나 대추 같은 것을 슬며시 손에 쥐어 주고는 부끄러워서 꼬리가 빠질 듯이 달아나던 그 정든 아이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밤 야학을 파하고 사숙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일갓집에 붙어서 사는 금분이란 계집애가 숨이 턱에 닿아서 쫓아오더니, 선생님의 재킷 주머니에다가 꽁꽁 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넌지시 넣어 주고 달아났다.

"아서라, 이런 것 가져오지 말구우 네나 먹어라, 응."

하면서도 영신은 어린애의 정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왜콩이나 밤톨이거니.'

하고 만져 보지도 않고 가저 재킷을 벗어 거는데 방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니 껍질을 말끔 깐 도토리였다.

영신은 떫어서 먹지도 못하는 그 도토리를 접시에 소복이 담아 책상머리에 놓고 들여다보고 손바닥에 굴려 보고 하다가 콧마루가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뜨끈하게 솟던 생각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당장 날아라도 가서 안아 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거짓말은커녕 실없는 소리도 잘 하지 않는 동혁이까지,

"발동선이 고장이 나서 못 댕긴다는데, 저 바다를 건너 뛸 재주가 있거든 가보시지요."

하고 붙잡는 바람에 그 말을 곧이듣고 한 이틀을 더 묵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신은 누구에게나 발표하지 못한 고민을 가슴속에 감추고 왔었다. 사실은 그 고민을 해결짓기 위해서 동혁이와 의논을 할 양으로 일부러 온 것이었다. 정양을 하려는 것도, 동혁이가 실지로 일하는 것이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십이 훨씬 넘은 처녀로서 저 혼자로는 해결지을 수 없는 일생에 가장 중대한 문제와 부닥쳤기 때문이다. 여간한 남자보다도 용단성이 있는 영신이건만, 동혁이와 단둘이 만나서 가슴속의 비밀을 조용히 고백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동혁의 얼굴만 마주 대해도 그 말을 끄집어내려던 용기가 자라 모가지처럼 옴츠러들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