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제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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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골서 한 십 리쯤 되는 흑석리(黑石里)라는 동리에, 그 근처에서 제일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낭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한낭청은 한곡리의 강도사 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천 석도 넘겨 하리라는 소문이 난 지도 여러 해나 되었다)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큰 소를 한 마리나 잡아 엎었다더라―---'

'읍내에서 기생하고 광대를 불러다가 소리를 시키고 줄을 걸린다더라―---'

인근 각처에 소문이 굉장히 퍼졌다. 청석골서도 그 집의 논을 하는 작인들은 물론, 갓을 빌려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늙은 축들이 십여 명이나 떼를 지어 구경을 갔다. 여편네들도 풀을 세게 먹여서 버석거리는 치마를 빼질러 입고 그 뒤를 따랐다. 소를 통으로 잡아 엎고 기생 광대까지 놀린다는 것은, 이 궁벽한 시골서 구경거리에도 주린 그네들에게 있어서 몇십 년에 한 번 만날지 말지 한 좋은 기회이다.

'떵기덩 떵더꿍.'

'닐리리 닐리리 쿵다쿵.'

한낭청 집 널따란 사랑마당 큰 느티나무 밑에는 차일을 치고 마당 양 귀퉁이에는 작수를 받치고 팔뚝 같은 굵은 참밧줄을 핑핑히 켕겨 놓았는데, 갓을 삐딱하게 쓴 늙은 풍악잡이들이 북, 장구, 피리, 젓대, 깡깡이 같은 제구를 갖추어 풍악을 잡히기 시작한다. 주인 영감이 큰상을 받은 것이다. 덧문을 추녀 끝에 추켜 단 큰사랑 대청에는 군수의 대리로 나온 서무주임 이하 면장, 주재소 주임, 금융조합 이사, 보통학교 교장 같은 양복장이 귀빈들은 물론, 일가친척이 각처서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툇마루 끝까지 그득히 앉았다. 교자상이 몫몫이 나와서, 주전자를 든 아이들은 손님 사이를 간신히 부비고 다닌다. 읍내서 자동차로 사랑놀음에 불려 온 기생들은(기생이래야 요릿집으로 팔려 온 작부지만) 인조견 남치마에 무릎을 세고 앉아서 풍악에 맞추어,

만수산 만수봉에 만년장수 있사온데,
그 물로 빚은 술을 만년 배에 가득 부어,
이삼 배 잡수시오면 만수무강하오리다.

하고 권주가를 부른다.

주인의 오른편에서 노랑 수염을 꼬아 올리고 앉았던 면장은,

"사, 간상 드시지요. 사, 이케다상."

하고 커다란 은잔을 들어 주인과 주재소 수석에게 권한다. 십여 년이나 면장 노릇을 하면서도 한 획 가로 긋고 두 획 내려 그은 것이 'サ'자인 줄도 모르건만, 긴상 복상은 곧잘 부를 줄 안다. 달리 부를 수 있는 자리에도 '상'자를 붙이는 것이 고작 가는 존대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난흥이라고 부르는 기생은, 잔대를 들고 노란 치잣물 같은 약주가 찰찰 넘치는 잔을 들어 손들이 권하는 대로 주인 영감에게 받들어 올린다. 한낭청은 반백이 된 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어 올리고, 그 술이 정말 불로장생의 선약이나 되는 듯이 높이 들어 쭈욱 들이마시곤 한다.

깍짓동처럼 뚱뚱해서 두 볼의 군살이 혹처럼 너덜너덜하는 한낭청에게 버드나무 회초리 같은 계집들이 착착 부닐면서 아양을 떠는 것도 한 구경거리다.

이윽고 풍류 소리와 함께 헌화하는 소리와 웃음 소리가 일어난다. 술 주전자를 들고, 혹은 진 안주 마른 안주를 나르는 사내 하인과 계집 하인이 안 중문으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 동안에 주객이 함께 술이 취하였다.

아침부터 안 대청에서 자여질들이 헌수하는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나온 한낭청은, 사방 삼십 센티미터나 됨직한 얼굴이 당호박처럼 시뻘겋게 익었다. 그 얼굴에다가 조그만 감투를 동그마니 올려놓은 것이 족두리를 쓴 것 같아서, 기생들은 아까부터 저희끼리 눈짓을 해가며 낄낄대고 웃었다.

주인과 늙은 손들은 무릎 장단을 치며 시조를 부르다가 서로 수염을 끄두르며 기롱을 하기 시작하고, 체면을 차리고 도사리고 앉았던 면장도 분을 횟박같이 뒤집어쓴 기생들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며 음탕한 소리까지 하게 되었다.

"여봐라, 큰애 어디 갔느냐?"

한낭청은 위엄 있게 불렀다. 뒤처져 온 손들의 주안상을 분별하던 큰아들이 올라와 두 손길을 마주 잡았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니, 저 손들두 얼른 내다 먹여라. 취투룩 먹여. 오늘 내 집에 술이야 떨어지겠느냐."

하고는 뜰 아래에 쭈그리고 앉고 혹은 멀찌감치 돌아서서 담배를 태우는 늙은 작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머슴들은 바깥 마당에다가 멍석을 주욱 폈다. 막걸리가 동이로 나오는데 안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건만, 그네들의 안주는 콩나물에 북어와 두부를 썰어 넣고 멀겋게 끓인 지짐이와, 시루떡 부스러기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매방앗간에, 지난밤부터 진을 치고 있던 장타령꾼들이 수십 명이나 와르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해가며 음식을 집어 들고 달아났다.

삼현 육각이 자진가락으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아뢰고, 광대가 마악 줄을 타고 올라설 때였다. 구경꾼이 물결치듯 하는데 거진 오륙십 명이나 됨직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선생의 인솔로 큰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 여선생은 영신이었다. 학원을 지으려는 데만 열중한 그는, 그 전날도 기부금을 거두려고 삼십 리 밖 장거리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그곳 교인의 집에서 묵고 아침에 떠나서 오는 길에 서너 집이나 들르느라고 점심때도 겨워서 흑석리 동구 앞까지 당도하였다.

청석골서 아직도 담을 넘겨다보며 글을 배우고 땅바닥에 글씨를 익히고 하던 아이들은 점심들을 먹으러 가는 길에 채선생이 오는 것을 신작로에서 먼발치로 보고는,

"얘, 저어기 우리 선생님 오신다."

한 아이가 외치자, 여러 아이들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가는 동무들까지 소리쳐 불러서, 어느 틈에 삼사십 명이나 영신을 둘러쌌다. 비록 하루 동안이라도 떠나 있다가 타동에서 만나니까, 피차에 몇 달 만에 얼굴을 대하는 것만치나 반가웠다. 영신이가,

"너희들은 먼첨들 가거라. 난 저 기와집엘 댕겨갈 테니……."

하고 떼치려니까, 이이들은,

"나두 가유."

"선생님 우리두 갈 테유."

하고 뒤를 따른다. 영신은 그 집에 오늘 잔치가 벌어진 줄은 까맣게 몰랐건만, 어른들에게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한부잣집 잔치에 청좌를 받고 가는 줄만 여기고, 속심으로는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기를 쓰고 대서는 것이다.

한낭청은 체면에 못 이겨서, 또는 취중에 자기 손으로 기부금을 오십 원이나 적었었다. 그런 지가 벌써 돌이 돌아오건만 요리조리 핑계를 하고 오늘날까지 한푼도 내지를 않아서 요전번처럼 영신에게 창피까지 당하였었다.

오십 원짜리가 가장 큰 머리라, 영신은 그 돈으로 우선 재목이라도 잡아 보려고 십여 차나 그 집 문지방을 닳린 것인데, 근자에 와서는 부자가 다 안으로 피하고 만나 주지도 않을 뿐더러, 도의원 후보자로 군내에 세력이 당당한 한낭청의 맏아들은, 채영신이가 기부금을 강청해서 주민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고, 경찰서에 가서 귀를 불었기 때문에 영신이가 주재소까지 불려가서 설유를 톡톡히 받았었고, 강습하는 아동이 제한당한 것만 하더라도 그 여파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수록 영신은,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

하고 단단히 별러 오던 터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한낭청의 환갑날 또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잔치가 있어서 동네 어른도 많이 갔다는 말을 비로소 아이들에게 들은 영신은,

'옳다구나, 마침 잘 됐다. 오늘이야 설마 아니 만나진 못허겠지.'

하고 아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여차직하면 만인좌중에 그 돼지 같은 영감쟁이 고작을 들었다 노리라.'

하고는 일종의 시위운동도 될 듯해서 조무래기는 쫓아 보내고, 머리 굵은 아이들을 이십 명 가량만 추렸다. 그러나 큰 구경이나 빼어 놓고 가는 줄 알고,

"나두 나두."

하고 계집아이들까지 중간에서 행렬에 달라붙고 하여서, 그럭저럭 오륙십 명이나 따라오게 된 것이다. 영신은,

"그 집에서 음식을 주드래두, 너희들은 받어 먹거나 싸갖구 가선 안 된다."

하고 단단히 단속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낭청 집에 솟을대문이 바라다보이는 큰 마당터까지 와서는,

'칩칩허게 음식이나 얻어먹으러 애들까지 데리고 오는 줄이나 알지 않을까.'

'아무튼 그 집의 경사날인데, 우르르 몰려가는 건 체면상 좀 재미 적은걸.'

하고 두세 번 돌쳐설까 하고 망설였다.

'가뜩이나 나를 못 믿겠다는데, 아주 상스런 여자나 흑작질꾼으로 치부를 하면 어떡허나?'

하고 뒤를 사리려고 하다가,

'계획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담에야 내친걸음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것도 비겁하다.'

하고 용기를 돋아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광대는 꽃부채를 펴들고 몸을 꼬느면서 줄을 타고 앉았다 일어섰다 용춤을 추다가 아래서 어릿광대가,

"여봐라, 말 들어라."

하고 먹이면, 줄 위의 광대는,

"오오냐, 말만 던져라."

하면서 재담을 주고받는다.

높은 산에 눈 날리듯
얕은 산에 재 날리듯
억수 장마 비 퍼붓듯
대천 바다 조수 밀듯

하고 이 댁에 돈과 곡식이 쏟아지고 밀려들라고 덕담을 늘어놓으면, 기생들은 대청 위에서,

얼씨구 좋다 절씨구
지화자 좋다 저리시구

하고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장아장 주인의 앞으로 대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 판에 영신의 일행은 사랑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빈객들은,

"이거 별안간 웬 아이들야?"

하고 서로 술취한 얼굴을 돌려다보는데, 줄 위에 오른 광대는 아이들이 발바닥 밑으로 우르르 달려드는 사품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발을 헛딛고 떨어질 뻔하였다.

영신이도 잠시 어리둥절해서 당상 당하를 둘러보다가, 여러 사람의 눈총을 한몸에 받으면서 댓돌 아래로 다가섰다. 몹시 불쾌한 낯빛으로 '저 딱장대가 또 뭘 허러 왔을까' 하고 영신의 행동을 말없이 보고 섰던 도의원 후보자는 여러 사람 앞이라 주인의 체모를 차리느라고 영신의 앞으로 와서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보이며,

"아, 사이상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온 허두 정신이 쓰라려서 미처 청첩두 못 했는데……."

하고 작은사랑 편으로 올라가라고 손바닥을 펴대며 인도를 한다. 영신은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예를 하고는,

"네, 고맙습니다. 올라가지 않어두 좋습니다."

하고 마주 굽실거리다가 큰마루 위를 향해서 늙은 주인도 들으라는 듯이,

"우리는 불청객이올시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 주인 영감께 축하의 말씀 한마디도 아니 드릴 수가 없어서 오는 길에 아이들까지 이렇게 따러 나왔습니다."

하고 만취가 된 한낭청을 똑바로 쳐다본다. 늙은 주인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영신을 알아본 듯 게게 풀린 눈자위로 마당 그득히 들어선 아이들을 내려다보더니,

"허어, 귀헌 손님들이로군. 조것들꺼정 내 환갑날을 어떻게 알었든고?"

하고 수염을 내려 쓰다듬으며 매우 만족한 웃음을 웃고는,

"큰애 게 있느냐?"

하고 위엄 있게 큰아들을 불러 세우더니 아이들을 먹일 음식상을 차려 내오라고 명령한다.

"아니올시다. 우린 음식을 먹으려구 오질 않었습니다."

하고 영신은 손을 내저었다. 젊은 주인은 어쩐지 형세가 불온해서 속으로는 적지 않이 켕기건만,

"머처럼 이렇게 오셨는데, 도무지 차린 게 변변치 않어서……."

하고 어름어름하다가 돌아서며,

"저 숱한 얘들을 뭘 다 노나 먹인담……."

하고 군소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 위의 손들이 파흥이 된 것을 불쾌히 여기는 눈치를 채고 한낭청은 기둥을 붙들고 일어서며,

"아아니, 광대놈들은 뭘 허는 셈이냐?"

하고 역정을 낸다. 풍악 소리는 다시 일어나고 광대는 비실거리며 줄을 걷는다. 마당 가장자리에 조옥 둘러앉은 아이들은 광대가 줄을 타고 달리다가 뒷걸음을 쳤다가 하는 것을 정신없이 쳐다본다. 그 중에도 계집애들은 간이 콩만해지는 듯,

'애그머니!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을 쥔다. 영신이도 광대가 줄을 타는 것을 처음 보아서 그편을 쳐다보고 섰는데, 이 집의 머슴들은 장타령꾼과 머슴애들이 먹던 그릇을 말끔 몰아 가지고 들어갔다.

조금 뒤에는 그 사발 대접을 부시지도 않고, 고명도 없는 밀국수에 장국 국물을 찔끔찔끔 쳐가지고 나와서는 그나마 두세 명에 한 그릇씩 안긴다. 그것을 본 영신은 크나큰 모욕을 느끼고 금시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여보, 우린 그런 음식 안 먹소!"

하고 꾸짖듯 하고는 머슴들의 앞을 딱 가로막아 섰다.

어떤 아이는 일러 준 말을 잊어버리고 국수 그릇에 손을 내밀다가 옴실하고 선생의 눈치를 살핀다.

"아, 왜 이러시나요? 준비헌 건 없지만 온 주인 된 사람이 무안허군요."

젊은 주인은 영신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얼더듬는다. 그 태도는 기부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던 때와는 딴판이다.

한편에서는 배불리 얻어먹은 장타령꾼의 두목인 듯한 푸댓조각을 두른 자가 안 중문으로 들이대고 헛침을 튀튀 뱉더니,

"얼씨구 들어왔네, 품 품 품바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두 않구 또 왔소―--- 냉수 동이나 마셨느냐, 시원시원 잘두 헌다. 뜨물 동이나, 들이켰나, 걸직걸직 잘두 한다."

하고 곤댓질을 하니까, 머리를 충충 땋아 늘인 총각 녀석이 뒤를 대어,

"에― 하늘천자를 들구 봐, 자시에 생천하니 호호탕탕 하늘천, 축시에 생지하니 만물창생 따아지."

하고 천자 뒤풀이를 청승맞게 한다.

광대는 줄에서 뛰어내려 땅재주를 훌떡훌떡 넘다가,

"사부댁 존전에 그저 처분만 바랍니다."

하고 댓돌 위로 홍선을 펴들고 기생들에게 눈짓을 슬쩍 한다. 기생들은 그 눈치를 약빨리 채고,

"아이고 영가암, 몇 장 처분해 줍쇼그려어."

하고 화롯가에 붙인 촛가락처럼 이리 곤드라지고 저리 곤드라지는 양복쟁이들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것을 본 한낭청은,

"옜다, 그래라. 이런 때 돈을 못 쓰면 저승에 가 쓰겠느냐."

하고 새빨간 염낭을 끄르더니 지전 한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 광대의 얼굴에다 끼얹듯이 내던진다. 가랑잎처럼 휘돌다가 댓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일 원짜리는 아니다. 어릿광대는 지전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수없이 합장을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 수없는 사람의 손때가 묻은 지전을 입에다 물고 배운 재주는 다 부리는데, 대청 위에서는 기생들이 손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영신의 눈은 점점 이상한 광채가 돌기 시작한다. 한낭청은 첩에게 부축이 되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아이들이 그저 마당에 가 쪼그리고 앉은 것을 보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쟤 쟤들은 왜 여태 저 저러구 앉었느냐?"

하고 만경이 된 것 같은 두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영신을 내려다본다. 영신은 마당 한복판으로 썩 나섰다.

"우리들이 댁에 뭘 얻어먹으러 온 줄 아십니까?"

그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그 그럼 뭐 뭘 허러 왔노?"

"돈을 하두 흔허게 쓰신다길래 여기 손수 적어 주신 기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영신은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부금 명부를 싼 책보를 끄른다. 낭청은,

"기부금? 아 그래 쇠털 같은 날에, 하 하필 오늘날 성군작당(成群作黨)을 허구 와서 내란 말야. 기 기부금에 거 걸신이 들렸군."

하고 사뭇 호령을 하고는 돌아서려고 든다. 영신은 뚱뚱보의 앞을 떡 가로막아 서며,

"안 됩니다. 오늘은 만나 뵌 김에 천하 없는 일이 있어두 받어 가지구야 갈 텝니다."

하고 야무지게 목소리를 높인다. 손들과 구경꾼들이며 기생 광대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해서 여선생을 주목한다. 영신은 마당 가득 찬 여러 사람을 향해서,

"여러분, 이런 공평치 못한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어느 누구는 자기 환갑이라구 이렇게 질탕히 노는데, 배우는 데까지 굶주리는 이 어린이들은 비바람을 가릴 집 한 간이 없어서 그나마 길바닥으로 쫓겨났습니다. 원숭이 새끼처럼 담이나 나뭇가지에 가 매달려서 글 배는 입내를 내고요, 조 가느다란 손고락의 손툽이 닳도록 땅바닥에다 글씨를 씁니다!"

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목구멍에 피를 끓이는 듯한 어조로,

"여러분, 이 아이들이 도대체 누구의 자손입니까? 눈에 눈물이 있고 가죽 속에 붉은 피가 도는 사람이면, 그 술이 차마 목구녁으루 넘어갑니까? 기생이나 광대를 불러서 세월 가는 줄 모르구 놀아두, 이 가슴이―--- 양심이 아프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으며 저의 앙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손들은 도가 넘도록 취했던 술이 당장에 깬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데, 한낭청은 어느 틈에 안으로 피해 들어가고 젊은 주인은 영신의 앞을 막아 서며,

"사이상, 온 이거 어느새 망령이시구려. 오늘 같은 날 참으시지요. 일이 잘못 됐으니 그저 참어 주세요. 그 돈은 저녁 안으루 꼭 보내 드리리다."

하고 말씨가 명주 고름 같아지며 머리를 수없이 숙여 보인다.

영신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숨만 가쁘게 쉬고 섰는데, 처음부터 누마루 한구석에 앉아서 영신의 행동을 노리고 내려다보던 주재소 수석의 눈은 점점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영신은 경찰서 유치장 마루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본서까지 끌려가서 구류를 당하던 경과며, 그 까닭은 오직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