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수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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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 후심(先心後心)

서대문 우편국 앞에서였다.

커다란 보퉁이를 가지고 전차에서 내린 한 노파가 무거운 짐이라, 혼자로서는 일 수가 없는 모양으로 가슴에다가 두 손으로 잔뜩 받쳐 안은 채 전차 선로를 건너서더니,

“미안합니다만 이 짐을 좀 받아 이어 주세요.”

그러마는 내 승낙도 얻기 전에 노파는 그 짐을 내 가슴에 내어나 던지듯이 안긴다.

나는 말없이 짐을 받아서 꺼꾸부둥하고 머리를 내미는 노파의 머리 위에 들어서 얹었다.

“아이 신세스럽소.”

인사와 같이 허리를 펴다가 그 짐이 닿았던 내 외투자락에 무언지 허연 가루가 뽀얗게 묻는 것을 노파가 보았다.

“아이구 옷을 버려서 어쩌나!”

장갑 낀 손으로 털어 보고 문질러 보고 그리고 그 무거운 짐에 눌린 머리를 두 번인지 세 번인지 숙여 가며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거듭 표하고 간다.

나는 우편국으로 들어가 한 이십 분 가량이나 그러한 시간을 허비하여 볼 일을 보고 벗을 찾아 마포 쪽을 향하여 죽첨정(竹添町)의 상가를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풍전아파트 채 미치지 못해서 복술(卜術)쟁이가 점책을 펴 놓고 앉은 가로수 아래 웬일인지 사람이 한 이십여 명이나 원을 그리고 죽 둘러섰다. 기웃해 보니 아까 그 노파가 사람 성(城) 가운데서 무언지 볼 부은 소리로 흥분이 되어 지껄인다.

“―글쎄 내가 이제 개명 앞에서 그 웬 양복쟁이 녀석더러 이 보퉁이를 좀 받아 이어 달라고 했더니 그 밖에야 어느 누가 이 보퉁이에 손이나 대여 본 일이 있었기…….”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노파가 여기서 나를 만난다면 잠잠히 그대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려 모르는 체 휭하니 나 갈 길을 그대로 걸었다.

노파의 그 말만으로는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잃기는 분명 잃은 모양으로 그 의심을 내게다가 두는 것을 보면, 그리고 이런 노상에서 뭇 사람들을 대하야 이렇게 지껄여 내는 것을 보면 기필코 나를 붙들고 물건을 잃었으니 내라고 행악을 할 것임이 빤히 내다보이는 것같이 그게 한껏 우스우면서도 한껏으로는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믿을 녀석이 세상에 있나 보지? 우라질 녀석 같으니…….”

이어서 들려오는 그 노파의 볼 부은 소리.

조금 전에 내게 향하여 그렇게도 감사하던 마음이 지금은 극도의 증오에 충만되었다.

나는 걸어가며 생각을 했다.

이 노파가 처음에 머리를 숙여 감사하던 그 마음과 지금 증오의 격분에 목에다가 핏대를 돋우는 그 마음과 그 어느 것이 좀더 마음의 밑을 통하여 나왔을 진심이었을 것일까를, 그리고 만일 내가 그 노파를 피하지 아니하고 대하였던들 나는 족히 그 노파와 군중을 설복시킬 재주가 있었을 것일까를…….


아무리 사람의 진정한 벗이 되려고 해도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벗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들의 충고 가운데는 벗으로서의 충고 그것보다 제 자신을 위한 교언 (巧言)이 많음을 늘 지나 본다. 내가 만일 그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라면 그들은 얼마나 나를 향하여 자기를 속이며 입술에 기름을 바를 것인고? 차라리 내가 그러한 높은 지위를 못 가진 일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그들의 인격을 위하여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아첨을 받을 때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말없이 주는 정, 그리고 말로 받기를 원치 않는 정, 그러한 정을 늘 받아 보고 싶고, 또 주고 싶다.

이러한 사람이 내 시골에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다 농사를 짓는 삼십대의 꼭같은 연배로 한 동리에 살았다. 휴가일 때마다 그들은 서로 찾는다. 앉아서는 빙그레 웃는다. 웃는 것이 인사다. 그런 다음엔 계속되는 것이 무언 속에 그저 일이다.

이따금 빙그레 서로 웃음을 바꾼다. 이 무언의 웃음의 교환 속엔 참뜻이 통하는, 그리하여 스며드는 정이 한껏 만족한 반증이다.

어느 날 그 한 사람이 근처에서 상량(上樑)하는 구경을 갔다가 그만 올려 놓았던 보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치었다. 심한 상처였다.

치료하는 월여(月餘) 동안 그의 친지는 누구나 한 번씩 찾아가는 것이 인사였다. 그것으로 친지로서의 인사는 다 되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짬이 있는 대로 밤이나 낮이나 가리는 법이 없이 무시로 찾아가서는 마주앉는, 그리하여 꾸준히 아픔을 같이하는 다만 한 사람, 그것은 오직 무언의 상대 그였던 것이다.


취직

사람을 속이고 싶지는 앞으면서도 속이게 되는 때가 있다.

내가 모사(某社)에 취직을 할 적이다.

“무엇이 제일 장기(長技)십니까?”

“주판놀음만 아니면 무어나 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있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부(部)이나 ㅇㅇ부(部)가 제겐 아마 제일 적당한 부라고 생각 합니다.”

“글쎄 본시 지원은 그 두 부(部)에다가 하셨지만 지금은 자리가 어느 부에 나 없으니까요 □□부라도 희망을 하신다면 거긴…….”

“그 부엔 대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판은 없습니다.”

“그럼 그 부에라도 무방하겠습니다.”

“한번 입사를 하시면 삼 년이고 사 년이고 꾸준히 계속해서 있을 각오로 들어오셔야 됩니다.”

“네 물론 일만 손에 맞는다면 그럴 각오입니다.”

“네?”

그는 놀란 듯이 눈을 치뜬다.

“일이 손에 맞으면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두어 번 머리를 주억일 뿐 다시는 말이 없다.

일이 손에 맞는다면 하고 내 자신 양심으로서의 책임상 솔직히 바친 그 한마디가 다 된 죽에 떨어진 코 같은 위험성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엎지른 물이라 주어 담을 수가 없다. 저쪽에서 다시는 말이 없는 이상, 이쪽에서도 말을 되끄집어내어 변명을 하기도 쑥스러운 일이다.

그가 말이 없으니 나도 말이 없을 밖에.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알았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요컨대 입사를 해 보아서 일이 손에 맞지 않으면 그만두신다는 말씀이지요?”

한참 만에 입을 열더니 그 말을 집어 꺼낸다.

이 기회였다. 나는 여기서 나를 속임으로 나를 살릴 재조(才操)를 입 빨리 부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역시 내 양심은 실컷 뒤재어 본다는 것이 같은 말밖엔 더 입으로 내 보지 못했다.

“아니올시다. 일이 손에 맞는다면 삼사 년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있겠다는 각오로 드린 말씀입니다.”

“글쎄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나는 선생의 솔직한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 만은 세상사란 그렇지 않으니까 이제 □□부에 부장이 혹 묻거나 해도 그때엔 그런 말씀을 마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힘껏 하겠다구 그렇게 대답을 하십시오. 취직을 하려는 이가 그렇게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어디 됩니까.”

그는 이렇게 후의를 보이는 거짓말을 가르쳐 준다.

얼마 후, □□부의 부장이 물을 때 나는 가르쳐 준 그대로 그저 네네 하고 대답과 같이 머리를 숙였다.

“그럼, 내일부터 아홉시에 출근을 하시도록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