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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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上篇)[편집]

이것이 참말일까. 아아, 이것이 참말일까. 오늘 신문에 난 상한 전보가 참말일까. 한번 다시 보자.

『조선 민족의 지도자 이 항목은 작일 당지 국민회관에서 연설하고 돌아 오는 길에 어떤 조선 사람의 육혈포에 가슴 을 맞아 시립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금조에 사망하였다는데.

가해자는 곧 미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더라.』

이 전보가 과연일까. 아아, 과연일까. 그렇다 하면 진실로 조선 백성은 그의 차 지도자를 잃어 버렸구나! 이 항목! 그 는 타고 난 애국자요 지도자였었다. 그에게는 집도 없었고, 재산도 없었고, 몸도 이름도 없었고, 오직 조선의 땅과 사람 이 있었을 뿐이라. 사십 평생에 그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 과 모든 행실은 오지 어찌하면 조선 백성을 자 살게 할까.

어찌하면 썩어진 정부를 개혁하고 백성에게 지식을 주고 도 덕을 주고 재산을 줄까. 어찌하면 조선 백성으로 세계의 문 명에 큰 공헌을 하는 백성이 되게 할까─이것뿐이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썽도 많거니 와, 그것은 다 그의 참뜻을 모르는 말이 아니면 그의 참됨 을 시기하여 짐짓 그를 헐려 하는 이의 말이다. 나는 수심 년래 그의 친구 되는 한 사람으로 내 딴에는 그의 인격과 경력을 자세히 알거니와, 그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요, 진정한 애국자요, 참된 사람이 요, 또 능히 한 민족을 지도하여 갈 만한 식견과 인격을 구 비한 지도자였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조선 사람들은 그 잘 하는 코웃음을 웃을지도 모르거니와 그는 내가 일생에 접하 여 본 내외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참되고 위대한 인격자 였었다. 나는 몇 번이나 혹은 혼자서 혹은 사람을 대하여 특히 청년들을 대하여 그의 인격을 찬양하였을까. 그를 조 선 사람의 구주로 진정한 지도자로 성인으로 찬양하였을까.

옛날 안 연이가 공자를 찬양하던 말을 빌어 「앙지 미고요 찬지 미견」이라고 하였을까.

나 같은 사람은 이 선생에게 비기면 쓰레기나 티끌이다.

한 벌레다. 나도 일생을 그를 배우노라고 애를 썼으나 힘과 정성을 다하였건만도 미칠 수가 없어서 나이 사십에 아직도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초토에 묻혔을뿐이다. 아마 장래 에야 이 선생보다 나은 이도 많이 나려니와 아직까지는 이 만한 이는 없었다. 현재에 내로라고 떠드는 모든 영웅들은 다 뭉쳐 놓아도 그 어른 한 분을 못 당할 것이다. 불행하거 니와 지금은 그 어른 손가락 하나를 당할 사람도 없다.!

그러하거늘 조선 사람들은 이삼십년을 내려 두고 그를 욕 설하였고 모함하였고 마침내 육혈포를 놓아 죽이기까지 하 였구나! 아아! 어리석은 조선 백성이여! 참된 지도자를 모르 고 은혜를 배반하는 조선 백성이여!

아아! 이 전보가 참말일까? 이 선생이 과연 돌아 가셨을 까? 그 거룩한 포부를 다 펴보지 못하고 조선을 버리고 돌 아 가셨을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로부터 천하사를 누구에 게 맡기랴. 하늘이 무심도 하여라! 나 같은 것이 수없이 많 거늘 왜 하필 그 어른을 빼앗아 갔는고. 아아, 하늘아, 만일 될 수만 있거든 내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그를 도 롤 조선에 살려다고. 그도 병에 죽은 것도 아니요 총에 죽 었고 총에 죽어도 하필 조선 사람의 총에 죽었구나. 이 어 리석은 형제야, 네가 어떠한 악마의 꾀임으로 너와 네 자손 과 네 동포의 구주를 죽였느냐?

조선 백성들이 만일 철이 있다 하면 이 전보를 볼 때에 모 두 가슴을 두드려 통곡할 것이언마는 어리석은 형제들 중에 그의 값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랴.

어즈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는 이 슬픈 기별을 보고 흐 르는 피눈물에 먹을 갈아 가신 그 어른의 일생이나 그려 보 자.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마 이천만 늙은이 젊은이가 모조리 아니 울지는 못할 것이다.

비옵나니, 내가 숭배하는 이의 영이시여, 당신을 그리는 나 의 붓을 도우소서.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평양서 칠성문을 나서서 의주로 가는 직로로 삼십리 가량이나 가노라면 조그마한 고개 하나 이 있고, 그 고개에 올라 서서 동으로 굽어 보면 우무거리 에 대여섯 초가집이 보이는 농촌이 있다. 이 농촌에 사는 이는 다 가난한 소작인이다. 평양 성중이 그렇게 가깝지마 는 가을에 성내에 있는 지주에게 타작을 가지고 가거나 사 오 명절에 아이들 댕기 감이나 사러 가는 때 밖에는 별로 평양 성중에 들어 가 보는 일도 없는 백성들이다.

이 선생은 이 동네 어떤 가난한 집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지금부터 한 오십년 전 어느 여름날에 세상에 나왔다. 한창 밤길 논김으로 바쁜 때에 나서 그의 어머니 되는 이는 순산 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 갓난이를 혼자방에다 내어 버리 고 호미자루를 들고 벌에 나갔다. 어린애는 자다가 깨어서 는 울다가 울다가 울어서 지쳐서는 자고, 이렁하여 기나긴 여름날에 낮에는 세 번도 젖을 얻어 먹기가 어려웠다. 그러 나 그는 얼굴이 잘나고 재줄가 있다 하여 그으이 부친은 그 를 글 공부를 시키기로 하였다. 이 집도 옛날에는 소위 점 잖은 집으로 남의 집에 글빌러 간 일은 없었다. 하나 어찌 어찌하여 그의 조부적부터 아주 농군이 되어 버리고 만 것 이다. 그러므로 조상적 영화를 생각하는 그의 부친은 이 셋 째 아들의 힘으로 수십년 간 떨어졌던 가명을 회복하여 볼 까 하고 마음에 기대함이 컸다.

사람 잘나고 글 잘하기로 한 골에서는 꽤 유명하였다는 그 의 증조부와 얼굴이 같다 하여 더욱 그 부친의 귀염을 받는 어린 항목은 그가 다섯 살 되는 정월부터 천자문을 끼고 고 개 너머 서당으로 갔다. 그 후부터 그는 다른 아이들 모양 으로 서당에 가기를 싷어하지도 아니하고 또 천자문을 하루 에 넉줄씩이나 배운다 하여 동네에 차차 재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모양으로 병도 없고 별일도 없이 열 두 살까지를 금방 도련님으로 자랐으나 열 두 살 되던 해 여름 쥐통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둘째 형님이 죽어 한꺼번에 초상 셋이 나고 보니, 그의 백씨와 그와 두 사나이가 온집안 십여 식 구를 먹여 살려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당을 나와 그의 백씨를 도와 어린 농군이 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만 오년 간 그가 열 여덟 살 되기까지에 노사에 관한 모든 재 주를 배워 제법 한 사람 구실할 농부가 되었고, 또 그가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의견을 내어 보통강 상류의 어떤 물굽이 하날ㄹ 막아 열 마지기나 넘는 논을 만들었으므로 금년에는 거기서 벼를 삼십석이다. 이제부터는 연년이 양식 걱정은 아니할 테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어이 공부를 더하라고 맘이 착한 그의 백씨의 권함을 따라 항목은 공부를 떠나기 로 결심하였다.

평양성을 쑥밭을 만든 일청 전쟁도 작년 봄까지에 끝이 났 다. 이번 난에는 모두 죽으리라고 재작년·작년 양년에는 모 두 산으로 달아나고 인심이 물 끓듯하더니 금년부터는 다시 인심이 안정하게 되어 부지런히 농사도 하게 되었다. 오랜 폐하였던 서당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항목은 그해 가 을부터 다시 서당에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 열 여덟이 나 되고 울밀대와 현무문을 부수는 대포 소리를 들은 항목 은 서당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 무엇인지는 모르나 서당 외에 논어·맹자외에 무슨 좋은 공부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어디로 가랴. 아무려나 집구석을 떠나서 대처로 나 가 보자. 위선 평양을 나가 보고 거기도 시원치 않거든 서 울로 올라 가 보자. 가서 세사잉 어떻게 되든 거도 보고 좋 은 선생도 찾아 보자. 대장부 한번 세상에 났거든 초로에 묻혀 썩을 줄이 있으라. 마땅히 힘을 닦아 한 나라를 경제 하고 이름을 천주에 유전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책에 나올 듯한 결심을 가지고 추석 명절이 지나기를 기다려 조그마한 웃보퉁이 하나를 진 열여덟 살 먹은 총각은 그 백씨께 하직 절을 하고 평양성으로 들어 왔 다. 때는 을미년 팔월 열 이렛날이다. 이로부터 우리 이 선 생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항목이가 봇짐을 지고 앞고개에 오라 와 바윗돌에 걸터앉 아 지금 떠나 온 집과 동네를 바라다보고 비창한 맘을 금하 지 못할 즈음에 고개 밑에 어떤 여자가 연해뒤를 돌아 보며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항목은 그것이 누구인 줄을 알 았다. 그리고 민망한 생각이 났다. 못 본 체하고 달아날까?

저 여자가 항목을 따르는 지가 벌써 만 이년이다. 밤이나 또 사람 없는 곳에서 항목에게 매어 달리기로 십여 차나 되 었다. 그럴 때마다 항목은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러면 며칠 동안은 따르지 아니하다가도 또 따르기를 시작하였다. 항목 도 여러 번 맘에 유혹도 받았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항상 이를 악물고 억제하였다.

그 여자는 본래 항목과 앞뒤 집에서 자랐고 또 둘이다 얼 굴이 똑똑하고 상냥하다 하여 장래에는 부부를 삼아 주자 하여 부모들이 농담겸 늘 말하여 왔다. 피차에 열 살이 넘 어서부터는 자기네들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항목의 부 모가 도아 가시매, 이 여자의 부모는 딸을 항목에게 주지 않기로 작정하고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순안 어떤 데로 시 집을 보냈다. 시집 가는 날 딸은 가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 고 울어서 이웃 동네에까지 이야깃 거리가 되었다.

시집 간 뒤에도 그 여자는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는 일년에 도 몇 번씩 친청으로 와서는 올 때마다 한두 달씩이나 묵어 갔고, 그럴 때마다 성가스럽게 항목을 따르고 졸랐다. 그러 다가 작년 봄 평양 싸움에 지고 쫓겨 달아나는 청인의 총에 그 남편이 맞아 죽어 열 일곱 살에 과부가 되어서부터는 친 정에 와서 이내 시집에 아니 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퍽 귀 찮게도 항목에게 매어 달렸다.

동리 안에도 무론 이러한 소문이 아니 날 리가 없었다. 항 목이가 가난한 집 셋째 아들이요, 또 나이 열 여덟. 커다란 총각이 되도록 장가를 못 들음을 볼 때에 아마 이 청년 과 부와 같이 살리라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항목이가 결 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럴 리가 만무하다 하여 과부 의 행실이 부정한 것만 비웃고 불쌍히 여겼다.

항목도 그 여자를 미워하지는 아니하였다. 그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저것이 내 아내 될 사람이어이 하고 어린 맘에도 자고만 나면 가 보고 싶어서 그 집 아프로 갔다. 그러나 그 여자가 시집 간 뒤에는 힘써 그를 잊어버리려 하였다.

〈사내가 요만 여자를 못 잊어 무엇하랴.〉 하여도 보고, 〈내가 이 유혹을 못 이기면 큰사람이 아니다.〉 하여도 보아 그리운 슬픔도 퍽 참고 몰 일듯하는 유혹도 퍽 참았다.

나는 이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계집애의 정에 끌려 몸 을 더럽힐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흠없는 사람 이 되어야 한다. 개끗하고 높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털끌만 한 죄도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해서 무슨 큰일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그는 그 여자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혼자 생각하고 주먹을 불근 쥐었다. 그러므로 이 여자가 그처럼 귀찮게 따 르고 유혹한 것이 도리어 그의 도덕적 수련이 되고 의지를 굳게 하는 시험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항상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욕망이 떠날 새는 없었다. 오늘도 형님께 하직하고 집을 떠날 때에 한번만 그를 보았으면 잠깐 찾아 보고 갈까하는 생각조차 났었다. 지금 이 고개에 오라 와 집을 바라볼 때에도 혹 그 의 모양이 보이지나 아니할가. 따라오기라도 하였으면 하는 생각까지 났었다.

그 여자가 거의 고개에 다 올라 왔다. 그 동그레한 얼굴의 윤곽가지도 분명히 보이고 걸으믈 걷는 대로 흰 치맛 자락 이 펄렁거리는 것이 분명히 보일 때에 항목의 가슴에는 형 언할 수 없는 정의 불길이 일어나 얼굴까지도 확확 다는 것 을 깨달았다.

여자는 올라 왔다. 항목은 일어나 여자를 맞았다. 말없이 항목의 앞에 와 서서 항목을 쳐다보는 젊은 과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두 뺨은 흥분과 그 급한 걸음으로 술취한 빛 이 되었다. 항목의 눈에도 눈물이 있었다.

눈물 머금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마주 보고 있다.

『어디로 가오? 몸이 좀 아파서 누워 있는데 아이들이 와 서 앞집 항목이가 봇짐을 지고 어디로 간다고 그러기에 따 라 나왔소. 어디로 가오?』

하며 말끝이 울음으로 변한다.

항목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눈을 한번 감아 눈에 고인 눈 물을 떨어 버리면서,

『나는 정처 없이 공부하러 가는 길이요. 위선 평양으로 가지마는 어디까지 갈는지 알 수 없소. 어려서부터 서로 친 동생같이 지내다가 이렇게 서로 떠나게 되니 나는 맘이 퍽 슬펐소. 그래서 집을 떠날 적에 한번 가서 보려고도 했지마 는 남녀가 길이 다르고 또 사람의 눈을 꺼려서 그도 못하고 떠났는데 이렇게 따라까지 오니 너무도 반갑고 고맙고... 자, 인제는 들어 가시오. 누가 보기나 하면 나는 관계치 않지마 는 또 무에라고 말썽이 되면 좋지 못하니, 자, 어서 들어 가 시오.』

하며 항목은 손으로 여자의 등을 어루만져 집으로 갈 방향 을로 돌려 세웠다. 여자는 더욱 울고 등을 마지는 항목의 손에 몸을 기대면서,

『나도 가요! 집에 있기 싫으니, 나도 가요!』한다.

『가기는 어디를 가요?』

『아무 데나 가요! 집에는 안 들어 갈 테야요. 무엇하려 집 에를 가요? 아무 데나 가서... 평양 가서 대동강에 풍 빠져 죽을 테야요. 살아서 무엇해요. 아버지도 어서 뒈지라고 그 러시는데요. 아니요. 집에는 안 가요, 따라가요!』

하고 길바닥에 펄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더니 벌떡 일어나 서 항목의 갈 길로 앞서서 훨훨 간다.

항목의 마음에는 측은한 마음이 가뜩 찼다. 이 여자의 불 쌍한 신세를 잘 안다. 전 남편의 삼년 상이 끝이 나기도 전 에 그 부모가 과부된 딸을 또 어떤 늙은이에게 팔아먹을 줄 도 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려서부터 자기를 생각하고 첫 번 시집 가는 날도 몸부림을 하고 안 간다고 떼를 쓴 것도 안다. 그러나 항목은 어찌할 길이 없었다. 차랄리 이 불쌍한 여자를 건지기 위하여 둘이서 어떤 산골에라도 달아날까.

거기가서 조그마한 집이나 짓고 농사나 지어 먹고 살까. 그 러나 자기는 반드시 하여야 할 무슨 큰일이 있는 듯하여 자 기의 일생을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어찌할까. 좋은 말로 달래어 돌려 보낼까. 얼마 아니하여 돌아 오마고, 돌아 오거던 어떻게든지 그대의 맘대로 하여 주마고, 이렇게 속 일까. 그러나 거짓말을 하기를 무섭게 싫어하는 그는 차마 이 불쌍한 여자를 속일 수도 없었다.

옳지, 이렇게 하자. 자기각 공부를 다 마치기까지 집에 있 어서 기다리라고 하자. 그러면 공부를 마친 뒤에 그와 혼인 을 하여 주도록 하자. 과부! 과부며 어떠냐? 나를 따라 주는 이를 아내로 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엃지, 그러자 하고 앞서 가는 여자를 다라 가 붙들며,

『여보, 내 말을 들으시오!』

하였다. 여자는 붙들리기는 하였으나 독이 난 듯이 무슨말 을 들으려고 아니한다. 항목은 여자의 손을 잡으며,

『여보, 나와 혼인하려오?』

항목의 이 말에 깜짝 놀라는 듯이 여자는,

『무어요?』

하고 항목을 치어다본다. 그는 항목의 얼굴에 나타난 진청 을 치어다본다. 그는 항목의 얼굴에 나타난 진청을 보았다.

『내가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올 것이니, 그때까지 기 다리고 있으려오? 그러면 그때에 둘이 혼인합시다. 그때까 지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혼인을 해요? 나하구?』

하고 여자는 의심 나는 듯이,

『내가 과분데 과부하구 혼인을 해요?』

『왜 못하오?』

하고 항목은 여자의 손을 더 힘껏 쥐며,

『나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으면 혼인하지요. 그럴 맘이 있소?』

『정말이요?』

하고 여자는 숨이 씨근씨근하며,

『정말 나하구 혼인하셔요?』

『정말이지요?』

하고 항목은 힘있는 목소리로,

『나는 한번 한 말은 변치 않는 사람이야요.』

여자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 더니, 항목의 잡은 손을 뿌리쳐 허리춤에서 헝겊에 싼 뭉텅 이 하나를 집어 내어 던지고는 아무 말도 없이 빠른 걸음은 뒤로 아니 돌아다 보고 집을 향하고 고개로 도로 올라 간다.

항목은 정신 빠진 듯이 고개턱으로 올라 가는 여자의 뒷모 양을 바라보다가 여자가 고개 마루터기 길 서냥 앞에 서서 두어 번 손을 펴고는 없어지는 거슬 보고 길게 한숨을 쉬며 발 앞에 떨어진 헝겊 뭉텅이를 집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 고 손바닥에 놓고 무게를 보니 맛즉하다. 항목은 슬금슬금 발을 옮겨 놓으며 그 헝겊 뭉텅이를 풀렀다. 싸고 또 싸고 한 것은 일청 전쟁 통에 숱하게 흩으러진 일원짜리 일본 은 전 열 푼과 은가락지 한쌍이었다. 항목은 사지가 굳어진 듯 이 우뚝 섰다.

〈이것이 그 여자의 재산의 전부다.〉 하고 항목은 혼자 생각한다.

〈가난한 친정, 가난한 시집살이에 은전 열 푼을 모으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청년 과부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모아 이렇게 꽁꽁 싸두었던고? 이렇게 애써모아서 그렇게 아끼고 아끼고 하던 것을 아무 말도 없이 내 발 앞에 던지 고 달아나는 것은 무슨 뜻인고?〉 그 여자가 오늘 하던 행동은 다 알 수 없는 수수께기다.

항목은 따라 가서 이 돈을 도로 주리라 하고 고개로 올라 갔다. 그러나 여자는 벌써 저 두 고개 밑으로 내려 가고 말 았다. 항목은 고개에 서서 이윽히 여자들 바라보았다. 산모 퉁이를 돌아 서려 할 때에 여자는 잠깐 뒤를 돌아 보더니 항목의 선 양을 보고 아까 모양으로 두어 번 손을 흔들고는 없어지고 말았다.

항목은 하릴없는 듯이 그 돈과 가락지를 한번 더 물끄러미 보고는 주머니에 접어 넣고 활개를 활활 치며 평야을 향하 고 걸었다.

속일 수 없는 가을 바람이 솔솔 불건마는 아직도 날이 덥 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햇빛이 넘친다. 길가에 말라 가는 풀 속에서는 구슬픈 귀뚜라미 소리가 끝없이 들 리고 산 옆 풀판에는 향기 높은 산국화각 피었다.

풍년을 맞은 농가들은 초가 지붕가지도 기름이 흐르는 듯 일년 전에 난리가 지나간 자리도 볼 수가 없다. 그요란한 총소리와 대포 소리도 그 많이 흐른 피도 천지의 평화를 어 지러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른 저녁때난 되어 항목은 끝없는 생각으로 길 가는줄도 모른게 칠성문 밖에 다다랐다. 기자는 늙은 소나무에 탄환 자국이 수없이 보이고 거기서 사람의 생체기에 흐르는 피 모양으로 송진이 흘러 내린 것이 처량하였다. 기자능 소나 무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이 모두 총알 자국이라 하더니, 듣던 바와 같이 심하지는 아니하거니와 역시 참혹하기는 하다.

항목도 대포 소리가 무섭게 울려 오던 것을 잘 기억하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왜 일인과 청인이 저렇게 열이 나서 서 로 죽이려고 둘까 하고 동무들과 함게 토론하던 것이 생각 난다. 그러나 일본과 청국이 왜 저렇게 사왔는지 그네들 싸 움 통에 기자능 솔반은 왜 저 꼴이 되었는지 그 뜻은 아직 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알아 볼 양으로 공 부를 떠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항목은 칠성문을 들 어 서서 종로를 향하고 가다가 어떤 좁은 골목 조그마한 보 행 객주에 들었다. 여기 들어서 며칠 도안에 평양 형편을 살펴서 일생의 작전 계획을 정하기로 하였다.

객주에서는 먼저 든 손님이 사오인은 되었다. 더러는 장사 하는 사람도 같으나 더러는 선비도 같다. 그중에 나이서른 댓이난 되었을 듯한 수염 많은 사람은 꽤 점잖고 유식해 보 였다. 후에 알아 본즉 그는 찬 진사라는 사람인데 항목이가 객주에 들어 잘 때에 아랫목에 허리를 다 하면서 무슨 정치 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항목이가 들어오는 것도 본 체 만 체하고 하여 오던 말을 이어,

『지금 조정에 있는 놈들이 한놈이나 쓸 놈이 있나 대원군 은 그래도 기개나 있었지. 지금 있는 놈들은 모두 이것 밖 에 모르는 놈들이야.』

하며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며,

『백성의 돈을 긁어다가 제 배때기나 채우려는 놈들뿐이란 말이야. 모조리 나무 작두에 목을 갈라 죽일 놈들이란 말이 야. 김 옥균이 가고 김 홍집이 또 거꾸러지니 나라 일은 말 이 아니지! 말이 아니어!』

하고 더욱 흥분한 어조롤 조정 대관과 수령·방백을 간신이 니 탐관 오리니 하고 공격ㄱ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멍하니 듣고만 앉았다.

차 진사는 더욱 신이 나서,

『그렇지마는 이 백성들이 이렇게 어두우니 할 수가 있나.

민유 방본이라니 백성이 이렇게 어둡고야 무엇이 된단 말인 가. 저 태서 제국은 백성이 모두 깨어서 정부 태관들이 아 무런 것이나 맘대로 하지를 못한대어. 민당이란 것이 있고 국회란 것이 있고 그러니까 나라 일이 잘못될 리가 있겠나.

일본도 서양법을 받아다가 제도를 고친 지가 아직 삼십년도 못됐건마는 천하에 제일 크다는 청국을 때려 눕혀네그려.

그런데 우리 조선은 이렇게 조그마한 나라로서 백성이 이렇 게 어두우니 어떻게 견딘단말인가. 청국을 때려 눕힌 일본 이 한번 그 군사를 몰고 오면 꼼짝이나 할 줄 아나. 그런데 이 어리석은 것들이 그것을 모르고.......』

하며, 차 진사의 비분 강개하는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르 려 할 때에 저녁상이 들어 왔다. 사람들은 모두 시장하였던 듯이 이야기도 듣던 티도 없이 밥만 먹건마는 오직 차 진사 는 밥상을 받아 놓고도 한참이나 누늘 감고 앉아서 무슨 생 각을 하는 모양이다.

항목은 평양 들어 온 첫날에 전에 듣지 못하던 소리를 많 이 들었다. 그주에 가장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것은 조선에 모든 벼슬하는 사람들이 제 배만 채우련다는 것과 백성이 어둡다는 것과, 일본의 손에 들어 들어 가리라 하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어디서 차 진사를 찾아 온 사람이 이삼인 더 있었다. 차 진사는 여전히 비분 강개한 어조로 담화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아까 하던 말뒤풀이요, 별로 더 새로운 말은 없었다.

그러나 곁에서 듣던 항목은 차 진사의 이야기에서 많은 지 식을 새로 얻었다. 그 대강을 기록하면 이러하다.

지금 서울에는 독립협회라는 회가 생겼다. 회라는 것은 서 양에 있는 민당인데, 본래 조선 사람으로 미국 사람이 된 서 재필 박사라는 이가 와서 시작한 것인데, 날마다 장안 사람을 모아 놓고 연설이라는 것을 하며, 《독립 신문》이 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또 대표라는 사람을 정부에 보내어 날마다 잘못하는 정사를 질문을 하며 장차는 정부에 있는 모든 간신을 몰아 내고 좋은 사람들만이 나라 일을 하게 된 다고 하며, 그리되면 지금 평양감사로 있는 민 모도 아맘 목이 붙어 있기가 어려우리라고. 그러니까 우리 평양엣 독 립협회 지회를 설립하고 서울서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고. 차 진사 자기는 서박사와도 친한데, 이번에 평양에 독립 협회 지회를 세우려고 내려 온 길이라고. 우리 독립협회는 나라에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민당이니 평양 감사도 꿈쩍하 지 못한다고. 대개 이러한 뜻이다.

듣는 사람들은 모두 차 진사의 말에 찬성하는 뜻을 표하였 다. 그리고 동지가 이미 사십여 명이나 되었으니 이삼일 내 로 부벽루에 평양 사람을 많이 모아 놓고 독립협회 지회 발 회식을 한다고 한다.

차차 알아 본즉, 차 진사와 이 집에 모이는 사랍들은 선비 들이다. 모두 소매달이 심의 귀달린 깃에 망건을 도토리같 이 동이고 행전 위로 흘러 내리는 바지 가랑이가 땅에 줄줄 끌리는 선비들이다. 오직 차 진사만이 소매 없는 두루마기 에 통 좁은 바지를 입고 작은 강을 썼다.

일청 전쟁의 총소리에 놀래인 선비들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택하였다. 돈괘를 얻은 주자 모양으로 난세를 피하 여 산림에 숨는 것이 한 길이요, 또는 치국 평천하의 대경 륜을 품고 책상을 박차고 나서는 것이 한 길이다. 차 진사 와 그를 찾는 사람들은 다 책상ㅇㄹ 박차고 나온 무리들이 다. 오직 이 항목만이 박차 버리고 나올 책상이 없어서 호 미자루를 던지고 나온 사람이다. 호미자루를 던지고 뛰어 나온 항목은 저 웃목 한편 구석에 가만히 박여 앉아서 깜박 깜박하는 피마자 등잔불 곁엣 사람의 얼굴도 아니 보이는 담배 연기 연기 속에서 떠드는 선비들의 말을 가만히, 그러 나 유심히 듣고 있었다.

밤이 깊은 뒤에야 차 진사는 자기 여관으로 돌아갔다.

항목은 우연히 좋은 객주에 든 것을 기뻐하였다. 아직도 들끊는 낮에 파리와 밤에 빈대는 좀 견디기가 여러우나, 그 만한 고생을 교계하랴. 차 진사가 날마다 오고 그가 오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와서 여전히 정치담을 하고 부벽루에서 독립협회 발회식할 의논을 한다.

항목은 나날이 귀가 밝어져서 사흘째 되는 날에는 차 진사 의 하는 말 뜻을 죄다 알아 들었고, 차 진사가 별로 아는 것이 많지 아니한 것까지도 알았다. 그러나 그각 그처럼 정 성으로 여러 사람을 모아 데리고 날마다 종일 목이 쉬도록 독립협회 지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에 대하여 항목은 깊이 존경하는 뜻을 표하였다. 그 밖에는 별로 지식이나 능력 있 는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차 진사 바람에 따라 가는 것 같았다.

차 진사의 이야기를 듣기에 재미를 들여 항목은 평양들어 온 지 사흘이 넘도록 별로 문밖에도 아니 나갔다. 밤에는 여태껏 들은 세상 이야기로 되풀이해 생각도 해보고, 또 그 이야기를 재료로 조선과 세계 형편을 추측도 하느라고 밤이 깊도록 잠을 못 이루면서도 집 생각이나 그 여자 생각은 할 새도 없었다. 다만 문득문득 고개턱에서 서로 작별하던 생 각이 날 때마다 잠깐 맘이 비창해졌을 뿐이다.

이러하므로 객주집 주인도 항목의 행동을 수상이 여겨서

「너는 어디 있는 아인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차 진 사네 축도 날마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정신 차려 이야 기를 듣는 총각을 차차 이상히 생각하게 되어 「이름이 무 엇이며 집이 어디냐」 이러한 소리를 물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볕에 그을은 그 얼굴과 마디 난 그 손가락을 볼 때 에는 특별히 주의도 하지 아니하고 아마 집에서 농사하기가 싫어서 어떤 금전판으로 도망 가는 아이여니하였다.

그러나 항목과 같이 있는 사람들은 차차 항목과 이야기를 하게 되어 그 까닭에 항목은 차 진사의 내력과 여기 모이는 이들의 내력을 들을 수가 있었다.

차 진사는 숙천 동산대 사람이다. 본래 부자로 학자로 이 름이 있던 사람인데 민 모가 펴양 감사로 왔을 적에 애매히 여려 십만냥 돈을 빼앗겼다. 그리고는 민 감사가 갈려 올라 갈 때에 그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 갔다. 가기는 민 가사에 게 빼앗긴 돈을 받아 보려고 간 것이언마는 일년 이태 있는 동안에 받으려던 돈은 받지못하고 독립협회에 들어 서 박사 에게 새로운 사상을 받았다. 그리고는 민 감사 하나를 없이 할 것이 아니라 조정의 모든 간신 무리를 없이 해야 자기 하나만 살아날 것이 아니라 창생이 도탄 중에서 벗어나리라 하여 정치 운동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글도 잘하고 말 잘 하고 또 담대하고 독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민 감사도 서 울서 몇 번 만나 보고는, 돈은 아까와 내어 주 수가 없으나 사람은 무서워서 청지기에서 부탁하여, 차 진사가 오거든 대문 안에 들이지 말라고 어떤 평안도 사람이 오더라도 아 예 만나지도 않게 하라고 신칙을 하였다 한다. 지금 있는 평양 감사도 차 진사가 무서운 줄을 알므로 내부 대신의 조 회를 얻어 가지고 독립협회 지회를 세우려 내려 온 차 잔사 를 보고는 아주 동관이나 친구를 대하는 듯이 공손히 하였 고 일간 부벽루에서 열릴 발회식에서도 감사가 친히 참석하 마고 청하기도 전에 허락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렇게 호랑이 같고 이무기 같다는 민 감사도 차 진사 앞에서는 쩔쩔 맨다 하여 평양 감영에서 차진사 모 르는 이가 없고 그만이나 한지라 평양 온 지 불과 십여 일 에 사십여 명 회원을 얻은 것이다.

항목이가 같이 있는 사람에게 얻어 들은 차 진사의 역사는 이러하였다. 그것을 들을 때에 항목은 혼자 자탄하였다. 그 러면 저 차 진사가 지금 평양 감영에 첫째로 가는 인물인가 하고 만일 서울서 차 진사만한 인물 밖에 없어서 그를 대표 로 보낸 것이라 하면 조선에는 과연 인물이 없다고 이렇게 항목은 차 진사를 부족하게 보고 조선에 사람 없는 것을 차 탄하게 될 때,

『내가 나서야!』

하는 자존심 자부심이 생겼다. 그래서

『오냐, 세상이 이렇구나. 세사에 이렇게도 사람이 없었구 나. 어디, 평양 성중을 두루 찾아 보고 또 서울 장안을 두루 찾아 보자.』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부벽루에서 큰 회가 열리는 날이요, 감사도 나오고 기생의 풍악도 있다는 말이 평양 성중에 퍼져서 이른 아침부터 대 동문으로 청류벽으로 어른 아이들이 부벽루를 향하고 모이 기 시작하였다. 영명사 앞마당에는 국수 장수·떡장수·엿장수 들이 가계를 벌였다. 장사꾼들이 듣고 나가 전하였든지 촌 사람들도 모여 들어 온다. 지팡이 짚고 어린 아이들 손목 잡은 노파들까지도 왔다. 아마 무슨 유산이나 굿구경으로 안 모양이다.

마침 추석은 지나고 날은 맑고 춥도 덥도 않고 하여 사람 들의 얼굴엔ㄴ 모두 놀이터에 모인 듯한 기쁨이 나타난다.

어던 호험스러워 보이는 청년 하나는 성에 걸터앉아서 대동 강의 흐르는 물과 능라도 조는 섬을 바라보면서 처량하게 피리를 불고 모란봉 위로서는 길게 뽑는 수심가 가락이 울 어 온다.

모두 즐거운 놀이터다. 추석 명절에 하루 입고 개커서 어 른들 틈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아마 부벽루 근처 로 무거운 걸음을 걷는 큰갓에 소매 넓은 옷을 입은 몇 사 람만이 오늘이 무엇을 하는 날인 것과 세상에 대한 다소의 근심을 품은 사람일 것이다. 그 밖에는 모두 태평 견곤이다.

『날라리 늬나노—.』

하는 성랑의 피리 소리,

『노자 노자 헤에—.』

하는 모란봉의 수심가 가락 대동강의 끝없는 흐름, 그위로 시름 없이 오르내리는 길다란 수상선 뒤노는 아이들, 국수 와 떡과 엿을 사 먹는 시골 노파들, 어느 것이 태평의 기상 이 아니랴. 일청 전쟁의 대항구 아래 함편 귀가 떨어진 울 밀대 주춧돌에 아직도 화약 내가 묻었고 현무문 길바닥에 핏빛이 오히려 새롭건마는 그것은 저 백성들에게는 아무 상 관도 없는 일이다.

해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많이 모였다. 감영 나졸들 이 부벽루 가으로 왔다 갔다 하며 사람들을 내어 몰더니 부 벽루 마루와 사명 마당에는 멍석과 화문석이 내려갈리고 마 루 한편 구석에는 삼현 육각의 풍악 기구가 늘깔리고 마루 한편 구석에는 삼현 육각의 풍악 기구가 늘여 놓여 구경군 들을 기쁘게 한다. 북쪽으로 한층 높은 자리에 탁자 하나를 놓고 거기는 더 좋은 화문석을 깐다.

『저것이 감사 앉는 자리다.』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겍 가르쳐 준다.

그중에는 행의 입은 사람들도 간간이 섞였다. 마치 과거에 모여 드는 선비들 같다. 그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모르는 듯 이 부벅루를 싸고 빙빙 돌더니 그중에 용기 있는이가 먼저 신을 벗고 누로 올라 가 화문석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을 보고는 다를 선비들도 나도 나도 하고 들어가 앉는다. 삽시 가에 부벽루는 갓밭이 되었다. 앉아서는 모두들 아무 말도 없이 글을 외는 모양으로 몸을 흔들흔들 한다. 구경군들은 이제나 구경이 나는가 저제나 나는가 하여 무서워 무서워하 면서도 할걸음씩 한거름씩 가가이 밀려 들어 온다. 언제 왔 는지 그중엔 일본 사람도 이삼이 섞이고 서양 선교사도 하 나 돌아 다닌다.

『웨이 웨이.』

하는 벽제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많은 아전과 나졸로 앞 뒤를 호위한 감사가 영명사 앞 층층대를 무겁게 걸어 올라 온다. 회장에서는 풍악 소리가 일어나고 구경군들은 모두 서너 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앉아서 몸을 흔들던 선비들도 일제히 일어나 어떤 이는 분주히 신을 끌고 마루에서 내려 와 읍하고 서고, 어떤 이는 내려 올가말까하고 머뭇머뭇한 다. 어디 있다가 나왔는지 차 진사가 층층대까지 마주 나와 읍하고 감사를 맞으니, 감사도 친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마 주 고개를 숙인다. 구경군들은 더욱 뒷걸음을 쳐서 무러나 고 뚱둥하고 수염 없는 검은 건복에 자주띠 띤 감사는 통인 의 부측을 받아 읍하고 있는 갓 속으로 뚜벅두벅 마루에 올 라 와 자기가 앉은 곳을 얼른 알지 못하는 듯이 잠간 걸음 을 멈추고 휘 돌아 보다가 모두가 읍하고 마링 없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자기긔 지위를 확신하는 듯이 탁자 놓은 높 은 자리에 올라가 통인의 놓아 주는 안석에 한 팔을 기대고 난간 너머로 대동강 경치를 바라본다.

감사가 좌정하자 풍악은 뚝 그쳤다. 읍하고 섰던 선비들도 아까 모양으로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경군들도 조금 씩 조금씩 밀려 들어 와 아까 섰던 자리에 왔다. 일본 사람 들은 바싹 가까이 들어 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얼 굴을 보고 무어라고 저희끼리 웃고 이야기하며, 서양 선교 사는 무엇이 마땅치 아니한 듯한 얼굴로 왔다갔다 멀리로만 돈다. 차 진사는 감사와 두어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분주히 이리저리로 왔다갔다한다. 선비들과 구경군 눈은 모두 차 진사에게로 쏠린다. 그에게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기긱를 기 다리는 것이다.

마침내 차 진사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짚고 서서 일동을 휘 둘러 보더니, 탁자 위에 놓였던 끝방망이 같은 방망이를 들 어 탁자를 서너 번 딱딱 때리고 나서 가다듬은 목소리로,

『여러분! 이제는 시간이 되었으니 개회합니다. 다들 정숙히 하시기를 바랍니다.』하고는 또 한번 방망이로 탁자를 탁 치고는 방망이를 놓더니,『여러분! 동포들! 지금 태서 선진 십 이 제국(泰西先進十二諸國)에서는 부국 강병지책을 써서 동양으로 나와 이미 인도를 멸하고 월남을 병탐하고 청국을 침범하며, 또 우리 조선을 범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조선에 는 조정에 간신이 차고 수명·박뱅이 모두 포학하여 나라 일 을 돌아 보지 아니하고 주지 육림에 오희 월녀를 희롱하며 빙공 영사하여 사탁을 채우기로만 일을 삼습니다. 그런즉 우리 조선 나라는 국세의 급업함이 누란과 같습니다. 오희 라 우리 국가에 시민된 자–이것을 수수 방관할 수가 있습니 까. 태서 선진국 모양으로 우리 인민이 공고한 민당을 만들 어 나라를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유지 제씨가 독 립협회라는 민다를 만들었 는데 본인이 회장 서 재필 박사 의 뜨슬 받자와 우리 천년 고도평양에 지회를 선립할 차로 서울서 내려 왔던 바, 다행히 우리 현백(賢伯) 민 관찰사와 여러 유지 제씨의 찬성하심을 얻어 오늘 제일 강산 부벽루 에서 이 발회식을 거행하게 되었은즉, 아마 제일 강산이 생 긴 후에 이보다 더 기쁘고 경화로운 일은 없으리라 합니 다.』하고, 차 진사는 주먹으로 한번 탁자를 친다. 모인 사 람들 중에서 누가 박장을 한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이 이 상한 박장 소리 나는 데로 향한다. 그것을 보고 그 박장하 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여러분, 원래 회장님이 연설이 끝이 나면 박장훈 하는 법이외다. 그러니 우리 박장을 합시 다.』하고 또 박장을 한다. 다른 사람들도 박장을 한다. 구 경군들 중에도 박장을 한다. 선교사도 싱글싱글 웃으며 박 장을 한다. 차 진사는 박장이 끝나기를 기다려,『여러분! 그 런데 그물에는 벼리가 있는 모양으로 회에는 회장니미 있어 야 합니다. 먼저 세 사람을 호천하여 가지고 투표를 하겠습 니다.』

하고 투표할 조이 조각을 아전에게 주어 회원들에게 돌린 다. 회원들은 심도 모르고 종이 조각을 받아 든다. 차 진사 는,『내가 먼저 회장을 처합니다. 독립협회 관서 지휘장으로 평남 관찰사 민 영진 각하를 천합니다.』하고 감사를 돌아 본즉, 감사는 안석에 기댄 대로 빙그레 웃는다. 회원들 중에 서 한 사람이 일어나며,『나는 차 진사 경호씨를 천합니 다.』

한다. 다시는 더 천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아전들이 필 무글 들고 회중으로 돌아 다니려 할 적에 저편 구석에서,

『나 같은 총각도 말할 수가 있습니까?』하고 벌떡 일어서 는 이가 있다. 모두 놀래ㅓ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얼 굴이 볕에 그을고 짧은 두루마기 입은 총각이다.

차 진사는 그 총각이 객주에서 보던 총각인 줄을 알고 깜 짝 놀래었다. 감사도 고개를 번적 들어서 그 총각을 보았다.

차 진사는 빙그레 웃으며,『그래 무슨 말이냐? 어디 해보아 라!』

한다.

『여러 어른들!』

하고 총각은 힘있는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한다.

『정부 대관과 수령·방백이 모두 옳지 못한 놈들이 되어서 나라가 이렇게 위태하여졌으므로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이 민당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고 목소리를 더 높임에 모든 사람들은 이 총각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려는가 하고 눈도 깜빡 아니하고 총각의 입을 쳐다본다. 구경군들까지도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얼 굴로 모두 총각만 바라본다.

총각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모인 것을 알메 다소 주저하는 듯하였으나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

『그런데 이제 와 본즉, 민당을 세운다는 사람들이 일개평 안도 관찰사 앞에 허리를 굽히고 이제 또 그 사람을 회장으 로 뽑자 하니 이러고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들 이 죽 고 그렇게 생각들이 거짓되어 가지고 어떻게 넘어지는 나 라를 바로 잡겠습니까!』

할 대에 사람들은 모두 눈이 둥글어지고 구경군들도

『쟤가 어쩌려고 저러나?』

하고 수군거렸다.

차 진사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일어나서 팔을 흔들며

『얘, 네 말이 너무 버릇 없으니 그만하고 앉아라!』

하고 어떤 아전 하나는 총각의 곁으로 오면서 위협하는 듯 이,

『쉬!쉬!』

한다.

총각은 웃으며,

『여러분! 만일 내 말이 잘못되었거든 카로 내 입을 찢으 시오! 만일 내 말이 옳거든 여러분은 내 말을 좇으시오! 만 일 평양 감사가 무섭거든 가만히 집에 돌아가 누우시오. 만 일 나라를 바로 잡으려거든 의를 위하여 칼날도 두려워 마 시오!』

하고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어 디 서,

『그 말이 옳소!』

하는 소리가 난다. 관속은 총각의 팔을 붙들어 끌어 내었 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듯이 일어났다. 관찰사는 성 난 듯이 일어나 구경군들을 헤치고 나온다. 구경군들은 모 두 무서워서 뒷걸음을 쳐 물러선다. 갓 쓴 선비들은 어쩔 줄 을 모르고 주춤주춤하며 차 진사만 바라본다. 차 진사는 방 망이로 탁자를 두드리며,

『여러분! 다 정숙하시오! 앉으시오!』

하고 소리껏 외쳤으나 좀체로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 고, 슬쩍 뒤를 돌아 보며 신들을 집어 신고 달아났다. 그러 나 한 이십명 가량은 뒤에 남아서 회를 조직하였다. 차 진 사가 회를 조직하였다. 차 진사가 회장이 되었다.

구경군들은 흥이 깨어진 듯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더 러는 청류벽 밑에 먼저 와서 지켜 섰다가 관속에 게 붙들려 끌려 가는 총각을 보려 하였다. 총각은 무서워하는 빛도 없 이 끌려 갔다.

하나이,

『저게 왠 총각이야?』

하면, 다른 사람은.

『글세, 어느 촌 아이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막대해! 어쩌 면 그렇게 말을 잘해!』

하고 감칸도 하고,

『저게 이제 붙들려 가면 경칠걸. 죽일걸.』

하는 이도 있다.

평양 성중에서는 가게에 앉은 사람이나 길가는 사람이나 오늘 부벽루에서 일어난 일이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리 고는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총각이 흥미의 중심이 되었다.

그 총각은 말할 것도 없이 이 항목이다.

항목은 위태한 나라를ㄹ 바로 잡으려는 민당을 세운다하므 로 아마 그 사람들은 참으로 의기 있는 사람들로 알았다.

그랬더니 부벽루에 사 본즉, 감사 앞에 허리들을 굽히고 감 사를 상좌로 모셔 올리는 것을 볼 때에 차 진사가 객주에 와서 떠들던 말이 모두 거짓말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감사를 회장으로 봅자는 말을 들을 때에 항목은 참으려도 참을 수 없어서 그 말을 한 것이니, 자기는 옳은 말을 하면 어른들도 다 옳다고 들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 어른들이 모두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볼때에, 저것들도 사람인가 하고 기가 막혔다.

항목은 끄려 들어오는 길로 가목에 드러 갔다. 관속은 항 목의 발에 고랑을 채우며,

『망할 자식, 주둥이는 왜 가먹어서 인제 경치게 되었다.』

하고 주먹으로 항목의 어깨를 때리고 판장문을 탁 닫고 나 간다.

처음에는 가슴이 좀 울렁거렸으나 관속이 나간 뒤에 한참 있으니 정신이 가라앉는다. 길다랗고 컴컴한 방에는 자기와 같이 고랑 찬 사람이 십여 인이나 있다. 그네는 무덤 속에 서 뛰어 나온 사람같이 움푹 꺼진 눈으로 새로 들어 온 총 각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

옥에 들어 간 이튿날 아침에 혹 불면 날아날 조밥 한덩이 를 얻어 먹고 숭늉을 한 모금 먹었으면 하고 앉아노라니 옥 문이 덜걱덜걱한다. 방안에 앉은 죄인들ㅇㄴ 모두 RkaWKr 놀란 듯이 누을 둥글하여 덜커덕거리른ㄴ 옥문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누 차렌가, 누가 곤장을 맞고 피를 흘리며 들어 올 차렌가 하고 저마자 「낸가 넨가」함이다. 항목도 까닭 모르게 가슴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하고 말을 진정하려 할 때에 문이 열리며 옥졸이 철편을 들고 쑥 들어 서고 그 뒤로 키가 커다랗고 머리가 하얀양인 하나이 들어 선다. 양인은 못된 냄새를 못 견디어 하는 듯 이 눈살을 찌푸리며 파란 눈동자를 슬슬 굴려 방안에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더니 옥졸을 따라 항목의 곁으로 온다.

옥졸은 항목의 머리 꼬리를 잡아 당기며,

『이놈아, 이 양대인이 너를 보러 왔다. 이 양대인헌테 매 어 달려라. 그러면 나간다.』

하고 씩 웃는다.

양대인은 항목의 곁으로 와서 가마니 눈을 감고 입을 우물 우물하더니 눈을 EJ서 항목을 굽어 보며,

『흥흥. 당신 성명 무엇이요?』

하고 정답게 묻는다.

『내 성명은—.』

하고 대답하려다가 항목은 자기가 옥에 들어 왔단 말이 만 일 집으로 굴러 가면 집에서 걱정이 될 것을 두려워,

『네, 내 성명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양대인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염려 없소. 나 하나님 일하는 선교사요. 나 부벽루에서 당신 말하는 것 보고 당신 좋은 사람인 줄 알았소. 그래서 당신 동와 줄 양으로 온 거싱요. 당신 성명 말해도 염려 없 소.』

하고 더욱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양인을 별로 본 적 없는 항목은 양인이 조선말ㄹ으 하는 것도 신기하고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을 듣고 도와 줄 양으로 찾아 온 것도 신기하였 다. 그러나 자기의 성명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고맙습니다. 그러나 어저께 우리 관찰사가 물어도 내가 성명을 마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께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끝을 힘있게 맺었다.

양대인은 뜻을 알아 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더욱 유심히 항목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그러면 당신 성명 말하라고 내가 더 말 아니하겠소.』

하고 잠간 주저하다가,

『당신 예수 믿소?』

한다.

이 말을 듣고 항목은 속으로, 〈옳지, 이 것이 예수하는 양목사로구나.〉 하였다. 양목사들이 평양 와서 예수 퍼뜨린다는 말은 항목 도 들었다. 회심단이란 약을 먹여서 한번 예수에 들면 그만 미쳐 버린단 말도 들었다. 그러나 항목은 일찍 예수라는 사 람도 보지 못하고 예수란 어떠한 것인지 자세한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도와 주려고 찾아 온 것을 보 니 예수란 악한 것은 아닌가보다 하면서

『아니요. 나 예수란 말은 더러 들었지마는 알지 못해요.』

하였다. 양대인은 잠간 생각하는 모양으로 고개를 기웃기 웃하더니 허리  굽혀 입을 항목의 귀에 대이고,

『예수 믿는다고 하시오. 그러면 곧 나갈 수 있소. 나 감사 잘 아나 예수 안 믿는 사람 나오게 할 수 없소.』

한다. 항목은 양대인을 보며,

『내가 예수 안 믿는 것을 어떻게 믿는다고 합니까?』

이 말에 양대인은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보퉁이에서 책 한 권을 내어,

『당신 대단히 마 좋은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오! 흥흥, 이 책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 씀 있으니. 당신 그것 보면 예수 믿을 것이요. 이 책 잘 보 면 좋은 이치 많이 알 수 있소.』

하며 그 책을 받으며,

『네. 책 잘 보겠습니다. 보아서 내 맘에 좋으면 예수 믿겠 습니다.』

하고 감사하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양대인은 항목의 머리 를 어루만지며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형제 맘이 곧사오니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줄 아옵나이다. 이 형제에게 성신을 주사아버지 의 이치를 깨달아 조선 사람 속에 큰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 옵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하고 항목의 수갑 찬 손을 잡으며,

『내일 모레 또 오겠소. 이 책 정신 차려 잘 보시오.』

하고 나간다.

양대인이 나간 뒤에 같은 방에 있는 죄인들은 항목을 돌아 보며 그각 양대인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것을 책망하였다. 그 중에도 바로 항목의 곁에 앉은 얼굴에 핏기 하나도 없는 한 사십 된 사람은 움쑥 들어 간 눈을 무섭게 구리면서 항목더 러,

『글세, 너같이 못생긴 자식이 어디 있어? 양대인이 놓아 준다는데 왜 싫대어? 에수만 믿는다고 하면 곧 나갈 것을 백주에 실핟고 해? 어미를 붙었다고 하더라도 나가는 것이 자앗여. 빌어 먹을 자식 여기라는 데가 한번 들어오고 보면 다시 나가지는 못하는 데어. 돈이 많거나 세도가 좋거나 하 기 전에는 어느 귀신이 잡아 가는 줄도 모르게 썩어 죽는 데어.』

하고 그 사람은 점점 흥분되는 어조로,

『나도 여기 들어 온 지가 벌써 아마 오년은 되지. 오년인 지 육년인지 누가 아나. 들어 올 때에는 나도 남 부럽지 않 게 살도 찌고 속도 살았지마는 지금은 이 꼴이어. 인제 언 제 죽을지 아나. 이렇게 겉으로는 빼빼 마르고 속으로 푹푹 썩어 죽는단 말이어. 내가 여기 들어 온뒤에도 이 방에서 썩어 죽어 나간 녀석은 스물은 될 게다. 바로 두어 달 전에 너 앉았던 자리에 앉았던 사람도 얻어 맞고 병은 들고 하여 두어 달이나 골고하다가 퀴었단 말이야.』

하고 그는 여러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듯이 방안을 한번 둘러 보더니,

『나 너 할 것 없이 여기 들어 온 뒤에야 죽은 목숨이지.

칠성판에서 뛰어 나오는 놈은 있을지는 모르지마는 여기 들 어 왔다가 살아 나갔다는 말은 옛날에나 있는 말이야. 잡혀 와서 얼마 동안은 얻어 맞더라도 끄려 나가서 하늘 구경이 나 하지. 얼마만 지나면 우리 따위는 잊어 버리고 만다. 그 러고 감사가 갈리고 새 감사가 오면 수청 기생 고르기와 부 벽루 놀이에 열고가 나서 여기 들어 와 앉은 양반들은 점고 나 한번 해 본다든가?

그는 고개를 썰레썰레 흔들고 침을 두어 번 퇘퇘 뱉더니,

『그런데 이 못난 자식아, 양대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것을 싫대? 할밀 붙을 자식! 그렇게 똑똑한 체한면 별 수 있든? 똥이나 처먹어라』

하며 고개를 숙인 항목의 뺨에 구린내 나는 침을 탁 뱉는 다. 항목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보았으나 다투려하지도 아니하고 수갑 찬 팔굽이를 들어 뺨에 묻은 그 구린내 나는 가래침을 씻어 버렸다. 그때에 항목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가 자기에게 대하여 욕서을 하고 가래침 을 뱉은 것이 분하여 흐르는 눈물도 아니요, 또 그의 말과 같이 자기의 세상에 나갈 길이 망연하여서도 눈물을 흘림도 아니다. 그가 죽은 사람 같은 그가 움쑴 들어 간 눈을 헤번 덕거리며 축 쳐진 턱을 들먹거려 기운 없는 목소리로 함부 로 지껄이는 그 말이 항목에게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주었 다. 그의 말을 들으며 들을수록 어둠침침한 방이 더욱 어두 워지는 듯하고 방안에 앉아 말없이 그의 지껄이는 쇠를 듣 고 한숨을 쉬는 죄인들이 모두 귀신같이 무섭게 보였다. 항 목의 눈물은 이리하여 흐른 것이다.

항목은 긴 한숨으로 눈물을 거두고 공손한 어조롤 그사라 더러,

『어른께서는 무슨 죄로 오셧 이렇게 오년 동안이나 못 나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그는 그 무서운 눈으로 항목을 힐끗 보며

『나? 처음에야 무슨 죄가 있어서 붙들려 왔겠지. 그러나 인제는 하도 오래여서 다 잊어 버렸다. 다 잊어 버려썽. 내 집에 부모가 있었든지 처자가 있었든지 그것조차 인제는 다 잊어 버렸다. 가끔 이러고 앉았노라면 웬 늙은이 얼굴도 보 이고, 여편네도 번쩍 보이고, 발강 댕기도 보이니, 아마 나 도 부모·처자도 있었던 모양이지. 그러나 인제는 다 잊어 버 렸다. 내 성명도 다 잊어 버렸다.』

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항목은 차마 더 물어 보려 고도 아니하고 다만 곁눈으로 그의 하는 양만 엿보았다.

방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게 되었다. 죄인들은 몸을 비스듬 히 뒤로 기대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이따금 휘하고 한숨 들만 쉰다. 어디서 「아이고, 아이고!」하는 소리가 온다. 아 마 누가 악형을 받는 모양이다. 항목은 한참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양대인이 주고 간 책을 보기 시작하였다.

양대인이 주고 간 책은 순 국문으로 마태 복음이다. 항목 은 그 빨강 껍데기 한 조그마한 책을 입으로 책장을 넘겨 가며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부라 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 제들 낳고......』

하는 데는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장 삼장 읽어 갈수록 무슨 신기한 뜻이 있는 듯하여 항목은 차차 흥 미를 얻었다. 오장에서부터 칠장까지의 산상 보훈은 더욱이 그의 맘을 끌었다. 가끔 서투른 구절이 없지 아니하나 재미 있는 구절이 더욱 많았다. 무엇인지 꼭 형언할 수 없어도 지금가지에 들어 보지 못하던 무슨 높고 깊고 거룩한 말을 듣는 것 같았다. 그중에도 오장육장 절에,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는 자는 복이 있 나니, 저희 뜻이 이루어질 것이요.』

한 것과 제십절과 십 일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를 인하여 세상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 하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계 복이 있나니 기뻐하 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것이 크리라. 너희 전 에 있던 선지자들은 세상이 다 이와 같이 하였나니라.』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항목은 저를 두고 한 af같이 생각 하여 어쩔 줄 모르게 기뻤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속으로 읽다가 마침내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 읽었다. 그 소리에 방 안에 앉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하옥을 돌아보았다. 항목 의 얼굴에 웃음이 찬 것을 보고 그네는 이상히 여겼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얘, 너 무슨 책을 보고 그렇게 좋아하니? 어디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어든 한번 소리를 내어서 읽어 보아라. 심심한데 우리도 좀 들어 보자.』

한다. 항목은 그 청대로 지금 읽던 구절을 소리를 가다듬 어 한번 더 읽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네의 흥미를 끌지 않는지 모두 도롤 눈들을 감고 한숨을 쉰다. 항목은 더욱 신이 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 찌 다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쓸데 없어 밖에 버려 사람에 게 밝힘이 되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하고 읽어 내려 갈 대에 항목에게 가래침 뱉던 사람이 성 가신 듯이 항목을 노려 보며,

『이 빌어 먹다 뒈질 자식아 시끄럽다. 시끄러워! 보려거든 속으로나 보아라!』

하고 소리를 지른다. 항목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죽여싸.

방안에 앉은 죄인들은 모두 빙그레 웃었다.

항목은 소리 없이 연하여 읽어 내려 가서 제육장 삼십일절 에 다다랐다—

『그런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 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오직 그 나 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게 주시니....

..』

여기 이르러 항목은 책을 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 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하는 구절을 몇 번인지 모르 게 외고 또 외쳤다.

〈옳다! 나라와 의와! 이것이 나의 구할 것이다. 무엇을 먹 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가, 이것은 나의 염려할 바이 아니다! 나라와 의! 나라와 의! 나는 이것을 구하여 일 생을 살아 갈 것이다. 억조 창생이 평안히 살아 갈 나라를 세우려고 몸과 맘을 다하는 것 이것이 의다! 이것이 나의 할 일이다!〉 〈큰 핍박이 오리라. 욕도 먹으리라. 매도 맞으리라. 이렇 게 옥에도 들어오리라. 그리하더라도 오직 나의 구할 것은 나라와 의와 이것뿐이다!〉 항목의 가슴은 뛰고 얼굴엔느 피가 올라 왔다. 정신이 조 그마한 몸에서 빠져서 끝없는 공중으로 훌훌 날아 올라 가 는 듯하였다.

마침 이 날에는 감사에게 어떤 손님이 와서 이로부터 연 삼일 간 공사를 쉬고 잔치를 베푼다 하므로 감옥 안에 갇힌 죄인들은 끌려 나갔다 들어 왔다 하지도 아니하고, 옥졸들 도 어디로 술들으 먹으러 달아나서 방안이 아주 조용하였 다. 그 덕에 항목은 마태 복음을 끝까지 읽을 수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는 읽기 시작하여 저녁에 글자가 아니 보이게 되어야 책을 덮어 놓았다. 그리고는 밤에 찬 방바닥에 모으 로 누워서도 밤이 깊는 줄 모르도록 그 책에 쓰인 것을 생 각하고 되풀이하였다. 이리하여 옥에 들어 온 지 사흘만에 항목은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것같이 생각하였다.

〈예수는 천하 사람에게 사람이 밝아 갈 참길을 가르쳐 하 늘 나라를 세우려다가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었다. 나는 적 더라도 조선 사람을 깨워 내어 조선에 하늘 나라를 세우기 를 일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방안에 고랑을 차고 앉는 핏기없는 얼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네의 반 너머 썩어진 몸과 맘을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바른 말을 한 까닭으로 자기를 옥에 다가 잡아 가두고 친구 하나가 왔다 하여 잔치를 베푸노라 고 사흘씩이나 공사를 쉬는 감사를 생각하고, 또 차 진사가 조정의 모든 대관과 방백·수령들이다 백성의 피를 긁어 자기 으 배를 채우는 놈들이라고 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옳다! 조선 백성을 건지려면 먼저 이 썩어진 정부대관들 과 방백·수령들을 없이해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면 차 진사 의 말과 같이 민당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리니까 나는 옥 에서 나가는 날로부터 민당을 크게 만들기를 힘스리라. 여 러 천명 여러 만명 민당을 모아 서울로 거쳐 들어 가 썩어 진 정부 대관들을 몰아 내고 하는 나라를 세우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항목은 기쁨을 못 이기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어린 그의 앞에는 곤란이라든지 실패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아니하였다. 자기가 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예수 모양으로 장거리와 장가 바닷가로 돌아 다니며 백성들에게 말을 하여 삼년 내에 만명 민당은 모으리라 한다. 예수는 삼년 만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조롱과 비웃음 속에 십자가 에 못을 박힘이 되었거니와 자기는 삼년 후면 만여 명 민당 을 거느리고 남대문으로 휘몰아 들어가,

『썩어진 정부 대관들아 나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를 대에 늙은 대관들이 벌벌 떨며 자기앞에 꿇어 엎딜 것을 생각한다.

〈그리 되면 상감께서 나를 부르시리라. 나는 상감님을 뵈 옵거든 위선 썩어진 조정 대관과 방배·수려을 몰아내고 조선 에 예수께서 말하는 것과 같은 하늘 나라를 세워야 됩니다 고 아뢰리라.〉 비록 어린 항목의 눈앞에도 아주 자기가 지고 갈 십자가가 아니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만일 감사나 정부 대관이 자기 를 미워하고 시기하여서 몰래 죽여 버리면 어찌할까, 잡아 다가 이러한 옥속에 집어 넣어 저 사람들 모양으로 사년이 난 오년 동안 산 대로 썩어지게 되면 어쩌할까, 아니 만일 나를 잡아다가 가두면 민당이 몰려 와서 「우리 두목을 내 어 놓으라」고 야단을 하여 기어이 내어놓고야 말리라. 그 러나 나를 죽이면 어찌할까.

이까지 생각하다가 항목은 잠간 생각을 쉬었다.

〈일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원수의 손에 죽어 버리면 어찌 할까.〉 〈그런 리가 없다. 나는 일을 이루기 전에 죽을 리가 없다.

하늘이 나를 내신 것은 조선 나라를 바로 잡아 만백성을 평 안케 하라고 하심이라. 그러니까 나는 결코 일을 이루기 전 에는 죽을 리가 없다. 사람이 다 들러 붙고 귀신이 다 모여 들더라도 나는 건드리지 못한다! 옳다! 확실히 그렇다!〉 마태 복음을 보기와 이러한 생각을 하기로 항목은 언제 보 낸 줄 모르게 사흘을 보내었다. 나흘째 되는 오늘은 양대인 이 다시 오마 한 날이요, 도 감사의 잔치가 끝나는 날이다.

잡혀 온 후로 한번도 불려 나간 일이 없으니 아마 오늘은 한바탕 얻어 맞나보다 하고 항목은 문소리 나기만 기다렸다.

옥문 밖에 발자취 소리가 나더니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린 다. 그 데걱데걱하는 소리가 오늘은 특별히 항목에게 무섭 게 들렀다. 항목은 방안에 둘러 앉은 죄인들이 모두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보 ㄹ대에 항목은 일변 그네에게 대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고, 일번 내가 이렇게 겁을내어서는 아니 되 겠다. 요만 일에 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하고 기운을 내었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옥사각 들어 서며 무서워해라 하는 듯 한 눈으로 방안을 휘 둘러 본다. 죄인들은 모두 그의 눈을 피하여 고개를 돌린다. 항목도 자기 눈이 그 심술궂은 곱고 옥사의 눈과 마주칠 때에는 몸에 쭉 소름이 끼치는 듯하여 서 가만히 눈을 내려 떴다. 그러나 항목의 얼굴에 침을 뱉 던 죄잉능 무섭게 눈을 굴리며 옥사를 노려 보더니 지랄장 이 모양으로 몸을 흔들며,

『글세 이놈들아 어쩌잔 말이냐! 내가 죄가 있거든 있다고 하고 없거든 없다고 하려무나! 죽이겠거든 싹싹모가지를 베 려무나! 내어다가 때리기도 하려무나! 이감사놈 영장놈 너희 나졸들까지 모두 벼락을 맞아 죽어라!』

하고 악을 쓴다. 옥사는 기가 막히는 듯이 한참이나 멍하 고 섰더닌 그 죄인 곁으로 가까이 와서 물끄러미 죄인을 내 려다 보며,

『이놈아! 무엇이 어째?』

하고 따귀를 붙인다.

『옳다!』

하고 죄인은 더욱 몸을 흔들며,

『자, 나를 때려 죽여라. 이 급살을 맞을 놈들 같으니! 다 들 생사람을 잡아다가 왜 오년 동안이나 이 지옥구석에다 썩히느냐 이놈들아!』

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꺼이꺼이 처운다. 이 소리에 옥 졸이 사오인이나 모여 와서 야단하는 죄인을 에워 싸고 삥 둘러 선다. 처음에는 모두 무서운 것이나 보는 듯이 눈이 둥그레지더니 그중에 한 옥졸이 누구더러 묻는지 모르게

『이녀석도 무얼하다가 붙들려 왔누?』

한즉 다른 옥졸이,

『모르지. 내가 오니까 벌써 이녀석으 여기 있던데.』

하고 또 한 옥졸은

『나도 구실 들어 온 지가 벌써 오년이나 되었건만 이죄인 신문받는 것 못 보았지. 아마 어느 감사 등내에 붙들어다 놓고는 그 감사 갈려 간 뒤에는 다 잊어 버렸나봐!』

한다. 그중에 늙은 옥졸 하나이 만사를 다 아는 듯이 고개 를 썰레써레 흔들고 손짓을 하여 가며,

『너희들은 다 모른다. 이 사람도 십년 전에는 안주에헌다 하는 양반이요, 부자더란다. 민○○감사 동네에 이 사람도 호협한 소년으로 펴양 감영에 와서 놀다가 어찌어찌하여 감 사의 수처 ㅇ들던 기생 하나를 건드린 죄로 붙들려 와서는 세간 다 없애 버리고 이 꼴이 되었단다. 그 감사가 갈려 간 뒤에 여러 감사가 왔지마는 이 사람은 죄안에 이름도 오르 지 않아서 한번 신문도 받아 본 일 없이 벌서 팔년짼가 구 년짼가 된다누.』

늙은 옥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죄인 그러 대며 갖은 악담을 다한다. 늙은 옥졸은

『얘들아, 다들 나가자.』

하고 다른 옥졸들의 드을 떠밀며,

『이 사람도 팔자 괴악하게 타고 났지. 그래도 아직도 안 죽는 것이 신통하지. 얘들아, 너희들도 우락부락하지 말아 라. 죽을 날도 몇 달 안 남았으니 죽는 날가지 편안히 있다 가 죽게.』 하고 모두 밀려 나간다.

떨렁떨렁하는 현령 소리가 난다.

「예─이 예─이」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난다. 항목의 방 에 처음 들어 왔던 옥사는 잊어 버렷던 것을 새로 생각하는 듯이 깜짝 놀라며 항목의 곁으로 와서 발에 채운 고랑을 벗 기고 목에 칼을 씌우더니,

『자 나가자. 가서 한번 따끔하게 경을 쳐 보아라.』

하고 목덜미를 집어 앞세운다. 항목은 전신의 피가 머리로 다 오랄 오는 듯하게 반항하는 맘과 무서운 맘이 섞여 일어 나면서 옥사에게 떠미렬 옥문을 나섰다.

옥사는 항목이가 미처 발을 옮겨 놓을 새가 없이 등을 떠 민다. 울룩불룩 귀가 일어난 방석에 발이 걸려 몇 번이나 넘어갈 번하였다. 목에 달린 칼보다도 목덜미를 확누른 옥 사의 굳은 주먹이 더욱 못 견디게 불쾌하였다.

삼문 안에는 수없는 나졸들이 이상 야릇한 벙거지와 옷을 입고 허리들을 꾸부리고 둘러 섰다. 옥사는 더욱 항목의 목 덜미를 힘껏 내려 눌러 발이 땅에 붙을 새 없이 항목을 떠 밀어다가 나졸들이 둘러 선 한가운데 무릎이 깨어져라 더 힘것 꽉 누르면서 옥사는,

『예이, 죄인 대령했습니다.』

하고「다」자를 길게 뽑는다. 그런즉 죽 둘러 선 나졸들이 무어라고,

『예─이─쉬─.』

하고 응한다. 항목의 흥분한 귀에는 그 소리들이 모두 무 슨 귀신들이 우짖는 소리같이 들린다. 항목은 고개를 좀 들 어 보려 사였으나 조금만 움직거려도 사방으로서 쇠뭉치 같 은 주먹이 와서 목덜미와 등을 꾹꾹 눌렀다. 항목은 다시는 고개를 들려고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다만 〈이것이 다 잊 지 못할 것이다.〉하고 반항하는 생각이 가슴에 복받칠 뿐 이다.

이리하여 심문이 시작되었다. 말 마디마다,

『예─이─쉬.』

하는 합창이 있으면서,

『요놈, 네 성명이 무엇이야?』

하는 소리가 내려 오면,

『예─이─쉬─ 요놈 네 성명이 무엇이야 바로 아룁랍신 다. 예─이─쉬─.』

한다. 항목은 힘있는 목소리로,

『나는 성명을 마하지 아니하겠소!』

한다. 이 거만한 대답은 일찍이 마당에서 나와 본인이 없 었다. 모두 그 의외으 대답에 놀란 듯이 잠간 잠잠하다. 이 윽고 아까보다 좀 더 위엄 있고 큰 목소리로,

『요 발칙한 놈이 관장을 모랄 보고...... 고 발칙한 놈을 네 단개에 피 묻혀 올려라!』

하는 소리가 나자, 두럴 섰던 나졸들은,

『예─이─쉬─.』

소리와 함게 우수수 왔다갔다하며 무슨 무거운 것을 끌어 들이는 소리와 질질 끄는 소리와 무엇을 털썩 내려놓는 소 리가 나더니 손 몇 개가 항목을 반작 들어 형틀위에 오려 얹고 찢어져라 하고 바지를 끌어 내려 엉덩이을 까놓고는 전 모양으로 쭉 갈라 선다. 또 머리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 고

『예─이─쉬─.』

하는 소리가 나더니 딱하는 소리가 나며 항목의 엉덩이가 터지는 듯이 아프다. 항목은 부지 불각에 몸을 들어다 놓았 다. 그러나 손발을 얽었고 머리 꼬리 조차 형틀에 비끄러 aols 것을 발견하였다. 항목은 윽하고 이를 갈았다.

『요놈, 네 죄를 몰라?』

『나는 바른 말을 한 것 밖에 아무 죄도 없소.』

『요놈, 네가 바른 말을 했어? 요 발칙한 놈 같으니! 요놈 네가 부벽루에서 한 말을 잊어 버렸어?』

『안 잊어 버렸소.』

『지금도 그런 소리를 할 테야?』

『바른 말은 아무 데서나 하겠소. 당신같이 굽은 말으 가 진 자가 바른 말으 들을 줄 모르는 것이 가엾소.』

이러한 문답이 있고는 항목은 정신을 잃었다. 항목이가 정 신을 차린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다.

항목의 다리에는 성한 곳이 없이 맷자리가 나고 엉덩이나 장단지에서는 다량의 피가 흘렀다. 항목은 희미한 정신에도 자기의 바지가 피에 젖어 끈쩍함을 깨달았다. 허리 아래는 내 몸 같긷 하고 아니 것 같기도 한데, 다마 가끔가끔 숨이 턱턱 막히도록 두 다리가 저리고 쑤실 때에 이것이 내 살인 줄을 알 뿐이다. 아픈 대로 다리를 좀 움직여 보려 하였으 나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 얼음장 같은 방 바닥에 철썩 달라붙은 등도 찬 줄을모르고, 입술과 혓바닥 이 타는 듯이 마르도록 항목의 몸에는 신열이 높다. 항목은 나오는 줄 모르게,

『나, 물!』

하였다. 그러나 여기는 대답하는 자도 없었다.

항목의 마른 목을 냉수 한 모금으로 축여주는 이도 없어 항목은 희미한 정신에 애를 부덩부덩 쓰던 항목은 혼수 상 태에 빠졌다. 같은 방에 앉은 죄인들도,

『저 애 죽는다.』

고 근심을 하였다.

항목이가 두 번째 혼수 상태에서 깨어 낫을 때에는 항목의 눈에 비추인 것은 전에 있던 감옥 방이 아니요, 어떤 깨끗 한 사사집 방이었다.

〈내가 어디 있나?〉 하고 희미한 의식으로 생각해 보려 할 때에 어떤 젊은 사 람이 숟가락에 무엇을 떠서 자기 입에 넣는다. 항목은 떠놓 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 삼켰다. 그 젊은 사람은 기쁜 듯이 항목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려다보며,

『정신이 나오?』

하고 웃는다.

항목은 눈을 좀 떴다. 그러나 자기에게 말을 하는 이ㅢ 얼 굴을 아 수가 없었다.

『네.』

하고 항목은 점점 더 정신을 차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감옥소에 있었는데?』

하고 물었다.

그 젊은 사람은 항목의 말하는 양을 보고 기쁨을 못이기는 듯이 항목의 손을 잡으며,

『아아, 인제 살아났구료. 사흘만에 겨우 살아 났구료.』

한다. 그러나 항목은 그의 하는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또 잠드는 듯이 정신이 혼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의 간호와 서양 의사의 치료로 칠팔일 후에는 일어날 앉을이만큼 되었다. 그래서 밥도 예사로 먹 고 그 젊은 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또 감옥에서 찾아 오던 서양 목사각 올때마다 성경 토론도 하고 기도도 하였다. 그 젊은 사람은 방 대형이라 하여 지금 스물다섯 살 된 이집 주인이요, 오랜 예수교 신자다. 항목이가 매맞은 이튿날 양 목사가 감옥에 왔다가 이 모양을 보고는 곧 감사에게로 달 려 들러가 그 형벌이 야만인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 리는 것이 고자님의 도리에 옳지 아니함을 말하고, 구두발 로 방바닥을 구르며 딱딱얼렀다. 양대인의 말이면 상감님도 거스르지 못하는 줄을 잘 아는 감사는 목구멍까지 올라 오 는 아니꼬움을 억지로 삼켜 가면서 양대인의 말대로 항목을 무죄 방면하게 하였다. 그래서 양대인은 하목을 담아다가 방 대형의 집에 둔 것이요, 방 대형은 부벽루에서 항목의 말하던 기개를 사랑하여 그를 놓아 주도록 목사에게 간청한 것이다.

항목의 병은 나았다. 대형의 집에 있은 지 한 달만에는 하 목은 지팡이 없이 걸어 다니게 되었다. 그뿐더러 그 한 달 동안에 항목은 목사와 대형에게서 많은 인격적감화와 지식 을 얻었다. 목사는 거의 날마다 아침 아홉시 가량이면 꼭 찾아 와서 대형과 항목과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그후에 는 정치·사회·교육·학술 등 서양 문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항목에게는 모두가 새롭고 귀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기어이 서양을 가리라가서 정치학 공부를 하여 오리라, 그 래서 조선도 서양과 같이 만들리라,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 었다. 대형이도 말끝마다 그리하기를 권하였다.

『조선도 이대로는 살 수 없어. 서양을 본받아서 모두 변 해야지.』

하는 대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자기도 서양을 가기를 원하거니와, 늙은 어머니의 외아들로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또 항목은 대형에게서 배운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나 라 일은 청년들이 하는 것이니, 조선서도 청년들이 일어나 야 한다 함이다. 대형은 예배당에 다니는 젊은 예수교인들 을 많이 친하고 또 예수교인 외에도 될 수 있는 대로 청년 들을 많이 교제하여 그네에게 조선도 서양을 본받아서 모든 것을 개혁하여야 할 것과, 그리하려면 청년들이 많이 일어 나야 할 것을 말하였다. 항목이가 있는 동안에도 대형의 집 에는 많은 청년들이 찾아 오고, 찾아오면 반드시 한두 시간 씩 이야기를 듣고 갔다. 갈 때에는 대개 얼굴이 붉도록 흥 분하여 당장에 무슨 큰일을 저지를 듯하였다. 대형의 날마 다 하는 일은 실로 이러한 청년 교제였다. 그는 몸가짐에 위엄이 있고도 다정하고, 말이 유창하여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을 취하게 하였다.

서양 목사도 대형을 대하여 여러 번 목사 되기를 권하였 다. 그러나 대혀은 그때마다 자기는 그 재목이 아니라하여 목사의 청을 사절하였다. 목사는 심히 대형을 사랑하였으나 동시에 그를 두려워하였다. 대개 목사의 생각에 대형이가 만일 교회의 큰일구닝 되지 아니하면 반드시 교회의 큰 대 적이 될 거슬 안 까닭이다. 벌써부터 교회의 청년들은 대형 으 깃발 밑으로 모여 들었다. 교회에서 그 청년들을 움직이 려면 먼저 대형을 움직이지 아니하면 안될만큼 청년간에 대 형의 세력이 컸다. 대형은 일찍 강단 위에 나서서 강도를 하여 본 적도 없고, 또 교회의 직원이 된 적도 없었다. 그러 나 청년들은 그를 보기만 하여도 자연히 그에게 끌렸다.

항목도 벌써 그에게 끌렸다. 항목이 보기에 대형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속에는 끌 간 데를 모르는 지혜와 지식이 있고, 또 무엇에나 두려워함이 없는 용기가 있었다. 아마 머 리 위에 벼락이 떨어져도 눈도 깜짝할 것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항목이 보기에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 형이가 그렇게 모든 것을 잘 알고 또 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또 조선을 서양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하면 서도 말뿐이요, 자기는 직접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꽤 친한 뒤에 항목은 대형더러,

『형님은 왜 세상에 안 나서요? 차 진사 같은 이가 다 나 서서 덤비는데?』

하고 물었다. 그런즉 그는 웃으며,

『다 때가 있소. 지금은 차 진사 같은 이가 나서서 떠들 대요.』

하였다.

『그러면 형님이 나설 때는 언제야요?』

하고 항목이가 다시 물으면 그는 더 유심히 빙그레 웃으 며,

『항목이가 미국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올 만한 때 요.』

할 뿐이었다.

그때에는 아직 지금 쓰는 뜻과 같은 교육이란 말은 없었 다. 그러나 대형은 나라 일과 교육과의 관계를 알아만나는 청년마다 미국 가서 공부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항목의 생각에는 대형의 안 나서는 이유가 분명치 못하였다. 다만 그를 믿기 때문에 아마 그가 안 나서는 것 은 그의 말같이 아직 나설 때가 아니 된 것이어니 하였다.

항목의 매맞은 자리는 아주 나았다. 그리고는 예배당에 가 서 세례를 받고 대형과 같이 청년들과 모여 나라일을 토론 하기로 일을 삼았다.

마침 차 진사의 설립한 평양 독립협회 지회는 날로 왕성하 여 이듬해 봄에는 벌서 회원아 사백여명에 달하였다. 날이 더워짐에 따라 부벽루와 연광정에서 거의 날마다 연설회가 있었다. 그래서 대형과 교제하는 청년들도 모두 정치열이 팽창하여 모여만 앉으면 정부 대관을 탄핵하고 민 감사의 학정을 비방하였다. 감사에게 원통하게 돈을 빼앗기거나 매 를 맞았거나 또는 어떤 수령에게 그러한 일을 당한 사람들 은 대동문안 독립협회 사무소로 와서 그의 원통한 것을 풀 어 달라고 빌게 되고, 그러면 차 진사는 곧 선화당으로 달 려가 감사에게 질문을 하여 흔히는 백성들의 원통한 것을 풀어 주었다. 이리하여 차 진사는 평양엣 감사 이상으로 백 성들의 존경을 받게 도고 , 독립협회의 세력은 날로 무섭게 늘었다. 이바람에 청년들은 대형에게 와서 우리네도 일어나 자고 졸랐다. 만일 아니 일어나려거든 독립협회에 들자고 졸랐다. 항목도 항상 대형을 졸랐다. 그러나 대형은 그때마 다 침착하게,

『아직도 때가 아니니 어서 미국들이나 가서 공부들이나 해 가지고 오시오.』

하고 조금도 응하는 빛이 없었다. 대형의 이러한 태도를 불만히 여겨서 단독으로 독립협회에 입회하는 청년도 하나 둘 생겼다. 하루는 대형이가 항목더러 조용히,

『항목도 독립협회에 입회하려오? 꼭 하고 싶거든 자유로 하시오.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마시오—항목이가 공부를 마치 고 돌아 오기까지는 아직 일할 때가 아닌 줄을.』

하였다.

평양 온 지 일년만에 항목은 예수교회와 독립협회에 말 잘 하는 이 총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방 대형과 이 항목이라면 평양감영에 모르는 사라미 없게 되었다. 대 형은 결코 연설을 아니하지마는 항목은 연설하기를 좋아하 였다. 예수교 예배당에서도 사오차나 강도를 하였다. 총각의 강도를 듣는 예수교인들은 다 그가 성신을 받았다고 일컬었 고, 그중에도 젊은 축들이 항목을 심히 사라하였다. 그래서 항목이가 비록 총각이지마는 그더러 아이 대접하는 이가 없 었다.

어떤 부자 과부는 항목을 사위를 삼는다고 열고가 나서 방 대형에게 여러번 청을 하였다. 그러나 방 대형은 항목이가 미국에 가기 위하여 허락을 아니하였고 항목은 앞 고개에서 작별한 과부를 위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항목은 마침내 평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오월 어느 날 민 감사가 부벽루에 생일 잔치를 벌 이고 각읍 수령과 평양 사람들을 모아 질탕하게 노닐 때에 항목도 그 자리에 참예하였다가 작년 모양으로 벌떡 일어난 감사 공격을 하였다. 감사는 항목의 얼굴을 기억하므로 그 가 벌떡 일어날 때에 치를 떨었다. 항목은 감사를 노려 보 며 나라 일이 이렇게 위태한 때에 나라에 중한 벼슬을 받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릴 생각은 없이 날마다 음탕하게 노는 것은 나라에 대하여 큰 죄요, 백성에게 대하여 큰 죄니 이 러한 난신의 머리 위에는 반드시 천벌이 내리리라 하고 추 상같이 외칠 때에 일좌에 앉은 사람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 어 감히 고개를 드는 자가 없었다.

과연 이날으 부벽루 연설은 항목의 일생에 기억할 만한 웅 변이었다. 그 어조라든지, 억양이라든지, 그 엄숙하고 장중 한 태도라든지, 듣는 자도 모골이 송연하도록 두려운 생각 이 나게 하였다. 부벽루에 돌아 오는 길에 대형이가 항목의 손을 꽉 잡으며,

『항목이! 과연 웅변이요! 공부하고 돌아 오는 날에는 반드 시 조선 인민의 선도자가 될 것이요!』

하고 감격한 눈물을 흘릴만큼 그렇게 그날의 항목의 연설 은 사람을 감동하는 힘이 컸다. 감사도 처음에는 항목을 노 려도 보고 소리를 지르려고도 하였으나 항목의 연설이 나갈 수록 차차 고개가 숙어지고 차 진사도 두어번 항목을 향하 여 팔을 흔들었으나 마침내 당하지 못할 줄을 알고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이날 평양 감영에는 말 잘하는 이 총각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그날에는 말 잘하는 것 외에 무슨 무서운 힘이 이 이 총각의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감사는 파홍과 망신을 당하고 돌아 와서는 객을 다 사절하고 방안에 꼭들어 앉아 서 죽을 듯이 괴로워하였다. 이날에 항목을 잡지 아니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백성들은 여러 가질 그 까닭을 추측 하였다.

집에 돌아 오자 대형은 항목더러 이 밤으로 곧 평양을 떠 나길 권하였다. 비록 사람들이 두려워 감사도 즉석에서는 항목을 잡지 못하였거니와, 반드시 후환이 있을것이요, 이번 에 불들리면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우리라함과 도 공연히 평양에 있어서 세월을 허비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속히 미국 으로 가는 것이 좋으니, 이것을 기회로 평양을 떠나서 서울 로 올라 가라 함이 대형의 이유다.

항목은 이리하여 그날 밤으로 대동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 였다. 대형과 다른 청년 사오인은 같은 배로 대동강을 건너 항목을 전송하였다.

첫여름 바람이 솔솔 불고 양양한 대동강 위에는 달빛이 가 득하였다. 조그마한 낚싯배를 소리 없이 저어 건너가는 일 곱 청년의 흉중에는 무한한 회포가 있었다. 그네는 낚시배 를 대동강 동쪽 언덕 버들숲 밑에 대이고 미리 준비하였던 술을 내어 마셨다.

고요한 달밤 대동강 위 버들 그늘에서 나는 일곱 청년의 소근거림은 거의 끝날 줄을 몰랐다. 밤이 깊은 뒤에 한 사 람이,

『자, 이제 항목군을 작별할 때에 우리 각기 일생에 할 일 을 말하자.』

하였다.

일곱 사람은 정숙하게 앉았다. 그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유 진석이부터 차례로 말하기르 작정하였다. 유 진석은 팔 을 뽐내며,

『나는 병학을 배워서 장수가 되려네, 멀지 아니하여서 여 러 나라가 조선을 침노할 것이니까, 조선에도 일본 모양으 로 군대를 세워야 할 것이니까, 나는 명년에는 일본으로 가 서 병학을 배우려네.』

하고 그 뚱뚱하고 키 큰 모믈 흔들어 가며 말한다.

다음에는 이 항목—

『나는 미국 가서 정치를 배우려오. 정치를 배워다가 조선 의 정치를 개혁하려오. 우리 나라가 이렇게 어둡고 약한 것 은 모두 정치가 잘못된 까닭이니, 이것을 우리가 고치지 아 니하면 누가 고치오? 그러니까 나는 정치를 배워 일생을 정 치가로 지내려오!』

다음에는 키 작고 눈 작고 표독하기로 유명한 임 휘.

그는 쇠소리 같은 목소리로 몸도 꼼짝하지 아니하고,

『나는 정치도 배우고 병학도 배우고 싶소. 그러나 나는 먼저 병학을 배우려오. 우선 내 손에 병마의 권을 잡아서 나라의 난신 적자 놈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그런 뒤에 정 치를 하려 화. 또 조선이 지광이 적으니 이것만으로는 큰 나라를 만들 수가 없으니까 우리는 군대를 크게 양성하여서 요동 칠백리를 우리 판도를 만들어야 하겠소. 그러니까 나 는 병학을 배워 일생에 군인 정치가가 되려오.』

임 휘의 말이 끝나자 일동은.

『좋다!』

하고 소리를 쳤다. 임 휘의 조그마한 눈은 달빛에 반짝반 짝하였다.

그 다음 늘 웃어 가지고 있는 박 준식. 그 느리고 가는 목 소리로,

『내야 무엇 할 것 있나, 글이나 쓰지 글이나 써. 글쓰는 사람도 있어야 되네. 있어야 되어.』

하며, 갑자기 기운을 내어,

『자네네들은 칼을 들어 천하를 호령하지마는 나는 붓을 들어 천할ㄹ 호령한단 말야!』

하고 더 나올 말이 있는 듯하다가 뚝 끊고 허허 웃는다.

일동도,

『좋다!』

하고 웃었다.

그다음 미남자요 말 잘하기로 유명한 정 윤빈. 모믈 꼿곳 이 gku 위엄을 내며 간단히,

『나는 일어와 영어와 청어를 배워서 외교관이 되겠소.』

하고 만다. 일동은

『소진이!』

하고 웃었다.

그 다음 박 대형,

『나는 교육가가 되려오. 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을 많이 모 두어 도덕과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가가 되려오. 여러분의 말씀하는 바가 다 우리 나라에 필요한 것이어니와, 교육은 나라의 기초요. 나는 여러분이 이후에 각각 뜻한대로 성공 한 뒤에라도 일심하여 교육에 힘쓰기를 바라오.』

한다. 일동은 그 말에 동의하는 듯이 다만 고개를 끄덕끄 덕할 뿐이었다.

맨 나중에 나이 벌써 삼십이나 된 최 윤식,

『나는 벌써 나이 많아서 공부도 할 수 없고 또 전에 배운 재주도 없으니 여러분이 다 공부하고들 돌아 오거든 심부름 이나 하여 드리지요. 나도 이미 나라에 몸은 바쳤으니 아무 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은 아니할 것이요. 나는 손을 꼽아 가며 여러분이 공부들을 마치고 돌아 오시기만 기다리지 요.』

한다. 일동이 그의 정성이 넘치는 태도에 감격하여 잠잠하 였다.

일곱 사람의 말이 끝난 뒤에 대형은 일어날 큰 잔에 수를 가득히 부어 들고,

『자, 우리가 인제 일생에 할 일을 말하였으니 저 하늘과 땅과 달과 별과 대동강의 물을 증인으로 하고 여기서 한 가 지 서약을 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맘을 온전히 나라에 바치되, 우리 일곱 사람이 함만 한 뜻이 되어 나라를 위하 여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를 합시다. 만일 내 말에 응하시 거던 모두 손을 들으시오!』

모두 일어나 손을 높이 들었다. 높이 든 일곱 손이 달빛에 보기에 검극과 같아싸. 대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천지 신명이여! 우리의 맺은 거룩한 서약을 증거하시옵 소서. 비록 몸이 칼에 죽을지언정 이 굳은 맹세가 변치 말 게 하시옵소서.』

일동의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 쳤다.

오늘 오시에 독립문 낙성식이 있다고 서울 장안은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물 끓듯하였다. 연주문을 헐어 버리고 맨돌 로만 하늘에 닿는 홍예문을 세웠다. 오늘은 대황제 폐하가 거동을 한단다. 이제부터는 우리 상감님이 조선 왕이 아니 요, 대황제 폐하다. 연주문을 흔들 적에 오백년 묵은 큰 구 렁이가 나와서 사람을 열 아홉이나 잡아 먹었다. 오늘 독립 문 낙성연에는 십 이 제국 사람들이 다 모이고 십 이 제국 풍악을 다 잡힌다— 이러한 소리가 장안에 쭉 돌았다. 중늙 은이 여편네들은 아이들 데리고 구경 간다고 이삼일 전부터 의복과 돈을 장만하였고, 새문 밖에서 연주문까지 오는 길 가 집들에는 양반집과 돈 있는 집에서 누구누구의 의막이라 는 패를 서 붙였다. 궐내에서도 오늘은 특별히 일찍이 조회 를 폐하고 망조백관이 모두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공연히 대궐 마당으로 왔다 갔다하며 대궐문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였다. 새로 대황제 폐하기 되신 상감께서도 마관 조약에 당신이 대황제 페하가 되셨다는 기별을 처음 들을 때보다도 더욱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 갔다하며 내부 대신을 불러라 군부 대신을 불러라 하고 심 히 바쁘셨다. 어젯밤 닭 울기까지에 태조 고 황제로부터 추 숭할 일을 다 추숭하시고 궁중에서 부르는 모든 칭호와 예 식도 마지막 결정이 되었다. 오늘 독립문 낙성연이 끝나면 조선은 완전히 당당한 대한제국이 되고 상감님은 완전히 당 당한 대황제 폐하가 되시는 듯하였다.

『아아, 대황제 폐하! 어떻게난 영광스러운 이름인고! 아아, 조선 왕! 어떻게난 수치스러운 이름인고! 아아, 대한제국 대 황제 페하—.』

하고 대황제 페하께서는 아라사에서 새로 맞춰 온 군복에 끝이 뾰족한 모잘ㄹ 쓰시고 혼자 난간에 지어 서서 대궐 마 당에 느어진 수양버들 가지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으셨다.

시종 무관장이 들어 와,

『일본 공사가 폐현 청합니다.』

『아라사 공사가 폐현을 청합니다.』

할 때마다 대황제 폐하는 귀찮은 듯이 고래르 약간 움직인 뿐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풍악이나 아뢰라.』

하실 뿐이었다. 황젠ㄴ 오늘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의 위의 를 갖추고 만인 환호 중에 독립문으로 거동하실 기쁨과 그 리고 나서는 재각년에 참혹하게 돌아 가신 왕비—아니다 황 후릉에 거동하실 생각뿐이다.

날은 맑다. 대궐 안에 부는 바람은 그리 덥지 아니하고 특 별히 서늘하였다. 어전도 꺼리지 아니하는 참새들은 추녀 끝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며 지저귄다. 어원의 꽃향기에 취한 나비들도 오늘은 따라서 황제의 앞으로 자주 지나가며, 춤을 추었다. 천지에는 모두 서기뿐이다. 황제에게 오직 한 가지 근심이 있다. 그것은 이 씨 오백년이라는 정감록의 예언이다.

〈오백년? 오백년이라면 앞에 몇 해가 안 가리웠다! 오백 년? 아아, 그럴ㄹ 리가 있나.〉 하고 정감록의 잠언을 부인하려 하나, 그것이 아무리 하여 도 마음에 걸린다. 이때에 대한문 밖으로서,

『만세!』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하는 여러 백명 군중의 외친 소리가 들린다. 시종과는 이 것이 독립협회의 봉축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듣고 황제는 빙그레 웃으시며, 〈오백년, 그럴 리가 있나!〉 하고 황제는, 〈만세, 만세.〉 를 속으로 서너 번 외셨다.

그러나 독립협회란 말에 새로운 근심이 일어났다. 참정 대 신은 독립협회를 역모하는 무리라 하였고, 외부 대신은 미 국이 서 재필을 시켜서 대한제국을 망하게 하는 당파라고 하였다.

〈그가 미국의 힘을 등지고 짐을 배반해!〉 그럴 듯한 일이다. 그러나 참정 대신과 의부 대신의 말도 함부로 믿을 수는 없다. 지금도 독립협회 사람들이,

『대황제 폐하 만세.』

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황제께서는 맘을 정할 수가 없었다.

대한문에서 남대문을 지나 독립문에 이르는 큰길에는 깨끗 한 석비레가 깔리고 묵묵히 새 군복을 입고 망건 위에 삼보 를 쓰고 총을 멘 병정이 둘씩 셋씩 파수를 보며 진시 말무 터는 큰길에 다니는 행인을 벽제하였다. 장안에서 내어 밀 리는 구경군들은 모두 새문과 서소문이 터져랄 하고 나와서 누구나 한두 번씩 파수 보는 병정에게 길을 막히면 서성 밑 으로 도랑 독립문을 향하고 나왔다. 사시쯤 되어서는 악바 우골 약물터와 인왕산 기슭에는 온통 사람으로 덮였다. 아 마 아침부터 무악재를 넘어 온 사람만 하여도 이만명은 넘 을 것이다.

하늘에 닿는 돌 홍에문, 헐어 버린 연주문, 사람을 열아홉 씩이나 잡아 먹었다는 연주문 구렁이, 상감님의 거동—이런 것이 모두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 것이다.

이윽고 하늘에 닿는 듯한 돌 홍예문 꼭대기에는 까맣게 커 다란 태극기가 바람에 펄렁거릴 때에 수없는 백성들은 일제 히,

『저것 보아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마치 「우아~」하는 고함 소리 같았다.

얼마 있다가는 그 돌 홍예문 꼭대기에서 땅 밑가지 몇줄인 지 모르는 줄이 달리고 그 줄에 울긋불긋한 만국기가 일시 에 달렸다. 그것을 본 백성들은 한번 더,

『우아!』

하고 고함을 쳤다. 꼭대기에 달린 태극기와 수없이 펄렁거 리는 만국기는 쉬지 않고 바람에 펄렁거린다. 그것을 보는 수없는 백성들은 비록 그 뜻을 kf지 못한다 하여도 적더라 도 무슨 좋은 일같이 보였다.

독립문 앞에는 헐려진 연주문 재목을 그냥 쌓아 놀고 굵다 란 연주문 돌기둥은 섬거적을 싸 놓았다. 그리고 영은문이 라는 큰 현관은 바로 독립문 아래 땅바닥에 서너조각을 깨 뜨려 놓아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씩 밟도록 하였 다. 오늘 대황제가 만조 백관을 거느리고 나오시면 황제가 앞 서고 백관이 뒤를 따라 그 여러 백년 치욕의 기억을 가 진 연주문 현관을 밟고 지나갈 거시오, 그런 후에는 일반 인민들이 한번씩 밟고 지나갈 것이다.

사시 중은 되었다. 나팔 소리가 나더니 병정 한 떼가 뚜벅 뚜벅 걸어 와서 독립문 앞에 이르러서는 독립문을 향하고 이열 횡대가 되어 우뚝 서더니, 새로 길게 뽑는 나팔 소리 에 병정들은 높이 달린 국기를 향하여 받드러 총을 하고 다 시 총을 메고는 나팔 소리에 발을 맞추어 무슨 노래를 부르 면서 독립문을 서너 바퀴 싸고 돌더니, 장관이 긴 칼을 한 번 두르자 나팔 소리가 그치고 병정들은 독립문을 싸고 둥 그렇게 물러선다. 총 끝에 끼인 창과 장관의 군도가 여름 볕에 번쩍번쩍한다.

외국 공사들도 조선 대관들도 하나씩 둘씩 남녀에서 내려 서는 독립문 바람에 날리는 깃발을 쳐다보고는 독립관으로 들어 가 버린다.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상감님 거동 이 오시기를 기다린다. 어디서 깃발만 펄렁거려도 구경군들 은 주먹에 땀을 쥐었다.

바로 이맘때에 항목은 옷 보퉁이를 지고 지팡이를 끌며 구 경 오는 백성들의 무리에 싸여서 무악재를 넘어섰다. 사람 들을 뚫고 몸을 비비적거려서 겨우 독립문에서 한 사오십보 된는 데까지 와서는 더 나갈 수가 없어서 우뚝 섰다.

그는 높이 달린 태극기와 돌 홍예무늘 바라보았다. 그리고 는 백차일 치듯 모여 든 사람들으 보았다. 사나이·여편네, 늙은이, 젊은이, 어른, 아이 , 선비들, 농부들, 모군군들—이 수없는 대한제국 백성들 중에 대한제국 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몇 명이며, 오늘날 이렇게 베푸는 잔치의 뜻을 아는 이는 몇몇인가 하고 혼자 한탄하였다. 연주문의 큰 구렁이 가 들어서 사람을 해하므로 그 구렁일 잠노라고 연주무능 헐어 버리고 돌로 다 새연주문을 지어싸고서, 그 늙은 구렁 이를 죽였으니까 금년에는 큰 병이 돌거나 또 큰 난리가 나 리라고 주막 주인이 설명하던 말을 생각할 때에 그리고 이 제 저 독립문과 모인 백성들을 볼 때에 항목의 가슴은 찢어 지게 아팠다.

오시가 넘고 미시 초가 지나도 상감님은 아니 나오셨다.

내려 쪼이는 여름 볕은 점점 더워 가고 솔솔 불던 바람조차 없어져서 독립문 위에 달린 깃발도 축 늘어지고 말았다. 구 경 온 백성들의 붉게 익은 이마에는 구슬땀이 흐르고 모처 럼 입고 나온 적삼 샛등에는 땀들이 배었다.

『거동이 안 나오는 게야.』

하는 소리가 차차 나오기 시작하였다.

독립관에 나온 내외국 고관들도 기다리다 모사여 맘이 초 조한 듯이 공연히 문밖에 나왔다 들어 갔다 한다.

미시 말이나 되어서 시종관이 독립관으로 달려 와서,

『대황제 폐하께서는 옥체가 미녕하시와, 오늘 독립문 행 행을 중지하압신다.』

는 뜻을 노하였다. 통역관은 그 말을 서양 말로 번역하였 다. 이 말을 듣고 솔직한 서양 사람들은 성을 내어 입에 물 었던 여송연을 방바닥에 팽개치며 무엇이라고 떠들면서 한 국 고관들의 위로하는 말도 듣지 아니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서 박사는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듯이 눈싸릉 찌푸리고 방 안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의무 협관을 붙들고,

『웬일이요? 어떤 못된 놈들이 또 무슨 소리를 하여서 이 렇게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 망신을 시킨단 말이요?』

하고, 곁눈질으 하고 앉았는 대관들을 힐긋 들떠 보면서 성낸 어조로,

『당신네들은 나라와 황제의 은혜를 받고서 높은 벼슬을 하면서 조상에게서 물려 가진 못된 버릇을 아직도 떼어 버 리지 못하고 꼭 나라를 망치고야 말려는구료! 저 독립문을 헐어 버릴 자도 당신네들이요.』

하고, 차차 더욱 흥분하여 구둣발로 마루를 텅텅 구르고 주먹을 내어 두르며,

『이 정신없는 양반들아, 나라가 망하면 당신네의 시기와 질투가 꽉 찬 모가지가 그냥 붙어 있을 줄을 아시오!』

하고 소리를 지른다. 대관들은 모두 마땅치 아니하는 듯이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견디어 보아라」 하는 듯이 입을 꼭 다문다. 그중에 가장 나 많은 학부 대신이 서박사의 곁으로 오며,

『자네 너무하네그려. 여기 앉은 사람이 다 자네 부집이 아닌가. 어디 그렇게 말을 하는 법이 있나. 도 오늘 일로 말 하면 위로서 옥체가 미녕하셔서 그런 게지 누가 누구를 참 소한 거소 아닌데......』

하고 반쯤 서 박사를 책망하는 듯, 반쯤 위로하는 듯이 말 한다.

서 박사는 학부 대신의 마링 끝나기도 저에,

『부집은 부집이요, 나랏 일은 나랏 일이지요...... 오늘일은 내가 다 알아요—아까까지 행행하신다고 준비를 하시고 외국 사신들까지 인견하시던 폐하께서 그렇게 갑자기 옥체가 미 녕하실 리가 어디 있소. 참정 대신과 의부대신이 참소를 한 게지요.』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은 참정 대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가서,

『참정 대신!』

하고 힘있는 소리로 불렀다. 참정 대신은 대답 없이 힐끗 서 박사르 볼 뿐이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아직 젊은 놈이 얼느도 모랄 보고! 괘씸한 놈 같으니」하는 빛이 보인다.

서 박사는 성이 나고도 조롱한는 듯한 태도로,

『참정 대신! 대감께서 칠십이 가깝도록 굴록을 자시고 한 일이 무엇이요? 뱃성의 필 빨고 충신들으 죽이고 위로 폐하 를 속이고—그것 밖에 한 일이 무엇이요?대감! 죽을 날이 몇 날 안 남았거든 아직고 지은 죄악이 부족해서 폐하에게 수 치를 드리고 내 부모와 처자를 죽여 버린 솜씨 나까지 죽이 려고 하는구료!』

하고 서 박사는 발로 땅을 한번 구른다. 학부 대신은 황망 히 서 박사의 팔을 잡아 끌며,

『여보게, 자네 이게 웬일인가? 잘못일세 잘못이여! 참경 대신이 그러셨을 리가 있나.....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서 박사를 끌어 내려 한다. 다른 대신들과 젊은 사람 들도 모두 일어선다. 참정 대신은.

『응!』

하고 돌아 앉는다. 서 박사는 학부 대신의 잡은 팔을 뿌리 치며 양복 주머니에서 어떤 편지 한 장을 낸다.

『이 편지가 무슨 편진지 대감은 아시겠지요?』

하고, 그 편지 겉봉을 빼어 한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편지 를 펼쳐서 참정 대신의 눈앞에 갖다 대인다. 참정대신은 힐 끗 그 편지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듯이 낯빛이 변한다. 학 부 대신도 그 편지를 들여다 보고 다른 대관들과 다 모여 들어서 그 편지를 본다. 서 박사는 그 편지를 흔들면서 조 롱하는 목소리로,

『이것이 분명히 대감의 친필이지요? 이것이 일국의 정사 를 맡은 참정 대신의 소위로구료!』

하고 그 편지를 들어 중간 몇 구절을 낭독한다—

『역적 재필이 지금 미국의 힘을 믿고 다수한 도당을 모아 날로 정부를 압바하고 민심을 소요하니 반드시 현정부를 전 복하고 우리 무리를 참멸할 흉계를 품은 것이라. 이제 재필 을 그대로 방임하면 우리 무리 후회하여도 막급할 것이라, 내 이미 폐하께 재필의 역모 있음을 누차주달하였고, 외무 대신도 다른 길로 재필의 의심 있음을 주달하여 폐하께옵서 는 이미 재필을 의심하시고 미워하신즉, 우리가 이를 들어 후환을 제함은 바로 이때라. 원컨대 대감은 일변 보부상으 로 하여금 독립협회의 흉도들을 쳐 몰아 내고 일변 자객을 택하여 흉적 재필의 성명을 없이 하고......』

여기까지 내려 일거리 서 박사는 견딜 수 없이 분한 듯이 그 편지를 떨리는 손에 움켜 쥐며,

『여보시오! 나는 이 나라에서 받은 화가 있을지언정 받은 은혜는 없는 사람이요. 당신네는 죄 없는 내 부모와 처자와 상족을 육시하였소. 그래도 나는 조국을 못잊어 이 나라에 를 다시 찾아 왔소. 행여나 이 나라를 남의 나라만큼 만들 어 볼까 하고 다시 찾아 온 것이요.』

여기까지 말하고 서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흑흑 느끼는 목 소리로,

『그런데 당신네들은 이 나라에 은혜 속에 갖은 부귀공며 을 다 누리면서 그러면서도 나라를 사랑할 줄으 모르고, 갖 은 망할 짓을 다하는구료! 오늘 폐하께서 행행을 중지하신 것도 무슨 까닭인지 내가 다 아오. 오늘 역적 서 재필이가 독립협회의 흉도를 거느리고 폐하를 해하려 합니다. 이것이 당신 같은 간악한 입이 마땅히 할만한 말이요!』

하고 서 박사는 아무리 하여도 쓸데 없다 하는 듯이 휘돌 아 서서 문을 향하고 나오며,

『잘들하시오! 당신네의 죄악으로 늙은 모가지가 생전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멀지 아니하여서 반드시 당신네들 짐승 보다도 더 더러운 뼈다귀가 가루가 될 날이 있으리다!』

하고 뛰어 나온다.

참정 대신의 얼굴은 중병을 앓은 사람 모양으로 해쓱하게 되었다. 다른 대관들도 말없이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독립관으로서는 위의 엄숙한 대관의 일행이 나온 다. 어느 새에 길가에 벌여 섰던 병정들은 대관 일행이 지나갈 때에 받들어 총의 경례를 한다.

잠간 갔던 바라미 다시 일어나서 독립문에 달린 깃발들이 힘있게 펄렁 거리고 거동을 못 보아 실망한 백성의 떼는 물 빠져 나가듯이 사바으로 흩어졌다. 더러는 가까이 와서 독 립문 구경을 하려고 독립문을 향하고 모여든다. 그네들은 손으로 돌으 만져도 보고 rhroff 들어 까맣게 높은 천정을 바라다보아싸. 그 큰 구렁이 있던 데가 어딘가 하고 돌아 보며 묻는 이도 있고, 연주문 기둥을 싼 섬거적을 들쳐 보 는 이도 있다. 길바닥에 놓인 연주문 현판은 수없는 발에 밝히어 산산 조각이 나고 어떤 선비 같은 사람은 허리를 꾸 부리고 그 조각을 모아서 글자를 맞추어 보다가 뒤로 들어 오는 사람에게 밀려나오기도 한다.

항목이도 이러한 사람들 틈에 끼었다.

저녁때가 겨워서야 사람들이 흩어지고 말아싸. 항목은 혼 자 독립문 앞에 서서 이런 생각저런 생각을 하고 방화하다 가 갑자기 시장하고 피곤한 생각이 나서 주막을 찾으며 걷 기 시작하였다.

항목은 장안에 들어 와 대형이가 소개하여 준 객주에 들었 다. 그 집에는 사십명 사람이나 들어 있는데 모두 독립협회 회원으로 시골서 모여 든 사람들이요, 그중에 반수는 평안 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대개 오랜 객지에 때 묻은 옷을 입고 소매 좁은 두루마기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개화군들로 한 방에 오륙인씩이나 모여 있어서, 밤에는 마 루와 툇마루에 나와 자고, 어떤 사람은 뒷곁과 마당에서도 잔다. 자고 나서 아침만 먹으면 종로에 있는 회관으로 모여 가서 이야기 하고 연설도 듣고 회도 하다가 저녁이면 배고 픈 모양으로 돌아 온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사람 하나를 독립 신문사로 보내어 몇 장 신문을 사다 놓고는 쭉 둘러 앉아서 소리를 내어 논설과 잡보를 읽고, 그것을 다 읽고 나서는 정부 대관의 공격과 서 박사에게서 들은 서양 이야 기를 하였다.

그네의 말을 듣건데, 서 박사는 미국에서도 대통령 다음으 로 가는 잘난 사람이요, 그러므로 서 박사를 건드리면 독립 협회 일은 걱정이 없고, 얼마 아니하여 조정의 간신들을 다 몰아 내고 서양과 같은 훌륭한 새 나라를 만들리라고 한다.

그리되면 저 썩어진 양반 계급은 다 없어지고 민당들이 세 력을 잡아 대신이나 수령이나 방백이나 다 민당 사람들이 하게 되리라 한다.

항목이가 그 객주에 들어 갔을 때에는 한참 오늘 독립문 낙성식 이야기가 벌어졌을 때다.

「간신놈들이 우리 독립협회를 참소하여서 폐하께서 거동 을 중지하셨다.」하는 것은 그네의 일치한 의견이다. 내일 신문에는 반드시 그 사연이 날 것이요, 그리고는 박사가 가 만히 있지 아니할 터인즉 반드시 이번에는 무슨일이 나리 라. 이번에 일이 나면 저 썩어진 정부를 뒤집어 엎고 서 박 사가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리라 하는 것이 그네의 결론이었다.

그 사람들 주에는 항목의 이름을 들은 이도 있었다. 부벽 루에서 민 감사를 공격하고 옥에 드러 가 매를 맞고 나온 이 총각이라고, 저녁상이 나가기 전에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일종의 호기심 을 가지고 이 총각을 보려고 모여 들었고 그중에 어떠한 사 람은 존경하는 항목을 동지와 같이 대우하였다. 내일은 곧 독립협회에 입회를 하라고 그리고는 정부를 공격하는 대연 설을 하라고 격려하는 이조차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항목 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몰랐으나 어느덧 어른에게 대한 예로

「항목씨」라고 부르고 혹은 「여보 이 수재」하고 부르게 되었다. 누가 시작하였는지 모르나「이 수재」라는 이름이 차차 통용되게 되었다.

그날 밤에 항목은 여러 사람들에게 펴양 형편을 이야기하 였다. 독립협회 일이며 민 김사의 일이며, 맨 나중에는 부벽 루 민 감사의 생일 잔치에 일어난 풍파까지 말으 하였다.

사람들은 다 항목의 조리 있고 참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 고 민 감사 생일 잔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잠잠하게 듣다가 항목의 연설한 이야기가 끝날 때에는 일제히 박장을 하며 통쾌하다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노라고 짧은 여름밤이 벌써 자정이 되 어 종로 인경 소리가 구슬프게 꿍궁 울려 온다. 이 소리를 처음 듣는 항목은 그 꿍꿍하고 울려 오는 인경 소리를 심히 슬프게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자경 인경소리를 듣고는 따라 비감한 생각이 나는 듯하였다.

아아, 구슬픈 인경 소리! 오백년 해에 몇 십만 번이나 저렇 게 울었던고! 저렇게 울다가 끊이고 끊였다가 울고 하는 동 안에 몇 번이나 흥망과 성쇠의 기쁜 운수, 슬픈 운수가 오 고 가고 하였는고! 지금 저 소리가 울려 오는 이 순간에 무 슨 무서운 운수의 한 고개가 넘어가는고!

항목은 자리에 누웠으나 여러 날 노독과 오늘 흥분에 잘 잠이 들지 못하였다.

독립협회의원들과 장안 백성들은 칠월 이십 오일 진시만수 성 절에 대안문으로 모이라는 인쇄한 통문이 돌았다. 이 통 문이 돈 날밤에 자안 인심은 물 끓듯하였다.

독립문 낙성식 사건이 있은 후로 정부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각가지로 압박 수단을 써 왔고 이 때문에 독립협회 원들의 정부에 대한 악감은 더욱 맹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무슨 일이 나고야 만다」하는 것이 무슨 요언 모양 으로 장안 성중에 꽉 퍼졌다. 서 박사의 집에서 칼 가지고 들어 온 사람을 잡았다는 둥, 서병선이 들어 왔다는둥, 독립 협회원들이 들어 있는 객주집에 염탐군이 들어 왔다는 둥, 대원군이 독립협회에 들었다는 둥, 그럴 듯한 소문, 엉터리 도 없는 소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장안으로 돌아 다녔다.

무슨 일인지 모르거니와, 자나가던 미국 병선 두 척이 제 물포에 들어오 지가 사흘이나 되어도 떠날 생각을 아니하고 그다음에는 일본 병선 두 척이 또 제물포 어귀에 들어 왔다 하여 인심이 흉흉하던 데다가 내일 아침 진사에 모두 대안 문 앞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볼 때에는 누구나,

『아뿔사, 무슨 변이 나는군!』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에 헌병과 순검이 통 떨어나서 열씩 스물씩 떼를 지어 가지고 독립협회원들 들어 있는 여 관으로 돌아 다니며,「칙령이 내렸으니 모두 문밖으로 나가 라」는 명령을 전하고, 만일 듣지 아니하면 모조리 잡아다 가 가둔다고 위협을 하였다.

항목의 여관에서도 모두 저녁을 먹고나서《독립신문》을 읽고 있을 때에 헌병 한 떼가 밀려 들어 와서 무섭게 위엄 을 부르며,

『여보, 모두들 당자에 문밖으로 나가시오!』

하고 호령을 한다.

일동은 이 의외의 명려에 깜짝 노래어 어안이 벙벙하였다.

회원 중에 한 사람이 나서며,

『왜 문밖으로 나가라고 그러시오?』

하고 질문을 하였다.

『왜?』

하고, 한 헌병이 아픙로 썩 나서서 그 회원으 흘겨 보며,

『대황제 폐하의 칙령이야!』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헌병들이 방방이 돌아다니 며 어서어서 지으 싸 가지고 나가라고 야단을 한다.

사람들은 모두 벌벌떨며 보퉁이를 싸  이도 있고 어떤 이 는 벌써 마당에 내려 서는 이도 있다.

항목은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섰더니 차마 견딜 수 없느 듯이 뒷마루롤 나사며,

『여러분, 잠간만 기다리시오!』

한다.

마당에 내러 섰던 이들과 보퉁이를 싸던 이들도 다 고개를 돌려 항목이를 본다. 항목은 헌병더러,

『내 생각에는 그러한 칙령이 내릴 리가 없소. 대황제 폐 하께서 아무 죄 없는 인민을 문바끙로 몰아 내실 리가 만무 하오!』

한다.

헌병은 항목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놈아, 아이놈이 무슨 잔소리야!』

하고 주먹을 내어 두른다. 항목은 천연히 서서,

『안될 말이오. 아무리 아이라도 이 나라의 백성이오. 이 나라으 백성을 누가 감히 맘대로 내어 쫓는단 말이요. 만일 칙령이 내렸거든 칙령을 가지고 오시오! 그러기 전에는 우 리는 한걸음도 여기서 물러나지 아니하겠소!』

하며 방에 들어 앉는다. 마당에 내려 갔던 사람들도 다시 오랄 왔다. 그러고는

『칙령을 가직 오너라.』

고 헌병을 얼렀다.

헌병들은 이제 순검을 내보어서 모조리 잡아 간다고 위협 을 하고는 다 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에는 헌병도 순검도 다시 오지 아니하였다.

헌병들이 나간 뒤에 하옥은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오늘 저녁에 장안에 있는 회원들이 모두 문밖으로 쫓겨날 모양이 니 집을 아는 이들은 속히 찾아 돌아 다니며 아예 문밖으로 나가지 말도록 이르자고, 만일 다들 문밖으로 나가면 내일 아침에 모일 수가 없다고 반론하였다. 여러 사람은 다 항목 의 말에 찬성하였다. 찬성이라기보다 복종하였다.

항목은 혼자 여관에 앉아서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 다. 자경이나 되어서 다들 돌아 왔다. 그 보고를 듣건댄, 삼 분지 이는 벌써 문밖으로 쫓겨 나가고 한 오십명은 안 나가 려다가 붙들려 가고, 삼백명 가량은 안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듣고 다들 자리에 누우려 할 적에 서 박사에게 서 기별이 왔다. 회원들을 문밖으로 내어 쫓으려 한 것은 참정 대신과 군부 대신의 음모요, 황제의 칙령이 내린 것이 아니고 헌병이나 순검이 와서 무에라고 하더라도 결코 복종 하지 말라 함과, 내일 대안문 앞에 모이는 일은 심히 중대 한 일이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모일 것과, 또 그날에 무 슨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 말고 끝까지 나라 를 위하ㅕ 일심하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드러누워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는 벌떡 일어나서 곁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도 드 러누웠다가는 또 일어나고, 이 모양으로 밤을 새웠다.

항목도 뭇느 큰 변이 앞엣 기다리는 듯하여 자믈 이루지 못하였다. 또 사람들은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항목에 게 물어 볼 만큼 항목을 신임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잠이 들 다가는 곁엣 사람에게 깨움이 되었다.

이러다가 해뜨게 일어나서 아침들을 먹고는 다시 안돌아 올 사람들 모양으로 짐을 꽁꽁 싸 놓고 대안문을 향하고 나 섰다. 항목도 그 과부가 준 은가락지와 은전과 노잣돈 남은 것을 꽁꽁 싸서 품에 감추고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

항목이가 있던 여관은 소공등이었으므로 대안문 앞에를 가 려면 황단 앞 골목으로 빠져 나와야 하게 되었다.

지금 상업 회의소 있는 삼거리에 나서서, 거기는 순검과 헌병들이 지키어 서서 사람들의 동행을 금하므로 명동과 소 공동으로 나오던 사람들의 떼와 희동, 정동으로 나온던 사 람들의 때는 상업 회의소 앞에 와서는 더 나갈 수가 없이 되었다. 길이 막힌 사람들은 좀체로 뒤로 물러가려고도 아 니하고 연하여 내어 미는 사람의 힘에 한걸음씩 한걸음씩 주춤주춤 대안문을 향하고 나오게 된다. 순검과 헌병들은 마침내 길에 새끼줄을 건너 매고 카를 배어 지키고 있다.

누구든지 새끼줄만 넘어서면 내려 찍을 듯이 으른다. 앞에 선 사람들은 이 바라에 흔히 나서 뒤로 물러가려 하난 고개 만 뒤로 젖혀질 뿐이요, 발을 옮겨 놓을 수도 없었다. 잠잠 하던 사람들 속에서는 차차 벌의 소리같이 소곤거리는 소리 가 나고 가끔,

『우아!』

하는 고함 소리가 난다. 일분, 이분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 는 더욱 등등하여 간다. 항목의 일행도 사람ㄷㄹ 틈에 끼어 이따금 앞으로 모믈 내어 밀었다.

그동안에 몇 십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거니와 시간이 지나 갈수록 사람들의 맘은 점점 예민하게 되어 어디서 무슨 소 리나 아니 나나, 누가 무슨 일을 먼저 시작이나 아니하나 하고 서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맨 앞에서,

『우아!』

하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앞으로 나가라는 명령이나 되는 것같이 있는 힘 을 다하여 앞으로 내어 밀었다. 마치 축동이 터진 물 모양 으로 사람의 메는 무섭게 속한 속력으로 십여 보나 내어 밀 렸다. 이때에 어디서,

『사람 죽었다. 순검이 사람 죽인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새끼줄에서 한 오륙보 앞에는 함부로 내어 두르는 순검과 헌병의 칼에, 혹은 팔과 넓적다리를 찍 힌 사람이 여덟이나 넘어졌다. 이것을 본 사람들의 눈에는 빨갛게 피가 올랐다.

『우리를 다 죽여라!』

소리를 치며 사람들은 피가 콸콸 쏟는 시체를 맞들고 아픙 로 달려 나갔다. 순검과 헌병은 몇 번 저항하려 하였으나 마침내 쫓겨 가게 되었다. 순검들도 뛰고 수없는 사람의 메 도 뛰고, 고함치고, 부르짓고, 정신 차릴 수 없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순검 중에도 칼을 빼앗긴 자, 목청을 찢긴 자, 삼보를 잃어 버린 자가 많았다.

대안문 앞으로 피 흐르는 송장을 떠메고 달려드는 수천명 군중을 보고 다른 길에서 순검과 헌병에게 막혔던 군중들 도,

『우아!』

소리를 치며, 경게선을 뚫고 대안문 앞으로 모여 들었다.

대안문 앞은 순신간에 임산 인해를 이루었다. 일어나는 먼 지와 떠드는 소리와, 마치 전장과 같았다. 대안문을 지키던 병정은 황망히 대안문을 닫고 공중을 향하여 십여 발이나 헛총을 놓았다. 해는 벌써 사시 초가 가까워 말복 뜨거운 볕이 사람들의 흥분한 머리를 내려 쬐었다.

피 흐르는 시체는 바로 대안문 앞에 섬거적을 펴고 가지런 히 누웠다. 더러는 정신도 차라리 못하나 더러는 가끔가끔 소리를 질렀다—

『정부에 썩어진 놈들을 다 없애 버려라!』

『우리에게도 자유를 다오!』

『나라이 망한다!』

—이러한 비분 강개한 부르짖음이었다. 이렇게 소리를 지를 적마다 피는 더욱 흘렀다. 대문 앞 흙에는 어떤 사라믜 끊 는 피가 깊이 배었다.

이윽고 시체를 놓은 곁에서 누구가 무엇 위에 높이 올라 서며 기를 두른다. 사람들은 떠들던 것을 그치고 그기 두르 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사라믕 독립협회 평의 자 유 병준 이다. 수염 많은 얼굴에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여러분! 대한 국민들! 우리는 나라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날 마지막으로 우리 대황제 폐하께 상소를 하려고 모인 것이외다..... 우리 대한은 망합니다... 정부 대 관은 모두 간신 놈들이외다. 빙공 영사로 나라 이름을 팔아 국민의 피와 기름을 긁어서는 제 배를 채울 뿐이외다...... 이 러므로 우리 대한 나라는 망합니다. 여러분, 대한 국민!』

하고 유 평의장은 목이 막혀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들더니 더욱 소리에 힘을 주어,

『우리 대한은 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보고 가만 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독립협회는 과거 일년간 있는 힘으 다하여 정부에 건의도 하고 직무도 하고 권고도 하였지마는 그 오장이 썩어지고 짐승의 마음이 가득 찬 정 부 대관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려고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를 역적으로 모랑 대황제 폐하께 참소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군중 속에서,

『그놈들을 다 잡아 내어라!』

하는 소리를 친다. 유 평의장은 기를 두럴 정숙하라는 뜻 을 표하며,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할일 없이 예성 문무하신 우리 대황제 폐하께 우리 국민의 참뜻을 아뢰려고 오늘이 자리에 모인 것이외다. 그런데 여러분! 흉악한 당국자는 칼을 빼어 충량한 우리 국민을 이렇게 죽였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여덟 신체를 가리키며,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흘릴 피가 있습니까? 나라를 위하 여 흐릴 피가 있습니까?』

하고 말을 끊는다. 사람들은

『있소!』

『있소!』

『그놈들을 잡아 내어라!』

하고 한참 동안이나 끊는다. 유 평의장으 다시 기를 두르 며,

『여러분! 여러분께 만일 이 여덟 분 의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흐릴 피가 있거든, 대황제 폐하께서 정부의 썩어진 무리를 내어 버리신다는 조칙이 내리기까지 여기시 한걸으 도 물러가지 맙시다. 만일 내 말에 찬성하시거든 찬저이요 하고 손을 듭시오!』

사람들은,

『찬성이요!』

하며 수없는 손을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바다의 물결소 리와 같았다.

황제께서는 백성들이 대안문으로 몰려 들어 온단 말을 들 으시고 놀라셨다. 일내에 옥체가 내령하오시어 열 한시가 넘어야 일어나시던 황제께서는 이날 여덟시도 되기전에 이 러나셔서 몸소 여러 침실로 도랑 다니시면서 황태자와 여러 궁녀들을 깨우시고 시종관을 급파하여, 참정 대신 이하 각 대신을 부르셨다. 그러나 다르 대신들은 모두 백성들이 무 서워서 칭벙하고 아니 들어오고 들어 온 것은 오직 참정 대 신과 외부 대신과 나 많은 학구대신뿐이었다. 황제께서는 심히 흥분되신 어조로,

『경들은 짐의 오백년 사직을 뒤집ㅇ 엎고 말려는가?』

하시고 고개를 숙인 세 대신을 보셨다. 세 대신은 대답할 바를 몰라 오직 수그린 고개를 더 수그릴 뿐이었다.

황제께서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시며 더욱 높은 목소리 로,

『내가 무어라고 했어? 재필의 말대로 해야 된다고 아니했 나. 일본과 청국같은 나라들도 대개 새 법을 쓴다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옛날대로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경들은 제 몸 과 제 권세만 생각하고 나라를 뒤집고야 말련단 말인가?』

하시고 황젠느 소리를 낮추며 매우 근심하시는 듯이,

『지금 대안문 앞에 백성들이 모여 들어서 문까지 닫혔다 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하시고 황제께서는 괴로워 못 견디어 하시는 모양으로 옥 좌에 앉으셨나 일어났다 하신다. 대신들은 서로 다른 사람 이 말을 내기를 기다리는 듯이 곁눈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 을 뿐이다.

황제께서는 수그러진 허옇게 세인 머리를 노하신 듯이 보 시더니 바로 방바닥을 한번 구르시며,

『왜 말이 없어? 참정 대신?』

하고 외치신다.

참정 대신을 깜짝 놀라는 듯이 정신을 가다듬어 고개를 잠 간 들다가 황제의 시선과 마주쳐 다시 고개를 숙이며,

『네, 다 소신의 불찰이옵시다.』

하고 더욱 고개를 숙인다.

『어째?』

하시고 황제는,

『불찰이야, 불찰이니 어쩌잔 말이야?』

『폐하!』

하고, 참정 대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 소신의 불찰이오니, 폐하의 처분대로 하압시길르 기다릴 뿐이옵시다.』

『처분대로?흥!』

하시고 황제께서는 복받쳐 오르는 분하신 마음을 참으시노 라고 한숨을 한번 쉬시며,

『처분대로? 그 거짓말 잘하는 늙은 모가지를 배란 말리 야?』

하시고 황제께서는 차셨던 칼자루에 손을 대이신다. 세대 신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에 대안문 밖에서

『우아!』

하는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가 큰 폭풍 소리와 같이 대궐로 울려 들어 온다. 황제께서는 칼자루를 놓으시고 창밖을 바 라보셨다. 세 대신의 눈도 소리 오는 편으로 향하였다. 다시

『우아!』

하는 소리가 나며 그 소리가 더욱 커진다. 황제께서는 몸 이 떨리시며 힘없이 옥좌에 펄썩 앉으셨다. 고개를 숙이신 황제의 눈에서는 두어 방울 눈물이 떨어진다. 마치 오백년 사직이 오늘에 끝이 나는 듯하였다. 황제께서 다시 고개를 들으시며,

『참정 대신! 왜 백성을 흩이지 못하오? 오 우두커니 섰 소?』

하시더니 잠간 말을 끊으셨다가,

『아니, 나는 백성들의 원하는 바를 들으려오. 다시 경들은 짐의 말을 거슬리지 마오! 내 뜻은 굳게 정하였소! 다시 거 스리는 자가 있으면 목이 없을 줄 아오! 자, 참정 대신! 어 서 나가서 백성들의 뜻이 무엇인가 물어보오! 그리고 황제 는 그 뜻을 들어 준다고 전하오!』

하셨다.

참정 대신은 궁궁하고 물러나간다. 외부 대신과 학부대신 도 뒤를 따라 물러 나간다.

『옳아! 백성들의 뜻을 들어 주자. 백성들은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참정 대신보다 내게 충성이다.』

하시고 혼자 방안으로 왔다갔다 하시며 가끔 희보 오기를 기다리시고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신다. 또 백성들의

『우아!우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중관이 아침 수라가 준비되었음을 고하였으나, 황제께서는 손을 흐들어 잡수실 뜻이 없음을 보이셨다. 궁중에서는 모두 눈이 둥글하여 어디서 무슨 소 리 들리기만 기다린다.

참정 대신은 나오는 길로 사람을 대안문 밖에 내어 보내어 독립협회 총대를 불러 드리라 하고 피곤한 듯이 대신들은 기다리는 방 비단 교의에 주저앉는다. 의부 대신도 그 곁에 앉고 학부 대신은 수염을 쓸며 근심스러운 듯이 왔다 갔다 거닌다. 외부 대신은 눈부터 먼저 웃는 웃음으로 참정 대신 더러,

『대감, 아침이나 잡수셨서요?』

하고 묻는다.

『아침?』

하고 참정 대신은 이마에 땀을 씻으며,

『아침이 다 무어요, 재필이 놈을 없이 하기 전에 밥이 목 에 넘어가오?』

하고 한숨을 지운다.

『오늘은 한 놈도 대안문 앞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일 렀는데 웬일요? 군부 대신의 잘못이야! 왜 그놈들은 모조리 무찌르지를 못하고...... 그런데 폐하께서 재필의 놈의 말을 들으신다고 하시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진작 독립협 회를 두들겨 부술 건데 그만 양호 유환이 되었소구료.』

하고 외부 대신은 입맛을 다신다.

『그럴 생각이야 없었소마은 재필이 놈이 미국에 입적을 하였으니 어쩔 수가 있어야 아니하오? 지금 제물포에 미국 병선이 와 섰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것은 재필이 놈이 불러 온 짓이로구료.. 할 수 없지요. 폐하께서 하라시는 대 로 할 수 밖에 있소?』

『폐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셔요?』

하고 외부 대신은 놀라며,

『그러면 대감은 재필의 놈의 말대로 정부를 내놓고 오신 단 말씀이시오? 네? 모든 권세를 재필이 놈의 소에 그 역적 놈의 손에 내어 맡긴단 말씀이시오?』

한다. 참정 대신은 물끄러미 외부 대신을 치어다보며,

『그러면 별 수 있소? 페하께서 굳게 결심하셨다는데야─ 이번에도 거슬리면 목을 배신다니 늙은 것이 목이 달아나서 야 되겠소?』

하고 고개를 숙인다.

외부 대신은 조그마한 눈을 살살 구리더니 성난 듯이 벌떡 일어나며,

『그래 대감께서는 이제 와서 그 늙은 목을 아껴서 재필이 놈에게 항복을 하신단 말씀이야요? 옳지, 알았읍니다그려, 응, 나도 들었어요. 그러나 설마 그러랴 하고 믿지는 아니하 였지요, 내 다 알았습니다. 오늘 저렇게 난인들이 대안문 앞 에 모여서 야단을 하는 것도 다 대감이 시키신 게로구료?』

하고 자리를 차고 황제 있는 방으로 가려는 기색을 보인 다. 참정 대신은 황망히 따라 가 붙드나 외부 대신은 팔을 뿌리친다.

이 때에 독립협회 평의장이 상소를 가지고 들어 와서 외국 사신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시종과이 전한다. 세 대신은 서로 밀다가 마침내 늙은 학부 대신이 정부를 대표하여 유 평의장과 희견하게 되었다.

어떻게 되었든지 일 없기만 위주하는 학부 대신은 일어나 공손히 절하는 유 평의장의 어깨와 손을 잡으며,

『글세 자네 이게 웬일인가. 왜 백성들을 모아 가지고 이 렇게 소동을 일으킨단 말인가 자내나 내나 다 오랜 세의 집 이요, 또 자네와 참정 대신과는 연사간이 아닌가. 그런데 무 슨 원혐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을 못 견디게 군단 말인가?

응 이 사람아!』

하고 유 평의장을 끌어다가 자기 곁에 앉힌다.

유 평의장은 학부 대신의 하는 말이 엄청나게도 의외인 듯 이 한참을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더니,

『세의는 세의요, 연사간은 연사간이요, 나라 일은 나라 일 입지요. 무슨 원혐인가 하시니 제가 대감께서 다른 어른께 무슨 사사로운 원혐이 있단 말씀입니까. 대감같이 일국의 보필 지신이 되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나라이 대감댁 물건은 아닙지오? 세의나 연사간의 관계 로 나라 일을 움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 평의장의 말이 나올수록 학부 대신은 다소 부끄러운 듯 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차마 더 듣기 어려운 듯이 손을 흔들 어 유 평의장의 말을 막으며,

『아니야, 누가 그런 줄을 모르나?』

하고 화두를 돌리려 한다.

『아니옵시다. 잠깐만 제 말씀을 더 들으십시오.』

하고 유 평의장은,

『지금 나라일이 어떻게 위태한데 진실로 누란과 같단 말 씀이야요. 그런데 대감 같으신 어른은 정부에 앉아서 나라 일을 무슨 소견거리나 같이 여기시니 이러고야 어찌......』

하고, 유 평의장은 어성은 점점 격렬하여 간다. 학부 대신 은 어쩔 줄 모르는 듯이 고개를 l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더니,

『응, 그래 응, 다 알았어...... 그런데 폐하께서 백성들의 의사를 들으시마고, 그 의사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니, 그래 어떻게 하잔 의사인가?』

유 평의장은 품에서 커다란 봉투를 꺼내어 그 속을 뽑아 학부 대신에게 주며,

『이것이 다만 독립협회뿐이 아니라, 오늘 모인 모든 인민 들과 전국 이천만 동포가 원하는 바이지요. 이것은 오늘 국 민대회에서 의결한 것인데, 대황제 페하께 올리는 상소문이 옵시다. 그동안 몇 번 상소를 하였으나 다 참정 대신이 중 간에서 깔고 폐하께는 엉뚱한 참소를하여 왔습니다. 그러므 로 오늘 이것은 내 폐하께 올려서 가부간 무슨 칙령을 받기 전에는 아니 물러나갈 결심이올시다.

학부 대신은 일번 유 평의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번 상소 문을 읽는다.

『그러면 대관절.』

하고, 학부 대신은 상소문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우리 나라로 오랑캐 나랄ㄹ 만들자는 말일쎄그려. 일본 공사와 미국 공사도 만나면 밤낮 소리니 자네도 그놈들의 충동을 들었네 그려?』

하고 도리어 유 평의장을 책망하는 듯이 노려 본다.

『아니올시다.』

하고 유 평의장은,

『오랑캐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문명한 나라를 만 들자는 것이지요.』

한다.

『첫째 양반 계급을 타파하고 인민에게 정권을 준다 하니, 이것이 오랑캐의 바잉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성경현전에 어디 그런 말씀이 있단 말인가. 안될 말이지 안될 말이어,』

하고 용서할 수 없게 마땅치 못한 듯이 고개를 썰레썰레 흔들더니,

『자네, 그래 이 상소를 기어이 올리려나?』

한다.

『기어이 올리지요!』

『앗게! 나는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 앗게! 큰일나지.』

하고 학부 대신은 마치 어린 아이를 훈계하는 어조로 재삼 상소를 마랄고 권한다. 유 평의장은 그만 기가 막혔다. 본래 대신들이 어리석은 것들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대 도록 어리석은 줄은 몰랐다. 학부 대신은 여러 대신들 주에 도 가장 학행이 높은 사람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이러하다 하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유 평의장은 그 만 낙심이 되어 그 상소를 북북찢어 버리고 한바탕 통곡이 나 하고 나갈까 하였다. 그러나 대안문 앞에서는 수천명 인 민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누가 연설을 하는지 가끔

「우아!」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 평의장은 크게 믿던 것을 잃어 버린 듯이 앞이 막막하여 한참 주저하다가,

『이렇게 지체할 새가 없으니 곧 이 상소를 올리도록 해줍 시오!』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벌서 아까 보던 기운이 없었 다. 학부 대신은 여러 번 상소를 말라고 권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대신 폐하께 드리마, 결코 중간엣 깔고 안 드리는 일이 없게 하마하고 그 상소를 들고 나가서 참정 대신과 외 부 대신 있는 방으로 들어 가 그 상소문을 보였다.

참정 대신과 외부 대신은 지금껏 무엇을 다루던 모양인지 모두 얼굴이 붉어지고 성난 기운이 보인다. 참정 대신은 상 소를 받아 한번 내려 보더니, 외부 대신과 무슨 말으 하려 다가 그가 외면한 것을 보고는 학부 대신더러,

『대감 의향은 어떠하시오? 이 상소문을 올리면......글쎄요, 대감의 의향대로 하시지오.』

한다.

참정 대신은 아니꼬움을 참는 듯이 외부 대신의 등을 한참 이나 노려 보더니 그래도 아니 말할 수 없다는 태도로,

『여보, 의무 대신!』

하고 부른다.

외부 대신은 참정 대신의 부르는 말에 돌아 보지도 아니하 고 외면한 대로,

『대감 의향대로 하시지요.』

한다. 참경 대신은 한참이나 주저주저하며 무슨 생각을 하 더니 그 상소문을 들고 황제 계신 방으로 들어 간다.

황제께서는 수심 있는 낮으로 바깥을 바라보시고 앉으셨다 가 참정 대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그래 어떻게 되었소?』

하신다.

참정 대신은 그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께서  이윽히 그들 을 보시더니,

『그 말대로 하여 준다고 그러오!』

하시고 그 상소문을 테이블 위에 놓시더니,

『인민들의 원하는 대로한다고 그러오!』

하시고는 그 상소문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신다.

참정 대신은 하릴없이 몰려 나왔다. 그러나 그의 삼백년간 전해 오는 당쟁의 궤홀과 음모를 받아 가진 머릿속에는 창 졸간에도 수없는 궤홀과 음모가 죽 끓듯하였다.

『학부 대신! 나가서 폐하께서 인제 소원대로 들어 주시마 고 하신다고 전하시오.』

할 때에 학부 대신은 깜짝 놀라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뜬 다. 의부 대신도 흠칫하고 놀라는 모양을 보이더니 벌떡 일 어나서 밖으로 나가려는 기세를 보이며,

『대감 뜻대로 잘되었구료.』

하고 참정 대신을 한번 노려 본다. 학부 대신은

『글세, 일이 어떻게 되는 모양이요? 응 대관절?』

하고 한걸음 가까이 오며

『글세 이게 무슨 일이야요?』

한다. 참정 대신은 귀찮은 듯이,

『나는 내일 시작하고 시골집으로 가겠소. 외부 대신이 나 라 일 잘하겠지요!』

하고 문을 열고 나간다.

학부 대신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혼자 우두커니 섰더니,

『한놈 믿을 놈 있나. 서로 시기들만 하고......나라는 망했 어. 나도 시골집에 가서 손자놈 데리고 낚시질이나 다녀 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유 평의장 있는 방으로 와서,

『자네는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응.』

한다.

『상소 올려 주셨습니까?』

하는 유 평의장의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우두커니 말없 이 섰더니 겨우 고개를 들어,

『흥, 자네 소원은 이뤘네. 폐하께서는 인민의 뜻대로 다 들어 주시마고.』

한다. 유 평의장은 기쁨을 못 이기어하는 듯이

『정말 상소를 올려 주셨어요? 폐하께서 인민의 소원을 들 으신다고요?』

하고는 미처 학부 대신께 인사도 잘하지 아니하고 뛰어나 간다.

닫혔던 대안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백성들이 유 평의장이 단상에 올라 서서 기를 두르는 것을 보고 모두 바싹 소리도 없이 유 평의장의 일만 바라본다.

유 평의장은 개선 장군 모양으로 백성들을 한번 휘 둘려 보더니,

『여러분! 우리 대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 인민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할 때에 백성들 속에서는

『우아!』

『대 황제 폐하 만세!』

하는 소리가 일어나고 팔들이 들리고 몸들이 흔들리어 마 치 사람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는 듯하였다. 아마 이 삼 분 동안이나 이렇게 끓다가 평의장의 두르는 기에 겨우 다 시 정숙하게 되었다. 평의장은 다시 입을 열어

『예성 문무하옵신 우리 대 황제 폐하께옵소는 이렇게 우 리 인민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니 우리 인민은 무엇으로 이 산해 같은 은덕을 갚으리까? 우리는 오직 우리의 충성과 목 숨으로 우리 나라와 대황제 폐하를 받듬으로만 이 은덕의 만일을 갚을 것이외다.』

하고 유 평의장은 두 팔을 높이 들어 대한제국과 대 황제 폐하의 만세를 사망하였다. 인민들도 그와 같이 하여 「만 세!」소리가 장안 천지를 울렀다.

백성들은 모두 기븜에 정신을 잃고 흩어졌다.

이날 밤에 서울 장안에서는 밤이 깊도록 잠들도 아니 자고 이야기를 하였다.

대게는 이제부터는 양반들이 다 없어지고 아무나 재주있는 사람이 큰 벼슬을 하리라 하며, 벼슬 팔아 먹던 것이 없어 지리라 하며, 독립협회 사람들의 천하가 되리라하며, 그러고 는 양인이나 일본 사람들 모양으로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으리라 하며, 혹은 젊은 사람들은 모두 병정으로 뽑혀서 전장에 나가리라 하며, 또 혹은 아니다 오늘은 비록 양반들 이 꿈쩍 못하였으나 또 무슨 큰변이 일어나리라 하며, 혹 어떤 일 갈 아는 노인은 무슨 큰 비밀이나 말하는 듯이 다 른 사람의 귀에다 일을 대고,

『아니야, 정감록이 맞노라고 그러네, 이씨 오백년이다 되 었어!』

하고 한숨을 쉬는 이도 있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보다도 의혹과 불안과 공포가 가장 공통한 감정이었다.

『상감님께서 백성드릐 소원을 들어 주시마고 했다.』

하고 독립협회원들도 기뻐하고 대안문 밖에 모였던 사람들 도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기네의 소원 이 무엇인 것을 몰랐다.

〈정부 대관들을 내어 쫓는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백성들이 나라 일에 참여한다. 또 그 것은 무슨 말인가. 백성들이 나라 일에 참여한다. 또 그것은 무슨 말인가. 이런 것이 모두 백성들에게는 알수 없는 말이 었다.

〈어떻게나 살까? 세상이 마지막 날이 가까웠는데도 다 죽 을 날이 가까웠는데 어찌하면 피난이 될까?—〉 이것은 그때 백성들이 누구나 품은 근심이다. 그 이른바 세상의 끝날이란 무엇이며ㅡ 다 죽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그러나 〈끝날이 가까웠다. 다 죽는다.〉 는 생각은 가장 힘있게 백성들의 맘을 꽉 내려 누른다.

「구인종어 량백」이니, 「구곡종어 삼풍」이니 하는1무서 운 정감록의 구절은 밤낮으로 그네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그네가 이 무엇인지 모르는 큰 변을 벗어날 길은 오직 십 승지와 정도령이 있음을 알 뿐이다. 서 재필의 성이 정자가 아닌 이상 독립협회는 그네에게 무슨 구원의 효력이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고, 독립협회가 궁궁 을을로 아니요, 도하 지도 아닌 이상에 그것은 그네에게 아무 의지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진인은 출어해도중」이라, 우리 백성을 구원할 이는 지 금 남조선에서 날개 돋은 장수들을 모아 데리고 병법을 연 습하시는 중이다. 죽을 만큼 사람이 죽어 황평 양서에 백리 에 한 사람을 보게 되어야 진인이 신병을 거느리고 나와서 계롱산에 도읍을 하고 그때에야 태평 세계가온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하더라도 다 쓸데 없다─이러한 굳은 신앙을 가진 백성들에게는 독립협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해마다 큰 병이 돌아, 사람들이 삼대 쓰러지듯 하고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되 리라. 그리고 서울 장안에는 해마다 난리가 나서 종로 한복 판이 쑥밭이 되고 말리라. 이러한 뒤에야 오백년 이씨 운수 가 다 지나가고 왜앙 삼년 가정 삼년이 다 지나가고, 새 갑 자 새 을축에 큰일이 일어나고, 병인년 정묘년에 천하가 평 정하고 무진년 기사년에 성인이 나와서 경오년 신미년이 지 난 뒤에야 조선 천지에서 다시 태령락으 누리리라—이러한 잠서를 굳데 믿는 백성들에게는 정부의 개혁이니 신문명의 수입이니 하는 말이 귀에 들어 갈 리가 만무하였다.

대안문 앞 사건은 다만 일반 백성에게는 세상 끝날이 과연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새롭게 하였을 뿐이다.

한 백성의 정경이야 그 얼마난 가련한고!

〈내 손으로 내 나라 운수의 키를 돌리자.〉 는 생각을 가지고 혹시 애를 쓰는 몇 사람 안되는 선도자 들의 가슴은 얼마나 쓰렸던고!

정동 서 박사 집에는 독립협회원이 사오십명은 모였다. 서 양식 응접실과 조선식 사랑이 넘치도록 갓 쓰고 때묻은 두 루마기 입은 이들이 앉았고 그리고돋 남아서 마당과 대문간 에까지 뭉게 뭉게 모여 들었다. 오는 사람마다 서양식 응접 실에 들어 가서는 서 박사에게 손을 읍하고 허리를 굽혀 경 례하고,

『이것이 다 영감의 덕이올시다.』

하고 축하를 한다.

서 박사는 그때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별로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혹 박사가 친히 아는 이가 들어오면 일어나 서 양식으로 악수를 하는 이도 있고 그중에는 영어로 인사를 하는 이도 있다. 이 말에 서 박사는 마치 공화국의 대통령 과 같았다. 어스름한 달빛과 미국서 가져온 커다란 남포동 빛에 큰 갓에 큰 두루막 입은 선비들의 느릿느릿 걷는 그림 자가 왔다 갔다 하는 양은 마치 종묘나 사람들은 모두 이제 부터 나라 일이 잘되어 갈 것을 서로 축하하고 또 마치 전 장에서 싸움을 이기고 돌아 온 장수들 모양으로 장차 자기 에게도 무슨 큰 상이 올 것을 예기하여 혹은 「나는 어는 도 관찰사」혹은 「적어도 어느 골 군수」하고 혼자들 기뻐 하나 감히 입 밖에 내지는 차마들 못하였다. 그중에는 특히 서 박사에게 긴한 양을 보이려는 듯이, 별 말도 아닌 것을 서 박사의 귀에 대고 고하는 이도 있고, 또는 서 박사와 친 한 양을 보이느라고 일부러 웃어 가며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전에나 들어 온 모양으로 손을 읍하고 고개를 좀 숙이고 섰는 사람들이다.

항목도 왔다. 항목을 보고 박사는 일어나 손을 내어밀었고, 항목은 서슴치 않고 덥석 그 손을 잡아 흔들었다. 박사는 항목의 어깨를 두드리며 서양식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두 러 섰는 여러 사람에게 소개한다.

『이 사람이 유명한 이 총각이요.』

하고 평양서 두 번이나 평양 감사를 공격하는 연설을 한것 과, 한번은 감사에게 붙들려 가서 죽도록 매를 맞은 일과, 어저께는 회원들을 문밖으로 내어 쫓으려는 헌병과 순사를 물리고 또 사람들을 각 주인으로 보내어 다는 사람들도 나 가지 않도록 한 일을 말하고 다시 항목의 손을 잡아 흔들 며,

『우리 민족의 장래의 지도자요, 우리 조선 사람 중에 이 항목처럼 거짓 없고 용기 있는 사람 드무오. 우리 동포 지 금은 모두 허위와 겁날 뿐이요. 서양 사람 그렇지 않소. 다 참되고 용기 있소.』

한다.

항목은 일변 기쁘고도 일변 부끄러웠다. 그래서 고개를 숙 이고 방에서 물러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서 박사가 그렇게 도 칭찬하는 항목을 주목하였다.

항목은 서울 온 후에 세 번째 서 박사를 면회하였다. 첫 번에는 누구의 소개로 인사만 하고, 둘쨋번에는 두시간 동 안이나 이야기를 하고 저녁가지 얻어 먹고 왔다. 항목은 서 울 온 지 두 달 동안에 거의 서 박사의 연설에는 한번도 빠 진 적이 없었고 연설을 들을 때마다 서 박사를 숭배하게 되 었다. 더욱이 두 번째 저녁 얻어먹던 날에는 세상에 서 박 사 같은 사람이 또 있나 하도록 감동이 되었다. 그의 친절 한 태도, 그의 열성, 그의 정직함, 이것은 굳세게 항목의 숭 배하는 정을 끌었다.

그러나 넓은 조선 천지를 돌아보아도 쓸 만한 사람은 서 박사와 방 대형과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서 박사는 항목더러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 일은 사람이 하오. 그런데 우리나라에 사람 없소.

나도 독립협회 큰일 못할 줄 아나 행여 무엇이 될까하고 해 보는 것이요, 항목이는 어서 공부하시오.』

그래서 항목은 학교에 들어 가 영어 배우는지가 벌써 달 반이 되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배달한 《독립신문》에는

「대한 유신」이라는 큰 제목으로 이번 대 황제 폐하께서 독립협회의 청원을 들어 주신 것이 대한 나라를 새롭게 하 는 큰일이라고 일본에 명치 유신과 같은 일이라고 대 황제 폐하의 성덕은 진실로 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크다고, 이게 불원에 대정(大政) 유신의 조서가 활발하리라고,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더할 수 없는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 고 오늘 오시에는 독립관에서 성대한 축하 연설회를 열 것 이니, 독립협회원은 물론이어니와, 일반은 다수히 참가하라 고 독립협회 이름으로 커다랗게 광고가 났다.

독립협회원들은 이 신문을 소리 높이 읽으면서 처음 듣는 기별 모양으로 기뻐 뛰었다. 마치 나라 일이 다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아무 걱정이 없고 오직 태평 세계가 온 것 같았다.

항목은 여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미친 모양으로 기뻐 뛰 었다.

『꿈 같애 그려.』

『이렇게도 쉽게 된담.』

『참 간신놈 들이 있어 그렇지, 우리 대 황제 폐하는 성군 이신 모양이야.』

하고 기뻐하는 결론은 반드시 대 황제 폐하의 성덕으로 돌 아 갔다.

금년은 가물어서 오늘도 맑았다. 사시 초나 되어 독립협회 원들은 삼삼 오오 떼를 지어 독립관으로 모여들었다. 회원 아닌 사람들도 많이 나왔으나, 도저히 독립문낙성식에 비길 바가 아니다.

이날도 독립문에는 태극기와 만국기각 달리고 문 좌우에는 길다란 비단에「대한제국 만세」「대 황제 폐하 만세」라고 대자로 쓴 큰 깃발을 늘였다. 이날엔느 이 깃발이 퍽 구경 군의 말을 끈 모양이다.

독립관도 태극기와 만국기로 찬란하게 장식을 하고 회장 정면에는 역시 독립문에 단 것과 같은 만세기를 달았다.

오시초나 되어서 독립관은 갓 쓴 사람으로 꽉 차고 문과 창 밖에는 구경군들이 쭉 둘러 썼다.

오시 정각이 되어서는 미국 공사와 일본 공사도 오고 서 박사도 예복을 입고 와서 공사들과 이야기를 하였다. 외부 협판 한성 관윤 같은 관리들도 왔으나 대신급에서는 그림자 도 보이지 아니한다. 서 박사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이 연해 시계를 내어 보더니 무슨 못마땅한 일이 있는 듯이 서너 번 눈살을 찌푸린다. 개회 전에는ㄴ 대 황제이 조서가 내릴 것 이다. 민의대로 정부를 개혁하고 서정을 쇄신한다는 조서가 내릴 것이다. 서 박사는 오늘 아침에 직접 폐하께 이 말씀 을 들었다. 그런데 오시가 넘도록 아무 기별이 없다. 공사들 도 시계를 내어 본다. 또 독립문 낙성식 본이나 아니 되나 하고 hen 근심하였다.

몇 번 문으로 들어 왔다 나갔다 하다가 서 박사는 견딜 수 없는 듯이 고개를 기웃기웃하더니 빛도 띠며 몇 마디 이야 기를 하더니 서 박사의 뒤를 따라 나가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움직거리기 시작하였다. 지금가 지 가졌던 기쁨이 반나마 스러지고 새로운 의심과 무서움이 구름과 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더욱 의심나는 것은 유 평의 장이 아직도 출석지 아니함이다.

『유 평의장이 왜 아니 올까?』

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자 갓들이 자주 움직이 기 시작하였다.

문득 문밖에서,

『우아!』

하는 고함 소리가 나고,

『아이구!』

하는 우짖는 소리가 난다. 문과 사방으로 주먹 같은 돌맹 이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연하여 방망이를 들고 머리에 노란 수건 동인 사람들이 수없이 달려 들어 와 갓쓴 사람들 을 함부로 내려 조긴다.

『이놈아!』

『아이구!』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에서 흐르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쓰 러졌다. 아아, 세상에 이에서 더한 참혹한 광경이 있으랴.

이에서 더한 비인도적 광경이 있으랴.

불과 몇 분 동안에 독립관 속은 마치 야전 병원과 같이 되 고 말았다. 머리 터진 사람은 팔 부러진 사람 위에 쓰러지 고, 갈빗대 꺾인 사람은 기절한 사람 밑에 깔렸다.

아아, 세상에 이렇게 참담한 광경이 또 있으랴.

방망이 든 사람들은 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때려 누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겨우 회장에서 빠져 달아나는 사람들을 따라 갔다.

항목은 마침 창 가까이 섰다가 머리만 한 대 얻어 맞고 피 하여 나을 수가 있었다. 항목은 미처 달아날 생각도 아니하 고 웬일인지 몰라 우두커니 섰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어 머 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문안으로 달아 들 어 왔다. 들어 오는 길에도 서너 번이나 노랑 수건 동인 패 를 만났으나 요행 더 얻어 맞지는 아니하고 기는 듯이 여관 으로 들어 왔다. 들어 와 본즉, 벌써 대문에는 순검과 헌병 이 사오인이나 지켜 섰다각 항목이가 오는것을 보고 따라 나온다. 항목은 급히 방향을 돌려 좁은 골목으로 빠져 회관 으로 갔다. 회관에도 벌써 수십명 순검과 헌병이 들어 서고 누군지 모르나 두어 사람을 잔뜩 결박을 지어 놓았다. 항목 은 더 뛸 기운이 없다. 아아, 어찌할고. 머리에서 나오는 피 는 상처를 누른 손가락 틈으로 스며 팔로 흘러 내려서 땀에 젖은 적삼 소매를 빨갛게 물들였다. 어디를 kr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서 박사의 집으로 가자. 그는 사람들 틈 에 숨어 천신 만고로 서 박사의 집에 다다랐다. 박사의 사 랑에는 벌써 피난 들어 온 사람이 십여 명은 된다. 항목은 겨우 사랑 마루에 기어 올라 가서는 그만 정신을 잃고 거꾸 러져다.

아아, 속았다! 독립협회는 속았다! 백성들은 속았다! 누구에 게? 그것은 모른다. 그러나 속았다.

독립협회원드링 독립관에 모이기를 기다려서 이웃 동네에 미리 매복시켰던 보부상패를 시켜 독립협회원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려 한 것이다.

『막 죽여라! 외국 사람만 건드리지 말아라!』

이것이 보부상들이 받은 명령이다. 누구에게서? 그것은 보 부상들도 모른다. 오직 시킨 사람과 하늘만이 알뿐이다. 그 만큼 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삼백년 동안 닦아 온 음모와 궤홀이란 것이다.

그것이 마치 누구인지는 모르거니와, 지금 독립관 변을 돌 고 외따른 방에서 즐겁게 술을 노닐며 묘책의 성공을 축하 하는 늙은이 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네는 다대광 보국 숭복 대부이다.

이 일이 있은 이튿날 미국 공사는 한국 정부에 항의를 제 출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답변을 하였다. 얼마 아니하여 각국 공사가 다 독 립관 학살의 비인도적인 것을 항의하였다. 그래서 참정 대 신은 그 책임을 지고 갈리고 전 외부 대신 이원용이 새로 내각을 조직하고 전 독립협회 부회장 윤 치영은 내부 지방 국장으로, 전 독립협회 평의장 유 순겸이 탁지부 사세 국장 으로, 기타 독립협회에 유력하던 자가 사오인이나 혹은 인 천 감리도 되고 혹은 원산 감리도 되었다.

이리하여 독립협회는 없어졌다. 더러는 독립관에서 맞아 주고, 더러는 병신이 되고 더러는 감옥에 들어가고, 더러는 목숨을 주워 가지고 시골로 달아나고, 더러는 일보느로 달 아나고 더러는 미국으로 달아나고—이리하여 독립협회는 없 어지고 말았다.

서 박사는 독립관 변이 있은 이튿날 한국의 외부 고문이라 는 벼슬을 사양하고 제물포로 내려가서 마침 입항 하였던 미국 군함을 타고 영원히 사천년 사랑하여 오던 조국을 이 별하고 말았다. 그 배에 서 박사는 이 하옥과 다른 세 사람 과 동행하였다. 그 세 사람의 이름과 사업을 언제 한번 이 글에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군함이 제물포를 떠날 때에 서 박사와 머리를 붕대로 싸맨 조선 사람 네 사람은 배고물에 서서 점점 멀어 가는 조국 사넌을 바라보고 슬피 통곡하였다.

중편(中篇)[편집]

나는 지금까지에 이 선생의 어릴 때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어떠한 일이 있었나, 그때에 우리 선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거기서 우리 이 선생은 어떠한 감화 를 받았나, 이것을 대강 말하노라고 하였다. 내가 역사의 지 식이 부족하고 또 글 쓰는 솜씨가 어리므로 그것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을 독자 여러분께 대하여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처음에도 말한 바어니와, 나는 재미있는 소 설을 짓노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요, 상항(桑港)에서 불행히 진실로 불행히 돌아 가신 우리 민족의 선도자 이 항 목 선생을 조상하는 뜻으로 그의 갸륵한 인격의 한끝만이라 도 사랑하는 동포에게 전할 양으로 오직 내 정성껏 이 그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도 그러한 생각으로 이 맛 없는 글을 봐 주셔야 할 것이다.

나는 선생이 미국에 가시던 일과 미국 계신지 삼년 동안에 동포를 위하여 힘쓰신 일을 일일이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 것은 도저히 다 기록할 수가 없겠고, 그렇다고 그 어른의 하신 일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빼어 놓을 수가 없으므로 나는 그것은 다른 기회에 밀고, 진실로 그어른 일생의 본무 대라고 할 만한 , 즉 십년만에 미국서 돌아 오셔서 칠년 동 안 조국을 위하여 힘쓰던 시대의 이릉ㄹ 기록함으로 이 중 편을 채우려 한다.

진시롤 이 어른의 하신 일은 비록 그중에 가장 작은 일이 라도 우리로 보면 우리는 할 수 없는 가장 큰일이었다. 그 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어른의 한신 일을 진선 진미하 게 기록하지 못한는 것이 큰 유감이다. 그러나 현명하신 독 자 여러분은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만 보고라도 그 어른의 인격과 민족을 위하여 애쓰신 경력을 대강은 짐작하실 줄 믿는다.

진실로 선생이 미국서 돌아 오신 후 칠년 간의 생활은 극 히 복잡하고 극히 파란이 많고 극히 위험하고 극히 영광스 럽고 그러고도 극히 근심과 슬픔 많은 생활이었다. 더구나 그가 마침내 슬픈 눈물 슬픈 노래로 사랑하는 나라와 애인 을 영결할 때의 감회야 말해 무엇하랴.

인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선생이 (이제부터는 항목이라도 부르지 말고 그를 선생이 라 부르자. 이것도 내가 진정으로 그 어른을 선생으로 사랑 하고 존경하는 정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서 본국으로 바다의 대포 소리로 터진 일로 전쟁도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나고, 포오츠머스의 평화 회의도 끝이 나서, 소위 을사 보호 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후작 이등 박문의 한국 통감으로 오게 된 때다. 이러한 때에 선생은 멀리 태 평양을 건너 수심에 싸인 고국에 돌아 오신 것이다.

선생이 본국에 돌아 올 때쯤 하여 본국 형편은 어떠하였던 가? 도저히 그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으나, 대강이라도 말하는 것이 우리 이야기의 준비가 될 것이다.

갑진년에 일아(日俄)전쟁이 터지자, 한국은 처음엔느 엄정 중립을 성명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 결하였다. 그러자 십년 전 독립협회원으로 조직하고 연하여 동학당에서 진보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갑진년 읍력 팔월 이 십 구일에 팔도 동학당은 각각 읍내에 모여 머리를 깎았다.

얼마 아니하여 일진회는 진보회와 합하여 일진회가 되고 도 학당 수령 이 용구가 그 회장이 되었다.

그 일진회의 사대 강령이란 이런 것이었다— 一. 한국의 독립을 보전할 사 三. 정부를 개혁하고 서정을 유신할 사 四. 동맹국 군사상에 극력 보조할 사 이 사대 강령에 의하여 군용 철도인 경의선 부설 공사에 일진회원드른 전력을 다하여 인부를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오월엔가 일진회장 이 용구의 일백만 일 진회원이란 명의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그 선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였다— 지금 세계 열강이 생존을 경쟁하는 이 시대에 우리 한국은 아직 인민이 몽매하고 재정이 궁핍하며 병비가 약하니 부득 이 외교와 군사를 일본에 위임하여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그리하였다가 우리의 실력이 충실하거든 안전한 독립을 하 자— 하는 뜻이었다.

이 선언서가 발표되자 국내의 지사들은 물 끓듯하였다. 아 무리 하여서라도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아니 되도록 힘을 쓰려 하였다.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두 가지 운동이 생 겼으니, 하나는 의병 운동이요, 하나는 결사운동, 즉 단체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강원도 . 함경도. 충청도. 황해도 등지에 는 정부에서는 폭도라 하고 민간에서는 의병이라 하는 무장 한 무리가 많이 일어나서 싸우기도 여러번 하고 죽기도 많 이 하였다. 아마 합방하기까지에 의병으로 죽은 사람이 사 오만명은 될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는 서북학회니, 기호학회니, 대한협회니 하는 여러 단체들이 일어나고 그 단체의 기관지로 여러신문과 잡 지가 되며, 전국 각지에는 한굑가 뭉텅이로 일어나며 운동 회와 연설회가 없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의병이나 단체 운동자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네가 매국적이 무리라고 인정하는 현정부의 집권 계급을 박멸하는 것, 둘째는 한국내에서 일본의 세력을 배 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와 일본은 협력하여 이 공동한 적에게 대항하게 되어 한국의 군인은 일본 군인과 협력하여 의병을 토벌하게 되고, 한국의 경찰은 일본의 헌 병대와 협력하여 애국 운동을 진압하게 되었다. 이 애국 운 동은 당시의 정부와 일본 측에서는 배일운동이라고 일컬었 는데, 경찰권의 위임, 사법권의 위임은 이 배일 운동의 진압 을 이유로 한 것이다. 즉, 한국정부는 이 옳지 못한 운동을 진압할 능력이 없으니 그 모든 권리를 일본에 위임하라 함 이다.

이라하여 거의 날마다 한 가지 권리씩 일본에게 위임되어 보호 조약이 된지 불과 기월에 한국정부는 통감부의 하급 관청에 불과하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될 수록 이른바「배일열」은 점점 높아져서 연설을 하는 자는 반드시 땅을 구르고 가슴을 두드리며, 듣 는 자는 또한 눈물을 흘리며, 심하면 방성 대곡을 하게 되 고, 각 학교의 학도들은 누가 지은지 모르는 비분 강게한 노래를 부르게 되어 조선 천지는 마치 큰 상가집 모양으로 눈물과 탄식에 차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 중에 그때에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랐던 이는 내가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도저히 그때 정조를 맛보기 어 려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다가 생각하더라도 몸에 소름 이 쭉쭉 끼치도록 비분 강개한 기운에 싸인 그때 조선이 일 종 형언할 수 없는 슬픈 빛을 띠고 눈앞에 나타난다.

이백여 년 쇄국적 대평에 깊이 잠이 들었던 이천만 민중이 일청 전쟁의 대포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본즉, 벌써 자기네의 운명은 뜻하지도 못하였던 남의 손—심히 힘있고 무서운 남의 손에 들어 가게 된 것을 발견할때의 그네의 놀 람과 슬픔과 분함! 게다가 어찌할 줄도 모르고 또 어찌할 힘도 없어서 울고 하늘을 부르고 발버둥을 치고 목표도 방 향도 없이 날뛰는 그네의 애탐과 애처러움! 그중에도 몇 개 안되는 선도자 자기네도 분명히 민족을 끌고 나갈 방향을 모르거니와 온 집에 불이 붙는 줄도 모르고, 깊이 잠든 동 포들을 불러 일어나라고 외치던 선도자들의 아픔과 애탐!

아아, 이것을 다 얻허게 이루 형언하랴. 오직 눈을 감고 가 만히 생각해 봄으로만 그 만분지 이링라도 상상할 수가 있 을 것이다.

『영웅이 없냐, 아아, 우리를 건져 줄 영웅이 없나.』

이것이 깬 사람의 부르짖음이다. 그네의 생각에 영웅만 있 으면, 많이 말고 한두 사람만 있으면 나라 일이 다 잘 될 것 같았다. 「영.미.법.덕」이나 일본이 잘된 것은 다 한두 영웅 때문에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바라는 영 웅은 벌써 남조선의 정도령은 아니요, 비스마르크·카부르·와 신턴·나폴레옹 같은 영웅이다. 그 중에도 비스마르크 ·카부 르는 그때 지사들이 가장 사모하던 인물이다. 그만큼 벌써 서양 문명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이 선생이 돌아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때다. 이렇게 온 나 라가 무서움과 울분함과 슬픔에 차고, 어떻게 이 운명을 벗 어날 양으로, 영웅을 기다리던 때다.

이 선생이 일본을 거쳐서 본국에 돌아온다는 소문이 나자, 각 신문과 잡지에서는 열성으로 그를 소개하고 환영하였다.

대개 선생이 미국에 계신 동안에 그 곳에 있는 동포들을 잘 지도하고 조직하여, 밤낮 서로 싸우고 속이기로 일을 삼던 무식하고 타락한 동포들로 존경할 만한 애국자를 만들고, 또 그네들도 조직한 고립협회라는 단체는 거의 한 독립 국 가의 체계를 갖추어 당시에 있어서는 조선 민족 중에 가장 완전한 단체였었다. 비록 회원은 천명에도 달하지 못하나, 그 조직이 완전하고 그 사업이 활발함이 그때에 있어서는 유일한 모범적 단체였었다. 더욱이 그 단체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국내에서 깊은 존경을 받았었다.

이러한 사업의 경영을 가진 선생이 본국에서 그만한 환영 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그때 본국에 일어난 여러 유력한 단체의 중심 인물은 대개 선생이 본국을 떠나 기 전 동지다. 예를 들면, 그때에 가장 유력한 단체이던 서 북학회의 중심 인물은 그때 대동강에서 병학과 정치를 같이 하겠다던 키 작고 눈 작은 임 휘요, 그때에 가장 유력한 신 문이던 《대한 매일 신보》의 주필은 역시 대동강에서 붓으 로 천하를 움직이마고 장담하던 박 춘식이다. 임 휘는 독립 협회가 부서지는 판에 일본으로 달아나 동경 육군 사관 학 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일로 전쟁에 출정하였다가 전 쟁이 끝나매, 육군 중위가 되어 당시 일본의 한국 주찰군 사령관인 강 곡천 대장의 부하로 있다가 곧 일본의 군직을 버리고 한국 육군의 참령이 되어 동경 사관 학교의 동창이 요, 또 동지인 참령 염 백윤과 대동강 동지인 참령 유 진석 으로 더불어 일변 육군의 편제를 새로이 하고, 일변 사관 학교를 세워 군대의 교육을 일신하며 몸소는 육군 대신의 부관이 되어, 비록 벼슬은 일개 참령에 불과하거니와 사실 상 한국 육군의 중심 인물이 되어 염·유 양씨와 함께 육군의 삼 참령이라 하면, 아동 주졸도 그 세력을 무서워할 만한 터이요, 또 자기의 가산을 털어 크게 서북 회관을 짓고 많 은 지사의 생활비와 여비를 아낌없이 지출함으로 당시 정치 계에도 민당의 영수라는 존경을 받게 되었다.

미국서 이루어 놓은 사업의 경력과 본국서 이렇게 세력 높 은 둥지를 가진 선생은 돌아 온 지 불과 한두 달에 전국에 명성이 높게 되었다. 십년 전 독립문 낙성식에 허름한 보따 리를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던 이 총각과 오늘에 이 선생을 같은 사람이라면 누가 믿으랴.

이 선생은 본국에 돌아 와서 서너 달 동안은 여러 정치가 들과 회견하여, 그네의 의견과 사업의 방침을 들으며 여러 단체들의 조직과 경영 방침을 연구하며 각지로 순회하여 십 년 간에 변천한 민정도 시찰하며, 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동 포들에게 새로운 도덕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과 동포끼 리 나라 일을 위하여 굳게 뭉쳐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이러하는 동안에 이 선생은 벌써 대 정치가요, 대 웅변가 요, 대 책략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직 비판력이 유치하고 영웅을 기다리는 정이 너무도 간절한 동포들은 선생의 연설 몇 번을 들어 보고 어느덧, 선생을 대 정치가요, 영웅을 만 든 것이다. 이렇게 유치한 민중은 또 누구의 몇 마디 참소 에 반드시 선생을 가장 어리석은 자, 가장 괴이한 놈을 만 들 것이다 과연 그때부터 지금까지에 얼마나 많은 갑작 영 웅과 갑작 지사가 났으며, 얼마나 많은 갑작 매국적 갑작 악인이 생겼던고.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추겨 올리는 민중들도 선생이 받으 셔야 마땅한 칭찬을 다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 나 우리 동포 중에 선생의 의견이 참으로 위대함과, 선생의 민족을 위한 경륜이 참으로 철저한 것을 알아드린 이는 몇 사람은 되지 아니하였다. 있는 대로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 나 우리 동포는 아직도 그 어른의 인격과 경륜을 알아 드릴 만한 도덕과 지식의 정도에 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겨 우 그네의 힘껏 판단한다는 것이 이 아무는 위대한 정치가 요, 웅변가라 하는 것이다.

선생은 과연 정치가다 천하 민생의 살아 나갈 길을 경륜하 니 어찌 정치가가 아니랴. 진실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라.

그러나 선생은 정치가 이상이다. 그는 결코 민중의 일시적 요구나 흥분을 이용하여 민중의 환심을 사기를 일삼는 그러 한 정치가는 아니다. 그는 민족의 백년 천년의 대계를 생각 하여 이롭거나 즐겁거나, 민중이 비록 일시 찬성하거나 반 대하거나, 심하면 민중의 미워하는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 이 이다 하더라도 그 큰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 는 그러한 종류의 정치가다.

그러나 동포들은 이것을 알아주지 못하고 실컷 그를 칭찬 하다는 것이 수단 많으니, 정치가라 함이다. 수단이란 조선 말 뜻으로는 궐모와 술수를 부린다는 뜻이다.

웅변가라는 것도 그와 같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옳다고 소리를 지르지 아니할 수 없고,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고, 주먹을 불끈 쥐지 아니할 수 없다. 대개 그는 천 번 만 번 생각하여「이것이 진리다!」하고 확신하는 것만 말하고 자기 혼자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던 것만 말하고 주먹을 부르쥐던 것만 말하는 까닭이다. 그가 진리를 말하 므로 그의 말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말을 위하여 말을 하는 이가 아니다. 「이말은 내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아니할 수 없다」확실히는 말이 아니고는 말하는 이가 아니다.

그러하건마는 그의 말을 듣는 동포들은 이러한 뜻을 아랑 보지 못하고 다만 「말도 잘도 한다」하고 감탄할 뿐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그의 맘이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으랴.

애국심의 화신인 그의 가슴이 얼마나 조리고 아팠으랴!

그렇지마는—그렇게 세상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지마는 이 선생의 명성은 공연히 높았다. 그래서 여러회에서는 각 각 그를 끌어가려 하였고 각각 자기네 회의 지도자로 삼으 려 하였다. 더욱이 그의 대동강 동지 되는 임 참령이 중심 이 된 서북학회에서는 직원과 회원대표가 거의 날마다 그를 따라 다니며 졸랐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생은,

『나는 그 일에 합당한 재목도 아니어니와, 그 일을 할 뜻 도 없소.』

하고, 정직하고도 겸손한 대답으로 매양 거절할 뿐 이였다.

선생은 당시 국내에서 하는 운동이 다 시국을 건지지 못할 줄을 간파하였다. 다만 시국을 건지지 못할뿐더러, 이대로 가면 시국은 점점 험악하여질 것이요, 그뿐 아니라 , 조선 민족은 민족적 멸망의 위기에 빠질 것을 깨달았다.

선생이 양덕의 산골에 숨어 있던 최 윤식에게 전인을 보내 어 한 편지를 보면, 그때의 조선의 형편과 그 형편에 처한 선생의 선견을 알 수 있을 것이다.(독자는 기억하시는가—최 윤식이란 십년 전 대동강에서 일곱 사람이 작별할 때에 각 각 자기의 뜻을 말할 때에 맨 나중으로)

『내야 무엇이나 아는 것이 있소? 그저 여러분이 잘 공부 하여 가지고 돌아 와서 무슨 일을 시키기나 하면, 나도 그 일을 위하여서는 목숨을 바치오.』

하던 가장 나 많은 사람이다. 그는 독립협회가 없어진 뒤 에 가족을 끌고 덕천의 깊은 산골에 숨어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 왔다. 임 참령이 서북학회를 조직할 때에 사람을 보내 어 그를 청하였으나 나오지 아니한 사람이다.

선생이 최 윤식에게 한 편지는 이러하다—

『경애하는 최 선생이시여!』

항목은 고국에 돌아 왔나이다. 대동강 달밤의 작별이 어어 간 십년이 지나고 그동안에 조국은 창상지변을 당하였나이다.

환국하여 우금 삼개월에 건국 각지로 돌아 다니며 여러 지 사들의 의견도 듣고 하시는 일들도 보고, 또 일반동포의 사 상도 대강 살펴 보았으나 오직 한숨과 눈물이 나올 뿐이로 소이다. 여러 지사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국사에 진력하심은 감사하오나, 이러한 시국에 처하여 그리한 방법으로 일을 하더라도 이 시국을 건질 가망이 없사오며 시국은 점점 험 악하여 갈 듯 하여이다.

크나큰 국사를 하여 가는데 근본적 요건이 되는 것이 인재 와 재산과 단결인 것은 선생께서 통촉하실 줄 믿나이다. 그 런데, 이제 국내를 돌아본즉, 인제의 부족함이 십년 전이나 다름이 없사옵고 국고와 민간에 재정의 결핍함이 극도에 달 하였사오며, 또 내년에 일어날 수 없는 단체가 있사오나 그 조직의 방법과 단원을 정신이 둘 다 부족하여 큰일을 할 만 한 실력을 볼 수 없사오니, 이 어찌 한심할 일이 아니오리 이까. 이렇게 미약한 힘을 가지고 비록 아무러한 활동을 한 다 하더라도 그것이 능히 무너지는 큰집을 버티지 못할뿐더 러, 도리어 더욱더욱 시국을 험악하게 하여 국가의 운명을 하루라도 더 단축할 뿐인가 하나이다.

가령 일국의 정치를 맡을 실력의 준비도 없이 한갖 정부 당국자를 공격하기로만 일삼음은 도리어 당국자를 더 악하 게 만들뿐이며 힘으로 능히 대항할 만한 준비도 없이 한갓 입과 붓으로만 일본을 배척하옵은 도리어 일본에게 우리의 활동의 자유를 속박하는 핑계를 줄 뿐인가 하나이다.

경애하는 최 선생이시여! 선생께서 이 일을 잘 통촉하실 줄 믿나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일변 학교를 세우 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다수의 인재를 배양하고 일 변 공업을 크게 일으켜 국민의 부력을 충실케하고 일변 전 국에 흩어져 있는 지사를 찾아 굳고 큰 단체를 만들어 큰 교육과 큰 산업과 큰 정치의 운동을 할 힘을 기르는 것일 것이로소이다...

선생이시여! 이 일이 되면 조국은 살고, 이 일이 안되면 조 국은 죽을 것을 선생께서는 잘 통촉할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항목은 전부터 아는 여러 동지에게 이 뜻을 말하 였사오나 모두 그 뜻은 찬성하되, 「시국이 급한데 언제 그 런 일을 하랴」하고 들으려 하지 아니하오며, 도리어 항목 더러 자기네와 같은 일을 하자 하나이다.

항목은 혹 그네의 판단이 옳고 나의 판단이 그리잔 아니한 가 하여 여러 번 여러 번 돌려 생각하였사오나, 아무리 하 여도 그네의 판단을 따를 수가 없나이다.

선생이시여! 항목은 지금 심히 외롭고 괴로운 중에 있사오 며, 오직 선생께서나 항목의 뜻을 알아 주시와 이편지 보시 는 대로 곧 상경하실 줄 믿삽고, 그것을 위로로 삼아 오늘 부터 날마다 서쪽 하늘만 바라겠나이다.』

이 편지로 보아도 선생이 어떻게 최 윤식을 믿고 공경하였 는지를 알 것이다. 선생이 십년 전 평양에 있을 때에 방 대 형의 집엣 여러 번 최 윤식을 만났다. 최 윤식은 선생보다 십 이녀이나 위이기 때문에 선생은 그를 선생이라고 불렀 다. 그때 선생의 생각에 최 윤식은 심히 인격이 높은 사람 같이 보였다. 말이 적고 자기의 포부를 발표하는 일이 적으 나 그 속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인격을의 힘이 그를 대하 는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내려 누르는 듯하였다. 젊은 사람 들이 모여 앉아서 떠들다가도 그가 오면 모두 옷깃을 바르 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무서운 사람은 아니다. 위엄이 있으되 부드러운 위엄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정다움을 느끼 면서도 고개를 숙이게 하는 그러한 위엄이다.

선생에게 그러한 위엄이 퍽 부러워서 그때부터 그와 같은 위엄을 가지는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와 언변 은 대형을 본받고, 진실하고 침묵하고 부드럽게 위엄 있음 은 최 윤식을 본받으리라 하였다. 진실로 그가 미국에 있는 십년 동안에 한 공부의 대부분은 이렇게 고금의 빼난 사람 의 덕행을 배움이었었다.

삼년 전에 방 대형의 부고를 받을 때의 선생의 놀람과 슬 픔이야 얼마나 하였으랴. 선생은 사흘 동안 문을 꼭 닫고 대형을 위하여 울었다. 다른 동지들이 억지로 선생을 방에 서 끌어 낼 때에는 마치 정신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그 후에 어떤 동지를 보고,

『나는 일생에 처음 참으로 슬픈 일을 보았소.』아무리 슬 피 울어도 넉넉지 못한 슬픈 일을 보았소.』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번 본국에 돌아 와서도 오는 길로 곧 대형의 무덤을 찾 아가서 산 사람을 대하는 모양으로 이야기하고 울었다.

『아아, 왜 죽었소? 나라가 꼭 형님 같은 이를 요구할 때 에 왜 벌써 죽었소?』

하고 탄식하였다.

대형이 죽은 후에 선생의 가슴속에 남은 잉는 오직 최 윤 식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지금도 무슨 일으 할 능력을 가진 사람 일까. 혹 지나간 십년 동안에 대형보다도 낫고 윤식보다도 나은 인물이 많이 나지나 아니하였을까 하여, 우선 몇 달 동안 이름 있다는 인물을 많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대형이나 윤식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거짓이 없고 나라와 동지에 대하여 충성이 있고 그만큼 일을아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아아, 인물이 과연 귀하다! 하늘은 일시에 한두 사람밖에 그 귀한 보물을 땅에 내려 보내시지 아니하는구나! 그러하 거늘 이제 그 보물 하나를 도로 찾아 가셨구나!』

하고 한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옳다. 최 윤식이다! 같이 일을 의논할 만한 이는 오직 최 윤식이다!

이리하여 선생은 마침내 최 윤식에게 전인을 보낸 것이다.

사람을 보낸 지 열흘째 되던 날, 선생은 손수 방을 치이고 마당을 쓸고 새로운 그림을 사다가 방을 발랐다. 선생이 머 물러 있는 김 의사의 누이 되는 선경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보고 문을 열어 잡은 대로,

『선생님, 오늘은 웬일이셔요?』

하고 물었다.

선생은 벽에 그림을 달다가 선경을 돌아보며,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실 날이요. 그래서 환영하는 준비 를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웃었다.

『귀한 손님이 누구신데, 그렇게 환영을 굉장히 하셔요?』

하고, 선경은 문을 닫고 들어 와 걸려는 그림으 한편 귀를 받들며 묻는다.

『내게는 가장 귀한 손님이요, 내 선생님 이야요.』

하며 선생은 못을 박는다.

『좀더 올려 박으셔요......아니 이 못을요......이 귀가 처지 는데—.』

하며, 선경은 아무리 하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듯이 그 둥 그레한 큰 눈알을 연해 굴리고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그 선생님이 어디서 오셔요?』

선생은 못을 박고 방바닥에 내려서 걸린 그림을 쳐다보더 니 만족한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아랫목에 가 앉아서 선경을 쳐다보며,

『그 선생님이 아주 먼 데서 오시오. 저 맹산이라는 산골 에서 나를 보려고 이 추운 겨울에 오시오...... 이제 최 선생 이 오시면 선경이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많이 배우게 되 겠소.』

최 선생이란 어떠한 어른인데 이 선생 같은 어른이 저렇게 존경을 하시나 하고, 이 선생을 성인같이 숭배하는 선경은 물끄러미 선생의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 오늘 오신다고 기별이 왔습니 까?』

하고 묻는다.

『기별이 온 것은 아니나, 내가 오시라고 편지를 하였으니 까 그 편지를 보시고 그 이튿날은 준비하시고, 그 이튿날 떠나시면 오늘 저녁에는 들어 오시겠지요.』

선경은 더 물어 보고 싶건마는, 너무 많이 묻기가 어려워 서 그만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아마 저러한 선생님들은 한 분이 오시라고 청하면, 몇 천리 밖에서라도 꼭 오시는 어른 들 인가보다, 이상도 하다. 정말 오늘 오시나 보자 하고 일 종의 호기심을 가질 뿐이었다.

과연 그날 밤에 이 선생은 저녁도 아니 먹고 정거장으로 나가더니, 굵다란 무명옷을 입고 갓 감투 남바위에 보따리 하나를 든, 한 사십된 중키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 왔다.

선경은 이 선생이 정거장에 나간 뒤에 이 선생 방에 들어 가 두 번 세 번 먼지도 없는 방을 쓸고 훔치고 나무를 한 아름 안아다가 제 손으로 불을 많이 때어 놓았다. 그러고는 자기 오라버니 방에 놓였던 수선화 한 분을 집어다가 이 선 생의 책상 위에 놓았다. 그래서 과히 좁지 아니한 이 간 방 이 아주 얌전하게 되었다.

최 선생이 온 지 사흘 동안 선생은 일체로 외객을 사절하 고 단둘이서만 무슨 끝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경이도 아 침에 방을 치워 드리느라고 한번 들어가고 저녁에 학교에 갔다 와서 한번 들어 갈 뿐이요, 선경의 오라버니 되는 김 윤해도 회사에 나갈 때와 돌아 올 때에 한번 선생을 볼 뿐 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에 선생은 식전에 어디로 나가더니 사람 일 곱을 데리고 들어 왔다. 그 일곱 사람은 다 세상에 이름 나 지 아니한 사람이었다. 그중에 키 크고 눈 크고 아주 순하 게 생긴 이가 정동 예배당에 목사로 있는 전 덕균씨 그 다 음에 수염 많고 여덟팔 자 눈에 양미간에 주름 잡힌 이가 북청 진위대 참령으로 있던 도 응회씨, 이두 사람은 다소 세상에서 아는 읻 있지마는 다른 다섯 사람은 아주 세상에 드러나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선생은 최 선생께 이 일곱 사 람을 소개하는 말이,

『이 일곱 분은 내가 미국서 돌아 와서 전력을 다하여 얻 은 동지외다. 최 선생과 아울러 여덟 분 동지를 나는 하늘 이 우리나라에 주신 큰 일군으로 믿습니다. 우리 아홉 사람 이 뜻을 같이 하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함이었다.

아홉 사람은 설렁탕으로 점심을 먹고 그날 종일 무슨 이야 기를 하였다. 선경이가 학교에서 돌아 오 f때에는 이아홉 사 람의 얼굴을 흥분하여 술 취한 듯하였다.

그 이튿날 선생은 방 치우러 들어 온 선경더러,

『선경이, 나는 최 선생님 모시고 한 이틀 어디 갔다 올 테니, 오라버니 일어나시거든 그렇게 말씀 여쭙고 누가 찾 아 오거든 어디 나갔다고만 그러오.』

하고는 아침상을 물리기도 전에 최 선생과 함께 어디로 나 가 버렸다. 선경은 최 선생이 온 후로 선생의 말슴 들을 기 회도 없어져서 지나간 사오일 동안에 무엇을 잃어버린 듯한 섭섭한 생각으로 지내 왔다. 그러다가 선생이 한 이틀 동안 어디 다녀온다는 말에 선경은 가슴이 뜨금하였다. 저도 웬 일인지 모르거니와, 선생을 떠나는 것이 무슨 큰 무서운 일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선생이 최선생과 함께 대문으로 나 가는 것을 바라보고 선경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였다.

선경은,

『내가 왜 이러나.』

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정신 없이 책상 앞에 한참앉았 다가 시계 치는 소리에 놀래어 허둥지둥 책을 싸 가지고 중 문을 뛰어 나왔다. 대문간까지 나갔다가 돌아들어 와서 사 랑으로 나아가 사랑 대문을 닫아걸고 이 선생 방에 들어가 서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공연히 왔다 갔다 하였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선경은 혼자 물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가장 큰 어른이시다. 가장 높은 어 른이시다. 선생님의 몸은 다른 여러 만 사람의 몸 중에도 가장 소중한 몸이시다...... 그런데 나는? 나는 한 어린 계집 애다! 아아,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선생이 아침마다 반드시 보는 마태 복음을 들어 피는 대로 펴 보았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 요......』

여기까지 보고는 다시 마태 복음을 책상 위에 놓았다. 이 것이 십여 년 전 선생이 평양서 옥에 들어 갔을적에 양대인 이라 하던 목사에게서 받은 거시라 함과 그때부터 이 책을 하루도 아 본 날이 없다 함과, 이 책을 봄으로 사람되는 길 을 배우고 동포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기쁨과 용기를 얻 었다는 말을 선경은 선생께 들었다. 그러고는.

「나도 성경을 잘 보리라」하고 날마다 성경을 보아 왔다.

선생이 오신 후로 선경의 몸가짐과 말하는 양이 일변한 것 은 가족과 동창생이 다 인정하는 바라. 본래 선경은 조촐한 여자는 아니어서 흔히 늦게도 일어나고 방도 함부로 늘어놓 고 하인들도 몹시 책망하고 잘 울고 잘 웃고 잘 성내는 여 자였다. 그러나 지나간 사오개월 간에 선경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방과 책상을 깨끗이 치고 어머님과 함께 마루 걸 레로 치고 부엌까지 치게 되고 차차 뒷간까지 걸레를 치게 되고 머리도 잘 빗고 옷도 똑바로 입고 성도 잘 안 내는 사 람이 되었다. 그래서, 〈아아, 내가 이 선생님을 배우는구나.〉 하고 혼자 기뻐하였다.

선경은 새해 잡아 열 일곱 살이다. 그가 처음 선생을 대한 것은 열 여섯 살 되는 첫가을이건마는. 웬일인지 오래 만나 자고 그리던 이를 만난 것과 같은 반가움과 가슴 뛰는 것을 맛보았다. 그런 이후로 선생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날이 깊어 갔다. 그러나 선경은, 〈우리 선생님인데, 우리 아버지와 같으신 선생님인데.〉 하고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혼자 별명을 하여 왔다. 그러 나 근래에 와서는 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져서 자다가도 눈을 뜨고는 선생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선 경의 가슴에는 분명 무엇이 들어 왔다.

선경의 집에는 학교 동무가 많이 눌러 온다. 그 중에도 선 경이와 한 반에 있는 저와 동갑되는 박 선애라는 여자와, 또 선경이보다 한 반 위에 있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은 이 선형이라는 여자는 거의 날마다 오다시피 눌러 왔고 눌러 오면 반드시 이 선생을 찾아갔고, 마침 이 선생께 손님이나 없으면 선생의 말씀도 듣고 창가도 하였다. 그 중에 선경이 가 제일 목소리가 고왔다. 세 여자는 다 선생을 숭배하였다.

그네의 아버지나 오라버니는 대개 나서 돌아다니는 애국자 들이었고, 또 그때의 풍조가 그러하였으므로 중학교에 다니 는 계집애들이면서도 이야기에 중심되는 과제는 매양 정치 에 관한 것이었다. 어서 교육이 보급이 되어야 한다는 둥, 지금 정부 대관이 모두 죽일놈 들이니 이놈들을 몰아 내야 한다는 둥, 우리 여자들도 국민의 일분자이니 나라 일을 해 야 한다는 둥,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였고 날마다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하는 애국 부인전 같은 것을 보 고 다시 보고, 자기네도 그와 같은 여자가 되리라고 여러 번 맹세들을 하였다. 선생도 그네들을 대할 때에는,

『지금은 특별한 때요! 조선 여자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서 같은 여자를 많이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할 때요, 고운 옷이나 입고 부자집 며느리나 되어서 제 몸이나 편안히 살 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라 일을 위하여서 여러분의 귀한 몸 을 바쳐야 할 때요!』

이러한 말로 격려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같은 여자를 많이 가르치라고는 하면서도 정치적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아니하 였다. 이것을 복 세 여자는, 〈우리를 어리게 보고 그러신다.〉 하고 맘에 좀 불만이 생각하였다.

선생이 어디 다녀온다고 나간 날은 마침 반공일이므로 선 경은 선형과 선애를 데리고 오정이 조금 지내어서 집으로 왔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셋이 사랑으로 나와서 선생의 방 을 통으로 맡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선경은 떡 선 생의 자리에 선생이 앉던 모양으로 앉고, 평생 얌전한 성형 은 여자들끼리 있는 데서 항상 수삽한 기운을 띄고 아랫목 발치에 벽을 기대어 앉고 사내 같은 선애는 턱 원장을 차고 앉아서 사내들 모양으로 몸을 흔들거린다.

선경은 대굴대굴 굴 듯이 깔깔 웃으며,

『얘, 글쎄 이것 좀 보아요!』

해가며 최선생이 오실 때에 차렸던 모양을 말한다.

『글세, 하릴없는 헌 망건 장수야요.』

하는 선경의 말에 선형과 선애도 몸짓을 해가며 웃는다.

『그래.』

하고 선애가,

『지금도 최 선생이라는 이가 그 꼴을 차리고 계셔?』

하고 묻는다.

『왜?』

하고 선경은,

『선생님이 어떻게 최 선생을 위하시는데 말 말아요, 글쎄 들어오는 길로 선생님 새 옷 한 벌을 내어 입히고 버선. 토 시. 대님까지 속속들이 새것으로 갈아 드렸다누, 모자는 그 이튿날 아침에 선생님이 손수 사다 드리구요, 글쎄 말을 말 아요, 여간이야지.』

『그래, 그렇게 갈아 입혀도 헌 망건 장수 같읍디까? 언 니!』

하고 지금껏 가만히 앉았던 선형이가 묻는다.

『왜 그래?』

하고 선경은,

『최 선생도 잘 생겼어요. 기름한 얼굴에 수염이 너슬너슬 하고 아주 위엄 있게 생기셨다우. 그리구 그 말씀하는 말소 리가 어떻게 점잖은지..... 아주 점잖은 어른이야......지금 마 흔 둘이라나.』

『마흔 둘?』

하고 선애는,

『선생님보다 늙으셨네......그래 어때? 선생님만큼 풍체가 좋아?』

하고 선경을 본다.

『선생님만이야 못하지.』

하고, 선경은 아니할 말을 할 듯이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힌다. 선애는 사내 모양으로 껄걸 웃으며,

『암, 그렇겠지. 내가 선경이에게 묻는 것이 잘못이지.』하 며 동의를 구하는 듯이 선형을 본다. 선형도 생긋이 웃고 선경을 곁눈으로 보며,

『그럼, 선경 언니는 선생님이라면 죽는데.』

한다. 선경은 더욱 낯이 붉어지더니 픽 돌아 앉으면서,

『망할 것들!』

하고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든다. 그 성경은 이 선 생의 마태 복음이다. 선경은 마태 복음을 뒤적뒤적하면서 부끄러운 중에도 자기가 그처럼 선생님께 가까운 줄을 날들 이 알아 주는 것이 기뻤다.

선경은 아직 이 선생의 부인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자기보다 천충 만충이나 높으신 선생님을 자기가 남 편이라고 불러 보리라고는 꿈에도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지 마는, 그래도 선생님은 자기 한 사람의 것이 되글 맘에 간절히 바랬다. 그가 아버지가 되든지 오라버니가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영원히 자기 한 사람의 것이기를 바라고 빌었다.

천생 얼굴이 못생기고 게다가 얽기까지 한 선애는 일찍 남 의 사랑을 받아 보리라고는 생각도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사랑을 받아 보고 싶은 맘이 없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사 랑을 받아 보고 싶은 맘이 없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사랑 을 받을 만한 희망이 없을수록 더욱 받아보고 싶은 생각을 간절하였다. 게다가 이미 나이 열 여덟이요, 또 어려서부터 고생을 만힝 한 그는 풍족한 가정에서 자라난 선경이나 선 형이보다도 모든 것이 조숙하였으므로 이성에 대한 생각도 두 사람보다는 익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얼굴에 대한 실 망으로 모든 여자의 태도를 잃어버리고, 점점 남자와 같이 활발하게 성질과 행동이 변하였다. 그가, 〈애국 부인의 일생을 보내리라〉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 도 그의 얼굴이 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그에 게는 남자와 같은 용기와 드물게 보는 말재주가 있었다. 그 래서 학교에서도 매양 학생 중에 주목이 되고, 이 선생도 선애의 이 특징을 알아보아서 그 용기와 변재로 나라 일에 몸을 바치라고 전하였다.

선형은 선애와의 반대로 여자 중에도 극히 여자다운 여자 다. 수줍고 얌전하고 상냥한 계집애다. 선경이와 같이 희로 애락을 얼른 발표하지도 아니하고 무엇에 그렇게 열중하지 도 아니하고 얼른 보기에 퍽 매몰하고 냉정한 듯하나, 속에 는 남에게 짖 않는 열이 있고 비록 말이 없으나 속에는 육 조를 배안하고 있는 여자다.

세 여자가 세 가지 특색이 있으면서도 서로 좋아하였다.

서로 변치 말자고 나라 일을 같이 하자고, 시집도 가면 같 이 가고 안 가면 같이 안 가자고, 셋이 모여 기도로 맹세도 하고 은으로 만든 염통도 노나 가지고, 사진도 같이 박고 자기네가 아는 방법은 다 써서 의를 맺았다. 이것은 그때 여학생들이 흔히 하던 일이요, 하고는 반드시 안 지키던 일 이다.

그러나 이 선생의 금후의 일생에 이 세 여자가 그림자 모 양으로 따르게 되고 또 선생의 일을 적지 않게 도와드리게 된 것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차차 알려니와, 실로 이상한 인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선경네 사랑에서 이렇게 어린애들 모양으로 웃고 떠들던 세 여자도 지금은 모두 사십이 가깝고 조선에서 모르는 사 람이 없게 되었다. 아마 그네는 각각 이 선생이 암살되었다 는 전보를 보고 가장 슬피 우는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선생과 최 선생이 조반상도 물리기 전에 선경의 집을 떠나서 간 곳은 북한산 승가사이다. 여덟 시 반에 창의문에 서 만나기로 약속한 아홉 사람은 사오 분의 차이로 서로 만 났다.

어젯밤에 온 눈을 아직 밟은 사람이 없어서 어디가 길인지 분별할 수도 없는데, 아홉 사람은 이제 겨우 산으로 넘어 쏘는 금빛 같은 아침볕을 옆으로 받으면서 산길을 올라갔다.

새 눈에 발이 들어가는 소리, 발에 밟혀서 빠드득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는 것이 없다. 키 작은 솔포기는 하얗게 눈 을 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마치 아홉 사람의 발자취에 놀라는 듯이 약간 고개를 흔들어 눈덩어리를 떨어뜨린다.

중덕을 훨씬 지냈다. 칼날 같은 산마루터기 새파란 하늘을 베이려 하는 양이 새맑안 대기 속에 분명히 보인다. 골짜기 에서 꿩 한 마리가 「깩께」소리를 지르며 아홉 사람의 앞 을 지나 다음 골목으로 넘어간다. 아홉 사람은 우뚝 발을 멈추고 꿩의 가는 곳을 바라보았다.

승가사에 이르러서는 중에게 점심을 시키고 잠간 더운맘에 몸을 녹여 가지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아홉 사람이 신 라 진흥왕 순수비 있는 바위 위에 모여 섰을때는 바로 열 한 시 정각이었다. 비록 바람은 없으나 높은 산꼭대기 공기 는 얼음과 같이 차다. 다만 아홉 사람의 가슴에 물결치는 피만이 용솟음을 쳐 끊을 뿐이다.

이 선생은 모자를 벗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벗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맘을 이 강산에 바치는 중한 서약을 할 양으로 이 곳에 모 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일은 겨로 유 광장 삼인의 도원에서 결의한 것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그네는 오직 하 나라 화실을 위하여 몸을 바친 것에 지나지 못하거니와, 우 리는 조상이 피땀 흘려 개척하고 지켜 오던 이 강산과 우리 와 한 피를 나눈 저 이천만 동포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하여 의를 맺는 것이외다.

우리가 오늘에 서약하는 일을 행하면 우리나라는 살고, 아 니 행하면 우리나라는 죽습니다. 여덟 분! 저 참담한 강산을 도라 봅시오! 그 위에 사는 저 멸망하여 가는 동포를 생각 합시오, 그러고 이 강산과 이 동포의 운명이 여기 있는 우 리 아홉 사람의 속에 달린 것을 생각합시오!

우리는 이미 우리의 할 일을 자각하였고 또 그 일을 목숨 을 바쳐서 행하기를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기 잘하는 피를 가진 사람들이라, 아무쪼록 이 작정을 변하지 말자고 이 심상치 아니한 곳에 모여서 심상치 아니한 서약 을 하는 것입니다.

여덟 분 사랑하는 동지! 우리의 서약에는 아무 사사로움이 없고 아무 깨끗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서약하는 바 는 광명 정대합니다. 그러므로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 시 우리의 서약을 가상하실 것이요, 우리 황조의 신령이 또 한 우리와 같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이로부터 십년이나 이십년 후 에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달하여 나라를 구원한 후에 우리 가 다시 이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오릴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동안에 우리의 앞에는 감 옥이 있고, 포학이 있고, 죽음이 있거니와, 이날에 철석같이 굳게 서약한 뜻은 저 하늘과 이산으로 더불어 영원히 변할 날이 없을 것을 확신합니다.』

하고 말을 끊을 때에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눈에서는 눈 물이 흘렀다.

이 선생은 자리를 피하면서 전 목사에게 나서란 눈짓을 한 다. 전 목사는 이 선생의 섰던 자리에 서서 두 팔을 들고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천지 만유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저의 아홉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 사랑하는 나라와 동포를 위하여 이 몸과 맘을 바치기로 서약을 하려 하오니 이 이링 만일 당신의 듯에 합당할진댄, 저희의 서약을 당신 의 맘에 기록하시옵고 저희에게 끊임없는 가르침과 도움을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 무리 비록 맘은 간절하오나 듯이 연약하오니 당신의 굳센 힘을 저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어리석은 생각에 이 일이 당신의 뜻에 합당할 것을 확실히 믿사오며, 그러므로 저희는 우리 주 예수께옵서 천 하 만민을 위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본받아 이 값 없는 몸을 저희의 나라와 동족을 구원하는 제단에 제물로 드리려 하오니, 주여 이것이 값 있는 제물이 되게 하여 주 시옵소서!』

전 목사의 기도가 끝날 때에 예수를 믿는 이나 아니 믿는 이나 다 정성스러운 목소리로「아멘」을 불렀다.

전 목사는 품에서 종이 조각하나를 내어 들고 낭독하는 모 양으로,

『이곳에 참예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대표하여 이제 서 로 서약할 바 몇 조건을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오랫동 안 생각하시고 굳게 작정한 바 있으신 줄을 믿거니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는 서약은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보지 못한 귀 중한 서약이라. 만일 여러분 중에 누구시나 조금이라도 말 에 거리낌이 있거든 이제라도 이 자리에서 물러가시기를 바 랍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이 양심의 자유인 것은 여러 분도 아시는 바어니와, 이 양심의 자유를 누르려 맘에 없는 서약을 행하는 것은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누구 시나 서약하기를 조금이라도 꺼리시는 이가 있거든 물러나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전 목사는 여러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모양으 로 잠깐 말을 끊고 여덟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 얼 굴들은 모두 이상한 흥분과 긴장으로 붉어지고 근육이 움직 였다. 최 선생은 악골이 움직여 이발이 마주 닿는 소리가 들린다. 보기만 해도 몸서림이 치도록 익숙하고 비장한 기 운이 아홉 사람을 둘렀다. 난데없는 회리바람이 산 밑으로 눈보라를 몰아다가 아홉 사람의 얼굴에 뿌리고 뱅글뱅글 돌 아 하늘로 올라 간다. 아홉 사람은 무슨 신비한 영감이나 느끼는 듯이 다시 몸을 떨었다.

『만일.』

하고 전 목사는 말을 계속하여,

『서약하시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노라, 참된 맘으로 기 쁜 맘으로 서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거든 바른 손을 드시 오.』

하였다. 여덟 사람은 일제히 바른 손을 들었다.

『그러면』

하고 전 목사는,

『여덟 분은 오늘부터 한 모믜 안락과 집과 재산과 필요할 때에는 새영까지도 버리고, 죽는 날까지 나라와 동족을 위 하여 일하기르 서약하시오?』

하고 물으매,

『네!』

하고 여덟 사람은 소리르 모아서 대답한다.

『여덟 분은 오늘부터 동지를 믿어 결코 서로 의심하느 일 이 없겠습니까?』

『없겠습니다.』

『여덟 분은 우리 일의 기초가 크고 굳은 단체를 지음에 있는 줄을 아신즉, 오늘부터 단결의 규약을 꼭 지키어 조금 도 어김이 없고, 이 단결을 사랑하기를 몸과 같이 하겠습니 까?』

『이 단결을 몸과 같이 사라하겠습니다.』

목사는 한층 소리를 높여,

『여덟 분은 이 단결을 지극히 사랑하신즉, 누가 이 단결 의 지도자가 되든지 우리가 뽑은 지도자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가장 필요한 이리요, 도 가장 어려운 일이니, 깊이 생각하신 뒤에 대답하시기를 바 랍니다.』

한참 잠잠하다가,

『절대로 복종하겠습니다.』

하고 여덟 사람은 일제히 대답하였다.

『마지막으로 묻거니와.』

하고 전 목사는 더욱 장중한 어조로 느리게 힘있게,

『그러면 여러분은 괴롭든지 즐겁든지 일이 성공이 되든지 실패가 되든지 감옥에를 들어가든지 교수대에를 올라가든 지,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서약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평생에 우리가 작정한 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습니 까?』

할 때에 일동은 더욱 힘있는 목소리로,

『배반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사람의 머리는 일시에 쭈볏하였다.

또 한번 전 목사의 간절한 감사 기도로 서약식은 끝이나고 서로 굳게 악수를 한 뒤에 이미 준비하였던 투표지를 내어 회장을 선거하니 만장일치로 항목이 뽑혔다. 순서대로 선생 은 여덟 사람의 앞에서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나 이 항목을 회장으로 뽑으신 여러 동지의 뜻을 맘에 새겨 괴롭거나 즐겁거나 죽든지 살든지 우리 회를 위하여 힘쓰겠사오며, 작은 일이나 큰일에 반드시 우리 회의 규약 과 양심의 명하는 바를 어그리지 아니하기를 선서하나이 다.』

하고 한번 고개를 숙인다. 여덟 사람도 고개를 숙인다. 이 리하여 저 유명한 백령회(白領會)가 처음 조직이 되었다.

백령이란 흰 동정이란 뜻이다. 우리는 흰 동정을 다는 백 성이니 흰 동정이 모여 크게 흰 동정의 힘과 빛을 발하자는 뜻이다. 백두산 머리를 영원히 덮은 흰 눈, 조선사람의 목에 영원히 둘린 흰 동정, 이것이 「영원히 순결하여라!」「영원 히 외로워라!」「영원히 새로워라!」「영원히 하나이어라!」

하는 우리 민족의 이상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령회 의 회원이 되는 사람은 맘이 순결한 사람이라야 한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린 자의 먹고마실 것을 사모하듯하는 자라야 한다. 날로 새롭고 시시각각으로 새롭기를 바란는 자라야한 다. 순결함과 의로움과 새로움에서 일심하는 자라야 한다.

흰 동정을 단 이천만 남녀 중에서 이렇게 순결하고 의롭고 새롭고 일심하는 자를 모아 백령회 깃발 밑에 뭉치자. 그런 사람이 아홉에서 아흔에, 아흔에서 구백에, 구백에서 구천 에, 구만에서 구십만 백만에 달하기를 기약하자. 이에 비로 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좌우할 힘과 자 격이 생길 것이다. 이리하지 아니하고는 우리에게는 국가적 생명도 민족적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을 바쳐 서 이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이 이 선생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동지에게 말한 바요, 오늘 같이 서약한 여덟 사람이다.

같이 서약한 여덟 사람이다. 같이 자각한 배다.

아아, 오늘에 서약한 이 아홉 사람이 장차 시국이 급박한 반도 내에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고. 그것을 그때 사정을 아 는 이는 더러 알거니와, 참으로 아는 이는 없고 또 아직 나 이 어린 우리 아우와 누이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어 찌하면 이 선인의 귀한 노력과 민족적 운동의 성공과 실패 의 여러 가지 아프고 눈물 나고 장하고 애타고 존귀한 매력 을 사랑하는 아우와 누이들에게 들려 줄까?

청컨댄 내 이야기를 들으라!

승가의 서약이 있은 지 일년이 지났다. 그동안에 많은 사 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감옥에 잡혀 갔다. 나는 그동안에 일어난 여러 가지 정치적 변혁을 말한 자유가 없는 것을 유 감으로 안다. 또 그때부터의 조선 지사들의 정치적 운동과 여러 가지 계획을 다 자세히 말하지 못한는 것을 더욱 유감 으로 안다. 대개 이러한 말을 다하려면 내 붓은 당장으로 금지를 당할 것이요, 그리되면 내가 여러분께 하려는 중요 한 말—이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에 관한 말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꾹참고 다만 써도 관계치 아니한 것만 주어 쓰련다. 그러므로 나의 서술은 극히 불완전할 것 이다. 독자여!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다른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자.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장차 쓰려는 것이 아주 공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복잡하고 생각만 하여도 주먹에 땀이 쥐어 지는 눈물지는 당신의 정치적 배경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지, 부자유하나마, 우리 이 선생의 인격과 경영과 활동 의 골자는 넉넉히 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승가에서 서약을 마치고 내려 와서 한 일주일 도안 사업의 계획과 방침을 토론하여 확정한 후에 이 선생과 전목사는 서울에 있기로 하고, 다른 일곱 사람은 각각 한 도씩 맡아 가지고 지방으로 갔다. 그네가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극히 단순하였다. 알아 보기 쉽게 표를 만들어 보자.

(一) 믿을 만한고 애국성 있는 자를 염탐하여 백령회에 가 입케 하는 것.

(二) 각 지방에 누구라고 이름 난 사람을 염탐하여 백령회 에 가입케 하는 것.

(三) 재산 있는 자를 조사하여 명부를 만드는 것.

(四) 각지의 산물을 조사하는 것.

이 네 가지뿐이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염탐하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지 그와 교제할 길을 찾아 더욱 자세히 그의 사상과 심지를 알 아보아 마침내는 백령회에 일회를 시키고, 그런 뒤에 그 사 람과 둘이서 다시 한 사람을 구하여 동지를 만들고, 그 다 음에 그 두 사람과 셋이서 다시 한 사람을 구하여 동지를 만들고, 이리하여 한 골에 동지 셋이 생기면 그 세 사람에 게 그 골 일을 맡기고 자기는 그 다음 고로 가서 도 그와 같은 일을 한다.

그러면 한 골을 맡은 세 사람은 다시 그 골 안에서 동지를 모으고 명망가와 재산가와 산물을 조사한다. 이리하여 얻은 결과는 그 도를 맡은이의 손을 거쳐 중앙으로 올라온다.

그러므로 한 골에 있는 회원들은 오직 그 골에 있는 두령 을 알 뿐이요, 한 골에 있는 두령은 오직 그 도의 두령과 회담을 할 뿐이요, 모든 것을 다 알고 앉았는 이는 오직 중 앙에 있는 회장뿐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 이 비밀 결사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다른 골 동지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을 것이다. 세로 들어오 는 회원은 석 달 동안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그 골의 두령과 둥지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다.

회원의 의무도 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一) 매삭 삼원의 회비를 낼 것.

(二) 회에서 경영하는 교육 기관과 산업 기관에는 반드시 출자자가 될 것.

(三) 각 사람이 무엇이든지 돈벌이하는 직업을 가질 것.

(四) 자녀를 학교에 보낼 것.

(五) 비빌을 지킬 것.

(六) 회가 부를 때에 나설 것.

이 여섯 가지뿐이었다.

이 회에서는 총회니 지방회니 하고 모인는 일이 없고 다만 법에 정하여 높은 것을 법이 정한 사람으로 히야금 실현케 할 뿐이었다. 회원은 그 법을 일일이 보고 그 법이 자기의 뜻에 합한다는 것을 허락한 뒤에 입회하였기 때문에 회에서 하는 일을 모여서 더 토론할 필요도 없겠고 더구나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무론 회에서 하는 일이 모든 회원에게 다 만족을 줄 수는 없으나, 그네는 단체적 행동이란 본래 단체 의 각개인의 의사에 곡 맞을 수 없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았 다. 그러므로 비록 자기의 뜻에 좀 아니 맞는 일이 있더라 도 처음에 정해 놓은 법에 어그러지는 일만 아니면 기쁘게 복종하였다.

그녀는 적지 아니한 회비를 내지마는 그 회비가 어디로 가 서 어떻게 씌우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것이 오직 나라 일에 쓰이는 줄을 믿기 때문에 쓰이는 곳을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서로 믿었다기보다도 서로 믿는 사람들 끼리만 모인 것이다.

이러한 지 일년만에 승가에서 — 서약한 일주년 기념일에 아홉 사람이 다시 승가에서 모였을 때에는 회원을 얻은 이 가 첫째는 최 선생, 둘째는 건 목사, 셋째로 김 윤문이었다.

김 윤뮨은 본래 이름이 드러나지 아니한 사람이나 지나간 일년 동안의 활동에 그의 비법과 지언 지감과 사람을 권유 하는 능력, 사람을 감화하는 인력의 힘이 넉넉히 발현되었다.

기념일에 승가사에 모여 점심을 먹으며 제일회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중학교 하나, 책사 셋, 인쇄소하나, 직조 공 장 하나, 잡화상 셋, 객주 다섯을 세우는 것이다. 중학교 하 나는 서울에 두어 회원의 자제와 일반 총춘한 청년을 교육 하여 나라의 일군이 될 만한 상식과 인격을 가진 자를 양성 하려 함이요, 책사와 인쇄소는 정신을 고취하고 지식을 개 발할 서서적을 출판하자 함이요, 직조 공장은 외국으로서 들어오는 서양목 옥양목 비단 등속을 막자 함이요, 객주는 동지은 내왕과 통신을 편하게 하며, 아울러 각처 상인과 친 교를 맺으려 함이다.

이 계획은 이개월 내로 실현되기 시작하여 그해 사월에 백 산중학교의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는 그 회의 책사에서 사오게 되었다. 직조 공장도 자본금 십만 원으로 그해 팔월부터는 서양목을 짜내게 되었고, 객주 다 섯 곳도 그래 동짓달 안으로 다 배치가 되었다.

이 선생은 몸소 학교의 교장이 되고, 최 선생이 책사 주인 이 되고 이 상준이 직조 회사의 사장이 되고, 객주 주인도 동지 중에 명망 있는 인사들이 되었다.

세상이야 어찌되거나 본 체 만 체하고 백령회원은 다만 회 원 모으기와 돈 모으기와 학교 세우기와 공장 세우기로만 골몰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이러한 모든 사업이 한 기관의 고동으로 되는 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이 선생은 모든 연설회와 회의 청함도 다 사절하고 오직 학교에 들어 박혀 낮에는 학생을 지도하고 밤에는 백령회를 지도하였다. 이것을 보고 세상에는 이 선생이 시국에 대하 여 낙심한 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아까운 사람이 큰 정치 사업을 하지 아니하고 한 학교의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아 깝게 여기는 이도 있고, 심한 자는 그가 큰 야심을 두어 자 기의 부하를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비방한 이도 있었다. 선 생은 이러한 비평을 들을 때마다 혼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백산 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가 사월 일일 각 신문에 발표 되었는데 사월 십일 개학에는 사백 오십명의 학생이 상학하 게 되었다. 이것은 무론 대부분이 백령회원의 자제들이라 백산 학교가 창립되길 고대고대하고 있던 학생들이다. 거의 십 삼도 전체에서 골고루 모여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학교 에는 이백명 이상의 학생을 가진 자가 없었으므로 백산 학 교 오백명 가까운 학생이 묀 것은 한 이적처럼 세상의 주목 을 끌었다.

이 항목이가 교장이란 것이 사회의 주의를 끌 이유도 되었 으나, 전국 십 삼도에서 골고루 모여 든 것이 더욱 이상하 게 보였다. 그래서 당시 통감부가 주관하는 경찰에서는 이 상한 눈으로 백산 학교를 주목하게 되었고, 교장 이 선생에 게 대하여서도 더욱 깊은 주의를 하게 되었다. 지금가지도 이 선생을 일류로 가는 주의 인물로 알지 아니한 것은 아니 었으나, 이렇게까지 큰 명성을 가졌으리라고는 당시 정부에 서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다. 실로 백산 학교의 설립이 이 선생의 명성을 무섭게 높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선생의 능력에 놀란 것은 통감부와 정부와 일반 사회보다도 학생들이었다. 비록 중학교 학생이라 하지마는 당시 학생은 평균 이십세 내자 삼십세의 장년들이었다. 그 네는 자기 고향에서는 다 지식 계급이요, 지사요, 영웅이던 사람들이다. 어린 학생을 통솔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 니어든, 하물며 이렇게 어른이 다 된 오백명 학생을 통솔함 에리요. 그런데 이 오백명 장년 학생들은 첫 학기가 다 지 나지 못하여 그만 이 선생의 소에 새로 훈련될 사람들이 되 고 말았다.

나도 가끔 그 학교를 참관하려 갔거니와, 그 숱한 학생들 의 엄숙한 기상과 정연한 질서! 진실로 아니 놀랄 수가 없 었다. 모자를 쓴 모양, 두루마기 고름을 맨 모양, 대님을 친 모양까지 모두 정돈해 보이고 그네의 활개와 걸음까지 모두 활기가 있어 보이고, 혹 어떤 학생을 붙들고 수작을 하여 보면 모든 정성과 힘이 있는 듯하였다.

한번은 어떤 미국 손님 하나가 선교사 두어 사람과 함께 학교를 참관하러 왔다. 그때에 선생은 그 손님에게 학생들 에게 강연을 하여 주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학생을 대강 당으로 취집시키는 동안에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선생은 미국 손님더러 조선에 와서 얻은 감상 중에 가장 조선 사람 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런즉, 솔직 한 미국 손님은,

『내가 한국에 와 보고 가장 슬프게 생각한 것은 한국사람 이 거의 원기가 없어 느리고 게을러 보이는 것과, 단체 생 활을 하는 능력이 결핍한 것입니다. 원기와 단체생활 능력 은 현대의 국민 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인데, 귀국 인민에 이 두 가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슬픔니다.』

하였다. 이 말에는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고 같이 온 선교 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이 흠점은 고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글쎄요?』

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오랫동안 잘 훌녀되면 고쳐도 지겠지요.』

하고 매우 확신 없는 어조로 말을 맺는다. 선생은 다시 아 무 말도 묻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입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자신이 있는 듯한 웃음이 있었다. 미국 손님은 선 생은 이 웃음을 이상히 보고 그 뜻을 생각하였다.

이윽고 선생이 미국 손님과 선교사들을 인도하여 대강당에 들어가니 방에 찬 학생들이 아무 호령도 없는데 일제히 일 어난다. 그 일어나는 것이 마치 무슨 기계의 작용으로 되는 듯하였다.

선생은 손님에게 「학생들이 집회할 때에는 반드시 애국가 한번을 부른다」는 뜻을 귓속하였다. 이 말에 잠깐교의에 앉았던 미국 사람들은 애국가에 결의를 표하여 일어섰다.

선생이 눈으로 한번 군호를 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는 애국가가 오백명의 힘있는 목으로 울었다. 어느 때에 나 이 노래를 부르면 몸서리가 치도록 감격이 되거니와, 이 만리 밖에 자유의 나라 문명의 나라에서 우리를 보러 온 손 님을 앞에 세우고 부르는 이날 노래를 뼈속까지 짜릿짜릿하 도록 감격이 되었다.

다음에 선생의 간단히 소개하는 말이 있고 그러고는 미국 손님의 간단한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 끝에 한 미국 손님 의 말은 백산 학교 학생의 기상이 얼마나 이 먼 나라 손님 을 감동시켰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자백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및 여러분 의 사랑하는 국민에게 용서함을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동포를 볼 때에 이 백성은 원기가 없는 백 성이다. 이 백성은 노쇠하여 살 기운이 없는 백성이다. 그리 고 이 백성은 도리어 단체적 생활을 감당할 만한 정신이 없 는 백성이다. 아아, 이 백성은 다시 일어날 희망이 없는 백 성이다 하고 속으로 단정하였습니다.』

하고 고개를 도렬 이 선생을 잠간 보며,

『지금도 교장께 그러한 뜻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을 보니 여러분의 힘있는 목소리, 여러 분의 꼿꼿이 앉은 모양, 여러분이 장시간 동안 나만 주목하 고 있는 무서운 주의력, 여러분이 절제와 질서, 이 모든 것 을 본 나는 여기서 전에 볼일 없는 새로운 한이 모든 것을 본 나는 여기서 전에 본일 없는 새로운 한국 국민을 대한 것 같습니다.

아아, 여러분! 여러분의 기상은 다른 어느 민족에 비겨도 지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동포가 다 이러합니까?

다만 여러분만이 이러합니까......?』

이 말을 들으면, 그때 백산 학교 학생의 훈련이 어떠하였 던 것을 알 것이 아니냐 나오는 길에 미국 손님은 이 선생의 손을 꽉 붙들고 감격 이 넘치는 목소리로,

『아아, 이 백성의 진정한 지도자!』

하고 재삼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 미국 손님은 당시의 조 선 통감이던 이 등 박문을 보고,

『왜 한국 사람의 교육을 이 항목에게 맡기지 아니하시오?

이 백성의 결점을 가장 밝히 알고 그 결점을 그치는 가장 무서운 기술을 가진 이는 이 항목이요!』

하였다. 이 말은 일년 후에 이등 통감이 이 선생과 회견 할 때에 직접으로 할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 이 선생의 교육의 참 뜻과 그 무서운 훈련 술을 알아 준 이는 오직 이 미국 손님 하나뿐이었고, 그가 사랑하는 조선 동포 중에는 그 백분지 일을 알아주는 이도 없었다.

어디, 이 기회에 이 선생이 학생을 교육하던 모양을 이야 기해 볼까. 지나간 일이나 진리는 항상 새로운 것이다. 요새 에 새로 난 교육가들이 많으니 무슨 새로운 교육법이 새로 났는지 모르거니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선생의 교육법이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참된 교육법이요, 또 영원히 그러할 것이요, 세계적으로도 그러할 것인 줄 믿는다.

선생의 교육법의 제 일조는 학교가 학생을 교육하는 목적 과 주의를 정하고, 그것은 우선 학교의 직원과 강사에게 분 명히 알리고 실행시키는 것이다. 그가 교사를 구할때에는 그 후보자에게 반드시 학교의 규칙과 주의를 보이고 여러 날 생각을 시키고 토론을 하여 그가 조금도 이의가 없노라 고, 자기도 그렇게 실행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을 보고야 그를 교사로 채용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피 차에 그것이 해결되기 전에는 결코 채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학교를 시작한 뒤에 교사를 구하지 아니하 고 교사를 구하여 놓은 뒤에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학 교뿐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이나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는 새로 입학하는 학생과 그 보증인에게도 우선 규 칙을 주어 잘 보게 한 후에 그 규칙에 불복하는 점이 없노 라고, 꼭 그 규칙대로 복종하겠노라고 허락을 한 뒤에야 입 학을 시켰다. 그는 신임하는 학생을 일일이 몸소 구두 시험 을 하였는데 여러 말을 다 물은 뒤에는 반드시 이 말을 하 였다—

『공부도 좋지마는 제 양심의 자유를 희생하고까지 할 필 요는 없소. 우리 학교에서는 공부잘하는 사람보다도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아니하는 사람을 원하오. 그러므로 만일 우리 학교 규칙 중에 조금이라도 당신의 양심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거든 입학을 아니하는 것이 좋소. 그렇지마는 한번 당신 이 이 규칙을 복종하겠다고 허락하고 입학한 뒤에는 조금도 용서함이 없을 것이요, 또 당신도 한번 복종하기를 양심으 로 허락하였은즉, 다시는 아무 불평도 하실 수 없을 것이 요.』

이렇게 말하고는 선생은 학생에게 잠간 생각할 신간을 준 뒤에 그 대답을 들었다.

그러므로 교사나 학생이나 한번 학교에 들어 온 뒤에는 다 시 아무 이론이 없었다. 비록 규칙에 의하여 엄한벌을 받더 라도 자기가 이미 허락한 것이므로 감히 원망할 생각을 아 니하였다.

무슨 과실이 있는 학생에게 벌을 줄 때에는 선생은 반드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을 벌하는 것이 내가 아니요 당신이요, 이 규칙은 당신이 지키기로 허락한 것이니, 곧 당신의 뜻이요, 나는 당 신의 위임을 받아 학교의 이름으로 이 벌을 주는 것이요, 당신을 벌할 자는 오직 당신뿐이요.』

이런 말을 할 때에 선생의 목소리는 떨었다.

한번은 어떤 학생에게 퇴학 처분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 경우를 당하여 퇴학당할 학생을 앞에 세우고,

『당신은 허물된 일을 하였구료!』

하였다. 그런즉 그 학생은,

『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입학할 때에』

하고 선생은 심히 애석하는 듯한 어조로,

『이러한 허물을 지면 퇴학 처분을 받겠노라고 약속하였지 요?』

하였다. 그 말이 어떻게 엄숙하고도 간절한지 할생은 흑흑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며,

『나는 이것이 당신의 한 때 잘못인 줄 아오. 그리고 당신 이 좋은 사람인 것도 아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의 허락으로 세운 법은 지켜야 하고 또 당신이 양심의 자유로한 약속은 지켜야 하겠으므로, 나는 학교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퇴학을 명하오.』

하였다. 그 학생은 그날 밤에 선생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 러나 용서하여 달라는 청을 하러 간 것은 아니다. 그는

『선생님, 일년 후에 다시 입학하겠습니다.』

하고 집으로 갔다가 과연 말대로 일녀 후에 다시 입학하였다.

그야말로 후일에 선생의 중요한 동지 중에 하나인 김윤수다.

선생이 정한 백산 학교의 교육 목적은 이러하다—

『본교는 청년 남자의 덕을 함양하며, 상식을 교수하며, 위 생과 체육의 습관을 길러 국민 생활비 한 부분의 직무를 감 당할 만한 한 인격자를 양성하기로 목점함.』

이것은 아침 상학전 집합시마다 애국가를 부른 뒤에 반드 시 낭독되었다. 그럴뿐더러 직원이나 학생이나 무슨 회를 할 때마다 반드시 낭독되었다. 그래서 직원이나 학생이나 염불 모양으로 첫머리만 생각하면 끝까지 내려외어지도록 암송이 되었다. 그뿐더러 날마다 그 뜻을 해설하므로 그 뜻 까지 구구의 뜻도 직원이나 학생이나 죄다 일치하게 암송이 되었다.

선생이 이 뜻을 해석할 때마다 항상 힘있게 말한 것은,

『국민 생활의 한부분의 직무를 감당할 만한 인격.』

이란 구절에 관한 것이다. 하루는 아침 집합식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가 이상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또 에로부터 우리나라 습관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 라 일이라면 오직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만 인 듯이 생각하 오. 그러나 이것은 심히 낡고 무식한 생각이요, 논밭에 김을 매는 것이 큰 나라 일이요. 이리하므로 국민의 먹을 양식을 버는 것이외다. 짚신과 미투리를 겪는 것이 큰 나라 일이요, 이것으로 국민이 활동할 신승 공급하기 때문이요. 아이들과 무식한 동포들을 가르치는 것은 큰일 중에도 가장 큰일이 요, 이리하므로만 국민이 잘 살게 될 수 있는 까닭이요! 그 러므로 국민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직업은 농이나 공이나 상이나 교육이나 정치나 죄다 나라 일이요. 그러므로 각 사 람이 놀지 말고 한 가지 직업을 잘하는 것. 이것이 나라 일 을 잘 하는 것이요. 우리가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나 운동을 하여 몸을 건강케 하는 것이 모두 제 직업을 잘하기 위한 준비외다.

높은 인격이란 무엇이냐? 저 맡은 직업을 가장 충실하게 잘하는 인격을 이름이외다. 한 가지 직업이 없는자는 곧 인 격이 없는 자이니 죄인 중에 이에서 더 큰 죄인이 없는 것 이외다.』

이 해석을 보면, 선생의 교육의 주의를 짐작할 것이다. 이 것은 선생의 국가학적 이상인, (一) 국민 개학 (國民皆學) (二) 국민 개업 (國民皆業) (三) 국민 개병 (國民皆兵) 주의의 한부분 중심되는 한부분을 말한 것이다.

국민 개학이라는 학자도 결코 세상이 생각하는 뜻과는 같 지 아니하였다. 선생의 교육설에 의하건댄 아동은 소학교 교육은 평등하게 받게 하더라도 중학교 시대부터는 먼저 그 아동의 천분을 보아 일생의 직업을 택하게 하라. 그런 뒤에 는 도덕이나 지식이나 모든 수련을 그직 업을 위하여 시켜 야 한다고 한다. 선생의 인생관으로 보면, 인생은 곧 직업이 다. 직업 없는 곳에는 덕행도 지식도 없는 것이니, 덕행이나 지식은 직업을 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낟. 대개 인생의 목적은 두 가지니, (一) 제 손으로 저 먹을 것을 버는 것.

(二) 인생 사회의 모든 분업 중에 하나를 감당하느 것 인데 이 두가지 목적은 직업으로만 달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관으로 보면 인생 곧 직업, 직업 곧 인생이다. 그러므로 아동의 교육은 일생에 한 한직업을 감 당할 만한 덕행과 지식과 기예를 줌에 있다. 그리하고 직업 의 귀천은 직업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요 직업을 잘하고 못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직업을 하는 사람에게 있다—이 런 것이 선생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개학한 뒤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학생을 불러 그의 즐겨하는바와 잘하느 바와 우려 하는바를 조사했 다. 선생은 몇 가지 조건을 정하여 가지고 문답법을 써서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의 즐기는 바와 잘하는 바와 원하는 바를 자각하게 하여, 제 생각으로 제 직업을 택하게 하였고 결코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위 선 학생의 이력서를 보아 그의 나고 자란 지방, 그의 가정 의 형편, 그의 총전 교육들은 연구하고 다음에는 보증인을 청하여 그가 보증한 학생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을 다 듣는다. 그런 뒤에 조용한 방에 학생을 불러 들인다.

선생은 학생의 개성과 사정을 따라 묻는 바가 각기 다르거 니와 그 대강은 이러하다— 첫째, 몸이 건강한가를 물어, 만일 병이 많다든지 별로 병 은 없으나 몸이 약하다고 대답하면 선생은

『그러면 몸을 건강케 할 공부를 해야 하지 아니하겠소?』

하고 묻는다.

『네!』

하고 그 학생은 일생에 처음 자기의 건강을 주의하여야 할 것임을 자각하고 깜짝 놀란다. 그러면 선생은,

『당신이 힘만 쓰면 당신의 몸은 건강하게 될 수 있소! 내 일은 생리학 선생께서 부르실 터이니, 가서 어찌하던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읍니까고 물어 보아서, 그 선생께서 가르 치시는 대로 날마다 실행하시오!』

한 후에 선생은,

『당신은 어려서 소학교에 다닐 적에 무엇하기를 제일 즐 겨하였소?』

하고 물어, 만일 학생이 산술과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하면,

『그러면 당신은 산술과 그림 그리는 직업을 택하시기를 원하시오?』

하여 만일 그렇다고 학생이 대답하면,

『모레는 이 화학 선생이 부르실 것이니, 가서 그 선생께 서 가르치시는 대로 하시오.』

한다. 이 밖에도 혹은 학생의 재질 혹은 학비 혹은 건강 혹은 성미를 토론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의 힘을 자가케 한 뒤에 자기의 일생 사업을 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생리학 교사, 이 화학 교사, 지리.역사 교사등 각방 면을 맡은 교사들에게 교장이 명부를 보내고 그 명부를 받 은 전문 교사들은 명부에 씌운 대로 학생들을 불러 각각 학 생의 원하는 방면으로 지도를 한다.

이 모양으로 교장 이하 모든 학과의 교사가 하나이 되어 조직적으로 전교 학생의 개성과 능력을 판정하고 또 각 학 생이 일생에 하여 갈 직업을 택하게 한다. 이리하여 제일학 기 안에 전교 학생의 능력을 전부 조사하는 규정이다.

학과를 교수하는 이외에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사무가 있으므로 교장과 교사들은 매일 아침 여덟시로부터 저녁 네 시까지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대신에 교사들의 월급 은 다른 모든 학교보다 많았고 또 십년 간 교사로 근속한 이에게는 일생의 생활비를 대어 주는 작정도 있었고, 또 장 차는 학교 구내에 교원의 주택도 지어 각 교원으로 하여금 생활에 도와 걱정이 없이 일생을 이 학교에서 근무할 편의 를 도모하였다.

위에 말한 모양으로 각 학생의 능력과 직업을 판정한 후에 는 학생을 (一) 문과 부류, (二) 수리과 보류, (三) 공과 보 류, (四) 농고 보류로 나누어 각 부류를 따라 특정한 학과를 더 중요하게 배우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학교를 졸업한 때 에는 가령 공과 보류에 속한 학생은 공업자로의 도덕적 훈 련과 지식적 기초를 가지고 겸하여 간이한 목공. 철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학교 일로 온종일을 지나면 선생 은 숙소에 돌아 와 저녁을 먹고는 각처에서 들어오는 백령 회의 보고를 받아 처리할 것은 처리하고 답장할 것은 답장 하고, 또 동지들의 방문을 받고, 이리하여 밤 열 두시나 되 어야 비로소 자리에 누었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 다섯시 에는 꼭 일어난 성경을 들고 남산을 한번 다녀 내려 와서는 아침을 먹고 담배 한 대를 태우기가 바쁘게 학교에 출석하 였다. 이 모양으로 선생의 생활에는 잠시의 빈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요일에야 겨우 한가를 얻어 혹 절에도 나가고 혹 산에도 올라 하루를 편히 쉬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사업은 극히 순조로 진행하여 학교 일도 잘 되어 가고 백령회원은 무서운 세력으로 늘어 해야 평화회의 사건으로 광무황제께서 양위하시는 변이 날 때쯤 하여서는 전국에 삼천여 명에 달하고 날로 풍운이 급할수록 더욱 신 속히 증가하여 하루에도 엉떤 날에는 삼백여 명 회원을 얻 게 되었다. 백령회의 재산이 이미 이십만원에 달하고, 염직 회사의 자본도 십만원이 모였으며 여관이 열 두 곳, 책사가 네 곳, 인쇄소가 둘, 야국이 여섯 , 각지방에 세운 학교가 일백 스물 여섯이 되었고 또 백령회원이 주의를 선전하러 들어 간 곳을 보더라도 시위대 각 진위대에 쉰 여섯, 경무 청에 서른 둘, 중앙 정부와 각지방 관청에 이백 서른 다섯, 동경 유학생 중에 스물 일곱, 기타 각 학교 단체 등에 들어 간 자가 백여 명이나 되어 거의 건조선 각지방에 거미줄 늘 이듯 백령회의 기관을 늘여 놓았고 심지어 통감부 정탐 중 에 두 사람인가 백령회원이 섞여 있었다.

동지들은 일이 이렇게 쉽게 발전되는 것을 보고 급한 마음 에 어서 무슨 일을 일으키기를 원하였으나 선생은 항상,

『아직 멀었소, 아직 우리 일은 기초도 서지 못하였소.』

하고 동지들을 만져 눌렀다. 이 모양으로 과거 일년 반 동 안에 선생의 경하는 일은 모두 순조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숨은 세력은 바로 한 마디 호령에 건국이 끓어날이 만큼 크게 되었다.

이때에 해아 평화회의에 광무황제께서 이 준을 대포로 국 서를 보내었다가 평화회의에서 받아 주지 아니하므로 이 준 이 회의 성삭에 칼을 빼에 배를 갈라 죽었다는 사건이 일어 나 광무황제는 양위를 하시게 되고 종로와 전동에서는 한국 군대와 일본 군대간에 충돌이 생겨 그것이 이유로 한국의 군대는 「국민 병역을 실시할 때까지」 해산하게 되는 때에 당시 전국의 민정은 물 끓듯하여 당장에 무슨 큰 변이 터질 듯하여서 복학회를 머리로 사망 모든 정치적 단체와 지사들 은 팔을 뽐내고 입에 거품을 물어 시국의 절망적임을 부르 짖었고 각신문고 연설가들은,

「국민아, 어서 나가 죽자」고 비분 강개한 말을 하다가 혹은 압수를 당하고 혹은 용산 헌병대에 붙들려 들어가 구 류를 당하였다.

이 통에 헌병과 경찰에서는 모든 단체와 지사들의 행동을 엄중히 정탐하고 감시하는 일이 시작되고 신문과 잠지가 발 행 금지를 당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헌병과 경찰이 전국을 뒤집어 흩을 판에 백령회의 존재도 발각이 되어 올 부터 선생의 주위에는 비밀 정탐이 이삼인씩 따르게 되고, 통감부가 보기에 의문의 인물이었던 이 항목은 아주 위험 인물 중에 가장 큰 위험 인물인 것이 단정되었다.

게다가 서북학회의 임 창령이며 백형회의 과격한 동지들은 거의 날마다 혹은 기별로 혹은 직접 방문으로 시세의 급박 함과 선생의 출동할 것을 재촉하였다.

『여보 추산!』

하고 이미 창령은 목이 메인 소리로 이 선생의 손을 잡았 다. (추산은 이 선생의 당호다)

『그러면 어쩌단 말이요?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인제도 우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언제나 일어난단말이 요?......추산은 밤낮 실력 실력하니 그 실력이 언제나 준비된 단 말이요? 나라이 다 망한 뒤에 실력을 해서 무엇을 하오?

통감부 측에서 나오는 말을 듣건댄, 볼일내로 군대를 해산 할 모양인데 이 군부 대신 놈은 그 비밀을 알련만도 자기 부관되는 내게도 아무 말도 아니하는구료.

그런즉 하루라도 바삐 내일이라도 내 힘 자라는 대로는 반 항을 일으키려고 결심하였소.』

하고 양복 주머니에서 무슨 봉투 하나를 내어 이 선생앞에 펴놓으며,

『자, 이것이 내가 각 영문 동지에게서 도장 받은 것이 요.』

한다. 거기는 시위대 중대장에 누구 평양대 재 몇 중대장 에 누구, 강화대 참려에 누구 이 모양으로 칠판인 되는 장 교의 도장이 찍히고 그 머리에는

『우리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한번 싸위글 맹세하 노라.』

한 귀저링 있다. 이 선생은 이윽고 그 서약서를 들여다보 더니,

『그러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하고 이 참령에게 물었다.

임 참령은 눈물 고인 누느로 이 선생을 바라보며 가는 목 소리로,

『이 사람들이 연합을 위하여서 혁명을 일으키지오.정부 대관을 모두 잡아 죽이고 정부를 점령하지오!』

한다.

『그러면 정부에서는 통감부에 첨벙하겠지오? 벌써 일본 군대가 남산과 남대문에 대포와 기관포를 설치할 것이 무슨 뜻인 줄 아시오?』

하는 이 선생의 말이 긑나기도 저네 임 참령은 손을 흔들 며,

『만일 그렇게 되면 일본 군대오 한바탕 싸우지오. 싸워서 다 죽어 버리면 그만이 아니요? 우리에게는 지금 그렇게 하 는 길 밖에 남은 것이 없지오!』

하고 임 참령의 말소리는 더욱 커진다.

『지금 이 대대 군병은 내 손에 확실히 넣을 수가 있고 또 추산이 말 한 마디만 하면 오천명 백령회원이 일어날것이 요, 그리고만 보면 지금 각처에 있는 의병들과 형제를 합해 서 한번 싸울 만은 할 것이외다. 그런즉 오늘 저녁에 추산 만 한 마디 말을 때면 이 일은 될 것이 아니요?』

이 선생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은 말이 없었다. 임 참령은 더욱 흥분하여,

『내가 이 길로 총리 대신과 군부 대신으 집으로 가려오.

가서 계획에 복종하면 좋고 그렇지 아니하면 위선 그놈들은 죽여 버리고 내일 아침에는 선전 포고서를 발표하려오! 자, 추산 허락하실 테요?』

한다. 임 참령의 비창한 어조와 이 선생의 고민하는 안색, 실내에는 피비린내 나는 찬바람이 홱홱 도는 듯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이윽고 이 선생은 길게 한숨을 지우며,

『나는 임 참령의 계획에 반대할 용기가 없소이다. 나도 젊은 사람이라, 이 처지를 당하여 오 울분한 마음이 없겠어 요? 당장에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 죽고라도 싶지마는 그 러지도 못한는 것이 더욱 괴로움니다.

과연 지금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지마는 내 생각에는 임 참령의 계획으로 국가를 구원하리라고 믿을 수 없소이 다. 우리 국가를 없이하려 한는 자가 힘으로 할때에는 그것 을 대항하려 하는 자도 힘으로 해야 할 것인데 우리에게는 힘이 없지 아니합니까?』

이 선생은 말을 이어,

『내 생각에는 이렇게 위태한 때일수록 더욱 힘을 쌓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분한 생각과 급한 생각으로 어서 어서 일어나자고만 하면 영영 일어날 날은 없어지리라고 믿습니 다. 나라이 망한다고 하나 아직도 망할 대가 멀었습니다. 양 위? 그것이 무엇이 그리 중합니까? 몇날이 아니하여 한국이 아주 일본의 영토가 되고 말 날도 올 것이외다. 그러나 그 것도 아직 나라이 아주 망하는 것이 아니외다. 장차는 한국 땅에 한국 사람의 중자가 끊어질 것이 올 것이니 정말 나라 이 망하는 날이외다.

그러니까 양위라든가 합병이라든가 이것도 다 우습게 여겨 야지요, 우리가 아주 멸망하지 아니할 길은 위하여야 할 것 이외다......그러하는 길이 무엇인고? 힘을 기르는 것이외다.

만일 백령회원이 이만명만 되고 우리 손에 백만원만 있고 나라 일을 할 만한 일군이 천명만 된다 하면, 금시에라도 일어나겠지마는 아무 힘도 없이 일어나는 것은 도리어 한편 으로는 국가의 운며을 재촉하고 한편으로 힘을 기를 기회만 잃어 버리게 하는 것일까 합니다.

백령회 동지들도 요새에는 날마다 와서 조릅니다— 이때에 아니 일어나면 언제 일어나느냐고 조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움직이는 것이 나라에 해가 있을지언정, 이익이 없을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혼자 입술을 물고 참아 가며 힘을 기르기에 전력을 다하느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인가 합니다.

임 참명! 나는 차마 애국의 열정으로 나온 그 계획을 반대 할 용기가 없습니다. 당장에 임 참령을 따라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임 참령! 한번 더 깊히 생각하셔요! 그래서 우리 오 는 일년 동안에라도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보셔요!』

그만 임 참령은 목을 놓아 울었다. 이 선생도 같이 울어싸.

두 사람이 슬피 우는 울음 소리는 안팎에까지 들렸다. 차를 들고 나오던 선경은 웬일인지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가 도로 제 방으로 들어 와 그도 울었다.

왜 우나? 우는 사람들도 다 뜻을 몰랐다. 다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어서 운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그네의 울음 터지는 속을 알아 줄 순들 있으랴. 임 참령은 말없이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였다. 골목골목이 파수 보는 일본 병정과 조선 병정의 총장만 희미한 전등빛에 뻔 쩍어리고 겁이 나서 시민들은 나와다니지도 아니하는 모양 이다.

거의 집에까지 왔다가 임 참령은 인력거부에게 군부대신 집으로 끌라고 명하였다. 군부 대신은 마침 통감부에서 각 대신과 한국 군대 해산에 관한 의논을 하고 돌아와서 아직 군복도 벗지 아니하고 있다가 임 참령의 명함을 받고는 잠 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차마 거절은 못하였다.

서양식으로 차린 응접실에 들어 가 사오분이나 기다린 뒤 에 똥똥한 군부 대신이 훈장 단 육군 부장의 군복을 입고 나왔다. 임 참령의 흥분한 낮빛을 보고는 잠간 주저하는 듯 하더니 수인사를 하고 교의에 앉는다.

임 참령은 눈이 부시어 하는 듯한 군부 대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감께 좀 물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일간 군대를 해산 하신다지오?』하는 그 말소리는 심히 날카로왔다.

『응?』

하고 군부 대신은 어쩔 줄 모르는 듯이 놀라더니,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소?』

『네, 그것은 큰 비밀이겠지오. 군부 대신 부관으로 있는 나도 모르는 비밀이겠지오. 아마 대감 같으신 어른네와 일 본 사람인 차관들만 아는 비밀이겠지오.』

하고 임 참령의 어성은 점점 험하게 된다.

군부 대신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고 궐련 재만 연해 떨더니,

『응, 그렇지 않아도 내일 아침에는 임 참령에게 이야기하 려고 하였소......그 일이 작정되기는 오늘 저녁이니까......지 금 바로 통감부 회의를 끝내고 돌아 온 길이니, 언제 부관 게 말할 시간이 있었소? 그러니 노여지 마시오.』

『노여고 안 노여는 것이 문제가 이니지오.』

하고 임 참령은 좀 어성을 낮추어,

『그래 군대를 해산하자는 의견은 누가 먼저 제출했어 요?』

하고 물었다.

『그게야 통감이 했지요.』

『그러면 한국 정부에 있는 각 대신들은 다 어떠한 태도를 취했나요?......아무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나요?』

하고 임 참령은 심문하는 태도로 묻는다.

『첨에야 다 반대했지요......나도 반대하였고—.』

『그랬는데 처음에는 반대하고 나중에는 다 도장을 찍었나 요?』

하며 임 참령은 군부 대신을 노려본다.

『그럼 다들 찍는 도장을 내니 어떻게 안 찍으오?』

하고 군부 대신은 회유 한숨을 쉰다.

『누가 먼저 찍었나요?』

하고 임 참령은 더욱 날카롭게 묻는다.

『그건 알아 무엇하오? 낟 말하기도 싫소?』

하고 군부 대신은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 어쨌으나 대감도 찍기는 찍으셨구료? 군대를 해 산하자는 의안에 대감도 도장을 찍기는 찍으셨단 말씀이지 요?』

하고 임 참령의 j성은 다시 커 간다.

『글세 말이요, 남들이 다 찍는 것을 어떻게 안 찍으우?

또 군대를 해산하는 것도 아주 군대를 없애는 것이아니라, 장차 일본 모양으로 징병 제도를 쓰기까지 해산하잔 말이니 까. 그렇게 아주 못할 일도 아니지요.』

이 말에 임 참령의 가슴은 한번 크게 불룩하였다. 그러나 주먹을 불끈 쥐어 복받쳐 올라 오는 분을 참고 호주머니에 서 종이를 내어 테이블 위에 펴 놓으며,

『자, 대감도 여태껏 국록을 먹고살아 왔소이다. 대감만 아 니라 대감댁 에서는 오백년 내리 국록을 먹고 살아왔고 대 감도 지금 군부 대신으로 가슴에는 저렇게 번쩍하는 훈장까 지 찾으니, 나와 같은 시골 상놈으로 미관 말직에 있는 놈 보다는 애국심도 자별하겠고 대황제 페하께 대한 충성도 자 별할 것이요. 그런즉 이때가 바로 대감이 나라와 황상을 위 하여 한번 목숨을 내어 놓을 때외다.

하고 임 참령은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한층 더 어성을 높혀,

『그런즉 여기 있는 이 동원령과 선전 포고서에 도장을 찍 고 이 길로 나하고 둘이서 총리 대신 집에 가서 도장을 찍 히고 또 입내해서 페하의 결재를 받도록 합시다. 그래서 여 러 해 동안에 많은 국비를 허비해 가며 길러온 군대를 한번 나라를 위하여 보고나 맙시다.』

하였다.

군부 대신은 그 동원령이란 것과 선전 포고란 것을 한번 내려 읽고 몸을 떨었다. 숨이 막히고 눈이 둥글어지며, 다만 임 참령의 얼굴을 치어다볼 뿐이었다. 임 참령의 피 오른 눈과 바싹 다문 입에는 소름이 끼칠 듯이 무서운 웃음이 떠 돌았다.

이때에 응접실에 걸린 전화기가 따르르 운다. 군부 대신이 일어나려는 것을 임 참령이 먼저 일어나 수화기를 떼어 들 었다. 그것은 총리 대신에게서 온 것인데 통감이 부르니 곧 대궐로 들어오라, 어전 회의를 하겠다 하는 전화라 임 참령 은 그 말을 군부 대신에게 전하였다. 군부 대신이 다시 무 슨 전화를 걸려고 할 때에 임 참령은 칼을 빼어서 전화 줄 을 끊어 버렸다.

임 참령이 칼을 빼어 전화 줄을 끊는 바람에 방안에는 살 기가 동등하게 되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임 참령의 손은 무섭게 떨린다. 군 부 대신은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섰다. 조그 만 더하면,

『사람 살려 주우!』

하고 소리를 지를 것 같다.

임 참령은 돌 꽂고 자기 자리에 앉으며,

『대감 앉읍시오!』

한다.

군부 대신은 마치 최면술 걸린 사람이 시술자의 명령을 복 종하는 모양으로 무의식적으로 덜석 교의에 앉는다. 임 참 령은 몸을 뒤로 잦히며 힘있는 목소리로,

『대감! 나는 지금 부관의 자격으로 한국 군대의 전권을 잡은 군부 대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외다...... 대감은 이 자리 에서 내 요구대로 이 동원령과 선전 포고에 서명을 하기전 에는 한걸음도 문밖에 나서지를 못할 것이외다! 만일 대감 이 내 요구를 안 들으면 나는 이 칼로 먼저 대감을 죽이고 그다음에 내 죽으렵니다......대감! 군부 대선! 어서 서명하고 도장을 찍으시오!』

하고 명령하는 태도를 취한다. 임 참령의 숨소리는 점점 커가고 군부 대신의 고개는 점점 수그러진다.

한참 말이 없다.

『여보!』

하고 군부 대신은 고개를 들며,

『내 궐내에 들어 가서 형편을 보고 나올 것이니 여기기다 리고 있으우......임 참령의 말하는 뜻은 다 알아 들었지마는 이렇게 큰일을 그렇게 경솔히 경정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군부 대신은 한 활로를 찾은 듯이, 얼굴이 좀 펴지며 상관의 위엄을 차린다.

임 참령은 군부 대신의 속을 들여다 보는 듯이 이윽히 쳐 다보더니,

『그래 서명을 못하겠단 말이요? 아까 통감부에서 찍던 도 장을 여기서는 좀 못 찍는단 말이요?』

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그래 대감의 목에는 칼이 아니 들어간단 말이요? 나라를 팔아먹고 기름진 그 몸뚱에는 칼이 안 들어 갈줄 아오?』

하며, 임 참령은 벌떡 일어나 칼 자루에 손을 댄다.

군부 대신은 몸을 막는 듯이 한 팔로 앞을 가리우며 잘 돌 아 가지 않는 어조로,

『임 참령! 이게 무슨 일이요? 참으시오! 차 참으시오! 내 말을 드, 드, 들어요.』한다.

『시각이 바쁘다.』

하고 임 참령은 군부 대신의 곁으로 가서 한 손으로 그 왼 편 팔을 으서저라 하고 꽉 쥐이고, 한 손으로는 칼을 들어 머리를 칠 듯이 하며,

『여러 말 할 새기 없다. 여기 도장을 찍을 테냐? 안 찍을 테냐? 단마디로 대답을 해라!』

하고 소리를 지른다.

군부 대신은 한 손으로 테이블 다리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 다. 안에 따르르하는 소리가 나자 쿵쿵하고 사람 오는 소리 가 들린다.

임 참령은 테이블보를 들치고 그 속에 초인종이 있는 것을 보았다.

『예, 이 짐승 같은 놈아!』

하며, 임 참령은 들었던 군도로 군부 대신의 어깨를 내려 쳤다.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자 군부 대신은,

『아이고.』

소리를 지르고 마루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임 참령은,

『이 짐승 놈아!』

『이 매국적아!』

를 연해 외치며, 군부 대신의 옆구리를 차고 찌르고 하다 가 피 흐르는 칼을 테일블보에 싯어 칼집에 꽂고 문을 차고 뛰어 나갔다.

대문 밖에 기다리던 인력거를 타고 곧 전동 영문으로 몰았다.

영문에 파수 보던 병정들은 받들어 총의 경례로 임 창령을 맞아 들였다.

밤 열 한 시, 비는 줄줄 오기 시작하였는데 궐내에는 통감 과 각 대신이 모여 연해 시계를 치어다보며 군부 대신이 들 어오기를 기다린다.

웬일인가 아무리 군부 대신 집에 전화를 걸어도 나오지를 아니하여 마침내 사람을 보내려 할 때에 북서 경찰서장의 급보가 왔다—

『군부 대신은 임 참령과 회담 중에 누구에겐지 칼을 맞아 유혈이 낭자하였는데 아직 생명은 있으나 심히 위중하며, 임 참령은 어디로 갔는지 간 곳을 알 수 없다.』

하는 보고다.

일동은 놀랐다.

이 총리 대신은 일어로 이 뜻을 통감에게 말하였다.

통감은 잠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군부 대신을 죽인 것이 누구라고 생각들 하시오?』

하고 각 대신에게 묻는다.

대신들은 저마다 먼저 말하기를 싫어하는 듯이 서로마주 보고만 앉았다. 그중에 송 농상공부 대신이 입을 열어,

『군부 대신을 죽인 것이야 임 부관이지오. 임군이 어제 저녁에도 나한테 와서 비분 강개한 말을 하고 나를 위협하 는 말도 많이 하였으니까.......그 사람 아주 매서운 사람이 어!』

한다. 통감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무슨 생각을 깊이 하는 듯하더니 자기 비서관을 불러 귓속으로 무슨 말을 삼분 동 안이나 한다. 대신들은 연해 손짓을 하여가며 비서관에게 귓속을 하고 섰는 통감의 등을 바라보고 말없이 우두커니 앉았다.

비서관은 통감의 말을 다 듣고는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 듯이 두어 번 눈을 깜박깜박하고 달음질 치듯이 달아나간다.

통감은 한손을 가슴에 대고 자리에 돌아 와 총리 대신을 보고.

『할 수 없으니 이대로 어전 회의를 엽시다.』

한다. 총리 대신은,

『네!』

하고 앞장을 서서 눈으로 다른 대신들을 불러 가지고 통감 과 함께 방에서 나간다.

다른 대신들은 가기 싫은 데 나가는 모양으로 하나씩 둘씩 일어나서 하품을 하며 따라 나간다.

어건 회의에는 별일이 없었다. 다만 아까 통감부에서 결정 한 대로 내일 아침 조조에 군대를 해산하고 모든 방영을 일 본군이 차지하게 할 것, 군대를 해산하는 것은 아주 없애려 는 것이 아니요, 장차 일본 모양으로 징병제도를 쓸 때가지 임시로 해산한다는 뜻으로 조서를 내릴 것 등을 의논하여, 윤모가 대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어새를 찍고 각 대신이 정 식으로 인을 찍고 다만 그뿐이었다. 각 대신들은 통감이 나 가기를 기다려 자정이나 되어서 모두 집으로 나갔다.

자정이나 지나서 얼만지 알 수 없는 일본 병정이 종로와 각 영문 앞으로 거미줄 늘이듯 늘여 서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붙들어 성명을 묻고 몸 수험을 하였다 뚜 벅뚜벅하는 병정들의 발자취 소리에 길가 집에서는 모두 잠 을 깨어서 무슨 큰 변이나 나는가 하고 놀래어 귀들을 기울 였다.

오기 시작하던 비는 소나기로 지나가고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았는데 억만 장안 안에 아무 소리도 없이 다만 야순하는 일본 기병대의 말 발굽 소리만이 옛 서울의 고요함을 깨뜨 린다.

그러나 반 공중에 서린 동등한 살기, 지금 장안 어느 구석 에서 온 장안을 무찌를 길다란 화승 끝에 불이 피는고?

밤은 간다.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전동 영문 제삼 중대장 실에는 임 참령을 중심으로 장교 사오인이 발으 세워 무슨 의논을 한다.

닭이 또 운다.

짧은 여름밤은 벌써 새려 한다.

아침 햇빛이 장안의 넓은 안개를 뚫을 때쯤 하여 종로에서 소총 소리가 났다. 전동 영문을 점령하려 오는 일본 군대를 향하여 영문내에서 먼저 사격을 개시하므로 시가전이 시작 된 것이다. 임 참령이 군부 대신을 죽이고 달아났단 말을 들은 경무청과 일본 헌병대엣 밤새도록 장안 안에 그럴 듯 한 곳을 수색하였으나, 차짖 못하였으므로 언ㄴ 영문에 숨 은 줄은 대강 짐작하였었다. 그러나 설마 무력으로 저항이 야 하랴 하고 다만 도망하는 것과 각 영문에 연락하는 것이 나 막기 위하여 파수만 늘어 놓았다가 전동 영문의 방향을 보고는 일본 측에서도 깜짝 놀래었다.

전동 어구에 일본 병정 칠팔인이 총에 맞아 넘어지고 종로 에는 어디서 나온지 모르는 속사포 두 틀이 놓였다. 일본 군대는 몇 번 전동 영문을 gi하고 돌격하였으나 몇 명씩 죽 기만 하고 물러나왔다. 마침내 속사포가 열렸다. 또드락또드 락 콩 볶는 소리가 나며 수없는 탄환이 전동 영문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 갔다.

이윽고 영문 문이 열리며 총창에 삼보끈 졸라매고 이화표 붙인 병정들이 납함 소리를 치며 종로를 향하고 달려 나왔 다. 그네의 나오는 양이 종로에 놓인 속사포를 점령하려는 모양과 같았으나 빗발같이 쏟아지는 속사포 알에 전동 어구 를 나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돌격으로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안 그네들은 종로 길가로 벌 여 있는 지붕으로 산병선을 늘였다. 그래서 지붕위에 숨어 쏘는 탄환에 일본 군인도 적지 않게 죽었다.

이러한 단병전이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전동 영문에서는 최후의 결사대가 종로의 숙사포를 점령하려고 밀려 나왔다.

『우야!』

하고 납함하는 선두에 선 것은 임 참령이었다. 전동 어구 를 쑥 나서자 임 참령은 탄환에 맞았는지 픽 쓰러지더니 다 시 일어나 한손에 군도를 한손에는 태극기를 두르면서 서너 걸음 더 나오다가 한번 껑충 뛰고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뒤를 따르던 얼마 아니 되는 병정들도 거의 다 쓰러지고 다 만 지붕 위 산병선에서만 이따금 총소리가 났다.

마침내 일본 군대는 돌격을 부러 전동 영문을 점령하였다.

총에 넘어진 두 민족의 시체는 그 날 밤까지에야 겨우 다 치웠다. 임 참령의 시체도 그 통에 함께 섞여 어디가 묻혔 는지 지금까지 아는 이가 없다. 다만 그 날에 죽은 조선 군 인의 시체를 수구문 밖과 애오개 넘어에 묻었다니, 아마 임 참령의 시체도 그중 어느 곳에 묻혀을 것이다.

이날에 서소문안 영문에서도 싸움이 일어나 피차에 수십명 이 상하고 대대장 박 참령은 자기의 군도로 자살하여 버렸다.

밤에는 일본 병정과 헌병이 장안 만호를 모조리 수색하여 병정인 듯한 혐의 있는 자는 모조리 잡아내었고, 혹은 동대 문 밖으로 혹은 모화관으로 도망한 군인은 삼십명 가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시위대 기타 영문에서는 병정들까지도 모두 몇 백냥씩 상금을 타 가지고 무사히 해산하였고 고급 장교들은 일본 군대의 상당한 대우를 받아 그 군복을 입고 이화표 자리에 별표를 붙이고 다니게 되었다.

한국의 군대 해산은 이리하여 임 참령을 중심으로 한 비극 으로 끝이 났다.

군부 대신이 칼을 맞았다. 군대가 해산이 되었다. 종로에서 싸움이 나싸. 이 모든 사건은 전국 인심을 끓여 이로부터 모든 비극이 뒤를 대어 일어나게 되었다.

종로 사건이 있는 이튿날 이 선생은 돌연히 가택 수색을 당하고 용산 일본 헌병대에 구금을 당하였다. 포박을 한 것 은 아니나, 용산 헌병대 대위 하나가 헌병을 다섯을 거느리 고 와서 이 선생을 데려다가 헌병대의 장교 숙직실에 가둔 것이외다.

잡혀 간 날 저녁에 이 선생은 헌병 대장에게 첫 번 신문을 받았다. 대장은 위선 이 선생의 이름을 들은지 오랜 것과 항상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이변 군대 해산 에 대한 감상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이 선생은 이윽히 생각 하더니,

『나는 그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하고 대답을 거절하였다.

헌병 대장은 잠간 눈썹을 움직이고 낯을 붉히더니 다시 웃 는 낯을 지으며,

『대답 아니하신다면 하릴없지오.』

하고 다시,

『그러면 이번 임 참령의 한 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 참령은 선생과 여러 해 동지요, 또 바로 그저께 저녁에 임 참령이 선생댁을 방문한 줄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런즉 임 참령이 자기의 계획을 먼저 선생께 말씀하였을 것이 아 닙니까?』

하고 선생의 눈을 쳐다본다.

선생은 전과 같이 냉담한 태도와 목소리로,

『미안하지마는 나는 당신의 물으시는 말에 대하여는 대답 할 필요도 없고, 또 대답할 의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헌병 대장은 더 참을 수 없는 모양으로 교의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저 어째서 대답을 못한단 말이야? 나마이끼나!』

하고 성을 낸다.

그래도 선생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헌병 대장은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팔팔 뛰었다. 「빠가!」

「나마이끼나!」하는 소리가 연발하였다. 혹 목소리를 낮추 고 부드러운 말로 몇 가지 말을 더 물었으나 선생은 다만,

『대답할 필요가 없소.』

한 마디로 거절하여 버렸다.

헌병 대장은 몇 번이나 선생을 때리려고 대어 들었다. 마 침내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이 모양으로 두 시간 동안이나 애를 태다가 하릴없이 심문 이 끝나서 이 선생은 방으로 돌아 왔다. 비록 소리는 내었 으나 이 선생의 두 뺨의 근육도 연해 분함으로 경련하였다.

헌병 대장은 이번 심문에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분 명히 이번 사건의 괴수는 이 하목인 듯하건마는 아무증거도 없고 자백도 없다. 어제 저녁부터 삼십여 명을 붙들어다가 심문하였으나 거기서도 이 선생이 이 사건의 주동자라는 공 초는 얻지 못하였다.

헌병 대장은 어제부터 밤을 새우고 많은 사람의 심문을 하 기에 심히 피곤하였고 피곤할수록 신경은 더욱 과민하게 되 었다.

헌병 대장은 도저히 이 선생에게서 아무 말도 얻어들을 수 없을 줄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날 밤새도록 다른 삼십여 명 사람들을 얼려 가며, 주리를 하여가며 이 선생에 관한 말을 끌어 내려 하였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 선생은 사흘 동안에 여섯 번 심문을 당하고 마침내 나 흘째 되는 날 사령부로 넘기어싸.

사령부에서는 장곡천 사령관이 몸소 두어 번 만났으나, 선 생은 다만 외국 고간에게 대한 상당한 경의를 표할 뿐이요, 시국에 관하여서는 한 마디로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사령 부에 넘어간 다음 다음 날 통감ㅇㄴ 비서관을 선생의 감금 시로 보내어 정식으로 면회하기를 청하였다.

통감이 한국의 한 평민에게 먼저 정식으로 면횔ㄹ 청한다 함은 실로 파천황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에는 이유 가 있다— 군대 해산 날 종로와 서소문 안에서 변이 난 것 외에 각지 방 진위대에서도 각각 적으나 크나 한두 가지 소동이 있었 다. 그 중에도 참령 유 진석이 대대장으로 있던 강화 진위 대에서는 꽤 대규모적으로 소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모 든 소란이 거의 같은 모양으로 일어난 것이 통감부의 주목 을 끈 이유라 아무리 하여도 이 모든 소란은 한사람의 계획 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렇게 넓게 세력 범위를 가진 이가 있다 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 항목일 것이다.

이렇게 통감부에서는 생각하였다.

더욱 통감부를 놀라게 한 것은 강화대와 평양대에서 소란 이 일어난 것은 도리어 그 대대장들이 모두 무사하게 진무 하였을뿐더러 병정들은 모두 흩어 보낼 때에 극히 감동적이 요, 비창한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병정들이 각기 무기고를 깨뜨리고 총을 들고 나서서 병영을 인계하러 온 일본 수비 대와 대항하려는 것을 대대장이 나서서 눈물로써 말리고 영 문 마당에 병정들을 모아 세우고 비창한 일장의 훈시를 한 후에 마지막으로 태극기와 군기에 대하여 받들어 총의 최후 경례를 행하고 마지막으로 국가와 군가를 부르고 마지막으 로 만세를 부르고 그리고 장교나 병졸이나 그만 감격을 못 이기어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내어 통곡을 하고 그리고는 마치 정든 가족들이 난리에 이별하는 모양으로 흩어졌다.

그 중에도 강화대의 서로 이별하던 광경은 너무도 비창하여 그것을 목격한 성중 백성들은 물론이요, 그 후에 이야기를 들은 전도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것뿐으로 그렇게 통감부에서 경동할 리는 없지마는 해산 한 이튿날 각 병영에서는 무서운 사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러하다.

무기고에 있는 총기의 중요한 부분이 모두 파괴된 것과, 무기가 혹은 반수나 혹은 삼분지 일이나 없어진 것과 탈환 과 화약도 문부에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적은 것이 발견되 었다.

이 무기와 탄약은 어디로 갔나? 누가 무슨 목적으로 옮긴 것인가 함이 당시 통감부의 경동한 중요한 이유다.

로 하여 여러 중요한 한국 장교가 이 선생의 뒤를 이어 경 성으로 붙들러 왔으나, 그네도 혹은 호령을 하거나 혹은 잠 자코 있거나 할 뿐이요, 아무리 심문을 하여도 알아들을 만 한 대답을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 모든 책임을 이 선생에게 지우려 하였으나 통감 부에 들어 온 보고를 보건대, 이선생이 두령이 된 백령회원 은 삼만명 이사이요, 시위대를 폐한 각 영문의 장교와 사회 에 다소간 이름 있는 사람은 모조리 백령회원이요, 일설에 는 각처에 출몰하는 의병들도 다 백령회의 사업의 일부분이 라 한다.

백령회란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 목적을 어떤 계획 과 수단으로 달하려는 것인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백령회가 무서웠다. 당시 경찰이난 헌병의 눈에는 세상 사 람이 모두 백령회원 같고 세상에 일어나느 좀 험함 사건은 다 배령회원의 소위와 같이 보였다.

그러므로 통감부에서 취할 정책은 둘 밖에 없었다—백령회 를 아주 두들겨 부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와 화친하거 나.

이 두 가지 길에 관하여 통감부와 군사령부에서는 의논이 불일하였다. 혹은 고압 수단을 써서 백령회 일파를 악수하여 만사를 원만히 해결하자 하였다. 군사령부를 중 심으로 한 무관 측에서는 첫 의견을 주장하고, 통감을 머리 로 하는 문관 측에서는 둘째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마 침내 통감의 의견이 선 것이다.

통감의 주장은 이것이다—한국을 통치하려면 한국에 가장 유력한 계급과 악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진회는 그 선 언서를 발표함으로부터 전국의 인심을 잃어 버렸고, 결하여 일진회원의 거의 전부를 점령한 동학당이 천도교도라는 이 름으로 분립하게 되어, 일진회라는 것은 이 용구. 송 병준 등 두목이 있을 따름이요, 아무 실력이 없다. 다음에 남은 것은 헌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계급과 백령회 뿐이다.

그런데 양반 계급이란 거소 지금에 와서는 일본의 정책에 대하여 조금도 반항할 힘이없고 경하여 군대까지 해산하여 버렸은 즉, 더우기 그네의 수족을 끊은 셈이며, 게다가 그네 의 공명심과 시기심을 이용하면 언제나 부리고 싶은 대로 부릴 수 있다. 그런데 오직 백령회만은 수만의 회원을 가졌 을 뿐더러, 그네는 모두 명치 유신 시대의 지사와 같은 무 서운 결심을 가진이들인 즉, 이 사람들과 악수하는 것이 한 국을 통치하여 가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함이다.

그런데 「백일파」라는 별명을 듣는 백령회가 통감부와 악 수를 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는 통감은 자기 의 수완을 자신하였다. 어찌하였으나 백령회는 두령되는 이 항목을 한번 만나 보자. 만나서 동양의 대세와 한국의 장래 를 토론하여 보자. 그러하노라면 그의 인물여하와 계획 여 하도 알 것이다. 알아보아서 인물도 그럴 듯하고 주의와 계 획도 접근하거든 악수를 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정책을 취할 것이다—이것이 통감이 이 선생을 회견하 게 된 동기다.

선생은 통감의 비서관에게 회견하자는 말을 듣고 잠간 생 각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선생이 회견하기를 주저한 것 은 만나더라도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을 안 까닭이다. 통감 의 생각과 선생 자신의 생각에 일치점이 없을 것을 안 까닭 이다. 정당하게 생각하면 선생은 통감을 회견하지 않는 것 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선생에겐ㄴ 그것을 거절할 생각도 아 니 나서 그리 마음에도 없느 회견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군사령부 정문으로 마차 하나가 들어 와서 선생 을 모셔 갔다. 선생의 마차에 오를 때에는 군사령관까지도 문간까지 나와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다.

남산 밑 솔밭 기슭에 있는 통감 관저의 정문에는 병정이 총을 메고 파수를 볼 뿐이요, 그 넓은 구내에는 인적도 없 다. 다만 정문에서 한참 도안이나 들어가서 바로 문밖에 정 복 순사 하나가 전등 빛 속으로 거닐 따름이었다.

비서관은 먼저 내려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으로서 연미복 입은 사람이 나오더니, 공손히 문을 여고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응접실을 가리킨다.

응접실 천정에는 커단 선풍기가 소리 없이 슬슬 돌아가고 그럴 때마다 레이스 문장이 가볍게 펄렁펄렁한다.

『잠간 기다리십시오.』

하고 젊고 얌전하게 생긴 비서관은 안으로 들어간다. 선생 은 맞은편 벽에 걸린, 풍랑 이는 바다에 돛단 배 하나가 부 대끼는 그림을 무심히 바라보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아아, 풍파 높은 가 없는 바다에 부대끼는 외로운 배!』

하고 선생은 문득 비감이 생겼다.

나라는 장차 넘어가려 한다. 이 한 몸이 이 한 나라를 버 티지 못할 줄을 잘 안다. 버티지 못할 줄을 잘 알면서도 버 티지 아니할 수 없는 이 신세! 선생은 휘유하고 한숨을 쉬 었다.

통감은 크고 강한 나라의 대표자다. 그의 뉘에는 무서운 위력을 가진 육해군이 있다. 그리고 그의 부하에는 수없는 힘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운명을 좌우 하는 권력을 가졌다. 나는 무엇인고? 일개 서생이다! 가진 것이 있다 하면 뜨거운 정성과 육천명 백령회원과 오백명 중학생과 이것뿐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랴.

육천명 백령회원은 육만명이 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오백명 중학생은 적어도 오백명 전문가가 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아, 하늘아! 십년만 다오! 이제부터 십년만 다 오! 십년이면 십만의 백령회원과 일만의 전문가를 얻을 것 이다. 그때에 내 나라의 운명을 내 손으로 좌우할 것이다.

그러나 십년! 십년의 세월이 어려울 듯하다. 나라의 운명은 시시각각으로 줄어들어 갈 뿐이다.

며칠 동안에 심히 피로한 선생의 정신은 무슨 무거운 것으 로 내려 누르는 듯이 괴로웠다.

나는 지금 내 나라의 운명을 한 손에 쥐인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하더라도 지금 그의 손에서 내 나라의 운명을 가져올 수 없는 처지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통감과 회견하는 것이 심히 불쾌하였다.

이때에 안으로 통한 응접실 문이 가만히 열리며 수염 희고 중키나 되는 뚱뚱한 노인이 예사 양복을 입고 들어오고 그 뒤에 젊은 사람 하나가 따라 들어온다. 이는 통역관이다.

선생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통감은 빙그레 웃는 낯으로 선 생 곁으로 오더니, 손을 내밀며 영어로 초면의 인사를 한다.

선생도 통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기쁘다는 뜻을 영어로 말하였다.

두 사람은 초록색 상보를 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고 통역관은 테이블 한편 모퉁이에 앉았다. 차와 과자가 나오고 담배를 권하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통감은 이 선생의 말을 들은지 오랜 것과, 한번 만나 이야 기하려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던 것이 유감이란 것과, 작년 에 미국 사람이 선생을 칭찬하고 왜 교육을 선생에게 맡기 지 않느냐 하더란 말과, 이번에 용산 헌병 대장의 실수로 선생을 괴롭게 하여 미안하다는 것을 혼자 고개를 끄덕여 가며 이야기를 한 뒤에, 통감은 한층 어성을 가다듬고 몸을 테이블에 기대어 선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래 당신께서는 오늘날 동양 대세를 어떻게 보십니 까?』

하고 선생에게 묻는다.

선생은,

『나는 동양 대세를 염두에 둘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생 각하는 것은 오직 내 나라 일뿐이외다.』

한다. 통감은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그러나 나는 한국 문제와 동양 평화는 다만 밀접한 관계 가 있을 뿐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 로 한국 문제를 동양 대세와 떼어서 생각하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선생의 눈을 바라본다.

선생은 통역관이 이 말을 통하는 것을 귀를 기울이고 듣더 니 고개를 바르고 통감을 바라보며,

『아마 그렇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일 밖에 다 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고 아가 말을 반복하였다.

통감은 아까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하시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러분 한국 지사가 한국 일 이욋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뜻을 잘 이해합니 다......그런 잠간 나를 위하여 동양 대세를 생각하신다 하며 는 어떻게 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 침일까요?......이것은 내가 항상 생각하는 관게상 당신같이 식견이 높은 이를 대하면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것이외 다.』

한다. 선생은 통감의 말이 진정인 것을 알아 들었다. 그러 고 남이 진정으로 물을 때에 내가 진정으로 대답해야 하겠 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진실로 나는 내 나라 일 이욋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 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하는 대답은 내가 지금 생각하여 낸 대답에 지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동 양평화를 안보하고 안보치 못하는 것은 오직 일본 정치가의 손에 달렸다고 봅니다—그 중에도 한국의 운명을 손에 잡은 각하의 손에 달렸다고 봅니다—각하와 각하의 나라의 정치가 들이 헛된 공명적 야심을 가지고 침략적 정책을 쓰시면 동 양의 평화는 마침내 개어져서 한국과 청국이 그 해를 받을 뿐더러 각하의 나라이 또한 고립적 지위에 서게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고 각하와 및 각하의 나라의 정치가들이 공정 한 양심으로 동양의 선각자의 지위에서 성실히 동양을 지도 하면 동양의 평화는 안보 되리라고 믿습니다—일언이 폐지하 던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동양 제 민족의 신뢰를 얻고 못 얻는데 달렸다고 믿습니다』

하였다.

통감은 한 마디로 놓치지 아니하려는 듯이 눈을 감고 통역 관의 번역하는 말을 듣더니 손으로 책상을 턱 치며,

『옳은 말씀이외다! 정론이외다!』

하고 그 말을 한번 더 생각하는 듯이 말없이 여러 번 고개 만 끄덕이더니,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나 다른 일본 정치가 가 공정한 양심과 성실한 태도로도 힘을 쓴다 하더라도 만 일 동양 제 민족이 신뢰를 아니하면 어찌합니까......예를 들 어 말하면, 지금도 한국 지사들 중에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 는 경향이 있지 아니합니까?......그러면 어찌합니까?』

한다.

『그것은.』

하고 선생은 좀 말하기 어려운 듯이 잠간 주저하더니,

『마땅히 신뢰할 만한 이를 신뢰하지 않은 것은 신뢰아니 하는 이의 책임이겠지요. 그러나 일로 전쟁 당시에 한국 구 민은 거의 일치하여 일본을 신임하였습니다. 나는 그때에 불행히 외국에 있었거니와, 당시 사정을 들건덴, 한국 인민 은 일치하여 일본의 승리를 빌었고 승리를 기뻐하였다 합니 다. 봉천 함락과 어순 함락이 있었을 때에 서울은 물론 이 어니와 전국 각지에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는 열성의 축하식 이 있었다 하고, 또 한국 정부와 인민은 일본군에 줄 수 있 는 편의를 다 주었다 합니다. 인민은 자원하여 경성. 의주 간의 군용 철도 부설에 노역하였읍니다—그처럼 한국은 일본 을 신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호 조약이 발표되고 서울에 통감부가 되는 날 한국 인민의 신임하는 맘은 영영 일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각하의 말을 빌건댄, 이리하여 동양 평 화에는 회복하지 못할 틈이 나고 만 것이외다—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말을 끝는 선생의 어조는 자못 흥분하였다.

통감은 이 말을 듣는 동안에 혹은 눈을 감기도 하고, 혹은 고개를 약간 돌리기도 하고, 혹은 끄덕어리기도 하더니, 말 이 끝나자 크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스크리임이 들어온다.

한참 동안 말이 끊혔다. 선풍기 돌아가는 둔한 소리가 들 리고 마당의 벌레 소리가 철망을 대인 창을 통하여 들어온 다. 아이스크리임을 먹노라고 숙인 통감의 머리는 받아 빠 져서 번쩍번쩍한다. 아이스크리임을 먹고 나서는 담배를 피 우며 잠간 잡담을 하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흥분하였던 신 경을 얼마큼 쉬이게 하였다. 통감은 만족한 듯이 몸을 뒤로 기대고 여송연 연기를 공중으로 올려 보내며 아까보다도 더 친근하게 될 듯한 어조로,

『동양 평화에 관한 의견은 감복합니다. 진실로 명철한 정 치가의 의견이시외다. 나도 불초하지마는 그러한 생각을—그 러한 정성은 가지고 나가려고 합니다.』

하고 특별히 중요한 말을 하려고 몸과 맘에 준비를 하는 듯이 여송연을 재떨이에 놓고 몸의 자세를 바로 잡고 선생 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화두를 돌려,

『그런데 인제는 당면의 문제를 토론하시지요—당신께서는 한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생각하십니까? 경영하시는 일이라든지 주장하시는 의견은 간접으로 들었지마는 한번 면대해서 듣기를 원했습니다.』

한다. 선생은 좀 피곤한 듯이 눈을 반쯤 감고 교의 뒤에 기대어 앉았더니, 가만히 몸을 바로 일으키며,

『한국 문제의 해결에 무슨 특별한 계책이 있다고 생각하 지 아니합니다. 어느 나라가 어둡다가 밝아지려 할 때에 작 다가 커지려 할 때에 반드시 밟아야 할 길을 밟을 수 밖에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귀국이 명치 유신 에 밟은 경로를 밟는 게지요—교육으로 민지를 계발하고 산 업으로 민력을 함양하고, 이리하는 길 밖에 더 있습니까?』

하고 말ㅇㄹ 끊었다.

통감은 아까 모양으로 눈을 내려 감고 고개를 끄덕끄덕하 더니, 다시 여송연을 들어 한 모금 빨며,

『그것이 정경 대도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그러한 정경대 도를 아는 이가—정치가까지도— 드물지요.』

하고 이윽고 말이 없다가,

『그런데 내가 한국을 위해서 하여 드릴 일이 무엇일까요?

나는 불초하지마는 성심 성의로 한국을 위하여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리라는 생각은 간결해요. 또 지 금까지도—벌써 삼년이 됩니다마는—내 깐에는 그러한 생각 으로 전력을 다하노라고 했지요......그것은 인정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크게 볼 만한 결과는 없으니 부끄러운 일 이지요.』하고 빙그레 웃는다. 그의 넓은 얼굴에 많은 주름 이 잡힌다.

선생은 이윽히 생각하다가,

『나도 각하의 성의를 믿습니다. 각하의 높은 인격을 믿습 니다. 큰 성의와 높은 인격이 아니고야 어떻게 각하의 나라 를 저렇게 영과 있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각하가 한국 을 위하는 맘이 있는 줄도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각하에게 는 한국을 위하여 일하시는데 가장 큰 흠점이 있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랴. 나는 한없는 일개 서 생이다.〉 하고 더 말하지 아니하리라. 인제는 돌아 가리라 하였다.

그때에 통감은 고개를 들며,

『지금 하신 말씀은 잘 들었읍니다—모두 옳은 말씀이외다.

그러나 한 마디 내가 성언할 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아 무 영토적 야심이 없다는 것이외다. 일본의 참뜻은 오직 동 양의 평활ㄹ 안보하자. 한국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지 하 는 데 있다 함이외다. 이것은 우리 천황페하의 성지니까 나 같은 관리도 어디까지든지 이 성지를 몸 받아서 전력을 다 할 뿐이외다—그런데 불행히 한국 인사들은 이 뜻을 바로 알 아 주지 않는 모양이외다—그것이 유감이외다.』

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영토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언 부언한다. 그러다가 통감은 선생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고 무슨 반향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선생은 잠잠하였다.

마침내 통감도 선생에게서 많은 말이 나오지 아니할 줄을 알아 차리고 다시 담배를 권하며,

『오늘은 서로 가려움 없는 의견 교환을 하여서 심히 유쾌 합니다. 나는 한국의 지사와 이러한 의견 교환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외다.』

하고 담배를 붙여 한 모금을 피우며,

『그런데 최후에 한 마디 대답하시기를 원하는 거시 있습 니다. 당신께서 내게 대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무론 국사에 관하여 말씀이지요—나는 당신께서 숨기지 않는 인 줄을 믿습니다.』

한다. 선생은 이 의외 질문에 잠시 놀랬다. 그래서 이윽히 생각하다가,

『예, 각하께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각하가 이 원을 꼭 들어 주시기를 요구합니다.......이제로부터 십년 동안만 한국의 현상을 더 변하지 말고 우리에게 자유로 활동할 기 회를 달라 함이외다. 다시 말씀하거니와, 십년동안 우리로 하여금 자립할 실력을 기를 기회를 달라 함이외다.』

하였다. 이 말에 통감은

『무론 자유로 활동하실 수 있지요. 실례 말씀일는지 모르 거니와, 한국 사람들은 음모와 쓸데없는 당쟁으로 다만 국 가의 질서를 문란하는지라, 그러는 것이지 만일 당신 같은 이가 정당한 길로 힘을 쓰신다면, 그것은 쌍수를 들어 환영 하는 바외다.』

하고 유쾌한 듯이 웃는다.

선생은 정색하고,

『만일 십년 동안만 현상을 변치 않고 우리에게 활동의 자 유를 주신다 하면 우리에게는 만족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 세에 더 큰 변화가 있을 것을 두려워합니다—한걸음 더 내키 는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통감은 결코 일부에 전하는 같이 합병이나 연방을 하는 없 다고 당언하였다. 그리고 이후도 가끔 만나 의견을 교환할 기회를 만들자는 통감의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선생은 통 감을 작별하였다. 통감은 응접실문밖에서 아까 모양으로 선 생과 악수를 하고 영어로 잘가란 말과 또 만나기를 원한다 는 말을 고 작별하였다. 선생을 태운 마차는 군사령부도 가 지 아니하고 바로 선생의 숙소인 선생의 집 대문 앞에 머물 렀다.

선경은 눈물을 흘리며 선생의 손에 매어 달렸다.

세월은 흘렀다. 그는 결코 가만히 흐르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장난을 하면서 흐른다. 더욱이 당시 우리 나라에서 흐 르던 세월은 수없는 비극의 자취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모 든 비극을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후에 만일 좋 은 기회가 있으면 어떠한 정성 있는 역사가가 이때의 여러 가지 슬픈 기록을 세상에 내놓을 때나 있을까. 아직은 그것 이 나올 때가 아니다.

이 동안에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 충청도 방면으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네는 다 떨어지고 때묻는 조선 옷에 흑은 신식 총을 메고 혹은 화승 총을 메고 몇 백명씩 몇 백 명씩 떼를 지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골에서 저 골로 돌 아 다녔다. 그러면 훈련 있고 규를 있고 새로운 무기를 가 진 일본 군대와 조선인 헌병 보조원으로 된 폭도 토벌대가 그네의 뒤를 따랐다. 그네는 한번 싸우고는 쫓기고 두 번 싸우고는 또 쫓기어 몇 백명이던 것이 몇 십명으로 줄고 몇 십명이던 것이 단 몇 명으로 줄어 마침내 어느 좁은 골목에 서 일본 군대의 손에 포로가 될 때에는 무덤 속에서 뛰어나 는 송장과 같이 얼굴은 초췌하고 머리는 너슬너슬하고 의복 은 검고 남루하였다. 그 중에 더러는 소나무에 비끌어 매어 총 맞아 주곡, 두목이 라 할 만한 이는 그 명성을 따라 혹은 지방에서 혹은 서울 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다행히 포로도 아니 된 이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 짐승을 잡아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하여 입고 살았으며, 혹은 탄약이 없거나 세상 소문을 듣고 싶으면 삼삼나온 듯한 사 람이 야릇한 가죽 옷을 입고 껑충껑충 뛰어들어오면 누구나 무서운 마음과 불쌍한 마음이 아니 난 사람이 없었고 헌병 들도 이 사람들을 보면, 아무쪼록 맞서지 않고 피하였다. 황 해도에도 홍수원. 금천 둥지에는 가끔 이러한 이상한 사람 들이 다녀 갔다고 한다.

이렇게 산속에 들어 간 사람이 몇 백명인지 몇 천명인지 그것은 아는 자 없다. 그중에서 더러는 산을 타서 백두산을 넘어 만주 지경으로 들어 갔을 것이요, 더러는 슬슬 내려 와 혹은 함경도. 강원도 같은 교통 불편한 지방의 어부도 되고 노동자도 되었을 것이요, 그 나머지는 혹은 얼어 죽고 혹은 굶어 죽고 또 혹은 병들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서백 리아나 만주로 돌아 다니노라면 가끔 귓바퀴 떨어진 사람 눈이 얼어 and틀어진 사람 손발가락 몽탕 떨어진 사람을 만 날 것이다. 그네에게 왜 그런 연유를 물으면, 모두 산속에서 얼어 빠져서 그리된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네 각 개인의 체력이 어떠한지 그것은 도저히 알 수 없 는 일이다. 다만 그중에 해산 받은 군인들이 많이 중심인물 이 되었던 것과 군졸으 대부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 노동 계 급에 속한 백성이던 것은 사실이다. 포수들, 산속에서 농사 하던 젊은 농군들, 금전군들, 어부들 어쨌든지 이러한 계급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군대가 해산되고 한창 《대한 매일 신보》에 의병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날 적에 백령회원 중에서도 소장한 청년들이 많이 간부들을 졸랐다. 청년들뿐 아니라, 간부 중에서도 이 기회를 타서 한번 일어나기를 주장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 나 선생은 처으메 정한 뜻으 존중할 것을 말하고 매양 이것 을 눌렀다. 어떤이는 오적 칠적을 모두 죽여 버린다고 결사 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백령회 전체의 통일은 여전히 보 전하여 왔다.

그러나 인심은 더욱 불안하여져서 산간 벽촌에까지도 「나 가 싸워야 한다」「다 나가 죽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모두 앉아 죽을 것이다」하는 풍설 같은 소리가 들았다. 누 구와 싸울 것인지 어떻게 사울 것인지도 모르고 다만 나가 싸워야 된다고 서로 말하게 되었다. 서울이나 평양이나 그 러한 대처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이제 공부는 하여 무엇해?」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 갔다. 가서는 학교에서 얻어 들은 비분 강개한 정치 연설을 하고 슬픈 창가를 부르 고 병식 체조를 가르쳐 저녁마다 농민들을 무섭게 하고 울 게 하였다.

처처에 여남은씩 스무남은씩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 혹은 피를 마시고 혹은 손가락을 끊고 혹은 천지 신명께 맹세를 하여 수없는 도원 결의가 생겼다.

이리하여 호미 자루를 들고 가는 농촌까지도 비분한 노래 를 부르게 되어 마치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무슨 변이 나는 듯하였다.

더욱이 전국에서 총이란 총은 말할 것도 없고 식칼 좀 기 름한 것까지도 모조리 걷어 들일 때에

『옳다. 인제는 죽을 날이 왔구나.』

하고 노인들까지도 세상 마지막 날이 온 것을 당언하여싸.

그래서 정감록에 있는 심 승지르 찾아서 혹은 경사. 전라도 로 피난을 가고 혹은 서북간도로 피난을 가는 이가 날로 늘 고, 난 날 때에도 산에 들어 가 죽지 아니할 준비로 벽곡 공부를 하는 이는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다가 어디서 무슨 큰소리만 나도 옳다 죽었구나 하고 밥숟가락을 떨어뜨릴이 만큼 밳겅들의 신경은 병적으로 예민하였졌다. 대체 인심이 이렇게도 불온하게 끓어 오르는 일이 다시도 있을까? 그것 은 도저히 필설로 허용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공 기 중에서 맘이 아니흔들릴 사람이 있으랴? 마침내 백령회 내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그래서 금진파와 완진파로 갈 리려는 조짐이 보였다.「이때가 어느 때라고 십년 후 준비 를 하랴.」하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요, 「지금 일어난 대 야 닭의 알로 바위를 겨누는 것이니, 급할수록 준비를 급히 해야한다」는 것이 완진파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선 생도 양파의 주장을 절충하도록 힘쓰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만주에 넓은 땅을 장만하고 거기다가 사관학교를 세워 군인과 정치 운동에 쓸 인물을 양성하자는 계획이 서 게 되었다. 이 계획으로 겨우 급진. 완진 양파의 분열을 막 았다.

이 계획이 서자 수없는 청년들은 만주를 향하고 떠났다.

그네는,

『간다, 간다.』

하는 비창한 노래를 부르며 강을 건넜다. 그네는 마치 모 두 건국 영웅과 같았다. 아무 능력도 지식도 없는 무명한 청년들이언마는, 다 바다와 같이 크나큰 뜻을 품고 어딘지 도 모르는 만주로 둘씩 세씩 국경을 넘어갔다. 백산 학교 학생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이들은 모두 마음이 들먹거려 공 부하는 것이 맘에도 들어 가지 아니하고, 모여만 앉으면 만 주 무관 학교로 달아날 공론들을 하였고 그중에 가장 청년 사오인은 선생께 말씀도 아니하고 만주로 달아나 버렸다.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군인되는 것만이 나라 일이 아니요, 국가에 필요한 모든 것 중에 한 가지씩을 맡을 힘을 기르는 것이 나라 일이 요.』

하고 훈계하였으나, 선생의 힘있는 훈계도 시대의 조류를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선생과 백령회 간부중 에 최 선생, 전 목사, 김 윤목 같은 몇 두목을 제하고는 거 의 모든 지사들이 청년을 선동하므로 불과 삼개월간에 천여 명 청년이 아무 계획도 없이 직업과 공부를 버리고 만주로 건너 갔다. 이렇게 만주로 나간 청년들은 얼마 아니하여 합 병이 되고 백령회 사업이 실패됨을 따라 (백령회 사업이 실 패된 까닭은 후에 말함)전혀 갈 바를 잃고 만주와 서백리아 로 표류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이는 동포가 많이 사는 촌락에 들어 가 학교도 세우고 농민을 지도하는 사업 도 하고, 어떤 이는 혹은 이발사 혹은 빨래질, 혹은 농사, 혹은 금덤군, 혹은 아편 장수 이 모양으로 의식을 버는 직 업을 삼고, 어떤 이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정처 없이 돌아 다니며 언제 돌아 올지 모를 시기를 기다렸다.

지금 만주와 서백리아에 다니는 삼십세 내지 사십세된 사 람들은 이러하여 나간 사람이다.

전국 민심의 이러한 동요, 그중에 철석같이 굳게 약속하였 던 백령회원들의 이러한 동요는 선생의 가슴에 심한 아픔을 주었다.

『글세, 어쩌자고 이렇게 말들이 뜨오? 이러면 일이 되오?

다만 나라의 망할 운명을 하루라도 빠르게 하고 흉할 운수 를 하루라도 더디게 할 뿐이요...... 꾹 참고 준비합시다. 배 우고 동지 얻고 돈 모으고—.』

이 모양으로 선생은 마음이 들뜬 동지들을 대할 때마다 눈 물을 흘리다시피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그사람들의 귀에 들어 가지 아니하였다. 선생은 몇 번이나 혼자 우시었다.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우자는 계획으로 겨우 진압하였던 백형회원의 마음은 이상한 사건의 동기로 다시 흥분하여 선 생에게 일어나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사건이란 이러하다, 이 주영이라는 청년이 황토마루에서 보호 조약 당시 의무 대신으로 있던 이 내무 대신을 칼로 찌르고 붙들렸다. 그느 경찰에서 자기가 백령회원인 것과 백령회원중에 자기와 같 은 동지가 많은 것을 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청년들이 많이 만주로 가는 것이며 백령회가 아무 소리 없는 것을 마땅치 않게 알고 있던 경찰에서는 철저하게 백령회를 소탕할 계획 으로 각처에 수없느 밀정을 놓아 백령회원인 듯한 사람의 행동을 모조리 감시하였다. 이것을 당하는 백령회원 중에서 는 〈옳다.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하고 어차피 죽을 것이면 한번 일어나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각 강화대에 참령으로 있던 염 참령은 근래에 몹시 흥분하여 「일어나자!」는 주장을 내세게 되므로 백령 회 인심은 수습할 수 없도록 흥분이 되었다. 어떤 회원은 이래도 아니 일어난다면 우리는 간부를 배척하고 자유 행동 을 한다는 과격한 언동을 하기까지 하여 도리어 착실한 주 장을 하는 두목을 원망하느 상태가 되었다. 염 참령은 어떤 날, 선생을 찾아 와서 처음부터 흥분된 어저로,

『추산, 다시는 우리의 주장을 막아서는 안되오. 민심은 천 심이요, 만일 추산이 이 민심을 무시한다 하면 그것은 천의 를 무시하느 것이요!』

하고 「일어나자」는 뜻에 찬성하기를 강청하였다.

선생은 아직 아무 준비가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비록 일어 난다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니 될 것과, 지금 섣불리 일어 나기 때문에 모든 계획이 다 틀어져 장차 오는 기회에 응할 준비도 못될 것을 누누이 말하였으나 염 참령은 전혀 고개 르 흔들고 듣지 아니하였다. 그러고 나중에,

『지금 만일 추산이 우리 뜻에 찬성을 아니한다 하면, 나 라를 망케 한 죄는 추산에게 돌아 갈 것이요.』

하고 자리르 차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날 밤에 선생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였다. 아 아, 모든 계획은 수포에 돌아 가고 마는가. 십년의 큰 계획 은 원수가 깨드리기 전에 우리 손으로 깨뜨려 버리는가!

임 참령이 종로 싸움에 세상을 떠나므로 서북학회도 유명 무실하게 되고 다른 회들도 당국의 압막으로 두목들이 하나 씩 둘씩 꽁무니를 빼어 모두 유명 무실하게 되었다. 그 회 들의 기관으로 발행되던 일간 신문과 잡지들도 하나씩 둘씩 거꾸러져 버리고 말았다.

일시 조선 천지를 떠들고 나갈 듯하던 수다할 회들이 다 유명 무실하게 되어 인제는 그 많던 연설회도 없어지고,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순회 연설을 하던 지사들도 혹은 감 옥으로 혹은 만주로 혹은 자기 집 안방으로 들어 숨게 되어 일반 민심은 심히 불온한 대신에 지도자의 계급은 심히 영 성하게 되었다.

이때에 홀로 당국과 세상의 주의의 초점이 된 것은 만명이 라고도 청하고, 혹은 삼만명 혹은 십만명이라고까지도 청하 던 얼마 전까지도 성명도 알지 못하던 백령회뿐이었다. 진 실로 백령회의 그 두목인 이 선생은 당시 일본의 눈에나 조 선의 눈에나 알 수 없는 어비였었다.

그런데 이 백령회조차 내부로부터 동요하기를 시작하였구 나!

승가사에서 서약한 아홉 사람 중에서도 벌써 두 사람이나 최초의 게획을 버리고 무모한 급진을 하려고 드는 구나! 그 중에 염 참령은 그저 좋은 사람이요, 드거운 애국성과 돌진 적 용기가 있을 뿐이요, 명석한 두뇌와 꾸준히 참아 가는 의지가 없는 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보다 오록세나 나이 적은 선생의 말을 꼭 복종하여 오더니 일본 가서 법률을 배 워 가지고 온 최 선학을 친하게 됨으로부터 선생의 말을 듣 는 것이 점점 적어지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생의 계획을 반항하기까지 하였다.

최 선학은 결코 안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계획 과 지식에 대하여 너무 자신이 크고 이 선생의 인격과 사업 을 이해할 만한 위대한 총명이 없었다.

그는 여러 번 선생을 찾아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였으나 선 생이 그 의견에 감복함이 비치 없음을 불만히 여겨 선생과 죽은 임 참명을 제하고는 가장 민간에 명망이 높은 염 창령 을 붙들어 자기의 의뢰를 삼으려 하였다. 정직하고 단순한 염 참령은 마침내 최 선학의 주먹 속에 들어 가 그의 말이 면 다 듣고 개교면 다 쓰게 되었다. 최 선학은 염 참령의 이름으로 백령회원 전부는 못하더라도 대부분을 선생에게서 빼앗아 한번 큰일을 일으켜 보려 하였다. 그러나 염 참령은 의리를 지켜 차마 선생은 배반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가 끔 가서는 큰소리만 하고는 돌아 온 것이다.

최 학선은 염 참령이 결단성이 없음을 보고 몸소 백령회의 두령들을 찾아 다니며, 이 선생 하나만을 신처럼 믿고 있는 것이 어떻게 어리석은 일임을 재주 있는 말로서 듣기 싫지 않게 선전하였다. 선생은 한 무식한 사람이 아니냐. 그가 비 록 미국에 가서 다 소 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노동 생 활이나 하다가 온 사람이 아니냐. 그에게는 아무 학식도 없 지 아니하느냐. 그는 세계의 대세도 국제공법도 모르지 않 느냐. 어떻게 이런 사람의 말 덜어지기만 기다리고 나라이 망하는 것을 보고만 앉았단 말이냐?—이 모양으로 최 선학은 점점 노골적으로 선생을 중상하는 수단을 썼다.

처음에는 최를 괘씸히 보는 이도 있었으나 차차 그의 말을 그런 듯하게 생각하는 이가 하나 둘 늘어 가게 되었다. 그 래서 어떤 사람은 새삼스럽게 선생을 찾아 가서 그의 의견 을 시험적으로 한번 떠들어 보는 이도 있었다. 들어본즉, 이 선생의 말은 역시 옳았다. 그러나 물러나와 최 선학의 말을 들어 보면 선생은 역시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리하여 많은 회원들은 방황하게 되었다.

최 선학은 백령회 이외의 모든 지사들과도 관계를 맺았다.

임 참령 일거 후에 지도자를 잃었던 서북학회원들은 최씨야 말로 참말 대정치가라도 곧 신앙하게 찬송하게 되었고 기타 의 모든 사람들도 최씨를 무슨 큰힘이 있는 정치가로 일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모양으로 활동한 지 불과 반년에 최씨는 일방의 두목으 로 한국 정게에 이름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선생을 떠밀치고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 갈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야심을 달하는 방법은 염 참령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의리를 생각하고 차마 이 선생을 배반하지 못하던 염 참령은 마침내 최 선학의 말대로 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는 이 선생을 조르지도 아니하고 최 선학을 시켜 백령 회원을 자기 앞으로 끄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시작하였다.

이 선생과 전 목사가 여러 번 염 참령을 붙들고 권하였으나 염 참명은,

『추산의 말만 듣다가는 나라를 망쳐놓고 마오!』

하고 주먹을 내어 두를 만한 자신이 생겼다.

백령회원 중에서도 과격할 분자가 염 참려의 깃발 밑으로 모여 들었다. 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묻고 명령하 면 명령한 대로 복종하는 것을 볼 때에 염 참령은 지도자의 단맛을 깨달았고 또 자기도 결코 이 선생만 못한 사람 아니 라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큰일을 일으키는 첫 수단으로 부하 중에서 결사대 를 뽑아 통감 이하 각 요로의 대관을 암살하여 인심을 선동 하고 일변 암살대로 하여금 각지의 부자들을 위험하여 많은 돈을 거두어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전쟁할 준비의 게획을 세웠다.

이 계획대로 서울에 십여 명 암살대를 배치하여 통감과 요 로 대관을 암살할 기회를 엿보게 하고 각지방에도 암살대를 파송하여 부자를 위협하도록 한 후에 염 참령은 그래도 예 정을 잊지 못하여 하루는 최 선학에게는 말도 아니하고 가 만히 이 선생을 찾아 자랑삼아 자기의 게획을 말하고 그 계 획에 찬성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이 선생은 염 참령의 계획을 듣 고 심히 슬퍼하는 모양으로 염 참령에게 그 계획은 중지하 기를 청하였다.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통감이나 요로 대감 을 암살하는 것이 다만 일본의 악감을 일으켜 우리에게 압 박을 더하게 할뿐더러, 반드시 나라의 운명을 줄이는 결과 에 마칠 것이니, 만일 염 참령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성공하 는 이튿날 반드시 합병 문제가 일어날 것인즉, 이리되면 우 리는 힘을 기를 여자도 없어지고 말 것이라—함과, 또 각지 방 부자들을 위협한다 하면 돈을 얻는 목적을 달하지 못할 뿐더러 국민의 신용을 잃어버릴 것이니, 국민의 신용을 잃 고 어찌 나라 일을 하랴 함이다.

그리고 최후에 선생을 염 참령을 향하여,

『생각해 보시오. 거룩한 국사를 무정한 수단으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부정한 권모 술수로 망하였어요!

궤홀한 꾀! 음모! 이것은 우리나라를 망하게한 원수외다. 그 런데 이제 우리네가 다시 그러한 죄악을 범한단 말씀입니 까?

하고 심히 흥분하고 분개한 어조로,

『염 참령! 우리가 승가사에서 그렇게 굳게 한 맹세를 그 렇게 쉽게 저바리렵니까!』

하였다. 염 창령은 아무 말 아니하고 돌아 갔다. 그러나 그 때부터 칠팔년을 지나서 겨우 염 참령은 선생의 말을 생각 하였다.

초가을부터 선생의 건강은 심히 쇠하였다. 음식도 잘 소화 하지 아니하고 밤에는 잠이 들지 아니하였다. 신경도 퍽 예 민하여져서 가끔 화증을 내는 일도 있게 되었다.

『아아, 그만 만사가 수포에 돌아가고 마는가!』

하고 혼자 탄식하면서 방안으로 왔다 갔다 하는 양을 선경 은 가끔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생의 의사의 말대로 학교를 쉬고 얼마 동안 정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찾아오는 손님과 그 손님들이 하나 둘씩 가지고 오늘 좋지 못한 기별을 도리어 학교 사무 를 보는 것보다도 선생의 신경을 피곤케 하였다. 마침내 선 생은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동지들이 하나 둘씩 가지고 오는 좋지 못한 기별은 도리어 학교 사무를 보는 것 보다도 선생의 신경을 피곤케 하였다. 마침내 선생은 자리 에 눕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동지들은 황망하여 그를 제중 원에 입원을 시키고 의사에게 부탁하여 일체 면회를 사절케 하였다. 다만 아무 때나 출탁하여 일체 면회를 사절케 하였 다. 다만 아무 때나 출 일할 자유를 가진 이는 전 목사와 성경 두 사람뿐이었다.

선생은 어떤 때에는 눈을 감은 대로 자는지 깨어는지 두 시간이나 세 시간씩 가만히 누워 있고 어떤 때는 눈을 가늘 게 떠서 흰 철정을 보고 한두 시간씩 말이 없이 누워 있었 다. 그러한 때에는 선경은 선생의 생각을 깨뜨릴가 두려워 하듯이 아무쪼록 선생의 눈에 피우지 아니할 만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가끔 곁눈으로 선생을 바라보며 무슨 책을 보고 만일 몸을 움직이거나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발끝만 으로 사뿐사뿐 마루를 밟아 소리를 낼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다가 선생이 침대 위에 일어나 앉거나 또는 모로 누워 눈을 크게 뜨고 방안을 둘러 보는 양을 보면 선경은 얼른 일어나서 침상 곁에 놓인 의자로 간다. 그러면 선생은 모든 시름을 다 잊는 듯이 선경을 동무 삼아 학교 이야기 세상 이야기 같은 힘 안 드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선경도 자기의 조그마한 경험의 곳간 속에서 재미있을 만한 것을 모두 꺼내어 선생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쓴다. 선경이가 무 슨 이야기를 할 때에는 선생은 주의하여 듣는다 이것은 선 생이 누구와 이야기할 때에나 하는 버릇이다. 그러다가 재 미있는 대목에 가서는 재미있다는 뜻을 표한다. 이렇게 선 생이 자기 이야기에 재미있다는 뜻을 표할 때에는 선경은 너무 기뻐서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막힌다. 그래서 선경은 선생이 가만히 누워 있는 동안에는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여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면 선경의 방안을 깨끗이 치워놓 고 선생이 밤 동안에 쓸 만한 것을 다 선생의 머리맏에 준 비해 놓고 그리고는 선생의 침대 곁에 우두커니 서서 「무 엇을 더 시킬 것이나 없습니까? 인제는 집에 가도 관계치 않습니까?」하는 듯이 선생을 물끄러미 본다. 그러면 선생 은 빙그레 웃으며

『애썼소. 가 보시오.』

한다. 그러면 선경은 하릴없는 듯이 머리를 한번 만지고 치마 구김살을 펴고 우산과 보던 책을 집어 들고 다시 선생 의 침상 곁에 와서,

『선생님 안녕힌 주무십시오.』

하고는 가만히 문을 열고 나간다.

선생은 선경이가 없어지는 뒷모양을 보고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선경은 마당에 내려 와서 선생의 병실을 한번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고 전차길로 나간다.

며칠 동안 조용한 생활에 선생은 마치 오래간만에 순전한 사람에 돌아 온 듯하였다. 그동안 오년 동안에 마치 인생을 잊어버린 듯하였다. 그의 생활은 오직 애국자의 생활이요, 교육자의 생활이요, 큰 단체의 지도자의 생활뿐이었다. 그리 고는 「사람」의 생활은 전혀 잊어 버렸었다. 그에게는 자 기의 몸이나 가족이나 쾌락이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오년의 긴 동안에 날마다 생각한 것은 어찌하 면 백령회원을 많이 얻고 굳게 단결할까, 어찌하면 산업 기 관을 크게 만들까. 어찌하면 백산 학교의 학생을 잘 기르고 또 그와 같은 학교를 많이 세울까, 어찌하면 동지들의 경고 망동하는 것을 막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대체 사람이 이처 럼 제 몸을 잊고 나라일에 골돌할 수가 있을 수가 있을까.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실로 이적이었다. 전 목사 가 항상 청년을 대할 때마다

『추산 선생은 제 몸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요. 나는 사 십 평생에 그러한 사람을 보기도 처음이어니와, 사람으로 그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소.』

한 것이 결코 조금도 과장한 말이 아니다. 진시로 선생은 지나간 오년간 일천 팔백여 일에 하루도 나라 일을 생각 아 니한 날이 없었고, 하루도 자기의 괴로움을 생각해본 날이 없었다 할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범인으로는 믿지 못할 위 대한 의지력과 정령과 열성을 가진 어른이었다.

그는 그동안 천여 명 학생의 입학 구두 시험을 꼭 몸소 행 하되 한 사람도 범연하게 한 일이 없었다. 중도에 나가거나 졸업하고 나간 학생들의 문의하는 일은 정성으로 대답하지 아니한 일이 없으며, 날마다 상학 건에는 반드시 학생들에 게 새로운 자극을 줄 만한 훈계를 하였으며, 그리고 나서도 밤에는 일반 방문객과 백령회원의 심방을 받아 자정이 넘도 록 중요하고 힘드는 담화도 하였으며 그리고도 몸소 백령회 원을 임회시킨 것이 이백명이나 된다. 그뿐일까 방적회사와 책사 객주 같은 것도 그 시설이나 경영 방침은 모두 친히 생각하여 내어서 경영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가 하는 한 마디 말은 모두 여러 시간 동안 궁리하고 궁 리할 말이다. 그는 무슨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이틀 이나 사흘이나 혹은 그보다 오래 되더라도 완전한 해답을 얻기까지는 생각한다. 그는 그 문제의 성질과 내용과 실현 의 가능성과 그것과 다른 문제와의 관계가 어쨌으나 생각하 수 있는 모든 방면으로 생각한다. 다만 그 문제에 찬성하는 편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욱 힘을 들여서 그 문제에 반 대하는 태도로도 생각하여 본다. 그래서 아무러한 반대가 오더라도 대답할 만하고 아무러한 곤란이 오더라도 실현할 만한 때에야 비로소 「되었다」하여 그 문제를 치어 버린 다. 그러므로 선생의 말은 한번 나오면 도로 걷어들이는 법 이 없고 선생의 계획은 한번 나오면 반드시 일도 실현되었다.

아무려나 그 판에 그 혼돈한 안심 속에서 만명 가까운 큰 단결과 수십만원 자본의 큰 산업 기관과 전국 각 사회 각 방면에 동지의 그물은 늘인 것과 그만한 교육적 효과를 얻 은 것이 여간한 인격과 수완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장이 난명이다. 너무 그의 일을 맞들어 줄 동지 가 없었다. 있다 하여도 너무 수효가 적었다. 그리고 동포의 도덕적 자격도 지능의 정도도 너무도 유치하였다.

아아, 외로운 선도자의 심사여, 그 어떠하였으랴!

비록 작년 이래도 동지 중에서 다소의 분열이 생기고 백령 회원 중에도 다소의 동요는 생겼으나 그것은 한 적은 부분 이요, 대다수는 여전히 선생을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아 놓 고 본즉, 그네는 너무도 무능력한 사람들이었다. 돈을 낸대 야 돈의 힘도 없고 다만 그네의 가진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맘과 선생의 지도를 믿는 말뿐이었다. 선생을 믿어도 다만 한 지도자를 믿는 것처럼 먹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신통한 재주와 모략을 가진 영웅처럼 믿었다. 선생에게 가장 고통 을 준 것은 회원이 분열이나 동요보다도 그네의 정도가 유 치한 것이었다. 아아, 이렇게 유치한 동지로 어떻게 일을 같 이 하랴. 국가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랴. 「십년!」「십년!」

십년 동안 가르쳐야 할 것이다. 부대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년 동안 돈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세는 십 년까지 기다려주지 아니할 모양이다. 민심은 날로 격양하여 언제 무슨 일을 저질러서 일본에게 무슨 좋은 핑계를 줄는 지 모르고 또 비 합병론자인 이등 통감도 갔다. 그런데 정 부 당국자의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맘은 나날이 더하여 가고 신 황제의 곁에는 모조리 무슨 일이나 못할 것 없는 간교한 무리들이 모여 들었은즉, 그들이 공명 다툼으로 무 슨 일을 할는지 알 수 없다. 만일 한 사람이 연방론을 주장 하여 일본 정치가의 환심을 산다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반드 시 합병론을 주창하여 그 위에 오르려 할 것이요, 또 한 사 람은 반드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하자는 논을 주창하여 다시 그 위에 오르려 할 것이라—이렇게 관찰한 선생의 눈에 는 그 첫 사람은 누구요, 첫 사람의 위에 오르려는 둘째 사 람은 누구며, 셋째 사람은 누구인 것까지 분명히 보였다.

그러하거늘 염 참령같은 동지는 이러한 줄도 모르고 나라 의 운명을 한 치씩 한 치씩 쏟아 가는 일만 만들고 일반 지 사들도 도리어 그 편으로 쏠리려 한다.

선생의 심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괴롭지 아니할 수 없었 다. 이 괴로움과 오년 동안의 심신 과로와 이것들이 합하여 이번 병을 이룬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동안 며칠을 두고 지나간 일과 돌아 올 일 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점점 더 날이 지나고 몸이 쇠약할수록 그 생각은 차차 줄어지고 오래 잊어 버렸 던 어렸을 적 생각과 미국에 가 있던 생각과 나랏일 아닌 예삿일이 하나씩 둘씩 생각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애국자의 생활이 잠간 쉬고 예삿 사람의 생활이 눈을 뜨는 것이다.

선생은 구차한 생활에 자식들을 기르느라고 혼자 애쓰던 홀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도 흐렸다. 미국서 처음 돌아오는 길로 가 뵈올 적에 어느 새 백발이 다 되신 어머니가 굽은 허리로 마당까지 내려 와서, 〈항목이냐?〉 하고 우시던 생각을 하고도 울었다. 그리고 재작년에 그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임종도 못한 것을 생각하고도 울 었다.

또 미국 가고 없는 새에 형님과 누님들이 아들 딸을 많이 낳아 가지고, 〈아침 저녁 끓여 먹을 것이나 있는 것도 다 네 덕이다.〉 하던 것을 생각할 때에도 모두 비감하였다. 그리고 앞 고 개에서 이상하게 작별하던 과부의 일을 생각할 때에는 형언 할 수 없이 불쌍한 맘이 생겨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쉬었다.

그 과부는 선생이 미국에 간지 이태 되던 가을에 미처서 밤낮 울고 돌아 다니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선생의 모친 은 선생이 미국서 온 날 저녁에 옛말 모양으로 웃어 가며,

『글세 그애가 미쳐서는 내 이름만 부르고 돌아 다녔단다 —. 〈항목씨 항목씨〉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몸에 소름 이 끼치겠지—불쌍도 하고—그럼—머리를 풀어 헤치고—맨발로 —그럼......그래서 너무나 가엾어서 불러다 밥도 먹였단다.』

할 때에는 선생은 울음이 터질 듯하였다. 침침한 등잔불에 비추인 어머니의 주름 잡힌 뺨에도 눈물이 번쩍번쩍하였다.

『그것도 어미까지 죽어 버리니.』

하고 어머니는 눈물이야 흐르거나 말거나 씻으려고도 아니 하고 말을 이어,

『누가 그것을 돌아 보니? 오라범댁은 소리만 지르고 제 오라비는 어서 뒈지기나 하라고 욕이나 하구—아이들은 따라 다니면서 놀려 주고...... 글쎄, 그렇게 불쌍할 데가 어디 있 노?—그러다 하루느 아무 소리도 없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그 이튿날 찾아 보니께니 성공우물에 빠져 죽었드래......』

선생은 날이 새기를 기다려 동네 사람에게 물어서 그 무덤 을 찾아갔다. 무덤이라야 어린애 무덤 모양으로 산비탈에 조그마한 봉분이 있을 뿐이다. 선생은 그 무덤 위에 난 쑥 포기를 뽑아 주고 한 시간 동안이나 물끄러미 그 불쌍한 무 덤을 바라복고 앉았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하고도 침상 위 에서 혼자 눈물을 지었다.

선생의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대게 이러한 슬픈 일뿐이었 다. 이런 일을 생각하고 맘이 비창해진 때에는 삼천리 강산 에 우물거리는 흰 옷 입은 백성이 모두 그 과부와 같이 불 쌍한 처지에 있는 듯이 생각해서 비창한 맘은 더욱 비창하 여진다.

미국과 하와이에 가서 백인에게 짐승 대접을 받으며 뼈가 휘도록 노동을 하여서는 독한 술과 매독. 임질 있는 일본 갈보에게 처넣는 동포들의 광경이 보인다. 다 떨어진 양복 에 볕에 그을은 얼굴, 짐도 없고 처자도 없고 세상 낙이라 고는 없느 그들이 괴로워 찌그리는 얼굴로 눈앞에 나온다.

그 다음에는 이 추운 날 살이 점점이 드러나는 때묻은 겹옷 에 화승초을 메고 더운 밥 한 술도 못 얻어 먹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일병에게 쫓겨다니는 의병들이 나온다.

다음에는 서북간도와 서백리아에 흩어져서 영양 불량으로 얼굴들이 해쓱하고 허리도 잘 펴지 못하는 혹은 허름한 청 복을 입고 혹은 허름한 양복을 입은 눈도 분명히 감았다 뜨 지 못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휙휙 지나간다. 그리고는 십 삼 도 방방 곡곡에 서양 사람의 돼지우리만도 못한 쓰러져 가 는 움막살이에서 제 운명이 어찌 되는 지도 모르고 웃고 울 고 하는 수없는 얼굴이 나온다. 다음에는 종로에서 총 맞아 죽음이 창령과, 어리석으면서도 그래도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는 염 창령과 목숨도 지도 다 잊어버리고 밤낮 돌아다니 는 최 선생과, 페결핵으로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도 회원을 모으느라고 애쓰는 김 윤뮨과 역시 폐병이면서도 폐병인 줄 도 모르는 f전 목사와 어리석으면서도 그래도 제깐에 무엇 을 하려고 하는 선애. 선형. 선경 같은 여학생들도 모두 다 불쌍해 보이고 측은해 보이는 얼굴로 눈앞에 얼른얼른 지나 가고 나중에는 선생 자신의 초췌한 모양이 환등에 비칠 그 림자 모양으로 눈앞에 나서는 것도 다 불쌍해 보이고 처량 해 보인다.

이렇게 끝없는 생각을 하다가 언제 드는지 모르게 잠이 들 었다. 개면 벌써 선경의 언제까지나 어린애다운 얼굴이 방 저편 구석에 와 앉았다. 새로 세수하고 화창한 그의 풍부한 얼굴은 건강과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선생님 좀 어떠십니까?』

하고 선경은 한 다리를 침대에 기대면서 물어 본다. 그러 고는 수건에 물을 축여 선생의 낯을 씻기고 창을 조금 열어 놓아 잠간 공기를 바꾸고 간호부를 불러 잡수실 것을 가져 온다. 이 모양으로 선경은 아주 바쁜 듯이 무슨 더할 일이 나 없나 하는 듯이 방안으로 왔다 갔다 한다.

선경도 벌써 스물 두 살이다. 얼마 아니해서 스물 세 살이 된다. 학교는 벌써 삼사년 건에 졸업하고 이화 학당 대학부 엔느 이태쯤 다니다가 재미가 없나 하여 중도에 그만두었 다. 여기저기서 혼인도 청하였으나 그는 시집 갈 생각도 아 니하고 그의 오라버니도 구태 시집을 보내려고도 아니하고 제 맘대로 내버려 둔다. 선경의 집에서는 선경을 이 선생에 게 시집 보낼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말 을 선생에게 할 기회도 얻지 못하였고 또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운 듯도 하였다. 선경도 어려서는 무엇인지 모르게 선 생을 따르고 그리워하였으나 차차 나이 먹어 갈수록 선생을

「남편」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선생에게 아무 반향이 없으므로 선경은 혼자 애를 태워 왔다.

〈선생의 병이 좀더 중하게 되었으면.〉 하고 선경은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리되면 마음대로 선생 의 머리도 만져 드리고 몸도 쓸어 드릴 수가 있을 것이다.

의사도 없고 간호부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떼도 있다. 그 러면 자기 혼자서 선생을 맡아 간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호부가 자유로 선생의 팔목을 잡고 맥을 볼 때에는 자기 가 간호부만큼 선생을 가까이 할 자유가 없는 것이 슬펐다.

〈어찌할꼬? 내가 선생의 것이 될 수가 있을까?〉 하고 선생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때에 방 한편 구석에 서 선생의 여윈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선생님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미워하지는 아 니하신다—그러나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히 하시는데!〉 하고 선생이 선형과 선애에게 하는 행동을 생각해 본다.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선생님 같으신 어른의 부인이 되어 볼 수가 있을까—아아, 선생의 부인.〉 하고 생각만 하여도 몸이 자릿자릿한다.

그러할 때 선생이 눈을 뜬다. 선생의 눈은 방안을 한번 돌 아본다. 선경은 저 눈이 나를 찾는 것이 아닌가한다. 그러다 가 혹은 선생의 시선이 자기 시선과 마주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다시 눈을 감는 일도 있고 혹은 선경의 시선과 마주 치기도 전에 그냥 스르르 다시 눈을 감는 일도 있다. 그러 할 때에는 선경의 가슴은 내려앉는 듯 한다. 「아아, 선생의 심중에는 내 그림자도 없구나」

하고 가만히 실망의 한숨을 쉰다.

〈어찌하면 선생님의 손을 알아볼까? 조금이라도 나를 생 각해 주시는지 알아볼까?〉 하고 선경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여진다.

선생이 자기를 보고 웃기나 하면 안심이 되고 그렇지 아니 하고 다른 생각만 하는 것 같으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더욱 이 병원에 선생을 간호하게 되어서 부터는 선경의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아아, 어찌하면 내가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볼까?〉 이 생각은 선경을 앓는 선생보다는 더욱 괴롭게 하였다.

선생의 병세는 점점 중하게 되었다. 신열이 삼십구도에서 사십도까지를 왕래하게 되었다. 의사는 마침내 장질부사를 병발하였다는 진단을 하였다. 이 진단을 한 서양 의사는 의 미 있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저렇게 쇠약한 몸이 견딜 수가 있나.』

하고 한탄하였다. 곁에 섰던 선경은 가슴이 내려앉는 듯이 놀라며 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선생의 눈은 죽은 듯이 감겨 있고 입술은 까맣게 탔다. 그렇게 신열이 높건마는 숨소리 도 들릴락말락 마치 임종이 가까워 오는 듯하였다. 선경은 전 목사를 쳐다보았다. 전 목사도 그 크고 유순한 눈에 근 심이 가득하여 선생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양 의사가 나간 뒤에 전 목사는 선경을 돌아보며,

『우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시다.』

하며 고개를 숙인다. 선경은 방바닥에 꿇어 엎데고 곁에 있던 간호부도 선경의 뒤에 경건한 태도로 쭈구리고 앉았다.

전 목사는 들릴락말락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불쌍한 우리 백성의 유일한 선도자를 우리 백성 중에 오 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ㅣ 우리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거 든 우리 선도자의 병을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사람마저 가면 우리 동포들 어찌합니까. 하나님!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사람의 몸에 주의 손을 다하사 이 병이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 때에 선경은 이마를 방바닥에 비비며 「아멘」하였다.

그리고 속으로 「하나님 저 같은 목숨으로 이 귀한 어른을 대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몇 번이나 빌었다.

그러다가 기도가 끝난 때에는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간호부도 흰 치맛 자락으로 눈을 씻었다.

전 목사는 흑흑 느끼는 선경의 어깨를 만지며,

『울지마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선생님을 결코 죽게 하지 아니할 것이ㅛㅡ 울지마오!』

하고 위로하였다.

그 날 밤에 선경은 집에 아니 들어가고 선생 곁에서 밤을 새우기를 결심하였다.

선경은 간호부와 함께 연해 얼음으로 선생의 머리와 가슴 을 식히며 숟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선생의 타는 듯하는 입 술을 축였다. 선생은 가끔 팔 다리를 움직이고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였다. 의사는 거의 한 시간만에 하넌씩 들어 와서 병셀르 살폈다.

선경은 간호부가 갖다 주는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꼭 선생 의 침상 곁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혹가다 선생이 눈을 뜨 나 아마 의식이 분명치 못한 듯하였다. 그런 때마다 선경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두어 번 불러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위험한 상태가 사흘을 계속하였다. 선생의 병이 중 하다는 말이 퍼지자 편지와 전보로 선생의 병세를 묻는 이 가 하루에도 백이 넘었다. 이것은 모두 전 목사가 맡아 가 지고 청년 몇 사람을 감독하여 일일이 답장을 하였다. 그리 고 시골서 일부러 찾아 온 이도 있으나 모두 면회를 사절하 였다. 선생의 병은 일반 백령회원과 백산 학교 학생들에게 는 무론이요, 일반 민심에 적지 아니한 두려움과 근심을 주 었다. 얼마 동안 선생이 없이 지내보니 그가 필요한 인물인 것을 더욱 간절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수없는 사람을 대표하여 혼자 애쓰는 것이 선경이다.

선경은 지나간 사흘 동안에 마주 볼 수 없이 얼굴이 수척하 였다. 의사는 하룻 동안 쉬기를 권하나 미친 사람 모양으로 듣지 아니하였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부터 선생은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었 다. 눈도 뜨고 물 달라는 말도 하였다. 그리고는 그 날 종일 선생의 병세는 훨씬 감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전 목사도 안 심하고 집으로 가고 주임 의사도 집으로 가고 병실에는 선 경과 간호부만 남아 있게 되었다. 선생은 종일 자는 모양이 었다.

선경도 그저께부터 들여놓은 간호자의 침상에 누워서 마음 놓고 깊이 잠이 들었다.

선경은 이러한 꿈을 꾸었다—자기는 선생과 혼인을 하여 가 지고 어디 먼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데 마침 선생의 팔에 매 달려서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은 자기 의 팔을 꼈던 팔로 자기의 허리를 가만히 껴안으며 한 팔로 한없이 먼 곳을 가리키면서,

『선경이 나는 지금 저리로 가야 할 테야요.』

하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선생은 몸을 뿌리쳐 바다로 뛰 어 내렸다. 선경은,

『나도 가요, 나는 가요.』

하고 울면서 선생의 뒤를 따르러 하였으나 웬일인지, 정신 이 돌과 같이 굳어져서 움직이지르 아니하고 소리를 치려 하여도 소리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그때에 뒤에서 누가

『선경이, 선경이!』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래어 깨니 꿈이었다.

선경은 무서운 듯이 벌떡 일어나 선생의 침상 곁으로 갔다.

선생은 피로와 못 견디는 듯이 몸을 비비 꼬고 입술을 꼭 꼭 씹는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선경은 선생의 흔들면서 부럴 보았다. 그러나 선생은 알아 듣는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선생은 심히 숨이 찬 모양이요, 도 마치 일어나고 싶어서 애쓰는 모양 같았다. 그래 선경은 전후를 생각할 새도 없이 선생의 어깨 밑으로 팔을 넣어 자기의 가슴에 기대어 앉게 하였다. 선생의 기운 없는 목이 한편으로 기울어져 그 얼굴 이 선경의 뺨에 닿을 때에는 마치 이럭이럭 타는 숯불이 닿 는 듯하였다. 선경은 한 손으로 선생의 머리를 쳐들어 자기 의 머리에 편안히 기대게 하였다. 선경은 한 손으로 선생의 머리를 쳐들어 자기의 머리에 편안히 기대게 하였다. 일어 나 앉은 까닭인지 선생은 다소간 편한 듯이 가만히 있었다.

앉은 까닭인지 선생은 다소간 편한 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 러나 정신을 못 차리는 것과 숨소리가 높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경은 그제야 아까 꿈을 생각하고, 〈선생이 돌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휙 지나가자 몸에 오싹 소름이 끼친다.

〈선생께서 돌아가시면 어찌할까?〉 하고 선경은 무슨 큰 새 사시를 당한 것처럼 생각한다.

선생께서 돌아가시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은 마치 선경의 눈과 코를 무엇으로 꽉 싸매는 듯하였다. 선생이 없는 곳에 자기가 있을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자기가 지난 오년 동안 살아 온 것은 오직 선생을 바란 것 같았다. 반드시 선생의 아내가 되리라는 분명한 의식은 없 었으나 그래도 자고 깨서 다시 잠을 들 때까지 학교에 가서 칠판 밑에서도 오직 선생을 생각하므로 선생이 자기 곁에 계시거니 함으로 사라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선생께서 돌아가시면 도저히 자기는 세상에 살아 있을 것 같지 아니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선경은 고개를 돌려 자기의 귀 밑에 기대 어 있는 선생의 얼굴을 보려 하였다. 그때에 선경의 뺨이 선생의 불덩어리 같은 더운 뺨에 닿는다. 선경은 정신 엇이 자기의 입술을 까맣게 탄 선생의 입에 꽉 대었다. 그러고

「병이 다 내게 옮아 오라」하고 힘껏 입으로 빨았다.

선경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선생의 입술을 빨았다. 선생의 입에서는 불과 같이 뜨거운 입김이 훅훅 나와서 미치 선겨 을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옆의 침대에서 간호부가 돌아 눕는 소리에 선경은 깜짝 놀 랐다. 간호부는 고개만 번쩍 돌려 선경을 바라보며 졸리는 목소리로,

『왜 선생이 더하셔요?』

하고 벌떡 일어난다.

선경은 간호부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고개를 돌려 무엇을 찾는 양을 하며,

『네, 선생님이 앓는 소리를 하시기에 일어났더닌 아주 정 신ㅇㄹ 못 차리시고 신열이 나시고......그러고 일어나시려고 애를 쓰시기에......』

하고 얼마큼 맘이 놓이는 듯이 간호부를 돌아 본다.] 벌써 선생의 침상 곁에 와서 선생의 팔을 잡아 맥을 보는 간호부의 눈에 선경의 이상하게 흥분한 얼굴을 물끄러미 돌 리다 보았다. 선경은 가슴이 내려 앉는 듯하여 간호부의 시 선을 피하였다. 무슨 큰 죄나 저지르다가 무서운 사람에게 발각이나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 선경은 아무리 할 길도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대인한 모양으로 간호부더 러,

『시계 좀 보셔요, 몇 시야요?』

하였다.

간호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선생의 시계를 열어 보더니,

『새로 세 시 반!』

하고 시계를 도로 담는다.

『어떡하면 좋아요? 이렇게 신열이 안 내리시니......지금이 라도 김 의사를 좀 깨워 오시지요......오늘따라 숙직하는 이 도 없다지요?』

한다. 간호부는

『글세......』

하고 시계를 한번 다시 보더니 문을 열고 나간다. 간호부 의 발자국 소리가 저쪽으로 멀어질 때쯤 하여 선경은 한번 더 선생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여전히 불같이 뜨거운 입 김이 훅훅 나오고 숨결은 아까보다도 더 찬 것 같다. 선경 은 가만히 선생을 자리에 눕혔다. 눕히고 자가기 침대에서 내려 올 대에 선생은 한번 눈을 뻔쩍 떴다. 그리고 선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고 다시 눈을 감아 버 렸다.

〈아아, 어쩌나?〉 하고 선경은 침상 곁 의자에 앉아서 구겨진 치맛 자락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였을까—그런 버릇없는 짓을 하였을 까? 선생님이 아셨으면 얼마나 나를 몹쓸 년이라고 하실까— 에 그 아셨으면 어찌나?〉 이렇게 생각하면 선경은 어디로 달아나고 싶었다. 선생님 안 계신 데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한 끝에는 「에그 좋아라!」하는 만족하는 맘도 있었다.

그렇게 오랫 동안 두고 두고 그리워하던 선생을 인제는 아 주 제 것을 만들어 버린 듯한 기쁨도 있었다.

날이 새었다. 의사들이 오고 전 목사가 오고 선경의 오라 버니도 왔다. 선생의 신열은 해뜨게부터 내려서 정신도 분 명하게 되었다.

밤을 새이고 맘에 많은 번뇌를 한 선경의 얼굴과 눈은 앓 는 사람 같았다. 오라버니나 전 목사나 다 자기를 유심히 보았다. 전 목사는

『선경이 애썼소, 간호부 말을 들으니까 선경이가 밤새도 록 선생을 안고 앉았었다고.』

할 때에 선경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선생도 기운 없이 눈을 번히 떠서 선경을 바라보았다.

R 눈이 선경의 눈과 마주칠 때에 선경은 어찌할 줄 모르는 듯이 몸을 꼬았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모든 것이 꿈 같다. 선경은 쩔쩔 매는 생각으로 아침 볕이 비추 인 남산 솔밭을 바라보고 가슴을 울렁거렸다.

선생이 병원에 있은 지는 꼭 삼십 오일도안이었다. 그러나 그 얼마 아니 되는 동안에는 세상에는 많은 사건이 생기고 많은 사람이 잡혔다. 정국은 한 달 전보다도 더욱 긴장하여 언제 무슨 벼락이 내릴는지 몰랐다. 그래서 모든 신문지들 도 날마다 압수와 발행 금지가 되는 바람에 정치에 관한 말 을 거의 한 마디도 쓰지 못하게 되고 겨우 연약한 당국자와 귀족들을 공격할 뿐이었다. 다만 영국 사람 경영인 대한 매 일신보사가 여전히 각처의 의벼에 관한 기사와 알삼대의 기 사를 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신문사 문밖에 나오기 가 바쁘게 곧 일본 경찰과 헌병에게 압수를 당하였다.

시세가 이러하므로 한창 떠들던 지사패들도 대개 이구석 저구석에 숨어서 새가 들을까 쥐나 아니 듣나 하여 소곤소 곤 이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 이야기는 대게 정국을 핍 박하였다. 지금 새 통감은 합병할 계획을 가지고 왔고 내각 대신 중에는 누가 합병에 공로자가 될까 하고 서로 경쟁하 는 중이라 함과, 이제 한 가지 남은 일은 백령회원을 몰아 한바탕 싸와 보는 것과, 미국에 사신을 보내어 그 도움을 비는 것 뿐이라 함이었다.

그러나 염 참령의 계획이 도처에 발각되어 강도 또는 모살 미수, 보안법 위반 등 죄명으로 많은 백령회원이 검거되는 것을 볼 때에 또 백령회의 주인인 선생의 병세가 점점 중하 여 간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은 백령회에 대하여서도 일 종의 비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는 판에 선생이 수척한 몸을 가지고 병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벌써 선생의 문에 사복한 형사들이 지켜 서서 오고 가는 사람을 주의하여 보며 어떤 때에는 붙들고 성명을 묻도록 경찰의 경계가 엄하게 되었다.

이렇게 경계가 엄하여진 것은 염 참령의 위협단과 암살대 를 두려워 한 까닭도 있거니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변하여진 증거다. 아주 고압 수단을 써서 모든 단결과 언론 기관을 내려 누르고 황제와 한국 정부의 당국자만을 대수로 하여 점점 합병의 계단을 밟자 하게 된 증거다.

이런 때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안 중근이 하르빈 에서 전 통감 이등 공작을 죽인 일이다. 이 일이 보도되매, 일본 사람의 감정은 극도로 흥분하였고, 당시 한국 사람의 감정은 다른 방향으로 또한 극도로 흥분되었다. 낡은 통감 이 잘리고 새로 통감이 왔다. 이 육군 대장이 통감으로 온 것만 보아도 일 본 정부의 의사와 결심을 알 것이다. 그는 실로 정부에서와 원로에게서 한국 문제를 처치할 전권을 맡 아 가지고 왔다. 한국을 한국대로 그냥 두든지, 또 아주 합 병하여 버리든지 하는 한국의 운명은 전혀 이 군인 통감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는 통감으로 오는 길에 여러 대대의 육군과 무기를 가져 왔고 그의 행장 속에는 많은 비밀 서류가 들어 있었다.

생 통감이 온다는 말이 나매 대궐안은 물로니요, 일반 인 민이 모두 이번에야 무슨 끝이 나고 만다고 수군수군 하였다.

비가 되려는가, 바람이 되려는가. 하늘 한쪽에는 뜬 험악한 구름 틈으로 번쩍이는 검푸른 번갯불! 이천만 사람은 다만 벙어리 모양으로 멀거니 그것을 치어다볼 뿐이었다.

하르빈에서 전 통감을 죽인 사건으로 만주에서는 물로니 요, 하눅ㄱ 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붙들리기도 하고 주의 도 받았으나 마침내 그것이 백령회의 계획도 아니요, 한국 황실의 계획도 아니요, 다만 안 중근 이하 몇 사람의 계획 은 것이 판명되어 수범은 여순 감옥에서 사형을 받고 종범 몇 사람은 징역을 하고 말았다. 한국 황실에서는 곧 동경에 사죄사들 파견하여 한국 국민 중에서 한사람이 공신을 죽인 것이 잘못되었다는 듯을 표하여 이 사건만은 무사하게 되었다.

원래 이 사건이 일본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다만 한국사람 이 일본 공신을 죽였다 하는 것 이외에 아마 이것도 해아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낸 것과 같이 한국 황실의 계획이 아 닌가. 또는 배일당으로 유명한 이 항목의 백령회의 소위나 아닌가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었다. 그래서 일본의 각 신문지는 은혜를 배반하는 한국 황실을 응징하라고 분개한 소리를 하였고 또 통감부의 경찰 당국과 헌병대는 「그것 보라 백령회를 그대로 둔 까닭이라」고 선견지명을 자랑하 였다. 미상불 사내 통감도 만일 이 일이 한국 황실의 계획 인 것만 분명하면 쓸 수 없는 고압수단을 다 써 보려고 하 였고 백령회에 대하여서도 그러하였다.

그러다가 심리의 결과 황실과 백령회가 이 일에 아무 관계 가 없는 것이 판명되매, 통감부에서는 들어던 주먹을 놓을 곳이 없는 형편이어싿.

이라하여 「이등공 암살 사건」의 내용이 판명되기를 기다 려 곧 합병을 단행하려고 하던 사내 통감의 결심은 잠간 풀 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무로 「내 손으로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만들리라」하고 군인 통감이 결심이 아주 없어질 리는 만무하였다. 다만 새 로운 기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하고 합병을 하되 아무 쪼록 피를 흘리는 일이 없이 한국 편에서 먼저 일본에 합병 되기를 청하는 형식으로 그야말로 가장 원만한 합병을 하자 —이러한 기회를 기다렸다.

통감은 한국 사정을 잘 안다는 사람들을 많이 부러 그 의 견을 들었다. 한국에서 일본을 친하려고하는 파는 누구누구 며. 가장 일본을 배척하려는 파는 누구누구며, 그러한 파중 에는 어떠한 두령과 유력한 인물이 있으며, 그 유력한 인물 의 성격은 어떠하며, 또 한국에 가장 유력한 단체와 인물은 어느 것이며, 그러한 단체의 인물을 복종시키는 방법은 무 엇이겠느냐—이러한 것이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 제목이 었다.

그가 여러 사람에게 들은 것을 종합한 결과는 이러하였다.

가장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는 현재 외부 대신으로 있는 이 원용이다. 그는 머리가 밝고 수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일찍 청국에 세력이 있을 때에 친정파였었고, 아라사가 세 력이 있을 때에 친아파였으며, 일로 전쟁 중에는 형세를 관 망하다가 일본이 이기매 친일파가 되었다. 그가 혹은 청을 친하고 혹은 아를 친하는 것은 정치적. 애국적 견지로 그러 는 것보단 자기 일개인의 정치적 세력을 위함이다. 그러므 로 그에게 남의 위에서는 세력을 주기를 약속하면 반드시 무슨 일이나 그 약속을 하는 이의 뜻을 좇으리라—아무려나 그는 정부 당국자 중에는 가장 능력 있는 인물이다.

다음에 현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 국척 윤 중영 등은 이 외 부 대신에게서 밝은 머리와 수완을 빼어 낸 것이다라고 보 면 잘못이 아닐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송의 뛰어난 야심 과 고집과 윤의 뛰어난 사욕과 좀꾀다.

『한국 귀족은 대개 이러합니다. 이기적이요, 모든 것을 속 임과 음모로만 하려 하고 그리고도 약하고......』

이렇게 한국 양반을 소개하는 어떤 사람이 통감에게 말 할 때에 통감은 재미있는 듯이 픽 웃었다.

그러고 배일당 수령으로는 통감에게 말하는 사람마다 이항 목과 염 참령을 들었다. 그러고는 으레,

『염이란 아주 무서운 줄 모르는 인물이야요, 칼이라도 삼 킬 위인이지오. 조선에서는 드물게 보는 정직하고 기개 있 고 용기 있는 군인적 인물이올시다.』

하고 염 참령의 인격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염은 한 군인이지 정치가는 아닙니다. 큰일을 경 여하는 모략과 수완은 없어요. 이것을 구비한 자느 이 항목 이요—아주 무서운 인물이올시다. 아무 소리 아니내고 가만 히 한 사랍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백려회라는 무서운 단 체를 만들고—그밖에도 퍽 실력 있는 겨여이 많은 모양입니 다......어쨌으나 조선에 하나입니다. 머리로 보든지 수완으로 보든지 성격으로 보든지......』

이 모양으로 백령회는 아주 비밀한 단체로서 아무리 그 내 막을 알아 보려 하여도 알아 낼 수 없다고 그러나 적어도 그 회원이 십만명은 넘으리라고 말하여다.

통감은 무로 일본에 있을 적부터 한국의 사정은 대개 들었 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집 반년에 얻은 지식으로 더욱한국 사람 중에 맛들고 일할 만한 자는 이 원용이나 이 항목이나 둘 중에 하나라고 깨달았다. 귀족 이 평민 이 친일파 이 배 일파 이 부려 먹기에 좋은 이, 사람 값있는 이, 이들 중에 어느 이를 취할까—이것은 꽤 오랜 동안 통감이 마음을 괴롭 게 한 문제였었다.

경술년 오월 어는 날이다. 선생이 학교에서 여전히 금년에 신입한 학생들을 일일이 불러서 그의 가정의 사정과 좋아하 는 바와 특징을 물을때에 의외에 최 선학에게서 전화가 왔 다. 지금 곧 올 터이니 한 시간 동안 회견할 시가니 있는가 를 묻는 것이었다. 선생은 간단히 오라는 말을 전하고 문답 하던 학생의 문답을 끝낸 뒤에 응접실에 혼자 앉아서 담배 를 피우며 최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최 선학은 근래에 선생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러고는 특히 선생과 친한 양을 보였다. 그는 선생의 바로 앞에서 가끔 염 참령의 흉까지도 보았다. 그의 말을 듣건댄, 자기는 모든 계획을 다 잘하였으나, 일은 염 참령이 다 망쳐 놓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염 참령은 도저히 일군이 아니요, 우리나 라에서 큰일을 경영할 이는 오직 선생뿐이라고도 말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선생은 일종 불쾌감이 일어났으나 그래도 최 선학이 반드시 악인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과연 최 선학은 결코 악인은 아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애국심이 있 다. 다만 그는 자기의 꾀와 재주를 너무 믿어 무슨 일을 하 는 데나 정경 대도를 버리고 권모 술수를 베풀어 기병을 쓰 려는 것이 흠이라고 선생은 생각하였다.

그의 계획은 다 실패하였다. 암살하려던 것도 소리만 컸을 뿐이요, 외부 대신의 옆구리를 찌르는데 불과하였고, 돈을 모으려는 것도 수십명 청년을 강도, 공갈, 취재 등의 죄명으 로 감옥에 집어 넣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명예롭지 못한 책임은 오직 염 참령에게 돌아 갔을 뿐이요, 최 선학 자신 에게 아무 관계도 없었다.

최 선학은 두 패 인력거를 몰아 학교로 들어 왔다. 그는 응접실에 들어 와 아주 점잖게 선생께 인사를 하였다. 선생 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새로 지은 양복에 가슴에는 굵 다란 금시계 줄을 늘이는 먼지 잘 떨어버린 중산모를 손에 들었다. 그동안 심히 고등한 생활에 최 선학은 아주 귀족적 태도가 왕성하였다. 그 눈감았다 뜨는 모양 느릿느릿 말하 는 모양이며 말끝마다「어어」를 다는 모양이며 모든 것이 귀족식이다. 누가 그를 함경북도 시골에서 자라난 사람이라 하랴. 다만 가끔 가다가 숨길 수 없는 사투리가 그의 시골 사람임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두어 모금 말없이 빨더니, 방안을 한번 둘러 보아 샐 데가 없음을 안 뒤에 입을 열어,

『오늘 추산 선생을 찾은 것은 좀 중요한......어......말씀을 ......어......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고 다 느리게 하여 오다가 말끝만 잠감 빠르게 맺는다.

『예, 말씀하시지요.』

하고 선생은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한 어조로 대답한다.

최 선학은 잠간 눈을 감고 말을 찾아 내려는 듯하더니 눈 을 번쩍 뜨고 한숨을 내어 쉬며,

『통감이 내게 사람을 보냈어요 날더러 좀 만나자고요. 그 래 두어 번 거절하다가 그래도 할 말이 있다고 하기에 오늘 아침 아홉 시에 관저에 갔었읍니다......가기 전에 먼저 선생 을 뵈옵고 의논을 하려다가 무슨 일인지 알수도 없어서 가 보았지요.』

하고 선생의 기색을 살피려는 듯이 잠간 말을 끊고 선생을 바라본다. 선생은,

『네, 그래 무슨 말이 있었어요?』하고 듣기를 원하는 뜻 을 표한다.

『그래.』

하고 최 선학은 말을 이어,

『동양의 대세며 한국 문제로 이런 말 저런 말 한참 하다 가 나중에 통감이 이렇게 말을 해요—한국의 신진 정치가들 에게 한국 일 맡기기를 원하노라고......이번 내각이 총사직을 하거든 이 항목씨에게 내각 조직을 부탁하고 싶은데 이씨가 들을 듯 싶으냐고..... 직접 교섭하기도 어떠하니 그대가 그 의 동지인즉, 그의 의향을 알아 는 것이 어떠냐고......그러고 이런 말까지 해요—이씨가 내각을 맡아 조직한다 하면 자기 는 힘있게 후원을 하여서 맘껏 수완을 두를 수 있게 하겠노 라고......』

여기까지 와서 최씨는 말을 끊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한족의 웃음이 있었다.

선새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내각을 조직하라」는 말에 잠간 놀라는 빛을 보였으나 다 모든 문제를 해결한 듯한 평정한 낯빛에 돌아 오며,

『그래 무에라고 하셨습니까?』

하고 최씨에게 묻는다.

『가서 선생의 의견을 들어 보마고 그랬지오......의견을 들 어서 일주일 내로 회답을 하마고 그랬어요......모두 의논도 해야겠고......』

최씨는 마치 선생이 으레 이 청을 받을 줄 믿는 듯이 말한다.

선생은 눈을 감고 한참이나 말이 없다. 하학 종 치는 소리 가 나며 교실에서 학생들이 뛰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 은 눈을 번쩍 떠서 마당으로 뛰어 다니는 학생들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잠간 얼굴에 결정하지 못하는 듯한 빛을 보이 며,

『그래 최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하고 묻는다.

『나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의를 실현 할 기회가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 손에 정권만 들어오는 날이면, 우리 이상대로 할 것이 아닙니까—그러니까 선생께 서는 주저마시고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지 중에는 반대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매우 흥분한 어조다.

『글쎄요?』

하고 선생은 또 눈을 감는다.

선생이 기쁘게 응하지 아니하는 기색을 보고 최 선학은 더 욱 열심스러운 어조로 이 기횔 놓쳐서는 아니 될 이유를 설 명하였다.

만일 이번에 선생이 통감이 요청에 응하지 아니하면 반드 시 현재 외부 대신으로 있는 이 원용이가 내을으 맡거나 그 렇지 아니하면 농상공부 대신 송병순이가 맡을 것이다. 그 런데 송은 한일 연방을 주장하는 자요, 이는 송보다 한 걸 음 더 내켜서 합병을 주장하는 자니 이들 중에 누구나 하나 이 내각을 맡는다 하면, 국가의 운명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통감이 선생더러 내각을 조직하라 함은 일종의 최후 수단이다. 한국을 한국대로 그냥 두랴, 또는 아주 일본 의 영토를 만들려 하는 마지막 결정이다. 마지막으로 독립 당에게 한번 정권을 맡겨 봐서 좌우를 결하자는 것이다.

통감도 백령호의 세력을 은근히 무서워한다. 그 힘이 얼마 나 되는지 분명히 아니하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것이다. 합 병을 하긴 쉬운 일이나 합병 후의 일이 근심되는 것은 욎ㄱ 백령회를 꺼림이다. 그러므로 한번 백령회 내각을 시켜 보 아서 잘되면 내버려 두고 잘못되면 백령회 내각의 손으로 합병을 행하게 하자. 그리하는 것이 만전지책이라 함이 통 감의 생각이다.

그런즉, 이 기회에 나서서 선생이 내각을 맡는 것이 마지 막으로 나라를 붙드는 일이라 함이 최씨의 관찰이다.

선생은 최씨의 이 관찰에 동의하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내각의 조직을 맡을 수 없다하는 것 이 선생의 의견이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하신 말씀은 다 옳은 말씀이외다—한번 독립당에게 이를 맡겨 보자. 그래서 독립당의 손으로 일의 끝을 맺게 하자 하는 뜻으로 관찰하신 것은 바른 관찰이십니다.

그러나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어디까지든지 통감과 악수하지 아니하는 것이 우리 무리의 의무외다. 우리 무리는 독립당이이외다. 독립당이므 로 어디까지든지 남의 힘을 빌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라사 의 힘을 빌어서도 아니 되고 영국이나 미국의 힘을 빌어도 아니 됩니다. 우리는 적으로나 크나 우리의 힘으로 우리 일 을 할 의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통감의 힘을 빌어 서 우리 무리가 정권을 잡는 것이 옳겠습니까. 결코 못할 일입니다......만일 우리 무리가 지금 정권을 잡지 아니하면 나라이 망하리라. 아무리 하여서라도 우리 무리의 손에 정 권을 넣어야 되겠다 하면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것은 혁명이외다—우리 힘으로 현 정부를 때려부수고 그리고 정권을 잡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할 때에 최 선학은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이상론이십니다. 실제야 어디 그 리됩니까?』 하고 말을 막는다.

『잠간 나하던 말씀을 더 들으셔요.』

하고 선생은 첫째로는 지금 말한 거소가 같이 대의상 통감 의 청을 들을 수가 없고,

『둘째로는 지금 이 방법으로 우리가 정권을 자는 대야 결 코 우리가 듯한 바를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 면, 우리가 정권을 잡는 날이면 현재 정권을 잡고 있던 양 반 계급은 굳게 결속하여 우리를 방해할 것이요, 모해할 것 이다. 그네가 삼백년 닦아 온 노소론 남북인의 당쟁하던 수 단을 있는 대로 다 쓸 것이외다. 게다가 이가니 송가나 하 는 무리는 우리를 없이하기 위해서는 온 나라라도 없애 버 릴 위인들이 아닙니까?』

『그게야 우리 손에 정권만 들어오면 모두 눌러 버리지요.

그것을 누른 것은 내가 담당하리다.』

하고 최씨는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그는 스스로 내무 대 신이 되기를 기약한 것이다.

『눌러요?』

하고 선생은,

『정권만 가지고 그렇게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만일 정권을 가지고 뜻에 아니 맞는 자를 막 놀려 버릴 수가 있다 하면, 우리 같은 무리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을 수가 있겠어요? 지금 정권을 가진 자가 우리를 미워하기를 우리가 그네를 미워하는 것보다 못지 않것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것도 적은 일이지요—그보다도 큰일이 있습니다.

우리네가 통감이 힘을 빌어 정권을 잡는다 하면, 우리는 통감의 수하에 달린 사람이 됩니다. 통감이 우리에게 정권 을 맡길 때에는 마땅히 우리에게 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외 다. 그 구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것은 모른다 하고라도 구 하는 바가 있을 것은 사실이외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 까?』

하고 선생은 최씨를 치어다본다. 좀 말하기 어려운 듯이,

『그게야 무엇을 구하는 것이 있겠지요.』

하는 선생의 둘째 물음에 최씨는

『자기네야 무론 우리를 이용하려고 드는 것이겠지요. 그 러나 우리는 자기네를 또 이용하려는 것이지요.』

하고 자신 있는 듯이 대답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선생은 다시 엄숙한 태도로 말한다.

『그는 우리보다 힘이 있습니다. 병력이 있고 금력이 있고 지력이 있습니다. 그네는 우리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경험 도 많고 수완도 많은 노련한 정치가들이요, 우리는 젊은 서 생들이외다. 그네가 우리의 이용을 받을 듯합니까?』

선생은 한번 빙그레 웃고 다시 말을 이어,

『최 선생! 우리는 오직 첫 뜻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우 리가 서로 굳게 약속한 바를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정당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一. 결코 남의 힘을 빌지 말자. 의뢰하지 말자.

一. 오직 우리의 힘에만 스스로 의뢰하자.

一. 결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천천히 힘을 기른다는 정경 대도를 밟아 나아가자.

一. 나라 일이란 거룩한 일이니, 거룩한 일일랑 거룩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부정한 수단을 쓰지 말자.

이것이 우리네가 동지 될 때에 서로 굳게 약속한 것이 아 닙니까? 최 선생께서 그동안 잠시 이 약속을 잊어버리신 것 을 나는 깊이 애석합니다. 그러니까 내각 문제는 아주 단념 해 버리시오.』

하고 선생은 할 말을 다한 듯이 몸을 뒤로 기대며 담배를 붙인다. 선생의 얼굴에도 흥분한 빛이 있고 최 선학의 얼굴 에도 흥분한 빛이 있다.

한참 말이 없다.

또 학교의 종 치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은 시계를 내어 보 았다. 바로 오정이다.

최씨는 실망한 듯이 근심스러운 듯이 이윽히 손으로 이마 를 고이고 앉았더니,

『글세, 선생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를 어찌합니까. 지금 선생이 거절하시면 기회는 영 가버리고 말 것이 아닙니까. 송이나 이가 내각을 만들 것이 아닙니까 —송이나 이가 내각을 만들면 반드시 연방이 되든지 합방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이 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분개함을 못 이기는 듯이 입술을 문다.

『아마 합바이 되겠지요.』

하고 선생은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면 어찌합니까?』

하고 최 선학은 기가 막히는 듯이 소능로 테이블을 친다.

『이러한 때에 수수 방관하고 가만히 있어야 옳습니까. 만 여 명 백령회원는 다 무엇에 씁니까?』

선생은 말하기를 줄겨 아니하는 듯이 한참 창밖을 바라보 더니,

『합병이 무섭다고 생각합니까.—내 눈앞에는 합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보입니다.—그것은 영영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민족이 망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합병이 열 번 되더라 도 우리에게 힘만 있으면 아무 때라도 살아 날 날이 있지마 는, 요행히 합병만 면하더라도 우리에게 오늘날과 같이 힘 이 없으면 아무 때에라도 한번은 망해 버릴 것이외다.

만여 명 백령회원? 만명이 그리 많은 것 같습니까. 도 그 만명이 무슨 힘이 있는 것 같습니까? 백령회는 아직은 젖먹 는 어린애외다. 젖먹이를 가지고 일을 한다하면은 무슨 일 이 됩니까? 가만히 젖히나 먹이고 잘 길러서 오는 날 어른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힘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대 세를 막을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있는 것은 그만한 힘 을 기를 힘뿐이외다. 우리가 만일 을미년 독립협회 대부터 성큼한 생각과 요행을 바라는 생각과 남의 힘에 의뢰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천천히 힘을 기르기에만 힘을 썼더면 육년 후 오늘날에는 상당한 힘이 길러졌겠지요.......연방이니 합방 이니 하는 말도 아니 나리 만하게 되었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믿지 못할 것만 믿고, 꼭 해야 할 일은 아니 하므로 밤낮 이 꼴이 아닙니까? 육년 간 어서 나가 죽어야 어서 나가 죽어야 하여 왔거니와 무슨 일이 되었습니까. 지 도자 된 일들이 어서 나가 죽어야를 부르짖기 때문에 백성 의 마음만 들뜨게 하여 진정한 일만 못하게 하지 아니하였 습니까? 만일 그네가 나가 죽자고 부르짖는 대신에 나가 죽 을 준비를 하자고 부르짖었던들 지금쯤은 그야말로 나가 죽 을 만한 힘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은 것이 무 엇입니까?

최 선생 우리의 지금 형편도 그와 같읍니다.—그와 꼭 같습 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에 할 일은 오직 가만히 힘을 기르는 일이지, 결코 있지도 아니한 힘을 가지고 가볍게 움 직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더욱 침통한 목소리로,

『만일 우리가 나라이 망하는 양을 차마 볼 수 없다고 생 각하였던 정에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우리나 죽어 버립시다. 민 충청 모양으로 임 참령 모양으로. 그러나 되지 도 아니할 일을 된다고 동포를 속여서 저는 아니 죽고 남만 죽이는 일은 하지 맙시다. 나는 이로부터 소위 급전을 주장 하는 이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할까. 그래서 그렇지 아니 하여도 없는 동포의 실력을 더구나 없애 버리지나 아니할 까. 그것만 근심이 됩니다.』

하고 선생은 흥분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듯이 벌떡 일어나 서 방안으로 왔다 갔다 하기를 시작한다. 최씨도 더 말할 용기를 잃은 듯이 잠자코 앉았다. 그 얼굴에는 견딜 수 없 는 괴로운 빛이 보인다.

그러나 최씨는 반드시 선생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 었다. 그가 삼년래도 주장해 오던 급진론을 그렇게 일조 일 석에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선생은 말이 이치에 옳은 것 은 최씨도 승인하였으나 그의 감정이 이를 승인하려 아니하 였다.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최씨는 저녁에 한번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돌아 왔다.

최씨가 돌아 간 후에 선생은 점심을 먹고나서 두 시까지 여전히 하교 을을 보고 학교에서 나왔다.

『아아, 인제는 최후로구나!』

하고 혼자 한탄을 하면서 선생은 어디 절로나 가서 생각이 나 할 양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집에는 마침 평안도 지방으로 순회하던 최 선생이 오늘 아 침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선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온후한 최 선생의 얼굴이 문밖으로 쑥 나올 때에, 선생은 갑자기 나오는 번개같은 반 가움을 못 이기어 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피차에 말없 이 손을 곽 쥘 때에는 말할 수 없이 비창한 생각이 두 사람 의 가슴을 턱 막았다.

육년 간 쉬지 않는 노역과 끝없는 근심에 또는 지난번 큰 병에 선생의 용모는 퍽 수척하였다. 삼십세의 혈기가 충장 하고 그렇게도 좋던 얼굴에는 이미 뺨이 깎이고 이마에 주 름이 잡혔다. 삼십 오세의 중년이 된 것이다. 최 선생은 한 해에 한두 번씩 선생을 만날 때마다 선생이 점점 수척하여 가는 것을 근심하였으나 이번같이 심하게 근심된 일은 없었다.

『그렇게 오래 병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도 오지 못한 고......』

하는 최 선생의 눈을 눈물이 고여서 선생의 여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믿고 사랑하는 동지의 건강이 쇠해가는 것을 보는 최 선생의 가슴은 진실로 아팠던 것이다.

선생도 전보다 퍽 수척하고 빛이 검어지고 피부에 탄력이 적어진 최 선생의 얼굴을 이윽히 보고 있었다. 최 선생도 늙었다. 벌써 오십줄이 아니냐? 게다가 지나간 오년 간 백 령회를 일으킴으로부터는 일찍 일주일 동안을 집에 편안히 있어 본 적이 없었고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압록강 과 대동강 사이를 몇 십 번 걸어 다녔는지 모른다. 진실로 그의 생명은 백령회에 바쳐 온 것이다.

『그런데 춘정 병세는 어떤 모양이야요?』

하고 방안에 들어 와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선생은 최 선 생에게 물었다. 춘정이란 김 윤목의 당호다. 독자도 키억하 려니와 김 윤목은 백령회의 황해도 영수다.

『어렵겠어요』

하고 최 선생은 고개를 흔들면서,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하고 게다가 숨이 차서 하니 견디겠어요? 그래 이번에도 만나서 좀 정양하도록 권 하였지마는 들을 사람입니까? 나는 어차피 살날이 몇 날 안 남았으니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다 일을 해야—글쎄 이러는 구료. 그리고는 나와 같이 떠나서 안악.신천 지방으로 순회 를 떠났지요.』

하고 한숨을 쉰다.

선생은 두통이나 나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고이고 한참 앉 았더니,

『그것 안되었습니다. 춘정을 데려다가 입원을 시키지요.

이 더운 때에 약한 몸으로 저렇게 돌아다니면 어찌 됩니 까?』

『나도 힘써 권하였어요. 그런데 염 참령이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회원들을 선동을 하여서 많이 동요가 된 모양이야 요. 평안도도 그렇지마는 황해도. 함경도가 제일 심한 모양 입니다.』

하고 최 선생은 최 윤중의 소위 주전파 암살파라는 급진론 자가 많이 있던 일과, 지금은 그것은 좀 가라앉았으나 그 반동으로 회원들이 시국에 대하여 많이 낙심한다는 뜻을 근 심스러운 어조로 말하다가 선생의 낯빛이 심히 괴로워 보이 는 것을 보고 말을 중도에 끊는다. 선생은 더 자세히 들으 려고도 아니하고 가만히 앉았더니,

『모든 일에 끝이 가까웠읍니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최 선생은 놀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떳다. 그는 일찍 선생이 이처럼 비관하는 말을 들은 일이 없고 이처럼 괴로워하는 낯빛을 본 일이 없었다. 선생은 아무리 난처한 일을 당하더 라도 결코 실망하는 어조나 낯빛을 보인 일이 없었다. 그러 므로 누구나 아무리 실망할 만한 좋지못한 소문이라도 안심 하고 선생에게는 말하였고 말하면 반드시 무슨 해결 방침을 얻었다. 그렇게 결코 실망이나 비관을 모르던 선생의 오늘 에 하는 모양은 몹시 최 선생을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였 다. 그는 무슨 까닭인가 하고 곧 물을 용기도 없어서 얼빠 진 사람 모야응로 우두커니 선생의 눈치만 보고 앉았다. 그 러다가 선생이 다시,

『모든 일에 끝이 가까워 왔습니다. 우리가 애써 버티려던 것은 다 무너져 버리고 마나 봅니다.』

할 때에 비로소 용기를 얻어 최 선생은

『왜 또 무슨 일이 생겼소?』

하고 물었다.

『합병이 된 모양입니다. 미리부터도 기다리고 있던 바이 지마는, 그래도 이렇게 속히 되ㄹ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 어요. 이등 통감이 날더러 한 말도 있으니 적어도 급후 사 오년은 현상대로 갈가 하고 바라고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최 선학시 말을 듣건대. 합방은 몇 달이 아니가리운 모양입 니다. 통감이 날더러 내각을 조직하라 하니 내가 맡으면 나 라는 우리길 망해 버릴 것이요, 아니 맡으면 나라를 통감부 에 갖다 바칠 사람들이 맡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즉 어차피 시국은 끝이 나고 말 것이요, 그러노라면 내나 선생이나는 망명을 하거나 죽어 버리거나 할 수 밖에 없고......그런데 숨 은 기둥이던 목사가 병들어, 춘정이 병들어 뒷일을 누가 맡 아 합니까? 전 목사도 잘 살아야 일년이겠지요—자기는 아직 도 죽을 생각은 아니하는 모양이지마는 의사의 말을 듣건 대, 도저히 어려우리라 합니다.』

선생은 연해 한숨을 쉬고 몸을 비비 꼬면서,

『할 수 있습니까? 선생이나 내나 다른 동지들이나 할수 있는 데까지는 다해 보다가 이렇게도 되는 것이야 어찌합니 까—나라는 망하고......동지들은 병들고......동포들이 여전히 꿈만 꾸고......』

하다가 말이 맺지 못하여 참으려던 울음이 터져 선생은 소 리를 내어 운다. 최 선생도 그만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때 에 마침 선생께 드리려고 정성껏 식히고 꿀을 탄 수박과 사 시를 소반에 놓아 들고 나오던 선경은 두 선생이 우는 광경 을 보고 손에 들었던 소반을 떨어뜨릴 뻔하도록 놀랐다. 그 러나 선생이 눈물을 거두며,

『오, 선경이요? 수박이요? 들어오오.』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땅에 꽉 붙은 듯하던 발이 떨어져 서 방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수박 소반을 방바닥에 내려 놓고 나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선생은 사시를 틀어 최 선생께 드리며,

『자, 수박 좀 잡수셔요.』

하고 자기도 빨갛게 익은 수박을 두어 숟가락 이벵 넣고 씨를 골라 뱉으면서,

『아주 맛난데......오랫 동안 식혔구료!』

하고 웃는 낯으로 선경을 본다. 선경에게는 그 웃음이 도 리어 가슴을 찌르는 듯이 슬펐다.

『네, 점심때에 사다가 여태껏 얼음에 채워 두었어요.』

하면서 선경은 최 선생을 바라본다. 최 선생은 검고 긴 눈 썹에는 아직도 눈물이 달렸다. 얼음 같은 수박을 먹은 두 사람의 정신은 얼마큼 가라앉았다. 그러한 기색을 본 선경 은 자기의 공로를 기뻐하였다. 그리고 우물에 가서 두 선생 의 세숫물을 떠다 드리고 자기는 수건을 들고 지켜 섰다.

선경은 기뻤다.

선생과 최 선생이 세수를 하고 동소문 밖 선생이 늘 가기 를 좋아하는 약사로 나갈 모양으로 웃을 입을 때에 최 선학 에게서 편지 가진 인력거가 왔다.

『아까 말씀드린 일에 관하여 여러 동지와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옵고 오늘 저녁 손택 호텔에서 만찬회를 하오 니 출석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는 편지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다. 선생은 그 편지를 최 선생에게 주 었다. 최 선생이 다 보고 고개를 들기를 기다려,

『도 말썽이 되겠지요?』

하고 귀찮은 듯이 물었다.

『글쎄요, 그러나 출석은 하셔야지.』

하고 최 선생도 별로 흥미 없는 듯이 대답한다. 출석하여 서 할 일이나 말은 선생이 가장 잘 알리라고 믿고 최선생은 다소간 의견을 말하고 싶은 것도 참았다. 그러나 선생이,

『어쩌면 좋아요?』

하고 선생은 심히 절망적인 태도와 어조로 물을 때에 최 선생은 잠자코 있을 수 없다느 듯이 입을 열어,

『내가 말씀해 아시겠어요마는, 선생은 곧 밖으로 나가셔 야지요—자기네 청하느 것을 거절만 하는 날이면 무슨 까닭 이 날 것이니까.』

『밖으로?』

하면서 선생은 모자를 집어 쓰며,

『자, 가시지요.』

하며 한숨을 쉰다.

선경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대문까지 따라 나와서,

『늦게 돌아 오셔요?』한다.

『음, 아마 늦게 돌아 오겠소』

하고 선생과 최 선생은 인력거를 탔다.

손택 호텔에는 이십명 가량이나 모였다. 이층 휴게실에는 양복 입은 이, 조선 옷 입은 이, 둘씩 셋씩 앉기도 하고 섰 기도 하여 목소리도 적게 무슨 이야기들을 한다. 이날의 주 인인 최 선학은 북창 및 안락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한 모금 무슨 차를 마셔 가며 땀을 흘리고 흥분하여 하는 염 참령 더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거면 염 참령은 가끔 큰소리로 최 선학의 말을 가로막고, 그러면 초 선학은 눈짓을 하고 손을 내어 둘러 염 참령 더러 조용히 하라는 뜻을 표한다.

다른 사람들은 최 선학과 염 참령의 담화를 한 마디라도 얻어듣고 싶은 듯이 이따금 그 앞으로 지나가며 슬쩍 곁눈 질을 하나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오래 그 앞에 머물지 도 몫하고, 그럴 때마다 최 선학은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앞을 지나는 사람을 흘겨보고, 그러면 그 사람은 얻어들었 던 소리까지도 잊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저쪽으로 달아나고 만다.

염 참령은 처음에는 이 선생이 이번에 내각을 조직하는 것 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 선학의 말을 듣고 이제는 찬성하 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일 이 선생이 내각 조직을 거절하거든 염 참령이 맡고 또 이 항목 내각이 실패를 하거든 그 다음에 염 참령 내각 을 조직할 것을 말할 때에, 염 참령은 웬일인지 모르나 무 서운 듯하여 힘있게 반대하였다.

『어디 그럴 수가 있나—동지간에 서로 도와 주어야지. 어 디 동지가 실패하거든 내가 그 뒤를 잇겠다—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나.』

하고, 그럴 수가 있나를 수없이 써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치란 그런 것이라 나라 일이란 그렇게 해야된다 는 최 선학의 설명에 염 참령은 싫은 대도 찬성하였다. 찬 성하고 나서는 일종 누를 수 없는 자존심이 발하여,

『그렇지! 내가 이 몸뚱이를 나라를 위해 내어놓았으니까 무슨 일은 못하나—추산이 마다면 내가 맡지!』

하고 발을 덩덩 굴렀다.

최 선학은 이리하여 염 참령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다만 한 마디로, 「이번 추산이 내각 을 맡을 의무가 있다」고만 말하면 두었다. 그러고 대개는 그 뜻을 찬성의 뜻을 표하였고 도리어 크게 경하로운 기회 가 이른 것이라 하여 모두 기뻐들 하였다. 홀로 《매일신 문》주필 박 춘식이 아깔부터 얼굴이 빨갛게 분개한 빛을 보이며 방안에 모인 사람마다 붙들고 추산이 내각을 맡는 것이 옳지 않다. 차라리 옥으로 깨어질지언정 구차하게 통 감부와 손을 잡는 것은 죄악이라 하고 열심히 반대론을 주 장하였으나, 선비의 이상론이라 하여 다만 「그래요, 네」하 고 슬슬 피할 뿐이요, 아무도 그의 뜻에 찬성하는 이는 없 었다.

마침내 박 춘식은 더욱 분개하여 최 선학을 붙들고 언짢은 소리까지 하였으나 염 참령이,

『아따, 동생은 글이나 쓰소.』

하고 떼어놓는 바람에 혼자 중얼거리며 방 한편 구석에 가 서 말없이 앉았다.

이리하여 대세는 내각을 말자는 편으로 기울어졌다. 다만 평생에 말이 없는 유 참령과 이 참판이라는 이름으로 통하 는 이 준령 두 사람은 가타고도 부타고도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 나 그 두 사람은 대세를 움직일 힘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 에 아무도 크게 주의도 아니한다.

최 선학은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을 만족해하는 듯이 한가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여송연을 피웠다. 아가 이 선생이 굳세게 거절할 때에 매우 실망하였으나 이 선생 이 사양하면 염 참령을 내세우고, 염 참령이 또 사양을 하 거나 실패하면 자기가 몸소 나설 것을 생각하고는 조금도 근심됨이 없었다. 그는 오늘 저녁에 이 선생이 결코 응하지 아니할 줄을 안다. 그러나 다수 동지가 다 민당 내각의 조 직을 희망하는 때에 이 선생이 응치 아니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후보를 처할 것을 알고 그 후보는 염 참령과 자기와 중에 하나일 것을 믿는다. 그리되면 대한협회와 자강회와 타협하여 가지고 염 백윤 내각 또는 초 선학 내각을 조직하 자. 한번 이리하여 정권이 손에 들어오면 한국의 일을 내 뜻대로 할 것이라 하는 청년다운 야심의 꿈에 취하였다.

〈일국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렸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 최 선생은 더 할 수 없는 자존심과 기쁨 을 느꼈다.

이윽고 이 선생과 최 선생이 전후하여 들어 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문으로 향하여 나가서 서로 다투어 가며 선생과 악수를 하였다. 악수를 하고 나서도 물러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과 악수하는 동안 그 곁에 지켜 섰다.

염 참령도 오래 간만에 만나는 듯이 힘있게 선생의 손을 잡 아 흔들며,

『추산! 내가 아우님께 사죄할 것이 많소!』

하고 군입답게 껄걸 웃는다.

맨 나주엥 최 선학이 약간 허리를 굽히고 선생의 손을 잡 으며,

『내가 가 뵐 갠데 여러분 찾노라고......』

하고 인력거만 보내어 청한 것을 사과한다.

최 선생을 아는 이가 오륙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 름을 소개할 때에는 「네」하고 한번 더 주의하여 보았다.

마침내 선생은 방 한편 구석에 부쳐 모양으로 우두커니 앉 았는 박 춘식을 보고 그 앞으로 걸어가서 손을 내어 밀었다. 박 춘식은 억지로 하는 듯이 일어나 선생의 손을 한번 쥐어 보고는 말없이 도로 걸터앉 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선생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재상이로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실로 이날에는 선생은 모든 사람에게 위인으로 보였다. 영 웅으로 보였다. 선생이 약간 허리를 굽혀 박 춘식과 악수를 할 때에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 온 듯 하였다.—그렇게 오늘은 이 사람들이 선생을 우러러 보게 되 었다.

그들은 평소에 반드시 선생을 사랑하는 자도 아니었었고 더구나 숭배하는 자도 아니었었다. 도리어 그를 한 고집한 사람, 영웅의 기상이 없는 사람이라 하였고, 그 하고 선생의 얼굴을 이윽히 본다. 선생은더욱 견딜 수 없 는 듯이 약간 고개르 숙인다. 사람들의 시선도 선생에게로 모였따.

『그런데.』

하고 최 선학은 말소리를 낮추어,

『선생께서는 이것을 사양하십니다. 본인 정성을 다하여 권하였건마는 선생은 굳게 사양하십니다.』

하고 한번 더 선생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본인은 선생께서 결코 사양하시지 못해 할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본인의 힘만으로는 선생의 뜻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전 국민을 대표한다 할 만한 여러 분 동지께 이 뜻을 고하여서 우리가 힘을 합하여서 선생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올시다.』

최 선학은 일층 소리를 높이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힘있는 목소리로,

『선생께서는 결코 일반 국민의 우려하는 바를 어그리시지 못하실 것이올시다. 우리가 국가와 국민이 이름으로 청할 때에 선생께서는 그것을 물리치지 못할 동지를 지셨다고 본 인은 믿습니다—여러분은 본인의 뜻에 의감하십니까?』

하고 말을 끊을 때에 염 참령을 서두로 하여 모든 사람들 은,

『동감이요!』

하고 박장을 한다.

이때에 박 춘식이 술과 흥분을 겸하여 주호을 부은 듯이 빨간 얼굴을 번쩍 들고 일어나며,

『아니요!아니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듯이 박 춘식에 게로 고개를 돌린다. 염 참령이 냉큼 뛰어 가서,

『아우님, 앉으라우!』

하고 박 춘식을 도로 앉힌다. 사람들은 흥에 깨어진 듯하 였다. 이상하게 비창한 기운이 방안데 돈다.

사람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최 선학은

『이런 사정이올시다. 그런즉 여러분께서는 각각 생각하신 바를 말씀하셔서 추산 선생의 뜻을 움직이도록 하시기를 바 랍니다. 자 다들 잡수십시오.』

하고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면서 앉는다.

과연 최 선학의 연설은 웅변이었다. 문법 하나 틀리지 아 니하고 억양이든지 몸짓이든지 어느 것 흠할 것이 없다. 더 욱이 그가 「합해야 된다. 한맘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외칠 때에는 열정도 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 혀 이 짧은 연설에 취하여 버렸다. 그 말속에 있는 것은 모 두가 진리인 듯하였다.

최 선학이 연설을 그치고 식탁에 도로 앉을 때에 염참령은 심히 만족한 듯이 두어 번 고개르 흔들면서 선생더러,

『추산! 어찌할 수 없이 나서야 되겠소.』

하고 껄걸 웃는다.

선생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대 한협회장 김 경진은 그 주름 잡히 조그마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그러고 말고요, 추산이 아니 나서면 창생에 하오?』

한다. 다년 궐내와 외교에 다니던 노 정치가의 이 말에는 더욱 힘이 있는 듯하였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나라를 그르쳐 놓은 죄인이요, 또 다 낡아서 인제부터는 추산 같은 이의 뒤나 받들어 드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지요.』

하고 김 경진은 가장 겸손한 태도로 말한다—.

염 참령과 김 경진이 선생을 권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다 무에라고 한 마디씩은 선생이 나서야 할 것을 권한다.

머리들은 모두 선생을 향하고 모였다. 그러나 선생은 아직 도 말이 없이 다만 여러 사람의 말을 주의 하였는 듯이 가 끔 고개만 끄덕끄덕할 뿐이다.

박 춘식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그림을 치어다보는 데도 싫증이 난 듯이 음식만 먹고 앉았더니, 혼자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고 창에 붙어 서서 한가히 바깥만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주의하는 이는 없었다.

대한협회장 김 경진은 선생의 입에서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자기가 한 마디 더 해야겠다는 듯이,

『추산은 잘 잇겠지마는 바로 독립협회 때 요구료. 그때 내가 외부 협판으로 있다가 일본 공사로 가려던 길에 독립 관이 변이 나지 않았소? 그때 나도 퍽 싸웠소, 인제는 새로 운 사람에게 국정을 맡겨야 된다고 독립협회에 국정을 맡기 자고 내각회의와 있을 때마다 싸웠지요. 학부 대신 하나이 나와 뜻이 맞았읍니다—그러나 들어야지요! 그래 나는 폐하 께 즉주까지 하였지요. 암만 해도 새 사람들에게 국사를 맡 겨야 된다고......폐하께서는 총명하시니까 그렇다고 말씀은 하시지만 신하들이 다 그따위니 되나요? 독립관 행행하실 날에도 나는 울며 간하였지요, 행행을 하셔야 됩니다고. 그 때 참정 대신도 그랬지요. 한 것을 외부 대신이 우겨서 그 꼴을 만들었더랍니다. 사형으로 말하자면 참정 대신을 골리 자는 것이지요—흉악 한 인물입니다. 지금도 안 그러오?』

하고 눈을 꿈쩍한다.

『허니까.』

하고 김 경진은 감개 무량한 듯이 말을 한다.

『그때는 지나간 일이라 후회 막급이지마는 이번에는 꼭 추산이 국사를 맡으셔야지.』

말을 마치고 김 경진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선생을 바라 본다.

『자, 추산! 인제는 대답을 하오!』

하고 염 참령이 가슴을 쑥 내어 밀며 재촉한다. 다른 사람 들은 선생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숨소리를 죽이고 선생을 바라본다.

선생도 인제는 무슨 대답이나 하여야 할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괴로웠다.

일국에 재상이 되는 것, 그것은 반드시 싫은 일은 아니다.

하물며 국가가 위대할 때에 만인이 희망을 한 에 지고 나서 서 그 국가를 반석 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 어떻게나 쾌한 일이랴. 인생의 공명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에서 더한 것 이 어디 있으랴. 선생도 확실히 공명욕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선생은 너무도 밝히 알았다.—자기가 나서서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결코 국가를 위해서나 배령회를 위해서나 또 는 자기 일신을 위해서나 결코 이익도 아니요, 읠도 아닌 것으 알아싿. 그 가 한번 맡은 날에는 통감부에서는 그의 뜻대로 하기를 요구할 것이요, 귀족패에서는 신내각이 미운 까닭으로 다만 그것을 전복시키지 아니하고는 속이 시원치 못한 까닭으로 온갖 음모와 궤홀을 쓸뿐더러 나라르 들어다 가 남에게 바치는 일까지라도 할 것이요. 또 지금은 이렇게 성심으로, 열심히 자기더러 내각을 맡기를 권하는 이들도 한번 자기가 나서는 날이면 시기와 부당한 요구로 자기를 대항할 줄을 너무 잘 안다. 내각이 된 뒤에느 말 말고 대량 으로 각원을 택할 때부터 벌써 수 없는 싸움과 원망과 음모 가 생길 줄을 너무 잘 안다.

저들은 그렇게도 충성되고 털끝만한 사심도 없는 이 충무 를 죽인 자의 자손이 아니야. 적병이 서울까지 밀어들어 와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달아나던 길에도 하루만 적병이 아니 오면 시기와 음모를 하던 자의 자손이 아니냐. 어떻게 그네 를 믿으랴. 어떻게 그네가 이 위태한 때에 「한맘이 되고 한 뜻이 되어」국사를 위하여 사생을 같이 할 줄을 믿으랴?

〈옳다.! 모든 것은 새 백성을 만들어 놓은 뒤에 일이다!〉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선생의 머리에 번개같이 빠르게 힘있게 뛰어 나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선생은 사람들을 돌 아보았다.

그네는 다 순량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조그마한 악의 도 있어 보이지 아니하고 다 진정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들 이다. 더욱이 이 자리에서는 그러하나 — 모두 순결하다. 서 로 쓸어안고 뺨들이라도 비비고 싶듯이 정다와 보인다. 지 금 만일 누가,

『여러분 우리는 한맘 한 뜻이 되어 사생을 같이 합시 다.』

하고 외치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럽시다. 그러고 말고요!』

하고 팔을 벌리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지금 이상한 기회에 흥분된 이 상한 열성이 식는 날이면 수백년 묵은 시기와 책임전가(責 任轉嫁)의 독한 핏기운이 이렇게 아름답던 영혼들을 마취시 켜 버릴 것이다.

선생은 마침내 결심이 생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선생이 말이 없는 것을 근심되게 갑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하였다. 염 참 령은 전신이 흔들리도록 그 큰손을 수없이 마주쳤다. 늙은 김 경진까지도 박장을 하였다. 박수 소리가 그치자 사람들 의 시선은 모아 쓰는 화살 모양으로 선생의 여윈 얼굴에 향 하였다.

『여러분! 내 맘은 터지도록 아픕니다. 내 일생에 이렇게 맘이 괴로워 본 경험을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선생은 말을 낸다.

『여러분의 말씀을 들어야 옳은가, 거절해야 옳은가, 의리 를 지키랴, 요행의 이익을 바라랴, 이 목숨을 남겨서 만일의 성공을 기다리랴......』

말이 맞지 못하여 선생의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슬픔에 눌리어, 느꼈다. 염참령 은

『우후.』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박 춘식은 식탁에 이마를 대고 흑흑 느꼈다. 최 선학만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입을 바 싹 다물었다. 김 경진 노인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조는 사 람 모양으로 끄덕한다.

『나는 여러분의 권하시는 뜻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께서는 내가 거절하는 뜻도 잘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내 몸을 바쳐서 조금 국가에 도움이 되리라 하면, 부 탕 도회라도 사양치 아니하겠습니다. 그러나 내 몸이 나섬 으로 국가나 국민에 수치가 있으리라 하면, 하늘이 명하시 더라도 나는 이 몸을 내어 놓치 못하겠습니다. 이 몸이 중 한 것이 아니라, 나라이 중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절박한 줄을 압니다. 사랑하는 조 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버티지 못하는 정이 얼마나 쓰 리겠습니까?

나는 지나간 육년 간 여러분과 같이 이 나라를 버티어 볼 양으로 있는 정성은 다하였습니다. 삼천리의 산천이 나의 가엾은 정성을 조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힘이 없습 니다—. 여러분에게도 힘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슬픈 일을 보고도 그것을 바로 잡을 힘이 없는 자는 손으 로 목숨을 끊어 그것을 보지 말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슬프고 부끄러움 속에서 힘을 기르거나 이 두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몸도 지치고 맘도 지쳤습니다. 또 내 앞에 오려 는 슬픔을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 큰 슬픔입니다.—나는 더 이 목숨을 남겨 둘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하던 이가 죽는 날에 나도 이 목숨을 끊어 사랑 하는 이의 무덤 곁에 묻히려 하는 것 밖에 아무 소원이 없 습니다.』

이렇게 말을 맺고 선생은 기절하는 사람 모양으로 기운 없 이 교의에 뚝 쓰러진다. 염 참령을 참다 못하여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통곡한다. 최 선생을 안아 일으켜 이마를 만진다.

『우우.』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박 춘식이다. 그는 고개를 내어 두르며 소리를 내어 운다.

온 방안은 울음 판이다. 이상한 울음소리에 놀래어서 밖에 사람들이 퉁퉁하고 모여드는 소리가 들리나 일절 사람을 들 이지 말라고 일렀으므로 감히 문을 여는 자는 없었다.

염 참령은 벌떠 r일어나서 비틀비틀하는 걸음으로 선생의 곁으로 가더니 선생의 의자 뒤에 끌헝 낮아 선생을 바라보 며 두 손을 치어 들고,

『추산! 아우님! 나를 용서해 주오! 이 놈이 육년 전 굳은 맹세를 잊어버리고 추산을 미워했소! 추산을 방해했소!』

하고 운다.

선생은 염 참령을 붙들어 일으켰다. 염 참령은 선생을 껴 안고 그 뺨에 자기의 수염 많은 뺨을 비비며,

『아우님! 용서하오! 다시는 아우님을 배반하지 아니하리 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났다. 최 선학은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이리하여 이 회는 유두 무미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선생이 최 선생과 함께 집에 돌아 온 것은 자정 후였다.

오늘 저녁에도 선경은 수박 하나를 갖다 놓고 기다려다가 들어 가 잘 모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을 먹으려고도 아니하고 말없이 자리에 누웠다.

칠월의 더운 해는 넘어가고 화계사(華溪寺)의 솔숲 속에는 벌써 서늘한 어둠이 기어 내린다.

선생은 저녁상을 물리고 지팡이 하나를 끌고 나서서 뒷 암 자를 찾아올라 간다. 사흘 전에 온 빗물이 아직 남아서 낭 떠러지 밑 시내에서는 졸졸 물 굴러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시내 건너 숲속에서는 음침한 부엉의 소리가 울어 온다.

『부엉! 부엉!』

선생은 발을 멈추었다. 부엉이는 인적에 놀란 듯이 잠깐 소리를 그치더니 선생이 다시 발을 옮기려 할 때에 또 「부 엉! 부엉!」하고 울기를 시작한다. 올라 갈수록 골은 더욱 깊어져서 길이 아니 보이도록 어둡다. 산마루터기에는 은 갈고리 같은 초생달이 걸렸으나 그까짓 것은 있으나 없으나 하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부엉의 소리만 어둠 속으로서 청승스럽게 울어 와서 사람의 비감을 자아낸다. 선생은 슬 픔에 찬 사람 모양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쥐 며 한걸음 한걸음 어두운 것을 찾아올라 간다. 「썰썰」하 는 벌레 소리가 점점 터질 때쯤하여 「땡땡」하는 쇠소리가 울어 온다.

『암자다!』

암자에는 조그마한 석유 등장불이 서너 개 늙은 중의 눈 모양으로 깜박깜박하고 역시 조그마한 금부처 앞에 노승 하 나가 저녁 예참을 드리노라고 목탁을 딱딱 두드리고는 중얼 중얼하면서 수없이 절을 한다. 그 늙은 목소리도 낡은 목탁 소리와 같이 생기가 없다.

『지심귀명례......아라바지나 사바교주 친백억화신 서가무니 를 지심귀명례 과거 삼촌 현재사위 칠여래불.』

이 모양으로 「지심여래」를 힘 주어 외우고 무슨 무슨

「불」하는 「불」자를 길게 뽑으면서 똑딱 목탁을 두드리 고는 한 무릎을 끓고 또 한 무릎으로 끓고, 한손을 땅에 짚 고 또 한손을 당에 짚고 이마를 땅에 대고 이윽히 엎디었다 가는 다시 이마르 들고 한손을 들고는 또 한손을 들어 목탁 을 딱딱 두드리면서, 일어나 단 위에 앉은 조그마한 금부처 를 가는 누느로 쳐다보며, 새로이 소리를 가다듬어,

『지심귀명례 찬탄미타 시와계불 저멸승죄 삼오부울.』

하시고는 또 아까 모양으로 딱딱 목탁을 두드리면서 절을 한다.

모든 불을 다 부르고 나서는 「불타야중」을 부르고 「달 마야중」을 부르고 「보살」들을 불러 일일이 「지심귀명 례」하면서 목탁을 딱딱 두드리고는 끝이 없는 듯한 절을 한다.

『지심명례 만허공 편법계 성타보익 진사보살 마하살.』

하고 「살」자의 「ㄹ」을 수없이 끌어 낼 때에는 이 암자 와 이 천지가 모두 그 소리로 차는 듯하다.

선생은 공손히 두 손을 읍하고 한편으로 비켜서서 노승의 예참하는 양을 보았다.

그러할 때에 그의 맘속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하고 도 경건한 감경이 안개 모양으로 피워 올랐다.

이 깊은 산속에 혼자 숨어서 사람이야 보거나 말거나 제불 보살과 삼개 중생을 다 보낸 그 노승이 심히 거룩하게 보였다.

진실로 맑은 양심을 가진 자일진텐, 이 세계를 볼 때에 어 찌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맘이 나지 아니하랴. 어찌 차마 그네와 함께 죄를 지어 그네의 죄를 무겁게 하랴. 진ㄱ실로 맑은 양심을 가진 자면 반드시 저 불쌍한 중생을 건지리라 는 원(願)이 발할 것이다—.

『원공법계 제중생 동입미타대 원해!』

하고 노승은 마지막으로 긴절을 하고 일어섰다.

노승은 예참을 그치고 밖으로 나오더니 마루 북편에 그려 붙힌 그림 앞에서 또 절을 하여 가면서,

『금징감로다 봉헌삼보 전감찰건간심 원수아람수.』

하고 「원수아랍수」를 구슬프게도 세 번이나 길게 떨리게 부른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섬돌에 내려 와 선생 앞에 합장하면서,

『올라 오십시오.』

하고 인사를 한다. 선생은 공손히 답례를 하고 노승이 권 하는 대로 올라 앉았다.

『소승 저녁 먹고 나오겠습니다. 아무 것도 보실 것도 없 어서......,』

하며 한번 읍하고 뒷방으로 들어간다.

선생은 노승을 들여 보내고 호낮 마루에 걸터앉아서 가만 히 생각에 취하였다—.

그렇다. 죄 많은 세상이요. 괴로운 중생이다. 이 중생을 건 져 낼 힘이 없을진댄, 마땅히 산간에 수멍 중생을 건져지다 하는 축원을 할 것이다. 목숨이 마칠 때까지 「삼계중새을 건져지이다 건져지이다」하고 축원을 할 것이다. 그 축원이 들어질까 말까 그것은 나의 알 바—아니다. 다만 중생의 괴 로워하는 꼴을 눈을 가지고 차마 못 보겠으니 산간에 숨어 축원을 하는 것이다.

아아, 축원! 우리 인생으로 축원 밖에 더할 것이 무엇이랴.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나? 사람이 어찌 사람을 괴로움에서 건져 내나?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눈물 섞인 간절한 목소리 로,『삼계 중생을 건져지다 건져지다.』

할 수 있는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선생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일생을 생각하였다. 십 팔세에 평양에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이십년 가까운 동안에 나는 이천만 조선 사람을 건져볼 양으로 있 는 애는 다 써 보았다. 그러나 그리하여 얻은 바가 무엇인 고? 붙들려던 나라는 넘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건지련던 동 포들은 여전히 멸망으로 향하지 아니하느냐? 인젠느 삼천리 강산에 이몸 하나도 담을 곳이 없어 한 많은 이 목숨을 끊 어 버릴 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느냐? 내가 이러는 동안에 저 노승은 욕심도 없이 다툼도 없이 남을 미워함도 없이 남 에게 미움을 받음도 없이 이 산간에 혼자 숨어 삼계 중생을 위하여,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의 한없이 큰 축원을 하고 있었다. 그의 홀로 숨어하는 축 원이 도리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으로 중생의 굳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하였는지 어찌 알랴. 중생의 찬 정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였는지 어찌 알랴.

이렇게 생각하면, 선생 자신의 생활은 모두 헛된 것 같고 저 노승의 생활이 도리어 훨씬 거룩하고 훨씬 가치가 높아 보인다.

「지심귀명례......서가무니불」「지심귀명례불타야중」하던 그 노승의 떠드는 우는 듯한 그러고도 티끌티가 조금도 없 는 목소리와 그것을 화하여, 「딱딱딱」울던 목탁 소리가 마치 오래 잊어 버렸던 그리운 기억과 같이 극히 그윽하게 백단 향내 모양으로 향기롭게 귀에 울려온다. 선생은 그 기 억을 더욱 분명히 하려는 듯이 일어나 아까 노승이 절하던 곳을 들여다보았다. 금부처 바로 앞에 걸린 옥등잔에는 참 기름 불이 깜빡깜빡하고 불단에는 까맣게 때묻은 무슨 경문 이 놓였다. 벽에 걸린 노승의 가사가 밤 바람에 약간 흔들 린다.

또 어디서 부엉의 소리가 울어 온다.

『부엉! 부엉!』

고요한 산의 밤은 가는 등잔불과 부엉의 소리의 차지다.

아아, 어떻게나 슬픈 경갠가 어떻게나 고요의 번뇌를 자아 내느 경갠가 선생은 눈물이 날 듯 날 듯하여 일어나 마당에 거닐었다.

선생은 오늘처럼 정신이 흔들린 일이 없었다. 선생으 일찍 자기의 믿는 바와 행하는 lf에 대하여 조금일다ㅗ 의시을 품 은 일이 없어쏙,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일이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한번 옳다고 작정한 일이 면 아무러한 말에나 아무러한 일에도 휘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러첨 그는 자신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므 로 그가 온 정신이 흔들리도록 깊은 감화를 받은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이십년 전 평양 감옥에서 양대인에게 처음 성 경을 받아 읽을 때이었을 것이다. 그런 뒤에는 이번에 이 노승 예참을 보고 처음 정신이 흔들린 것이다.

세상 영화를 다 버리고 홀로 산 속에 숨어 삼게 중생이 제 도되기를 빌기로 일생을 마치는 노승의 생활을 볼 때에 자 기의 생각이나 사업은 심히 적고 값없는 것같이 보였다. 너 무나 속되고 너무나 악착한 것같이 보였다. 마치 조그마한 시냇물이 가이 없는 저 바다를 대한 것처럼 아주 부끄럽고 성명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아아, 그 끊임없는 계획과 노력, 그 끊임없는 근심과 걱 정, 끊임없는 피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고 이런 것이 이 천만 중생에게 과연 몇 푼어치나 괴로움이 덜고 행복됨을 주었는고? 이십년의 쉬임 없는 노력이 마침내 남겨 놓은 것 이 무엇인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선생은 하염없는 한숨을 쉬었다.

〈아아, 서른 일곱! 벌써 사십이 내일 모레가 아니냐. 사십 사십! 사십이라면 인생의 일생은 확정이 되는 것이다. 더 나 아가려야 나아갈 길이 없고 더 자라랴 자랄 때가 없는 것이 다. 사십 사십! 짧은 인생의 삼분의 이! 이것을 결과 없는 노력에 허비하여 버린단 말가.

그동안에 몇 번이나 맛난 밥을 먹었고 몇 번이나 근심 없 는 잠을 잤던고. 내 입이 몇 번이나 시름없는 생명의 기쁨 으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러 보았던고! 몇 번이나 사랑하는 동무들과 같이 어린애 모양으로 천진 난만한 이야 기를 하며 뛰놀았던고? 마음놓고 실컷 웃고, 마음놓고 실컷 울고 마음놓고 실컷 소리를 쳐본 것은 몇 번이나 되었던고?

아아, 나의 일생은 질곡의 일생이요, 노역의 일생이었었다.

말 한마디 행실 하나를 마음놓고 하여 본 일이 없었다—. 이 라하면 나라에 해나 안될까, 저리하면 국민의 수치나 안될 까, 혹 내가 다른 동포의 좋지 못한 본이나 안될까—나의 이 십년 생활은 「나라」라는 멍예를 메고, 「나라」라는 굴레 를 쓰고, 「나라」라는 흠길을 걸어 온 생활이다. 나에게는 즐거운 소년 시대도 없었다. 열 여덟 살 되는 어린 때부터 노인의 생활을 하여 오는 동안에 진실로 노인의 시대를 당 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선생의 과기 생활은 쳐다보기만 해도 지 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듯하였다.

〈아아, 자유로운 생활이 그립다!〉 하고 선생의 마음속에서는 쉿소리같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 린다.

〈아아, 근심도 없고 돌아보는 것도 없는 경영하는 것도 없는 자유의 생활이 그립다!〉 불량한 소년들이 잔득 술이 취하여 기생들을 끼고 딩굴며 갖은 추태를 다 부리는 그러한 생활이라도 자유로운 생활이 그립다.

모든 것을 다 집어 내던지고 한징 없이 가고 싶다!

천리나 만리나 십만리 백만리나 남그에나 북극에나 광야에 나 산림 속에나 깊은 산속에나 어디나 가고 싶다. 가고 가 고 가고 가서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고 영원히 돌아 오지 않고 싶다.

『부엉! 부엉!』

하고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다다랐다. 수풀은 더욱 깊어서 길은 더욱 캄캄하다. 선생은 알 수 없는 근심 과 슬픔 속에 꿈길을 걷는 모양으로 한걸음 한걸음 옮겨 놓 았다.

『선생님이시오?』

하고 불의에 어디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선생은 깜짝 놀 래서 우뚝 서며 어둠 속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때에야 비로 서, 〈선경의 소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난다. 그러나 선경이가 여기 올 리가 있을까?

『누구요?』

하고 선생이 물었다.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빨리 가까이 오 더니,

『선생님!』

하고 무슨 무서운 것에 놀랜 어린애 모양으로 선생의 가슴 에 얼굴을 묻고 매어 달린다. 선생도 두 팔로 그 흰그림자 를 꽉 껴안았다. 그 흰 그림자도 두 팔로 선생의 허리르 껴 안아싸.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은 선경이었다.

선경이가 와서 푹 안길 때 또 자기가 두 팔로 따듯한 선경 의 몸을 푹 안을 때에 선생의 피는 일시에 머리로만 몰려 올라 오는 듯하여 한편 옆으로 쓰러질 듯이 정신이 아뜩아 득하였다. 두 사람이 떨어져 마주 설 때까지에는 얼마나 시 간이 지냈는지 두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선경이가 어떻게 왔소?』

하고 앞에 선 선경의 희미한 그러고도 하얀 얼굴을 보고 말하는 선생의 목소리는 숨찬 듯하고도 떨렸다. 그리고도 지금 무의식 중에 한 일이 심히 잘못된 듯하여 선생의 얼굴 은 화끈화끈하였다. 선경도 조금마한 가슴이 들먹거리는 것 을 억지로 진정하려는 듯이 가슴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있 다가,

『선생님 큰일났어요. 집에 선생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오 빠만 잡혀 갔어요......그리고 선생님은 어디 계시냐고 저를 붙들고 묻기에 모른다고 그랬지요......했더니 모를 리가 있느 냐고 대라고 그러겠지요......그래도 모른다고 했더니 아마 어 디로 피신을 한 모양으로 저희끼리 일본말로 중얼거리고 갔 어요......바로 여섯 시 조금 지나서 그랬읍니다......그래서 그 것들 다 가기르 기다려서 뒷문으로 빠져 나왔습니다......그리 구는 통안까지 걸어 와서 인력거를 잡아 타고 나왔어요』

하며 한숨을 쉰다.

『최 선생 오늘 들어 가신 것 보았소?』

하고 선경의 말을 가만히 듣고 섰던 선생이 고개를 끄덕끄 덕하며 묻는다.

『네, 최 선생은 잠간 들리셨다가 전 목사 댁에 다녀오마 하시고 가시더니 이내 안 오셨어요......어디서 붙들리시지나 않았나......』

하고 선경은 선생을 쳐다본다.

선생은 고개를 들어 별이 총총한 하늘을 치어다보며, 무엇 을 생각하는 듯이 말이 없다. 그러더니 한걸음 앞으로 옮겨 놓으며,

『자, 내려 갑시다.』

하고 선경을 재촉한다.

선경은 선생이 재촉하는 대로 돌아 서서 두어 걸음 내려 오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이 돌아 서며,

『선생님 오늘 바믕로 달아나셔요......여기 계시다가는 위태 하십니다.』

하며 가려고 아니한다.

선생도 우뚝 섰다.

『제가 선생님 피하실 길을 다 예비해 놓고 왔어요.』

하고 선경은 한걸음 선생 곁으로 가까이 다가 서며,

『선형이 집이 한강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다가 선애를 선 형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선형이더러 선생님 타실 배를 얼 른 하나 준비하라고......그랬으니깐 지금으로 곧 가셔요—한 강으로......그래서 배를 타고 몸을 피하셔요.』

선생도 자못 앞일이 망언하였다. 자기가 내각을 조직하기 를 거절하면 반드시 이러한 이링 새길 것은 예기하였다. 그 렇게 사실로 당하면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벌서 합병 내각이 성립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마 합병에 관한 모든 계략은 시시각각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리되면 합병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무리에게 대하여는 고압수단을 쓸 것도 분명한 일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잡힐 것이다.

잡혀가면 합병에 찬성을 하다거나 적더라도 합병에 반대하 는 아무러한 말이나 일도 아니하고 가만히 있겠노라고도 맹 세하지 아니하면 이 나라에 붙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할꼬?

『나의 갈 길은 죽읍이나 망명이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 을 것이다.』

이것이 선생이 지금에 선 갈래 길이다.

선생은 손택 호텔에서 성명한 바와 같이 죽어 버릴 결심이 었었다. 자기의 일생을 전심력을 다하여 붙들려는 나라, 하 도 오랫동안 사랑과 생각의 목적이 되었었기 때문에 인제는 마치 애인과 같고 자모와 같이 모든 의리의 관념을 떠나 오 직 간절한 애정으로만 굳게 맺혀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 리라. 나라의 이름이 없어지는 날 없어진 나라의 이름을 부 러 실컷 우리라 하고 한 칼로 이 목숨을 끊어 버리리라—이 렇게 결심을 하였었다. 그는 늘 한번 결심한 것을 변하지 못하는 자기의 성질을 알기 때문에 이 결심을 할 때에는 자 기도 스스로 무서웠다. 그러나 이 항목이라는 사람 자기로 는 이 경우에 죽어 버릴 길 밖에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 선생은 선생의 이 결심을 추측하여 알았다. 선생이 학 교에 관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여 남에게 넘기고 최 선생에 게 백령회의 장래를 이삼일 간이나 밤을 새워 가며 말할 때 에 또는 선생이 가끔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멍하니 앉았 는 양을 볼 때에 최 선생은 선생의 결심을 못 알아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최 선생은 어이 돌아서 선생이 경솔히 목숨을 끊어서는 되지 아니할 일, 일본에 있는 백령회 일은 자기가 맡을 것이니, 선생은 해외로 나가서 그와 같은 사업 을 하여야 한다는 일을 누누이 말하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은 무슨 불쾌한 일이나 있는 듯이 미간을 찌푸 렸다.

최 선생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요, 선경이조차 선 생의 목숨을 위태하게 여겼다. 더욱 선형과 선애와 셋이 앉 은자리에서 최 선생이,

『이제부터는 꼭 선생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하나 있어야 겠는데.』

하는 말을 들을 때에는 선경은 여자의 예민한 직각으로 선 생에게는 앞에 생명에 관한 큰 위험이 이다 함을 깨달아 몸 에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오늘도 최 선생을 보고,

『선생님 안녕하셔요?』

하고 물을 때에는 「돌아가지나 아니했어요」하는 뜻이었 었고 아까 혼자 인력거를 타고나올 때에도 돌아 가시지나 아니했나. 방금 칼로 목을따고 피를 철철 흘리며 돌아가시 는 중이나 아닌가 하여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차 며 급한 것 보아서는 인력거를 뛰어 내려서 풀밭으로 나무 숲을 함부로 달려가고 싶었다. 절에 와서 선생이 뒷 암자로 오라 가셨다는 말에는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앞에서 사람 의 발자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을 때에 곧 선생으로 알았 다. 얼마나 반갑고 기뻣으랴. 이제는 내가 선생을 붙들었으 니 아무런 것을 해서라도 선생을 외국으로 끌고 나가리라 진실로 아무런 짓을 하여서라도!

이러한 결심으로 선경은 선생더러,

『어서 피하셔요.』

하고 조른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어떠한 대답을 하시나?

선경은 조마조마한 맘으로 선생을 쳐다보았다.

선생이 말없이 우두커니 섰는 것을 보고 선경은 심히 마음 이 조리는 듯이 선생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네, 이제 곧 한강으로 가셔요. 저도 다 준비해 가지고 왔 는데요』

하고는 갑자기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은 깜짝 놀라며,

『선경이가 무슨 준비요?』하고 한걸음 물러선다.

『저도 선생님 따라 가요! 어디를 가시든지 저도 선생님을 따라 가요......저도 굳게 결심을 하였으니깐 절더러 잘못이다 못한다 그러시지 마셔요. 제가 듣기만 어려우니깐......저는 어머님께도 마지막으로 하직을 하고 왔습니다.』

하고 선경은 무슨 말이나 다할 용기를 얻은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선생을 쳐다보며 겁 없는 어조로 바르게 힘있게 말을 한다.

선생은 더욱 놀랐다. 선경은 이미 어리광하는 어린 여자다.

그는 갑자기 지식과 의지가 원숙한 어른과 같이 된 것 같 다. 선생은 지금까지에 이렇게 어른 된 선경을 본 일이 없 었다. 게다가 선경이가 선생을 따라 가기로 결심하고 그렇 게 대담하게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어찌할 바를 모르도 록 놀랐다. 그래 한참이나 벙벙하니 있다가 선새은 자기가 먼저 한걸음을 나서며,

『자, 내려갑시다.』

하고 선경을 재촉한다.

선경는 선생의 맘대로 앞서서 길을 찾기 시작한다. 두 사 람은 서로 깊은 생각에 파묻혀서 말없이 한걸은 한걸음 어 둠 속으로 내려 왔다. 이제는 부엉의 소리도 아니 들리고 바람 한겸 불어 오지 아니한다.

선생의 숙소에 돌아 온 때에는 여름밤이 벌써 열 한시나 넘었다. 선생은 방문을 열고 들어 가 양초에 붙을 킨다. 선 경은 그 공안에 마당에 서서 사방을 두러 보았다. 장독대 하나도 없는 조그마한 초막 마당은 높다란 법당 그늘에 더 구나 캄캄하여서 마치 먹 바다같이 검다.

선생이 키는 촛불 빛이 나올 때에 마당은 더욱 어두워지는 듯하였다. 그 속에 하얀 모시 옷을 입은 선경이가 땅에 돋 은 듯이 선 것이 마치 무슨 허수아비와 같다.

선생은 불을 켜서 목침 위에 붙혀 놓더니, 쌍창으로 고개 를 내밀어 선경을 찾는 듯이 두러 본다. 그러하는 선생의 얼굴은 더욱 해쓱해 보이고 비창해 보였다

『선경이 어디 있소?』

하고 마침내 선생은 불렀다.

『네!』

하고 선경은 마루로 올라섰다.

『이것 보셔요!』

하고 선경은 손으로 어두운 마루의 한편 구석을 가리킨다.

선생은 선경의 가리키는 데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슛케이 스 (옷가방)하나와 손가방 하나와 담뇨 하나가 놓였다. 이것 은 선경이가 선생을 따라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나려는 준비다.

선생은 말없이 그 눈을 행장에서 선경에게로 옮겼다.

선경은 「처분을 기다립니다」하는 듯이 왼손 엄지손가락 을 앞니로 씹고 오른손으로 치마 고름을 만지면서 마루 바 닥을 내려다 보고섰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극히 평정한 듯 이 숨소리도 잘 드리지 아니한다.

선생은 선경의 머리와 어깨와 발끝을 정신없는 사람 모양 으로 이윽히 보고 섰더니 몰라던 것을 갑자기 깨달은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픽근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 와 아랫목까지 와서는 다시 의심이 생기는 듯이 고개를 숙 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선경이 가 손가락을 씹고 섰는 모양을 보고,

『선경이 이리 들어오오.』

하고 아랫목 담뇨 위에 앉는다.

선경은 집어다가 세워 놓은 듯이 마루에 섰던 그 모양대로 선생의앞에 와서 가만히 서 있다. 여전히 엄지 손가락을 씹 고 침 고름을 만지면서

『이만큼 앉으우』

하고 선생은 선경에게 앉을 자리를 가리킨다. 선경은 선생 이 기리키는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그러나 모든 기운을 다 잃어버린 듯이 수그린 이마가 무릎 에 내려 가 닿을 듯하다. 그 태도가 마치 「선생님, 나는 더 말할 용기도 없고 더 물을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 음은 작정이 되었으니까, 당신께서 아무리 한 말씀을 하셔 도 소용이 없읍니다」하는 듯하였다.

진실로 힘없이 「나는 모릅니다. 아무렇게나 하여 줌시 오」하는 듯한 선경의 태도는 어여쁘기도 하고 애처럽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의 발갛게 흥분된 뺨에서는 무슨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로운 것이 오르는 듯하였다.

굳은 의지의 힘으로 겨우 진정되었던 정신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솥에 물 모양으로 부글거리기 시작하였다. 진실로 선생에게는 선경이가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지금까지 에 선생은 선경을 대할 때에는 어린 누이나 또는 어린 딸에 게 대한 듯한 사랑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속에 단순한 이 성의 끄는 힘이 섞였던 것은 무론이다. 다만 선생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선생은 사십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순전한 독신 생활을 지 켜왔다. 그러면 그에게 사라의 욕심이 없었느냐? 그에게는 있었다. 있어도 심히 강하게 있었다. 다만 그는 나라라는 이 상한 애인을 위하여 모든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을 죽여 온 것이다. 죽여 왔다기보다, 모든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일어 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지금 가슴속에 두 가지 생각이 싸운다. 오 사랑하 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 바울이가 말한 바와 같이 아낼 둔 남자는 하나님보다도 아내를 머저 사랑 하리라 함이다. 그리고 선생에게는 자기도 잘 설명하지 못 하는 일종의 미신이 있다—이렇게 나라가 슬픈 경우에 있을 때에 혼인 같은 일을 하여 인생을 행락을 누리는 것은 어째 지악 같다 하는 미신이다. 이것은 선생뿐 아니라 그때 사람 들이 많이 가졌던 생각이다. 흔히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 할 때에는 「나라이 잘 되기까지」시집 d나 가기 동맹을 하 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대개 삼 사년 내에 대개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시집들을 가 버리고 말았다. 선경의 동창에 도 시집 안 가고 남아 있는 것을 자기와 선형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생은 선경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의 사랑 을 받아 줄 수도 없는 의무 관념의 힘있는 압박을 받는 것 이다.

『선경이!』

하고 마침내 선생은 입을 열었다.

선경은 잠간 고개를 들어 선생의 얼굴을 보고 도로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한다.

『나는 선경의 뜻을 잘 아오. 선경이가 지금가지 내게 대 하여 극진하였던 것과 또 인제 나와 간다는 뜻도 잘아오.』

하고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선생은,

『선경이 나도 선경이를 사랑하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 선경이를 가장 사랑하오! 그동안에 — 내가 입원했을 때에나 또 오늘이나, 선경이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것을 나도 눈물이 나도록 고맙게 생각하지요. 다만 내가 선 경에게 말을 아니하였을 뿐이지......』

선경이가 고개를 들어 선생의 낯을 볼 때에는 선생의 눈에 서 끊임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제가 철이 없어서 선생님을 슬프시게 하여 드려서......』

하고 선경도 방바닥에 엎드려 운다.

『울지 마오!』

하고 선생은 다정하게 선경을 안아 일으켰다. 선경은 일어 앉는 대로 선생의 가슴에 안겼다. 선생은 꽉 가슴에 달라붙 는 선경을 때려고도 아니하고 한참이나 묵묵히 앉았더니 손 으로 선경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다운 어조로

『선경이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요—한 애국자라는 기계요.

나는 나라라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사랑할 수가 없는 지게 요. 내가 애국자의 목적을 달한 뒤에 다시 사람이 되지요.

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거니와, 그 날이 언제 올는 지 모르오......나는 죽기를 결심하고 여기에 온 것이지마는 나는 그 결심을 깨뜨렸소—다는 살겠소. 언제까지나 살아서 애국자의 직무를 다하고야 죽기로 결심을 하였소......나는 선 경을 사랑하오—더 할수 없이 사랑하오. 그러나 선경이! 나 는 사랑할 자유가 없는 사람이요!

선경이가 하라는 대로 한강에 가서 배를 타고 외국으로 달 아나지요—이런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선경이외다.—그러나 선 경은 본국에 계시오. 본국에 있어서 내가 잠시도 게으름이 없도록 잠시도 애국자인 것을 잊지 않도록 빌어주시오! 사 랑하는 나라만 두고 가기가 아픈데 사랑하는 선경을 두고 가는 내 맘이야 얼마나 아프겠소.

선경이! 그러니까 내 뜻을 생각하여서 나를 따라 간다는 말을 마시오! 그리고 아마 최 선생이 어쩌면 이 밤으로 오 실 듯하니, 오시거든 내일 아침 같이 문안으로 들어가시 오.』

하고 느릿느릿하게 선경의 귀에 대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 경의 머리를 쳐들어 그 입에 입을 맞추었다.

선경은 죽은 사람 모양으로 선생의 팔에 몸을 걸고 다만 숨소리만 컸다.

선생은 한 손으로 선경의 머리를 바로 잡아 주며,

『선경이! 만일 선경이가 원하거든 내 아내라고 부르지요.

서로 생각만하고 일생에 멀리 떠나서 만나지 못하는 아내라 고 부르지요!』

하고 한번 선경을 가슴에 힘껏 껴안았다.

선생의 가슴에 안긴 선경은 다시 흑흑 느끼기를 시작한다.

선경 자신도 그 느끼는 뜻을 몰랐다. 기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고 부끄러운 것도 같고 또 죄스러운것도 같고 꿈도 같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썩여 나오는 눈물이요, 느낌이다.

이윽고 선경은 고개를 들어 눈이 부신 듯이 선생을 쳐다보 며,

『저는 따라 가요! 죽더라도 선생님을 아니 떠나기로 결심 했습니다. 만일 제가 곁에 있는 것이 나라 일에 방해가 되 거든 저는 선생님보다 하룻길씩 떨어져서 따라 가더라도 저 는 따라 가요!』

하고 잠간 주저하더니,

『제가 올 대에 생각하길 만일 선생님께서 벌써 돌아가셨 거나 또는 저를 안 데리고 가시면, 이 길로 당장에 죽어 버 리리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허리춤에서 시퍼런 면도를 내어 쭉 편다. 그 칼날 이 촛불에 비추어서 누르고 푸른 빛이 번쩍한다.

『저는 이 칼을 가지고 선생님을 외국으로 나가시게도 하 고 저를 데리고 가시게도 하려고 맘을 먹고 왔어요.』

하고 선경은 웃는다. 선생도 웃는다.

밤은 새로 한 시나 넘었다. 그렇게 맑았던 하늘이 언제 흐 렸는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비가 와요. 어서 한강으로 가셔요.』

하고 선경은 마루에 서서 손으로 빗방울을 받으면서 방안 에 있는 선생에게 말한다.

배는 퍼붓는 빗속에 한강의 검은 물결에 흔들리며 서으로 서으로 흘러 내려간다. 강언덕에 서서 소리를 내어 울던 최 선생의 울음소리도 인제 빗소리와 물소리에 들리지 않게 되 었다. 뱃머리에 서서 최 선생을 바라보고 손을 내어 두르던 염 참령도 얼굴에서 흐르는 비술과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슬픔을 못 이기는 여자 모양으로 배 위에 쓰러져 통곡을 한다.

선생은 염 참령을 붙들어 뜸자리 밑으로 끌어 들였다.

나도 같이 간다고 따라 온 박 춘식은 눈물조차도 나오지 못하도록 울어 새인 사람 모양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앉았 고, 선경과 선형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발발 떨고 한편 구석에 쪼구리고 앉았다. 「찌국찌국」하고 노젓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따금 소나기가 「욱」소리를 지르고 몰아 올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은 울렁거리고 눈물을 흘렀다.

〈날이 새기 전에 서강 앞을 지내야만 한다.〉 하여 뱃사람 셋은 전력을 다하여 저었다.

새로 두 시나 되어서 최 선생은 염 참령과 박 춘식을 데리 고 화계사로 나왔다. 대궐 안에서 자정이나 되어 이원용 내 각이 성립된 것과 동시에 합방할 의논이 확정되었다는 전화 가 대한 매일신보사로 나온 것을 박 춘식이 염 참령에게 전 하고, 염 참령이 최 선생에게 전하였다 한다. 염 참령과 박 춘식은 이 선생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고 화계사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국내의 백령회 사업은 전부 최 선생과 전 목사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후일로 준비하기 위하여 해외로 망명하기 로 작정한 것이다.

장안 안에서는 지금 배일당을 수색하노라고 법석이 났다.

백산 학교와 그 기숙사는 수색을 당하였고 직원도 삼사인 구급되었다. 이 선생을 수탐하는 전보는 거의 전국 각처에 경찰관서로 놓았다.

자, 어디로 가나? 이 배를 타고 이 강에 떠서 어디로 가 나?

배는 연해 흘러내린다. 「어듸어」하고 뱃사람이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 아마 인가 없는 데로 지나는 모양이다. 선 생은 한번 더 한양의 산천이나 바라보자 하고, 뜸 밖으로 고개를 내어 밀었으나 바람에 물린 빗발이 핏기없는 낯을 때릴 뿐이요, 캄캄한 속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강 언덕에 풀 한 폭이라도 보였으며 얼마나 반가우랴. 그것은 못하여도 모래판이라도 보였으면 얼마나 반가우랴.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인 것이 없다. 오직 눈가루같이 부서지는 물결 머리가 번뜩번뜩 보일 뿐이다. 인제는 흰 옷 입은 백성의 집에 닭들도 울 것이다. 그런 그 소리도 들리지 아니한다.

어디서 송아지 우는 소리라도 들렸으면......

배는 얼마나 왔는지 뱃사람들의 「어듸어」하는 소리는 점 점 커지고 배의 흔들림도 점점 커진다.

선경은 눈썹에 눈물이 맺힌 대로 선형의 어깨에 기대어 잠 이 들고 염 참령도 멍에 몸을 기대고 잠이 든 모양이다. 박 춘식은 여전히 가슴을 내어 밀고 앉아서 허공을 노려 보고 있었다.

비는 개었다. 하늘은 씻은 듯이 맑다. 청국 산동 연대를 향 하고 달아나는 청국 배는 화해도 서해안을 보일 듯 말 듯이 바라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간다.

배의 우편에 몸을 기대고 파랗게 목화 모양으로 보이는 조 국의 산을 바라보는 망명객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 렀다—

『언제나 돌아 오려나?』

—(중편 끝) —

(一九二三年三月二十七日˜七月十七日 《東亞日報》所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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