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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시대/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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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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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순이는 그 날 밤 한잠도 자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 하였다.

“철하는 과연 남자다운 사람이다. 거짓이 없고 의지가 굳은 사나이다”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명순이가 철하를 처음 알게 되기는 작년 봄 이월 이십일 동경 기독청년회관에서 졸업생송별강연회를 개최하던 날 밤이었다.

일본 미술학교 졸업생 대표로 나온 박철하가 강연을하게 되자 수천명 청중은 눈물의 바다를 이루웠었다. 명순이도 물론 눈물을 흘린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철하가 사년 동안 고학을 하던 쓰라린 이야기, 눈물겨운 생활 이 모든 것을 조금도 숨김없이 고백을 할때 같은 설움을 당하고 있는 수천명 군중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었던 것이다.

힘있는 부르짖음 그것은 고학행들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는 설움의 노래이며 철퇴 같은 주먹 그것은 없는 사람들의 힘이었다. 경관의 연발하는 ‘주의’ ‘주의’ 소리도 상관없다는 듯이 성낸 사자의 굶주린 부르짖음 같은 어구 어구마다 눈물겨운말을 서슴지 않고 하던 그 용감한 모양, 명순이는 그 때의 일이 파노라마와 같이 눈 앞에 전개되었다.

강연회가 끝나자 연사(演士)의 초대연이 ‘스미레’ 식당에서 열리었다. 그때 명순이도 여자사범학교 졸업생 대표의 연사가 되었던 까닭으로 그 초대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었다. 명순이는 그 초대회에 석상에 모인 이십여명의 사람 중 강수길이라는 사나이밖에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도 같은 고향 사람이랄 뿐이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명순이는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여자친구는 많아도 그 괴에는 별로히 이렇다 할만한 친구도 없었다.

그 련회에 참석한 두어명 여자도 그 때에 처음 대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날 때이다. 명순이는 피아노를 치며 다른 동무들과 합창을 하고 있을 때 별한간에 싸움 소리가 들렸다.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보니 박철하 강수길 그외 몇 사람이 한편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수십명이 작당이 되어가지고 언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론투쟁을 하던것이 그 다음에는 육박전으로 변하였다. 명순이는 속으로 술취한 사람들의 사소한 말다툼인 줄 알았더니 서로 오고가는 말을 자서히 들으니 그런 것이 아니다. 박철하의 강연에 일부 학행을 모욕하였다는 조건으로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돈 많은 학생들을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싸움이 일어났다.

얼마후에는 말리던 사람도 없어지고 싸움은 두편으로 나누어졌다. 완전히 편싸움이 되었다. 다만 삼사명의 여학행들만이 피아노를 둘러 싸고 싸움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움의 세력은 돈 있는 학생편이 강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박철하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하였지만 많은 사람의 주먹을 두 주먹으로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약하였다. 힘껏 싸웠으나 여러 놈들이 덤벼드는 바람에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어버리고 쓸어졌다. 강수길도 쓸어졌다. 그 나머지 몇사람들도 그 놈들의 세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명순이는 그 놈들의 행위가 분하여 왼몸이 떨리었다. 싸움의 승리를 얻은 그 놈들은 의기양양하였다. 싸움은 진정이 되었다. 그 놈들은 자기편에 들어 싸움하다가 철하의 철퇴같은 주먹에 맞어 쓰러진 사오명의 동무를 부축하여가지고 ‘스레미’ 식당으로부터 났다. 명순이는 쓸어진 강수길에게 가서 안어 일으키며

“수길씨 수길씨”

불러보았다. 수길이는 정신을 차려보니 명순이가 홀로 남아 있다. 철하는 쓸어진대로 있다.

“명순씨 택시를 좀 불러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명순이는 전화실에 달려가서 택시회사 번호를 찾아서 곧 오라고 전화를 하고 돌아오니 강수길은 철하를 안고 있다가

“명순씨 큰일이 났읍니다. 왼편 다리를 칼로 찔리어습니다”

하고 찔리운 곳을 가리킨다.

과연 철하의 왼편 다리의 양복바지 위로 시뻘건 피가 새여나왔다. 그러고 무엇으로 때렸는지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자동차가 왔다. 명순이는 수길이와 함께 쓸어진 철하를 부축하여 자동차에 올랐다.

“‘아가다마’ 병원까지”

수길이는 자동차 운전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밤 세시가 되어. 그렇게 소란하던 동경관도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쏜살 같이 달아나는 자동차는 ‘스미레’ 식당을 출발한지 십분이 못되여 ‘아가다마’ 병원 앞에 이르렀다. 병원문은 잠기었다.

수길은 닫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숙직의사가 잠이 깊이 든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초인종’ 시위치를 힘있게 눌렀다. 얼마후에 안으로부터 슬립파를 졸졸 끌고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간호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수길은 급한 병자가 왔다는 말을 하고 철하를 업고 병실로 들어가 명순이도 뒤따라 들어 갔다.

“과히 염녀 마십시오 그렇게 깊이 찔리지 않었읍니다. 칼이 원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진찰을 마친 의사의 말에 겨우 안심을 하였다.

“완치될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읍니까”

수길이는 그래도 근심스러운 낯으로 이렇게 물어보았다.

“일주일이면 걸음을 걸어도 괜찮겠읍니다”

말을 마친 의사는 이마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싼 뒤 칼로 찔린 자리를 소독하기 시작하였다. 정신을 잃은 철하는 상을 찡그리며 끙끙거리고 신음하였다. 소독을 마친 의사는 다시 철하의 팔에다 주사를 한번 놓고 곤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고는

“이곳에 계셔서 병자를 간호하는 것이 좋겠읍니다”

말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버렸다. 명순이는 간호부가 의자에 앉아서 깜박깜박 조을고 있는 것이 하도 우습기도 하고 가엾어서 침실에 돌아가서 자라고 권하였다.

간호부는 일본 여자의 독특한 애교를 부리며 사양을 하다가 명순의 권하는 바람에 못리기는 체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수길이와 명순이는 철하가 누운 곁에 의자를 나란히 하고 앉았었다.

“철하씨는 중학교의 동회 졸업생입니다”

“네 그렇습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서울에 있읍니다. 집에는 동생누이 한사람 밖에 없는 고독한 이입니다”

이 말을 듣고나니 명순이는 철하가 더욱 가이엾어 보인다. 수길이는 다시 말을 이어

“그러나 이 사람은 참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올시다. 하려고 결심한 일은 하고라야마는 이입니다. 장래 우리 조선의 ‘푸로’ 작가로서 명성이 듯날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스레미’ 식당에서 싸우던 이는 어떠한 이들입니까?”

“그놈들 말입니까 부보의 덕으로 돈냥이나 있으니까 공부를 한다는 전제로 동경에 와서 학교가는 시간보다 돈 쓰러 다니는 시간이 많은 놈들이지요”

수길이와 명순이는 조금도 피곤함을 깨닫지 않고 밤이 새도록 철하의 곁에 않아 이야기도 하며 간호하였다.

오전 다섯시가 되었을 때 철하는 겨우 정신을 차려 곁을 보니 수길이와 생전에 알지 못하던 여자가 자기 곁에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이 같기도 하였다.

그 때 수길이는

“어디 아프지나 않은가?”

“참 감사아네 수고하여 주는 덕택으로 아무일도 없네 이곳에 앉으신 이는---”

하고 명순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명순이는 퍽 부끄러웠다.

“어저께 저녁에 참석하였던 김명순이라고 하시는 인데 나와 한고향 사람이네”

수길이가 이렇게 소개를 하자 철하는 너무 황송하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려고하다가 도로 누우며

“실례합니다. 누워서― 처음 대하는 사람을 위하야 이렇게까지 감사히 하여 주시니”

명순이가 철하의 첫인사를 받게 된 때가 그 때이었다. 그 때 일을 지금 생각하여도 퍽 부끄러웠다. 첫인사를 마치고 무에라고 대답하였으면 좋을는지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일.

자리에 누운 명순이는 한숨을 휘- 쉬고 나서

“아! 그 때도 벌써 옛날이었고나---”

이렇게 입속으로 외쳤다.

철하가 입원한지 이틀이 넘으려고 하던 날 수길이는 고향에 계신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불길한 전보를 받고 그날 밤 차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순이는 수길이가 떠날 때 며칠 동안 철하를 위하여 대신 수고하여 달라는 부탁도 받았지만 외로운 몸인 철하 더욱이 병중에 있는 철하에게 자기가 가서 보아주지 아니하면 가볼 사람이 없는 줄 아는고로 그 후 낮이나 밤이나 철하의 병원에 가서 동무도 하여 주고 간호도 하여주는 동안 사람의 정은 남 모르게 젊은 가슴에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것이 두사람의 사랑의 싹을 움트게 하였다.

명순이도 철하를 찾아가지 아니하면 마은의 적막을 느끼고 그 이가 기다리는 것 같아서 명순이가 없으면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아가다마’ 병원의 팔호실 지금도 명순의 눈에서 그 방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았다.

길지 못한 여름밤의 열두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모기장 밖에서는 모기들이 앵앵하고 돌아다니는 소리가 점점 높아가고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 해 봄 고궁에 돌아온 즉시로 명순이는 평양에 있는 어떤 여학교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순의 마음은 늘 서울로 서울로만 향하였다. 서울 하늘 북악산 밑 그 곳이 그리운 곳 이었다. 그것은 서울의 번화한 거리를 그리는 것도 아니었고 화려한 노리터를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박철하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첫사랑에 애태우는 명순이의 마음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살것 같지도 않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틈 있는대로 철하에게 부치는 편지를 썼다.

명순이는 쓸쓸한 곳에서 철하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유일의 낙을 삼았다. 을밀대 최승대도 절경이었지만 명순이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울울한 기자림 사이를 거닐 때마다 철하가 더욱 그리웠다.

그 해 가을 어떤 날 오후이었다. 명순이는 철하에게서 오는 한장의 편지를 받아보고 미칠듯이 날뛰었다. 명순이는 지내간 기억에서 제일 기뻐하던 때를 찾아 내려고 하면 그 때를 말할것이다.

철하가 평양으로 내려오게 되겠다는 편지였다. 평양에 있는 푸로예술단체인 ‘배응사’ 의 초대를 받아 평양으로 내려 오겠다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훑어보았다.

명순이는 언제인가 편지와 함께 보내어준 시일편을 자기가 작곡을 하여둔 것이 있었다. 명순이는 철하가 내려오면 들려주려고 학교 하학시간만 되면 피아노에 맞추어 독창연습을 하였다.

‘화살에 맞은 참새

떨고있는 그 모양

사람아 비웃지마랴

네 가슴에도

파명의 화살이

가까웠으니

붉은 피 식기 전에

네 앞길을 바라보라’

구월 이십사일 명순이는 평양역으로 나갔다. 오후 봉천행 급행열차가 도착되자 명순이는 수 많은 승객중에서 철하를 찾아내려고 애를 섰다.

맨나중에 내리는 사람―― 그는 명순이가 그다지도 그리워하던 철하이었다. 명순이는 쏜살 같이 달려가서 행구를 받아들 그 때의 부끄러웁고도 반가웁던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철하가 일주일도 채 못되어서 도로 서울로 가게 될 때 명순이는 기차가 떠난 다음에도 푸랫트홈에 외로이 남아서 멀어지는 기차를 바라보고 남모르게 울던 일, 평양시내 시외를 철하와 같이 거니던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명순이는 아무리 하여도 평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올봄에 서울 배영학원으로 전직을 하게 된것이었다. 배영학원은 모든설비와 교사(校舍), 운동장 등이 평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원급도 평양에 있을 때보담 적게 받았으나 철하를 자주 만나볼 수 있는 고로 모든 것이 마음에 조금도 걸리지 않았다.

오전 두시가 넘어서야 명순이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