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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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편집]

대원각사(大圓覺寺)[편집]

세조대왕 십일년 사월 칠일.

서울에는 큰 명절이 왔다. 아마 그것은 서울에서만 큰 명절이 아니라, 전조선적으로 큰 명절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명절인고 하면 오 년이나 걸려서 왕이 몸소 계획하고, 이 년이나 걸려서 수만 명 사람을 쓰고, 수천 필 백목과 수천 석의 백미를 들여서 이룩한 대원각사(大圓覺寺)가 준공이 되어서 이날 낙성 법회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림하신다는 것이다.

왕은 즉위 이래로 태조대왕과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서 불법을 중흥하기에 힘을 쓰셨으므로 영광의 갑사며, 양양의 낙산사며, 오대산 월정사, 속리산의 속리사, 복천암이며, 경기에도 회암사, 보은사, 대자암, 정업원 등 중창하신 절이 많지마는 이 대원각사야말로 왕이 당신의 원찰로 정성과 정력을 기울여서 이룩하신 것이다.

정인지(鄭麟趾) 등 유신들이 혹은 단독으로, 혹은 경연(經筵)에서, 혹은 육조와 삼사를 거느리고, 혹은 음으로 혹은 양으로 왕의 불교적 시설을 막으려 하였으나 왕은 이 귀찮스럽게도, 또 끈기있게도 말썽부리는 유신들을 혹은 이치를 따져서, 혹은 성을 내어서, 혹은 위협을 하여서 물리치시면서 그예 중에게 도첩(度牒)을 주는 것과, 승과(僧科)를 보이는 것과, 관리가 어명 없이는 중을 잡거나 다스리지 못하는 법을 세우시고, 또 법화경, 금강경, 월인천강곡(月印千江曲) 같은 불서를 번역 출판하시고, 그리고 가장 크고 꼭대기 되는 사업으로 대원각사를 지으시고야 말으셨다.

"나는 임금이 아닌가, 임금이면 만민의 부모가 아닌가, 유가의 임금도 되려니와 불가의 임금도 아닌가. 너희들은 공자의 도를 잘 닦으라, 불가에서는 석가세존의 도를 잘 닦으라. 이리하면 만민이 다 제 길을 누릴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왕이 정인지 기타 유신의 벽불론(闢佛論)에 대하여서 하시는 일관한 논법이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왕은 신교의 자유를 주장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무론 세조대왕만의 주장이 아니라, 실로 태조대왕과 세종대왕과 공통한 것이었다. 다만 여조를 넘어뜨리고 이씨 조선을 세울 때에 몸소 참모장이 되어서 유가의 세력을 이용하신 태종대왕만이 유가의 주장대로 불교를 눌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날로 늘어가는 유신의 불교 배척의 세력은 세조대왕과 같은 이로도 당해내기가 참 어려웠다. 세종대왕의 어우 십삼 년간의 번민은 여기 있었다고 할 만하였다. 그렇게도 귀찮게 덤비는 유신의 반대를 높은 식견과 왕의 위력으로 눌러가면서 마침내 원각사 건축까지 완성하신 것이었다.

말은 원각사 낙성이라고 하지마는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건물은 대부분 당년에 되었고 구리 오만 근을 들여서 부었다는 큰 종도 작년에 완성이 되었다. 불교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꼽히는 한수석 십삼층 탑이 맨 나중으로 이 해 봄까지에 거의 완성이 되고, 그러고는 대원각사의 본존이 되실 옥불은 아직 아니되었으나 금불도 완성이 되었다. 그러나 삼보 중에 둘째 되는 법───이 경우에서는 세조대왕께옵서 몸소 입으로 부르시와서 김수온(金守溫), 황수신(黃守身), 한계희(韓繼禧), 노사신(盧思愼) 등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셨다는 원각경 열 권이 맨 나중으로 바로 며칠전에야 판에 박혀서 나오게 되었다.

이 모양으로 대원각사의 낙성이라는 것은 세조대왕께는 필생의 대사업이요, 가장 소중한 사업이요, 또 가장 힘드는 사업이었다.

이 날을 축하하기 위하여서 하루 이틀 전부터 장안 대소 민가에는 집집에 채색등을 달고 운종가(雲從街─지금 종로) 대로, 광교, 혜정교(惠政橋), 구리개, 황토마루 같은 데는 말할 것도 없고 경복궁, 창경궁에까지도 높다랗게 더그매를 매고 거기는 오색등과 오색 깃발을 늘여서 장안 천지가 온통 꽃밭이 되었다.

한성부 경행방(漢城府慶幸坊)인 대원각사 경내는 말할 것이 없다. 드높은 당대에는 오색 채번이 늘여 있고 산문에는 사람의 키만큼씩 큰 등이 좌우로 수십 개가 딴기둥에 달려 있고, 그 속에는 팔뚝 같은 황초가 꽂혀서 밤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상감의 거둥이 듭실 길에는 새로 황토가 깔리고, 아무도 그 위로 걷지 못하도록 금줄을 늘이고 푸른 솔가지로 덮여 있었다.

종루의 큰 종, 고루의 큰 북도 상감의 거둥이 듭실 때에 첫소리를 내이려고 건장한 중들이 대령하고 있고 산문의 사천왕상과 법당의 불상도 상감께서 손수 떼시기 위하여 백지로 봉하여 있었다.

촛대나, 향로나, 바라나, 경쇠나, 목탁이나, 무엇 하나도 상감께서 친히 지시하셔서 명공을 시켜서 새로 이룩한 것 아님이 없다. 오직 대웅전 네 모에 달린 풍경만이 벌써부터 첫여름 꽃 날리는 바람에 딸랑딸랑 혼자 소리를 내이고 있었고, 백판 인을 백 갑절한 일만 이천 명의 남승 여승이 모였다 하건마는 대호법왕(大護法王)이신 상감의 거둥을 기다리느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진시(辰時).

상감은 이날에 면복을 갖추시고 진시에 광화문을 납시어 황토마루로, 혜정교로, 운종가 네거리를 지납시어서 대원각사에 듭실 예정이므로 장안 사녀는 이날의 거둥을 뵈오려고 해뜨기 전부터 길가에까지 돗자리와 거적자리를 깔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대군, 무슨 군, 무슨 부원군 하는 귀한 집 가속들은 대개는 대원각사에 모였고, 고관들의 가속들도 대원각사 행랑과 거기 이웃한 집을 빌려서 모여 있었다.

이 대원각사 낙성경찬회(落成慶讚會)라는 대법회를 하루만 할 것이 아니라, 한 이레를 계속할 것이었고, 그 동안에 상감께서 원각사 큰 방을 행궁으로 삼으시고 계속하여서 주련하실 예정이니 그 굉장함은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사월 초칠일 진시.

상감께서는 입참조계(入參朝啓)를 명하신 동궁을 뒤따르게 합시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납시왔다. 약간 바람이 불었으나 그것은 연길에 가볍게 먼지를 날릴 만밖에 못하였다. 이날 상감께서는 황포에 익선관을 쓰시고 매양 좋아하시는 누런빛 나는 연을 탑셨다.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이 호위하고 영의정 신숙주(申叔舟), 좌의정 구치관(具致寬), 좌참찬 최항(崔恒), 이조판서 한계희, 호조판서 노사신, 공조판서 김수온, 지중추원사 양성지(梁誠之), 예조판서 원효연(元孝然), 형조판서 김질(金礩), 도승지 이파(李坡), 좌승지 김수녕(金壽寧), 우승지 박건(朴楗), 한성판윤 이석형(李石亨), 전 예조판사 인산군 홍윤성(洪允成), 형조참판 임원준(任元濬), 예문제학 이승소(李承召), 하동부원군 정인지,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중추원 부사 서거정(徐居正), 대사헌 김종순(金從舜) 등 문무 이품 이상의 거의 전부가 호종하였다.

종친인 효령대군 보(補), 임영대군 구(?), 영응대군 염(琰), 영순군 부(溥)는 원각사 조성도제조(造成都提調)로 이미 원각사에서 대가를 지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께서는 온양 온천 행궁에 가끔 거둥이 계시었지마는 이처럼 만조백관을 거느리시고 하신 거둥은 즉위 이래에 처음이었다. 더구나 이날의 호종 제신이 다 후세에 이름을 남길 큰 인물들인 것으로 보아서 실로 공전의 장관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안 백성들도 이 큰 인물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처음이다.

상감은 태조대왕 그대로라고 원호(元昊)가 탄복할 만한 어른이시다. 키도 훨씬 크시고 몸도 장대하시고 눈이나 수염이나 다 위풍이 늠름하실뿐더러 이 어른이 진양대군이니, 수양대군이니 하고 불려지시던 잠저(潛邸)시대로부터 백성들은 이 어른의 일을 잘 알았다. 너무도 용맹이 과인하시기 때문에 그 아버님 세종대왕께서,

"너같이 용맹한 사람은 부드러움을 공부하여야 한다."

하셔서 이름도 구슬옥 변에 부드러울 유 '瑈' 한 자로 지으시고 또,

"너같이 용맹한 사람은 넓은 옷을 입어야 한다."

하셔서 소매가 넓은 옷을 입게 하셨기 때문에 '소매 넓으신 나으리'라는 별명을 들으셨다는 것이나, 또 한 번 그 아우님 되는 저 글씨 잘 쓰고 호탕하기로 유명하던 안평대군 용(瑢), 단종대왕을 복위하려다가 돌아간 금성대군 유(瑜), 기타의 아우님들과 다른 친구들과 삼각산 백운대에 올라가셨을 때에 다들 뛰임바위를 못 뛰건마는 상감께서는 평지를 다니듯이 뛰셨다는 말이나, 또 활을 잘 쏘셔서 그 아버님 세종대왕과 형님이신 문종대왕을 모시고 왕방산(王方山)에 사냥을 가셨을 때에 연하여 사슴 일곱 마리를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쏘셨으되 꼭 개개이 목을 쏘셨으므로 세종대왕께서도 칭찬하시고 그 형님이시오 장차 문종대왕이 되실 동궁께서는 하도 기뻐하셔서 그 아우님이신, 그때에는 수양대군이라고 부르던 금상의 활을 당기시어,

"鐵石其弓. 霹靂其矢, 吾見其張, 未見其弛."

라고 쓰셨다는 것이나, 심지어 열네 살 적에 어떤 계집의 집에 오입을 가셨다가 불의에 그 서방이 돌아오매 두 길이나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으셨다는 것 같은 세세한 일까지도 백성들은 다 알고 있었다.

상감께서 어린 임금을 폐하시고 몸소 임금이 되시고, 다음에 그 어린 임금을 상왕이라고 여쭙던 것도 폐하시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셔서 강원도 영월에 유폐하시고, 또 다음에는 금부도사를 보내어 그 어리신 임금을 죽이시고, 또 다음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成源), 이개(李塏), 성승(成勝), 허후(許詡) 등을 비롯하여 여러 전조의 충신과 또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친동기를 죽이셨다는 것으로 인망을 잃으심이 크셨으나, 즉위 후 십년간에 하신 선정으로 하여서 백성들은 우리 임금 만세라는 칭송을 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불교를 중흥하시는 대호법왕이시라 하여 조상 적부터 불교를 존숭하여 오는 다수 백성들은 진정으로 이 임금의 만세를 부처님께 비는 것이었다.

"옆에 소인들이 있어서."

상감께서 잘못하신 듯한 정사의 책임은 소인들에게로 돌리 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이었고,

"상감께서 인자하셔서."

이러한 말로 한명회, 홍윤성, 양정(楊汀) 같은 탐학 무도한 공신들을 제거하지 못하시는 까닭을 삼게 되었다.

가끔 상감께서 참혹하게 인명을 죽이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상감께서는 그렇게 인자하시지마는 성미가 급하셔서."

이렇게 백성들은 서로 상감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임금을 이렇게 고맙게는 생각하면서도───아니,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임금의 일생을 흐리게 하는 몇 가지 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역시 이 임금이 상왕(단종을 가리킴)마마를 비롯하여서 여러 동기와 신하를 죽이신 일이다. 친조카님이신 경혜공주를 관비(官婢)의 천역에 붙이신 것이며, 전 왕후이시던 송씨마마[定順王后]를 역시 관비로 만든 것이나(필경은 거행은 아니 시켰지마는) 다 백성들의 마음에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문종대왕의 왕후이신 권씨[顯德王后]가 상감님 꿈에 나타나서,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인다."

한 이튿날에 동궁마마[德宗大王]께서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는 말 같은 것은 한 풍설에 지나지 못하겠지마는 상감께서 하신 일로 보아서는 그럴 법도 하다고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인 슬픈 일이었다.

그 밖에도 민간에는, 궐내에 원혼들이 나타나서 가끔 흉한 것을 보인다는 말도 있고, 상감께서 가끔 온양 온천에 행차합시는 것은 만신창이라는 무섭고 더러운 부스럼이 전신에 난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이 부스럼도 다 남에게 원통한 일을 많이 하고 살생을 많이 한 업보라고들 해석하여서 기기괴괴한 억측을 많이 하였다. 이 부스럼은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데만 나는 것이어서 얼굴이나 목이나 손은 멀쩡하지마는 만일 이 부스럼이 목이나 얼굴 같은 데로 나오게 되면 살 수가 없다는 말들도 하였다.

연 위에 앉으신 상감님의 목이나 얼굴이 보일 리야 만무하지마는, 설사 보인다 하더라도 부복한 무리들의 눈에 뜨일 리도 만무하지마는 그래도 혹은 상감님의 목에 거뭇거뭇한 것을 보았노라고 하는 엉터리없는 소리를 하는 자도 없지 아니하였고, 이 말을 듣는 사람들도 그것이 터무니없는 소리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럴 법도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상감님이 절을 많이 중창하시는 것이나, 불경을 번역하여서 간행하시는 것이나 신미(信眉), 수미(壽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같은 중을 존숭하시는 것이나 모두 이 업보를 면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이 무서운 죄의 갚음을 벗어나려 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마흔아홉 살 되시는 상감은 아직 늙으셨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마는 백성들의 생각에는 상감님의 머리 위에 무슨 큰 불행이, 큰 벌이 임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상감님의 덕을 사모는 하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 백성들의 마음은 슬펐다.

이러하기 때문에 오늘같이 위의있게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거둥을 납신 것을 우러러뵈와도 상감이 타신 연어 위에 불길한 검은 기운이 있는 듯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감을 에워싼 이 불길한 듯한 기운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은 뒤에 따르는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같은, 이 상감님을 도와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일을 한 공신들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백성들의 생각에는 이 위세가 당당한 공신들의 머리 위에도 반드시 무슨 업보의 벼락이 떨어지고 말 것같이 생각됨이었다.

시방 영의정으로 임금의 뒤를 따르는 신숙주는 저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문종대왕의 고명을 받은 신하였다. 그것은 어린 동궁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마침내 수양대군 편으로 갔고, 마침내 노산군을 죽이자고 발론을 한 사람이었다.

신숙주가 노산군을 죽이자는 것이 비록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현명한 신숙주는 천하에 인정도 의리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저주를 받을 것을 각오하였을 것이다. 성삼문 등의 일이 패하던 날에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목을 매려 하다가,

"성삼문, 박팽년이 죽는 날엔 신숙주가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소."

하고 울어서 신숙주가 전신에 피땀을 흘렸다는 것은 항간의 한 풍설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이 뿌리없는 풍설이 곧 백성들의 신숙주에게 대한 판결인 점에서 현실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어진 재상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출장입상릏 하였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육조에 역사ㅘ여서 이십 년이나 큰 권세를 잡았으나 단종께 대한 일 외에는 하나도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이 없었다.

"신숙주가 상왕비마마를 상감께서 받아서 종으로 부린다."

하는 말도 들었고,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상왕비를 종으로 줍소사고 여러 번 상감께 여쭈었으나 상감께서는 허하지 아니하셨다."

하는 말도 들었으나 그것은 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신숙주가 관비의 천역을 받은 송씨마마를 종이라는 명의로 모셔다가 편안히 계시게 하려는 충정에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마는 한명회, 홍윤성 같은 이는 백성들의 마음에 동정을 일으킬 재료가 적었다.

한명회는 일개 경덕궁 직원으로서 이 상감님을 도와서 벌써 대신을 지내고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그는 이때에는 평안도 체찰사(體察使)로 있었다. 탐재 호색이라는 평을 들었으나 그것보다도 상감이 계유정난 이래로 하신 모든 피흘린 일을 다 한명회의 계책이라고 백성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忠直老韓又來矣'라고 칭찬하였다 하니, 반드시 흉악한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상감께서는 한명회를, "내 자방[張子房]." 이라고 하셨다.

한명회를 수양대군께 추천한 권람(權擥)도 대신이 되고 길창부원군이 되었으나 작년에 벌써 세상을 떠나서 없다.

이 상감님의 신하 중에 가장 흉악한 위인으로 소문한 홍윤성은 백성들이 가장 미워하고 무서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위에 틀리는 사람이면 막 죽이고 마음에 드는 계집이면 막 빼앗았다. 제가 궁하였을 적에 도와준 제 당숙이 무슨 구청을 하러 왔다가 거절을 당하고, 올챙이 적 생각을 잊었는가, 네가 뉘 밥으로 잔뼈가 굵었는가, 하였다 하여서 당장에 물고를 내었다. 그것은 제가 소시에 미천하였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홍윤성은 시임 예조판서였다.

이러한 홍윤성도 노부(鹵簿)를 따랐다.

상감은 심히 만족하신 마음으로 연도에 부복한 백성들을 바라보셨다. 다만 하려던 일이 이루어진 기쁨만이 아니었다.

몸이 문득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신 듯함을 느끼신 것이었다.

만백성이 내 앞에 엎드려 나를 첨앙한다 하는 것은 제왕의 자리에 있는 이가 아니고는 못 가져볼 생각이다. 사람이 제왕으로 태어나기도 어려운 일이거든, 하물며 만민이 하늘같이 두려워하고 부모와 같이 따르고 스승과 같이 순종하는 그러한 임금이 되기는 더욱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십불선(十不善)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임금으로 태어난다 하거니와 이러한 전륜성왕으로 태어나기에는 무궁겁의 수행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수원 수생(隨員受生)하는 경계에 달한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응신(應身)으로 세상에 나타난 임금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일까?‘ 상감은 스스로 숙명과 본원을 생각하여 본다.

'저 백성들은 무량겁 전으로부터 내 가르침과 내 다스림을 받아 온 무리로서 이번 생에 또 내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여 보신다.

'나는 보살의 화신(化身)이다. 저 무리들을 불법으로 인도하기 위하여서 세상에 나타나서 임금이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상감은 그런 것만 같았다. 금시에 숙명통(宿命通)이 열린가 하였다. 여러 절을 많이 짓고 또 이번에 대원각사를 짓고 한 공덕이 나타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임금은 깜짝 놀랐다.

'증상만(增上慢)이다!' 하고 변화경의 "못 얻고 얻은 체, 못 깨닫고 깨달은 체(未得謂得 未證謂證)"라고 세존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셨다.

또 양무제(梁武帝)가 달마존자(達摩尊者)에게,

"내 불도를 위하여 절을 많이 이룩하고 경을 많이 번역하였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큰고?"

하고 물은 데 대하여, 달마존자는,

"무(無)."

라는 한 마디로 대답한 것을 생각하였다.

상감은 한 번 한숨을 지었다.

'내가 대원각사를 지은 공덕은 모두 불도에 회향(廻向)하나이다.' 하고 속으로 외쳤다.

애초에는 죽은 왕세자를 천도하자는 동기로 불경 번역과 절 수축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차차 그 일을 하여 가는 동안에 왕의 원은 점점 커졌다. 그것은 세종, 태종, 태조를 비롯하여서 여러 대의 조선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후손의 계계승승하여서 임금으로 위복을 누리기를 비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경은 저를 위하는 좁은 탐심이었다.

'공덕은 모두 불도에 회향하나이다.' 하는 생각을 분명히 이름짓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덕을 불도에 회향한다는 것은 곧 중생에 회향한다는 뜻이다.

앞에 엎드린 수많은 백성의 모양! 이것은 왕의 마음을 간막았던 것을 터놓아서 무량무변한 자비심을 발하게 한 것이었다.

'팔로의 남녀노유.' '억조 창생.' 그들을 위하여 임금은 그가 짓는 모든 공덕을 회향하노라고 또 한 번 외쳤다.

벌써 죽은 왕세자도 없고, 당신 몸에 병도 없고 선망 부모도 없고 고려 왕씨네는 원혼이나 노산군, 기타 상감이 당신 손으로 죽이신 원혼도 없었다.

'이 백성! 이 중생을 가르치고 다스리고 건지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나타난 것은 이 일 때문이다!' 상감은 이렇게 깨닫고 다지고 스스로 맹세하셨다.

"爲是衆生故, 而起大悲心(이러한 중생이래, 대비심을 내었노라.)" 하신 석가세존의 불도를 닦으신 동기를 말씀하신 것과,

"諸佛世尊唯以一大事因綠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開佛 知見使得淸淨故. 出現於世. 欲令衆生佛之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悟佛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入佛知見道故. 出 現於世.(모든 부처님네는 오직 한 가지 큰일, 큰 인연일래 세상에 나시나니……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알음알이를 열어 깨끗함을 얻게 하려고 세상에 나시고, 중생에게 부처 알음알이를 보이시려고 세상에 나시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 알음알이를 깨닫게 하려고 세상에 나시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 알음알이의 도에 들게 하려고 세상에 나시나니라.)"

하신 세존의 본회(本懷)를 말씀하신 법화경 방편품 구절을 생각하셨다.

'그렇다. 저 백성을 다 가르치자. 그리하여서 이 나라를 부처의 나라로 만들자.' 상감은 생각을 계속하신다.

황토마루에 높이 세운 더그매에서 오색 깃발이 가벼운 바람에 너훌너훌 나부낀다.

왕의 뜻을 알아서 기뻐하는 듯하였다.

거둥은 황토마루에서 목을 꺾어서 혜정교를 건너 운종가로 향한다. 의장(儀仗)의 장검과 장식이 햇볕에 번쩍번쩍 빛났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군사들도 소리없이 걷고 호종하는 노부도 소리없이 따랐다. 잡이 위에 높이 앉은 금관조복의 고관들이 머리가 잡이 흔들리는 대로 약간 흔들릴 뿐이었다.

넓고 넓은 운종가는 바다와 같았다.

길 좌우에 부복한 백성들은 돌로 깎아놓은 것 같았다.

장안 만호가 모두 괴괴하였다. 그것은 거룩하신 임금을 우러러보고 경배하기 위한 괴괴함이다.

왕은 문득 그의 증조부 되시는 태조대왕의 창업의 간난을 생각하셨다. 동정 서벌로 사십 평생을 병전 중에 보내신 것, 그리고 그 아드님 태종대왕과 뜻이 맞지 아니하신 것, 그리고 말년에 더욱 불도를 숭상하신 것.

왕은 태조를 존경하였다. 그 얼굴을 대해 뵈온 일은 없으나 다들 왕 자신의 용모와 풍채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태종대왕의 뒤를 이어서 그 성의를 실현할 자는 내다. 그 어른께서 뜻 두시고 이루지 못하신 것을 내가 완성하여야 한다. 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서 편안히 살게 하는 것,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우내(宇內)에 으뜸이 되게 하는 것, 그리고 불도가 널리 행하여서 이 나라에 태어난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불연을 맺게 하는 것───이것이 내 일이다. 내가 임금으로서 할 일이다.

이 일을 하려고 내가 임금이 된 것이다.'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시고 자못 경건한 느낌으로 앞을 바라보셨다.

삼엄한 위의.

부복한 백성들.

불법을 표상하는 만호의 등들.

'내 나이 마흔아홉.' 왕은 생각을 계속하신다.

'마흔아홉. 그리고 고치기 어려운 이 병.' 왕은 슬픔이 일어남을 깨닫는다. 왕은 오욕을 금하는 생활을 하셨다. 수라도 잠저 시나 다름없었다. 진지 한 그릇과 나물국 한 그릇과 짠 반찬 한 그릇과 물 한 그릇으로 수도하는 중의 식사를 하시는 일이 많았다.

야청 무명 소매 넓은 옷틔에 갓끈까지도 야청 무명으로 다시고 궐내에서는 짚신을 신으셨다.

금 술잔 은 술잔을 폐하시고 사기 잔을 쓰시고, 무슨 연회에나 놋잔을 쓰셨다.

정인지, 신숙주 같은 중신들이 매양 후궁을 간택하여 들이기를 여쭈었으나 상감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고, 선왕 적부터 부리시던 늙은 나인 외에는 일체 젊은 계집을 궐내에 들이지 아니하셨다.

주무실 때에 쓰시는 금침까지도 비단이나 명주를 금하시고 야청무명에 다홍 깃 단 것을 쓰셨다.

방이 더우면 마음이 게을러지고 또 정욕이 동한다 하여 엄동설한에도 불을 많이 때기를 금하시고, 또 찌는 듯한 복염에도 베옷과 부채와 얼음을 쓰지 아니하셨다.

몹시 더운 날에 솜옷을 입으시고 문창호를 꼭꼭 닫고 계셔서 신하들에게 몸을 길들이고 마음을 굳세게 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 모양으로 상감은 몸의 편안을 위하는 모든 탐욕을 끊는 생활을 하시면서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 힘을 쓰셨다.

이 임금께 세상 사람과 같은 낙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신하들을 데리시고 술을 잡수시는 것이었다. 밤이 깊도록 술을 잡수시며 취흥이 도도하시면서 신하들과 희롱을 하셨다. 떠밀기 내기도 하시고 팔씨름도 하시고 팔목을 힘껏 부르쥐어서 아프게 하기 내기도 하셨다. 신숙주, 구치관은 수없이 여러 번, 동무를 하여 드렸다.

그러나 그러하신 중에도 왕자의 존엄을 잃으심은 없으셔서, 곁에 뫼신 세자(뒤에 덕종대왕으로 추존되신 이)를 향하셔서는,

"나는 이러하더라도 너는 이러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고 훈계하셨다.

이렇게 근엄하신 생활을 하시면서 오직 국리 민복을 생각하셨건마는, 한되는 것은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정인지는 학문은 도저하나 위인이 범상하였다. 그는 확고한 제 주견이 서지 못하고 매양 좀된 유생들의 이용물이 되어서 불법에 반항하는 의사표시를 하다가 왕의 책망을 받았다.

괴애(乖崖) 김수온은 유학과 불법을 다 잘 알고 더욱이 불도에 대하여서는 왕의 동지였으나 이 역 위인이 변변치를 못하여서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구별할 줄 모르고 걸핏하면 절로 달아나서 숨어버린다고 하였다.

신숙주, 한명회는 다 구하기 어려운 정치가지마는 왕이 보시기에 국가의 만년대계를 의논할 사람은 못 되는 것 같았다. 하물며 무변중생을 다 건진다는 보살의 대원에 대하여서는 땅띔도 못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서 왕은 유가로 하여금 나라의 현실적 정치를 행하게 하고 불가로 하여금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행하게 하기로 하신 것이다. 신숙주와 한명회 같은 이들은 현실의 정치가로, 신미, 수미, 학열, 학조 등은 백성의 마음을 불도로 인도하는 일을 맡는 사람으로 상감의 심중에 정해놓으셨다.

왕의 숙부 되는 효령대군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도 불도편으로 왕의 의중의 인이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은 유신들의 편견이었다. 그들은 태조대왕 이래로 그러하지마는 불교를 뿌리를 뽑아버리지 아니하고는 만족치 아니하려 하였다. 왕이 보시기에는 되지도 못한 유치한 이유를 가지고 불도를 모함하였다. 그래서 머릿살 아프도록 밤낮 옥신각신이 끝나지 아니하였다.

또 중은 중대로 철없는 자가 많았다. 왕이 불도를 숭상한다 하여서 쓸데없는 곤댓질을 하여서는 유가에 비난의 재료를 제공하였다.

'사람이 없고나!' 하는 끊임없는 왕의 한탄은 여기서 온 것이었다.

왕은 이 점으로 보아서 무척 외로우셨다. 이 세계에 왕의 뜻을 받아주는 이는커녕, 알아주는 이도 없었다.

유신과 유학을 토론하여도 왕의 뜻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불도에 대하여서는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를 진심으로 존경하셨다. 신미가 과연 견성견불(見性見佛)을 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는 상감도 알지 못하시나, 그가 오욕 번뇌를 다 원리(遠離)한 아라한(阿羅漢)인 것을 상감은 허하셨다.

신미와 대하여 앉으면 상감은 마음이 편안하고 맑아짐을 느끼셨다. 신미의 용모는 단아한 중에도 위엄이 있었다. 좀처럼 말을 아니하나 말이 나오면 다 도를 얻은 말인 듯하고, 좀처럼 웃지 아니하나, 한 번 웃으면 춘풍이 솟는 듯하였다. 그는 임금의 앞이라 하여 당황하지도 아니하고, 또 임금이 존숭을 받는다 하여서 교만한 빛도 없이 어디까지나 태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신미는 언제나 먹물을 들인 칡베 장삼을 입고 보리자 염주를 메고 있었다. 늙어서 머리와 수염이 다 눈같이 세었으나 눈에는 맑고 젊은 기운이 있었다.

상감은 학조도 존경하였다. 경을 토론하는 데는 신미가 학조를 당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학조는 유학과 불서에 다 통달한 학승이었고, 또 상감께서 늘 가까이하실 수 있는 불도의 벗 김수온의 형이었으므로 유신 중에서는 유학과 문벌로 보아서 학조를 더 높이 여기면서도 동시에 학조를 깊이 시기하였다.

상감은 신미나 학조 같은 이와 자주 만나고 싶어하셨으나 정인지, 최항, 기타 유신들의 입이 귀찮아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셨다.

상감은 매양 외로우셨다. 그 외로움을 신숙주 같은 중신과 술을 자시고 해학함으로 겨우 풀으시는 것이었다.

"저 백성들은 내 백성들이다. 경들의 백성이 아니다."

상감은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다.

실상 백성의 휴척을 생각하는 이는 상감뿐이셨다. 신하라는 자들은 제 몸과 제 집과 당파를 위하여서 논쟁하였다.

유신들이 유교를 옹호한다는 것도 공자의 도를 위한다는 것보다도, 나라를 위한다는 것보다도 제 심사와 제 계급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었다.

봉련(鳳輦)은 운종가 네거리를 지났다. 거기는 수없는 오색 깃발과 수없는 등이 덩그렇게 높은 더그매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육주비전은 더욱 찬란하게 장식을 베풀었다.

새로 지은 대원각사의 날아가는 듯한 지붕이 보였다.

봉련이 황토를 편 길에 다다랐다.

상감은 원각사 지붕이 보일 때에 잠깐 손을 들어서 합장하셨다.

상감은 이 절을 조성하시기에 어떻게나 노심하신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셨다.

십삼층 탑은 어떠한고?

종은 어떠한고?

북은 어떠한고?

무엇보다도 효령대군이 몸소 감독하여서 부은 금불상은 어떠한고?

이 금불상은 원각사에 봉안하기 전에 한 번 대내에 모셔왔던 일이 있다. 두 분을 조성하여서 한 분은 궐내 내불당에 모시고 한 분은 원각사에 모시게 하셨다. 그때에 뵈온 일이 있지마는 대원각사 새 법당에 모신 모양은 더욱 장엄하리라 고 상감은 생각하셨다. 이 불상을 이룬 금은 전혀 양근 한여울[陽根大灘]에서 캔 사금이다. 봉련이 대총지문(大總持門) 앞에 다다르매 종과 북이 일시에 울기를 시작하였다.

이 종은 어떠한 종인고? 백성들의 전설에는 조선 팔도 매호에서 퉁숟가락 한 가락씩을 모아서 부은 것이라고 한다.

신라 적 가장 큰 종과 같이 큰 종이라고 하는 종이다. 조선 백성의 정성을 모아서 부은 종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 종이 우는 것이다. 그것은 팔도 백성의 마음이 임금의 행차를 맞아서 불도를 사모하여 우는 것이다.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시고 마음이 흡족하셨다. 대총지문이란 대원각사의 산문이다. 그것은 원각경에서 나온 말이다.

"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이라는 데서 온 것이다. 이 대다라니문의 이름이 둥글게 깨달음이란 것이니 여기서 온가지 깨끗한 참다움[眞如]과 깨달음과 번뇌를 끊음[涅槃]과, 올은 길[波羅蜜]이 흘러 나온다는 그 문이다. 이것을 큰 다라니, 즉 총지라고 한다.

대총지문 안에는 이환문(離幻門), 적조문(寂照門) 등 문이 있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한 것은,

"一時. 婆伽婆. 入於神通大光明藏三昧正受. 一切如來. 光嚴住持. 是諸衆生. 淸淨覺地."

라는 데서 온 것이니 중생의 모든 번뇌를 떼어버리고 들어가는 자리가 곧 크게 환한 빛의 근원, 곧 대광명장이요, 그것이 곧 부처다.

그 밖에 정려당(靜廬堂), 수환당(修幻堂), 선실(禪室) 등의 당호가 모두 원각경의 삼관(三觀), 이십오륜(二十五輪)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상감은 총지문 밖에서 내리셨다. 거기는 신미, 수미, 학열, 학조와 효령대군, 영응대군을 비롯하여 일백이십 명의 부회승의 영접이 있었다. 신미 이하로 합장 국궁하는데 대하여 상감도 합장 국궁으로 답례를 하시고 따라서 호종 제신들도 모두 합장 국궁하였다.

상감은 불도를 싫어하는 정인지 등 유신들이 합장 국궁하는 양을 돌아보시고 빙그레 웃으셨다.

상감이 황토를 깐 길로 옥보를 옮기시와 진여당(眞如堂)인 행궁에 듭시는 동안 종과 북이 그저 울었다.

상감이 진여당에 듭실 때쯤 하여서는 풍경까지도 더 우는 것 같았다.

경찬회(慶讚會)[편집]

오시부터 경찬회 큰 재를 잡숫기로 되었다.

임금은 다담을 잡수시고 새로 손을 씻으시고 양치를 하시 고 재우치는 쇠북, 가죽북 소리 속에, 혜각존자의 인도로 법 당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대낮이지마는 불탑 앞 정면에는 만월과 같은 옥등잔에 열 십자로 불이 켜 있었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자 는 불이다. 일월등명여래(日月燈明如來) 적부터 끊임없이 전 하여 연등불(練燈佛)을 거쳐 무시 이래 무량겁에 끊어짐 없 이 내려오는 '참길'의 법등이다.

상감은 특별히 경주 남산의 백옥을 캐어서 이 등을 만들게 하셨다.

"원컨대 이 등불이 삼계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 무 시 이래의 무명을 깨뜨리고 부처의 대광명장을 징하게 하여 지이다."

상감은 이렇게 심축하시었다.

법당 동쪽에 옥좌를 예비하고 그 뒤가 호종 제신의 자리 요, 동쪽에 법사의 사자좌(師子座)가 놓이고 그 뒤로 부회승 들이 새로운 가사 장삼에 단주들을 들고 서게 되었다.

맨 처음 절차는 불상의 개안법회(開眼法會)였다.

왕께서 손수 불상을 가리운 장막을 걷으시니 금색이 찬란 한 석가모니 좌상이 나타났다.

다음에 혜각법사의 손으로 불상의 눈을 봉한 종이를 끌렀 다.

"대자대비삼계대사 사생자부시아본사 석가모니불(大慈大悲 三界大師  生慈父是我本師 釋迦牟尼佛)."

하는 염불 소리가 혜각존자의 입에서 떨어지자 대중이 이 에 창화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계하의 악공석(樂工席)에서는 유량한 영산 회상곡(靈山會上曲)을 아뢰었다. 황포 또는 홍포에 사모를 쓴 마흔다섯명의 악공으로서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 곡조는 육 년 전에 상감께서 난계 박연(蘭溪 朴堧)을 명 하시와 친히 지으신 것이었다. 영산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 이 석가세존께서 법화경 기타 여러 경을 설하신 기사굴산 (嗜■?山)이다. 세존께서 이 우주의 처음 없는 처음으로부터 끝없는 끝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큰 길을 설하신 그 위대 한 광경을 음악으로 표현하자는 상감의 뜻이시니 월인천강 곡과 같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 주악이 있는 동안에 법당 안에서는 밀교(密敎), 현교(顯 敎)의 여러 가지 의식이 차례차례 거행되었다.

지리산에서 올려온 백단향의 연기는 법당을 채우고 남아서 구천으로 올라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부처 나라〔佛 刹〕에서 퍼져 제불보살께 공양이 되고 일체중생의 번뇌를 밝히라는 뜻이다.

혜각존자는 효령대군이 지은 축원문을 불전에 낭독하였다.

첫째로 왕과 왕후의 만수무강을 빌고,

둘째로 임금의 선세 부모의 명복을 빌고,

셋째로 돌아가신 세자궁의 명복을 빌고,

넷째로 국조(國祚)가 무궁할 것을 빌고,

다섯째로 내외 백관이 다 선정하고 복록이 무궁하고 품질이 오를 것을 빌고,

일곱째로 이 해에 우순 풍조하여서 팔로에 풍년이 들고 민간에 질고 없어 함포고복(含哺鼓腹)할 것을 빌고,

여덟째로 모든 시주의 복을 빌고,

아홉째로 본사를 제불 보살과 제천, 신장과 산신이 호념(護念)할 것을 빌고,

열째로 이 법회에 모인 무량중생이 모두 영단 무명(永斷無明)하고 증성불도(證成佛道)할 것을 빌고,

열한째로 이 절 조성에 참례한 목수 미장이, 기와장이, 일꾼들이 다 불연을 맺고 복록을 얻을 것을 빌었다.

이 절을 지은 장색, 일꾼이래야 거의 전부가 중이었다. 이 절 역사를 제 밥 먹고 하면 오십일이면 도첩을 주고, 나라 밥 먹고 하면 백일이면 도첩을 주기로 영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열두째로는 이 절이 거의 다 낙성이 되려 할 때에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일꾼 두 명이 무량겁래에 지은 죄를 절 지은 공덕으로 다 벗고 왕생 극락하기를 빌었다.

효령대군의 글도 간절하거니와 혜각존자의 읽는 소리도 간 절하였다.

상감은 축원문 중에, 돌아가신 세자궁 말씀이 나올 때에 잠시 비감하였으나 일체 함령이 다 정각을 이루어지이다 하 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세자궁이 이 세상에 다녀간 것이 다 헛됨이 아니요, 상감으로 하여금 더욱 불연을 깊이 맺게 하 신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한 번 합장하셨다.

실로 상감이 이처럼 불도에 깊이 들어가시기는 즉위하신 지 이년이 되는 해에 세자궁께서 열일곱 살에 애처롭게도 돌아가신 일이었다.

그것은 다만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잃으신 아버님의 슬픔만 이 아니었다. 계유정난 이래로 수없이 사람을 죽이신 것이 혹시 업보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무시로 상 감의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이 더욱 괴로우셨다.

이러한 인과 응보의 무서움을 느끼실 때마다 상감은,

"내 오욕을 채우려고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조종의 유업 을 빛내기 위하여서요, 중생을 바로 인도하기 위하여서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셨다.

더구나 세자궁께서 열이 높으신 때면,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여러 번 꼭같은 헛소리를 하신 것이 상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중전마마라면 무른 세자궁께는 백모가 되시는 문종대왕비시오, 가엾으신 노산군의 어머니이시다.

더구나 노산군을 죽이신 뒤로부터는 그렇게도 강강하신 상 감으로서도 가끔 꿈에 노산군을 뵈옵고는 소스라쳐 잠을 깨 셨다.

상감의 꿈에 보이는 노산군은, 노산군이 일찍 열네 살인 어린 왕으로 계실 때에 당시 영의정이요, 이조판서, 병조판 서를 겸한 수양대군이시던 상감의 소매를 붙드시고,

"숙부, 나는 어찌하라오?"

하시는 그 모양이었다.

상감은 세자궁을 생각하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시고 이번 경찬회 끝에 노산군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재를 올리 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산군을 위하여서 목숨을 버린 동기들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기타 여러 군들과 노산군을 기른 혜빈 양씨(惠嬪楊氏)며 노산군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그 부마 정종(鄭悰)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끝으로 성 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도 생각했다.

상감은 잠시 창연하여 불탑 위에 고요히 앉으신 불상을 바 라보셨다.

'모두 혼령을 불러 제사를 지내고, 원각경을 설하여 법공양 을 하자.' 상감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때에 법사가 끝나고 혜각존자는 공손히 왕의 앞에 걸어 와 합장하고,

"분향하시고 배례하시올지?"

하고 물었다.

상감은 곧 자리에서 일려 하시다가 좌우를 돌아보셨다. 임 금의 일이란 제 뜻대로 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 무도 먼저 의견을 말하지 아니한다. 임금을 두려워하는 것 보다도 제가 괜스레 출반주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국왕이 불전에 분향 배례하는 것이 예에 어떠하오?"

상감은 정인지를 돌아보시며 물으셨다.

정인지는 큰일났다고 생각하였다. 국왕이 불상 앞에 절을 하여도 관계치 않다고 대답하면 유신간에서 찧고 까불고 하 여서 제 명성이 떨어질 것이요, 만일 그것이 불가하다고 하 면 또 상감의 역린(逆鱗)을 건드릴 것이다.

인지가 자저(■??) 것을 보시고 상감은 인지의 심증을 촌탁 하시어 웃으시고, 다음에 서거정을 향하시와,

"학역재(學易齋)는 대답이 없으니. 강중(剛中)이 말하오. 은 휘하지 말고 바로 말을 하오."

하셨다.

학역재라는 것은 인지의 당호요, 강중은 거정의 자다. 인지 는 나이 많으매 존경하여 호를 부르신 것이요, 거정은 연상 적 하다 하여 자를 부르신 것이다.

거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젓사온대, 옛날 송태조께서 상국사(相國寺)에 행(幸)하시와서 불상전에 소향하시고 배하랴 말랴 물으시매, 중 찬녕(贊寧)이, 현재 불이 불배과거불(現在佛不拜過去佛)이라 아뢰이매 태조께서 크게 웃으시고 배하지 아니하셨다 하오. 그러하온즉, 배 아니하는 것은 정(正)이요, 배하는 것은 권(權)인 줄 아뢰오."

하고 아뢰었다.

상감도 웃으셨다.

정인지를 비롯하여서 호종 제신들은 모두 안심하였다. 더구나 그 결론이 묘하였다. 절 아니하는 것이 옳지마는 절하여도 관계치 않다는 뜻이다.

상감이 웃으신 것도 신하들의 이 심의를 보심이었다.

상감은 곧 웃음을 거두시고 다시 정색하셔서,

"임금이 불전에 분향 배례하면 신하들이 따라서 분향 배례 하는 것은 예에 어떠하오?"

하고 다시 정인지를 돌아보셨다.

"지당하온 줄 아오."

정인지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었다.

이에 상감은,

"佛弟子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王李■."

라는 자격으로 불전에 분향하시고 합장 국궁하셨다.

상감의 뒤를 따라서 영의정 신숙주를 비롯하여 호종 제신 이 모두 불전에 분향하고 절하였다.

이리하여서 경찬회의 첫 절차가 끝이 나고 상감은 행궁인 진여당으로 돌아오셨다. 불사가 끝날 때에도 종이 울었다.

소찬으로 점심이 끝난 뒤에 얼마 있다가 다시 종이 울었 다. 원각회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법당에서 먼저 왕과 호종 제신을 위하여서 원각경 법설이 있고 다음에 앞뜰에 많은 대중을 모으고 다시 원각경을 설 하자는 것이다. 이 대원각 법회는 실로 경찬회의 중심이 되 는 큰 절차로서 닷새동안을 계속할 예정이다.

상감은 아까 모양으로 호종 제신을 거느리시고 다시 법당 에 듭셨다.

사자좌에 이른 이는 신미, 혜각존자였다. 먹물 장삼에 주홍 가사를 메고 앞에 경상을 놓았다. 상 위에는 상감이 친히 입으로 부르시고 김수온, 한계희 등 문신을 시켜 주를 번역 하게 하신 원각경이 놓여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효령대군 이 몸소 감독하여 인쇄가 끝난 새 책 열 권이다.

원각경 번역이 완성된 것은 대원각사가 낙성된 것보다 큰 일이었다. 법화경, 영가집(永嘉集) 등과 아울러 왕께서 대장 경 번역을 발원하신 지 십 년에 이루어놓으신 가장 큰 공적 이었다.

왕은 불서만을 번역하신 것은 무론 아니다. 유가서도 친히 토를 다시고 유신들을 명하시와 주석까지 언해를 하셨다.

주역구결(主役口訣)도 이때까지에는 거의 완성이 되어 있었 다.

왕의 본회는 부왕이신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한글로 유교와 불교의 모든 경전을 다 번역하시려는 것이었다. 유가의 임 금이신 동시에 불가의 임금도 되시려는 본의시오, 또 조선 백성에게 높은 문화를 널리 펴시려는 본의셨다.

경전뿐 아니라 시문까지도 번역하실 뜻을 두셔서 두자미 (杜子美)의 시를 번역하셔서 《두시언해》라고 출판하셨다.

만일 이 임금이 앞으로 이십 년만 더 세상에 계셨더라도 경 전과 좋은 서적의 번역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서도 진실로 임금의 뜻을 알아드리 는 신하가 없었다. 유신들은 중국을 숭배하여서 글도 한문 만을 숭상하였고 한글로 번역하는 것을 객쩍은 일로 알았고 중들 중에도 대장경전을 조선말로 옮기려는 열성과, 또 그 만한 힘을 가진 자가 없었다. 모두 그날 그날의 영화를 생 각하는 무리요, 국가와 민생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자가 없었다. 왕은 이 일에도 외로우셨다. 혼자셨다.

왕께서 유와 불에 일편됨이 없으시다 하더라도 불도를 더 높이 평가하셔서 유교의 위에 두신 것은 사실이다.

"석가의 가르침은 너희 공자의 가르침을 포용하고도 더 높 고 더 넒으니라."

하신 것은 세종대왕께서 살아계신 때, 흥천사 오층불사리 탑 낙성법회(興天寺五層佛舍利塔落成法會) 때에 이미 하신 말씀이었다.

불도가 유교를 포용하고도 남는다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도 가진 사상이었다.

매월당은 이렇게 말하였다.

"釋氏之本意. 以慈悲爲先. 使君者知所以愛民. 父者知所以愛 子. 夫者知愛婦. 上無■戾之政. 下■弑逆之懷. 使天下之人皆 妥帖安堵. 而務養育妻子. 長長幼幼. 則雖無人義之談. 而不殺 不盜之警己形仁義之迹. 其福■王祚永■生民之功. 亦■加■."

"變西■爲廉恥之邦. 敎?■歸聖哲之域."

이것은 동시에 상감의 뜻이셨다. 곧 불도를 믿으면 유교의 인의는 자연히 포용된다고 보신다. 죽이지 말라 함은 인(仁) 이요, 빼앗지 말라 함은 의(義)요, 제 아내 아닌 여자를 탐 내지 말라 함은 예(禮)요, 거짓말 말라 함은 신(信)이요, 어 리석지 말라 함은 지(智)다. 이것은 곧 불교의 오계(五戒) 속에 벌써 유교의 오륜(五倫)이 다 포함됨을 보인 것이다.

하물며 불교에서 번뇌와 생사를 아주 끊어버리고 무변 중생 을 제도한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유교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는 불의 속에 들어가나 불은 유를 싸고 도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중생에는 근기(根機)의 상중하가 있어서 하근기 로는 불도의 고원한 것을 깨닫지 못하매, 그러한 무리에게 는 유교의 알기 쉬움이 쓸데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근기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에 있어서는 유신으로 족하다고 왕은 보신다.

유학을 배워서 대신이나 관장이 된 자는 제 분을 지켜서 세간 정치의 분을 지키되 제 근기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불 도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왕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서도 김시습이 한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불도에도 인의가 있다 하니 그러면 높 은 중으로 하여금 나라 정사를 맡게 하여도 좋으냐 하였다.

이 사람이 묻는 뜻은 나라 정사를 맡는 것이 인생에 가장 높은 일이요, 또 이 높은 일을 맡을 만한 이는 인의를 배운 유가라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물음에 대하여서 시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 같은 짐승이로되 사슴이 장거리에 내려오면 사람들이 다 괴이히 여기고 개가 산에 살면 사람들이 다 웬일인가 하 나니 대개 사는 곳이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높은 중에게 나라 정사를 맡기기로니 그가 허리를 굽혀서 그 자갈과 고 삐에 매울 것이냐."

왕께서 생각하시는 것도 이것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오늘 왕의 제신들이 대원각사 경찬회에 참석하여 분향 예불하고, 원각경 법설을 듣게 된 것을 왕께 서는 심히 기뻐하셨다. 이것으로 그들의 칠통(漆桶) 같은 마 음이 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나 또한 큰 불인연을 지 음에는 틀림없었다.

사람이 불상 앞에 가서,

"합장만 하거나
고개만 숙이거나
손만 한 번 들어도
다 부처 되나니라."

하신 법화경 방편품의 글귀를 왕은 생각하신 것이었다.

불탑에 피어오르는 향,
옥등잔에 타는 불,
이따금 들리는 풍경 소리,
모두 고요하였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고좌에 높이 앉은 혜각존자에게로 쏠 렸다.

신숙주, 황수신, 한계희, 김수온, 서거정, 이러한 사람들은 다 원각경을 여러 번 읽어 주석까지도 휑하게 아는 터이지 마는 혜각존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슨 아직까지 듣지 못하던 새 말인 것 같았다.

기실 그들은 혜각존자라는 중 신미를 미워한다. 상감께서 신임하시고 존경하시는 것을 시기하는 것이었다. 암만해도 저 늙은 중의 속에 자기네보다 나은 무엇이 들어앉았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속에는 교만이 차 있었다. 승록대 부니 승정대부니 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꽉 채워놓고 만 것이다.

그들은 사량(思量) 이상의 경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법은 보일 수 없도다. 말로 할 수가 없도다. (是法不可示 言詞相上寂滅)."

이라는 세존의 말씀이나,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 알 바 아니니, (是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

라는 것이나,

"너 사리불도 이 법에는 믿음으로 들거든 하물며 여느 성 문이랴. (汝■利佛. 尙於此法. 以信得入. 況■聲聞)."

이라는 것이나,

"이 법은 본래로부터 언제나 그저 괴오하니, 부처를 믿는 이 도를 행하고사 오는 세상에 부처 되리라. (是法從本來. 堂自寂滅相. 佛自行道己. 來世得作佛)."

이라 하는 경계는 그들의 귀에도, 마음에도 아니 들어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저 괴오하니."

알음과 움직임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 움직임이 없으매 걷 잡을 끄트머리가 없다는 말이다. 오직 제가 징할 수 있을 뿐이나 남에게 가르쳐 말할 수 없는 것이 참법의 본색이란 말이다.

그러하길래로,

"부처를 믿는 이 도를 행하고사."

라고 하셨다.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서 행해보고사,

"옳지, 이게로구나!"

하고 황연히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이 둘 다 교만한 자들이 즐겨아니하는 바다.

오직 제 조그마한 소견으로 요리조리 생각하여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할 뿐이다.

"凡夫■■. ■■■■."

라는 그러한 것들이다.

"깊이 허망한 법에 착(着)하여 굳게 지켜버릴 줄을 모르고, 제 잘난 체 스스로 높은 체, 마음이 굽고 참되지 아니하여 천만억겁이 되어도 부처의 이름도 듣지 못하고 바른 법도 듣지 못하니 이러한 사람은 건지기 어려워라. (심양허망법 ■■■■■ ■■■■■ ■■■■■ ■■■■■ ■ ■■■■ ■■■■■ ■■■■■)."

상감은 신하들의 편견을 대할 때에 가끔 이러한 법화경 구 절을 생각하셨다.

오늘은 이 사람들이 비인 마음으로 들어줄는가 하고 상감 은 제신을 돌아보셨다.

효령대군, 영응대군도 서쪽 중들의 자리에 있었다.

"■■■■■■■. ■■■■■■■.
■■■■■■■. ■■■■■■■
(높고 높고 깊고깊은 미묘한 법을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 워라. 내 이제 보고 듣고 받아 가지오니 부처님의 참뜻을 깨달아지이다.)"

하는 개경제(開經偈)가 끝나고 혜각존자는 원각경 셋째 권 을 폈다.

"─一時婆伽婆 入於神通大明■ 三昧正受."

여기까지 읽고 한 번 끊고,

"──一切如來 光嚴住■사

하고 또 한번 쉬어서,

"是諸衆生. 淸淨覺地."

하고 존자는 주장을 들어 한 번 경상을 쳤다. 딱하는 소리 가 났다.

"神通大光明멸■. 이것이오. 환한 빛, 아무것도 없고 오직 환한 빛, 이것이 부처요, 이것이 곧 우리 마음이오. 환한 빛, 환한 빛, 이것이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 자리가 막혔다.(言語 通斷思議處■)는 데요."

"一切如來 光嚴住■. 일체여래란 별것이 아니도. 이 대광명 장삼매요. 이 환한 빛이오."

"是諸衆生 淸淨覺地. 이 모든 중생이 청정각을 얻는 경계 라. 중생이 생사번뇌와 무명암치(無明暗■)를 벗어놓은 깨끗 한 마음 자리가 곧 이 신통대광명장이란 말이오. 그 자리에 언제까지나 있는 것을 일러서 삼매정수(三昧正受)라 하는 것 이오."

"여기 다했어. 이 말에 다했어. 원각경 열 권이 이 말에 다 하였고 석가세존의 오십 년 설법이 이에 다하였고 시방삼세 제불의 천언만어가 결국 이 한 경계를 말씀하신 것이오. 제 불출세 일대사인연(諸佛出世一大事因緣)이 바로 이 경계를 중생에게 알리자는 것이오."

하고 혜각존자는 또 한 번 주장을 들어 상을 치고,

"회마(會?)!"

하고 일갈하였다.

대중은 잠잠하다. 풍경 소리 들린다.

잠시 침묵한 뒤에 혜각존자는 소리를 높여서,

"나무본사 서가모니불."

을 불렀다.

다들 따라 불렀다.

열 번을 불렀다.

이 귀한 가르침을 듣자오매 저절로 석가모니 본사의 고마 움이 솟아오른 것이었다.

상감께서도 소리 높이,

"나무본사 서가모니불."

하고 부르셨다.

원체 웅장하신 음성이라 누구나 그것이 상감의 음성인 줄 을 분간할 만하였다. 제신들은 "설마" 하고 있던 차에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뒤떨어져서야 겨우 입 속으 로,

"나무본사 서가모니불."

을 불렀다. 정인지의 망건편자에는 땀이 솟았다.

염불이 끝난 뒤에, 혜각존자는 다시 목탁을 두어 번 울리 고 나서 소리를 가다듬어,

"이것이, 이 환한 빛이 곧 원각이오. 경에 서가세존께서 이 렇게 말씀하셨소."

하고는 경을 읽는 조로,

"선남자야, 문수사리보살을 부르시는 말씀이오. 이 원각으 로 말하면 고작 높은 지혜, 지혜의 꼭대기이기 때문에 세존 께서 문수보살을 인하시와 말씀하신 것이오."

다시 경을 외우는 조로,

"善男子야, 無上法王이 有大陀아羅문尼니門하니 名爲圓覺이 라."

하고는 설명하는 조로,

"이 대다라니라는 것이 곧 대광명장이오. 우리 중생의 청정 각지요. 모든 것을 그 속에 다 간직하였으매 다라니라 하는 것이오. 곧 무명을 떼어버린 우리 마음을 가리킨 것이오."

하고는 다시 경을 읽는 조로,

"流出一切. 淸淨眞■. ■■. 湟■. 及波羅난충충."

여기까지 읽고 존자는 눈을 들어 대중을 돌아보며,

"흥, 모두 이 속에서 나오는 것이오. 중생 세계의 천변 만 화가 다 한마음이라는 요술통에서 쏟아져 나오듯이 무상법 왕의 대다라니문에서는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바라미, 이 모든 것이 꽐꽐꽐꽐 솟아나온단 말인데, 무상법왕의 대다라 니문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가슴속에 저 마다 품고 있는 마음이란 말이오. 허허 제 몸에 값가는 보 물을 지니고도 그것을 잊고 거지 노릇을 하는 것이 우리네 범부 중생이오. 한 번 이 보물을 깨달아 아는 날에 우리가 다 같이 무상법왕이 되는 것이란 말요. 그러기로 경에 말씀 하시기를."

하고 경 읽는 조로,

"■■■■■■■■■■■■■■■■■■■■■■■■■■■■■■ ■■■■■■■■■■■

하고 나서, 주장으로 상을 크게 치며,

"좋을시고. 영단무명하야사 방성 불도로고나. 일체여래께오 서 어찌하여 부처가 되셨느냐. 다름이 아니라 영단 무명이 라, 무명을 영영 끊어버리시매 부처가 되신 것이라. 이것이 성불하는 길이란 말요. 무명에 가리워졌으니 중생이러니 한 번 무명을 벗으니 부처라, 그 말씀이오. 도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것이 도라, 그 말씀이오."

혜각존자는 경을 읽는 어조와 설명하는 어조를 섞어서,

"운하무명(云何無明)이냐, 무엇이 무명이나.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고 나고 죽고 죽고 나게 하는 무명이란 무엇 이냐. 선남자야. 일체 중생이 종무시래(從無始來)로 종종전 도(種種顚倒)하여───이게 병이오. 거꾸로 본단 말요. 유 여미인(猶如迷人)이 사방을 역처(易處)하여───동을 서로 알고 남을 북으로 알아서, 그런 말씀이오. 우리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 뜨거나, 모르는 고장에 처음 들어서면 가끔 사방 역처, 향방을 거꾸로 보는 일이 있는데, 향방을 모르는 자는 가르칠 수가 있지마는 향방을 거꾸로 알고 아는 체하는 자 는 암만 바로 일러주어도 못 깨닫는 것이오. 중생이 그게야.

태어나올 때에 사방 역처하고 죽을 때에 사방 역처를 하는 것이오. 그것이 새 고장이라도 여간한 새 고장이 아니라 아 주 생소한 남의 고장에 빨가숭이로 뚝 떨어지는 것이거든. 안 그럽니까."

하는 눈은 잠깐 상감께로 간다.

상감은 고개를 끄덕이신다. 존자는 한층 더 소리를 높여,

"망인사대(妄認  大)하여 위자신장(爲自身相)하고───이 잠시 썼다가 벗어버릴 몸뚱이를 망녕되이 저로 안단 말요.

육진연영(六塵緣影)하여 위자심상(爲自心相)이었다───육 진 연영───색성 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그림자를 망녕 되이 제 본마음으로 안단 말요. 이 육진이란 사대가합이라, 흙과 물로 반죽하여서 불기운과 바람 불어넣은 물건이니 이 를테면 쓰고 사는 집일지언정 나는 아니란 말요. 우리 중생 이 일컬어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 마음이 아니오.

그것은 이목구비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인 그림자란 말요.

그러므로 경에 하셨으되, 비피병목(臂彼病目)이 망견공화(妄 見空華)하고 급제이월(及第二月)하나니, 선남자야 공실무화 (空實無華)라, 병자망집(病者妄執)이니라───망녕되이 고 집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허깨비를 보고 하나밖에 없 는 달을 둘로 보면서 그것이 제 눈이 병들어 그런 줄을 모 르고 서 있다는군, 분명 있다는군. 이것이 망녕되이 고집하 는 것이라, 그 말씀이오."

하고 혜각존자는 손으로 제 가슴을 한 번 치며,

"이것도 허깨비, 이것도 허깨비라 하는 이 마음도 허깨비란 말요."

하고 허허 웃는다.

"있다가 스러질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란 말요. 비 온 끝에 하늘 한 편 끝에 서는 무지개, 그것을 있 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노露亦如通. 應作如是觀."

혜각존자는 금강경 사구게(金剛經 句偈)를 한 번 외운다.

"그런데 말씀이오, 유망집고(由妄執故)로───이 망녕된 고집으로 말미암아서, 비유혹차허공자성(非唯或此虛空自性) 하고───다만 이 허공엔 제 본성을 잘못 알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성이란 상자적멸상(箱子寂滅相)이라 불생불멸 (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무 법무래역무주(無法無來亦無住)───유가에서도 허영불매(虛 靈不昧)라 하였소. 이것이야말로 제거든, 제 주인이거든, 이 것을 잘못 알 뿐 아니라 말씀이여, 역부미피실화생처(亦復迷 彼實華生處), 또 저 실로 꽃이 난 데를 잘못 알아,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씀 뜻이지요. 이것이 다 제 눈 이 병이든 줄을 모르고 망녕되이 고집하는데서 말미암아 온 단 말씀이오." 하고 한번 대중을 돌아보며,

"허허 큰 병이오. 억천 만겁에 나을 줄 모르는 큰 병이란 말요. 묻노니 이 중에 뉘라서 이 병이 없는 자뇨? 있거든 나설지어다!" 하고 상을 때린다.

고요하다. 유신 중에는 무엄하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 각은 괘씸하다 하는 생각으로 변한다. 사간원이나 사헌부를 시켜서 이 무엄한 중 신미를 탄핵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혜각존자는 더욱 소리를 가다듬어,

"유차망유윤전생사(由此妄有輪轉生死)하니, 고로 명무명(名 無明)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망녕되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빙글빙글 중생이 생사의 쳇바퀴를 도니 이런 전차로 무명이 라 하는 것이니라, 이런 말씀이오."

하고는 책을 덮어놓고,

"이 무명환화(無明幻華)를 멀리 떠나면 곧 원각이요, 원각 이 곧 성불인데, 이 아래 말씀은 보현보살의 이환삼매(離幻 三昧)를 비롯하여 정환적(精幻寂) 삼정관(三淨觀)이 이십오 륜(二十五輪)이 모드 이 무명 환화를 떠나는 법이오. 상근기 (上根機)일진댄 입어신통대광명장 삼매정수(入御神通大光明 藏三昧正受)에서 벌써 깨달았을 것이오. 중근기(中根機)면, 무상법왕유대다라니문 명위원각(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名爲 圓覺)대문에서 벌써 깨달았을 것이오. 하근기라도 삼관 이십 오륜을 닦으되 혹은 팔십 일, 혹은 백 일, 혹은 일백이십일 에 깨달으리라 하셨소. 이법은 문수보현 등 법회를 위하시 와서 설하신 것이거니와 또한 오늘 이 법회를 위하시와서 설하신 것이니, 이 회를 모인 대중이 모두 당기(當機)라 할 것이오. 이제 승천체도열문영무하오신 주상전하께오서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와 이 원각경을 번역하오시고 대원각 사를 중창하오시와 오늘 법회의 기연을 지으시오니 실로 호 법대왕이시라. 삼가 성수 무강을 비옵나이다."

하고는 합장하여 위의를 갖추고,

"나무서가모니불."

하고 염불을 인도하였다. 대중은 소리를 높여서 이에 창화 하였다. 법석이 끝났다는 종이 뗑뗑 울었다.

추천재(追薦齋)[편집]

노산군(단종대왕)이하의 원통한 혼령을 추천(追薦)하고 싶 은 마음이 상감께서는 간절하셨다. 노산군은 친조카님이시 오, 임금으로, 상왕으로 섬기시던 이시다. 비록 대의멸친(大 義蔑親)으로 나라 일을 위하여서 그 목숨을 끊는 극형에까 지 처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의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상감 께는 가슴에 박힌 큰 못이었다.

노산군은 그뿐 아니라 상감의 아버님이신 세종대왕께서 극 진히 사랑하시던 손자님이시었다. 세종께서 몸소 왕손을 품 에 안으시고 전정을 거니셨을 뿐 아니라 집현전(集賢殿)에까 지 납시와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후사를 부탁하신 일이 한번 두 번만 아니시었다.

상감께서 이런 일을 친히 보시기도 하셨거니와 들어서라도 모르시는 바가 아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상감은 어디까지든 지 이 어리신 조카님이신 왕을 도와서 옛날 중국의 주공(周 公)의 직책을 다하려고 하셨었다.

아버님이신 세종께 대하여서만 아니라, 그 형님이신 문종 대왕께서도 상감을 극진히 우애하셨다. 원체 인자한 천품을 가지신 문종께서는 누구를 미워하실 수 없는 어른이시지마 는 그 바로 다음 아우님이신 수양대군, 지금 상감께 대하여 서는 특히 우애가극진하셨고, 또 그 숙숙하신 기질과 무용 에 대하여서는 장차 국가의 큰 힘으로 믿으셨다. 그러길래 로 문종께서는 아우님이신 수양대군, 지금 상감의 활에,

"鐵石其弓. 霹靂其失. 吾見其張. 未見其弛(그 활은 철석이요 살은 벼락이로구나. 내 그 켕겼음을 보았으되. 늘어짐을 못 보다)."

라는 명(銘)까지 써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골육이 상쟁하는 비극이 일어났느냐.

그 원인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맏아드님이 임금의 자리를 잇는다 하는 법이 태종 대왕으로 말미암아서 깨어진 것이다. 태조대왕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근심하셔서 태종의 큰 공이 있음을 아시고, 또 감사하시면서도 그 맏아드님 정종(定宗)을 세자로 삼으셨 을 뿐 아니라, 당신 생전에 정종께 양위를 하신 것이었다.

그런 것을 정종을 들어내시고 몸소 왕이 되셔서 형제가 왕 위의 상속을 다투는 상서롭지 못한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었 다.

둘째는 왕자로는 국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제한이다. 이 제한이 필요한 이유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맏아드님으로 상 속한다는 주의만 확립하면 그 폐해는 제거할 수가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왕자는 국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제한은 능력있고 야심있는 왕자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이것은 태종에서도 그러하였고, 지금 상감이신 세조에서도 그러하 였다.

뻔히 변변치 못한 위인들이 사직의 운명을 그르치는 것을 보면서 능력있는 인물이 왕자이기 때문에 수수방관하지 아 니하면 아니 된다는 것은 실로 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라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로는 신하들의 이기욕과 시기심이었다. 위에 말한 두 가지를 이용하여서 간사한 신하들이 저마다 어느 유력한 왕 자 하나씩을 떠받들고 제 세상을 만들려는 음모를 하는 것 이다.

상감이 노산군을 죽이시는 비극을 낳은 것도 실로 위에 말 한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로 문종께서 병환이 중하셔서 제신에게 세자를 부탁하 는 이른바 고명(顧命)을 하실 때에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 (金宗瑞), 정분(鄭?) 등만을 부르시고 친동기이신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팔 대군을 부르지 아니하신 것은 왕 자 불참정이라는 불문율을 생각하여서 궁중 부중(宮中府中) 을 섞지 말자는 의리관념에서였다. 혹은 문종이 수양의 야 심을 간파하신 것이라고도 하나 그것은 수양대군에게는 원 통한 누명일 것이요. 또 만일 문종이 진실로 수양의 야심을 간파하셔서, 그 견제책으로 고명이라는 형식을 쓰신 것이라 고 하면, 그것은 심히 졸렬한 방법이다. 왜 그런고 하면 강 성한 대군들을 돌려놓는 것은 도리어 그들을 격분시키는 것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종이란 심히 명석하시고 사욕을 떠난 성군이시 다. 결코 그런 좀스러운 책략을 쓰실 어른이 아니신 것은 그 어른의 일생을 통하여서 분명한 일이다.

문종이 그 고명에 있어서 대군들을 제외하신 동기는 오직 왕자불참정이라는 철칙에 충실하자는 단순한 뜻에 불과하였 다.

문종의 이 정책은 결과로 보아서는 득책은 아니었다. 차라 리 수양대군께 고명을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적이다. 그러나 문종은 이상가요, 실제가는 아니시다.

그는 정사 선악으로만 움직이는 이셨지, 이해 득실을 고려 하는 이는 아니셨다. 그러므로 문종의 이 허물은 군자의 허 물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정으로 보면 영의정 황보 인은 허물없는 선 비였을지는 몰라도 무슨 주의 주장이나 용단력이나 실행력 이 있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바로 말하면 못난이였다. 이런 인물은 세종대왕 같은 큰 임금 밑에서 태평시대에 네네, 하 고 지내갈, 이른바 무대과(無大過)를 유일한 장기로 아는 인 물이었다.

우의정 정분은 황보 인만도 못한, 물에 물 탄 듯한 위인이 었다. 유신들 중에서도 코웃음받는 그저 호인이었다.

좌의정 김종서에 대하여서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공적과 청 렴 강직한 인격으로 많이 존경을 받지마는, 계유정난 시대 에 있어서는 이 역시 무위무능한 늙은이였다.

이러한 못한 늙은이들에게 문종은 국정을 맡기고 승하하신 것이다.

수양대군같이 총명하시고 영특하신 눈으로 보시기에 복통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신들은 고명받은 것을 자세하고 세 늙은이를 조 종하여서 종실의 세력을 아주 눌러버리기에 열중하였다. 단 종대왕 즉위후에 이른바 '왕자의 분경(王子奔競)을 엄금'한다 는 정책이 이것이다.

이 왕자의 분경을 엄금한다는 것은 수양대군 이하 임금의 친숙부들로 하여금 궁중에서 발을 끊게 하자는 정책이다.

핑계인즉 종친이 강성하여서 어리신 상감을 침범할 염려가 있다는 그럴듯한 것이지마는 기실은 자기네의 세력을 부식 하자는 불순한 동기에서였다.

황보 인, 김종서, 정분 등 세 늙은이는 결코 부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충후한 늙은이라는 명예 까지를 빼앗는 것은 가혹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미 늙고, 또 못나서 젊은 소인들의 이용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지저고리였다.

소위 유신들이 수양대군 이하의 종친을 배척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천자 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候)하자는 묵은 꾀요, 둘째는 수양, 안평 등 여러 대군이 모두 잘났던 까닭이었다.

그 중에서 수양과 안평은 문으로서 무로서나 인물로서나 도 저히 당시 유신배의 적수가 아니었다. 심지어 글씨까지 안 평을 대적할 자가 없고 활쏘기까지도 수양을 따를 자가 없 었다. 태조, 태종, 세종의 큰 핏줄에서 나온 이들이라 할 만 한 그 식견이 높고, 담략이 있고, 사람을 위압하는 기상에 있어서는 당시 유신들은 그 발뒤꿈치의 먼지도 따를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미웠다. 시기가 났다. 이 대군들이 정사를 잡는다면 그들은 평생을 졸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대군들을 당해낼 재주가 없 으매 '고명'이라는 것을 유일한 방망이로 여겨서 대군들과 궁중과의 관계를 아주 끊어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왕을 상왕으로, 상왕을 노산군으로 마침내 이 어 리신 임금의 목숨을 끊지 아니하지 못한 책임은 상감께 있 다기보다도 마음이 간악한 신하들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하였으나 상감께서는 당신의 명으로 노산군 이하 여러 골육 지친을 죽이셨으니, 그 마음이 편안하실 리가 없었다.

무슨 기회를 얻으면 그이네의 혼령에 대하여서라도 추선(追 善)하는 일을 하고 싶으셨다.

상감께서 즉위하신 후에 더욱 불도를 숭상하셔서 많은 절 을 중창하시고 또 불경 번역하는 일을 힘쓰신 것이 불도 자 신을 위하심도 위하심이겠지마는, 입 밖에 내어서 말씀은 아니하셔도, 속마음으로는 노산군 이하 여러 불행하게 목숨 을 버린 이들을 위하여 복을 비시는 생각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 상감께서는 문종대왕의 혈속으로 남아 있 는 경혜공주의 혈육인 자녀들에게 대하여서는 천역을 면하 고 양민이 되게 한다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번 원각사 경찬회를 기회로 하는 추천법회에도 노산부인 송씨(본래 왕후시다가 강봉되고 다시 관비라는 천역에까지 떨어졌던 이)를 법회에 참례케 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임금이 하시는 일이라, 무엇에나 신하들의 말썽이 시끄러웠다. 임금이 무슨 일 하나를 하려고 하시면 유신들 은 반드시 무엇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송나라 어느 임금이 어떠한 둥, 명나라 누가 어떠한 등, 심지어 멀리 주나라, 은 나라 일까지 끌어서는 말썽을 부렸다. 그것도 누가 대사든 지, 인민의 이해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라면 할 만도 한 일지마는 이것은 걸음을 걸을 때에 왼편 발을 먼저 내어놓아야 옳다, 아니다, 바른편 발을 먼저 내어놓아 야 옳다, 하는 따위의 이른바 예문에 관한 잔소리였다.

더구나 불도에 관한 문제만 나오면 그들은 거의 이성을 잃 어버려서 마치 질투에 불타는 여자 모양으로 차마 못 할 일 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이런 줄을 아시기 때문에 상감은 영의정 신숙주만을 부르 셔서, 노산군 이하의 영을 위하여서는 추천하는 재를 올리 고 초혼제를 지낼 것을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상감이 신숙주에게 물으셨다.

"그러하올세."

하고 숙주는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

"왜? 또 말썽이 있겠소?"

왕은 빙그레 웃으셨다.

"아직은 나라에 죄인들이오매."

"아직은 나라에 죄인?"

"그러하오. 나라에서 사유(赦宥)하신다는 처분이 없으시니."

이 말에 상감은 잠시 눈을 감으셨다.

"살아서는 나라에 죄인이기로 죽은 뒤에야 무슨 죄가 있겠 소?"

상감의 말씀은 비통한 빛을 띠었다.

"그러하오나 나라의 죄인을 상감께서 친히 치제를 하신다 고 하면, 어떠하올지? 필시 유림에 물의가 있을 듯하오."

"으흥, 그럴까?"

상감은 침음하셨다.

얼마 후에 상감은,

"범옹(泛翁)."

하고 숙주의 자를 부르셨다. 상감은 옛날 친구에 대하여서 가끔 이렇게 자나 호를 부르셨다. 그것은 친하신 정과 개인 간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하기 위하심이었다. 그러나 공공한 일에는 직함을 부르셨다. 그러한 경우에 숙주를 부르시려면

"영상"하시거나 "영의정"하시거나 또는 "신 정승"이렇게 부 르시는 일도 있으셨다.

"예."

"범옹은 마음이 괴롭지 않소?"

"무슨 말씀이시온지?"

숙주는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용안에는 평생을 보지 못하 던 비통한 빛이 떠돌았다.

숙주는 상감이 파탈하고 노시는 쾌활하신 표정과 벼락같이 진노하시는 표정과 엄숙하고 장중하신 표정은 익히 뵈었으 나 이렇게 비통하신 표정을 뵈옵기는 처음이기 때문에 숙주 자신 송구한 마음이 아니 들 수 없었다.

"노산께 대해서 말요."

상감의 비통하신 빛은 분노에 가까운 빛으로 변하였다.

"지극히 슬픈 일로 아오."

숙주도 전신에 힘이 빠지는 듯함을 느꼈다.

숙주의 눈앞에는 어리신 세자로의, 어리신 상감으로의, 어 리신 상왕으로의, 그리고 최후로는 노산군으로 강봉되시어 영월을 향하고 떠나실 때에 동대문 밖에서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숙주가 여쭈올 때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신 눈으로 숙주를 바라보시며,

"상감 잘 도와 사직 안보하고, 현릉(顯陵) 수고 잘하고, 중 전───응 인제는 중전이 아니지, 불쌍한 송씨 과히 고생 안 되도록 하오."

하고 부탁하시던 것을 생각하였다.

누가 이것을 열일곱 살밖에 아니 되신 이의 말씀이라고 할 까. 숙주는 노산군이 무슨 원망하는 말씀을 하실까 하여서 마음이 조렸으나 이런 당당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는 쇠방망이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듯이 띵하였다.

상감을 잘 도우라, 현릉을 잘 수호하라, 송씨를 과히 고생 안 되도록 하라, 이 말씀은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숙주의 가 슴을 아프게 하고 뼈가 저리게 하였다.

숙주가 상감께 노산 부인을 제가 하사하시기를 청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일 노산 부인 송씨가 홍윤성 같은 위인의 집에 종으로 간다고 하면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몰랐기 때문 이다.

또 설사 노산 부인을 숙주가 하사를 받는다 하더라도 숙주 개인에 있어서는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만일 노산 부인을 우대하면 다른 무리들 이 숙주가 노산께 충성을 가졌다고 모함할 것이요, 또 만일 노산 부인을 예사 종으로 대우한다 하면, 숙주가 전왕의 후 비를 천역을 시키고도 염연하다고 공격할 것이다. 이런 줄 을 알면서도 노산 부인을 하사하시기를 청한 데는 숙주의 깊은 고충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상감은 노산 부인을 아무에게도 하사하시지는 아니 하셨다. 역적의 권솔이라는 죄명이 노산 부인을 관비로 아 니할 수는 없게 하더라도 상감은 노산 부인을 두호할 수는 있는 대로 두호하실 결심을 가지셨다. 그래서 전라도 순천 부에 관비로 가게 된 경혜공주의 소생을 기르게 한다는 명 의로 여전히 궁중에 두신 것이었다. 숙주는 상감의 이 고충 을 알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창졸간에, "너는 마음이 괴롭지 아니하냐."하 시는 말씀을 듣자오매 숙주는 무엇이라고 대답 할 바를 모른 것이었다.

비록 상감이 숙주를 대신으로, 학자로, 또 뜻을 서로 통하 는 친구로 알아주시는 처지라 하더라도 그래도 군신지분이 란 큰 간격이 있었다. 상감은 정말 노산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그것을 숙주가 똑바로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임금으로서는 노산을 나라의 죄인으로 아니 여길 수 없는 형편이지마는 개인으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일찍 성삼문 등을 죽이실 때에 상감은 신하들이 듣는 자리 에서,

"성삼문, 박팽년 등은 금세의 난신이나 후세의 충신이다.

얼마 아니하여서 필시 삼문, 팽년을 죽인 것으로 나를 허물 할 줄을 내가 잘 아노라."

하신 것을 듣고 숙주는 몸이 오싹함을 느꼈었다. 그것은 상감이 실로 범상한 어른이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속이 트인 임금이시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노산 이하로 원통히 죽은 여러 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예사 사람들 이상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생각을 가지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마는 경솔히 그들을 동정하는 말씀도 여쭙기 어려운 일이다. 만일 그 말씀 여쭌 것이 상감의 뜻을 거스른다 하 면 그것은 심각한 결론을 가져오고야 말 것이다. 숙주는 그 것을 초탈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노산에 대하여서,

"지극히 슬픈 일로 아오."

하고 대답 여쭌 것도 실로 목숨을 내어걸고 한 대답이었 다.

"그럴 것을 범옹은 왜 노산을 죽이자고 주장하였소?"

상감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나라에 임금 두 분이 계실 수 없소."

숙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시역(弑逆)이 아닐까?"

이 말씀에 숙주의 이마에는 땀이 솟았다. 상감이 왜 이러 한 말씀을 하실까. 상감은 가끔 대답하기 어려운 말씀을 신 하에게 물으시고는 신하들이 대답에 궁하여 하는 것을 보시 고 웃으시는 버릇이 계셨다. 숙주도 이런 일을 여러 번 당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것이 한 해학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 말씀이 해학이기에는 그 얼굴이 너무 비통하시 고 또 음성이 너무 떨리셨다.

그렇지마는 무엇이라고 여쭙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그래 서 숙주는, 제가 하려는 대답쯤은 극히 평범한 것이어서, 도 저히 상감이 바라시는 대답이 되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이 렇게 여쭈었다.

"임금의 자리에 계신 때에는 시역이 되더라도 신하의 자리 에 내린 뒤에는 주(誅)가 되는가 하오."

"음, 기껏 그 말밖에 없소?"

상감은 낙심하신 듯하였다.

"대의가 그러한가 하오."

숙주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이 유가(儒家)의 의라는 거야? 임금을 죽이고 싶으면 신하를 만들어가지고 죽인다!"

상감을 한숨을 쉬셨다.

숙주는 더 여쭐 바를 몰랐다.

"금세의 유가는 노산 죽인 것을 의라고 하고 후세의 유가 는 그것을 불의라고 할 것이오. 그러면 그 의란 무엇이냐 말요."

상감은 비통하시던 표정을 푸시고 빙그레 웃으신다.

숙주에게는 상감의 웃으심이 성내심보다 더욱 견디기가 어 려웠다. 마치 갑자기 제 몸이 대단히 낮은 곳으로 굴러 떨 러지는 듯함을 느꼈다.

"범옹."

상감은 인제는 평상스러운 기분을 회복하셔서 숙주를 부르 셨다.

"예."

숙주는 고개를 들어 상감을 우러러보았다.

상감은 숙주의 낯빛이 흙빛임을 보고 또 한 번 웃으셨다.

"그러한 대의를 꾸며대더라도 임금을 죽인 것은 임금을 죽 인 것이요, 사람을 죽인 것은 사람을 죽인 것이오. 노산을 죽인 죄를 내나 범옹이 벗을 줄 아오? 못 벗소. 대의가 어 쩌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저를 속이는 말이요, 제 죄를 가볍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오. 범옹. 노산 죽인 데 대하여서 는 나도 죄인이오. 범옹도 죄인이오."

"그러하오나 나라를 위하여서 하신 일이거든."

"응, 범옹은 내 죄를 벗기려고 하는 말이지마는, 내 죄를 벗길 자는 범옹이 아니오."

"부처님이시리이까?"

"부처님도 중생의 죄를 못 벗기시오."

"그러면?"

"내 죄를 벗길 자는 아무도 없소. 나는 죄인이오. 나는 임 금을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 아우들을 죽이고, 충신을 죽이 고───나는 죄인이오."

"그것은 너무 겸손하시는 말씀이시고."

"아니. 실상대로 한 말이지."

"그야 제왕은 만민의 죄를 대신 지시는 어른이시니. 옛날 성탕께서도───."

"아니, 아니, 죄인을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아니오. 그것이 첨곡(諂曲)이라는 것이오. 제 허물을 허물 아닌 것처럼 꾸민 단 말요. 그 것은 죄 위에 또 한 죄를 더 짓는 것이오. 유가 들은 그것이 병이야. 죄를 졌거든 나는 죄인이오, 이러지 아 니하고 무에라고 무에라고 사기를 끌어오는 경서를 끌어다 가 그것을 꾸미려들어. 저를 속이는 것이지, 천지신명이야 속소?"

"그러하오면 상감께서는 계유정난과 대통을 받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오니까?"

숙주는 이거 큰일이라 하는 생각으로 담대하게 물었다. 그 것은 참말로 묻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아니. 나는 후회는 아니하오. 죄는 죄대로 죄 갚음 은 내가 받을 작정하고 이 나라 일은 내가 맡아야 되겠으니 맡은 것이오. 그것이 다 부질없는 생각일는지 모르지. 망자 존대(妄自尊大)한 생각이겠지마는 황보 인, 김종서 같은 늙 은이들을 맡겨서 나라가 아니 망할 리가 없지 않소? 내가 대통을 이은 지 십일 년에 내우 외환이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지마는 이 난국을 나와 범옹이니까 이만큼 진정하여서 인제는 수령 방백이 겨우 내행을 데리고 갈 만큼 되었지마 는 만일 그래도 그 늙은이들께 맡겨두었더면 아마 뒤죽박죽 이겠지. 함평 양도는 벌써 오랑캐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민 심을 소란하였을 것이고, 그러니까 내 몸이 천만겁에 지옥 고를 받을 작정하고 이 일을 한 것이오. 범옹은 그렇게 생 각하지 아니하였소?"

숙주는 상감의 이 말씀에 고개를 숙였다. 임금이라 신하라 하는 간격을 다 잊고 숙주는 고개를 숙였다.

상감의 말씀은 숙주의 속을 꿰뚫고 들여다보시는 말씀과 같았다. 숙주는 진실로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여러 가지로 꾸며서 옳은 것을 만들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은 다 옳았 다. 그 옳음의 갚음이 자기의 부귀와 공명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첨곡!"

상감은 그것을 첨곡이라고 하셨다. 숙주는 일찍 자기가 첨 곡한 사람으로 자처한 일은 없었다. 자기는 공명정대한 사 람으로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역시 첨곡 이었다.

"첨곡심부실(諂曲心府實)."

숙주는 이 법화경의 구절에 비로소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았다.

"단생사입생사(斷生死入生死)."

저는 벌써 생사윤회를 끊었건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서 일부러 생사의 고를 받는다는 보살행(菩薩行)의 정신도 알아지는 것 같았다.

"위차제중생 이기대비심(爲此諸衆生 而起大悲心)."

어리석게 괴로워하는 중생을 위하여서 대비심을 일으켜 중 생과 같은 죄를 짓고 같은 고생을 한다는 부처님의 뜻도 알 아지는 것 같았다.

숙주는 상감을 한 번 더 우러러보았다. 용안에서는 전에 못 보던 빛이 발하는 것 같았다. 상감은 역시 저보다 높은 어른이셨다. 그 어른이 생각하시는 것은 당신 몸이 아니요, 백성 전체였다.

숙주는 솔직하게,

"황송하오. 소인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하였소."

하고 아뢰었다.

상감은 또 한 번 웃으셨다.

"범옹, 그러나 마음에 괴로워할 것은 없어."

상감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히 마음이 괴롭고 또 부끄럽소."

숙주는 또 솔직하게 심경을 아뢰었다.

"아니, 그것이 다 인연 업보야."

"그러하오리이까?"

"그럼, 유가에서 천명(天命)이라는 것이오. 그런데 유가에서 천명이라면 제 책임은 없는 것같이 생각하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야. 아무리 군국 대사를 위하고 억조 창생을 위해서 한 일이라도 내가 받을 보(報)는 보대로 받는 것이오. 이를테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것이지."

"옳은 일에 악보를 받는 일이 있어서야 의인이 의를 행할 수가 있사오리까?"

"그러니까 살신성인 아니오? 중생을 위하여서 지옥고를 받 고 생사윤회(生死輪回)를 받는다는 것이 그것이오. 그것이 보살행이란 말요."

"그러하면 황송하오나 상감께오서 살생의 보를 받으신단 말씀이오니까?"

"아무렴, 피할 수 없지. 그것이 무섭소?"

"그러기로 옳은 일을 하시고 악보를."

"악보는 악보대로, 선보는 선보대로, 그러나 구경법(究竟法) 으로 보면 모두 환(幻)이야. 원각경에 안 일렀소. 이환수환 (以幻修幻)───환으로써 환을 닦는다고. 하하하하, 그것이 오."

상감은 유쾌하게 웃으셨다.

"범옹도 나와 같이 노산 이하 여러 의인을 살해한 죄로 한 천겁쯤 지옥고를 치러도 좋지 아니한가. 진실로 우리네가 한 일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그만 것이 무엇이오, 안 그 래? 하하하하."

상감은 모든 비통한 빛을 다 씻으시고 유쾌하게 숙주의 어 깨를 치고 웃으셨다. 그러나 숙주에게는 그 농담이 농담으 로 들리지 아니하고 그 웃으심이 그냥 웃음으로 들리지 아 니하였다.

"영상, 노산 초혼제를 배비하라고 지휘하오. 그리고 노산 부인과 안평, 금성, 기타 대군, 군 부인네들도 특별이 예전 예유로 품수 따라 복생하고 참례하라고 이르오. 경혜공주는 멀리 있으니 할 수 없지마는. 또 근보(謹甫), 인수(仁?), 백 고(伯高), 중장(仲章) 그 밖에도 영상이 다 알아서 그 부인 과 딸들을 이날 하루 특별이 전관 예우로 참례하게 하오."

이렇게 결정적으로 명령하셨다.

근보는 성삼문, 인수는 박팽년, 백고는 이개, 중장은 하위 지의 자다.

숙주는 상감의 입으로 이 사람들의 자를 부르시는 것을 들 은 지가 실로 오래다. 상지 이년 병자(上之二年丙子)에 사형 을 당한 이래로 처음이다.

이리하여서 경찬회 넷째날에 노산 이하의 초혼제를 지내기 로 되었다. 그런데 이번 재 법사로는 설잠(雪岑)을 쓰자는 의논이 났다. 발론자는 신숙주인데 상감께서 좋다고 하셨다.

설잠이라 함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명이었다. 별호는 동봉 (東峯), 청은(淸隱)등 여러 가지 있었다. 열경(悅卿)이라 하 는 것이 그의 자이다.

설잠은 을해년 여름에 북한 태고사(太古寺)에서 글을 일고 있다가 유월 십일일 수양대군이 즉위하셔서 와이 되셨다 하 는 말을 듣고는 서울을 향하여서 통곡하고 책을 집어던지고 얼마 동안 표랑하여 돌아다니다가 중이 된 사람이다. 그는 벼슬을 아니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재주 있기로 이름 나서 세 종대왕께서 상급을 주시고 공부 잘하라 하신 부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였고, 또 중이 된 뒤에도 벌써 선으로나 교로 나 승려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상감께서는 여러 번 설잠을 볼 마음이 있었으나, 그가 평 소에 노산을 사모하고 성삼문, 박팽년을 위하여서 운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매양 만날 뜻을 내지 못하고 계셨다. 그런 데 이번에는 노산과 이른바 사육신의 혼을 위로하는 일이매 혹 부름에 응할 듯도 싶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설잠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상감의 물으심에 대하여서는 얼른 대답하는 이가 없 었다.

"그 사람 종적을 좀처럼 알 수가 없사와서."

하는 것은 효령대군의 대답이었다.

효령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님이요, 양녕대군의 아우님 이다. 태종대왕은 당신의 일을 돌아보셔서, 전혀 인물본위로 셋째 아드님이신 세종대왕을 세자로 삼으신 것이었다. 이리 하여서 양녕대군은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닌 방랑객으로 일 평생을 보내었고, 효령대군은 불도를 존숭하여서 거사로 일 생을 지내고, 세조께서 불전을 번역하시는 일이나 절을 이 룩하시는 일에 주장한 이였다.

"설잠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도 있고."

하고 신숙주는 서거정을 바라보았다. 서거정이 가장 설잠 과 친하다고 소문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면 강중이 설잠을 찾아보오."

상감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중이란 서거정의 자였다.

이리하여 서거정이 설잠, 즉 매월당 김시습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

밖에 나와서 거정은 숙주를 보고,

"왜 날더러 이 어려운 일을 하라는 거야,"

하고 원망하였다.

신숙주와 서거정과 김시습과는 본래 절친한 벗이었다. 그 러나 상감 등극 후로 설잠은 신숙주와 교제를 끊고 말았다.

신숙주는 그것이 가슴에 걸려서 어떻게든지 한 번 시습과 만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한 번 말만 하면 시습도 숙주의 한 일을 양해하여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 번은 시습이 서울에 돌아온 줄을 알고 시습과 친한 사람을 시켜서 술을 취토록 먹여서 잠이 든 뒤에 사람 으로 하여금 시습을 숙주의 집으로 업어오게 하여 숙주와 가지런히 자리를 깔고 한밤을 지내었다.

새벽에 시습이 잠이 깨어서 보고 깜짝 놀라 뛰어나가려는 것을 숙주가 시습의 소매를 붙들고,

"열경이. 자네 그러기로 나보고 말 한 마디도 없는가."

하였다.

그러나 시습은 말없이 이윽히 숙주를 바라보다가 숙주가 잡은 소매를 쫙 찢어버리고 숙주의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 런 뒤로는 숙주는 다시는 시습을 만날 마음을 끊었지마는 그래도 시습이 늘 보고 싶고 그와 한 번 말이나 하여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천하 사람이 다 숙주의 일을 옳게 여기더라 도 김시습 한 사람이 알아주지 아니하는 동안에는 숙주의 마음은 편하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거정한테만은 시습은 옛날 우정을 계속하였다.

"강중이. 자네 따위야 무명 소졸이니까, 무얼 절개를 논하 겠나?"

시습은 이렇게 거정을 조롱하였다. 그것은 거정이, 상감이 전왕의 자리를 이으신 일에 대하여서 책임이 없다는 뜻이었 다. 신숙주에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이 불가하지마는 서거 정에 있어서는 무가무불하다는 말이었다. 시습이 서울에 들 어오면 흔히 향굣골(지금 교등) 어떤 집에 주인을 들고 있었 다. 그리고 노자가 없거나 술이 먹고 싶으면 간혹 서거정한 테 자기가 서울에 왔단 말을 알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무론 번번이 그리하는 것은 아니요, 가다가 마음이 내키면 그러는 것이었다.

시습이 서울에 왔다고 하는 말만 들으면 거정은 밤에 미복 으로 상노에게 초롱을 들리고 시습이 묵는 집 대문에 이르 러서,

"열경이, 열경이."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인을 시켜서 주인을 부르게 한다든가, 이리 오너라 하는 것 같은 것을 시습이 싫어할 줄을 알기 때문이다.

시습이 묵는 집이 원체 작은 집인데다가 시습이 거처하는 방이 바로 대문 안 행랑 겸 사랑 겸인 방이기 때문에 시습 은,

"어 강중인가."

하고 들창을 열고 내다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냥 누 운 대로,

"어, 사가야? 들어오게."

이러기도 하였다. 사가( 佳)는 거정의 당호다.

차차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가 서거정 서 판서인 줄 을 알게 되어서부터는 대체 저 행랑방에서 누워서 대답하는 것은 어떤 작잔가 하고 모두 이상하게 알았던 것이다.

"술 가지고 왔나?"

흔히 이것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정을 보고 하는 시습의 첫 인사였다.

거정은 반드시 술 한병과 마른 안주를 들려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시습은 발은 벗은 대로, 무릎까지 바지는 걷어올 린 채로, 혹은 엎드려서, 혹은 방 한편 모퉁이에 가로누워서 발을 벽에다 대인 채로 술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네 아직도 그렇게 벼슬이 하고 싶은가. 인제는 장난감 떼어놓을 나이도 되었건마는."

시습은 이렇게 빈정대었다.

그러면 거정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옥관자니 금관자니 그만큼 달아보았거든 인제 떼어서 행 랑 아이들 엿이나 사먹으라고 주라고."

이런 소리도 하였다.

거정은 시습에게 이렇게 조롱받는 것이 기뻤다.

거정도 시습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있으면 서도 자기는 금관자에 꼭 결박이 되어서 꼼짝을 못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거정이 북경에서 누가 선물로 보냈다는 강태공 조어도(姜 太公釣魚圖)를 들고 와서 시습에게 보이고 거기 찬을 쓰라 고 칭하였다.

파파노인이 가만히 낙대를 들고 물을 들여다보고 앉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찬이 없었다.

"으응, 늙은이가 얼른 죽지 않고 무엇하러 오래 살아가지 고."

시습은 그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쯧쯧 혀를 찼다.

"왜 그러나 강태공이 작히나 갸륵한 사람인가?"

거정은 이렇게 변죽을 올려보았다.

"응, 자네 따위지. 그만큼 살았거든 그냥 낚시질이나 해먹 다가 늙은 몸뚱이를 위수에 던져서 잔 고기들이나 한때 공 양을 할 게지, 무엇하러 서백(西伯)은 따라가. 흥, 지렁이 미 끼로 고기를 잡다가 저는 지렁이 한 토막만도 못한 헛미끼 에 물려서 줄줄 끌려가는 꼴이라, 하하하하. 꼭 자네 그림일 세."

하고는 붓을 들어서,

"■■■■■■■■■■■■■■■■■■■■■■■ (바람 비 솔솔 낚시터에 날리올 제 위천의 새와 고기 따라 세려 잊기 배우던 몸, 어찌다 다 늙게에 응양장(鷹揚將)은 되어서리, 부질없이 이재만 굶겨 고사리를 캐게 한고?)"

라고 갈겼다.

거정은 시습이 써놓은 시를 이윽히 읽고 있더니,

"자네 시가 내 죄안(罪案, 선고문)일세."

하고 그림을 말아 넣었다.

거정은 시습을 찾으려고 남녀를 타고 원각사를 나서, 바로 이웃인 향굣골로 향하였다.

"이 군을 어디서 찾노?"

거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정이 향굣골로 들어서서 얼마 올라가지 아니하여서, 뒤 로서,

"여보게 강중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정은 돌아보지 아니하고도 그것이 시습의 음성인 줄을 알았다. 시습이 아니고는 노상에서 서거정의 자를 부를 사 람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쇄탈한 음성이 될 수는 없었다.

거정이 "마침 잘되었다." 하고 빙그레 웃는 동안에 벌써 시 습은 달려와서 거정의 남여채를 붙들었다.

"인제 그만 제 발로 걸어보지. 죽는 날까지 끌려만 다니고 담겨만 다닐 작정야. 자 내리게 내려. 내 자네를 좋은 곳으 로 데려감세."

하고 시습은 남녀를 내려눌렀다.

"내려놓아라."

하고 거정은 남녀에서 내렸다.

따르던 사람들은 웬 영문을 몰랐다.

거정은 시습의 손을 잡으며,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네를 찾아 떠난 길일세. 자 내 집으 로 가세."

하고 끌었다.

시습은 때묻은 옷에, 머리는 깎은 지가 오래여서 머리카락 이 귀와 눈썹을 덮어 중인지 속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서 타고 가게. 대감이 걸어다니면 체면이 손상하지 않 나? 오늘 밤에 내 사관으로 오게. 술이나 많이 가지고 와."

하고 시습은 거정이 잡은 손을 뿌리쳤다.

거정은 차마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거니와 또 이 제 시습을 놓쳐버리면 다시 어디서 붙들는지 몰라서,

"아냐, 자네가 내 집에 오기가 싫거든, 내가 자네 사관으로 감세."

하고 다시 시습의 소매를 붙들었다.

길에는 서거정과 어떤 거지와의 수상한 모양을 보느라고 행인들이 멀리서 수군거리고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술이 먹고 싶으니 그럼 우리 술집으로 가세. 바 로 이 골목 안에 술집이 하나 있는데, 아까 보니까 비지 지 지미가 부글부글 끓데. 자네 같은 귀인이 어디 그런 것 먹 어보았겠나?"

거정은 딱한 듯이 머뭇머뭇하였다.

"하하."

하고 시습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웃었다.

"비로소 귀인이 어떻게 살기 어려운 줄을 알겠다. 하하. 그 만두소. 내가 자네 마음을 한 번 조려보노라고 그랬네. 어서 타고 들려가게. 밤에나 몰래 만나세."

하고 지척거리며 술집 있다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만다.

거정은 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믿고 다시 남여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거정은 초롱을 들리고 향굣골 시습의 사관을 찾 았다.

"열강이 있나?"

하고 부르는 거정의 말에,

"응, 강중인가, 들어오게."

시습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창으로 나왔다.

거정은 술병과 안주를 손수 들고 시습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습은 발을 벗고 드러누워서 다리로 벽을 버티고 있다가 거정이 술병을 들고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나는 듯이 일 어나 거정의 손에 든 술병을 빼앗아 병마개를 뽑기가 무섭 게 벌꺽벌꺽 들이킨다.

"이 사람아, 오늘은 긴하게 할 말이 있으니 너무 취하지 말 고, 이야기가 끝나거든 먹게."

하고 거정은 시습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어 시원하군. 아까 좀 취해서 돌아와서 한잠 자고 났더니 목이 컬컬 했는걸. 자네가 왜 안 오나 하고 기다렸네."

시습은 육포를 씹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술이나 가지고 오는가 하고 나를 기다렸나?"

거정은 빙그레 웃었다. 흰 얼굴에 검은 수염이 보기 좋았 다. 도포에 띠만 두르고 있었다.

"그럼, 자네 따위야 술동무로 나밖에 쓸데가 무엇인가? 하 하하. 자네가 상감께는 긴한 사람일는지 모르겠네마는 내게 야 무어 쓸데있나. 어어흐, 찬 술을 들이켰더니 뱃속이 꾸룩 꾸룩 한다."

하고 커다란 트림을 두어 번 한다. 거정은 그 냄새를 피하 노라고 잠깐 고개를 돌린다.

시습은 그것도 상관 않는다는 듯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 며,

"자네 아까 내게 곤경당했지, 대로상에서?"

하고 킥킥 웃는다.

"원, 별말을 다 하네."

거정은 정색을 한다.

"글세, 이 용렬한 사람아. 그러기로 그렇게 쩔쩔매는 데가 어디 있나? 이봐라, 네 이 술취한 미친 중놈을 묶어서 포도 청으로 보내라 하고 한 번 호령을 하든지, 그것을 못 하겠 거든 내게 끌려서 선술집으로 가든지. 원 그게 무에란 말인 가. 아무리 썩은 선비기로 그렇게 용렬해서 쓸 수가 있나?"

"나는 자네를 내 남여에 태우고 내가 뒤에서 걸어갈까 했 네."

"흥, 누가, 눈이 시퍼렇게 산 녀석이 그 향교자에 올라앉을 리도 없고, 또 자네 기상에 웬걸. 그래도 자네는 숙주놈보다 는 나으이, 밤에 몰래라도 나를 찾아오니. 숙주놈, 사람을 시켜서 나를 술을 잔뜩 먹여놓고는 제 집으로 나를 들여갔 단 말야. 자다가 깨어보니까, 숙주놈이 내 곁에 누웠단 말 야. 나는 반가워서 껴안으려고 했네. 숙주가 내 이 방에 와 서 누운 줄만 알았거든. 그랬더니 돌아보니까, 내 이 방이 아니란 말일세. 그래 벌떡 일어나서 뿌리치고 나왔지. 그때 에 내 옷소매가 쭉 찍어져서 아마 아직도 숙주놈의 집에 있 을 걸세. 아하하하, 아하하하."

시습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꼬부려가면서 웃는 다.

" 이 사람, 그리 말게, 범옹이 자네를 지금도 어떻게 생각 하는데 그러나?"

거정은 이 기회를 잡아서 차차 제가 맡은 사명을 다하려고 하였다. 그러하는 데는 우선 시습으로 하여금 숙주에게 대 한 반감을 풀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사 실상 시습이 상감과 숙주에게 대한 고집이 풀리기 전에는 거정의 사명은 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뿐더러 시습의 마 음을 돌리는 것은 수다한 노산파 선비들의 마음을 돌리는 일도 되는 것이었다. 인제는 비록 유림이 대부분 상감을 승 인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마음 곧은 일부에서는 상감께 뜻을 허하지 아니하였다. 시습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곧 일 파 선비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흥, 숙주는 안 되지. 고것이 약은 것이 병이거든. 자네만 큼만 못났으면 제도할 도리도 있지마는, 이건 너무 약으니 까. 석가세존보다도 약으니까 석가세존의 제도를 받겠나. 안 그런가?"

시습의 이 말에 거정은,

"그렇지마는 지금 범옹이 아니고 누가 나라 일을 하겠는 가."

하고 숙주를 두호하였다.

"그건 그렇지. 굿은 무당이 하고 줄은 광대가 타는 것이니 까."

하고 시습은 픽 웃는다.

"그럼 자네는 세간사는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는 것인가?"

거정은 항의를 하였다.

"그런 말은 아니야. 국태 민안은 해야지. 숙주가 없으면 내 라도 해야지마는 말일세. 암, 숙주가 악인은 아니지. 애써 나라 일을 잘 하려는 성의도 있지. 다만 너무 약은 것이 병 이란 말일세."

거정은 이 기회를 타서,

"그러면 자네도 인제는 범옹을 허하기는 하네그려?"

하고 정통을 건드려보았다.

"무얼 허한단 말인가?"

시습은 눈을 크게 뜬다. 취태가 다 스러지고 만다. 마치 지 금까지 취태를 부린 것은 다 부러서 한 것인 듯이.

"아니. 자네가 범옹을 허물하던 그것 말일세."

"수양하고 붙어서 상왕 시역한 죄 말인가?"

"에잉, 말 삼가게."

거정은 잠깐 양미간을 찡그린다.

"우리는 궁중에서 엎드려서 말하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그 저 실상대로 보고 실상대로 말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 까."

시습은 픽 웃는다.

"그게 다 인연법이 아니겠나?"

거정은 불교적으로 시습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였다.

"무엇이 말야?"

시습은 또 눈을 크게 뜬다.

"노산께서 그렇게 되신 것이나, 또 상감께서 대통을 이으신 것이나 말일세."

"그렇지. 다 인연이지. 필경은 한바탕 꼭두각시 놀음이고."

시습은 멀거니 천장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렇게 허물할 것이 없지 아니한가. 자네도 너무 착(着)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을 거스르지 못한 것을 허물하는 것이지. 이를테면 내 가 숙주를 너무 높이 생각한 것이란 말일세. 능히 인연의 흐름을 거스러 오르는 잉어로 안 것이란 말야. 그게지 그저.

한 범상한 사람으로 볼 때에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 의정 고령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高靈府院 君) 아니신가. 자네네 유가의 도로 보면 위극인신(位極人臣) 으로 더할 나위 없을 테지. 다만 내가 숙주를 누하다고 책 망하는 것은 왜 좀더 높은 경계에 못 오르느냐 말일세. 안 그런가."

시습은 정색하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범옹이 소매를 붙잡는 것을 홱 뿌리치고 말 한 마디도 아니할 것은 무엇인가?"

"자비심이지."

"자비심이라니?"

"자식을 때리는 회초리란 말일세."

"인제는 아주 버렸나?"

"무엇을?"

"범옹을 제도하려는 자비심을 말일세."

"보살이 중생을 버리는 법이 있나? 언제까지든지 기연(機 緣)을 기다리고 있지."

"그러면 지금 범옹이 자네를 만나자면 만날 터인가?"

"파리가 날아오더라도 아니 만날 수 없는데 어떻게 숙주인 들 아니 만나겠가?"

거정은 이윽히 생각하였다. 이만큼 모처럼 끌어온 시습의 마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다. 시습이 한 번,

"응." 하고 고개를 돌리는 날이면 다시 걷잡기 어려울 줄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보게, 열경이."

하고 거정은 부드럽게 시습을 불렀다.

"왜 그러나? 자네 내게 무슨 청이 있나 보이그려."

시습은 거정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거정은 시습에게 속에 빼앗긴 줄을 깨달을 때에 좀 부끄러 웠다.

"기실은 자네한테 큰 청이 있네?"

거정은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응. 범옹이 나를 잡아오라고 하던가?"

시습은 누워 굴던 고개를 들어서 거정을 바라본다.

거정은 무엇이라고 말할 바를 몰라서 머뭇머뭇하며 앉음앉 음을 고치고 갓을 바로 쓰고 두 손을 읍하여서 무릎 위에 놓는다. 거정은 어명을 받아서 온 것임을 생각하매 자연히 위의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습에게 어명이라는 말 을 하였다가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을까 하여서 바로 말할 수 도 없었다.

시습은 물끄러미 거정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더니, 잠시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가, 그 웃음을 거두고는 벌떡 일어나 서 버선을 신고 대님을 치고, 누더기를 떼어 걸친다. 누더기 라는 것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입는 더덕더덕 깁고 누빈 도 포처럼 생긴 중의 옷이다.

시습이 이렇게 옷을 주워입는 것을 거정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시습은 옷을 입고 나서 반가부좌로 거정을 대하여서 앉았 다.

거정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시습이 여태껏 다리를 버둥거 리고 누워 있던 술주정꾼이 아니라, 위의가 엄숙한 대선사 가 된 것이었다. 거정은 아직도 시습의 이러한 위의를 본 일이 없었다. 청조선사설잠(淸照禪師雪岑)을 오늘 처음 대하 는 것이었다. 오래 깎지 아니한 머리카락이 두 귀밑을 덮은 모양도 아까까지는 우스웠으나 지금은 위의있는 장엄이었 다. 만일 시습이 젊어서부터 너나들이로 절친한 친구가 아 니었던들 거정은 일어나서 청조 설잠 앞에 절을 하였을는지 도 모른다.

점잖기로 말하면 거정도 점잖았다. 그러나 그 점잖음에는 아상(我相)의 어두움이 있었지마는 설잠의 점잖음에는 산과 같은 무거움이 있고 자비의 빛남이 있었다. 저 주정뱅이 시 습의 속에 어디서 저러한 위엄이 나는가 하고 거정은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그 먹물들인 누더기조차 향기와 빛을 발 하는 것과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 안 에는 향기가 진동하는 듯하였다.

얼마 후에 시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가 내게 온 뜻을 바로 말하게. 아마 상감 뜻을 받아서 온 모양일세그려?"

시습은 어성조차도 딴 사람인 듯하였다.

"그러하이."

거정은 지금까지 자기가 수단을 생각하고 조바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말하게, 출가인이 비록 부모와 임금께 절을 아니하는 몸이 라 하지마는 출가인이라고 사중은( 重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야. 상감의 뜻이면 위의를 아니 갖추고 받자올 수가 있 겠나? 어서 말하게."

하는 시습의 말에 그 해학과 풍자의 빛은 조금도 없었다.

거정은 시습의 이 태도를 실로 의외로 생각하였다. 그 처 음 보는 위엄도 위엄이려니와, 상감에 대한 태도에 놀란 것 이었다. 거정의 생각에는 시습은 왕명이면 펄쩍 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거정은 기쁘게 시습의 손을 잡으며,

"열경이, 내가 사죄하네. 나는 여태껏 자네를 가장 잘 아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기실 자네를 모르고 있었네. 나는 자네 가 비분 강개하는 양광자(佯狂者)로만 알고 있었네. 자네의 속에 흰 옥이 품겨 있는 것쯤은 내 눈으로도 알고 있었지마 는, 자네가 이처럼 도가 높은 줄은 몰랐네. 내 눈이 어두운 것을 사죄하네."

하고 거의 그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시습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거정이가 하는 말이면 무엇 이나 해학과 풍자의 방망이로 여지없이 두들겨대던 시습이 기 때문에 거정은 허물없이 말을 하면서도 으레 얻어맞을 것을 예기하는 것이었다. 이번같이 빙그레 웃음으로 용납을 받은 것은 참으로 처음이었다. 그래서 거정은 말을 하기가 쉬움을 느꼈다. 심술궂고, 비꼬인 광생인 시습으로 알았기 때문에 말하기가 거북하였지마는 한 성승 설잠으로 본 때에 는 무슨 말이나 마음을 놓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정은,

"인제 바로 말하겠네. 기실은 상감께서 자네를 찾아보라고 분부가 계셔서 내가 그게 원각사에서 나오던 길일세. 오늘 자네를 만난 것이."

하고 시습의 눈치를 보았다.

"응. 무슨 일로?"

시습의 물음은 점잖았다.

"이번 대원각사 경찬회를 하지 않나?"

"응. 그래서."

"그런데 위로서 노산군을 위하여서 재를 올리시고 또 초혼 제를 지내신다고 분부를 내리셔서."

"응. 유신들이 또 말이 많겠군."

"유신들이 무어라고 말할 새가 없이 영의정만을 부르셔서 분부를 내리신 것이야."

"응. 그런데?"

"노산군만 아니라, 안평, 금성이며……."

"응. 금성까지도?"

시습은 약간 의외라는 빛을 보인다. 금성대군은 순흥(順興) 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사약을 받고서,

"내 임금은 서울에 계시지 아니하고 영월에 계시다."

하고 영월 쪽을 향하여서 절하고 통곡하고 죽은 이다.

"안평, 금성만이 아니야. 인수, 근보, 모두 다."

인수란 박팽년, 근보란 성삼문이다.

이 말에 시습의 눈은 좀 크게 떠졌다. 그리고 얼굴 근육이 씰룩하고 움직이는 것을 거정은 보았다.

두 사람의 눈앞에는 불행하게 죽은 옛 친구들의 모양이 떴 다.

"근보, 인수도?"

한창 동안 침묵이 있는 뒤에야 시습은 이렇게 반문한 것이 었다.

"응. 그리고 이날만은 부인들도 다 예전 작품대로 차리고 첨배하도록 처분이 계시다네. 자네도 들었겠지마는, 바로 이 삼 일 전에 영양위(寧陽尉) 자손은 면천(免賤)을 하기로 분 부가 계셨네. 그런데 경혜공주가 전도가 멀어서 이번에 못 참례하는 것이 유감이야."

하고 거정은 한숨을 쉬었다.

시습은 정(定)에 든 사람같이 눈을 반쯤 감고 그린 듯이 앉 아 있었다.

시습은 상감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었다. 그 마음에 일어나 는 뉘우침과 따라서 일어나는 불심(佛心)을 생각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 괴로운 심사를 동정할 수가 있었다.

이윽하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시습은 눈을 여상하게 뜨 며,

"그래서?"

하고 또 거정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추천재의 법사로 자네를 청하시는 것이야."

거정은 마침내 사명의 요지를 전하였다. 거정은 무거운 짐 을 벗어놓은 듯하였다.

"응. 국조(國祚)가 오백 년은 늘었군."

시습은 혼잣말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거정은 시습의 말한 뜻을 물었다.

"상감이 그만한 뜻을 가지시면 인천복(人天福)을 받으실 만 은 하니까."

시습은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럼 자네가 추천재에 와주겠나?"

"가지."

시습은 쾌락하였다.

이 대답을 하고 나서는 시습은 누더기를 벗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시습으로 돌아갔다.

거정도 기뻐서 의관을 벗고 시습과 대좌하여서 술을 먹었 다.

"자네가 근보, 인수 등 여섯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서 노량 진에 묻지 않았나?"

거정은 시습에게 이런 말을 물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나?"

시습은 술잔을 멈추고 묻는다.

"처음에는 어떤 중이 와서 여섯 사람의 시체를 업어다가 묻었느니라고 소문이 나서 그게 누굴까고 말들이 많았지만 얼마 아니하여서 그것은 김시습이라고 다들 알게 되었어."

"응. 그래서 김시습을 잡아 죽이자는 충신도 나섰겠네그 려."

"있었지."

"그렇지마는 꼭 낸 줄을 몰라서 내 모가지도 아직 붙어 있 는 셈이로군."

시습은 웃는다.

"그런 게 아니야. 그야 자네가 하는 걸 누가 본 사람은 없 지마는 이 천지간에 자네밖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 겠나. 역적의 수괴로 능지를 당한 죄인의 피 흐르는 시체를 져다가 묻어줄 사람이 자네 아니고 누가 있느냐 말야. 그러 니까 세상이 다 이것은 김시습의 장난이라고 알았거든."

"그래 상감은 무에라시던가?"

"상감은 한 번 술자리에서 응, 김시습이 이조참의 한 자리 는 벌었군, 그러시데."

"흥, 흥, 흥, 흥."

시습은 참을 수 없다듯이 코웃음을 하였다.

"왜 웃나?"

거정도 술잔을 멈추고 시습을 바라본다.

"임금 되는 이란 역시 범인과는 다르단 말일세."

"그래 우리는 상감께서 자네를 이조참의로 부르실 줄 알지 않았겠나?"

"자네 따위 좀생이가 할 생각이지."

"했더니 말일세. 또 얼마를 지나서 어떤 중이 계룡산 동학 사(東鶴寺)에서 단을 모으고 여섯 사람 초혼을 했다는 말이 들린단 말야. 그래 조정에서는 이 김시습이 갈수록 무엄한 행동을 하니 그냥 두었다가는 인심이 소란하게 되리라고 속 히 없이 해야 된다고들 그랬지. 그때에는 상감이 그러신단 말일세, 이 김시습이 이조판서 하나는 벌었느니라고. 그래서 모두 상감께서 자네를 이조판서로 부르실 줄 알지 않았겠 나? 그런데 상감의 이 말씀이 자네를 살린 셈이세."

"어찌해서?"

"이크, 김시습이 미구에 이조판서가 된다 하니까, 아무도 감히 자네 험구를 못 하였거든."

"핫하하하."

시습은 술잔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면서, 배를 안고 웃는다.

그러나 거정은 시습이 웃는 뜻을 잘 몰라서 멀거니 시습을 바라 보고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나를 이조판서로 부르시지 아니하셨 나?"

시습은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묻는다. 그러나 그 눈과 입 어 염에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

"글쎄 말야."

거정의 자신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네 따위는 백을 묶어도 상감 새끼 발가락 하 나도 못 당한단 말야."

"무엇이 그런가?"

"내가 이조판서를 벌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로 아나?"

"그게 무슨 뜻인가?"

"앞으로 한 백 년 지나면 성삼문, 박팽년이 모두 이조판서 한 자리씩은 얻어 하거든. 그때가 되면 김시습도 이조판서 하나는 하게 된단 말일세. 상감은 그것을 아시는데 자네 따 위 좀생이는 그걸 모르니 새끼 발가락도 못 되지 않나?"

시습의 말을 듣고, 거정은 상감이 성삼문 등을 죽이실 때 에,

"오늘날 역적이나 훗날 충신이다. 뒤에 이 일로 하여서 나 를 허물하게 되리라."

하신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하였다.

"그렇지마는 상감은 내가 이조판서 될 것까지는 보시고 부 처 될 것은 못 보셨단 말야. 그러나 지금은 상감 보시는 것 이 좀 변하였을 것일세."

이리하여서 시습이 대원각사 봉찬회 제오일 추천재에서 법 사로 나타나게 되었다.

상감께서 몸소 노산군 이하의 추천재를 올리신다는 소식은 세상에 큰 충동을 아니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 일에 대하 여서 백성들은 무조건으로 기뻐하였다. 어느 사랑에서나 어 느 술자리에서나 이 말이 나게 되면 다 제 원통한 것을 씻 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기뻐하고 그 끝에는 상감님의 덕을 칭송하였다.

혹시 이것을 꼬부라지게 해석하여서, 상감이 이러한 일을 하시는 것은 일찍 돌아가신 아드님의 명복을 비시는 동시에 지금 세자궁이 병약하신 것이나 상감의 몸에 부스럼이 스러 지지 아니하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원혼들을 위로하여서 복 을 받으려 하심이라고 하는 자도 있지마는, 그렇다 하더라 도 팔도 강산에 맺힌 원한이 일시에 풀리는 듯한 생각은 누 구나 공통이었다.

다만 백성의 뜻과 다른 것은 한명회, 홍윤성 등이었다. 그 들의 생각에는 상감이 옛일을 뉘우치시는 듯한 것이 대단히 괴로웠다. 왜 그런고 하면 상감이 안평, 금성을 비롯하여서 성삼문, 박팽년의 무리까지도 가엾이 여긴다는 것은 곧, 그 들을 죽이기에 전력을 다한 자기네의 죄를 의식하심으로 보 이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입 밖에 내어서 말은 못 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상감의 이 일은 인자하신 성덕에서 우러난 것 이라고 칭송하기 때문에, 만일 이 일에 반대하면 반대하는 자기는 불인(不仁)의 패를 담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서 그들은 속으로는 싫으면서도 겉으로는 감격하 는 모양을 보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에게는 항용하는 일이지마는 이 경우에만은 많이 괴로웠다.

추천재는 신시에 시작되었다. 신, 유, 술이 귀신들이 먹는 시각이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비가 뿌렸다. 바람도 불었으나 밤에는 자고 비만 내렸다. 재를 아뢰는 종소리와 여러 가지 쇳소리들도 다 젖 은 듯하였다.

이십칸 대청인 대원각사 대웅전에는 등롱이 휘황하였다.

그러나 촛불이 밝을수록 하얀 지방들이 모두 소리를 치고 나서는 것 같았다. 더구나 신숙주, 한명회 등의 눈으로 볼 때에 그 하얀 지방에서는 이따금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노산군의 위패를 중심으로 하고 대군들과 군들과, 성삼문, 박팽년등이며 이러한 일백팔십여 위의 지방이 불탑으로부터 동쪽에 늘어붙고 그 앞에는 전왕후이시던 노산 부인 송씨를 비롯하여서 모두 골수에 사무친 한을 품고 관비라는 천역에 십 년 넘어 고생하던 미망인들이 오래간만에 명복(命服)으로 차리고 합장하고 서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흐를 눈물도 없었다.

상감은 이품관 이상을 거느리시고 불탑에서 서쪽에 좌정하 시었다.

혜각존자와 수미, 학조 등 중들이 검은 장삼에 불붙는 듯 한 가사를 메고 예불 절차를 행하는 동안에 상감은 일생의 회고에 잠기시었다.

계유정난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이 나오고 병자년 뼈저리는 일도 나왔다. 그것은 모두 골육을 서로 죽이는 일이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하얀 지방이 촛불에 보이고 그들의 미망인들이 원한에 초췌한 상모들이 보였다. 촛불이 바람결 에 춤을 출 때 마다 흰 지방들과 유족의 얼굴들이 컸다 작 았다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음산한 기운이 법당 안으로 돌아서 상감의 얼굴과 등골을 스치는 것 같았다.

"숙부, 나를 어찌하려오?"

하시던 상왕의 모양.

시뻘겋게 달군 쇠꼬치로 팔다리를 부썩부썩 지지며 국문을 할 때에, 소리소리 질러 상감의 죄를 나토던 성삼문 등의 모양.

그러나 가장 상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세자궁의 정경이 었다. 원체 자비심이 많고 또 효성이 많으신 세자궁은 십오 륙 세부터 두려워하는 것이 아바마마의 무서운 업보였다.

그 어린 마음에 생각되기를 이처럼 골육상잔의 살생을 많이 하신 아바마마께서 받으실 업보는 비길 수 없이 무서운 것 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세자궁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홀로 내불당에 가서 부처님께 빌으셨다. 작은 두 손을 꼭 마주 모아 합장하시고 오체 투지하시와 삼보전(三寶前)에 비셨다. 그것은 아바마마 의 악업을 소멸하게 합소서, 아바마마께서 내세에 받을 업 보를 대신 받아지이다, 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자는 불전에 엎드려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으로 부족하여서 세자궁은 법화경 일곱 권과 금강경 두 권을 손수 베끼셨다. 그리고 그 축원은 아바마마를 위하 심이었다.

아마 이렇게 마음을 쓰심이 지나쳐 병환이 나셨을 것이다.

날로 병환이 침중하여 가실 적에도 세자는 아바마마를 위하 여서 삼보전에 축원하시기를 쉬신 일이 없으셨다.

이 때문에 궁중에서는 세자궁을 거룩하신 어른으로 다들 두렵게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세자궁이 너무 숙성하시고 점 잖으시고 웃으시거나 희롱하시는 일이 없으시므로 부왕 모 후는 물론이거니와 늙은 궁녀들도 그윽히 염려하였다.

그러하지마는, 그러하기 때문에 상감께서는 이 아드님을 깊이 사랑하시고 아끼셨다. 그리고 촉망하심이 크셔서,

"너는 성군이 되어서 백성을 잘 사랑하여 아비의 허물까지 도 씻어라."

하는 훈계를 하셨다.

그러나 세자궁은 스무 살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러한 세자궁의 모양이 상감의 눈앞에 역력히 보일 때에 상감은 잠깐 눈을 감으셨다.

또 상감의 마음에는 둘째 아드님이신 세자궁이 역시 마음 만 인자하시고 몸이 약하신 것을 생각하신다. 그리고 상감 당신의 몸도 작금에 급히 쇠하심을 생각하신다. 이제 보산 (寶算)이 마흔아홉, 아직 늙으셨다 할 수 없건마는 이도 몇 이 빠지고 머리에 센 터럭도 날로 늘었다.

상감은 결코 행복되신 어른은 아니셨다. 무엇이 뜻대로 되 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되면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리리라, 모든 것이 상쾌하게 되리라 하시던 생각은 다 망녕된 생각 이라고 상감은 깨달으셨다.

"나는 일찍 나 자신을 위한 일은 없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시지마는 그래도 세상이 적막함을 아 니 느끼실 수가 없었다.

오직 삼보를 옹호하는 호법왕이 되어서 선세열조(先世烈祖) 와 후손의 복인이나 심자 하는 것이 상감의 적막한 가슴에 자리 잡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불경을 간행하시고, 번역하시고 절을 지으셨다.

상감은 손수 지으신 금강경발(金剛經跋)의 문구를 생각하셨 다.

"───■■■■■■■■■■■■■■■■■■■■■■■■■■ ■■■■■■■■■■■■■■■ 이라 하여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嚴經)등을 번역, 출판하 신 사실을 적으시다가,

"■■■■■■■■■■■■■■■ 이라고 쓰시던 때의 슬픔을 생각하셨다. 법화경은 세자궁 께서 베끼시다가 다 못 마치시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경을 발간하신 공덕을 회향하실 데를 이렇 게 말씀하셨다.

"爲 皇考 皇?及 祖宗列位早證正覺. 次爲亡子永離입八苦. 速■三界. 超出二 중. 圓成十力之■ 이라 하시고 계속하여,

"■■■■■■■■■■■■■■■■■■■■■■■■■■ ■■■■■■■■■■■■■■■■■■■■■■■■■■ ■■■■■■■■■■■■■■■■■■■■■■■■■■ 라고 하셨다.

"皇考 "皇?"란 상감의 아바, 어마마마시니 곧 세종대왕과 그 왕후를 가리키심이다. 세종대왕께옵서 불법을 숭상하셨 음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상감의 금강경발 허두에도,

"■者. 我.

皇■世宗堂恨不得見證道歌註解.

命我■求不得. 求之中國亦不得.

■命汝終是事."

라 하여 세종께서 상감께 불도로써 부탁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汝亦破相. 能離或業."

"世之觀此者. 足知余心之哀."

이것을 쓰시던 심경을 생각하시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심을 느끼신다. 돌아가신 아드님더러,

"너도 상을 깨뜨려 망녕된 업을 여의라."

하시는 아버님의 뜻이다.

"이 글을 보는 이는 내 마음의 슬픔을 알리라."

하시는 아버님의 뜻이다.

"산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난 자는 반드시 떠난다."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믿어서 내 슬픔을 참고 세상을 살아 가노라 하신 아버님의 뜻이시다.

상감은 당신이 경을 발간하시고 절을 지으신 모든 공덕이 이 불쌍하신 아드님이,

"길이 여덟 가지 괴로움을 떠나 빨리 삼계(三界)를 벗어나 서."

성불하시기에 회향되기를 바라시는 아버님의 뜻이시다.

상감은 당신이 하신 모든 보시(布施)가 부주상보시(不住相 布施)가 못 됨을 부끄러워하신다. 이 모든 공덕을 삼계 중생 을 널리 위하여서 불도에 회향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드님 을 위하심을 부끄러워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정이 다. 아드님이 성불하셔서 중생을 건지라, 하시는 정이다.

상감과, 호종 제신과, 망인(亡人)들의 유족들이 저마다 제 슬픔과 제 괴로움과 제 소원을 가지고 불상과 지방을 바라 보고 있는 동안에 추천재의 절차는 진행되어서 마침내 청조 설잠이 법문을 설할 절차가 되었다.

설잠은 먹물 들인 베 장삼에 주홍 가사를 걸고 고좌(高座) 에 올랐다. 그는 이날을 위하여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였다.

어디까지나 그를 따르는 제자 선행(善行)이 곁에 모셨다.

설잠은 고좌에 오르는 길로 한 번 합장하여 불전에 예하고 왼손에 주장을 짚고 오른손으로 금강경을 열었다. 그것은 돌아가신 세자궁이 손수 베끼신 것이었다.

"허, 피비린내 대천 세계에 가득하고 귀신의 울음소리 정히 추추하고나."

하는 것이 설잠의 첫말이었다.

법당에 있는 일동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정말 방안에서는 피비린내와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촛불이 춤을 추는 것도 무시무시하였다.

설잠의 자리는 위패를 향하게 되고 위패 앞에는 유족들이 앉아 있었다.

"영가(靈駕), 영가야."

하고 혼령들을 부른 뒤에,

"깊고 묘한 불법은,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워라.

이제 가장 깊은 법을 설하니 듣고 참뜻을 깨달았으라."

하여 개경게를 마음대로 번역하여서 부른 뒤에, 설잠은 경 문을 읽었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 하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중생이 좋다 궂다, 기쁘다 슬프다 하는 것이 그도 다 헛것을 보고 그러는 것이니라. 모두 물 속에 달이요 거울 속에 그림자란 말이오.

중생이 일컬어서 몸이라는 것은 흙을 물로 반죽한 그릇이 아니냐, 중생이 일컬어 마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귀 에 들리는 것, 코에 냄새, 입에 달고 쓴 것, 몸에 차고 더운 것, 생각이 좋다 궂다 하는 것이 아니냐. 파초 모양으로 모 두 알맹이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일러서 목숨이란 것도 바람결 하나 휙 불어 지나가는 것이라 하는 말이오.

중생이 나라고 하는 것이 이미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없는 것을 나라 하여 고집하고서 나서 죽고 하는 끝없는 꿈 속에 꿈을 꾼다 말이오. 경에도 중생은 꿈과 같고 부처님네는 번갯불과 같다 하였으니, 부 처도 번쩍하는 번갯불에 지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한낱 중생 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그러므로 부귀영화, 희로애락, 시비선악이 모두 다 한바탕 꿈이요, 네라 내라 하는 것이 모두 다 허깨비란 말이오.

영가, 영가야. 이 무상(無想)의 이치를 깨달을진댄 슬픔이 나 원망에 착(着)할 것이 무엇이리.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이란 것도 다 허깨비거니, 났다 죽었다, 났 다 죽었다 하는 꿈 속 일에 착할 것이랴. 어, 피비린내는 무 슨 피비린내리. 모두 내 코의 허망이요, 귀신의 울음은 무슨 귀신의 울음이리. 모두 내 귀의 허망이로다. 원통하니 슬프 니 하는 것은 다 뜬 마음이 허깨비에 홀려서 꿈을 꾸는 허 망이라 하는 말이오.

영가, 영가야. 이제 무상의 이치를 깨달았거든 상(相)도 없 고 착(着)도 없는 청점심(淸淨心)에 주(住)할지어다.

이일체상이 시명제불이니라.(離一切相.是名諸佛) 내가 어떻 다 하는 생각을 떠나면 이것이 곧 부처라, 내라 하는 생각 을 떠나는 그 찰나에 나는 곧 중생이 아니요, 부처라 그 말 씀이오.

물건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모양으로 중생은 제가 지은 업을 끌고 다니는 것이라, 업이 인이 되어 보의 과를 얻으 니 천상과 인간과 귀신과 지옥과 아귀와 축생에 오르락내리 락 되돌고 되돌기를 몇 억만겁이나 하는고? 대답하라!

앞으로도 내라 하는 생각으로 짓고 짓는 악업 선업으로 이 곳에 죽어서 저곳에 나고, 저곳에 죽어서 이곳에 나서 울고 웃고 하기를 몇 억만겁이나 하려 하는고? 대답하라!

터럭 끌 만한 업도 반드시 보를 받음이 몸에 그림자와 같 으니 어찌할꼬? 억천만생에 나고 죽고 한 나 한몸의 해골을 모아놓으면 조선 팔도보다도 클 것이요, 그 동안에 지은 악 업을 쌓아놓을진댄 남섬부주보다도 크리라. 이 갚음을 다 어찌 받을꼬? 대답하라!

죽인 자도 업보요, 죽은 자도 업보라. 끝없는 인과응보를 어찌 다 받을 것이뇨.

영가, 영가야. 생사윤회의 사슬을 끊을지어다. 이제 바야흐 로 그 때가 아니냐. 인과응보의 줄을 끊을지어다. 이제 바야 흐로 그때가 아니뇨?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약견 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 하리라.

내라 하는 생각을 뚝 떼어버린 때에 삼아승지겁(三阿僧祗 劫)이 일념에 공(空)이로고나. 거침없는 허공이거니 마(魔)와 불(佛)이 모두 발붙일 곳이 없으려든, 인과응보가 올 곳이 어디랴. 발을 붙이기는커녕 마와 불이 나를 볼 수도 없으려 든, 인과가 떨어질 곳이 있으랴. 허공에 칼을 두르니 소리도 없고 피도 없도다.

피비린내가 있기는 있었나니라. 귀신의 울음이 들리기는 들렸나니라. 그러나 대중아. 이제 무엇이 있는고? 마음이 맑 기 허공과 같고 평안하기 대지와 같고나.(心淨如虛空, 安住 如大地.) 어떠한고?"

하고 설잠은 주장을 한 번 굴러 딱 소리를 내었다.

상감을 비롯하여서 대중은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나오는 듯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정(定)에 든 것 같이 잠잠하다가 설잠은 앞에 놓인 금 강경 둘째 권 끝을 펴고 게를 읽었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요, 여로역여전이로고나. 응작여시관하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모든 유위법은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고, 이슬이요, 번개와 같고나. 빽빽이 이렇게 볼지어다. 그러나, 대중아, 잠깐 섰으라. 피끈 몸을 돌릴지어다."

하고 경문을 새겨서 읽는다.

"이러므로 수보리(須菩提)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맑 은 마음을 내일 것이니, 보이는 것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듣는 것이나 냄새나 맛이나 몸에 닿는 것이나 생각하 는 것에 머물러 마음을 내이지 말고, 머무는 곳 없는 데서 그 마음을 내일지어다. (是故. ■■■■■■■■■■■■■■■ ■ ■■■■■■■■■■■■■■■ 설잠은 또 한 번 주장으로 상을 치며, 소리를 가다듬어,

"알았는가?"

하고는 설산게를 소리 높이 왼다.

"모든 행은 덧없어라. 나고 죽는 법이로다.

나고 죽은 끊이고사 적멸함이 낙이로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己. 寂滅爲樂.)"

설잠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는 어성을 변하여서 마치 친 한 사람에게 조용히 권하는 어조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참말씀을 하는 이요, 있는 말씀 을 하는 이요, 고대로 말씀하는 이요, 허황한 말씀을 아니하 는 이요, 틀리는 말씀을 아니하는 이라 하셨소."

하고 나서 본문을 읽는다.

"■■■. 如來是아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語者. 不異語 者라 하시고 또 수보리가 말씀하시되, 세존하하다가 사람이 이 경을 듣잡고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실상을 낳으리이 다 하시니 세존께서 여시, 여시(如是如是)라, 그러니라 그러 니라 하셨소. 이 회에 모이신 이는 다다생에 서로 인연이 깊을뿐더러 또 불연이 중하시니 우으로 지존을 비롯하와 아 래와 나와 같은 빈도에 이르기까지 함께 불도를 이루어지이 다 하고 비오."

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매월당(梅月堂)[편집]

상감은 법당에서 큰바으로 돌아오시는 길로 서거정을 부르 시와,

"청조당(淸照堂절)을 만날 수 없겠고?"

하고 물으시었다. 상감은 시습과 담화를 하고 싶으시었다.

"찾아보겠습니다."

하고 서거정은 큰방에서 나왔다. 거정의 생각에 시습이 상 감과 만나기를 그렇게 꺼릴 것 같지도 아니하게 여긴 것이 었다. 그러나 온사중을 다 찾아보아도 시습의 종적은 없었 다.

거정은 상감께 돌아와,

"설잠이 간 곳이 없소."

하고 아뢰었다.

"그런 줄 알았고."

하시고 상감은 빙그레 웃으셨으나 그것은 적막한 웃음이었 다.

곁에 있던 신숙주도 이번 기회에 시습과 못 만난 것이 유 감이었다. 그러나 언제 한 번 만나보리라 하는 생각을 먹었 다.

시습은 원각사를 빠져나와서 향굣골 주인으로는 가지 아니 하고 통안을 향하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선행이 시습더러,

"이 밤중에 어디로 가시오?"

하고 물으니 시습은,

"수락산으로 가자."

하고 빨리 걸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요?"

선행은 가기 싫은 듯이 말하였다.

"비를 맞지 말려무나."

시습은 이렇게 툭 쏘았다.

"시님도 옷이 젖으셨습니다."

"옷은 젖어도 나는 안 젖는다."

선행은 가만히 그 뜻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동대문, 동소문이 다 걸렸을 터인데요."

하고 선행은 그래도 시습을 붙들고 싶었다. 근 십 년 시습 을 따라다녀도 매만 맞고 고생만 하고 한 번도 좋은 일이라 고는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상감님 앞에서 설법을 하였으 니 필시 좋은 일이 많으리라고 잔뜩 믿었다. 밤비를 맞으며 수락산 사십 리를 걸을 것을 생각하니 진저리가 났던 것이 다.

"오간수 구멍으로 나가자."

"물이 불었을걸요."

"물이 불었으면 둥둥 떠나가지."

"그러다가 순라꾼한테 또 잡히시리다."

"잡히거든 포도청에서 하루 묵어 가자."

선행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물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오간수 구멍을 헤어나와서 줄곧 비를 맞으며 수락사에 다다른 때에는 벌써 동틀 녘이었다.

시습은 개울물에 몸을 말짱히 씻고 법당에 들어가서 앉았 다. 선행은 아침 저녁 공양을 잡수와 가지고 법당에 들어왔 으나 시습은 눈도 거들떠보지를 아니하였다.

이리하기를 두 낮과 두 밤, 이튿날 이튿날 해뜨게야 목탁 소리가 나기로 선행이 법당에 올라가보니 시습은 목탁을 두 드리며 예불을 하고 있었다.

선행은 눈이누이 휘둥글하였다.

시습이 예불을 마치고 돌아설 때에 선행은 시습의 발 앞에 오체투지로 부복하였다. 술주정뱅이 미친 중으로 알았던 시 습이 원각사법설이며, 이번 수락사 선정에 생불같이 생각되 었던 것이다.

시습은 발길로 선행을 차며,

"저리 비켜!"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드는 선행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시습은 본체만체하고 방으로 내려왔다.

선행은 시습의 아침 공양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시습의 앞 에 절하였다.

"스승이 시님을 뫼신 지 우금 십 년이 근하오나 아직 참문 (參問)을 한 적이 없소. 오늘은 몇 가지 묻기를 허하여 주시 오."

하고 엎드린 채로 있었다.

"너같이 어리석은 놈이 묻기를 무엇을 묻는단 말이냐?"

시습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배를 문지르면서 껄걸 웃었다.

그것은 선행을 지극히 멸시하는 듯한 표였다.

"소승이 어리석으니 어리석은 말씀을 묻겠소."

선행은 팔을 방바닥에 짚은 대로 고개만 들어서 지극히 두 려워하는 모양으로 시습을 우러러보았다.

"어리석은 말을 묻겠다? 흥, 거 말이 되었다. 어디 물어보 아라."

시습은 멀거니 선행을 바라보았다.

시습이 명가 자제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은 데다가 행 동이 범인과 다른 것을 보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선비로 는 홍유손(洪裕孫),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고, 중 제자로는 도의(道義) 매학(梅學), 그리고 여기 말하는 선행 같은 이가 있었다. 그 밖에도 따르는 제자가 많았으나 시습은 그들을 막 윽박지르고 때리고, 못 견딜 일을 시키는 까닭에 다들 혹은 일 년 만에 혹은 이태 만에 달아나고 말았다.

어떤 중더러는,

"너는 가서 농사나 지어먹어라."

하여 윽박지르고, 어떤 중더러는,

"너는 가서 계집이나 서넛 얻어서 자식새끼나 만들어라."

하여 쫓아보내고, 어떠 제자는,

"너는 소와 같으니 소는 때려야 가느리라."

하여서 날마다 때려 매에 못 이겨서 달아나게 하고, 또 어 떤 제자는 밤낮 힘드는 일을 시켜서 못 견디게 하고, 또 어 떤 중은,

"이놈 도적놈."

하고 호령호령하여서 골이 나서 달아나게 하고, 이 모양으 로 모두 달아나고 도의, 매학까지도 이제는 따로 있고, 언제 까지나 어디를 가나 따라 다니는 것은 이 선행 한 사람뿐이 었다.

선행은 욕먹기와 매맞기와 힘드는 일하기와 무엇이나 아니 당한 것이 없어도 어디까지나 시습을 모셨다.

"이놈아 무엇하러 날 따라댕겨?"

하고 시습이 지팡이로 갈기면, 선행은,

"소승마저 가면 시님 술 심부름은 누가 하오?"

이렇게 대답하면서 따랐다.

실로 선행은 못 참을 것을 많이 참았다. 십 리나 눈길을 걸어서 술을 사들고 오면, 시습은 늦게 왔다고 생트집을 잡 아가지고는 그 술을 다 눈에 엎질러버리고는 새로 또 사오 라고 야단야단하였고, 그러면 선행은,

"예, 달음박질 갔다오리라."

하고는 또 병을 들고 술집으로 달려갔다.

이러한 고행을 수없이 한 선행이었으나 아직 시습은 무슨 법을 가르쳐준 일이 없었다. 혹시 다른 제자가,

"불도의 대의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에,

"이놈아 네 배고프고 아니 고픈 것을 누구더러 물어?"

이런 말을 하고는 후려갈기는 것을 보고는 선행은 감히 법 을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실상 시습을 따르기 십 년에 선행이, 시습의 설법을 들은 것은 원각사에서가 처 음이요, 좌선하는 양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원체 시습의 속에 무엇이 들었으리라는 생각은 있었지마는, 이번 에 두 밤 두 낮은 신심 부동하고 앉은 것을 보고는 반드시 큰 도인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그래서 또 욕 먹고 매맞을 것을 무릅쓰고 이번에야말로 꼭 몇 가지를 물어보리라고 결 심한 것이었다.

"이번 시님 설법에 사육신이 제도되었겠소?"

하는 것이 선행의 첫 물음이었다.

"상감은 제도를 받으셨나니라."

하는 것이 시습의 대답이었다.

"사육신은 어찌 되었습니까?"

"나는 충신이다 하는 아만(我慢)이 깨어지자면 몇 겁은 지 내야 할 것이다."

"삼아승지겁이 일념에 공이 된다 하지 아니하였소?"

"아상을 깨뜨린 자에게는 삼아승지겁이 일념이 되지마는 아만이 있는 자에게는 일념이 삼아승지겁이니라."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이러한 사람들은 우으로 는 임금을 죽이고 또 많은 충신 열사를 모해하였으니, 장차 어떠한 보를 받겠고? 지금 같아서는 부귀공명으로 세간락을 다 보고 있지 않소?"

"묵은 양식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한두 해 흉년쯤으로는 걱 정없나니라."

"그네들도 살생한 보를 받기는 받겠소?"

시습은 주장을 들어 선행을 때렸다.

"무슨 뜻이온지?"

시습은 또 한 개 선행을 때렸다. 선행은 일어나서 절하였 다.

시습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매를 맞으면 아픈 것과 같이 업을 지으면 보를 받는다는 뜻인가 하고 선행은 생각한 것이었다.

시습이 수락사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서 추강(秋江) 남효온 이 친구 이삼 인으로 더불어 시습을 찾아왔다.

"자네 어찌 내 여기 있는 줄 알았는가?"

하고 시습은 반갑게 효온을 맞았다.

그러나 효온은 대단히 분개한 모양으로 웃지도 아니하고 시습더러,

"자네가 수락사에 없으면 금오산(金鰲山)까지라도 찾아가려 고 떠났네. 방에 들어가서 말 좀 하세."

효온은 제가 주인인 것처럼 먼저 들어가서 시습을 불러들 였다.

방에는 시습이 손수 그린 제 화상 두 장이 붙어 있었다.

하나는 젊은 화상이요, 또 하나는 늙은 화상이었다. 시습은 아직도 사십 전 후지마는 한 장은 수염이 하얀 화상이었다.

그리고 그 화상에는,

"■■■■■■■■■■■■■■■■■■■■■■■■ (네 꼴은 못났으되 마음이 엉큼하니, 너는 마땅히 산골짝에 둘진저.) 이라고 찬이 써 있었다.

"게 앉게."

하고 효온은 그 작은 몸이 온통 불덩어리처럼 되어서 시습 을 노려보았다.

시습은 자리에 앉으며,

"무슨 그리 긴한 일이 있어서 날 따라서 금오산까지 가려 고 하였나?"

하고 웃었다.

"이 사람 자네가 그때 원각사에 가서 상감 앞에서 설법을 했다지?"

이것이 효온의 첫 항의였다.

"그랬네."

"그랬네? 그게 자네가 할 대답인가?"

"왜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나?"

"자네는 영월 계신 임금을 잊었나?"

"영월 계신 임금도 원각사에 와 계시던걸. 숙질분이 의좋게 계시던걸."

"무엇이? 그래 그리고 이후 황천에서 인수, 근보를 만날 작 정인가? 만날 면목이 있느냐 말이야."

"인수, 근보다 다 그 자리에 왔던걸. 다 함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잡숩던걸."

하고 시습은,

"얘, 선행아, 가서 냉수 한 그릇 듬뿍 떠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선행이 냉수를 떠왔다.

시습은 냉수를 효온의 앞에 밀어놓으며,

"어서 이 냉수를 자네 뱃속에 넣게. 자네 뱃속에서는 지금 불이 붙어. 진심(?心)의 불이라는 것일세. 능히 불성(佛性)을 태우는 불이야. 어서 불을 끄게."

하였다.

효온은 시습이 주는 물 그릇을 도로 밀어서 물 그릇이 엎 질러져서 방바닥에 물이 흘러 효온과 시습이 무릎 밑으로 흘러서 효온과 같이 온 선비들의 무릎 밑으로 기었다.

효온은 무릎 걸음으로 물러나고 다른 선비들은 물을 피하 여서 일어났으나 시습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좋다, 주감로법우하여 멸제번뇌염이로고나.(澍甘露法雨. 滅 除煩惱焰)───법화경 보문품게."

하고,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응."

하고 효온은 입맛이 썼다.

선행이 웃으면서 걸레를 가지고 들어와서 방의 물을 훔쳤 다.

효온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효온은 창피하여서 수습할 길이 없음을 느꼈다.

"어디 권토중래를 하여 보게."

시습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지금 유림에 물론이 자자해."

효온은 얼마 후에야 이렇게 제이차의 공격을 개시하였다.

"왜? 중 설잠이 원각사에서 금강경을 설한 탓에 대성전 위 패들이 돌아앉으셨나?"

"잉. 그렇게 할 말이 아닐세. 유림에서야 자네를 어디 중으 로 보나. 시세를 분개하여서 불적(佛跡)으로 몸을 숨긴다고 보지. 그래서 자네를 태산 북두같이 우러러보고들 있는 판 인데, 자네마저 훼절을 하여 버리니 왜들 분개하지 아니하 겠나?"

"추강, 자네나 유림에 태산 북두가 되게그려."

"에잉.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래도 그러네. 들으니까 우으 로서 자네를 이조판서로 부르신다네. 그래 자네는 거기 응 할 터인가? 그것만 말하게. 자네도 신숙주 밑에 소인을 바 치고 이조판서가 되겠느냐 말일세. 지금 이 친구들로 말하 여도 평거에 자네를 숭배하던 끝에 이런 해괴한 소문을 듣 고 자네한테 말을 들으러 오신 것이야. 그러니까, 똑바로 말 하게. 수양 앞에 무릎을 꿇을 터인가, 아니 꿇을 터인가. 그 것만 말해보란 말야."

"흠흠흠흠."

시습은 몸을 흔들고 웃는다.

"왜 웃나? 말을 못 하고."

"궁한 중이 술이 조히 생길 터이니 아니 웃겠나?"

"술이 생기다니?"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 무슨 공지신위(贈正憲大夫史曹判書 ○○公之神位)라고 하면 몇 해 동안 춘추에 술 한 잔이야 안 생기겠나? 그러나 그때에는 나는 술을 아니 먹을 터이 니, 유림 중에 누구 술 먹고 싶은 사람 와서 받아 먹으라고 하소."

효온은 입을 벌렸다. 선비들도 눈이 둥글해졌다.

이윽히 말이 없다가, 효온은 허리를 쭉 펴며,

"음, 그러면 그렇지. 그래 자네가 설마 수양 앞에 무릎이야 굽히겠나?"

하고는 선비들을 돌아보며,

"내 무에라든가. 그게 다 낭설이라고. 그래 이약 매월당 김 시습이 이조판서로 부른다고 갈 사람인가. 아닐세 아니야."

하고 대단히 유쾌한 모양으로 에헴하고 가래를 뱉었다.

또 며칠 후에 괴애 김수온이 그 형이요, 중인 학조와 함께 수락사에 시습을 찾았다. 이들은 시습과는 일가로 나이로는 수온이 시습보다 십여 년 장이지마는 항렬로는 시습보다 아 래였다. 그래서 수온은 시습더러 족숙이라고 부르는 시습은 수온더러 괴애라고 불렀다.

괴애 김수온은 전임 공조판서로 지금은 서거정과 함께 지 중추(知中樞)였다. 상감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중에 하나로 유불에 학문이 도저하고 또 율 잘 짓기로 당대에 으뜸이라 고 하였다.

수온은 마음으로는 불교를 믿으나, 그렇다고 유교를 버리 지도 못하고, 출가 입산할 생각도 간절하나 그렇다고 벼슬 을 버리지도 못하였다.

그렇지마는 수온은 결코 부귀에 연연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벼슬이 일품에 이르러도 집은 늘 가난하였다. 그는 거 처하는 방이 차면 책을 내려서 깔고 그 위에 누워 있었고, 누가 찾아가도 책을 내려서 깔아주었다.

수온은 마당에 선 좋은 향나무를 찍어서 장작을 패어서 불 을 때었다. 나무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의 형 학조는 일찍부터 중이 되었다. 그 역 시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사람 잘났다고 소문이 높은 중이 요, 상감의 신임을 받음도 두터웠다.

세상에서 전하기는 학조는 신통력을 얻어서 물을 육지와 같이 걷고, 불을 물과 같이 만진다고 하며, 능히 귀신을 불 러 말하고 능히 전생, 내생을 본다고 한다. 상감이 학조를 왕사로 삼은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 세상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면, 한 번 시습과 학조와 여 름 길을 가다가 도술내기를 하여서 시습이 학조를 이기었다 고 한다. 곧, 길가 물 고인 웅덩이에 뛰어들었다가 나오는 것인데 시습의 옷에는 물 한 방울도 아니 묻었건다는 학조 는 옷이나 얼굴에 온통 흙탕물이 묻어서 주룩주룩 흐르므로 시습이,

"네 어찌 내 도를 따르겠느냐."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마는 세상에서── ─특별히 유가에서 학조를 미워하고 시습을 존경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중이라도 시습은 산수간에 방랑하여 세상에 애착이 없으므로 세상의 존경을 받지마는 학조는 임금의 총애를 받 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당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시 습은 세상 사람이 탐내는 바를 탐내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 상의 미움을 받을 까닭이 없거니와, 학조는 세상이 탐내는 바를 탐내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임금의 총애였다.

학조와 수온이 수락사에 시습을 찾아온 것은 무론 왕명을 받아서였다.

원각사에서 환궁하신 상감은 곧 불쾌한 일을 당하셨다. 그 것은 유신들이 기악(妓樂)을 준비하고 상감을 기다린 것이었 다. 상감이 닷새 동안이나 원각사에 계셔서 불법에 혹하셨 으니 그것을 풀어들이지 아니하면 큰일이 난다고 하는 것이 었다.

"오늘은 전경일(轉經日)이니 아니 된다."

하고 막아버리셨으나 전경일이 지나자마자 또 기약을 드린 다고 하였다.

"군왕의 마음을 기악으로 혹하게 하자는 것이냐."

하고 진노까지 하였으나 유신들은 정인지를 내세워서 상감 께 탄원하였다.

"모처럼 다 준비한 것이니 한 번 보심도 수순인정(隨順人 情)이 아니오니까."

하고 인지는 굳이 말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상감은 그 기악을 받으셨다.

원각사에 사리분신(舍利分身), 감로(甘露), 서운(瑞雲) 등의 상서가 있다고 보함이 있어서 백관이 진하하였다. 백관이 진하는 하면서도 불도가 세력을 잡을 것이 겁이 났다.

불도의 세를 꺾으려면 절과 중의 나쁜 행실을 들출밖에 없 었다. 그래서 유신들은 열심히 그 재료를 수집하였다. 이에 한 재료를 얻었다. 그것은 원각사 법회시에 간통사건이 났 다는 것이었다.

추문은 수없이 전하였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어느 대군 부인이 시비가 잠든 틈을 나서 학조와 간통하였다는 것이었 다. 이것은 그 대군과 학조를 함께 모해하자는 말이었다.

이거 큰 재료라고 여러 가지고 수탐하여 보았으나 일이 대 군 집에 관한 것이라 가벼이 말을 내기가 어려웠다.

이때에 걸린 것이 한성소윤 이영(李?)의 딸이 내금위 이경 손(李敬孫)과 간통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말은 별시위 박처량(朴處良), 김치(金淄), 박의생(朴義生) 등의 밀고에서 나왔다.

상감은 이 일을 알아 올리라 하는 전지(傳旨)를 사헌부에 내리셨다.

사헌부에서는 곧 관계자를 잡아다가 조사하여 보았으나 진 상을 알 길이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이경손이란 자는 분 명히 제가 이소윤의 딸과 관계가 있노라고 하는데 여자 편 에서는 전혀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원각사 경찬회를 보려고 귀족의 가족들이 원각사 줄행랑에 한 방씩을 빌려가지고 와서 묵었는데, 한성소윤 이영의 딸 도 그 친정 쪽 조모 되는 고 의정 이사철(議政 李思哲)의 어 머니와 함께 해탈문(解脫門) 서쪽 위로 있는 줄행랑 일곱째 방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말하면 관리들이며 군 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영의 딸은 나이 열여섯, 얼굴이 아름다운 데다가 창으로 손을 내어밀고, 삐금삐금 얼굴도 내어놓아서 사람들 의 주목을 끌었다. 이 여자는 박모의 집에 시집을 갔다가 쫓겨 돌아온 영이의 딸이라는 것이 자자하여서 혈기 있는 군사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삼고 탐을 내었던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지위가 자별한 이경손과 관계가 생겼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사실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인지 별시위 박의생 등 세 사람은 당장 보았노라 고 하고, 또 더욱 이상한 것은 당자인 이경손이가 그리하였 노라고 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사헌부에서는 곧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더구 나 일이 재상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처결할 수 가 없었고, 또 사헌부 당국자들도 이 일에는 필경 배후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히 이러할 즈음에 노사신이 상감께 계하였다. 노사신은 이영의 외숙이었다. 이영의 딸은 이사철의 어머니와 같이 사흘을 유숙하였으니 그런 일이 없다, 이것은 필시 모함하 는 자의 일이니 고발한 별시위 세 명과, 통하였다는 이경손 을 엄중히 추국(推鞫)하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노사신은 상감이 신임하시는 공신 중의 하나일뿐더러 이 일이 상감의 불도 숭상하시는 것을 훼방하려 하는 자의 조 출인 줄을 불쾌하게 생각하시던 터이라, 상감께서는 사헌부 에 박의생 등과 이경손을 엄중히 국문하라시는 명을 내리셨 다.

이것을 기회로 여겨서 (三司)의 젊은 관리들은 이 일은 강 상에 관한 일이니 밝히시라는 상소가 뒤를 이어서 올랐다.

"이것이 그렇게 큰일이냐."

하고 상감은 화를 내시고 그 일은 다시 거론 말라 하시고 관계자를 다 방면케 하셨다.

이런 일 저런 일이 모두 상감의 뜻을 불쾌하게 하여서 더 욱더욱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생각이 간절하셨다.

이리하여서 상감은 김수온과 학조를 시습에게 보내신 것이 다. 상감은 할 수만 있으면 시습을 이조판서로 불러 쓰셔서 한 번 철저하게 관기 진숙을 하고도 싶으셨다.

신숙주 이하로 상감을 도와서 나라 일을 하여오던 공신들 로 말하면, 비록 벼슬은 공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나이로 는 아직 오십 전후의 장년이건마는 지나간 십 년간의 영화 에 벌써 대개 기운이 늙어버리고 정실에 얽혀서 현상을 타 파하는 혁신 정책을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상감은 될 수만 있으면 한 번 더 대혁신을 하고 싶으시었다. 그러나 상감이 보시기엔 인물이 없었다. 더구나 유교와 불교를 다 알아서 공평하고도 높은 정치를 할 인재가 없었다.

'김시습이면.' 하시는 생각을 내이신 것이 이 때문이었다. 실로 김시습으 로 말하면 비록 미친 사람으로 여기는 자도 있으나 유가, 불가를 물론하고 다 양도하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열경이 나와준다면 야무유현(野無遺賢)이 아니겠소?"

하고 상감이 숙주에게 물으신 것이 이 뜻이었다.

"예. 김시습이 나온다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인재도 나올 듯하오."

신숙주는 계윤정난 이래로 산과 들에 돌아가 숨은 여러 인 물을 생각하였다.

"열경이 나올 것 같소?"

하는 상감의 물으심은 간절하였다.

"그러하올세, 시습이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보시면 좋을까 하오."

숙주는 이렇게 아뢰었다.

이리하여서 두루 생각한 결과로 김수온 형제를 넌지시 수 락사로 보내신 것이었다. 이를테면 시습의 마음을 떠보자는 것이다.

김수온은 탄 것과 종자를 동구에 머물게 하고 학조와 단둘 이서 상노 하나만을 데리고 절로 올라갔다.

김 판서 대감의 행차건마는 수온을 한 거사의 행색같이 보 이고 싶었다.

"괴애 웬일시오? 학조 시님도."

이것이 시습의 인사였다.

"때는 녹음이 무르녹고 바람이 덥지도 춥지도 아니한 때였 다. 앞 뒷문을 활짝 열어놓고 세 사람은 자리를 정하였다.

"그래, 과히 불편하신 거나 없으시오?"

수온은 시습에게 이런 말을 물었다.

"쌀도 있고 물도 있고. 불 때일 나무가 좀 귀하지마는."

시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찌 이렇게 오셨소?"

시습은 이렇게 수온에게 물었다.

"원각사에서 너무 훌훌히 만나서 족숙도 만나서 법화도 들 을 겸, 하루 이틀이나마 홍진의 분요를 떠날까 하고 왔고.

마침 형님도 오시고."

수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래 홍진 분요를 지금은 떠나셨소?"

시습은 이렇게 물었다.

수온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밤이 되었다. 세 사람이 다 술이 반취하여 취흥이 도도하 였다. 나오는 말은 모두 아무 뜻 없는 잡담이었다.

그 중에는 이영의 딸이 원각사에서 간통하였다는 이야기 와, 노사신이 그 여자의 외숙으로 상감께 계하여서 무사 타 첩이 되었다는 말도 나왔다.

노사신이란 말에 시습은 "응." 하고 낯을 찡기며,

"여보 조대사(祖大師), 그 조우(祖雨)놈도 사람이오?"

하고 노조는 노려보았다. 그것은 중 조우가 학조와 좋아하 는 사이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왜 조우가 무슨 일이 있소?"

학조가 물었다. 학조는 또 무슨 트집이 나오는가 하여서 정색하였다.

"그놈이 노사신헌테 장자(莊子)를 배웠다니 그 놈이 사람이 오? 한 번 내가 영응저(永膺邸)에 갔더니 조우놈이 와 있길 래 모르는 체하고 조우놈을 만나는 날이면 때려죽일란다고, 노 사신헌테 장자를 배웠다니 사람이 아니라고 그랬더니, 이 조우놈 보시오, 그래 네가 대재상을 욕하느냐고 내게 대 들길래 멱살을 잡고 때려죽이려다가 여럿이 말려서 놓아주 지를 않았소? 그놈이 사람이오?"

시습은 게두덜거리는 어조로 떠들고 잠깐 쉬어서, 말을 이 었다.

"그런데 그런 지 얼마 후에 조우놈이 날 찾아왔단 말요. 그 래 왜 왔느냐고 밥을 지어주고 앉아 생각하니 암만해도 괘 씸하단 말이오. 그래 발로 그놈의 밥을 밟아서 못 먹게 하 지 않았소. 그랬더니 암말도 못 하고 간단 말야. 하하하하."

시습은 대단히 우스운 듯이 전신을 흔들며 웃었다.

대체 시습이 무슨 뜻으로 돌연히 이런 싱거운 말을 할까 하고 학조와 수온은 멀거니 시습을 바라볼 뿐이요, 한참 동 안 응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섣불리 한마디 던졌다가 트집 을 잡힐까 겁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습은 마치 두 사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모양으로 물끄러미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이러한 시습의 눈의 재촉을 받아서 학조는,

"불치불문(不恥不問)이지. 노사신에게서 장자를 배운 것이 그리 허물될 것은 무엇이오? 또 사신으로 말하면……." 하고 말하는 것을 중동을 잘라서,

"찟찟, 이이."

하고 대단히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학조는 위태함을 느꼈으나 기호지세였다.

"왜 노사신이가, 학문이 도저하고……."

"으응, 한 개 맞을 소리."

학조는 멈칫하였다.

수온은 학조의 옆구리를 찔렀다.

학조는 낯이 뻘겋게 되어서 주처할 바를 몰랐다.

학조는 시습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었다. 즉, 조우가 노사신 에게 장자를 배운 것은 사신의 학문을 우러러 스승을 삼은 것이 아니라, 사신의 높은 지위에 아첨한다는 뜻이요, 그것 은 곧 상감의 총애를 받아서 자주 궁중에 출입하는 학조를 풍자한 것이었다.

시습의 이 말은 학조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었다.

수온은 풍세가 좋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러다가는 수락사 에서 열흘을 묵어도 자기가 가지고 온 사명을 말도 못 해볼 것 같았다. 그래서 수온은 화두를 상감에게로 돌리려 하였 다. 애초에 이영의 딸 이야기를 낸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 런데 고만 엉뚱한 데로 돌아가서 학조가 시습에게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참, 저번 족숙이 원각사 추천재에서 금강경을 설한 것을 상감께서 대단히 기뻐하시오."

수온은 한마디를 던졌다.

"지껄이고 나니 스스로 부끄러워서 그 밤으로 오간수 구멍 으로 기어나와서 이리로 달아왔소."

시습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웬 말씀이오? 국왕 대신을 앞에 두고 사자후를 하셨으 니 그런 쾌한 일이 어디 있소?"

수온은 정색하고 하는 말이었다.

"아냐, 아냐."

하고 시습은 마치 매를 피하는 사람 모양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싸고 목을 움츠렸다.

"족숙의 그 설법으로 십 년간 엉키었던 원한이 홱 풀렸느 니라고 효령도 격찬을 어전에서 하셨소."

수온은 더욱 정중한 어조고 이렇게 말하였다.

"고만, 고만. 괴애, 제발 고만. 고만하면 설잠이 지옥에 천 겁은 살겠소."

하고 두팔을 내어저었다.

시습은 원각에서 국왕 대신을 앞에 놓고 금강경을 설할 때 에, "내가 장하다."하는 아상을 일으킨 것을 생각한 것이었 다.

그래도 수온은 이것이 시습의 겸손과 변덕으로만 여겨져 더욱 말을 계속하였다.

"상감께서는 족숙에서 법화경을 한 번 듣고 싶다고 그러시 오."

이 말에 시습은 비로소 위의를 수습하고 점잖게 대답하였 다.

"아니, 아니. 안락행품(安樂行品)에 국왕, 대신, 관장을 가 까이 말아라 하신 말씀이 있지 않소? 우리 따위는 아직 국 왕 대신에게 법을 설할 사람이 못 되어. 국왕 대신이 앞에 있는 것도 상관 않는다 하는 이 생각이 벌써 내가 어린 표 란 말요. 내가 법당에 들어갈 때까지도, 마음이 흔들리는 줄 을 모르겠더니, 금강경을 설하여 무주무상을 말할 때에 국 왕 대신이 고요히 듣는 것을 보니 마치 내가 천인(天人)의 공양이나 받을 사람 같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단 말요.

고만 맥이 풀리더군. 귀신들이 내 꼴을 보고 히히하고 비웃 는 것 같단 말요.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어."

하고 감개무량한 모양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고개를 숙인 것은 시습만이 아니었다. 학조도 고개를 숙이 고 수운도 고개를 숙였다.

밤새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시습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를 높여,

"나무아미타불."

열 번을 부르고는,

"자 다들 잡시다."

하고 목침을 베고 드러눕자, 곧 코를 골기를 시작하였다.

하고와 수온은 밤이깊도록 잠이 들지 못하였다. 왕명도 왕 명이거니와, 시습의 참회담이 마디마디 물푸레나무 회초리 가 되어서 두사람의 머리와 몸을 빈틈없이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형님 어떻게 생각하시오? 매월당이 이조판서로 불리면 갈 것 같소?"

누운 채로 수온은 학조에게 물었다.

"글세, 원각사에 온 것을 보면 노상 마음이 없는 것도 같지 아니한데."

학조도 누운 채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매월당이 아니 들을 것 같소. 원각사에 갔 던 것을 뉘우쳐서 오간수 구멍으로 달아나는 사람이 웬걸 상감이 부르신다고 나오겠소?"

수온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아무려나 우리 문중에 큰 복이오. 형님이 나시고 매월당이 나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튿날은 시습이 온종일 산에 올라가서 안 내려와서 말할 기회를 잃고, 그 이튿날은 수온이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여 서, 술을 먹으면서 이야기가 벌어졌다.

수온은 시습의 우국심을 움직이려 하여서 조정의 여러 가 지 폐단을 말하고, 또 공신들의 십년 영화에 이미 교만하여 지고 우국지성이 마멸되어서 상감의 처지가 심히 고독하시 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한 말 속에는 한명회 일파와 홍윤 성 일파의 방약무인한 죄상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홍윤성 이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꺼림이 없음도 말하였다.

시습은 가만히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 덕끄덕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그러니 여보시오."

하고 수온은 단도직입으로 제 사명을 말하려 하였다.

"족속도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소? 마침 상감께서는 지나간 허물은 어찌되었든지 불세출(不世出)의 영주이신 것은 족숙도 아시는 바이니까, 이 임금을 잘 도울 사람만 있으면 족히 나라를 태평케 할 수가 있을 것이란 말 이오. 그래서 나도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버릴 마음은 간절 하면서도 그래도 임금의 곁에 뫼시고 있으면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아직 견마지역을 하고 있소마는 어디 내야 힘이 있소? 내 일을 내가 잘 아니까 말이오마는 내야 무슨 힘이 있소? 그렇지마는 족숙으로 말하면 제세지재(濟世之才)시거 든. 이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란 말이오. 또 사류(士類)간에 명성이 좋으시단 말이야. 그런데 상감께서도 간절히 바라시 는 뜻을 가지시니 정히 어수지연(魚水之緣)이 아니오? 만일 영모(英廟─세조대왕)께서 살아 계시다면 족숙더러 이 임금 을 도와라, 하실 것 아니겠소? 그러하니 족숙 한 번 나서보 시면 어떻겠소?"

시습은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면서 수온의 말 을 듣고 있더니, 눈을 떠서 빙그레 웃으면서,

"사슴이 마을에 내리면 개한테 물리는 일밖에 없지요. 개가 산에 오르면 사슴이 개를 물지는 않지마는."

하고 껄걸 웃으며 길다란 수염을 쓸었다.

"아니오. 이약 선생의 명성으로는 아무도 감히 훼방은, 생 심을 못 하오리다."

수온은 족숙이라는 말 대신에 선생이라는 말을 썼다.

시습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한다.

"괴애는 아직 모르시오. 김시습이 저희 먹을 것을 아니 먹 으니까 유가에서 김시습을 마다 아니하는 것이오. 만일 김 시습도 저희 먹는 구유에 한몫 끼이는 날이면 곧 물고 차고 가 시작될 것이오. 대체 세상에서 생각하기를 금옥(金玉)은 공씨의 자손의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석가의 자손이 그 금옥을 탐내는 빛을 보이는 날이면 공씨 자손들은 이를 악 물로 덤빌 것 아니오? 이약, 무학(無學)으로도 다시 유신들 의 시기를 받았거든. 만일 무학이 바랑을 지고 산 속에 숨 어버리지를 않았던들, 아마 무학이 역적 누명을 쓰고 능지 를 당하였을 것이오. 지금 학조 시님도 조히 미움받으시리 다. 괴애는 아직 석씨 자손으로 아니 치니까 상관없지마는.

그러니까 대궐 문을 공씨 자손네더러 지켜먹으라고 하고 우 리네 중은 산문(山門)이나 지키고 있는 거야. 안 그러오? 또 설사 나라 일을 잘 할 만한 고승(高僧)이 있기로니 정말 고 승이면야 무엇하러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람의 굴레를 쓴단 말요? 그러니까 중으로서 국왕 대신이나 가까이 하는 자는 부처님이나 아니시면, 송나라 혜림(慧琳)이나 주나라 회의 (懷義) 같은 무리겠지. 소위 흑의재상(黑衣宰相)이라는 것이 로구려. 흑의재상이라니, 장삼을 입고 재상이 된대서야 그런 수치가 어디 있소? 으응. 쩟쩟."

시습의 말을 듣고 앉았는 학조는 등에 냉수를 끼얹는 듯함 을 느꼈다. 수온은 형을 염려하여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조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그런 걸, 원각사에는 왜 나오셨소? 그 너무 고고한 체 마 시오."

학조는 마침내 한마디를 쏘았다.

"에잉, 또 못난 소리."

하고 시습은 수염을 쓸다가 말고 학조를 흘겨본다.

"아니야."

하고 수온이 손을 흔들며,

"족숙 말씀이 옳지. 절절이 옳아. 형님은 아니하실 말씀을 하셨소."

하고 중재를 한다.

시습은 껄걸 웃으며,

"아니, 학조 시님. 지금 말씀은 직언야. 내 시님의 어리석 음을 비웃지마는 오래간만에 속에 있는 대로 직언할 것을 사랑하오. 하하하하. 자 술이나 먹읍시다. 학조 시님도 한 잔 드시우. 마음으로는 주색을 다 하시는 처지에 몸으로나 아니하면 무엇하오? 지옥은 지옥대로 가고, 하고 싶은 노릇 은 하고 싶은 노릇대로 못 하고, 이것이 양실(兩失)이란 것 이오. 핫핫핫하."

하며 굳이 학조에게 술잔을 권한다.

학조는 못 본 체하고 일어나 나간다.

"형님 일어나지 마시오."

수온이 학조의 장삼 자락을 잡는다.

"퇴역가의(退亦佳矣)야. 어서 나가서 부처님께 절이나 하시 고 오시오."

하고 시습은 학조에게 권하던 술잔을 제가 마셔버린다.

학조는 수온이 붙드는 것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얼굴 뿐 아니라 전신이 화끈화끈 달았다.

학조가 나가는 것을 보고 시습은 한 번 더 웃고 나서,

"여보시오, 괴애. 백씨 어서 속리산에 가서 염불이나 하라 고 하시오. 늙은이가 저 천대를 받고 저 미움을 받고, 으 응."

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제 수염을 손에 감아서 한 번 나 꾸챈다.

"형 말은 고만두고요."

하고 수온은 좀 어성을 낮추어서,

"족숙."

하고 유심하게 부른다.

"말씀하시오."

"내가 이번 족숙을 찾아온 길이."

"응."

"다른 게 아니라, 기실은 왕명을 받아서 온 길이오."

"으음."

하고 시습은 수염 만지는 것을 쉬고 몸을 흔들기도 쉬고, 물끄러미 수온을 바라본다.

"상감께서, 족숙을 이조판사로 부르실 뜻이 계신데, 족숙의 의향을 알아오라시는 것이오. 왜 하필 이조판서로 하는고 하니, 한 번 대경장(大更張)을 하시자는 뜻이오. 십년 대평 에 인심이 침체하고, 아까도 말씀하셨거니와 공신들이 의기 는 소진하고 영화에 젖어서 교만만 늘고, 만일 이대로 가다 가는 종사가 위태할 것이니 한 번 다시 유신(維新)의 대업을 하시자는 뜻으로 족숙을 이조판서로."

하는 수온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시습은,

"아니 저 학조 시님더러 하라지."

하고 어리석은 자 모양으로 눈을 크게 뜬다.

"그렇게 하실 말씀이 아니오."

수온은 정색한다.

"왜 이조판서 할 사람이 없어서 그리시오?"

시습도 정색하고 묻는다.

"글쎄 어디 인재가 있소?"

시습은 문득 몸을 움직여 창으로 머리를 내어밀고,

"선행아, 선행아."

하고 상좌를 부른다. 선행은 동이로 물을 길어나르느라고 누더기 앞자락을 적신 채로, 맨발로 달려온다.

"선행아."

"예."

"나라에서 지금 이조판서 할 사람이 없어서 이 대감이 오 셔서 날더러 이조판서가 되라고 하시는데, 나는 바빠서 갈 새가 없으니 너 가서 이조판서 안 되련?"

시습은 시미치따고 묻는다.

"소승, 이조판서 싫습니다."

왜? 한 번 해보지."

"시님이 먼저 하시고 나서 물려주시면 할까, 그 전에는 싫 습니다."

왜 싫다고 하느냐 말이다."

"소승이 이조판서를 하면 물은 누가 긷고 시님 공양은 누 가 하오?"

"싫음 그만두어라."

하고 시습은 자리에 돌아와서, 수온을 정색하고 바라보며,

"보시오. 나는 할 새 없고 선행이도 할 새 없다니 어떡하 오?"

하고 또 눈을 감고 몸을 흔든다.

"인제 고만 가세."

하고 뒷창 밖에서 두 사람이 말을 엿듣고 있던 학조가 나 선다. 수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그래서 마지막 으로,

"족숙. 내가 무엇이라고 복명을 하면 좋겠소?"

하고 간절히 물었다.

시습은 이윽히 생각하더니, 지필을 내어서 썼다.

"부처의 길은 마음에 욕심을 덜어 남과 다투지 아니함에 있나니, 그러므로 산에 있으면 그 도이 높고, 세상에 나오면 그 법이 엄하도다. 세상이 흐려 그 법을 좇지 아니하되 근 심할 이 없고 시절이 좋아 그 도이 다행하되 기뻐할 이 없 도다. 도로써 처(處)하며 비록 궁하게 산야에 살아도 낙이 많음이 없으며, 법으로써 나서매〔出〕비록 임금께 대하여 경을 설하더라도 뜻이 교만함이 없나니 우(優)하고 유(悠)하 도다. 얽매임이 없고 걸림 없음이여, 이 높은 중의 거취로 다."

(■■■■■■■■■■■■■■■■■■■■■■■■■■■■■■ ■■■■■■■■■■■■■■■■■■■■■■■■■■■■■■■ ■■■■■■■■■■■■■■■■■■■■■■■■■■■■■ 다 쓴 뒤에 이것을 수온에게 보였다. 수온은 그것을 읽고 나서 접어서 품에 넣고 수락사를 떠났다.

수온과 학조를 보내고 나서 돌아오는 길로 시습은,

"으응."

하고 낯을 찡그렸다.

"시님 왜 그러시오?"

하고 선행이 물었다.

"차차 구찮아질 것 같아."

하권[편집]

동순(東巡)[편집]

수온이 수락사로부터 돌아와서 상감께 시습의 뜻을 아뢰고 시습이 손수 쓴 글발을 올렸다.

상감은 그 글을 두세 번 읽으시더니,

"흥, 不興物淨. 以道而處. 以法而出. 無■무포. 옳은 말이지.

此高僧之法就也. 그러렷다. 나도 임금이 안 되었더면 중이 되었을 것이야. 그러나 모두 업보였다."

하시고 오래 침음하시다가,

"또 무슨 말 없었소?"

하고 수온을 보셨다.

"사슴이 마을에 내려가면 개헌테 물릴 따름이라고 그러옵 고."

"응"

상감은 웃으셨다. 상감은 만일 시습이 이조판서쯤으로 나 오면 뭇개가 이를 악물고 짖을 것을 생각하심이었다.

"또 무슨 말 없었소?"

"벼슬과 녹은 공씨 자손에게 줄 것이라고 그러오. 중에게는 청산녹수와 청풍명월이 당하다 그러하옵고."

"그래."

만일 그 장님이 흐린 날 한 번 눈을 떠보고는 다시 감아버 렸다 하면, 그는 정말 밝음은 영원히 모르고 말 것이요, 그 러면서도 저는 밝음이란 것을 다 보았노라고 생각할 것이 다.

'내가 이것이 아닌가?'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여 보신다.

'마음이 편안하여 움직이지 아니함이, 마치 대지와 같다(心 安不動猶如大地)는 보살의 마음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러할까?' 상감은 이렇게 한탄하신다.

그러나 상감은 당신을 일개 범부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아 니하셨다. 첫째로 국왕으로 태어났으니 십선(十善)은 하였을 것이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믿으니 전생에 보살원을 세우 고 보살행을 하였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상감은 많은 절을 수리하시고 경을 번역하여서 간행하셨다. 그만한 공덕만 하 여도 전생에 남은 업장을 제거할만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이 불편할까.

'이런 생각이 범부의 생각이다.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아니한 다(不受福德─금강경)고 하지 아니하였나?' 상감은 이렇게 자책하여 보신다.

'내게는 아직도 범부의 마음이 있다. 복덕을 받겠다는 아상 이 있다. 나는 아직 탐진치(貪瞋癡)를 떼지 못한 범부다.' 이렇게도 반성하신다.

그러나 상감은 당신을 범부라고 하시기는 싫었다. 내가 범 부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범부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도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깨끗한 업보를 버리고 중생을 위하여서 인간에 나 온 것 (自舍淸淨業報. 爲衆生故. 出生入間─법화경 법사품)."

이라고 믿고 싶으시었다.

그러하건마는 어찌하여서 이렇게 불안할까. 뜻이 흔들릴까.

맑은 하늘에 해가 오른 모양으로 환하지를 못하고 어찌하여 서 이렇게 흐릿할까. 눈에 무엇이 한 꺼풀 덮인 것 같을까.

그러나 상감은 이러한 심경을, 가장 신임하시는 혜각존자 신미에게도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임금이라는 지위 때문에 당신의 허물과 부족한 것을 시원하게 참회할 수도 없으시었 다. 마음의 괴로움을 말씀하시기 어려우실뿐더러, 몸의 병도 말씀하시기가 부끄러우셨다. 이러한 생각이 다 아상을 여의 치 못한 범부의 마음자리라고 아시면서도 그것은 하실 수가 없으셨다.

혹시 내불당이나 원각사에를 납셔도 불상 앞에 다만 읍하 고 국궁하실 뿐이요, 오체투지로 절을 하실 수는 없으셨다.

임금의 몸은 언제나 혼자 되실 때는 없으셨다. 언제나 시종 신이 따르고 있다. 만일 혼자 불당에 가실 기회가 있다면 상감은 오체투지로 이마를 땅에 대이고 불전에 절을 하시고 싶으셨으나 그러할 기회가 없으셨다.

'이러한 아만(我慢)을 여의기 전에 내가 견성(見性)할 줄이 있으랴?'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신다.

상감은 그 증조부님 되시는 태조대왕께서 왕위를 버리시고 염불삼매에 드시려 하신 뜻이 비로소 알아지시는 듯하였다.

그러나 태조께서도 왕위는 버리셨건마는 자유로우신 몸은 되시지 못하셨다.

"잘못 임금의 집에 나서(誤落帝王家)."

한 중국 어떤 임금의 한탄과 같은 한탄을 상감은 품고 계 셨다.

나이 오십이 되실수록, 몸이 편안치 아니하실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욱 심각하셨다.

해탈을 원하시면서도 해탈이 아니 되시는 것이었다. 해탈 을 원하는 것부터 벌써 번뇌나───이렇게 생각하시면, 더 욱 마음은 지향할 바를 모르셨다.

이러한 때에 혜각존자 신미가 학열, 학조와 합력하여 오대 산 상원사(上院寺)를 중수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전혀 상감 의 만세를 빌기 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낙산사(洛 山寺)를 중수하였다. 이것은 세자궁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감은 신미가 정성을 다하여서, 있는 힘을 다하여서 상감 을 위하시와 상원사를 중창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심히 감격 하셨다. 더구나 여러 공신들이 차차 부귀영화에 젖어서 임 금과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엷어지는 것을 보실수록 신미 의 이 정성이 극진히 고마웠던 것이다.

안방에 손을 맞잡고 사생을 맹약하였던 정인지도 마음이 돌아섰고,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도 이제는 결코 상감의 뜻대로 좇아 주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저마다 당파가 생기고 세력이 생겨서 어떠한 경우에는 도리어 임금을 견제하려 하 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하물며 홍윤성 같은 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구나 아직 벼슬이 낮은 때에는 충성을 보이 나 오를 대로 다 오른 뒤에는 임금을 누르려 들지 아니하면 슬슬 발을 빼려 들었다.

김수온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다 하여서 절에 수도하러 가 겠노라 하고, 신숙주는 물러간다 하고 한명회도 물러간다 하고, 모두 간다고만 하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전연 권세에 욕심이 없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인제는 상감께 바랄 것이 없고 더 달랄 것이 없은 것이었다.

이런 일을 생각하시면 모두 적막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신 미가 이처럼 당신을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 골수에 사무치게 고마우셨다.

그래서 상원사 중창할 뜻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온 신미를 시끄러운 유신들의 입을 꺼리시면서 내전에 불러보셨다.

신미는 머리와 눈썹이 모두 세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과하 나 역시 주름이 있었다. 신미는 풍신이 좋았다. 대단히 귀인 의 풍이 있었다.

신미는 정심 벽계(正心碧溪)와 나이가 얼마 틀리지 아니하 였다. 그들은 잠시 동문수학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신미는 세상에 나와 다니기를 좋아하지마는, 정심은 가만히 만덕사 (萬德寺)에 숨어서 참선과 염불만 하고 있었다. 상감은 정심 을 꼭 한 번 보셨으나 도무지 말이 없고 마치 어리석은 자 와 같았다. 상감도 정심이 더 도인다움을 짐작은 하셨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람으로 아시기 때문에 다만 금강 경 번역을 한 번 교역을 시켰을 뿐으로 더 불러보실 뜻을 끊으셨다.(정심은 그 제자 벽송 영엄(碧松靈嚴)을 통하여서 도를 청허 휴정(淸虛休靜)에게 전할 사람이다.) 상감은 신필로 이러한 것을 쓰셔서 신미에게 주셨다.

"世間有七重 三寶及父母君善知識 三寶爲出 ■■■■■■■■■■■■■■■■■■■■■■■■■■■■■■ ■■■■■■ 師■■■■■■■■■■■■■■■■■■■■■■■■■■■■■ ■■■■■■■■■ 師■■■■■■■■■■■■■■■■■■■■■■■■■■■■■ ■■■■■■■■■ 師■■■■■■■■■■■■■■■■■■ 師■■■■■■■■■■■■■■■■■ 師■■■■■■■■■■■■■■■■■ 이것을 숙의 홍씨(淑儀洪氏)로 하여금 번역케 하였다.

"世間에 닐굽重?이리잇?니 三寶와 父와 임금과 善知識괘니 三寶?여희여날?리오父母?목수?칠?리오님금?모?, 安保케??

리오善知識?모라릴弓導??리리시니내아아로브터오매내 慧覺尊者─일즉서르아라맛나道─마?며?ㅿ미和?야?ㅣ■드틄 길헤잡드러날로 恒常조?念을 ?져欲굴허에디디아니케?야오?

나리잇게?리 師의功이아니아한■■■■■■■■■■■■■■■■■■■■■ ■■■■■■■■■■■■■■■■■■■■■■■■■■■■■■■ ■■■■■■■■■■■■■■■■■■■■■■■■■■■■■■■ ■■■■■■■■■■■■■■■■■■■ 師──■■■■■■■■■■■■■■■■■■■■■■■■■■■ ■■■■■■ 師■■■■■■■■■■■■■■■■■■■■■ 師■■■■■■■■■■■■■■■■■■■■■■■■■■■■■ ■■■■■■■■■■■■■■■■■■■■■■■■■■■■■■■ ■■■■■■■■

"佛弟子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李어 慈 聖 王 妃 尹 氏."

라고 쓰시고는 "體天之寶"라는 어새(御璽)를 찍으시고 그 끝에,

"

米五百石 ■■■■■ ■■■■■ ■■■■■■■■■■ 이라고 상원사 중창에 쓰일 물자를 하사하시는 단자를 쓰 시고, 그 다음에는 세자, 세자빈, 진의공주(鎭懿公主), 의숙 공주(懿淑公主)기타 종친 부인들의 서명이 있었다.

상감께서는 상원사와 낙산사 중창이 낙성되는 기회를 타시 와 금강산, 오대산으로 행차하실 뜻을 굳게 잡수셨다.

다행이 상감과 세자궁의 병환도 차도 계시어 다음 해 삼월 에 동순(東巡)의 길을 떠나시게 된 것이었다.

병술년에는 윤삼월이 들었다. 예로부터 윤달은 불공하는 달일뿐더러 삼월이면 좋은 절기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신 것이 삼월 십오일이요, 단발령 을 넘으신 것이 이십일, 일석 양에 금강산 장안사에 연을 내리셨다.

대가에 호종한 사람은 대비, 왕후, 세자궁을 비롯하여 영의 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과, 상당부원군 한명회, 인산군 홍윤 성, 김수온, 한계희, 한계미, 서거정, 도승지 노사신, 김국광 등 대관들과 지친들 합하여 백여 명이나 되고 그 밖에 호위 하는 군관과 군사가 있어서 일행 노부가 무려 삼백여 명이 나 되었다. 이를테면 한양 조정 전부가 움직이는 형평이어 서 의정부, 이조, 예조, 병조, 호조, 승정원, 사헌부, 집현전, 의금부, 오위도총부 같은 아문들이 모두 따라가고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지밀나인도 여섯 명이 따른 것이었다.

원래 거둥을 많이 하신 상감이시오, 멀기로 말하면 평양까 지도 동가하신 일이 있지마는 이처럼 대규모로, 또 이처럼 한 달이나 되는 긴 기간을 두고 거둥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 이었다.

상감은 애초에는 거의 미행이라고 할 만한 간단한 노부로 떠나실 것을 생각하신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 면 상감은 이번 길에 세상 시끄러운 것을 떠나셔서 고요히 생각도 하시고 예불도 하시고 고승들과 담화도 하시고 또 자연의 경치도 완상하시자는 생각이셨다. 그러나 임금의 일 이라,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아니할 것을 보시매 상감은 뜻을 고치셨다. 그것은 작년 원각사 봉찬회 적 모양으로 주요한 신하들을 모두 명산 영경으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로 하여금 속되고 썩은 창자를 씻고 청정한 불연을 맺게 하자 하시는 뜻이셨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또한 승사라고 생각하시게 된 까닭이었다. 그래서 젊은 한림까지 데리고 오셨다.

금강산에를 한 번 다녀만 와도 전생 억압을 다 소멸하고 극락 왕생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탐진치가 가득 찬 무리 라 하여도 금강, 오대의 두 명산과 여러 큰 절에 첨배하고 돌아오면 그래도 마음이 얼마는 트이리라고 생각하신 자비 심에서 이렇게 많은 호종 제신을 거느리고 가신 것이었다.

단발령에 오르신 날에는 마치 봄날씨였다. 날은 따뜻하고 하늘은 젖빛인데, 금강 만이천 봉이 석양을 받아서 연하 중 에 빛나는 양이 바라보일 때에는 상감께서는 당신도 모르시 는 동안에 합장하셨다. 호종 제신들도 상감께서 하시는 양 을 따라서 합장하였다.

참으로 석양 빛에 봄날 연하에 싸인 금강의 모양을 멀리 바라보는 양은 암만하여도 이 세상 경치 같지는 아니하였 다.

"단발령이란 말이 허사가 아니로구나."

하고 차탄하신 것은 오직 상감뿐만은 아니었다. 누구나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금강을 바라보면 자연히 불심이 발하 여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는 마음이 난다는 것이다.

"운하"(雲霞), "표묘"(??), "영산"(靈山), "기봉"(奇峯), "천상

"(天上), "극락"(極樂), "선경"(仙境)───이러한 문자들을 누구나 생각하면서 금강의 절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늙어갈수록 차차로 변하는 금강의 빛, 그것은 푸른, 자주, 분홍, 누른, 각색 빛이 다 있고도 그 빛들이 가지가지 로 진하게 연하게, 밝게 어둡게, 꿈인 듯 선명하고, 분명한 듯 희미하여서 이루 형언할 길이 없었다.

상감은 말없이 금강을 바라보고 계셨다. 언제까지나 바라 보고 계셨다. 가실 것을 잊으시고 바라보고 계셨다.

"날이 저물어가오."

이렇게 여쭐 때까지 무심히 바라보고 계셨다. 만일 임금이 아니시더면 남이야 가거나 말거나 언제까지든지 그 자리에 서 서 계셨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금의 몸이시다. 상감 은 다시 연에 오르셨다.

상감은 단발령에서 모든 번뇌를 다 버리시기로 마음잡수셨 다. 적어도 금강, 오대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일체 잡념을 마 음에 넣지 말고 염불삼매로 지내실 것을 작정하셨다. 금강, 오대 한 달 동안에 이 마음에 남은 모든 때, 모든 업장을 다 씻어버리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렇게 작정하고 나시니 상감은 금시에 몸이 가뿐하여서 날아날듯함을 느끼셨다.

'불보살의 은혜셨다.' 상감은 다시금 다시금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튿날인 삼월 이십일일은 특별히 날이 청명하였다. 대가 가 지나가는 길가의 풀과 나뭇잎도 푸릇푸릇 봄바람에 나풀 거렸다. 작은 새들이 나무숲에서 지저귀는 소리도 상감께는 가릉빈가(伽陵頻加)의 소리로 들렸다. 젊으신 세자궁은 더욱 봄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셨다. 밭에 일하던 백성들도 모두 나랏님을 우러러서 기꺼하였다. 별 같은 기치 창검도 이날은 살기가 없고 다만 위엄과 아름다움만 보이는 듯하였 다. 이러한 속으로 봉련은 잠깐 흔들리는 듯 금강의 영봉을 향하고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넜다.

대가가 장안사 동구를 멀리 바라볼 때쯤하여서 문득 하늘 빛이 변하였다. 누르스름한 안개같은 것이 금강산 위의 하 늘을 살짝 가리워서 금강 전체가 금빛을 띠게 된 것이다.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거진 석양이 되어서 봉련이 장안사 동구에 들어선 때에 문 득 땅이 흔들리고 웅웅 소리가 나며 초목이 분명히 떨렸다.

모두 놀랄 즈음에 또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더니 오동나무 잎만큼 큰 꽃잎이 하늘로 부터 펄펄 내려와서 봉련과 일행의 옷과 머리에 떨어지고 향기가 더욱 진동하였다. 풀잎과 나뭇잎이 촉촉하게 이슬에 젖었는데 그 이슬은 꿀같이 달았다. 사람들은 문득 다 놀라 고 두려워서 말이 없이 하늘을 우러러서 합장하였다.

상감은 속으로, '감고(甘露)로다.' '우화(雨花)로다.' '이향(異香)이로다.' '지동(地動)이로다.' 하시고 엄숙한 마음으로 합장하셨다.

또 문득 환하게 밝아졌다. 갑자기 해가 네다섯이나 뜬 것 같았다.

그러고 금강산 전체가 마치 오색 구름에 싸인 것처럼 빛났 다.

동구에 나와 맞는 중들도 이것을 처음 보는 일이라고 상감 께 하례하였다. 나와 맞는 중 가운데는 효령대군도 있었다.

이때에 난데없이 학 두 마리가 동쪽으로부터서 날아와서 상감 일행의 위를 오른편으로부터 왼편으로 세 번 돌아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임금의 뒤에 따르는 사관은,

"방광"(放光).

"서기"(瑞氣).

"쌍학비상"(雙鶴飛翔).

"감로"(甘露).

"우화"(雨花).

"지동"(地動).

이라고 적었다.

상감은 불보살과 제천(諸天)이 감응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실 때에 마음에 송구하여서 연에서 내리셨다. 다들 땅에 내렸 다. 다들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서기와 방광이 걷힌 뒤에야 상감은 연에 오르셨다.

수승(殊勝)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일어났다.

'천고(天鼓)가 울지 않았나.' '천의(天衣)가 내리지 않았나.' 상감은 이러한 생각을 하셨다.

이날 장안사의 사리(舍利)도 분신(分身)하였다.

이튿날 이 상서(祥瑞)를 위하여서 영의정 신숙주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상감께서는 이 진하를 가납하시고 강도와 절도와를 제하고 모든 죄인을 놓으라 하시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 분부로 말 미암아 전국 여러 천명 죄인이 무죄 백방의 기쁨을 얻었다.

상감은 호조에 전교하시와,

"中米三百石, ■■■■■ ■■■ 역 라 하셨다.

대가가 장안사에 듭시는 날에 일어난 천기의 이변을 예조 참판 강희맹(강희맹)이 바친 금강산 서기송(금강산서기송)에 이렇게 써 있었다.

"臣.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신이 스무하룻날 김성 고을에 이르러 하늘을 우러러보오 매, 동북쪽에 누런 구름이 둘리고 안개 햇빛을 가리우더니, 이윽고 바람이 하늘을 쓸어 하늘 모양이 희미해 보이옵고 누런빛이 흰빛으로 변하고 그것이 다섯 갈래로 갈려 끝이 갈구리 모양이 되어 도라(■羅)가 다섯 손가락을 꼬부리는 듯 폈다, 꼬부렸다, 바로 섰다고 거꾸로 섰다가, 자유자재옵 더니 하물며 또 그것이 길게 늘어나 하늘 가운데를 지나 서 북으로 향하고 또 남방을 향하오매, 편편하게 흰빛이 되어 환하게 빛나오며 간간이 푸르스름한 기운이 여기저기 섞여 빛나기 비단 무늬같이 되옵고, 햇빛은 환하온데 산천 초목 이 금빛으로 변하더이다. 근래 상서로운 응(應)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신의 눈으로 본 것으로는 이것이 고작인가 하나이 다. 신이 곁의 사람더러 묻사오매, 이 상서로운 구름이 바로 금강산 있는 데라 하오며 또 이날은 전하께옵서 산밑에 주 필하신 날이라, 신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와 뜰에 내려 절하 였나이다.

그윽히 생각하옵건댄, 이 법(불법)이 동방에 흘러온 지 몇 천 백년에 그때그때 임금으로 믿고 받는 이 또한 몇인 줄을 모르옵거니와, 그 동안에 부처의 섭수하심을 받아 이상한 응을 얻은 일도 있으되 혹은 꿈이거나 혹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오매, 불법을 허는 자에게 말거리를 주어 후세에 의심을 줌이 없지 못하였삽거니와 어찌 오늘 본 상서로운 응이 두드리매 문득 응하듯이 이르러, 모두 하늘 높이 뚜렷 이 나타나 눈 있는 이는 다 본 바이오며 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사오리이다. 족히 써 억만년에 고집하고 어리석던 자의 혹함을 깨뜨릴 만하도소이다. 오호라, 하늘과 사람이 멀리 떨어져 감응하기 쉽지 아니하거든, 한 정성과 공경이 부처와 하늘에 감동하와 이렇듯 이상한 응이 있게 하니 그 무슨 이치리이니까. 대개 정성이 옹글면 도 두렵게 이루나니 부처와 다를 바 무엇이리이까. 부처와 부처 서로 맞으시매 이리 되기 대단히 쉬운가 하옵나니, 전하께오서 자주 신변을 얻으시와 고금에 빛나심이 이로써인가 하나이 다. 이 눈으로 참례하와 보오니, 이 무슨 다행이리이까. 이 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여 송을 울려 가로되───.

크시와라 우리 임금 공은 높고 덕 넓으사 높으시고 넓으시고 하늘이나 같으셔라.

동햇가를 돌으시니 금강산이 높았세라 신기 모아 빼났으니 상서응도 끝없어라 우리 임금 오르시와 일심향을 피우시니 삼천 세계 다 향기요 무주시(無住施)를 행하시니 널리 복전(福田) 가시녿다.

부처님네 하늘님네 이 좋은 일 보시옵고 대위신(大威神)을 나토시고 큰 상서를 내리셔라.

……………………

햇빛이 금빛나니 산천이 빛났어라.

눈 있는 이 다 보오니 뉘라 아니 경건하리.

안 믿던 이 깨닫삽고 믿던 이는 더 굳도다.

모든 무리 모여들어 찬송하여 이른 말이 우리 부처 참 가르침 옛날에는 모를러니 오늘에야 응하셨네.

우리 임금 도 닦으사 닦고 닦아 도가 차니 묘한 응이 자꾸 날아 하늘에 소연하니 우리 임금 거룩할셔.

다시 뉘라 미혹(迷惑)하리.

임금께서 깨우시니 네 마음 뉘 살리신고 임금께서 날개셔라.

제망(帝網)을 단 듯하니 제주(帝珠)도 끝없어라.

보등(寶燈)을 켠 듯하니 빛과 빛이 이었어라.

네 마음 밝혔으라 우리 임금 밝음이요 네 복을 닦았으라 우리 임금 복이로다.

이로부터 비롯아서 진묵겁(塵墨?)에 닿기까지 모두 부처 도를 닦아 성인지경 올라보세.) 이 송을 받으신 상감은 기쁘셨다. 더구나 그것이 예조참판 이요, 유가에 성망이 높은 강희맹의 글인 것이 더욱 기쁘셨 다.

그러나 상감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있으셨다. 아무리 하 여도 불도가 현전(現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여도 범부심(凡夫心)이 스러지지 아니하기 때문이었다. 더 욱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진심(瞋心)이었다. 상감은 원체 괄 괄하신 성품이셔서 당신의 성미를 누르시기가 어려우셨다.

가까이 신임하시는 신하들게 대하셔서도 가끔 성을 내셨다.

곧 "아차"하시지마는 그때에는 벌써 성내신 것이 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신하들이 두려워는 하나 그 대신 마음은 점 점 버을어가는 것을 상감은 잘 알으셨다.

이 진심이 깨어지기 전에 불도가 현전할 리가 없었다.

"아수라(阿修羅)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 아니다."

상감은 이렇게 자책하셨다.

"인욕(忍辱), 인욕, 인욕."

하고 상감은 혼자 당신께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석가세존은 그 본행시(本行時)에 오백생(五百生) 동안 인 욕바라미(忍辱波羅미)를 닦으셨다. 그러하신 결과로 가리왕 (歌利王)의 손에 사지를 잘려도 조금도 분한 마음을 일으켜 서 자비심을 움직임이 없으셨다."

상감은 이러한 생각을 가끔 하신다.

그러나 무시로부터서 내려오는 진심의 뿌리는 그 깊이가 법계의 밑바닥에까지 닿은 듯하였다.

진심은 아만과 통한 것이었다.

'내가, 낸데. 나를 감히.' 이러한 생각이었다.

상감은 어떤 사람을 보거나 나 당신만 못한 것만 같았다.

다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차지 아니하는 것을 보 면 화를 내셨다. 그놈을 대번에 죽여버리고 싶으셨다. 이러 한 마음은 떼어버리셔야 할 것을 상감은 깊이 느끼신다. 이 번 금강산 오대산 길에는 이것을 떼고 가자 하고 상감께서 는 수없이 마음에 작정하신다. 그러하건마는 장안사에 오신 지 엿새 만에 이득수(李得守), 안중경(安仲敬) 두 신하를 서 울에 압송하여 금부에 가두게 하셨다. 그것도 국법을 어긴 죄인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마는 상감은 괘씸하게만 보시면 이런 일을 하셨다. 하시고 나면 곧 뉘우치시지마는 임금의 말씀이란 땀과 같아서 한 번 나오면 다시 걷어들일 수는 없 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상감은 또 화를 내셨다.

이러한 당신 결점을 생각하시매 강희맹의 송이 한편으로는 기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괴로우셨다.

교만을 떼는 법을 절하는 데 있다 하는 말씀을 상감은 어 디서 들으셨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에 계신 이로서는 평생 에 남의 절을 받을 일뿐이오, 절을 할 곳이 없었다. 상감은 부처님 앞에 오체투지로 실컷 절을 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를 아니하였다.

원각사 경찬회에서도 겨우 불전에 국궁례를 하였을 뿐이었 다. 장안사에 오셔서도 오체투지를 하실 용기가 나지 아니 하셨다. 오늘은, 오늘이나 하시면서도 아직도 합장 국궁 이 상의 예를 못 하셨다.

'꼭 한 번 절을 하고야.'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시건마는 신하들은 그것을 반대하였 다.

"현재불부배과거불.(지금 부처는 지나간 부처께 절 아니한 다.)"

이라는 이라는 말은 신하들이 내세우는 말이었다.

"숭불(崇佛)은 좋으나 영불(?佛)은 도에 어그러지오."

신하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 앞에 절을 하는 것은 부처께 아첨한다는 것이다. 게 다가 선객들이,

"내가 곧 부처거든 뉘게 절을 하랴."

하는 말을 유신들은 많이 이용하여서 임금의 허리가 부처 앞에 굽혀지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았다.

"양무제(梁武帝)도 영불로 망하였소. 공민왕도 영불로 망하 였소."

유신들은 임금이 불도를 숭상하는 것이 마치 나라를 망하 게 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처럼 말하였다.

"걸주(傑紂)도 영불로 망하였나?"

상감은 이러한 말씀으로 유신들의 말을 막아버리시기는 하 시면서도 실행에 있어서는 결국 유신들의 말을 꺾지는 못하 셨다.

"제자가 선생 앞에 절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상감은 이렇게까지 생각도 하고 말씀도 하시면서도 아직 불상 앞에 절은 못 하셨다.

상감은 표훈사(表訓寺)에서 며칠을 묵으셨다. 정양사(正陽 寺)에도 다녀오셨다. 여기는 고려의 태조 왕건(太祖王建)도 다녀가신 데요, 상감의 증조부 되시는 태조께서도 다녀가신 데다. 태조 왕건이 정양사에 오르시매 도량에 빛을 발하였 다 하여서 방광대(放光臺)라는 이름이 있다는 중의 설명도 들으셨다.

헐성루(歇惺樓)에서 금강 제봉을 바라보시고 상감은 만 이 천 권속을 데리고 상주 설법하신다는 담부갈보살(曇無竭菩 薩)을 염하셨다. 그리고 금강산에 여러 절을 지은 원효(元 曉), 의상(義湘) 같은 신라 적 큰 중들도 생각하셨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와 아미타경소(阿彌陀經?)도 생각 하셨다.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와 보조국사(普照國師)도 생각하셨다. 태고(太古), 나옹(懶翁), 무학, 함허(涵虛) 같은 명승들도 생각하셨다. 그리고 그들과 상감 당신과를 비교도 하여보셨다. 그리고 그들은 왕보다 높다 하고 한숨을 쉬이 셨다.

태조께서 나라를 얻으신 뒤에 무학대사는 바랑을 지고 산 에 숨어 버리고 말았다. 태조께서 무척 무학을 사모하셔서 찾으려 하셨으나 무학은 좀체로 불려오지를 아니하였다. 무 학은 이산 저산으로 조그마한 암자를 찾아서 몸을 숨기다가 한참은 그대로 소문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서 굴이나 초막에 몸을 숨긴 일도 있었다.

왜 그러하였는가?

세상에서 부귀 영화라 하는 것보다도 더 놓은 낙을 가졌기 때문이다. 제왕의 일보다도 더 큰 일이 있기 때문이다. 상감 은 이렇게 생각하시고 구름 속게 숨으락 나오락 하는 금강 제봉을 언제까지나 바라보셨다.

상감은 장경전(藏經殿)에 있는 반야경을 잠깐 전(轉)하시고 소리 높이,

"마하반야바라미."

하고 외치셨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 여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 如是.) 상감은 글을 읽으시는 모양으로 이렇게 부르시고는,

"허, 오온개공(五?皆空)이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 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하시고는 침음 양구하셨다.

신숙주 이하 호종 제신들도 경치에 취하였던 마음을 돌려 잠시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삼매에 들어간 듯하였다. 그리고 이 임금이 장차 왕위를 버리시고 출가하려 하심이나 아닌가 하였다.

세자궁은 상감의 바로 뒤에 따라서 상감께서 발하시는 모 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다. 형님이 불도를 퍽으나 숭상하 시다가 일찍 돌아가시는 것을 보셨고, 또 당신도 몸이 늘 약하실뿐더러, 세사에 뜻이 적으셨다. 아직 나이 어리시나 한적한 것이 늘 마음에 맞으셨다. 그러하시던 터에 오늘 아 바마마께오서 "마하반야바라미"를 부르시는 것을 보시고는 어리신 마음에도 이상한 느낌을 얻으셨다.

상감은 정양사의 약사여래(藥師如來)께 절하시고 싶은 마음 이 있으셨다.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시려고 대원을 발하신 약사여래의 고마우신 마음이 상감의 마음에 통하는 듯이 느끼셨다. 상감은 당신부터 몸과 마음의 병이 깊으심 을 느끼시는 동시에 호종제신들이 어느 한 사람이나 병인 아님이 없음을 느끼셨다. 다만 그들은 다 병이 있으면서도 병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건전한 줄로 스 스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죽을 날이 앞에 며칠이 아니 남았지마는 이 사대육진( 大六塵)이 언제까지나 튼튼 하게 살아 있을 것으로 알고 그것을 탐을 내어서 진하고 치 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상감은 약사여래를 향하여서 잠깐 합장하고 발을 돌리셨다. 만일 상감이 약사여래께 지극한 정성을 드리는 표적을 보이신다 하면 제신들은,

"응, 상감께서 당신과 아드님의 병환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원하신다."

하고 생각할 것이니 상감께서는 이것을 원치 아니하셨다.

상감이 약사여래께 합장하시는 것을 보고 신하들도 다 합 장하였다. 그들도 속으로 혹은 아들의, 혹은 손자의, 혹은 제 몸의 병이 낫기를, 곁의 사람들이 눈치챌 것을 두려워하 면서 빌었다. 그러나 그 병이란 것은 체중이라든가, 부족증 이라든가, 성태를 못 한다든가 그러한 병이요, 영겁의 병의 뿌리가 되는 마음의 탐진치를 깨뜨려지이다 하고 빈 이는 상감 한 분밖에 없었다.

표훈사에서 크게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서 모든 귀신에게 이 상서의 기쁨을 미치려 하였으나 준비가 늦어서 상감께서 친히 보시지 못하고 효령대군을 시켜서 하기로 하시고 윤삼 월 초육일에 유점사를 향하여서 떠나셨다. 상감은 다만 사 람의 임금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이 국토 안에 있는 귀신과 짐승의 임금으로도 자처하셨다. 사람과 귀신과 짐승 이 다 각각 제자리를 얻어 살기에 괴롭지 아니할뿐더러 다 무상정등각(無常正等覺)을 얻는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 비로 소 임금의 일을 다함이라고 생각하셨다. 표훈사에서 수륙재 를 올리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유신들은 이 것을 한 기복(祈福)으로 알아서 말썽을 부렸다. 그러면 그들 은 기복을 아니하느냐 하면 그들이야말로 아침과 저녁으로 끊임없이 복을 빌고 있었다. 그것은 다 유루복(有漏福)이었 다. 임금이 생각하시기에 그들에게는 무루복(無漏福)이란 것 을 알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임금의 처지에 있으면 전국 백성의 휴척을 다 생각하게 된 다. 비를 기다리면 백성을 위하여서 기다리고, 풍년을 빌어 도 백성을 위하여서 빈다. 임금에게는 내 것이라는 것이 없 다. 그 나라의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내 것이 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임금은 도적한다 하거나 탐낸다 하는 일이 없다. 임금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바라는 것이 없다. 임금은 대시주(大施主)시다. 오직 주실 뿐이요. 바라는 것이 없다. 이것이 임금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덕이다.

상감은 이것을 잘 의식하신다. 그런데 신하들은 말과 글로 는 이것을 아는 듯하지마는 마음과 행으로는 모르는 것 같 았다. 그들에게는 탐욕이 있었다. 주는 것보다도 받기를 바 랐다. 그리하고 임금의 마음도 자기네의 마음으로 촌탁하였 다. 임금이 복을 빈다 하면 그것은 온 나라를 위하여서 비 는 것이건마는 신하들은 마치 임금이 임금 자신을 위하여서 복을 비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상감은 당신의 생각이 매양 신하들에게 오해되는 것을 괴 롭게 생각하셨다. 상감은 그 원인도 아셨다. 그것은 상감이 본래 임금으로 나신 것이 아니시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상감은 결코 임금의 자리가 탐이 나서 임금이 되신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임금이 아니 되시면 이 사직이 안보할 수 없다고 보셨으므로 임금이 되 신 것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아니하였 다.

그러나 또 하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민기가 소 진한 것이었다. 백성의 마음이 모두 탐욕으로만 기울어져서 오직 작은 저만을 생각할 뿐이요, 큰 저를 생각할 줄을 몰 랐다. 가장 뛰어났다는 인물도 그러하였다. 혹시 의리와 절 개를 생각한다는 사람들도 나라 전체를 생각할 줄은 몰랐 다. 이리하여서 적이 마음이 맑다는 사람이래야 저와 특별 한 관계가 있는 임금이나 또는 저 한 몸의 맑은 이름을 위 하여서 거취를 정하고, 그만도 못한 사람은 오직 제 지위와 재물이나 탐내어서 마음을 쓰고 몸을 썼다.

상감은 생각하시기를 이 사직이 오래 가게 하자면 백성들 의 마음을 바로잡아서 작은 저를 버리고 큰 저를 알게 함이 있다 하셨고, 그리하자면 불도를 펴지 아니하면 안 되리라 고 하셨다.

그러나 신하들 중에는 이 뜻을 알아주는 이도 적었다.

금강산에 오실 때에도 제신들에게 불연을 맺게 하여서 작 은 나의 탐욕을 깨뜨리게 하자는 뜻도 가지셨던 것이다. 그 러나 장안사, 표훈사 십여 일을 많은 기연을 짓노라 하셨건 마는 신하들은 굳게 닫힌 마음 문을 열려 하지 아니할뿐더 러, 도리어 상감의 뜻이 불도에 깊이 들어가기를 막으려 하 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것은 도리어 그럴듯하다 치고라도 이 법성(法城)에 들어와서까지 조그마한 권세다툼과 시기와 반목이 끊일 줄을 몰랐다.

"할 수 없는 것들!"

상감은 화를 내셨다.

"왜 속들이 좀 트이지를 못해!"

상감은 신숙주, 구치관 등을 보시고도 이러한 책망을 하셨 다.

윤삼월 초육일에 장안사 행궁을 떠나셔서 유점사를 향하시 다가 밧무재 못 미쳐서 비를 만났다. 처음에는 봄비인가 하 였더니 점점 퍼붓기 시작하여서 봉련에 물이 새고 일행은 흠뻑 젖었다. 비가 흔치 아니한 봄철일뿐더러, 또 아침에 장 안사를 떠날 때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아서 우비라 고는 통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왜 우비 준비가 없었느냐?"

하고 서로들 책망하고 원망하였다.

"하늘이 어찌 우리 임금의 행차를 모르시랴. 그냥 가시는 것이 옳소."

"이것은 하늘이 가시지 마시라는 뜻이니 장안사로 돌아가 시는 것이 옳소."

"관상감과 점치는 자가 어찌하여서 비올 줄을 몰랐소?"

"상감께서 용호(龍虎)의 기상이시니 비와 바람은 언제나 상 감을 따르는 것이오."

이 모양으로 중론이 불일하여서 마침내 상감 처분을 기다 리기로 하였다.

상감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여기서 유점사가 몇 리냐?"

"이십오 리요."

"장안사가 몇 리냐?"

"시오 리요."

"그러면 장안사로 돌려라."

하시는 처분이 내려서 다시 장안사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옷이 전부 젖어서 꼴이 아니었다. 몸꼴이 말이 아니었다. 몸꼴이 말이 아닌 모양으로 마음꼴도 말이 아니었다.

"하늘이 무엇을 아느냐. 부처가 무슨 영험이 있느냐,"

하는 마음들이 생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승정대부들이 모 두 귀인의 체면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비는 사람들의 이 못남을 비웃는 듯이 일행이 장안사에 돌 아온지 얼마 아니 되어서 언제 흐렸더나 하는 듯이 개어버 렸다. 만천교 밑에 물소리가 요란하였다.

이튿날 상감은 유점사에 도착하였다.

이날은 우비를 잔뜩 준비하였건마는 청청한 일기 속에 유 점사까지 올 수가 있었다.

어저께 중로에서 비를 만난 일로 하여서 호종 제신들 중에 말이 많은 것을 상감이 아시고 상감은 유점사에 듭시는 길 로 제신들을 모으시고 일행이 다 함께 비를 맞았거든 어찌 하여서 서로 원망하고 서로 책망하느냐, 다같이 맞은 소나 기 하나로 인하여서 한 조정 신하가 서로 마음이 버을어서 쓰겠느냐, 그만한 일에 마음이 움직여서 어찌하겠느냐, 그러 한 정치 못한 마음을 가지고야 밤낮에 악마의 놀림감이 되 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책망을 내리시고,

"그래서 내가 늘 하는 말 아닌가, 불경들을 읽으라고. 그렇 게 읽으라고 하여도 다들 아니 읽고는 그렇게 여리게 하단 말이야."

이렇게 걱정을 하셨다.

그러고서는 그 자리에서 정효산(鄭孝常), 어세공(魚世恭), 유진(兪鎭)을 부르시와,

"너희들 이리 나와서 능엄경 강을 하여 보아라. 내가 너희 더러 능엄경을 읽으란 지가 벌써 오래였으니 다 알 터이 지?"

하고 분부하셨다.

세 사람은 어전에 나와서 앉았다.

곁에 있던 중이 능엄경 책을 드리려는 것을 보시고 상감 은,

"아니다. 오늘은 복강(伏講)이다. 너희들이 사서 오경은 따 로 외울 터이니 능엄경인들 못 외우겠느냐. 어디 세계기시, 중생기시, 엄과기시(世界起始, 衆生起始, 業果起始)를 차례로 강을 하여보아라." 하셨다.

이 분부를 받잡고 정효상이 일어나,

"■■■■■■■■■■■■■■■■■■■■■■■■■■■■■■ ■■■■■■■■■■■■■■■■■■■■■■■■■■■■■■■ ■■■■■■■■■■■■■■■■■■■■■■■■■■■■■■■ ■■■■■■■■■■■■■■■■■■■■■■■■■■■■■■■ ■■■■■■■■■■■■■■■■■■■■■■■■■■■■■■■ ■■■■■■■■■■■■■■■■■■■■■■■■■■■■■■■ ■■■■■■■■■■■■■■■■■■■■■■■■■■■■■■■ ■■■■■■■■■■■■■■■■■■■■■■■■■■■■■■■ ■■■■■■■■■■■■■■■■■■■ 에서부터 세계기시 대문을 끝까지 내리외웠다.

(그때에 부르나 대중 중에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 깨를 메었고 오른 무릎을 꿇고 합장 공경하여 부처께 여쭈 오되……세존하, 만일 또 세상의 모든 근(根)과 진(塵)과 음 (陰)과 처(處)와 계(界) 같은 것이 다 여래장(如來藏)의 깨끗 한, 본래 그러한 것일진댄 어찌하여 문득, 산이며 강이며 땅 이며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생겨 차차로 변하여 흘러 끝나 고는 다시 비롯나이꼬?

또 여래께옵서 말씀하시기를 흙과 물과 바람이 본래 성품 이 둥글고 무르녹아 법계에 두루 퍼져 그득히 늘 있나니라 하시오니, 세존하, 만일 흙 될 것이 그득하면 불이 나지 못 하오리니 어찌하여 물 될 것과 불 될 것과 둘이 함께 허공 에 그득하여 서로 죽임이 없다 하는 것을 설명하리이꼬? 세 존하, 흙의 성질은 막히옵고 허공의 성질은 터지오니 어찌 하여 둘이 다 법계에 두루 퍼지리이꼬? 내 이 뜻이 어찌 되 는 바를 알지 못하오니 원하옵건댄 여래께옵서는 크신 사랑 을 베푸시와 내 미혹한 구름을 열으시와 모든 대중에 미치 게 하시옵소서. 이 말씀을 아뢰이고 부복하시와 목마른 듯 공손하게 부처의 고작 높으신 가르치심을 바라삽더니─── ──) 상감은 정효상의 거침없이 한 대문을 내리읽는 것을 보시 고 만족하신 웃음을 띠우시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시며,

"응 바로 읽었다. 뜻도 다 아느냐?"

하고 효상을 바라보셨다.

"바로 안다고 할 수 있사오리까, 글자대로는 새기노라 하였 소."

하고 겸손하게 아뢰었다.

"그래. 그 다음에는 중생기시를 세공이 외워보아라."

하시고 어세공을 바라보셨다. 여러 사람의 눈은 세공에게 로 쏠렸다.

어세공과 유진 두 사람은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부복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몸에서 신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뜩아뜩하였다. 한두 번 억지로 보느라고 하였으나 캄캄하여 한 글자도 생각이 나지 아니하였다.

상감의 낯빛이 변하였다.

"왜 안 외우느냐?"

하시는 소리가 방을 쩡쩡 울렸다.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두 송구하였다. 자기들까지 함께 걱정을 듣잡은 것 같았다. 혹 은 법화경을, 혹은 원각경을, 혹은 금강경을, 혹은 화엄경을 읽으라 하시는 분부를 받자온 신하가 많았다. 더구나 젊은 신하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다들 나와서 강할 만치 읽은 자는 몇이 되지 못하였다.

'내 차례가 돌아오면 어찌하나?' 하고 다들 겁이 났으나 어쩌할 수 없이 내려올 벼락을 기 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속으로 제가 읽기 로 된 경의 한 대문 한 대문을 외워보았다.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 하는 경의 첫머리는 익히 생각이 나지마는 대문 대문이 술 술 내려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김수온, 서거정, 한계희, 노사신 같은 사람을 제하고는 입으로는 내전(內典)에 통하였 노라 하면서도 진실로 아는 사람은 몇이 못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등골에서도 땀이 흐르?

번뇌무진(惱煩無盡)[편집]

윤삼월 이십사일에 대가(大駕)가 아차고개〔峨嵯山〕밑에 이르셨다.

여기서 상감은 세자와 정인지 등을 명하시와 술을 내오게 하시고 또 마중나온 재상들과 대간(臺諫)들게 술을 내리셨 다. 오래 고질이 되셨던 부스럼이 상원사에서 씻은 듯 부신 듯 나으신 것이 소문이 나서 모두들 이상하게 알고 또 기뻐 하였다.

충량포(忠良浦)에 이르시와 대가의 의장(儀仗)을 갖추시와 서 흥인문(興仁門)으로 듭실 때에 연로에는 남녀노유가 모두 나와 부복하여 봉영하였다.

민간에도 상감께서 금강산에서 듭시매 오색구름이 덮였다 하는 것이며, 하늘 꽃이 비오듯 내렸다 하는 것이며, 달고 진득진득한 이슬이 하늘에서 내렸다 하는 것이며, 학 한 쌍 이 상감의 타신 연 위로 훨훨 날았다 하는 것이며, 보살이 현신하셨다 하는 것이며, 하늘과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 여서 흔들리고 소리가 났다 하는 것이며, 상감의 몸에 병환 이 금시에 소멸되셨다 하는 것이며, 이러한 소문들이 열 갑 절 스무 갑절 보태어져서 돌았다.

대가가 흥인문에 듭시매 성균관 생원 서지무(徐智武)가 가 요(歌謠)를 드린 것을 보아도 이번 길에 대하여서 백성들이 감동된 것을 알 것이다. 그 글의 한 부분 한 부분을 골라 적으면 이러하다.

"伏見■■■■■■■■■■■■■■■■■■ 이라 한 것을 허두로 하여, 이번 동순에 관한 것을 송하여 말하기를,

"■■■■■■■■■■■■■■■■■■■■■■■■■■■■■■ ■■■■■■■■■■■■■■■■■■■■■■■■■■■■■■■ ■■■■■■■■■■■■■■■■■■■■■■■■■■■■■■■ ■■■■■■■■■■■■■■■■■■■■■■■■■■■■■■■ ■■■■■■■■■■■■■■■ 이라 하여 노래를 올리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

■■■■.

■■■■ ■■■■ ■■■■ ■■■■ ■■■■ ■■■■ ■■■■ ■■■■ ………."

또 중전 자성황후께 드리는 노래도 있었고, 또 남산 기생 자미선(紫微仙) 등이 연로(輦路)에 춤을 추며 가요를 드렸으 니, 하였으되.

"■■ ■■■■■ ■■■■■ ■■■■■■■ ■■■■■ 기생들은 또 중궁에도 가요를 올렸으니 그 중에는,

"■■■■■■■■■■■■■■■■■■ 라는 구가 있었다.

그 사(詞)에 가로되,

"■■■■■■■■■ ■■■■■■■■■■■■■■■■■■■■■■■ 이라고 하였다.

상감의 만족하심은 그칠 바를 모르셨다.

사흘을 쉬신 뒤에 윤삼월 이십칠일에 상감께서 근정전에서 어(御)하시와 의정부와 육조의 조하를 받으시고, 동순 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서와 또 환궁하신 뒤에 사리분신(舍利 分身)된 하례를 받으시고, 살인, 도적, 남형관리(濫刑官吏)이 하의 죄를 사하라 하신 교지를 내리셨다.

이날에 상감은 잔치를 베푸시고 동순에 호종하였던 제신과 서울에 남아 있던 제신을 부르시와 술을 내리실 새, 일본국 에서 온 뇌영(뇌永)의 사자 중 수린(수린)등 두 사람도 참례 케 하시고 이튿날은 뇌영의 사자 중 수린이 돌아감으로 일 본 임금께 글을 부치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

"■■■■■■■■■■■■■■■■■■■■■■■■■■■■■■ ■■■■■■■■■■■■■■■■■■■■■■■■■■■■■■■ ■■■■■■■■■■■■■■■■■■■■■■■■■■■■■■■ ■■■■■■■■■■■■■■■■■■■■■■■■■■■■■■■ ■■■■■■■■■■■■■■■■■■■■■■■■■■■■■■■ ■■■■■■■■■■ 이라 하였다.

일본 사자 수린이 떠난다 하여 상감은 사정전에 어하시 ■ ■■ 정인지, 봉원군 정창손, 고령군 신숙주, 좌의정 황수신, ■■■ 원형, 좌찬성 최항, 우찬성 조석문, 병조판서 김국광, 이조판서 ■계희, 호조판서 노사신 등의 상참(常參)을 받으 시와 뇌영 사자 중 수린 등 두 사람의 송별연을 베푸셨다.

술이 서너 순배나 돌아간 뒤에 상감은 수린 등 두 사람에게 각각 표피 한 장, 호피 한 장, 유지 자리 두 장, 면포, 모시, 베, 각 세 필, 그 밖에 붓, 먹, 책 등을 관등 따라주시고 이 렇게 말씀하셨다.

"경등이 나라에 돌아가 내 말씀을 임금께 아뢰일지어다. 이 웃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다못 세간사에 불과하니, 이 로부터 삼보(三寶)로써 서로 수선(隨善)하면 수타천식(須陀 天食)이 귀궁에 내리리이다 하여라. 부디 이 말을 잊지 말지 어다."

이 말씀을 받잡고 수린 등이 돈수 부복하였다.

"자, 술을 마시라."

하여 상감은 술을 내리시고 제신들도 술을 받들어 올려 상 감은 심히 기뻐하셨다.

뇌영의 사자 수린 등을 보내고 나서 며칠 아니하여 단오날 에 상감은 근정전(勤政殿)에 납시와 백관의 조화를 받으시고 서현정(序賢亭)에 듭시와 이품 이상의 종친과 재상과 부장 (部將)과 진무(鎭撫)와 사복(司僕)들을 부르시와 활쏘기를 베 푸시고 주연을 내리셨다.

이날 일기는 청명하고 어원의 무르녹은 녹음 속에서는 꾀 꼬리가 어지러이 울었다.

활쏘기가 끝난 뒤에는 상감께서는 친히 단운구장(短韻九章) 을 지으시와 재취 김수온(金守溫) 이하 열 사람과 삼품 이하 유신 백여인과 선전관 등으로 하여금 이 뜻으로 시부송책 (詩賦頌策)을 지어서 상감의 단운구장에 화하기를 명하셨다.

상감이 지으신 글은 이러하였다.

第一章 以心知自心 以心知他心. 知心自他心. 何者爲眞心.

(번역) 마음으로 제 마음을 알고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아니 아는 마음과, 제 마음 남의 마음이 어느 것이 참 마음인고.

第二章 仁重義重■. 禮重智重■.  ■體同源. 何者非重■.

(번역) 인이 중한가. 의가 중한가.

예가 중한가. 지가 중한가.

넷이 본래 한 근원이니 어느 것은 중치 아니하랴.

第三章 ■■■■■■■■■■■■■■■■■■■■■ (번역) 문하는 자 경륜할까.

무하는 자 경륜할까.

두 편이 경륜을 다투니 어느 편이 참 경륜일까.

第 章 ■■■■■■■■■■■■■■■■■■■■ (번역) 간척하는 것이 문인가.

정벌하는 것이 무인가.

이러한 문무의 도는 어느 방책에 벌여 있는고.

第五章 ■■■■■■■■■■■■■■■■■■■■■■ (번역) 나라가 아니면 백성을 뉘 지키며, 백성이 아니면 나라가 무엇으로 부할꼬.

너그러움이 아니면 정치 어찌 잘 되며, 예절이 아니면 나라가 어찌 오래 갈꼬.

第六章 ■■■■■■■■■■■■■■■■■■■■■ (번역) 물결은 바람으로 일고 비들은 철따라 새롭거니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다고 버성김이 아니오.

아첨을 한다고 친하게 됨이 아니라.

第七章 堂堂■■■■■■■■■■■■■■■■■■■■■■ (번역) 당당하게 성하고나 조정이어, 숙숙하게 정하고나 진중이어.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리라.

그 고동은 서로 믿븜에 있을진저.

第八章 ■■■■■■■■■■■■■■■■■■■■■■ (번역) 번 뇌 무 진 험한 곳에 범이 나오고 불빛에 나비 끌어 죽는다.

모두 탐진치오녀, 실상(實相)을 모름에 말미암음인저.

第九章 ■■■■■■■■■■■■■■■■■■■v (번역) 진실을 알작시면 사방이 훤츨히 뷔이도다.

삼계에 일물이 없거니 세는 무어며, 출세는 무어랴.

(註)① '진실'은 '실상', 즉 이 우주와 인생의 있는 대로의 모양, 우리의 어리석음, 욕심으로 물들이고 허 깨비를 만들 어 놓지 아니한, 본래의 모양.

② '훤츨히 뷔이도다.' 아무것도 없고, 걸림도 막힘도 없이 허공이라 하는 뜻.

③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俗界, 色界, 無色界) 중생의 경 계의 총칭.

④ 세출세. '세'는 욕심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 '출세'는 욕 심을 떠난 아라한 보살 등의 도인의 경계.

상감은 제신들이 화하는 글을 흥미 깊게 읽으셨다. 얼마나 이 단운구장에 나타난 뜻을 그들이 알아보았는가, 알고 싶 으심이었다. 그러나 그 그들은 하나도 상감의 뜻을 만족하 게 못하였다. 혹은 상감이 불도를 숭상하신다는 선입견에서 그 비위를 맞추려고 제일장과 제이장을 찬송, 부연한 자도 있고, 혹은 제이장의 인의예지 사단을 들어서 이 기회에 상 감의 마음에 유도를 고취하려는 자도 있고, 또 혹은 제삼장 제사장의 문무론을 들어서 숭문언무(崇文偃武)를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상감이 문과 무와 예와 정이 한데 합 하여서 비로소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정신과, 인의예지가 결 국 '마음'하나에 돌아가서 최고의 진실에 도달하는 날에는 확연 무일물한 데 이르나니라 하는 생각을 엿본 자는 없었 다. 세상을 다스림에는 유교를 쓰고 출세간의 영원한 수도 에는 불교를 쓴다고 한 것이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할 만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상감은 그것도 다 참으로 깨달은 소리가 못 되는 것을 알았다.

상감이 이 단운구장을 제신에게 보인 것이 결코 한 글짓는 유희를 위하심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기회를 잡아서 제신에게 생각하고 반성할 기회를 주어서, 저마다의 마음속에 깊이 쌓아진 사욕과 문무의 차별관과 유불의 반목 과 파쟁와 이러한 더러운 탐진치의 소굴을 들추어보자 하시 는 뜻이었다.

상감은 내심으로 제신 중에 인물이 없음을 한하셨으나 그 것이 다 당신의 복덕이 박함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날은 다 만 유쾌하게만 지내시려 하여서 제신에게 골고루 후한 상과 주식을 내리셨다.

상감이 불도를 숭상하셔서 조선에 영험한 일이 많다는 소 문이 이웃 나라에까지 퍼져서, 일본서도 여러 차례 사신(그 들은 다 중이었다)이 오고, 유구국 왕제 민의(琉救國 王弟 閔意)도 오고 또 명나라 황제의 사신 강옥(姜玉) 등도 와서 이들을 접대하고 이들에게 불경, 불상, 기타의 선물을 주는 것이 한 큰일이었다.

그러나 상감은 이것이 다 불도를 홍통(弘通)하는 일인 동시 에 나라를 빛내는 일이라 하여서 힘써 응하셨다.

상감은 더욱 불도를 위하여 힘을 쓰시게 되어서 학조(學組) 로 하여금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케 하시고, 또 구치관, 신숙 주 들을 시켜서 태조, 태종, 세종 삼대를 위하시와 보은사 (報恩寺)를 신창하시려고 기지를 심정(審定)케 하셨다. 그러 나 그 일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상감은 모든 것이 다 뜻대로 되는 것 같은 세월을 얼마 동 안 보내셨다. 오대산에서 병환도 나으시고, 이웃 나라에까지 호법 대왕으로 이름이 높이 나고, 마치 앞으로 착착 소원이 성취될 것같이 보였다.

상감은 다만 불경에만 통하신 것만 아니었다. 상감은 주역 을 비롯하여서 유가서의 구결(口訣)도 친히 지으시고, 또 병 서며 농사에 관한 것이며, 기타 다방면으로 학문에 관한 사 업을 하셨다. 그 어느 방면에 있어서나 상감은 어느 전문가 보다 뛰어나셨다. 주역 같은 것도 전문가인 정인지를 능가 하시고 권근(權近)의 구결을 수정하셨다.

이 모양으로 상감은 문화의 모든 방면에서 조선을 아름다 운 나라로 만들려고 힘을 썼고 또 외교적으로도 이웃 나라 들과 불교를 통하여서 서로 화친하기를 힘쓰셨다.

상감은 여러 차례 일본에 사절을 보내어서 두 나라가 영구 히 두목하기를 도모하려 하셨으나 중국 숭배이 고질이 깊이 박힌 유신들이 번번이 이것을 방해하였다. 그 표면의 이유 는 조선이 일본과 빈번히 교통하면 명나라의 의심을 산다는 것이었으나, 기실은 명나라를 존숭하는 노예 근성과 아울러 서 불교를 미워하는 까닭이었다.

본래 신라 적부터 불교도는 중국 숭배의 관념이 없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저를 존중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요샛말로 하면 국수주의자였다. 고신도 (古神道)의 정신을 보존한 것도 실로 불교도였다.

고려말까지도 이 사상이 계속하였다. 묘청(妙淸)이 고려 임 금을 황제라고 일컫기를 주장한 것도 이 정신이다. 이 정신 은 고려 태조의 정신이었다. 고려초에도 임금이 황제라고는 아니하였더라도 연호를 쓰고 짐(朕), 붕(崩)이라는 말을 썼 다. 그러나 점점 성하여 가는 유교도의 세력은 중국의 임금 을 천자라고 높이고 제 임금을 제후라고 낮추기를 주장한 것이었다. 이 일에 가장 중심이 된 인물은 김부식(金富軾)과 정몽주(鄭夢周)였다.

김부식은 다만 정치적으로 묘청 일파를 탄압하였을뿐더러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를 써서, 제 사대사상(事大思 想)을 멀리 고구려, 백제, 신라에까지 소급시켜서, 사실에 어 그러지게, 삼국을 종국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연 호를 삭제하고 임금에 관한 용어에서 짐이나 붕이란 말 대 신에 과인(寡人)이라, 흉(■)이라 하는 말을 썼다. 그리고 삼 국 고사의 사실을 혹은 은휘하고 혹은 개찬하여서 중국인의 사기에 맞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말에 이르러서 정몽주 일파가 중국을 송두리 째 본받고 저를 이적(夷狄)이라 하여서, 예로부터 정하여 오 는 모든 전통을 파괴하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니, 이것이 이 조(李朝)의 사상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명 태조가 새로 등극하여서, 사신을 고 려에 보내어 정삭(正朔)을 받으라 하였을 때에 신돈(辛旽)은 명사를 베기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불교도의 국수주의와 유 교도의 배화(拜華)주의의 최후요, 최고의 충돌이었다.

유신들은 이 자립, 자존사상을 타파하고 중국 의존의 노예 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서 처음에는 신돈을 공격하고 다음 에는 왕실까지도 배반하였다. 그 공격의 수단은 정정당당한 것이 아니요, 남의 사행을 적발하고 날조하는 비루 음험한 것이었다.

이조 태조의 참모장격이시던 태종 대왕께서는 이 조류를 이용하여서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선명히 하여서 유 교들의 지지를 얻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께서는 태종과 믿으시는 바가 다르셨다. 태조 께서는 불교와 유교를 양립시켜서 세가사인 정치는 유교에 의하여서 하되, 출세간사인 영원한 수련과 안심입명은 불교 에 의하여서 하시려 하였다. 그러므로 정치는 정도전(鄭道 傳), 조준(趙逡), 하륜(河崙) 등에게 맡기시면서도, 당신의 내 적생활을 위하여서는 무학을 왕사(王師)로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편협한 유신들은 이것이 못마땅하였다. 조선에 불 교를 온통으로, 형적도 없이 소멸해버리고 유교의 천하를 만들지 아니하고는 말지 아니하려 하여서, 태조와 정종을 다 배척하고 척불론자이신 태종을 왕위에 받는 것이었다.

태종은 유신들에게 주신 언질이 있기 때문에 일관한 송유척 불의 정치를 단행하셔서, 천년 가까운 불교에 제일차의 대 타격을 주신 것이었다.

태종의 이 정책은 세종의 중년에까지 계속하여서 세종은 집현전에 유신들을 모으시와 나라를 유교화하기를 힘쓰셨으 나, 점점 원숙하시는 연령에 달하시매 유교만으로 결코 세 도 인심을 바로잡을 수 없을뿐더러 중생에게 안심입명을 줄 수 없음을 깨달으시고 차차 불교를 숭상하시게 되었다.

지금 상감이신, 그때 수양대군, 안평대군의 두 분 아드님을 당시의 선지식이던 준(俊) 화상에게 보내시와 불도를 물으시 고, 대궐안에 일시 폐허나 다름없던 내불당(內佛堂)을 수리 하시와 몸소 예불도 하셨다.

유신들은 세종이 사도로 들어가신다고 벌떼같이 덤볐으나 워낙 세종이 영주이신지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하던 끝에 세종이 승하하시고, 문종도 승하하시고 단 종이 양위하시고 상감이 왕위에 오르신 것이었다.

상감은 처음에는 민심을 수습하시기 위하여서 유불 양교에 대하여 기치를 분명히 표방하시지 아니하셨으나, 아드님이 돌아가신 것도 빌미가 되어서, 중년 이후에는 태조 대왕의 유지를 이으시와 '세간사는 유교로, 출세간사는 불교로'라는 주의를 분명히 하시고 유불양립(儒佛兩立), 좌불우유(左佛右 儒)의 정책을 단행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명나라에 대하여서 도 은근히 유신들의 사상을 볼쾌히 여기시와 차라리 일본과 친하고 명을 멀리 하려는 생각을 품고 계셨다.

상감의 이러한 생각───중국에 대하여 독립의 위신을 유 지하려는 생각을 이은 이는 그 후 이백 년이나 지나서 효종 때에 한 번 더 나타났을 뿐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상감은 고구려, 백제 때로부터 깊은 인연 이 있고 또 불교를 보아서 더욱 뜻이 같은 일본과의 교의를 두터이하려고 힘을 쓰신 것이다. 일본서 약사사(藥師寺)를 짓는다는 기별이 온 것을 응하셔서, '■■■■■■■■■■■■■■■■■■■■■■■■■■■■■■ 라고 실록에 적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일본서 한 해에 여러 차례씩 혹은 장군가로부터, 혹은 명 가로부터 사자가 내왕하였기 때문에 상감은 예로부터 일본 과 조선과의 관계에 대하여서 깊은 인식을 가지고 계셨다.

더구나 신숙주는 일본 말을 잘하고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어서 그의 학자적인 두뇌로 일본의 역사도 연구함이 있었고, 일본 중 도언(道■) 같은 이는 여러 번 조선에 오기 때문에 옛날부터의 두 나라의 관계를 많이 말하였다.

아주 옛날 일은 말 말고라도 신공왕후(神功皇后)가 신라 왕 자 천일창(天日槍)의 후손이라 하는 것이며, 성덕태자(聖德 太子)에게 법화경, 승만경(勝■經)을 진강한 이가 고구려 중 혜자(慧子)라는 것이며, 또 그때에 나라(奈良)에 법륭사(法隆 寺) 등 절을 짓는데 성덕태자를 도운 이가 백제 중 자총(慈 聰)이란 것이며, 또 처음 경도(京都)에 평안경(平安京)을 정 한 환무천황(桓武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성왕의 증손녀라는 것이며, 또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를 치매 일 본에서 구원병을 파견하였고, 백제가 멸망함에 미쳐서는 백 제의 왕족과 대관과 학자가 일본에 망명하여서 황실의 우대 를 받자와 일본 백성이 되어서 이래 육칠백 년에 자손이 수 없이 퍼졌고 지금도 벼슬하는 이와 학자가 많다는 것이며, 또 그 후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한 때에 도 왕자 약광(若光)이 일천 칠백여 명의 귀족과 학자와 중과 신관(神官)과 도검(刀劍)을 만드는 공장(工匠)과 기타 여러 공장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망명하매 원성천황(元聖天皇)이 무장(武藏)에 땅을 베어주어서 세가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며, 또 고려 때에도 많은 사람이 일본에 건너가서 귀화하여 산 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상감께 아뢰었기 때문에 상감 은 일본에 대하여서 극히 친밀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명나라 사신에 대하여서는 비록 융숭은 하더라도 다만 외 교적인 접대가 있었을 뿐이지마는 일본서 온 사신이나 사자 에 대하여는 극히 친근한 정을 표하셨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십삼년 삼월 초파일조 실록에,

"■■■■■■■■■■■■■■■■■■■■■■■■■■■■■■ ■■■■■■■■■ (도언 등이 하지할 새 여쭈어되 소승이 중원의 절들을 두 루 보았사나, 듣잡건대 원각사 탑이 천하에 고작이라 하오 니 원하옵건댄 오늘 보게 하시옵소서 하거늘, 상감께서 이 르시되, 대사가 오늘은 술을 자셨고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가 봄이 옳도다 하시고, 곧 예조에 전하여 가라사대 일본 중이 내일 원각사를 보고자 하니 가서 접대하라 하시다.) 이라 하였고, 또 그 이튿날인 초구일에는,

"■■■■■■■■■■■■■■■■■■■■■■■■■■■■■■ ■■■■■■■■■■■■■■■■■■■■■■■■■■■■■■■ ■■■■ (주서 노만을 보내어 도언에게 일러 가라사대, 대사──전 에도 오고 이제 또 오니 정성이 고마운지라, 하물며, 대사는 나이와 덕이 다 높으시니 마땅히 몸소 만나 예로써 접대할 것이로되, 마침 사고 있어 뜻 같지 못하노라. 이제 여래와 관음 현상도 두 그림과 글씨 책 등을 증하노라 하시고 또 문신으로 하여금 시를 지어서 전별케 하시고 부관인과 원암 주와 반종하는 사람들에게도 관등 따라 물건을 주시다.) 하였다.

도언에 관하여서는 동년 춘정월 초파일조에, '日本■■■■■■■■■■■■■ 라고 하였으니 의요라 함은 아시가가 〔足利〕장군이다.

같은 해 사월 십육일조에, '■■■■■■■■■■■■■■■■■■■■■■■■■■■■■■ ■■■■■■ ■■■■■■■■■■■■■■■■■■■■■■■■■■■■■■ ■■■ 또 십칠일조에, '■■■■■■■■■■■■■■■■■■■■■■■■■■■■■■ ■■ 라고 하였다.

만일 상감이 더 오래 사시고, 또 신하들이 상감의 뜻을 받 들었다 하면, 임진년의 비극은 아니 일어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슬픈 인식착오였다.

무상(無常)[편집]

홍복산(洪福山) 사냥에서 비를 맞으신 것이 상감의 건강을 상함이 컸다. 원체 천품이 건강하시건마는 이제는 보산이 오십이요, 대대로 칠십을 넘기시기 어려운 유전인데다가 정 신을 과로하심으로 근년에 노쇠하심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홍복산 사냥에 새벽비를 맞으신 것이다. 비록 유월이라 하 더라도 새벽 산 비는 찼고 갑작비라 우비도 넉넉지 못하였 다.

명나라 사신 강옥(姜玉) 등이 황제의 명으로 금강산에 불공 을 드리러 왔다가 돌아갈 날이 되매 송별 삼아 사냥을 베푸 신 것이었다.

"불공하는 길에 사냥이 어떨까?"

하는 상감의 염려하심도 있었건마는 강옥은 기어이 사냥을 하고 싶어하였다.

유월 십일일 밤, 넷째 북소리에 상감은 호종 제신을 거느 리시고 홍복산 사장(射場)으로 거둥을 납셨다. 사관(史官)만 은 따르지 말라고 명하셨다.

거둥이 납신 지 얼마 아니하여 갑자비가 쏟아지기 시작하 였다.

상감은 신숙주를 강옥에게로 보내시와,

"지금 산에는 비가 점점 심하나 이미 포위(布圍)를 하고 두 분 이러므로 비로소 신명의 도우심과 백성의 향응을 얻어 새 나라를 이룩하셨다, 하는 것을 읊으신 것이 용비어천가다.

이 모양으로 창업이 어려우니 그것을 지키기에도 마음을 닦 음과 몸을 잇비함이 커야 한다 함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세존이 얼마인지 모르는 옛날에도 또 옛날보광불(普光佛) 재세시에 선혜비구(善慧比丘)라 하는 한 중으로 처음 발심하시와 기어코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 에 헤매며 가진 고초를 받는 삼계 중생을 제도하시는 큰 서 원(誓願)을 세우시고 억겁 수도에 혹은 보시행(布施行)을 닦 으사 나라와 처자와 머리와 눈과 보시하시고, 혹은 인욕선 인(忍辱仙人)으로 인욕행을 닦으사 가리왕에게 살을 깎이고 팔다리를 끓기면서도 일직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발하 지 아니하시고, 이 모양으로 혹은 수도하는 중으로, 혹은 선 이능로, 혹은 왕으로, 혹은 인간에, 혹은 천상에 어디나 아 니 태어나시는 데 없으시면서 끊임없이 시방제불게 공양하 시고, 끊임없이 중생을 위하시와 육도만행을 하실 새,

"■■■■■■■■■■■■■■■■■■■■■■■■■■■■ (삼천 대천 세계에 계자씨만한 곳도 이 보살님이 목숨을 아니 버린 곳이 없나니 중생을 위하심이라.) 하도록 공력을 드리시와 마침내 '넓은 지혜', '넉넉한 행실 (■■■■■■■)을 갖추시와 석가세존으로 세상에 나타나셨 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상감은 당신 한 몸으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담당 하시려는 포부를 가지신 것이었다.

여덟 기생이 월인천강지곡을 아뢰이는 동안 상감께서는 종 시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잠잠히 계시다가 노래가 끝나매 상감은 눈물을 흘리셨다.

모셨던 신하들은 상감께서 아버님이신 세종대왕을 생각하 시고 낙루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감의 눈물 은 반드시 선왕을 생각하시는 비감에서 온 것만이 아니었 다. 무엇인지 바로잡아 말할 수 없는 깊고 큰 슬픔에서 오 는 눈물이었다. 이른바 나기 전 슬픔이었다.

곁에 뫼셨던 호조 판서 노사신도 상감을 따라서 느껴울었 다.

밤은 깊었는데 상감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좌우가 다 변색하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에 보면 상감의 이날 눈물은 당신의 목숨의 무상에도 관계있는 것 같았다.

상감은 가끔 몸이 오싹오싹하고 식욕이 없고 잠자리가 편 안치 아니함을 느끼셨다.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불현 듯 나는 때도 있으셨다.

상감이 영의정 조석문(曺錫文)을 파하시고 구성군 준(龜城 君 浚)을 영의정을 삼으셨다. 이에 대하여서는 반대가 많았 으나 상감은 이것을 단행하셨다. 이것이 칠월 십칠일 일이 다. 구성군은 상감이 가장 신임하는 종친이었다. 중의를 무 시하시고 이렇게 하신 데는 비상한 결심이 있으신 모양이었 다.

그런 지 다음 다음날인 십구일에 상감은 중신들을 편전으 로 부르셨다. 상감은 병색이 있으셨으나 강잉하여 일어나 앉으셨다.

"몸이 춥고 머리가 아파."

상감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무더운 날이었다.

제신들은 근심된 눈으로 상감을 우러러뵈었다. 눈을 뜨시 기도 거북하신 모양이었다.

"생노병사는 누구나 면치 못하는 일이 아닌가."

하시고 상감은 빙그레 웃으셨다.

숙주 혼자만 남은 셈이었다. 황보 인, 김종서, 정분, 성삼 문, 박팽년 등등, 돕삽기를 맹세한 어리신 임금까지도 죽이 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이 임금 한 분과 종친, 중신, 문신 여러 십 명을 죽이는 일에 숙주는 정인지, 한명회 등과 함 께 언제나 수모자가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이제 다시 이 임금의 고명을 받는 것이었다. 숙주는 마음의 괴로움으 로 낯을 찡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숙주는 고개를 들어서 상감을 우러러뵈오며,

"상감마마. 황송하오. 소신 등이야말로 식견이 천단하옵고 충성이 부족하와서 매양 성의(聖意)를 받들지 못하와 신금 (宸襟)을 괴로우시게 하사왔사오니 그 불충의 죄를 생각하오 매 만사무적이오. 앞으로 분골쇄신(粉骨碎身)하와서라도 성 은의 만일이나 갚사오려 하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신하들은 숙주를 따라서 머리를 조아렸다.

상감은 만족하신 듯 미소하시더니,

"내 오늘 세자에게 전위하려 하오. 몸에 병이 있으니 한가 하게 쉬겠소. 경등은 잘 세자를 도와 국조(國祚)가 안태하게 하오. 이바라, 면복(冕服)을 들여라."

하셨다.

"상감마마. 마시옵소서."

숙주는 소리를 높여서 간하였다.

"아니. 아니"

상감은 고집하시며,

"어서 면복을 들여라."

하고 명하셨다. 그러나 그 어성은 퍽 약하셨다. 기운이 없 으시었다.

"상감마마. 아니되오. 신등이 죽기로써 아뢰오니 참으시옵 소서."

하는 숙주의 말에 다른 신하들도 다같이,

"아니 되오. 그리 아니 되오."

하고 다투었다.

"아니, 경등이 이럴 것이 아니오. 내 병이 심상치 아니해.

기운이 쇠하여서 진로(塵勞)가 시끄러우니 나는 죽기 전에 한가한 곳에서 마음이나 닦고 정양하고 싶어."

상감의 이마와 코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숙주는 그래도 듣지 아니하고,

"만일 옥체 미령하오신 연유로 한가하시게 쉬이시려 하오 시면, 환후 쾌복하시는 동안 일시 군국대사를 동궁마마께 맡기심은 가하오나 선위는 불가한 줄로 아뢰오."

하고 우겼다.

"아니. 나는 이제는 세속 일이 모두 시끄러워. 연전에 정 (汀──양정)이 나를 보고 한가한 자리에 물러앉아 편안히 지내라 하던 말이 고마워. 부질없이 정을 죽였어. 정은 나를 생각하고 말한 것인데, 정에게 무슨 죄가 있나, 정의 말은 충성에서 나온 말이었다. 경등이 나를 붙드는 것도 충성이 지마는 나를 놓아주는 것이 더욱 고마운 충성이야."

상감의 말씀은 마치 하소하심 같았다.

"정이 비록 불충한 마음으로 그러한 말씀을 아뢴 것이 아 니라 하옵더라도 신자로서 군부의 선위를 말함은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아뢰오."

숙주는 양정을 죽인 이유를 변명한 것이다. 양정이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서 상감께 뵈올 때에, 마침 신하들이 유교와 불교 다툼으로 상감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보고,

"상감마마,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 오."

를 탐하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소. 내가 인 정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소. 또는 나를 도와준 경들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다 아니오. 나는 이 사직을 위하여서 그리하였소. 내가 나서지 않고는 이 사직이 망할 것같이 생 각하여서 그리하였소. 이 나라를 한 번 좋은 나라를 만들어 볼까 하여서 그리하였소. 그러나 십사 년간 지낸 일을 돌아 보니 잘 하여 놓은 것은 별로 없고 남은 것이 오직 악업뿐 이오. 무서운 추억과 무서운 꿈뿐이오. 하나, 이제는 앞날이 업성. 내가 이 몸을 떠날 날이 왔소. 이제는 모든 일을 세자 와 경등에게 부탁하고 나는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겠소.

그렇지마는 내가 만일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서 수원 수 생(隨願受生)할 힘을 얻는다면 몇 번이고 더 사바세계에를 돌아오려오. 경들도 그때에 또 만나게 될 것을 믿소. 이바 라, 그 면복 들여라."

상감은 이렇게 최후의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이때에도 숙주와 제신들이 굳게 다투어서 중지하였 다.

"소신 등이 정성을 다하여서 사직과 종묘와 산천에 빌겠사 오니 그 동안만이라도 참으시옵소서."

숙주가 이렇게 눈물을 간청한 것이었다.

이날로 사직단과 종묘와 명산과 대천에 제관을 보내어서 상감의 병환이 나으시기를 빌었다. 궁중에서도 여러 절에 중사(中使)를 보내시와 기도를 올리게 하셨다.

남산의 목멱신사(木멱神祠)와 백악(白岳)의 백악신사(白岳 神祠)에도 늙은 무당과 젊은 무당을 모아서 큰 굿을 베풀었 다. 그리고 형조에 명하여 많은 죄인을 사하게 하셨다.

서울 백성들도 상감께서 병환이 침중하시다는 말을 듣고 모두 근심하고 혹은 절에, 혹은 신사에 나으시기를 기도하 는 이도 많았다.

첫 동궁이 돌아가신 이후로 오래 안 보이던 문종의 왕후와 노산이며 혜빈 양씨가 다시 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벌써 이십 년이나 된 일이건마는 현덕왕후 권씨의 모양이 꿈에 보이면 상감과 같이 장령이 세이신 어른으로도 모굴이 송연 함을 금할 수가 없으셨다.

현덕왕우 권씨는 아직 세자빈으로 겨우 스물네 살에 아드 님〔단종〕을 낳으신 지 이틀 만에 돌아가신 이이다.

"네가 죄 없는 내 아들을 죽였겠다."

하고 몸을 떨며 이를 가는 꿈이었다..

이 꿈은 상감이 임금이 되신 다음 해 겨울 어느날, 상감이 낮잠을 주무실 때에 처음 꾼 뒤로 그 동안 끊였다가 상감이 이번 병드신 때에 다시 꾸게 되신 것이었다.

첫 번 꿈을 꾸시고 놀라 깨시니 동궁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상감은 곧 명하여 소릉(昭陵──현덕왕 후능)을 파라 하셨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깨뜨리고 재궁 (梓宮)을 끌어내려 할 새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 두 이상하다 하여서 제문을 지어 제사를 드리니 비로소 재 궁이 들려 나왔다. 재궁을 땅 위에 내버려 나흘을 지낸 후 에 서일(庶人)의 예호 물가에 묻었다.

이때에 정부에서는,

"현덕왕후이 어미 아지(阿只)와 그 오라비 자신(自愼)이 모 반하여 베임을 당하고 또 그 아비도 추폐(追廢)하여 서인이 되었삽고 또 노산군이 득죄하와 군으로 강봉되었사온즉, 그 어미 오히려 명위(名位)를 가짐이 마땅치 아니하오니 추폐하 시와 서인을 삼으시와 다시 묻으소서."

하고 계하였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지하면 소릉이 패우기 며칠 전 밤중에 능으 로부터 그러면서도 상감은 아침나절에 정신이 쇄락하실 때에는 문 신들을 부르시와 주역, 시, 예기 같은 책들의 구결을 토론케 하시는 등, 일을 쉬이 심이 없으셨다.

이십팔일에 상감은 양성지(梁誠之), 구종직(丘從直), 정자영 (鄭自英)을 앞에 부르시와 종이 조각 하나를 보이시니 거기 는 상감 친필로 이렇게 써 있었다.

"■■■■■■■■■■■■■■■■■■■■■■■■■■■■■■ ■■■■■■■■■■■■■■■■■■■■■■■■■■■■■■■ ■■■■■ (사람마다 다 보이지 않는 아는 성이 있어, 보고 들으면 이 것이 발하니, 성이 발하는 것인가, 정이 발하는 것인가. 만 일 보고 들어서 발하지 아니할진댄, 끝이 발하지 아니하면 밑이 없으리니, 어찌 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어 온갖 일에 응한다 하느뇨. 또 어찌하여 이치가 여럿이요, 일이 많은고.

꿈에는 보는 바 듣는 바 없건마는 응하는 것이 이 뉘뇨.)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감이 근래에 자주 꾸시는 흉몽에 관하여 생각하 신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서 정자영은 고종(高宗)이 꿈에 부열(傅說)을 본 것이 어떤 등, 공자가 꿈에 주공(周公)을 본 것이 어떤 등 하고, 구종직은 꿈이 다 허망하다, 생각하는 바 꿈에 나 오나니, 생각이 본디 허망하매 꿈도 허망하다, 공종이나 공 자의 꿈도 다 허망하다고 논하였다.

그런즉 자영은 성인을 허망하다고 비방하였다 하여 들고 나서 종직도 제 주장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이 두 사람을 사사에 서로 반대편에 서는 것이었다. 종직은 불경을 잘 안 다고 자처하여 자영의 천박함을 웃고, 자영은 종직이 유가 이면서 불교로 상감께 아첨하는 것이라고 공박하였다. 이 두 사람은 당시 두 사상을 대표한 것이었다.

상감은 두 사람의 논쟁을 재미있게 들으시다가 거짓 노기 를 띠시고,

"너희들이 임금 앞에서 서로 다투니 마땅이 엄벌하리라."

하고 호령하시니 두 사람이 다 무서워 떨며 고두하였다.

상감은 벌로 두 사람에게 술을 내리시니 두 사람은 또 한 번 황공하였다.

"저마다 제가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저 와 같지 아니한 자를 배제(排?)하는 것은 세존도 금하시고 공부자도 금하신 것이야."

상감은 이렇게 두 젊은 학자를 타이르시고 이어서 사서 오 경( 書五經──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의 구결에 관하여서 상감이 친히 물으시니, 자영 은 또 상감의 뜻에 반대하였다. 그는 반대하는 것을 좋다고 아는 사람이요, 또 종직은 상감의 뜻을 지레짐작하여서 맞 추는 사람이었다. 상감은 이 두 사람의 논란을 들으며 빙그 레 웃으셨다. 최후원(崔灝元), 안효례(安孝禮)도 구종직과 같 이 상감의 뜻을 맞추는 사람이나, 이 두 사람은 해학을 잘 하고 시에 익고 또 음양술에 밝았다. 그들은 무엇에나 음양 오행을 말하고, 자축인묘 등 방위며 시각을 말하였다. 상감 은 그들의 말을 재미로 들으시나 거기 대하여서는 별로 믿 으시지는 아니하셨다.

"오늘은 머리를 인방으로 두시고 누으시는 것이 좋소."

"약물은 자방수를 사시에 길어서 미시에 약불을 피우시고 유시에 신방을 향하시와 다섯 모금에 잡수시는 것이 좋소."

"凡所有相皆是虛妄." (무릇 상이란 상은 다 허망하다) 함이나,

"觀一切法空如實相." (모든 것이 공임을 실상대로 보라) 함이나,

"靜觀, 幻觀, 寂觀."

이나 다 아는 듯하였건마는 정작 중병을 안고 죽음과 면대 하고 보니 그것을 알기만 한 것이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달으 셨다. 비로소,

"有知無行." (알음이 있고 행함이 없음) 의 슬픔과,

"正編知, 明所足."(바로 널리 알고 밝음의 행이 넉넉함) 이라는 것이 부처의 양족(兩足──둘 다 넉넉함)이라는 뜻 을 아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지났다, 이번 생의 끝은 가까웠다 하고 생각하면 괴로우셨다.

상감 불예(不豫)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오대산으로부터 달려 운 신미를 보시고 상감은,

"내 행이 부족하니 어찌하오?"

하는 걱정을 하실 때에, 신미는,

"상감마마 평생에 하신 일이 다 보살행이오."

하고 여쭈었다.

신미의 말에 상감은 약간 안심을 얻으셨으나, 그래도 사후 의 일이 염려가 되었다.

몸이 점점 쇠약하실수록 남는 것이 인생 행락의 그리움과 사후의 염려였다. 상감은 가끔 젊은 여자가 그리우셨다. 그 러한 때면 영순군에게 명하셔서 기생들을 부르시와 월인천 강지곡을 부르시게 하셨다. 음악에는 박연(朴堧)이 죽은 뒤 에는 영순군이 고작이었다.

영순군은 광평대군의 아드님으로 상감께는 친조카님이었 다. 그는 난 지 여섯 달만에 아버님 상을 당하고 조부 되시 는 세종대왕께서 친히 안아 기르시고 수복(壽福)이라는 아명 을 주시고 대군과 같은 예로 녹과 대우를 주셨다. 스물두 살에 다섯째로 등제하고 스물 다섯 살인 금년 봄 상감이 마 지막으로 온양 온천에 행행하셔서 과거를 뵈이실 때에 중시 (重試)호 장원이 되었다.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고 음악에 밝 고, 그러고도 단정하고 활달하여서 상감의 사랑을 받자옴이 컸다. 구성군 준과 아울러 상감이 가장 애중하시고 신임하 시는 종친이었다. 영순군도 혈연으로는 중부 되시는 상감을 친 아버지와 같이 사모하여서 상감이 환후 계실 때마다 그 뜻을 위로하여 드리기에 힘을 썼다.

"영순을 불러라."

상감은 적적하신 때와 괴로우신 때에 가끔 영순군을 부르 라시는 분부를 내리셨다.

영순군은 또 불도에 있어서도 상감의 뜻을 알아 드리는 사 람이었다.

영순군은 가장 얼굴이 아름다운 기생 여덟을 골라서 행궁 (行宮)인 효령대군저로 데리고 갔다.

상감은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영순군이 옴을 보시고 기뻐 하셨다.

밤이었다.

"월인천강지곡은 어떠하올지."

하고 영순군은 상감의 뜻을 여쭈었다.

"응. 그렇지 않아도 듣고 싶었다."

상감은 젊은 여자가 보고 싶다고는 아니하셨다.

"더 공부를 시키노라 하였사오나 어떠하온지."

영순군은 이렇게 삷고 물러나 정하에 대령하고 있던 기생 들을 불러들였다.

모든 것이 다 상감께는 슬픈 추억이었다.

'악인연이다.' 상감은 입맛을 다시셨다.

상감은 지나간 동안의 추억이 돌아오는 것을 억지로 막으 시고 아름다운 기생들의 모양과 소리를 생각하려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그 아름다운 기 생들의 분 바른 얼군과 아롱아롱한 옷들이 모두 송장고 k같 이, 또는 귀신들과 같이 요기롭고 무시무시하였다.

'환(幻), 환, 환,' (허깨비, 허깨비, 허깨비.) 상감은 억지로 웃으셨다.

'그래, 모두 다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야. 이 슬이요, 번개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상감은 당신의 땀 흐르는 몸을 생각하셨다. 썩을 날이 얼 마 아니 남은 몸. 목에서는 담이 끓어오르고, 입은 쓰고, 사 지는 쏙쏙 쑤셨다.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도 꿈.'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봐라. 향이 다 사위었으니 또 피워라."

협실에서 늙은 지밀나인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운 다.

"선선한 듯하오니 발을 걷고 창을 닫사오리까?"

"아니, 벌레 소리가 좋다."

"잠이 아니 드시면 또 누구를 부르올지?"

"아니, 혼자 있고 싶다."

나인은 고두하고 물러나갔다.

고요하다. 달빛을 받은 벌레 소리가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 욱 많았다. 상감은 경회룻가의 달빛과 벌레 소리도 생각하 셨다.

상감은 효령대군저에서 을산군(乙山君──처음에는 자산군) 저로 옮으셨다. 을산군은 돌아가신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둘 째 아드님으로 장차 성종대왕이라는 큰 임금이 되실 이였 다. 이제 열두 살. 상감은 밤 동안에 이 손자님 집으로 옮으 실 생각을 하신 것이었다.

대신들은 황궁하시기를 청하였으나 상감은 듣지 아니하셨 다.

상감은 미행으로 사린교를 타시고, 중정과 동궁도 역시 사 린교로 상감의 뒤를 따랐다.

행궁에 듭시어 을산군 부처의 배알을 받으셨다. 열두 산 된 을산군은 현록대부(顯祿大夫)의 조복으로, 열세 산 된 부 인 한씨도 그와 따랐다. 한씨는 돌아가신 세자빈 한씨의 아 우로 상당 부원군 한명회의 딸이다. 세자빈은 열일곱 살에 돌아가셨다.

상감은 을산군 부처의 절을 받으실 때에 깊이 만족하셨다.

을산군은 돌아가신 그 아버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상감은 웬일인지 맏 손자님 월산군(月山君)보다도 을산군을 사랑하 셨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나중에 우러산군이 양녕대군 모양으로 사양하고 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서 성종이 되 신 것이다.

상감은 을산군이 절을 하고 읍하고 선 것을 보시고 웃으시 며,

"요새에 무슨 글을 읽느냐?"

하고 물으셨다.

"논어를 읽나이다."

"활은 몇 방을 맞히나?"

"여섯을 맞혔나이다."

"오, 열방을 다 맞혀야지."

"명년이면 다 맞히리이다."

상감은 이 그림을 한 번 보실 생각이 난 것이었다. 인제는 그 그림을 보시더라도 가슴이 터질 듯하실 지경은 아닐 것 도 같았고, 또 을산군도 이제는 아버님의 화상이라도 뵈옵 고 낯을 익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다.

이윽고 그 화상이 왔다.

을산군 부처는 다시 관복, 명복을 갖추고, 또 동궁도 영순 군도, 신숙주도 다 예의를 갖추고 상감만은 탕건 갓, 도포로 차리시고 모두 엄숙하게 위의를 베푼 뒤에 의경사제의 화상 을 그린 족자를 펴서 벽에 걸었다.

상감은 제하고 일동은 화상을 향하여서 읍하는 것으로 예 를 하였다.

상감은 꿇어앉으시와 아드님의 화상을 바라보시었다. 보시 고 또 보실수록 상감은 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함을 느끼셨 다.

그림 속의 모양에도 맑은 기운이 보였다.

'어려서부터도 착하더니.' 상감은 이렇게 생각하신다.

상감의 눈앞에는 그 아드님의 어리시던 때 모양이며, 병들 어 고통하실 때 모양이며, 임종의 모양이 차례 없이 나타났 다. 의경세자가 돌아가신 집은 자핫골 본래 상감이 수양대 군으로 계실 때의 잠저였다. 상감은 임금의 몸으로서 몸소 세자의 병실에 거처를 같이 하시면서 밤낮으로 간병하셨다.

그처럼 상감은 애자지정이 깊으셨다. 지금에 이 정을 쏟으 시는 곳은 동궁과 을산군이었다. 상감은 오래 말이 없이 의 경세자의 화상만 보고 계시다가,

"수복아. 네 아비는 착하였더니라. 효성이 있고 자비심이 많았더니라. 네 아비는 비록 일찍 죽었으나 금생에 악한 일 을 한 것이 없고 불도를 잘 닦았으니, 그 복이 너희들게 올 줄 믿는다. 네 부디 아비를 기쁘게 하렸다."

하고 훈계하셨다.

수복은 을산군의 아명으로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이름이다.

을산군은 상감 앞에서 부복하여서 느껴울었다.

상감도 새로운 비감이 생기섰다. 이때에 수빈(粹嬪──의경 세자빈, 후에 인수왕비로 추존)이 월산군을 데리시고 오신 것이 상감의 비감을 더욱 도왔다. 수빈이 상감께 절하올 때 에 상감은,

"오, 의경의 화상이 저기 걸렸으니 보아라."

하시고 월산군을 향하셔서도,

"네 아비 화상을 보아라."

하셨다.

수빈은 화상을 대하자 낯빛이 변하였다. 터져 나오려는 울 음을 참지 못하셨다. 그가 스물한 살 적에 의경세자가 돌아 가신 것이었다. 아드님 두 분, 따님 한 분, 큰아드님이 월산 군, 작은아드님이 을산군, 따님이 명숙공주다. 인제 십이 년 만에 대하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수빈은 상감이시오, 시아버님의 앞이라, 힘써 참으셨으나 흐르는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빈은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이었다. 처음에 는 다만 수양대군의 아드님이 도원군(挑源君)의 부인으로 시 집을 가셨으나 열아홉 살 되시는 올해에는 세자빈으로 책봉 되시와 장차는 국모로 가장 높은 존경과 영화를 누리실 것 을 기약하셨던 것이다. 그러하였던 것이 불과 이 년에 스물 한 살의 몸으로 과부가 되시고 시동생 되시는 지금 동궁께 서 세자가 되시니 그 몸에서 난 아드님들도 임금의 자리에 오를 기약이 없어진 것이다. 앞으로 일 년이 못 하여서 그 작은아드님 을산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고, 당신은 인수 대비라는 존칭을 받게 될 줄은 신명밖에 알 이가 없다.

동궁은 그 형님이 돌아가실 때에 겨우 여덟 살이셨으므로 분명치는 아니하나 조각조각 형님의 기억이 있었다.

"이제, 그만 화상을 걷고 다 물러가거라."

상감은 이 슬픈 시간을 차마 더 오래 끌기가 어려우셨다.

더욱 홀며느님이신 정경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동은 화상 앞에 한 법 읍하였다. 수빈은 한 번 더 화상 을 바라보려 하셨으나 눈물이 가리워 잘 보이지 아니하였 다.

'나는 삼십이 넘었건만 동궁마마는 젊으신 그대로 계시다.' 하는 생각이 수빈의 가슴을 못 견디게 아프게 하였다.

이날에 상감은 임금으로부터서 한 사람으로 돌아오신 것 같았다.

상감은 남은 날을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고 싶으셨다. 그래 서 신숙주를 보시고,

"나를 창덕궁 후원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지어주오. 거기는 옛날 태조께오서 수도하시던 곳이야.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는지 모르지마는 거기 숨어서 한 세상을 보내려오."

이렇게 분부하셨다.

"경복궁으로 환궁을 하옵셔야지오."

숙주가 이렇게 여쭙는 것을 상감은 손을 흔들어 막으시고,

"아니, 나는 경복궁으로 아니 돌아갈 테야."

하셨다.

숙주는 상감이 경복궁으로 아니 돌아가신다 하는 뜻을 알 았다. 경복궁에는 여러 가지로 괴로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 다. 더욱이 문종대왕, 현덕왕후, 노산군, 혜빈 양씨, 성삼문,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등, 모두 피 흐르는 참혹한 기억들이 다. 상감의 흉한 꿈자리도 다 여기 관련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것을 무서워하랴."

하시던 기운도 줄고 몸과 마음이 약하세 되신 상감은 이러 한 추억이 있는 환경을 떠나고 싶으신 것이었다.

상감은 아직도 당신의 수명이 반달이 못 남은 줄은 아실 길이 없으셨다. 비록 병세가 심상치는 아니하더라도 아직도 몇 해는 더 사시려니 하신 것이었다. 더구나 상을 보는 자 들이, 당신이 태조와 기상이 같으시니 칠십을 넘기시기는 몰라도 환갑은 넘길 수 있는 것으로 속으로 생각하고 계셨 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에 조그마한 정사(精舍)를 지으시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시며, 불도 수양을 완성하자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야인 올적합(兀狄哈) 등이 경원(慶源), 온성(穩城), 회령(會 寧) 등지에 있는 올적합 등을 모아서 여러 길로 침입할 계 획이 있다고 하는 함길북도 절도사 김교(金嶠)의 장계가 있 은 밖에는 나라에는 별로 근심이 없었다.

"길주(吉州) 이북의 번상군사(番上軍士)의 친군위(親軍衛)를 발하고 또 함길남도 절도사로 하여금 영군(領軍)케 하여, 경 성(鏡城)부령(富寧)등처에 이르러 원병(援兵)이 되게 하여 라."

하신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정사를 못 보셨으니 이것이 팔 월 이십 팔일이었다.

생사(生死)의 경(境)[편집]

"각처 농형(農形)은 어떠하냐?"

상감은 병중에도 날마다 제신을 보시고 이런 말씀을 물으 셨다.

"삼남도 풍년이오."

"해서, 관서도 면흉은 되었소."

신하들은 이러한 말씀으로 신금을 편안케 하려고 애썼다.

구월 칠일 환후는 갑자기 더쳤다. 숨이 차고 몸에 부기도 있으셨다.

상감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시각이 가까운 줄을 의식하신 모양이어서, 아침 일찍이 중사를 보내시와 한계희를 부르셨 다.

한계희는 상감께서 극히 신임하는 한 사람으로 당시 벼슬 은 좌찬성 시강원 이사(左贊成侍講院貳師)여서 세자의 교육 을 맡았던 사람이다. 대대로 부귀한 집이면서 이 사람만은 극히 검소하여서 조석에 양식이 떨어지는 때조차 있었다.

그는 녹이 생기면 가난한 일가를 도와주고 저축함이 없었 다. 그의 재종제 한명회 기타 혁혁한 일문들이 모여서 문회 를 열고 동대문 밖 붙바위 밑 열 섬지기 논을 모아주었으나 받으려 아니하리만큼 청렴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물욕없 는 성격을 상감께서 사랑하시와 세자의 스승을 삼으신 것이 었다.

이날에 특히 계희를 부르심도 그에게 세자의 부육을 맡기 려 하심이었다.

계희는 소명을 받잡고 행궁으로 달려가 입시하였다.

상감의 목에는 가래가 끓어 호흡이 곤란하셨다.

"좌찬성 계희 입시오."

하는 말에 상감은 비로소 눈을 뜨셨다.

"서평(西平)"

하고 부르시는 모양이나 어음이 분명치 아니하였다. 서평 이란 계희의 군호다. 익대좌리공신 서평군(翊戴佐理功臣西平 君)이란 말이다.

상감은 말이 아니 나오는 것이 갑갑하신 듯이 낯을 찡기시 더니 한 손을 드시와 계희더러 가까이 오라 하시는 뜻을 표 하신다.

충성이 많은 계희는 눈물이 북받침을 누르면서 무릎을 미 끌어 상감이 누우신 곁으로 갔다.

상감은 또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 가래가 끓어올라 이루 지 못하였다.

상감은 다시 동궁을 향하시와 손을 흔드셨다.

동궁은 계희의 곁에 가까이 가서 엎드렸다.

상감은 겨우 가래를 돋구시고,

"평일아, 내가, 조훈조장(組訓條章) 같은 것을 지어서 너를 주려고 하였더니, 인제는 할 수 없이 되었어."

하시고는 또 숨이 막히셨다.

동궁과 계희의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 나 씻으려고도 아니하고 다만 다음 말씀이 내리시기만 기다 렸다.

이윽히 신고하신 뒤에 상감께서는 다시 입을 열으셨다.

"대강, 대개만을 할 테니 네가 받아써라."

한마디 한마디 힘있게 나오는 말씀이었다.

동궁은 몸소 연상을 들어다가 먹을 갈고 지필을 들었다.

"가르치시는 말씀을 받아쓰오리이다."

하는 동궁의 음성은 떨렸다.

"일왈(一曰)."

동궁은 "一曰."이라고 받아썼다.

"경천사신이오."

동궁은 "敬天事神."이라고 쓰셨다.

"이왈 봉선사효요."

"二曰奉先思孝."라고 받아쓰셨다.

"삼왈 절용애민이야."

동궁은 "三曰節用愛民."이라고 받아쓰셨다.

"다 썼느냐?"

"예."

"네 잊지 말고 그대로 하렷다."

"예."

"천이란 무엇인고?"

얼마 쉬이신 뒤에 이렇게 물으셨다.

"하늘이오."

"하늘이란 무엇인고?"

"불보살인 줄 아뢰오."

"오, 부처님이 천중천〔天中天〕이시니라."

"예."

"스승을 아비와 같이 알아라."

"예."

상감은 지금까지 말씀하시기에 대단히 힘이 드셨던 모양이 어서 이마와 코와 손등에까지 구슬땀이 흐르고 숨이 차서 가슴이 들먹들먹히셨다.

얼마 후에 상감은 다시 눈을 뜨셔서,

"서평."

하고 계희를 부르셨다.

"예."

"세자를 잘 도양(導揚)하오."

"예, 소신이 죽기까지는 견마지역을 다하오리이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시는 양을 보이시고는 또 잠잠하셨다.

한참 후에, 또 상감은,

"세자."

하고 부르셨다.

"예."

"사부(師傅)를 아비로 알렷다."

"예."

세자는 더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중전."

상감은 왕후를 부르셨다.

중전이 황망히 나오셨다.

상감은 눈을 뜨시와 왕후와 세자와 계희와 다 있음을 보시 고, 한 번 미소하시고,

"세자."

하고 부르셨다.

"예."

"대보(大寶)와 곤면(袞면)을 가져오너라."

"상감마마. 그 분부 거두시오."

세자는 울며 고두하였다.

"아니다. 어서 가져오너라."

"상감마마."

왕후가 또 말리려 하셨으나, 상감은,

"으 응."

하시고 귀찮으신 듯이 낯을 찡기시며,

"왕명과 부명을 거역하느냐?

하시고 어성을 높이셨다.

세자는 명대로 대보를 담은 궤와 곤면을 다음 상자를 가져 다가 엎드려서 상감의 손이 닿을 만한 자리에 놓으셨다.

상감은 일어나시려는 듯이 고개를 드시려 하였으나 못 하 시고 손을 드시어 대보를 드시와,

"받아라."

하셨다.

세자는 꿇어엎드린 채로 두 손을 들어 대보를 받으셨다.

상감은 이렇게 임금의 자리를 아느님께 전하신 것이다. 그 러나 이 아드님이 앞으로 일 년이 못 하여서 또 세상을 떠 나시고 그 대보가 어리신 을산군의 손에 받겨질 것을 아실 리는 없으셨다.

"나를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라."

상감은 세자께 전위하시자 곧 이 분부를 내리셨다. 임금이 민가에서 승하하심이 합당치 아니함을 생각하심이었다.

새 임금과 중신들은 상왕께 경복궁으로 가실 것을 주장하 였으나 상감은 듣지 아니하셨다.

그러면 차라리 을산군저에 머무르시기를 여쭈었으나, 그것 도 듣지 아니하시고 기어코 수강궁으로 옮으시고야 말으셨 다.

경각을 다투는 중태이시건마는 상왕은 소세하시고 머리도 빗으시고 망건을 쓰시고 검은 무명 도포를 입으시고 역시 짚신을 신으시고 탕건에 갓을 쓰시고 아무 병도 없으신 어 른같이 사린교를 타시고 가셨다.

새 임금께서 따라가시기를 원하셨으나,

"아들의 일보다 임금의 일이 크오."

하고 굳게 막으셨다.

새 임금은 눈물을 머금으시고 경복궁으로 가셨다. 이날에 즉위의 예식이 없을 수 없음이었다.

상왕께서 수강궁으로 옮으시고 세자궁이 즉위하셨단 말에 백성들은 모인 곳마다 세상이 어찌되나 하고 말들을 하였 다. 어리신 새 임금이 들어앉으시면 필시 한명회 일파의 한 씨가 권세를 잡으리라고 걱정한 것이다. 새 임금의 첫 번 짝이신 한명회 딸은 돌아가셨으나 새 임금의 왕후 되신 이 도 그 일가 한백륜의 딸이었다. 이러한 연고로 한씨가 권세 를 잡으리라 하는 것은 상상되기 쉬운 일이었다.

한명히는 탐재 호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 점에서 홍윤 성과 한쌍이었다.

뇌물짐이 문전에 끊일 사이가 없고 젊은 계집이 줄행랑에 그뜩찼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뉘집 딸이나 한 번 그 눈에 들고는 아니 빼앗기지 못한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는 제일 공신이기 때문에 상감(지금은 상왕이시다)께서는 그 의 일에는 눈을 감으셨다. 홍윤성에 대하여서도 그러하셨다.

이러한 한명회건마는 크신 임금의 위력에 눌려서 정사만은 악정을 못 하였건마는 자기 사위신 어리신 임금 밑에서 무 슨 일이야 못하랴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승려들은 호법대 왕을 여의게 됨을 걱정하였다. 새 임금은 아바마마의 뜻을 이으실 만도 하지마는 역시 한명회사 무서웠다. 명회는,

"도덕 문자은 내가 알 배 아니야."

이런 소리를 자랑 삼아서 하는 위인이다. 그는 계략을 좋 아하고 권세와 재물과 계집을 좋아한다. 그에게는 도덕도 없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신명도 없다. 이러한 인물이 정권 을 잡게 되면 반드시 불교를 탄압하리라고 걱정한 것인데, 그 걱정은 맞았다.

백성들에게나 승려들에게나 오직 하나 의지되는 것은 신숙 주였다. 그는 모난 사람이 아니요, 건전, 원만한 사람이었다.

한명회도 신숙주를 누를 생각을 못 하였고, 또 서로 인척간 으로 좋은 사이였다. 그러므로 신숙주가 건재한 동안 아무 리 한명회라도 큰 망발은 못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상왕이 수강궁으로 옮으셨단 말은 민간에서는 벌써 국상이 난 것이란 말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벌세 베값이 오르고 백 립을 사러 나서는 자도 있었다.

상감이 불예하시다 하여서 세 번이나 유죄(有罪)처분이 내 렸기 때문에 금부와 감옥은 거진 비었다. 오직 도적과 살인 죄인과 양반을 모멸하거나 상피 강간을 한 죄인들만이 나날 이 추워가는 늦은 가을에 흙방에 떨고 있었다.

수강궁으로 옮으신 상감마마는 무거운 짐을 벗으신 듯한 가쁜함을 느끼셨다. 인제는 임금이 아니시다. 군국 대사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도 없으시다. 취모멱자하고 호분석말하 는 문신들의 시끄러움도 이제부터는 없다. 옛 신하들이 때 로 문안은 올지언정, 말썽을 가지고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리신 아드님이 새로 임금이 되시와 어찌하여가노 하는 걱정이 크시나 상감은 그것을 모두 국운에 맡기시려 하였 다.

"그만 의관 끄르시고 편히 누우시겨오."

중전(이제는 대비시다)은 걱정스러운 듯이 상감(아직 상감 이라고 부르자)의 부석부석한 얼굴을 뵈옵고 아뢰었다.

"병이 다 가신 듯하오. 의관도 벗기 싫소. 이렇게 앉아서 우리 내외 이야기나 합시다."

상감은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누으셔서 말씀하시겨오."

"아니, 좀더 앉았다가. 내가 오늘 보각존자(普覺尊者──신 미)를 만나서 법설을 듣고 싶소. 인제는 내가 중을 만나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말썽부릴 사람 없어."

상감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빙그레 웃으셨다.

왕후는 상감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그렇게 중병 이신 어른이 갑자기 의관을 정제하고 앉으셔서 멀쩡하게 담 소하시는 양이 도리오 무시무시하였다. 목에 가래가 끓던 것도 없어진 듯하였다.

"보각존자를 여쭈오리까?"

왕후는 어찌할 줄을 모르시는 듯하였다.

"그러오. 그리고 보각존자 공양할 음식을 차리라 하오."

"예."

대답을 하시고도 왕후는 자리에서 일지 아니하신다.

"상감마마 의관 끄르시고 누우시겨오."

왕후는 한 번 더 아뢰인다.

"아니. 괜찮소. 나는 이대로 잠깐 참선을 하고 싶으니 혼자 있게 하오."

하시고 상감은 앉음앉음을 고치시와 반가부좌를 하신다.

왕후 윤씨는 일어나 두어 번 상감을 돌아보시고 나가신다.

상감은 두 손으로 석가여래 항마인을 지으시고 선정의 자세 를 지으신다.

'■■■■■■■■■■■■■■■■■■■■■■■■■■■■■■ ■■■■■■■■■ (내가 비임 알진댄 나를 헐 이 없구나. 내 있어 법 설함도 내 끊이지 못함이라.) 상감은 원각경의 이 구절을 생각하셨다.

다음 순간에, 상감은, '我本不有. 僧愛何由.' (내 본래 있지 아니하거니 밉고 닷음 어디서 생기리.) 하는 것을 생각하셨다. '닷음'이란 사랑함이란 뜻이다.

다음 순간에, '身心客■ . 從比永滅. 흥 몸과 마음이 다 뜬 먼지지, 그것 이 나는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셨다.

또 다음 순간에, '衆生壽命. 皆爲■想.' (중생의 목숨이 다 뜬 생각이라.) 이란 것이 생각나시고, 다음 순간에, '■■■■■■■■■■■■■■■■■■■■■■■■ (몸과 마음이 다 가리움이 됨을 알아, 지각함 없는 밝음이 모든 장애에 의지함이 없이, 길이 가리움 있고 가리움 없는 경계를 뛰어나.) 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또 다음 순간에, '■■■■■■■■■■■■■■■■■■■■■■■■■■■ (두려운 깨달음이 널리 비취어, 괴외하여 둘이 없는데, 그 속에 수없는 부처 세계들이 허깨비와 같이 어지러히 일어났 다가 어지러히 스러져, 바로 그것도 아니요, 그것을 떠남도 아니며, 얽힘도 아니요, 얽힘을 벗음도 아니니, 비로소 알괘 라, 중생이 본래 부처를 이뤘고 나고 죽고 열반함이 어젯밤 꿈과 같구나.) 하는 구절을 생각하실 때에 상감은 눈을 번히 뜨시고 웃으 셨다.

이때에 상감의 마음은, 구월 하늘과 같이 맑으셨다.

'遍滿法界.' (우주에 그뜩 차다.) 함을 이 순간에 느끼셨다.

이러한 원각경 구절들은 상감이 평생에 애송하시던 것이거 니와 이 순간에 새로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마치 어둡 던 방에 쌓고 쌓은 모든 보물을 한 번 불을 켜매 대번에 환 하게 보임과 같았다.

'諸佛世界. ■如空華. 난起난滅.

이라는 것과, '■■■■■■■■■■■■■■■■■■■■■■ 이라는 것을 소리를 내어서 외우셨다.

모든 병이 다 슬고, 몸이 가볍게 하늘에 날아오르는 것 같 음을 느끼셨다.

상감의 음성에 왕후는 놀라서 뛰어들어오셨다.

그러나 상감께서는 그린 듯이 앉아 계셨다. 숨조차 끊이신 듯하였다.

보각존자 신미가 왔다.

그는 들어오는 길로 상감 앞에 절하였다.

상감은 앉으신 대로 허리를 굽히시며,

"상인이 불배(不拜)의 몸으로 어찌 절을 하시오?"

하셨다.

"오늘 상왕마마 빛을 발하시오니 대법왕전에 절을 드리는 것이오."

신미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상감은 말씀이 없으셨다.

얼마 후에, 상감은 앉음앉음을 고치시며,

"내가 사대각리( 大各離──죽는다는 뜻)할 날이 얼마 아 니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내게 법을 들려주시오. 내 평생에 삼칠구애참회(三七求哀懺悔)만이라도 하려고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못 얻었소."

하셨다. 어음이 약하셨으나 알아들을 만은 하였다. 대단히 피로하신 모양을 보이셨다.

"여래께오서 벌써 법을 설하셨사오니, 산승이 무슨 법을 또 설하리이까."

하고 신미는 합장 명목하고 큰소리로,

"마하반야바라미(摩何般若波羅蜜).

할 뿐이었다.

상감은 그만 기진하셔서 옆으로 쓰러지셨다.

신미는 상감의 몸을 안고 왕후는 갓을 벗겨드려 자리에 누 우시게 하였다.

상감은 주무시는 듯하였다.

얼마 후에 신숙주와 영의정 구성군 준이 왔다. 두 사람은 상감의 옆에 엎드려,

"신숙주 아뢰오."

"영의정 신준이 아뢰오."

하였으나 상감은 못 들으시는 모양이었다.

숙주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암연하였다.

준은 끓어앉은 대로 한 걸음 더 상감 곁으로 다가와서,

"상감마마. 상왕마마께 아뢰오. 구성군 준이 아뢰오. 주상 전하 즉위례 무사히 행하온 줄로 상왕마마께 아뢰이라 전교 계시와 입시하였소."

하고 큰 음성으로 아뢰었다.

그러고는 숙주와 준은 고개를 뽑아 상감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상감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시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기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신미는 염주를 넘기며 들릴락말락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이 어른은 다시 정신을 차리신 일 없이 그 이튿날인 구월 칠일에 승하하셨다. 수 오십이. 재위 십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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