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사람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을 생각이 나는 법이다. 더우기 나와 같이 一生[일생]을 不幸[불행] 속에서 온 사람은 그러하다.

『에라 죽어 버리자. 죽어 버리면 고만일 것을 내가 왜 이 고생을 해!』

하고 어떻게 하면 얼른 죽어버릴까 하고 죽을 방법을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무슨 일이 하나 생겨서 도로 살기를 작정하게 되는 법이다. 그 일이란 항용 대수롭지 아니한 법이다. 혹은 말 한 마디에 지나지 못하는 수도, 혹은 손을 한번 만져 주는 것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죽으려는 사람의 무서운 결심을 변하게 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가령, 요새에 흔히 있는 일 모양으로 漢江鐵橋[한강철교]에 빠져 죽으려 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든지 그 사람을 껴안고 뺨을 한번 마주 비벼 보라. 그러면 당장에 그 사람의 죽을 마음이 스러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정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다. 사람의 목숨은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 죽으려는 이에게 사랑을 주라는 그는 곧 살아 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열 한 살 적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들과 나와 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 가셨지마는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 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하루는 저녁 지을 나무가 떨어졌기로 나는 낫과 새끼 한 바람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陰曆[음력] 九月[구월]이다. 풀이 다 늙어서 베어만 오면 곧 아궁이에 넣을 수가 있었다. 나는 서투른 솜씨로 불 잘 붙을 만한 풀을 골라 가면서 베었다. 이왕이니 내일 하루 때일 것까지도 베어 가지고 간다고 해가 저물도록 풀을 베어서 두어 단 거리나 되었을 적에, 낫이 어떤 나무 뿌리에 미끌어지면서 풀을 쥐었던 왼손無名指[무명지] 세째 마디를 썩 들여 베었다. 선뜩하기로 손을 쳐들어 보니 빨간 피가 수루루 흘러 내린다. 나는 웬 일인지 갑자기 설움이 나서 오른손에 들었던 낫을 집어 팽개를 치고 그 자리에 펄석 주저앉아서 울었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내 몸에 있는 피가 죄다 눈물이 되어버린 것같이 울었다. 울다가 눈을 떠 보면 손가락에서는 점점 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그것을 보고는 더욱 설움이 나서 울었다. 이렇게 해 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있을 때에 누가 등 뒤에서 한 팔로 껴안으며 그 입을 내 입술에 마주 댈이만큼 가까이 대이고,

『아이고 가엾어라, 너 왜 여기 앉아서 이렇게 우니? 父母[부모] 생각이 나서 그러니?』

하기로, 나는 피가 흐르는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라며,

『에그머니, 이게 웬 일이야!』

하고 피 흐르는 내 손가락을 자기 입으로 빨았다. 그의 입술에는 피가 묻었다.

『입에 피.』

하고,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 女人[여인]은 허리를 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베어 놓은 풀과 끝을 땅에 박고 직굽어선 낫을 보고, 내 손가락이 베어진 까닭을 안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부리나케 풀 속으로 돌아 다니면서 쑥솜(쑥대에 붙은 솜 같은 것)을 뜯어다가 내 손가락에 대고, 싸매일 것이 없어서 한참 어쩔 줄을 모르더니 입으로 자기의 치맛고름을 찍 찢어서 꼭꼭 싸매었다. 다 싸매기도 전에 하얀 치맛고름 헝겊에는 주홍빛으로 피가 내어 비치인다. 그리고는 그 여인이 또 한 번 내 목을 껴안고 뺨을 제 뺨에 비비며 여러 가지로 위로하는 말을 하고는 눈물에 젖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서,

『자, 집으로 가요, 어두웠으니…… 울지 말아요. 초년 고생을 해야 크게 된다. 울지 말어.』

하고는, 마치 어머니가 귀여움에 못견디어 무릎 위에 앉은 어린 자식에게 하는 모양으로, 나를 한번 더 꼭 껴안고 바르르 떨며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 여인이 내 몸을 놓기를 기다려 벌떡 일어나서 풀단을 둘러메고 낫을 들고 집을 향하고 뛰어 내려왔다. 얼마를 오다가 뒤를 돌아본즉 그 여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돌아보는 것을 보고 손을 혀긴다. 또 내가 얼마를 더 내려가다가 돌아본즉 그 여인은 어스름한 산 그늘로 가물가물 걸어 가는 것이 보인다.

집에 돌아 오니 어린 누이들이 대문 밖에 나서서 울고 섰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 가서 지금 해 온 나무로 밥을 지어 누이들과 같이 부뚜막에 앉아서 먹으면서 그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기운을 얻어서 언제까지든지 살리라, 힘있게 살리라 하였다.

그 여인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내가 누군지를 알았던 모양이나, 나는 그가 누군지를 몰랐다. 그후에도 만난 일이 없다. 그가 잘해야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먹었을 듯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음 것이나 아아 모르는 여인이여, 하늘의 복이 당신 위에 내릴지어다.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