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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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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편집]

“저게 그 배가 아닐까요?”

프로펠라의 요란한 음향 때문에 힘껏 고함지르지 않으면 상대 쪽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미스 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안 군은 망원경의 부리를 돌렸다.

창망한 바다 저편 수평선 위에는 무슨 약간 빛 다른 물건이 보인다.

미스 영은 비행사에게 그쪽으로 향하기를 명하였다.

사십만 원에 가까운 거액의 공채를 실은 이 비행기는 황해 바다를 상해로 향하여 전속력으로 날고 있었다.

“안 선생.”

“네?”

“하루 더 기다려 볼걸… 그이 혼자 버려 두고 다른 동지들만 다─.”

적적하였다.

그이가 남아 있다는 것은 경찰에 붙들리기 위해서인지라 가슴 아팠다.

“언제나 상봉케 될는지….”

“미스 영, 제 생각 같아서는 곧 상봉케 되리라고 봅니다. 서 선생님께서 조선서 무슨 죄를 범하셨읍니까? 미스 영께 위탁해서 이 공채를 가져오게 한 것뿐인데 그건 증거가 없는 일이 아니오니까? 일간 다시 상봉케 되리라고 저는 단단히 믿습니다.”

비행기는 미스 영의 지시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얼마 가까워지면서 보매 아까 보이던 창망한 바다 위에 보이던 한 점의 이상물은 분명한 배였다.

비행기는 그 배의 위에까지 이르러서 배를 두고 두어 번 공중을 선회하였다. 그러매 그 배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모두 갑판에 나서서 비행기를 향하여 손수건을 두른다.

동지들의 배임이 틀림이 없다.

그들은 지금 이 비행기 위에 서 박사가 타고 있는 줄 알고 저렇게 기뻐서 손수건들을 흔들겠지?

일에 착오가 생겨서 서 박사는 경계망을 뚫고 나오지를 못하고 지금 하릴없이 경성 안에 배회하고 있는 줄 알면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슬퍼들 하랴.

“저공 비행.”

미스 영은 비행사에게 명하였다. 비행기는 차차 아래로 내려갔다. 겨우 배의 돛 조금 위를 넘을 만치 높은 곳에서 그 배를 뱅뱅 돌았다.

“서 박사!”

“선생님!”

프로펠라의 요란한 소리를 덮어 누르며 이런 환성도 들린다. 배 갑판에 보이는 몇 사람의 여성─ 그 가운데는 서 박사의 누님이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를 빙빙 돌 동안 미스 영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보였다.

한 마디 전해 주고 싶었다. 서 박사는 일에 착오가 생겨서 범의 굴에 그냥 머물러 있고 목적물만은 틀림없이 비행기에 실었노라고 한 마디만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함을 지른대야 소리는 배에까지 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쯤은 붙들렸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그냥 숨어다니나? 혹은 요행히 어떻게 그 마도를 벗어나게라도 되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스 영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 갈 뿐이었다.

“인젠 제 길로.”

저공 비행도 끝이 없으므로 미스 영은 비행기를 직로 상해로 향하기를 명하였다.

이 수심과 근심과 중대한 사명과 거액의 보화를 실은 비행기는 동지들의 배 위를 떠나서 멀리 멀리 수평선을 넘어서….

LC당을 검거한 날 밤 경찰서 문밖 어둑신한 곳에서 서인준의 일격을 받고 넘어졌던 필호는 이삼 분이 지나서 피어났다.

인제를 하릴이 없었다. 그는 들어가서 주임을 조용히 만나서 백작 댁을 습격하였다는 여인은 미세스 매켄지로서 LC당의 최고 고문의 한 사람이라는 점과 그 미세스 매켄지와 서인준 새에 밀접한 연락이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이번 윤 백작 댁을 습격한 LC당원인 미세스 매켄지가 아니라 서인준의 친구인 미세스 메켄지인 듯하니 미세스 매켄지에 대한 수배와 동시에 서인준이도 지명수배를 하기를 원하였다.

법을 보호하는 경찰관의 한 사람으로서 서인준의 범죄를 그냥 눈감을 수가 없었다. 서인준이가 아까 필호의 요구대로 매켄지 부인의 있는 곳을 알으켜 주어서 그 공채만 윤 백작 댁에 돌아간다면 사사 정의로써 눈감아 버리려하여보았지만 서인준 측에서 매켄지 부인을 절대로 옹호하는 이상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밤도 많은 경관을 지휘하여 LC당을 모조리 잡아 낸 서인준이라 경관 가운데도 서인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죄 서인준이를 잡으러 떨쳐 나섰다.

필호가 드디어 어떤 길목에서 서인준이를 발견하였다. 필호로서 조금 성급한 사람이었더면 달려가서 곧 인준이를 포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호는 자기의 뛰노는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인준이의 뒤를 밟기로 하였다. 필호의 마음은 아직도 서인준이를 잡는 것보다도 매켄지 부인을 발견하여 공채만 무사히 들리게 하고 싶었다. 인준이의 뒤를 밟노라면 매켄지 부인과 회견을 하는 때를 붙들지도 알 수 없으므로….

필호는 밤새도록 인준이의 뒤를 밟았다. 인준이는 정신잃은 사람 모양으로 방향없이 좁은 골목골목을 허투루 꿰어다니는 것이었다.

날이 새기까지 인준이는 아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골목골목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은 뒤에야 어떤 중국 목간탕에 들어갔다.

필호도 가끔 다니는 목간탕이라 그 주인도 잘 알았다. 그래서 필호는 주인을 불러 내어서 자기가 들어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목간탕에서도 인준이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물에 들어갔다가는 나와서 쉬고 다시 들어가고─ 이런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가끔 가다가 하인에게 신문 호외가 안 났느냐고 묻고 하는 것을 들었다.

필호는 눈치채었다. 즉시로 주인에게 연필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서인준이는 자기가 감시 중이며 매켄지 부인은 벌써 어젯밤 즉시로 서울을 벗어난 듯싶으니 부산 신의주 기타 각 항구에 엄중히 수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의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목욕탕 사환에게 시켜서 경찰서까지 보냈다.

저녁때야 인준이는 목욕탕 집을 나왔다. 필호도 역시 멀리서 뒤를 밟았다.

어떤 음식점에 들어가서 저녁을 사 먹는 모양이었다. 필호는 틀키기 않을 만치 멀리서 인준이의 동정만 엿보고 있었다.

저녁을 다 먹은 뒤에 음식점을 나와서 길을 가는 인준이를 필호는 그냥 뒤를 밟았다.

인준이의 피아노 강습소까지 이르렀다. 인준이는 그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

빈집에 무얼 하러 들어가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필호도 살짝 대문 안에 들어섰다. 발소리를 감추고 뜰에까지 들어섰다.

인준이는 피아노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었다. 우두커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피아노를 두드렸다.

C샵 단음계의 알레그로였다. 필호는 망연히 그 피아노의 울림을 듣고 있었다.

자기는 잡히지 않으리라는 무슨 자신을 가지고 있나? 혹은 잡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나? 명랑한 음계─ 그것은 무거운 가슴의 주인으로서는 도저히 듣지 못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 강습소에 몰래나 들어온다면 모를 일이려니와 들어와서 피아노까지 두드리는 것은 ‘내가 여기 있노라’고 광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미친 사람의 짓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울려 나오는 명랑한 음계─

한참을 피아노를 두드리고 난 뒤에는 대청에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하는가 하고 필호가 가까이 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매 잠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필호는 인준이를 공식으로 만나 보려 마음먹었다. 신을 벗고 덥석 마루에 올라서면서

“이필호올시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고 물었다. 권총이라도 놓으면 피할 방비를 하면서… 그랬더니 안에서는 의외에도 명랑한 음성으로

“어서 들어오시오.”

한다.

필호는 쑥 문안에 들어섰다. 인준이의 표정은 그래도 움직임이 없었다.

“매켄지 부인은?”

필호는 들어서면서 물었다.

“상해로 비행기로─ 아마 인젠 도착했으리다.”

무얼? 너무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공채는?”

“가지고─.”

“가지고? LC당원의 자격으로입니까? 혹은 선생님의?”

“미세스 서의 자격으로.. 미세스 매켄지라는 사람은 본시부터 존재해 있지 않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미스 영─ 박영애 조선 사람.”

필호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잠시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 공, 어젯밤은 미안하외다. 미스 영을 잠깐 지급히 만나야겠는데 이 공이 계셨다가는 불가능하고 해서 그런 짓을 했소이다. 미안하외다.”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마는 오늘 저는 선생님을 경찰서로 모시고 가러 왔는데요.”

“나도 그래서 이 공을 기다리던 참이외다. 같은 값이면 이 공이 공로자가 되는 것이 내게도 유쾌하니까….”

“선생님,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직책이올시다.”

“이 공, 서인준 체포의 공로자는 이 공이지만 좀 미안한 점은 아마 나는 불기소나 면소가 되리다. 증거가 없어서…. 인준이는 동지들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서 백작 댁의 공채를 훔쳐내려다가 훔쳐내지 못하고 그 대신 LC당 검거에만 조력을 했다. 서인준이가 엿보던 공채는 LC당 최고 고문의 한 사람 되는 미세스 매켄지가 훔쳐 가지고 비행기로 도망쳐 버렸다. 서인준이는 닭 쫓던 개 모양이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이 이상 밖에는 되지 않을 게 아니오? 이 공도 오래 경찰계에 계셔서 짐작이 가겠지만 이 밖에 내가 표면상 어떤 범죄를 했소이까?”

태연히 이런 소리를 하는 인준이를 필호는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서인준과 매켄지 부인과의 밀정한 연락이 입증되지 않는 한에서는 서인준 자신만 부인해 버리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장래 일은 법관이 맡으려니와 좌우간 저는 제 직책상 선생님을 경찰서까지 모시고 가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그러시오.”

이리하여 이필호는 드디어 서인준이와 경찰서로 동행을 했다.

이튿날 신문에 이 사건이 또한 굉장히 보도되었다.

경찰서에서 서인준이는 전면적으로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다.

─ 자기가 무슨 뜻을 품고 조선에 들어왔었는지 그것은 문제 삼을 바가 아니다. 혹은 국법에 저촉되는 일을 할 목적으로 들어왔었는지도 알 수 없다.

─ 그러나 들어와 보매 자기의 방해자가 있었다. LC당이라는 세계적의 깽단이었다. 자기가 하려던 일을 곱다랗게 수행하려면 먼저 LC당을 없이해 버리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

─ 자기는 경찰에 조력을 해서 LC당 잔멸에 힘썼다. LC당을 다 없이 해 버린 뒤에 자기의 목적했던 일을 착수할 예정이었다.

─ 그런데 LC당과 싸우는 동안 그만 시기를 놓쳐 버려서 자기의 목적했던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당원들을 모두 인솔하고 상해로 돌아가려고 방침을 고치었다.

─ 그러나 무위히 상해로 돌아가느니보다는 귀국하였던 기회에 자기의 선물로 LC당을 철저히 없이해 버리고 돌아가려고 자기 당원들만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남아 있었다.

─ 최후의 순간 조선에 잠입한 LC당원 전부를 잡아내는 그 순간 LC당의 최고 고문의 한 사람인 매켄지 부인을 그만 놓쳐 버렸다. 놓쳐 버렸다기보다 (매켄지 부인과는 상해서부터 안면이 있던 처지라) 눈감아 주었다. 눈감아 주었더니 그 부인은 어느 틈엔가 윤 백작 댁에 가서 그 집에 있는 거액의 외국 공채를 강탈해 가지고 도망쳤다.

─ 인제는 조선 땅 안에는 LC당원도 없고 따라서 자기의 할 일도 없으므로 금명간 다시 향하여 출발하려던 중 별안간 구인을 당했다.

…이것이 인준이의 변명을 겸한 답변이었다.

이 인준이의 답변을 번복시킬 만한 반증이 없었다. 그리고 번복시킬 만한 반증이 없는 이상에는 예심에도 회부될 것이 없었다. 검사국에서 그냥 불기소 처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형무소에서 석방이 되던 날 저녁이었다.

인준이와 필호는 함께 정거장에 나왔다. 인준이가 상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공.”

“네!”

“법망이 성글거든. 그 틈으로 새려면 얼마든지 샐 수가 있어. 그 대신 내 덕으로 LC당이라는 괴물을 잡아내고 그 공로는 이 공이 차지했으니깐 너무 섭섭하게 생각치 마십쇼.”

“그것보다도 미스 영의 관계에는 저도 깜짝 넘었읍니다.”

“인제 또 무슨 다른 계획을 꾸며 가지고 돌아올 터이니 그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넘지 않도록 하십쇼.”

“처음부터 이상히 생각했읍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공공히 국제열차로 조선에 들어오시는 것이 필시 이면에 무슨 큰 음모가 있는 것이어니 하기는 했읍니다. 그렇지만 윤 백작 댁에 그런 거액의 공채가 있는 줄은 몰라서 선생님 목적을 알아낼 수가 없어서 쩔쩔매었읍니다.”

“이다음 오게 되면 더 쩔쩔매게 하리다.”

봉천으로 가는 기차가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플랫폼에 들어와 닿았다.

인준이는 짐 한 짝을 들고 앞서서 기차에 올랐다.

필호도 인준의 짐 한 개를 뒤에서 올려 주었다.

“그게 벌써 언젠가. 선천서부터 경성까지 밤을 새워 가면서 함께 기차로 오던 날이….”

“글쎄요.”

“좌우간 고맙소이다. 누구 한 사람 전송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 공 혼자서….”

“천만에. 선생님, 이 뒤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은 단단히 악수를 하였다.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는 석별의 적적함이 넘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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