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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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집]

명랑한 아침─.

휘장 틈으로 햇빛이 방 안 여기저기를 물들일 때야 인준이는 침대에서 나왔다.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하고 휘장을 모두 열어젖힌 뒤에 자리옷 채로 세수를 하려고 돌아서던 그는 침대귀에 무슨 종이가 하나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서 뜯어 보았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았다. 그러나 본 뒤에 인준이는 멍하니 섰다.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스스로도 몸이 차차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윤 백작 집은 그대에게는 필요 없는 집. 이 뒤는 다니지 말기를 바람. 만약 이 경고에 어기는 때는 그대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을 예고함. LC’

이런 글이 영문으로 씌어 있는 종이였다.

인준이는 잠시 얼빠진 모양으로 이 종이를 굽어보고 있었다.

어디로?

누구가?

언제?

세 가지의 의문이 그의 마음에 일어났다.

잠잘 때는 반드시 문을 잠그고 그 열쇠를 문에 그냥 꽂은 채 자는 인준이였다. 인준이는 급히 문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문은 그냥 잠긴 채 열쇠는 그냥 꽂힌 채 변동이 없었다. 그러면 이 종이를 가진 괴한은 어디로 들어왔나.

누구? LC당의 일원이라는 것은 무론 틀림없는 짐작일 것이다. 그러나 LC당의 누구가 언제 들어왔나? 짐작도 허락치 않는 이 문제─ 인준이는 눈이 켱 하니 종이만 굽어보았다.

가령 그것이 바로 문안에 내려진 것이라면 어떻게 문틈으로 들어뜨렸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에서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인준이의 침대 뒤에 압정으로 꽂혀 있는 것이었다. 미심결로 확대경으로 압정과 종이를 보았지만 무론 지문(指紋)도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인준이는 자기와 표면으로 정면으로 대립케 된 LC당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윤 백작 집에 자기가 간 것은 권총 사건 직후의 아침과 어제─ 두 번밖에는 없었다. 권총 사건 직후에는 이필호의 행색으로 갔으니 문제도 안 될 것이다.

여기 LC당에서 싫게 여기는 것은 어제 완쇠를 만나 본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을 싫게 보아서 LC당에서는 자기에게 이런 경고를 하였을 것이다.

자기가 완쇠를 방문한 일을 벌써 알고 경고를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디로 언제 들어왔는지 알지도 못하게 감쪽같이 들어와서 경고문을 대담히도 침대에 붙여 놓고 돌아간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 두 가지의 놀라운 사건 때문에 잠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던 인준이는 문득 완쇠의 안위를 생각하였다. 자기는 인제 바야흐로 완쇠를 찾아서 좀 더 비밀의 열쇠를 얻으려던 길─ 이 세상에 완쇠 한 사람밖에는 그 비밀의 열쇠의 일단이나마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열쇠의 일단을 가진 완쇠는 무사하였나?

여기 생각이 및자 인준이는 지금껏 들고 있던 종이를 집어서 제 조끼에 집어넣은 뒤에 자리옷 채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방문 밖에 달린 인준의 우편함 안에는 편지며 그 새 배달된 신문 밖에 새로이 배달된 듯한 신문 호외가 꼬리를 내밀고 있었다.

인준이는 황망히 그 우편함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편지와 신문을 한 손에 뭉쳐 쥐고 도로 급히 방 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에 문에 쇠를 도로 잠글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새로 배달된 호외는 인준에게 어떤 사건을 말하였다.

편지며 신문을 모두 제쳐 놓고 인준이는 호외부터 먼저 폈다. 그러나 그 호외를 펴면서 제목을 보는 순간 인준이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하여졌다.

호외는 간단하였다. 노 윤 백작의 충복 완쇠가 어젯 저녁에 참살되었다 하는 것이었다. 검시의 결과, 새벽 두 시쯤. 흉행자가 어떤 인물이며, 목적이 무엇이며, 어디로 해서 침입했으며, 흉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 드디어 한 개의 피가 흘렀다.

인준이의 눈으로 보자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흉행자는 무론 LC당원일 것이다. 목적은 안쇠의 입을 봉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디로 해서 침입하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LC당이 범죄의 교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외의 다른 가치는 못 가지는 것으로서, 인준이의 해석으로 보자면 너무도 가련하고 참혹한 희생이었다. 호외를 읽기를 다하고 인준이는 전화실로 뛰어나왔다. 필호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침 인준이가 전화실로 갈 때에 아파트의 수위가 인준이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지금 찾으려는 필호에게서의 전화였다.

“박사세요?”

“네, 이 공이오?”

“호외 보셨지요?”

“호외뿐 아니라, 내게도 경고장이 왔소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 사건 때문이지요?”

“그런 모양이외다. 내게는 정식으로 LC라는 이름으로 윤 백작 댁 사건에 간섭치 말라는 경고가 왔소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장래의 일이고, 조선 경찰로서는 먼저 참살 범인을 검거해야 될 게 아니오?”

“네, 모르는 바가 아니올시다. 그렇지만 증거가 하나도 없고 일이 너무도 막연해서 그럽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중대한 사건입니다. 박사께서 잠간 여기까지 오셔서 보아 주시면 얼마나 다행일는지요.”

“이 공은 지금 현장에 계시오?”

“네.”

“그러나 내가 무슨 명목으로 갑니까? 조선 경찰 사무에 조선 경찰과는 대립 상태에 있는 내가 무슨 명목으로 뛰쳐듭니까?”

“학구(學究)로 연구가로 범죄 학자로, 박사의 입회가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는지 모르겠읍니다. 아까 수사과장께도 그런 말씀을 해보았더니, 와 줍시사고 청은 못하나마 와 주시기만 하면 기뻐할 모양입디다.”

전화기를 통하여 필호의 말을 듣는 동안, 인준이의 마음 차차 끌리었다. 자기의 장차의 플랜을 세울 필요상으로라도 그 자리에 입회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다행이랴? 더구나 저편에서 청하는 이상에는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도 그 사건에 호기심을 가졌더니만치 가 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소이다만….”

“그러면 수고스러우시지만 잠깐만 와 주세요. 경찰 자동차를 즉시 박사 계신 곳으로 보낼까요?”

“완쇠는 확실히 죽었읍니까?”

“신문에는 그렇게 발표케 했지만 아직 한두 시간은 캠플의 힘으로 더 살 가망이 있답니다.”

“그럼 자동차를 보내 주세요.”

이리하여 전화를 끊은 인준이는 급급히 세수를 하고 방으로 뛰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고 경찰 자동차가 오기를 기다리려 인준이가 제 아파트의 밖에 방금 나설 때에 인준이를 모시러 온 자동차가 이르렀다.

경관이 운전하는 자동차이므로 첫눈에 경찰 자동차인 줄 안 인준이는 서슴지 않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인준이를 실은 뒤에 자동차는 다시 온 길로 돌아섰다.

자동차가 현장에 이르매 제일 먼저 인준이를 맞은 사람이 이필호였다.

“미안합니다. 박사께는 직접 이해관계도 없는 일에….”

이런 인사말에 미소로써 대답하매 필호는 입을 인준이의 귀에 가까이 하고

“과장에게는 I Show 박사라고 소개했읍니다. 서인준 씨라고 소개하면 혹은 별다르게 생각치 않을까 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이것이 인준에게는 도로혀 다행이었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범죄 과학자에게 대하여 거기 입회하였던 경찰 관리들은 모두 경의를 표하였다.

“피해자는 아직 살아 있읍니까?”

인준이는 필호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지만 의식이 명료치 못할걸요.”

“그래도 좀 만나 보았으면….”

필호는 경찰의에게 달려갔다. 갔다가 즉시로 돌아왔다.

“캠플 주사를 방금 놓아서 조금 의식이 명료해졌다 합니다. 잠깐 만나 보시지요. 과장의 기대도 적지 않으니까….”

“그럼 가 봅시다.”

위독한 완쇠의 몸은 노백작의 침실 곁방에 놓여 있었다. 인준이는 손짓으로 경찰의를 물리치고 필호 한 사람만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갔다.

상처를 검분하기 위하여 웃몸은 벗겨 두었다. 인준이는 그 알몸의 가슴을 먼저 만져 보고 그 뒤에 옆구리를 보았다.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로 심장을 뚫은 것이었다.

“LC당의 행위가 분명하지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묻는 필호의 말에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인 뒤야 인준이는 필호에게까지 좀 멀리 가 있기를 눈짓하고 자기의 입을 완쇠의 귀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크지는 않으나마 뇌에까지 울릴 명료한 어조로 물었다.

“완쇠, 대답하게….”

“….”

“주가(主家)를 위해서 주가의 안위를 위해서 정직히 대답하게 봉덕이의 아들이지.”

완쇠의 눈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런 뒤에 약간 벌려졌다. 아니라는 뜻이 나타났다.

“아니라니 그럼 누군가? 자네 원수고 겸해서 또 대감의 원수 되는 흉한은 누군가?”

완쇠의 눈에는 고민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 고민은 결코 상처의 아픔 때문의 고민이 아니요 심적 고통 때문에 나오는 고통인 것임을 인준이는 보았다.

인준이는 잠시 그 눈을 굽어보았다. 굽어볼 동안 짐작이 갔다.

짐작이 간 뒤에는 이번에는 인준이의 얼굴에 도로혀 고민의 표정이 차차 농후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완쇠의 얼굴을 굽어보고 있다가 인준이는 발을 돌이켜서 필호의 기다리고 있는 데로 돌아왔다.

“이 공.”

“어떻습니까?”

“나는 한 개의 학도─ 실제의 경험이 없으면 알지 못하겠소이다. 게다가 완쇠도 정신이 몽롱해서 대답도 못하고 하니까 알 길이 없소이다. 다만─.”

인준이는 제 조끼의 주머니에서 아까 집어넣었던 LC당의 협박장을 꺼내어 필호에게 보였다─.

“LC당의 행동인 것뿐은 분명하외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 사건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협박장을 보내고 또 한편으로는 사건의 일부분을 아는 듯한 늙은 충복 완쇠의 입을 영구히 막아 버리기 위해서 이런 흉행을 했구료. LC당이 종내 마수를 움직이기 시작했소이다. 큰일이외다.”

인준이는 좀 과장되이 필호의 앞에서 한 번 몸을 떨어 보였다.

인준이는 필호와 함께 수사과장 앞에 가서 밤중에 자기에게 온 협박장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외에 인준이는 그 집에서 더 알아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필호며 다른 경찰관들은 모르지만 인준 자기 혼자는 위독한 완쇠의 눈의 표정으로써 어떤 짐작이 갔으므로 어름어름 그저 그 집을 피해 나오기를 위주하였다.

검사국이면 경찰에서 왔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사례를 들으면서 백작 댁을 나오려 할 때에 필호가 인준의 뒤를 따라왔다.

“박사 박사.”

“네?”

“같이 가십시다. 저도 고등계에 근무하느니만치 직접으로는 책임도 없고 하니까 같이 갑시다.”

“그럽시다.”

둘은 같이 그 집을 나섰다. 인준이도 어떤 필요한 한 사람의 보조자가 있으면 하던 때라 필호가 따라 나오는 것을 도로혀 다행이 여겼다.

나서서 대문 밖에서 인준이는 대문 밖 담장 이곳저곳을 자세히 검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필호를 오라고 손짓하였다.

필호가 달려가서 인준이의 가리키는 곳을 보매 거기는 누런 토필로─ 1140477─ No.1이라 적히어 있었다.

필호가 너무도 놀라서 입을 딱 벌릴 때에 인준이가 오히려 침착히 웃었다─.

“이 공 아시겠소?”

“….”

“백작 댁 안에 현재 LC당원이 있소이다. 경찰 관계자인지 검사국 관계자인지 혹은 하인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이 댁 안에 당원이 있어서 취조의 진행을 주목하고 있소이다. 미리부터 짐작은 했지만….”

이런 탐정소설과 같은 일에 처음 당한 필호는 어찌하여야 할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박사 그럼 들어가서 모두 신체검사를 할까요?”

“신체검사를 하면 증거를 가지고 있겠소.”

“그럼 여기서 지킬까요?”

인준이는 웃었다.

“여기서 이 공과 내가 지키고 있으면 당원이 나오다가도 슬며시 그저 지나가 버리지 눈치챌 듯싶습디까? 그보다 경관을 한 십여 명쯤 부르시오.”

“왜요.”

“글쎄.”

필호는 즉시 정복 경관 십여 명을 불러 왔다.

“이 공.”

“?”

“이 경관들에게 내가 지휘할 일이 있는데 그 지휘에 복종하도록 이 공이 좀 대신해서 명령해 주시오.”

필호는 거기 온 십여 명의 정복 순사에게 향해서 인준이의 지휘에 복종하기를 명하였다. 그 뒤에 인준이가 다시 필호에게 말하였다.

“이 공 이전 언젠가 이 공에게도 말한 듯싶소이다마는 이 1140477이라는 부호는 일에서 시작해서 칠까지 있어요. 그리고 지금쯤은 그 1140477─ No.7─ 에서는 LC당원의 한 사람이 백작 댁 내안의 취조 경과를 듣기 위해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외다. 그러니깐 순서대로 이 번호만 밟아 나아가면 당원 한 사람은 반드시 붙들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 둘이서는 그저 통행인인 체하고 천연덕스럽게 가다가 No.7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당원을 발견해서 경관들에게 알으키면 당원 한 사람은 체포할 수가 있을 게 아니요? 그렇게 해봅시다.”

이리하여 플랜은 섰다. 그 뒤에는 인준이는 발걸음을 조절해 가면서 필호와 함께 갔다. 정복 순사들은 길 반대쪽에 서로 관계없는 사람인 듯이 갔다.

No.2 No.3 No.4 이리하여 No.7에까지 이르러 보면 그 앞 전선대에 기대어서 웬 허스름한 청년 하나이 무심스러운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청년의 위아래를 살펴본 뒤에 인준이는 필호를 꾹 찔렀다. 필호는 길 건너편의 정복 순사들에게 신호를 하였다.

손쉽게 체포는 되었다. 정복 경관들이 와르르 하니 몰려올 때도 그 청년은 천연히 서 있었다. 팔을 붙들 때도 무슨 일이냐는 듯이 힘껏 힐난하는 눈자위로 쳐다볼 뿐이었다. 여러 경관이 달려들어서 결박을 지을 때야 비로소 좀 반항하였다.

“왜들 이러세요.”

그 대답을 인준이가 하였다. 인준이가 고요히 그 청년의 앞으로 가까이 가면서 체포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LC당의 제삼급 당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체포하는 것이외다. 윤 백작 댁 하인 완쇠 살해의 공범으로.”

청년은 비로소 눈을 굴려서 인준이를 보았다.

“노형이 서인준 씨구료.”

“그렇소.”

“서인준 씨에게도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 말을 최후로 청년은 경관들에게 끄을려갔다.

간 뒤에 남은 것은 인준이와 필호 두 사람뿐이었다.

“이 공.”

“네?”

“경관들에게 잘 호위해서 에워싸고 가도록 말하시오. 대개 LC당에서는 당원이 체포되면 그 입을 막기 위해서 체포된 사람을 죽이는 법이니까… 이 근처 어디서도 간부급의 사람이 감시를 하고 있으리다.”

필호는 달려가서 경관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 돌아왔다.

“박사.”

“네?”

“잠간 경찰서까지 가서 취조하는 장면을 구경 안 하시렵니까?”

보고 싶었다. 보고 경우에 의지해서는 묻고 싶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대한 일이 있었다. 인제 급히 누님을 만나 보아야겠다. 완쇠가 참살당한 데 대해서 누님(윤 백작 댁에 식모로 들어가 있는)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누구와 약속한 시간이 있어서….”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인준이는 막았다.

“이 공─.”

빙긋이 웃으면서…

“LC당원의 한 사람을 내 덕으로 체포하지 않았소? 그 뒤는 이 공께 맡깁니다. 잘 취조해 보십쇼. 내 생각 같아서는 입을 봉하고 아무 말도 안 하리라마는 입을 봉한 사람에게서 대답을 얻어 내는 것이 이 공의 임무니까 힘써 보십쇼. 나는 아직 조반도 먹지 못했고 조반보다도─.”

인준이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지금이 여덟 시 반인데 아홉 시에는 누구를 만나기를 약속했기 때문에.”

필호는 부족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LC당원이라 하는 적지 않은 물건을 손에 넣기는 하였지만 LC당원이라는 증거도 없고 더구나 완쇠 살해자의 공범이라는 증거가 없는 이 인물을 인준이의 노력이 없이 혼자서 처결하기는 매우 곤란한 듯하였다.

“이 공, 인제도 말씀드렸거니와 이 근처에는 LC당의 간부급의 인물이 필시 감시를 하고 있을 테니깐 조심해서 가시오. LC당원은 사람의 생명의 귀함을 모릅니다.”

그냥 주저하는 필호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인준이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인준이에게

“박사, 아직 1140477이라는 부호는 지우지 않았으니깐 지금 백작 댁 안에 있던 흉한이 그 부호를 따라서 여기까지 올지도 모르지 않겠읍니까? 그건 어쩝니까.”

고 그래도 미련이 있는 듯이 인준이를 끌으렬 때에 인준이는

“안 오리다. 제삼급─ 제삼급이라는 것은 No.7에서 기다리는 당원을 총칭하는 명칭인데 제삼급이 체포된 줄은 벌써 알았으리다.”

한 뒤에는 궐련 한 꼬치를 내어 붙여 물면서 필호에게 작별하고 인제 필호가 갈 반대쪽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필호도 할 수 없이 경찰서로 향하여 발을 떼었다.

필호와 작별을 하고 얼마 더 가지 않아서 인준이는

“서 선생님 서 선생님.”

하고 찾는 소리에 할끈 돌아보았다. 여자의 목소리요 독일말이므로 자기를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보기 전부터 짐작이 갔다.

보매 예기했던 바와 같이 미스 영이었다.

“미스 영.”

“네, 저올시다.”

“어떻게 이른 아침에.”

대개의 레디들이 화장을 하고 조반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하려면 몇 시쯤이야 될는지 짐작이 가는 인준이는 이 이른 아침에 길거리에 나온 미스 영에게 기이의 눈을 던졌다.

영은 간단히 변명하였다─.

“어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왔어요. 한데 선생님은 어떻게 벌써 나오셨읍니까?”

“일이 있어서 나왔읍니다.”

“저는 저 볼 일은 다 끝났는데 어디서 가시는지 함께 가실까요?”

예의상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중대하고 긴급한 일을 가진 인준이는 미스 영과 한가로운 산보는 계속할 형세가 못 되었다.

영이 눈치채었다. 맑은 눈을 치들어 인준이를 우러러보았다. 눈가에는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선생님 용서하세요. 잠깐만 용무(用務)를 연기하세요. 저는 선생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유쾌롭고 기쁜 시간이올시다.”

여기 대하여 무엇이라 대답할까. 인준이는 발로써 땅의 아스팔트를 두어 번 긁었다. 그리고 겨우 눈을 들었다.

“미세스 매켄지. (미스 영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만약 미스터 매켄지일 것 같으면 일생을 두고 천하만사를 다 저버리고 늘 미세스 매켄지의 발 앞에 꿇어앉아 있겠읍니다. 만약 미세스 매켄지.”

“미스 영이라 불러 주세요.”

“미스 영─ 미스 영 무론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서 선생님뿐은 저를 미스 영이라 불러 주세요.”

인준이는 머리를 가슴 깊이 묻었다. 차차 더욱 마음이 혼란해졌다. 과학자로서의 냉담과 냉정이 이 기괴한 여성 앞에서 눈녹듯 사라져 갔다.

잠시 뒤에야 인준이는 머리를 들었다.

“미스 영, 같이 가십시다. 내가 실례했습니다. 용무는 내일 보아도 그뿐 모레 보아도 그뿐.”

영의 눈이 빛났다. 기쁜 듯한 눈자위였다.

“그럼 저와 함께 산보를 해주시겠어요?”

“해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자는 말씀이외다─ 결과를 말하자면 마찬가지지만.”

“미안합니다.”

“그 대신 삼 분 동안만 허락해 주세요. 어디 잠간 전화를 걸고 오겠읍니다.”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으로는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싶으면서도 만나기만 하며 자연히 마음이 끌리는 이 괴상한 여자 미스 영을 기달리워 놓고 인준이는 그 근처 어떤 전화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전화로 불러낸 곳은 윤 백작 댁 객실이었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는 데로 상사람 모양으로 해서 식모 윤씨를 전화에 불러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였다.

전화를 끝내고 나오매 아까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으마고 한 미스 영이 그 집 (인준이가 전화를 얻어 쓴 집) 앞에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용무는 끝나셨읍니까?”

“연기를 했읍니다.”

“그럼 산보를 어디로 가실까요?”

“마음대로 가시고 싶은 곳으로?”

이리하여 인준이는 미스 영을 데리고 좌우간 조반을 먹기 위해서 H호텔로 택시를 몰았다.

서인준 박사와 미스 영은 H호텔에서 조반을 같이 하였다. 미스 영은 이미 조반을 먹은 뒤라 함께 식탁에 앉아서 과자와 차를 입에 댈 뿐이었다. 그 뒤에 그들은 산보를 하러 그 호텔을 나섰다.

둘이 다 경성의 지리에 서툰 사람이었다. 젊은 남녀가 산보를 하자면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택시를 몰아서 목멱산으로 올라가서 택시는 돌려보내고 어떤 자리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하여 앉았다.

목멱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성은 음침한 도시였다. 여기저기 두드러진 건물이 있고 자동차며 전차의 달아나는 모양이 보이기는 하나 그 기분으로 보아서 매우 음침한 도시였다.

인준이와 미스 영은 묵묵히 이 음침한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는 새에 인준이 머리에는 다시 이 정체모를 미스 영이라는 여인에게 대한 호기심과 추구심이 연하여 일어났다.

자기 말로 자기는 미세스라 하지만 그 눈찌 살결 태도 몸가짐─ 아무 데로 보아도 인준이의 눈에는 미스였다. 자기 말로 자기는 윤락된 여자노라 하지만 한때 임시 댄스 홀의 댄서로 있었던 과거를 가질 뿐 그 밖에는 윤락되었다는 점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홀로이 조선에 뛰쳐 들어온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인준이는 스스로 픽 웃었다. 이 여자가 혹은 LC당의 수령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보고 너무도 우스워서 픽 웃은 것이었다.

문득 인준이는 오른편 팔로써 이상한 감촉을 감각하였다. 보매 미스 영이 양손으로 인준이의 오른편 팔을 힘있게 잡은 것이었다. 그뿐더러 정열에 빛나는 눈을 인준이의 얼굴에 정면으로 부읏고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우러러 보았다.

“서 선생님.”

“네?”

“서 선생님.”

“왜 그러세요.”

“하나 여쭈어 보겠읍니다. 서 선생님 고향은 평양이시라지요? 무엇하러 조선 오셔서 경성에만 계셔요?”

질문이라기보다 정열에 불붙은 말씨였다.

인준이는 대답하였다.

“네 서울 좀 볼 일이 있읍니다.”

미스 영은 그냥 인준이의 팔을 잡은 채 눈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침묵한 뒤에 말을 또 계속하였다.

“평양은 언제 가세요?”

“글쎄올시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로다─ 인준이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눈을 푹 아래도 내려뜬 채 미스 영은 무엇에 고민하는 사람같이 연하여 발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또 말을 꺼내었다.

“선생님.”

“네?”

“상해는 다시 가십니까. 혹은 영구히 조선에 계실 작정이십니까?”

“다시 갑니다.”

“언제쯤요?”

“일만 끝나면 갑니다.”

또 침묵─

한참 뒤에 미스 영이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네?”

“일이란 어떤 일이오니까?”

인준이는 대답치 않고 영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미스 영이 질문의 형식을 바꾸었다─.

“선생님의 일이란 일본 법률이 허락하는 일이오니까. 혹은 법률이 금하는 일이오니까?”

너무도 기괴한 질문이었다. 이 기괴한 질문을 하는 괴상한 여인의 얼굴을 인준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굽어보았다.

그 인준이의 날카로운 눈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스 영은 눈을 푹 내려뜬 채 가만히 있었다.

“미스 영!”

“….”

“미스 영! 아니 미세스 매켄지!”

“선생님.”

영은 비로소 눈을 들었다. 눈물이 고여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윤기(潤氣)만이 띠운 눈이었다.

“선생님.”

“?”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무슨 약속이외까?”

“무슨 약속이라 묻지 마시고 무조건하고 약속해 주세요. 제가 부탁하는 일을 꼭 실행하시겠다는 약속을… 결코 선생님께 불리치 않게 하겠읍니다.”

우러러보는 미스 영의 눈을 인준이는 마주 굽어보았다. 성의와 정열에 불붙은 눈이었다.

아직 삼십 미만의 젊은이 미스 영에 머리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도리어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임무를 생각할 때는 무조건하고 미스 영의 말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미스 영.”

“무슨 말씀인지 들어 보고 약속할 수 있는 일이면 약속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약속 못하겠소이다.”

미스 영의 눈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실망의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세스 매켄지─ 미세스 매켄지.”

남에게 들릴까 말까 하도록 작은 소리로 두어 번 뇌어 보는 미스 영의 이 말은 스스로 자기를 비웃는 말임이 분명하였다. 그런 뒤에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선생님, 인젠 내려 가십시다."

“내려갑시다.”

인준이도 일어섰다.

“봄이라 하지만 적적한 봄이올시다그려.”

“….”

인준이와 미스 영은 산 아래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선생님.”

“….”

“왜 대답을 안 하세요? 무슨 제가 실례라도 했습니까.”

“아니올시다.”

“그럼 왜 대답을 안 하세요.”

“말씀하십쇼.”

그러나 인준의 마음은 아프고 괴로웠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듯하였다.

“선생님은 저 같은 변변치 않은 사람에게는 일도 없으시겠지만 저를 찾으실 일이 계시면 ○×× × 번으로 전화를 걸어 주세요.”

“….”

“그리고 선생님, 이상한 말씀을 물어서 선생님께 기괴한 의심을 살는지도 알 수 없읍니다마는 소문에 들으니까 상해서 들어온 이는 신변이 매우 위태하다니 몸조심하세요. 저는 상해서 왔다 해도 국적까지 영국인이고 남편이 영국 귀족이니까 아무 관계도 없겠지만 선생님은 몸조심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표면에 나타난 이외에 이면에 무슨 뜻이 잠재해 있는 듯한 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준이는 지금 머리가 너무도 산란키 때문에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거리까지 내려와서 미스 영은 무슨 화장품을 사겠다고 어떤 상점으로 들어가고 인준이는 상점에 들어가는 영과 작별하고 자기 아파트로 향하였다.

교통기관을 이용하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 돌아오면서 내내 인준이는 미스 영이라는 여인 때문에 머리를 썼다.

이해할 수 없는 여인─ 그 위에 무슨 기괴한 배경을 가졌는지도 알 수 없는 듯한 여인─ 그러면서도 자기에게는 결코 악의는 품지 않고 있는 여인─ 이 기괴한 여인 미스 영─ 미세스 매켄지는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복잡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인준이의 머리를 더 어지럽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면 인준이는 결코 미스 영을 역겹게 보거나 밉게 보기는 싫었다.

어지러운 머리로 아파트에 돌아오매 아파트에서도 또한 인준이의 골치를 쏘게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자기 방으로 향하여 들어가려 할 때에 수위가 인준이에게 편지를 한 장 주었다.

보매 영문 우편으로 온 것이 아니며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 누구가 가져온 것이냐고 물으니 수위의 대답은 알지 못할 노동자 같은 사람이 방금(일이 분 전에) 가져왔다 하며 그리고 이제라도 뛰어나가면 혹은 그 사람이 행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다.

그래서 인준이는 수위에게 뛰어나가서 그 사람이 보이거든 좀 불러다 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일변 봉투를 찢으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또 협박장이었다.

다시 경고하오.

윤 백작의 집 사건에 관계 마오. 당신도 우리 당의 힘은 알 줄 아니 다시 말치 않거니와 우리의 경고를 승복하는 것이 당신의 양책일 줄 아오.

우리가 당신을 해(害)하지 않는 것은 죽이지 ‘못’ 하여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사정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것이오. 그러나 당신의 간섭이 도(度)를 넘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다시는 윤 백작 집 사건에 간섭치 마시오.

인준이는 읽기를 끝냈다. 수위가 들어와서 ‘편지 가져온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벌써 보이지 않더라’는 보고를 하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서 있었다.

“서인준 씨 당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오.”

아까 경관의 손에 붙들리어 가던 LC당원이 인준이에게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 붙들리어 간 자는 제삼급 당원으로서 간부 계급이 아니매 그때의 그 말은 한 개 위협사로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편지는 무론 LC당 지휘자에게서 왔을 것이다. 밤중에 인준이의 침대 귀에 꽂아 놓고 간 편지는 아까 수사과장에게 주었는지라 똑똑히 알 수는 없으나, 같은 타이프라이터로 찍힌 편지인 듯싶었다. 아까 아침의 협박장에도 Y자가 모두 꼬리가 명료치 못해서 V자와 같은 느낌이 있던 기억이었는데 지금의 편지도 역시 Y자는 모두 꼬리가 명료치 못하였다. 그러면 아까의 편지와 이번의 편지는 모두 LC당의 간부에게서 나온 편지일 것이다.

협박은 협박이라 하거니와 인준이로 하여금 더욱 의아케 하는 것은, ‘당신의 목숨을 없이하려면 할 수가 있으되 특수한 사정으로 당분간 그냥 둔다.’

하는 그 언구였다.

무론 LC당에서 인준 한 사람쯤이나 죽여 버리려면 어려운 노릇이 아닐 것이다. 어제 밤중에도 감쪽같이 자기의 방에 들어와서 자기의 침대 귀에 편지를 꽂아 놓고 돌아간 그들이거니 그때에 인준이를 죽이기만 하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특수한 사정이란 무엇인가?

또 아무리 특수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인준이의 행동이 도수를 넘치면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협박문이 아니요 반드시 실행성을 가졌을 것이다.

이 여러 가지의 기괴한 일을 머리에 그려 보면서 인준이는 자기의 몸에 차차 가까워 오는 위험을 직각하였다. 사람의 생명의 존중함을 모르는 LC당원이 인제 바야흐로 자기와 정면으로 대립하려는 데 대한 비상한 위험을 직각하였다. 그리고 아까 아침에 취한 자기의 행동이 실수이었음을 여기서 비로서 알았다. 창황중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한 것이었다. 좀더 냉정히 생각할 시간만 있었으면 그런 실수는 행치 않았을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형사 이필호와 동반하여 윤 백작 집에서 나오다가 ‘1140477 제일호’ 라는 부호을 발견했을 때 만약 냉정한 머리로 생각만 했더면 경관을 들어대어서 LC당원을 포박시킨다든가 그런 서툰 짓은 안했을 것이다. 이필호와 동반을 하여선 그렇지 않으면 자기 혼자선 그 번호를 몰래 밟아서 No.7에서 괴청년을 발견하고 그 괴청년이 장차 어디로 가는지 그 뒤를 밟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괴청년의 뒤를 밟으면 반드시 LC당 제이급 당원의 거처하는 곳을 알아낼 수가 있고 그것을 알아내어 잘 감시하면 LC당 간부급의 경성 본거를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순서를 밟아야 할 자기어늘 성급히 이필호에게 의뢰하여 제삼급 당원을 포박케 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제사급이나 제삼급 당원쯤은 몇천 명 몇만 명을 잡는다 할지라도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은 이미 세계 각국의 경험한 바가 아니었던가?

인준이는 전화실로 갔다. 그리고 ×× 서에 전화를 걸어서 이필호를 불러내었다.

필호가 전화가 나왔다.

“서인준이외다.”

“네.”

“어떻게 되었읍니까?”

“일을 봉하고 한 마디도 안 합니다.”

“좀 때려도?”

“네.”

“완쇠는?”

“완쇠는 죽었읍니다.”

무론 그럴 것이다. 아직껏의 선례가 LC당원이 잡힌다 할지라도 입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암시도 없어요?”

“그저 벙글벙글 웃기만 해서 유치장에서 집어넣었는데 증거가 없으니까 어찌할지 여기서도 두통거리외다.”

인준이는 전화를 끊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그를 괴롭게 한 것은 아까의 처치의 실수였다. 그냥 몰래 뒤를 밟지 않고 경찰에 잡아넣었다는 커다란 실수가 가장 인준이의 마음을 불안케 하였다.

경찰에 자기의 일신의 보호를 청할까. LC당의 주의가 자기에게 집중되어서 자칫하다가는 자기의 생명에도 관계될지 알 수 없으니 좀 보호하여 달라고 구원을 청할까. 그러나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 자기의 생명은 도모될지 모르지만 자기의 임무는 허사로 돌아간다.

조선에 잠입해 있는 자기에 당원 전부를 소집해서 자기를 호위시킬까.

그러나 그것도 안 될 일이다. 지금 경찰에서는 자기 한 사람 밖에는 존재를 모른다. 경찰에서 알지 못하는 당원들을 소집해서 경찰에게 알린다 하는 것은 당의 간부된 자의 취할 행동이 아니다.

좌우간 자기에게 임박하려는 LC당의 박해를 피해 가면서 일변으로는 경찰의 눈을 속이면서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는 매우 힘든 노릇이다. 자기가 몸소 여기까지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자기에게도 좀 과한 것이다. 이 과한 짐을 곱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여간 노심초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더구나 그 후에 가령 희생자가 생긴다 하면 그 희생이 몸소 자기가 되려고 결심한 인준이는 동지들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커다란 책임까지 있는 것이다.

전화실에서 돌아온 인준이는 머리를 움켜 쥐고 침대에 넘어졌다.

인제 자기의 누님과 회견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그는 자기의 지혜를 다하여 인제 취할 방책을 세우고자 고심하였다.

완쇠도 이미 죽은 지금에 있어서는 누님 한 사람 밖에는 윤 백작 댁 내용을 알아볼 길이 끊어졌다.

인준이의 입장은 괴롭게 되었다. 연하여 기다란 한숨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까지 가서 인준이는 누님을 만났다.

“집안이 꽤 어지럽지요?”

“음 잠깐 틈을 내가지고 뛰어나왔네.”

다른 일은 말할 시간의 여유도 없을 것이다. 인준이는 곧 용건을 물었다─.

“집안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두선두선하지.”

“백작 노부인은?”

누님은 앞뒤를 살핀 뒤에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박사,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어젯밤에─ 밤 깊은 때 말씀이올시다. 집안에 무슨 수상한 인기척이라도 없었읍니까?”

“글쎄, 인기척이 있어서 내다보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데.”

“아니 보이고 안 보이고가 문제가 아니라 요컨대 인기척이 있었느냐 말씀이올시다.”

“인기척은 분명히 있었네.”

“내당에 말씀이지요?”

“그럼 내당.”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은 누님의 관찰안의 좌우로 판단될 문제지만 백작 노부인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말하자면 물론 불안한 태도겠지만 그 태도가 막연한 ‘집안의 흉변’에 대한 불안입디까 혹은 그 이상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듯싶습디까? 이것은 누님의 제6감이 가리키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여기 대해서 누님은 주저치 않고 대답하였다─.

“여보게, 박사. 이상한 일인데 노마님은 좀 더 무슨 사정을 아는 듯싶데.”

인준이는 눈을 감았다. 고르고 또 고른 끝에 중대한 임무를 넉넉히 치를 사람은 이 사람이라 선택되어 윤 백작 댁 일 년 전부터 들어가 있던 누님의 관찰이라 과히 틀린 관찰은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관찰로써 옳다 할진대 자기의 추측하였던 바와도 부합이 된다.

인준이는 다시 물었다.

“누님!”

“…….”

“완쇠가 피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내실에 들어온 것은 언제쯤이오니까?”

“하인들 새에는 새벽 여섯 시, 노마님의 귀에는 아침 아홉 시.”

“그 아홉 시 전의 노마님의 태도는?”

“그게 말일세 무슨 불길한 소문이 들어올 것을 예기하는 것같이 몹시 조마조마해 하데.”

“노마님의 방에는 어젯밤에는 누구와 같이 잤읍니까?”

“어제 따로 혼자 잤네.”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다. 그 배면에는 복잡한 사정이 분명히 복재하여 있다.

“윤찬두 씨는 매일 아침 어머님께 문안 들어옵니까?”

“그새는 늘 들어왔지만.”

“오늘은?”

“오늘은 양관에 중대한 사건이 생기니만치 안 들어왔어….”

“그 밖에 무슨 다른 점으로 누님께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 없읍디까?”

누님은 잠시 생각한 뒤에 없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누님 알았읍니다. 인젠 돌아가세요. 너무 오래 나와 계셨다가는 의심을 살지도 알 수 없고 하니 어서 돌아 가세요. 그리고 노부인의 일거일동을 엄중히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는 점이 있으면 곧 제게 통지해 주세요.”

물어보려던 일 알아보려던 일은 다 알아보았다. 누님과의 회견을 끝내고 도로 자기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서 인준이는 어떤 책방에 들러서 기차 시간표를 하나 사 가지고 왔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문을 잠근 뒤에 한참을 기차표를 가지고 이리저리 연구를 한 뒤에 밤이 벌써 열 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준이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오늘 밤으로 사람 몇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먼저 필호를 찾았다. 필호는 마침 자기 집에 있었다. 그 필호를 불러내어 가지고 인준이는 어떤 조용한 음식점으로 갔다.

“입을 꼭 봉하고 있지요?”

“네 한마디도 않습니다.”

몸을 수색하여도 아무 증거품도 없고 단지 어떤 전선대 앞에 서 있었다는 죄 밖에는 아까의 LC당원을 경찰에서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필호는 한탄하였다.

그의 입은 옷이 상해서 지은 것이며 1140477─ No.7의 앞에 서 있는 점으로 보아서 LC당의 제삼급 당원임은 분명하지만 물적으로는 아무 증거도 없으므로 아마 그냥 놓아 줄 수밖에는 도리가 없으리라고 필호는 탄식하였다.

“나도 그것이 근심돼서 이 공을 찾았소이다. 그때 우리 행동이 경솔했지요. 체포하지를 말고 뒤를 밟아서 본거를 알아내어야 할 것을 너무도 경솔히 처리했소이다.”

아무 증거도 없으니 석방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지나 석방된 뒤에 뒤를 밟아 보라는 당부를 하고 인준이는 필호와 작별하였다.

그 뒤에는 안(安)이라는 동지의 집을 찾았다. 뒤를 살피고 또 살펴서 자기를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안 뒤에 비로서 안의 집을 찾았다.

어떤 집 행랑방을 세내어 가지고 잡화 행상인을 가장하고 있는 안은 하루 진일의 시달린 몸을 겨우 좀 펴려던 때였다.

“아이구 선생님.”

“오늘 참변을 아셨겠지?”

“완쇠가 참살당한 일 말씀이지요?”

“네.”

“알았읍니다.”

“거기 대해서 좀 탐사해 볼 일이 있어서─.”

인준이는 소리를 낮추어 가지고 안 군에게 몇 가지의 일을 당부하였다.

안 군에게 당부할 일을 다 당부하고 인준이는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자기의 아파트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차차 깊어 가는 밤의 거리를 이리저리로 돌아다녔다. 아무 목적한 곳도 없었다. 열한 시가 지나고 열두 시가 지나고 새로 한시가 지나도록 그냥 거리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러다가 밤이 매우 깊어서 거리도 차차 조용해지기 시작한 뒤에야 인준이는 잠잘 곳을 준비할 채비를 대었다.

오늘따라 아파트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아직 공포라는 것을 맛본 일이 없는 인준이로되 오늘 밤만은 아파트로 돌아가기가 유난히도 싫었다.

밤이 꽤 깊어서야 인준이는 어떤 작다란 여관 하나를 찾아서 거기 몸을 눕혔다. 숙박계를 들고 들어온 하인에게 향하여 기차 시간이 있어서 내일 새벽 일찍이 떠날 터이니 숙박료를 미리 받아 두라고 하고 세음을 치렀다. 그리고 혹은 아무도 아직 깨기 전에 떠날지도 모르니 쪽대문이 어디쯤 달렸는지 알으켜 달라 해서 하인의 인도로써 쪽대문까지 다 알아 본 뒤에야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자리 속에 들어간 인준이는 꽤 벌써 몸이 피곤할 때라 몇 가지의 생각이 몽롱히 머리에 왕래한 뒤에는 잠의 나라에 빠졌다.

이른 새벽에 떠나려고 마음먹고 자는 인준이라 그 불안 때문에 몇 번을 깨어서 시계를 보고 다시 자고 시계를 보고 다시 자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튿날 아직 날 밝기도 전에 소리 안 나게 그 집을 뛰쳐나와서 어젯밤에 알아 두었던 쪽대문을 가만히 열고 그 집을 나섰다.

거리까지 나오매 새벽 첫 전차가 웅 하니 지나갔다. 거기 몸을 실은 인준이는 십 분 뒤에 경성역 앞에서 전차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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