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제의 법칙
원문
[편집]弱肉强食과優勝劣敗는 果然움직일수없는鐵則인듯하다. 動植物의自然界를觀察하고 個人과國家의人類生活을詳考하야 이儼然한法則을發見할때에 强者는더욱 齒牙를가다듬어 覇業을向하야雀躍하려니와 弱子는 한갓失望과恐怖에 빠질수밖에別途가없었다. 때에 하나님의말슴이있으되 “몯은 골작이는 도두고, 뫼뿌리는 낮후리라”(이사야四十章四節), “교만한 눈은 낮후시나니라”(詩第十八篇二十七節)고. 무슨能力으로써 이일을執行하시는지 우리는알수없으나 그러나 事實은明白하다. 桑田이變하야 바다가 된다는것뿐만안이라 地質學者는 地形의輪廻說을唱하야 이에和應한다. 海底가隆起하야峻嶺이되고 幼年期 壯年期를經한高山은 老年期에入하야 準平原으로歸還한다고한다.
優勝劣敗의自然法則만이行하여진다면 埃及의파라오王權과 바빌론의네브갇네살의榮華는 永遠히隆盛하여야할것이엇다. 마는 “교만한눈은 낮후신다”. 秦始皇帝의萬里長城도 다만石堆에 지나지못하였고 獨逸國民의驕慢을象徵하는 카이젤의 수염도 드디어 한울을 거스려 자라지못할것을 깨다랏다. 獨逸의陸軍과 露西亞의騎兵보다더强한能力이存在함을 생각만하여도 떨리는事實이다. 世上에所謂無敵艦隊라는것이 種種出現하나 이는그나라海軍의成熟期를意味하는同時에 그凋落을表告하는前奏曲으로봄이 푸로그람을 보는法이될것이다. 數量의貧乏을念慮하며恐懼하는동안은 片隻의帆船이라도 能히 그疆域을安保하였으나 天下에無敵을標榜하는砲城의艦隊는 世上을요란케하고 내종에는 自國까지滅亡케하는羞辱을招致하고야말았다. 이는 그 ‘눈이 교만한’(High looks) 까닭이었다. 하나님은 仁慈하시사 몯은人間의허물을容赦하시기를 깃버하시나 오직 ‘교만한눈’을對하야서는 徹底히糺彈치않고는 마지안하신다. 교만한 눈을 낮후시는일은 特히 하나님의快心의 작난(이런말을許한다면)이신것같다. 故로優勝劣敗의法則을 宇宙間에許하시면서도, 때때로劣勝優敗의法則을執行하신다. 過去의歷史가 그러하였든것처럼 現在와將來에도 富貴를자랑하며軍備의充實을自矜하는百姓은 이第二法則의執行을當하고야말것이다. 우리는 어느個人이나 어느나라나 멸망한다기보다 隆盛한다는것을希求하는者이다. 더욱 내가弱한때에 그러하다. 마는小法則우에大法則을發見함은 眞理를 배우는 喜悅을 느끼는바이오, 詩人과같이 하나님께向한信賴와찬송이躍動함을禁할수없는故로 科學者가 實驗室에서作業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攝理의 손을 처다보면서 世上을觀望하고저하노라. 不安한마음으로써 未來를待하는것이안이라 實로 試驗濟의法則을 再演할것뿐이다. “교만한눈은 낮후시나니라”고. 누가能히낮아지지아니할者인고?
번역
[편집]약육강식과 우승열패는 과연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인 듯 하다. 동식물의 자연계를 관찰하고 개인과 국가의 인류생활을 상고하여 이 엄연한 법칙을 발견할 때 강자는 더욱 이빨을 가다듬고 패업을 향하여 작약하려니와 약자는 한갓 실망과 공포에 빠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되 “모든 골짜기는 돋우고, 산 뿌리는 낮추리라” (이사야 40:4), “교만한 눈은 낮추시느니라” (시편 18:27)하고. 무슨 능력으로써 이러한 일을 집행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은 명백하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된다는 것 뿐 아니라, 지질학자는 지형의 윤희설을 창하여 이에 화응한다. 해저가 융기하여 가파른 산맥이 되고 유년기 장년기를 지난 높은 산은 노년기에 들어 준평원으로 귀환한다고 한다.
우승열패의 자연법칙만이 행하여진다면 이집트의 파라오 왕조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의 영화는 영원히 융성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교만한 눈은 낮추신다”. 진시황제의 만리장성도 다만 돌 무더기에 불과하고 독일 국민의 교만을 상징하는 카이젤의 수염도 드디어 한울을 거슬러 자라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독일 육군과 러시아 기병보다 더 강한 능력이 존재함을 생각만해도 떨리는 사실이다. 세상에 소위 무적함대라는 것이 종종 출현하나 이는 그 나라 해군의 성숙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조락을 표고하는 전주곡으로 보는 것이 프로그램을 보는 법이 될 것이다. 수의 부족함을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한 척의 돗단배라도 능히 그 강역을 지켜내었으나 천하무적을 표방하는 포성의 세상을 요란하게 하고 결국에는 자국까지 멸망시키는 망신을 부르고야 말았다. 이는 그 ‘눈이 교만한’(High looks) 까닭이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사 모든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시길 기뻐하시나 오직 ‘교만한 눈’에 대해서는 철저히 규탄하지 않고는 마지 않으신다. 교만한 눈을 낮추시는 일은 특히 하나님의 ‘유퀘한 장난’(이런 말을 허락하신다면)이신 것 같다. 고로 우승열패의 법칙을 우주에서 허락하시면서도, 때때로 열승우패의 법칙을 집행하신다. 과거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와 장래에도 부귀를 자랑하며 군대의 총실을 자긍하는 백성은 이 제2법칙의 집행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이나 어느 나라가 멸망한다기보다 융성하는 것을 바라는 자이다. 내가 약한 때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작은 법칙 위에 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희열을 느끼는 바요, 시인과 같이 하나님께 향한 신뢰와 찬송이 약동함을 멈출 수 없는 고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작업하듯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쳐다 보면서 세상을 관망하고자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로 시험제의 법칙을 재연할 뿐이다. “교만한 눈은 낮추시느니라.” 누가 능히 낮아지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주석
[편집]- ↑ 이미 경험하여 결론이 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