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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14. 일·한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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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양위와 새로운 황제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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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0년 【광무 11년】 7월에 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讓位)했다. 새로운 황제는 전(前) 황제를 존중하여 태황제(太皇帝)라고 불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고 고쳤으며, 황제의 아우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삼았다. 새로운 황제는 지금의 이왕 전하(李王殿下)이며, 황태자는 지금의 이왕 세자(李王世子) 전하이다.

일·한 황실의 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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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메이지 천황은 황태자인 요시히토(嘉仁)를 파견하여 한국 황실을 방문하도록 하셨다. 이 때문에 일·한 양국 황실의 친밀함은 더욱 증대되었고 같은 해 말에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일·한 신협약과 남북 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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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초기에 다시 일본과 협약을 체결하여, 정치의 개혁은 오로지 통감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이어서 유신(維新)의 조서를 발령하여 새로운 정치의 방침을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이듬해 1월에 황제는 통감을 따라 남북(南北)을 순행(巡行)하면서 민정(民情)을 시찰했다.

새로운 정치의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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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가 개설된 이래, 한국 정부는 중앙과 함께 지방의 제도를 고쳤으며, 일본의 보호 하에 여러 분야의 정치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동안의 폐정(弊政)의 결과로 민력(民力)은 완전히 피폐해지고 또한 새로운 정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며, 도적들이 사방에서 배회하여 도저히 국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토 후작의 조난과 일·한 합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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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전(前)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여행하던 도중에 하얼빈(合爾賓)에서 흉도(兇徒)에게 암살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서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 및 회원 백만 명이 상소를 올려 일·한(日韓) 합방을 건의했다. 이 때문에 가부(可否)의 논쟁이 분분하게 일어나 결정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일·한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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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정세가 이와 같았으므로 황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국가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실히 하고 팔도의 민생을 보전하는 것은 일·한 양국이 합쳐 한 가족이 되는 것 외에는 없다고 했다. 마침내 뜻을 결정하여 일체의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넘겨주기로 하자 메이지 천황께서는 이를 승낙하셨다. 따라서 양국의 위원들은 병합조약을 체결하고 옛날부터 관계가 깊은 두 나라는 서로 합쳐 하나의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바야흐로 메이지 43년 【융희 4년】 8월의 일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519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