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2.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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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편집]

본과(本課)에서는 주로 신라, 고구려, 【또는 고려(高麗)라고도 한다.】 백제 삼국의 성립과 함께 상호 관계에 관해 가르친다. 또 고구려는 만주에 있는 한 종족인데, 만주와 함께 조선반도 북부에 있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하고, 반도를 잠식하면서 점차 남하했으며, 이에 반해 반도의 남부에 있던 한족(韓族)들은 아직 통일되지 못했다. 그중에서 백제는 우선 고구려와 충돌하여 분쟁이 끊일 때가 없었으며, 신라는 항상 그 이웃인 임나(任那) 제국(諸國)들을 정복하여, 반도 안에서는 항상 동요했으며, 그 영향은 곧바로 일본에도 미치는 형세였다. 이리하여 주아이(仲哀) 천황 【제14대】 은 먼저 규슈(九州)를 평정하려고 친히 직접 정벌하셨으며, 진구(神功) 황후는 나아가 신라를 정복하여, 임나 제국을 보호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힘쓰셨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심상소학 일본역사』 권1 제4 「진구 황후」와 연결시켜야 한다.

강의요령[편집]

신라의 시조[편집]

신라의 시조를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하는데, 이 왕의 즉위는 스진(崇神) 천황 【제10대】 시대에 해당한다. 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경주(慶州) 【경상북도】 였다. 제4대 왕인 석탈해(昔脫解)는 원래 일본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 신라의 왕가(王家)에는 박씨(朴氏), 석씨(昔氏) 외에 김씨(金氏)가 있다.

고구려의 시조[편집]

고구려의 시조를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그가 즉위한 것도 역시 스진 천황 시대이다. 나라의 도읍은 만주에 있었으며 그 위치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후에 압록강 중류에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백제의 시조[편집]

주몽의 장자(長子)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장자의 배다른 동생인 온조(溫祚)는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한(馬韓)의 영토로 들어와 백제국을 세웠으며,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통일했다. 이때가 바로 스이닌(垂仁) 천황 【제11대】 시대에 해당한다. 그 나라가 도읍한 곳은 보통 직산(稷山) 【충청남도】 이라고 한다. 【4. 일본부(日本府) 1의 비고 5 「백제와 고구려의 수도」 참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편집]

고구려는 처음에는 중국에 복속되었지만, 점차 강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일본해(日本海)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종족들을 정복하고, 다시 조선반도의 북부를 쳐들어가 중국의 군령(郡領)을 잠식했다. 이 무렵 중국의 군령은 크게 쇠퇴했기 때문에, 백제는 중국을 도와 고구려와 싸웠다. 그 사이에 고구려 왕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은 백제 왕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적국이 되었다. 【4. 일본부(日本府) 1의 비고 1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참조】

일본과 임나 제국의 관계[편집]

신라는 그 서남 지역에 있는 임나 제국을 정복하려고 끊임없이 가라국(加羅國)과 싸웠다. 그리하여 가라는 스진 천황 때 사신을 일본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일본은 장수를 파견한 적이 있다. 또 이 무렵에 지금의 규슈 지방은 아직 널리 일본 조정(朝廷)의 교화[皇化]가 미치지 못했고, 동쪽에서는 구마소[熊襲]라는 종족이 살고 있는 지방이 있었고, 서쪽에도 역시 조정에 복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조선반도의 남부와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를 비롯한 이들 여러 소국들 간의 분쟁은 곧바로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아이 천황 【제14대】 때 구마소는 또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천황은 이를 평정하려고 황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규슈에 행차하셨지만, 불행히도 천황께서는 군중(軍中)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황후는 천황의 뜻을 이어 규슈 전체를 평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친히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또한 장수를 파견하여 임나 제국들을 평정하고 보호하심으로써, 내외 평화의 유지에 힘쓰셨다. 이리하여 일본의 국위(國威)는 비로소 해외에서 빛나자,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함께 속국의 예를 갖추었다.

주의[편집]

(1) 본과(本課)에서는 보통학교 『국어독본』 권4 제22과 「알[卵]에서 태어난 왕」을 참조해야 한다.

(2) 진구(神功)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아울러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킨 것에 대해서는, 『심상소학 일본역사』 권1 제4 「진구 황후」에 의거하여 가르쳐야 한다.

비고[편집]

신라국 시조 전설[편집]

신라국의 시조 박혁거세의 전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처음에 진한(辰韓) 육부(六部)의 하나인 고허(高墟)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을 바라보니, 나정(蘿井)의 옆에 있는 숲 사이에 말이 있었는데,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었다. 곧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니, 홀연 그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이를 쪼개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곧 그를 거두어 길렀다. 10여 세가 되자 총명하고 조숙했다. 육부의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것이 신기했으므로 그를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옹립했다. 진한 사람들은 ‘호(瓠)’를 ‘박(朴)’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큰 알이 박처럼 생겼으므로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석탈해 전설[편집]

석탈해(昔脫解)는 신라 왕가(王家)인 석씨(昔氏)의 조상이다. 그에 관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석탈해는 원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里)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불길한 징조다. 마땅히 이를 버려야 한다.”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가라국】 의 해변에 도착했다. 금관국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도착했다. 이때가 시조 박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째 되는 해였다. 이때 해변의 늙은 여인이 밧줄을 이용하여 궤짝을 해안으로 끌어내고 열어 보니,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여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청년이 되자 키가 9척(尺)이고 풍채가 뛰어나며 지식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아이의 성(姓)을 알 수 없다. 처음에 궤짝에 떠내려 왔을 때, 한 마리의 까치[鵲]가 있었는데, 날아가면서 울었기에 이에 따른다. 마땅히 ‘鵲’자를 줄여 ‘昔’을 성씨로 삼아야 한다. 또 궤짝 속에 깊숙이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그러니 마땅히 ‘탈해(脫解)’를 이름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삼아 그 어머니를 공양했다. 예전부터 일찍이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모습이 특이하다. 그러니 마땅히 학문을 닦아 공명(功名)을 세워야 한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오로지 학문에 전념했으며, 또한 지리(地理)를 익혔다. 양산(楊山) 아래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보고 길지(吉地)라고 여겨, 계책을 부려 그 집을 얻은 뒤 거기에 살았다. 그 곳이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海王) 【제2대】 5년이 되자,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7년이 되자 등용되어 대보(大輔)가 되었고, 정사를 맡게 되었다. 유리(儒理) 【제4대】 가 곧 세상을 떠날 무렵에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당부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 사위에게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리하여 과인(寡人)이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그 지위를 전해야만 한다.”라고 하셨다.

호공 전설[편집]

석탈해 때 대보(大輔)가 된 호공(瓠公)도 역시 일본인이었다. 이에 관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 38년 봄 2월, 호공을 보내 마한에서 맞이했다. 【중략】 호공은 아직 그 족성(族姓)을 알지 못했다. 그는 원래 왜인(倭人)이다.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묶고 바다를 건너왔다. 따라서 ‘호공(瓠公)’이라고 불렀다.

석탈해 2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에 임명했다.

김알지 전설[편집]

김알지(金閼智)는 신라 왕가(王家) 김씨(金氏)의 시조이다. 그에 관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석탈해 【제3대】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숲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호공을 보내 그곳을 살펴보게 했다. 그러자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열어 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그 안에 있었다. 자태와 모습이 뛰어나게 훌륭했다. 임금께서 기뻐하며 좌우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내게 내려준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성장하니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알지(閼智)라고 이름을 짓고,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김씨(金氏)를 성으로 삼았다. 시림을 계림(雞林)이라고 고쳤으며, 따라서 이를 국호(國號)로 삼았다.

【김알지의 7대손인 김미추(金味鄒)는 비로소 제13대 왕에 올랐다. 그 후의 신라국 왕들은 대체로 모두 김씨가 되었다.】

고구려국 시조 전설[편집]

고구려국의 시조 주몽(朱蒙)의 전설은 『삼국사기』와 더불어 광개토왕비문에 근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는,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과 사통(私通)했다. 부여왕(扶餘王) 금와(金蛙)는 유화를 얻어 한 방 속에 유폐시켰는데, 햇빛을 받고 하나의 알을 낳았다. 그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한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려서 스스로 화살을 만들어 그것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사람들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금와는 아들이 일곱 명 있었다. 항상 주몽과 놀이를 했는데, 그 기예의 솜씨는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했다. 장자(長子)인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이 되자 용감해졌습니다. 만약 일찍이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그를 제거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도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주몽의 어머니는 몰래 그것을 알아채고 주몽에게 알려 주었다. 이에 주몽은 그의 친구 세 명과 나라를 도망쳐, 엄체수(淹遞水)를 건너려고 했는데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물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곳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자이다.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라.”라고 했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들이 그 소리에 응하여 떠올라와 다리를 놓으니, 건널 수 있었다. 주몽은 이 기적으로 다행히 뒤쫓던 기병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면했으며, 마침내 졸본천(卒本川) 유역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나라를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렀으며,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백제국 시조 전설[편집]

백제국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전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다. 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었다. 단지 세 명의 딸만 있었다.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을 비류(沸流)라고 불렀고, 차남을 온조라고 불렀다. 그러는 사이에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類利)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부여를 도망쳐 돌아왔다. 왕은 이를 기뻐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 두 사람은 태자를 두려워하여, 그들과 가까운 신하 10여 명과 함께 백성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갔으며,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부아악(負兒嶽) 【경성의 북쪽에 있는 삼각산】 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한수(漢水)의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백제(百濟)라고 했다. 그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扶餘)에서 나왔다. 따라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고구려의 국명[편집]

고구려의 국명(國名)은 일본에서는 보통 고려(高麗)라고 쓰며, ‘고마(こま)’라고 읽는다. 조선의 역사 서적에서는 반드시 ‘고구려(高句麗)’라고 쓰며, 중국의 역사 서적은 옛날에는 ‘고구려(高句驪)’ 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쓰며, 또는 줄여서 ‘구려(句驪)’ 혹은 ‘구려(句麗)’라고 쓰고, 가끔 ‘고려(高麗)’라고도 한다. 그런데 후에는 ‘고려(高麗)’라고 쓰는 것이 보통이다. 본서에서는 편의상 모두 ‘고구려(高句麗)’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