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3. 문학, 불교,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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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편집]

본과는 『심상소학 일본역사』 권1 제4 「진구(神功) 황후」의 마지막 절인 ‘학문과 기예의 전래’를 보충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가 먼저 조선반도에 전해지고, 다시 본국[內地]에 전파되는 양상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편집]

문학의 전래[편집]

삼국(三國) 가운데 중국에 가장 가깝고, 또한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했던 것은 고구려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문학은 가장 일찍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이 나라가 일본에 조공할 무렵에는 이미 태학(太學)도 설립되었다.

고흥과 왕인[편집]

백제는 고구려보다 늦어 일본에 복속될 무렵까지는 아직 문자로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고흥(高興)이라는 박사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기록이 시작되었다. 또 그 무렵 백제는 왕인(王仁)이라는 학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이때 백제의 왕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일본의 조정에 헌상(獻上)했다. 이것이 일본에 한학(漢學)이 전래된 시초인데, 즉 오진(應神) 천황 【제15대】 시대였다. 천황은 왕인 등에게 명하여 기록을 관장하도록 하셨다. 왕인의 조상은 중국인으로, 조부(祖父) 때부터 백제에 들어와 살았다. 고흥은 어디 사람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도 아마 중국에서 온 사람인 듯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중국과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문학의 전래도 역시 두 나라보다 늦었다.

불교의 전래[편집]

불교도 역시 처음에 북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그보다 약간 늦게 남중국으로부터 백제에 들어왔다. 둘 다 닌토쿠(仁德) 천황 시대에 해당된다. 신라에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온 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후 불교가 점차 행해져 법흥왕(法興王) 【제23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성해졌다. 이는 불교가 고구려·백제에 들어온 때부터 140~150년 후의 일이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다[편집]

그 후 20여 년이 지나, 긴메이(欽明) 천황 【제29대】 시대에 백제의 성왕(聖王) 【제26대】 은 불상 및 경론(經論)을 바쳤으며, 불교는 이때부터 일본에 전해졌다. 이때가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眞興王) 【제24대】 때가 되었으며, 이 나라에서도 불교가 점차 왕성해진 때이다.

공예의 전래[편집]

학문과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삼국에 전래된 상황을 보면, 각종 공예도 역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 많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국이 일본에 복속된 후에는, 학문과 불교 외에 이러한 공예는 다시 일본에 전해져, 문화의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주의[편집]

본과에서는 보통학교 『국어독본』 권5 제11 「오진(應神) 천황」을 참조해야 한다.

비고[편집]

삼국 문학의 전래[편집]

삼국의 문학 전래에 관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여름 6월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제17대 왕으로, 그 2년은 닌토쿠 천황 60년에 해당된다.】

(2) 근초고왕(近肖古王) 말년, 즉 30년 조목에 왕의 훙거(薨去)에 이어 기록하기를, “옛 기록에서 말하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써 사건을 기록한 적이 없다. 이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고서야 비로소 기록을 했다. 그렇지만 고흥은 아직 여전히 그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근초고왕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그 말년은 닌토쿠 천황 63년에 해당한다. 고흥에 관한 사항을 이 왕의 기사의 말미에 기록한 것은, 그 연대가 확실치 않고, 대체로 이 왕 때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3) 【신라에 관해서는 지증왕(智證王) 4년에, 비로소 국명을 신라로 정하고, 왕을 신라국왕이라고 칭했다는 사실이 보이는 것 외에, 문학의 전래에 관한 기사는 없다. 지증왕 4년은 부레쓰(武烈) 천황 5년에 해당한다.】

왕인의 내조[편집]

왕인(王仁)의 내조(來朝)에 관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오진(應神) 천황 15년 8월 정묘(丁卯)일, 백제 왕은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그것을 곧 가루(輕)의 사카노우에(坂上)에 있는 마구간[廐]에서 길렀으며, 아직기로 하여금 맡아 기르도록 했다. 따라서 그 말을 기르는 곳을 무마야사카(廐坂)라고 불렀다. 아직기도 역시 경전(經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곧 태자인 우치노와카이라츠도(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으셨다. 이때 천황이 아직기에게 묻기를, “만약 너희 나라에 뛰어난 박사가 있느냐?”라고 했다. 아직기가 대답하기를, “왕인(王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자가 뛰어납니다.”라고 했다. 이때 카미츠노케누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불러왔다. 아직기는 ‘아직키후무히도(阿直岐の史)’의 시조이다.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왔다. 곧 태자 우치노와카이라츠도는 그를 스승으로 삼아, 여러 전적(典籍)들을 왕인에게 익히셨으며,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이른바 왕인은 바로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

『고사기(古事紀)』의 「오진 천황」 조항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의 임금 조고왕(照古王) 【근초고왕을 말한다.】 이 수말 한 필과 암말 한 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바쳤다. 또한 횡도(橫刀) 및 대경(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의 이름은 화이길사(和邇吉師) 【왕인을 가리킨다.】 이다. 즉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합쳐 11권을 이 사람에게 보내 바쳤다.

또 왕인의 조상에 관해서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후손 중에 난(鸞)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난의 후손인 왕구(王狗)는 다시 백제에 왔다. 구소왕(久素王) 【‘구소(久素)’는 또한 ‘귀수(貴須)’라고도 쓴다. 모두 근초고왕 다음의 구수왕(仇首王)을 가리킨다.】 때,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문인(文人)을 불러왔다. 구소는 곧 구(狗)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삼국 불교 전래의 기사[편집]

삼국의 불교 전래에 관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소수림왕 2년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절 및 부도순도(浮屠順道)를 보내, 불경(佛經)과 경문(經文)을 보냈다. 왕은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시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소수림왕에 대한 것은 본과 비고 1 「삼국 문학의 전래」에 있다.】

(2) 침류왕(枕流王) 원년 가을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나라에서 왔다. 그를 왕궁 안에서 맞이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했다. 불법(佛法)이 이때 시작되었다.

  【침류왕은 백제 제15대 왕으로서, 그 원년은 닌토쿠(仁德) 천황 72년에 해당한다. 소수림왕 2년과 2년 차이가 있다. 이때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쪽은 진(秦)이었고, 남쪽은 동진(東晉)이었다. 그런데 불법은 고구려에는 북쪽의 진나라로부터 들어갔고, 백제에는 남쪽의 동진으로부터 전래되었다.】

(3) 법흥왕(法興王) 15년에 처음으로 불법을 행했다. 처음에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왔다. 이 군(郡) 사람들은 모례(毛禮)의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했다. 【중략】 갑작스러워 돌아갈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毘處王) 때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도착했다. 시자(侍者) 세 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머문 지 수년 만에 병이 나 죽었다.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서 살면서, 경률(經律)을 강독했다. 이따금 이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 왕도 역시 불교를 일으키려고 했다. 여러 신하들은 불교를 믿지 않고,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았다. 왕은 이를 책망했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청컨대 소신(小臣)을 참수하심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을 정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중략】 마침내 관리에게 명하여 막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차돈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법(法)을 위해 형(刑)을 받는다. 부처가 만약 신이라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를 참수하자 피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그런데 피의 색깔이 하얀 우유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다시 불사(佛事)를 비난하고 헐뜯지 않았다.

  【눌지왕은 신라 제19대 왕이고, 비처왕은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의 다른 이름이다. 법흥왕은 제23대 왕으로서, 그 15년은 고토바(繼體) 천황 22년에 해당한다. 백제 침류왕 원년으로부터 144년 후이다. 또 백제가 일본에 불상(佛像)과 경론(經論)을 바친 긴메이(欽明) 천황 13년은 신라 법흥왕 15년으로부터 겨우 24년 후이다.】

삼국의 공예 전래[편집]

공예의 전래에 대해서는 『심상소학 일본역사』 교사용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이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