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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4. 일본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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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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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일본부(日本府)를 중심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정립(鼎立)하고 있던 시대의 상황을 가르치며, 북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에 맞서, 한족(韓族)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힘으로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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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삼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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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神功) 황후는 신라를 친히 정벌하시고 그를 복종시키신 다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도 복속시켰다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때 조정은 일본부를 임나(任那)에 설치하고, 장군을 보내 장(長)으로 삼아 한족(韓族)의 영토를 다스리셨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은 모두 일본에 조공했는데, 특히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왕족을 일본의 조정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속국의 예를 다하는 성의를 보였다.

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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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삼국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데,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점차 조선반도에 있던 중국의 군령(郡領)을 잠식하여 점점 강대해졌다. 닌토쿠(仁德) 천황 【제16대】 무렵,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 【제19대】 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왕은 매우 용맹하여 왕성하게 국토를 사방으로 넓혔으며, 반도에서는 주로 백제와 싸워 그 영토를 빼앗았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장수왕 【제20대】 이 즉위했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백제의 땅을 빼앗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 【지금의 경기도 광주】 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왕인 개로(蓋鹵) 【제21대】 를 사로잡아 참수하여, 한강 남북의 땅을 빼앗았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한강 이남의 충주(忠州) 근방에까지 미쳤으니, 지금의 충청북도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일부까지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신라는 광개토왕 때 볼모를 고구려에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크게 두려워하여, 백제와 손을 잡고 서로 함께 고구려를 방어했다. 이러한 형세에 이르게 되자, 신라와 백제는 어쩌면 고구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재난을 면하게 해 준 것은 일본의 세력을 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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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왕이 살해되고 땅을 잃어 국가가 곧 망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도움으로 겨우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읍을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으로 옮겼는데, 그 후 나라가 점차 쇠약해져 다시 도읍을 사비(泗沘) 【사비는 ‘사비(泗沘)’ 또는 ‘사비(泗泚)’라고도 쓴다.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로 옮겼다. 긴메이(欽明) 천황 시대에 불상과 경론을 일본에 바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다음으로 그 두 나라의 수도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수도는 처음에는 만주 땅에 있다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장수왕 때 조선반도의 대부분이 그 영토가 되었으므로,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으며 그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또 신라의 수도는 처음부터 경상북도에 있었으며 끝까지 변한 적이 없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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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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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중국의 영향을 자주 받았는데,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에게 토벌을 당했다. 이때가 동천왕(東川王) 【제19대】 20년이다. 이때 관구검이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고 그곳을 도륙하자, 왕은 도망쳐 북옥저(北沃沮) 【지금의 함경북도】 로 달아났지만, 오래지 않아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바로 오진(應神) 천황 시대에 해당한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나, 중국은 서진(西晉) 말기에 이르렀는데,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난이 일어나, 여러 오랑캐족들이 번갈아 가며 일어나 나라를 세우자, 고구려는 중국의 위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그 군령(郡領)을 잠식했다. 미천왕(美川王) 【제15대】 때에는 조선의 북부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은 이미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점차 남하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 북쪽에서 일어난 연(燕)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연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제16대】 12년에는 환도성이 다시 파괴되고, 왕은 산골짜기로 도망쳤고,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그의 생모(生母)는 적에게 잡혀 가는 재난을 당했다. 고국원왕 때는 고구려가 외환(外患)으로 가장 고통을 받던 때로, 그 왕 4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왕이 나가 이를 막았지만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이상은 바로 닌토쿠(仁德) 천황 시대에 해당한다. 【2. 삼한(三韓) 참조】

광개토왕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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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부터 소수림왕(小獸林王), 【제17대】 고국양왕(故國壤王) 【제18대】 을 거쳐, 광개토왕(廣開土王) 【제19대】에 이른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은 닌토쿠 천황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고 하며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다. 이 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재위 기간은 중국의 혼란이 더없이 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점점 더 반도의 땅을 빼앗아 그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왕이 친히 사방을 공격하여 국토를 크게 확장한 것은, 현재의 만주 【성경성(盛京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왕은 주로 백제와 더불어 그를 도운 일본과 싸웠다. 최근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이 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경계는 임진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진사왕(辰斯王) 【제16대】 본기에,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통솔하는 병사 4만 명이 북비(北鄙)를 공격해 와, 석현(石峴) 등 10여 개 성들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대를 이용하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막을 수 없었으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을 빼앗겼다. 【진사왕 8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 ”라고 되어 있으므로, 백제는 한강 이북에 있는 영토를 이때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강원도에 있던 예족(濊族)도 광개토왕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므로, 그 영토는 신라와 인접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왕 때 신라는 볼모를 보내 고구려와 우호를 맺었다. 『삼국사기』의 신라 내물왕(奈勿王) 【제17대】 본기에는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 37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 라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은 재위 22년, 나이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인교(允恭) 천황 【제19대】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 이다. 이듬해에 그를 산속의 능(陵)에 옮겨 매장했다. 집안현(輯安縣)에 현존하는 이 왕릉비(王陵碑)는 이 해로부터 가능한 오래지 않아 만들어졌을 터인즉, 실로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으로, 그 비문은 곧 당시의 문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매우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료(史料)이다. 광개토왕이라는 호칭은 앞에서 기록한 비문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다. ‘국강상(國岡上)’은 왕을 매장한 지명이고, ‘광개토경평안호태(廣開土境平安好太)’는 그의 큰 업적[鴻業]을 일컫는 말이다. 호칭이 너무 길기 때문에 보통 줄여서 ‘광개토왕’ 또는 ‘호태왕’이라고 부르며, 고구려에서는 그때의 연호(年號)에 따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존칭했다.

장수왕 시대의 삼국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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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제20대】 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에 이어 즉위한 것은 인교(允恭) 천황 【제19대】 2년이다. 왕의 재위(在位)는 80년이나 오래 유지되었지만, 이 왕 때에 고구려는 이미 조선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함으로써, 이 왕 35년에 수도를 만주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다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더욱 국토를 넓혔다. 36년에 왕이 친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그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시켰으며, 그 왕인 개로(蓋鹵)를 사로잡아 참수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한강의 남북에 있는 많은 영토를 잃었고, 고구려의 영토는 늘어나 경상북도의 북부인 죽령(竹嶺)에 다다랐으며, 오늘날의 충청북도 충주도 포함하여 이 도(道)의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일부까지도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불안을 느낀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6년 후 【신라 눌지왕 17년, 백제 비유왕 7년】 에 이르러, 종래의 적대적 감정을 버리고 화의를 맺고 힘을 합쳐 고구려를 방어했지만,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를 함락하여 그 영토가 한강 이남까지 크게 늘어나자, 갈수록 두 나라의 결합을 공고히 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백제 왕은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자, 신라 왕은 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으니, 두 나라는 한층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관계는 백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일본의 백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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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때 일본은 백제를 지원하여 고구려와 싸웠지만, 그 후 백제는 장수왕의 침략을 받았으며, 마침내 개로왕(蓋鹵王) 【제22대】 때에는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살해되었으며, 또한 막대한 토지를 잃어, 나라가 곧 망할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가 유라쿠(雄略) 천황 19년이다. 천황은 즉시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을 도와 국가의 부흥을 꾀하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 21년 봄 3월에 천황은 백제가 고려 【고구려】 에게 패했다는 말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 【웅진(熊津)】 를 문주왕(汶洲王) 【문주왕(文周王)】 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하여 일으켰다. 이때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백제국은 이미 망하여 창하(倉下)에 모여 걱정하고 있었지만,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백제는 일본을 의지한 정도가 특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고구려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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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의 수도가 변천한 내용은 여러 책들에서 일치하지 않아 매우 혼동하기 쉽다. 따라서 아래에서 그에 대해 기록해 둔다.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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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인 온조(溫祚)가 처음으로 한수(漢水)의 남쪽에 있는 위례성(慰禮城) 【보통은 충청남도 직산(稷山)이라고 한다】 에 도읍을 정하고, 380년이 지나 제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한성(漢城)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 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105년이 지나 제21대 개로왕 때, 고구려에 수도가 함락되고, 왕도 역시 사로잡혀 참수됨으로써, 그의 아들 문주왕은 도읍을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公州)】 으로 옮겼으며, 또 64년이 지나 제26대 성왕(聖王)은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扶餘)】 로 도읍을 옮겼다.

일설에는 시조인 온조가 도읍을 위례성에 정하고, 같은 왕 13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 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근초고왕 26년에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경성부(京城府)】 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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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주몽은 처음에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하고, 40년이 지나 제2대 유리왕(琉璃王)은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으며, 207년이 지나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은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 【졸본, 국내, 환도는 모두 만주에 있다. 그중 국내와 환도 두 곳은 평안북도 벌등진(伐登鎭)의 건너편 강가에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135년이 지나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 모용씨(慕容氏) 【연(燕)나라】 에 의해 환도를 도륙당하여, 도읍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으며, 85년이 지나 제20대 장수왕(長壽王) 때 비로소 만주 땅을 떠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