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5. 일본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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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편집]

본과(本課)에서는 전과(前課)에 이어 일본부의 연혁을 설명하고, 더불어 삼국의 형세가 아주 달라진 양상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편집]

일본과 신라의 관계[편집]

신라는 진구(神功) 황후의 친정(親征)으로 일단 일본부에 복속된 후에도 항상 임나 제국(諸國)을 침략하여 국토를 확장했다. 또한 여러 차례 일본에 대한 조공을 게을리했으므로, 일본에게 원정을 당한 적이 빈번했다. 그런데 법흥왕(法興王) 【제23대】 때에 이르러 국력이 점차 강해졌으며, 모든 방면의 제도도 정비되었다. 이때가 바로 고토바(繼體) 천황 【제26대】 때에 해당한다.

신라의 흥기[편집]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은 법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 왕 때 백제의 성왕(聖王) 【제26대】 은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회복했지만, 신라는 다시 백제로부터 그 지역을 빼앗았으므로, 신라의 영토는 눈에 띄게 팽창했다. 이때부터 먼저, 법흥왕 때 김해(金海)에 있던 가라국(加羅國)은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그의 속국이 되었으며, 신라는 이 틈을 타 가라국 부근의 여러 나라들을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일본 조정은 일본부와 백제에 명하여 이들의 부흥을 도모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신라는 진흥왕 시대가 되었으며,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국토가 크게 팽창했고 세력이 점차 강해졌으므로, 마침내 모두 일본부의 보호를 받던 임나 제국들을 아울러 빼앗으니, 어쩔 수 없이 일본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긴메이(欽明) 천황 23년이다. 진구 황후 때 일본부를 설치한 이래 이때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만이다.

진흥왕 때 중국에서는 계속해서 남북조(南北朝)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후 여러 대(代)를 거쳐 수(隋)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했다.

수·당과 삼국의 관계[편집]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땅을 잃었지만 국력은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고 도리어 신라, 백제 두 나라와 싸웠다. 또한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 수나라의 영토를 침략했다. 수나라 황제는 크게 노하여, 바다와 육지로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그 군대는 오히려 살수(薩水) 【지금의 평안북도 청천강】 에서 을지문덕에게 크게 패했다. 수나라는 나라를 세운 지 겨우 수십 년 만에 망하고, 당(唐)나라가 수나라를 잇자, 고구려와 더불어 신라, 백제 두 나라도 함께 당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했다.

당과 신라의 관계[편집]

수나라가 일어나기 전부터 신라와 백제의 화친은 이미 깨지고, 백제의 성왕(聖王) 【제26대】 은 친히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이리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적으로 상대하여 큰 고통을 당했지만, 당나라는 그 국력이 대단히 강성했기 때문에 신라는 당나라에 가장 복종하여 당나라의 옷을 입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그 힘을 빌려 몇 년 전부터 적이 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비고[편집]

법흥왕 때의 제도 정비[편집]

『삼국사기』의 신라 법흥왕(法興王) 본기(本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항이 있다.

원년(元年)에 선왕(先王)에게 지증(智證)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호를 정하는 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4년 여름 4월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다.

7년 봄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에 주자(朱紫)의 질서를 제정했다.

15년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시행했다.

16년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했다.

18년 봄 3월에 관계 기관에 명하여 제방(堤防)을 수리했다. 여름 4월에 이찬(伊湌)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국사(國事)를 총괄하게 했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이때 시작되었다. 지금의 재상(宰相)과 같다.

23년에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신라와 백제의 피침지 동맹[편집]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聖王) 【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 한다】 과 힘을 합쳐 고려의 침략지를 회복한 것에 대하여 『삼국사기』의 신라 진흥왕 본기에는, 20년에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승리를 틈타 10개 군(郡)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긴메이(欽明) 천황 본기에는, 12년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친히 많은 사람들을 인솔했다. 또 두 나라 군대 【두 나라란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 가 고려를 정벌했다. 그리하여 한성(漢城) 땅을 획득했다. 또 진군(進軍)하여 평양을 공격했다. 대략 6개 군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라는 한강 유역의 10개 군, 백제는 같은 유역 6개 군의 땅을 취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14년에는 백제가 이 땅들을 신라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두 나라의 화친은 다시 깨지고, 이듬해에 백제의 성왕(聖王)은 신라와 전투하다 전사했다. 그리고 신라의 영토는 이로 인해 크게 팽창했다.

진흥왕순수비[편집]

신라 진흥왕은 확장한 영토를 순수(巡狩)했기 때문에, 세 개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북한산(北漢山)의 비봉(碑峰)에 있고, 하나는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황초령(黃草嶺)에 있으며, 하나는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창녕읍 안에 있다. 순수비는 당시 신라의 국경을 알 수 있는 유력한 자료이다.

진흥왕 이후의 임나 제국[편집]

긴메이(欽明) 천황 23년에, 일본부(日本府)의 치하(治下)에 있던 임나(任那) 제국은 모두 신라가 병합하여, 일본부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 되었다. 천황이 붕어(崩御)하시면서 조서를 내려 임나의 부흥을 명하셨으므로, 비다쓰(敏達) 천황, 요메이(用明) 천황, 스슌(崇峻) 천황이 이어서 즉위하셔서, 임나의 부흥을 도모하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이 틈을 타 신라는 일본을 경외하여 번번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했지만, 임나 제국은 신라가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이코(推古) 천황 【제33대】 은 8년과 32년의 두 차례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셨는데, 신라는 그때마다 천황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곧바로 항복했지만, 군대가 물러가자 신라는 임나를 침략하여 그들을 속령(屬領)으로 삼았다.

수와 고구려의 관계[편집]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제25대】 때, 중국에서는 수(隋)나라의 고조(高祖)인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비로소 남북조(南北朝)를 통일했다. 고구려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군량을 비축하면서 방어할 계책을 세웠지만, 표면적으로는 수나라에 조공을 하고 봉책(封冊)을 받았다. 영양왕(嬰陽王) 【제26대】 이 이어서 즉위하자 왕은 말갈(靺鞨)의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했다. 이는 이 왕 9년의 일이다. 이로 인해 수나라와의 화친은 깨졌으며, 문제는 크게 노하여 고구려 왕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원정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이 끝났다. 이어서 양제(煬帝)가 대를 이어 즉위하자 다시 조서를 내려 천하의 모든 군대를 모아 친히 그들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수나라 황제가 나아가 요동(遼東)에 이르렀지만,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굳게 지키고 있어 내려갈 수 없었다. 오히려 수나라의 수군은 평양성(平壤城) 아래에서 패배했고, 육군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살수(薩水) 【청천강】 에서 대패했다.

을지문덕의 살수에서의 승리[편집]

살수의 전투는 영양왕 23년 가을 7월에 있었는데 수나라 장수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 등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압록강의 서쪽에서 마주했다.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을 보내 수나라의 군영(軍營)에 참배하고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 허실(虛實)을 살폈다. 수나라 장수는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여러 장수들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적을 지치게 하려고 매번 전쟁에서처럼 쉬지 않고 달렸다. 수나라 장수는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군영을 차렸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했다. 수나라 장수는 장병들이 지쳐 있는 데다 평양이 험준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곧 군대를 철수했다.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무렵에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뒤쪽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으므로 적의 군대는 일시에 궤멸되었다. 처음에 수나라 군대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군대의 규모는 9군(軍) 30만 5천 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갈 때에는 고작 2천 7백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양제는 크게 노하여 다시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렀지만, 고구려 군대가 영성(嬰城)을 굳게 지켜 정복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철수했다. 고구려의 왕도 역시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여 한때 안정을 이루었다.

수의 멸망과 당의 건국[편집]

그 후 오래지 않아 영양왕(榮陽王) 【제27대】 원년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대신 중국을 통일했으므로,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고, 자제(子弟)를 당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도 잇달아 역시 당나라에 조공하고 신하로 칭했다.

당과 신라의 관계[편집]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제29대】 2년에 왕족 김춘추(金春秋)는 그의 아들과 함께 당나라에 입조(入朝)하여 태종(太宗)을 알현하고, 나라의 사정을 상세히 말했는데,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당나라가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태종은 김춘추에게 출병을 허락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을 당나라에 남겨 두고 귀국했다. 이때부터 당나라를 지나치게 섬기게 되어 이 왕 3년에는 비로소 당나라의 의관(衣冠)을 착용했고, 4년에는 왕이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그것을 비단에 짰으며,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고, 같은 해에 처음으로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조선의 연호[편집]

조선의 연호에 대한 기록은 고사(古史)와 더불어 고비(古碑)에서 보인다. 고구려 광개토왕 때 영락(永樂)이 있었고, 신라 법흥왕 23년에 처음으로 연호를 세워 건원(建元)이라고 했으며, 그 후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건복(建福), 인평(仁平), 태화(太和) 등이 있었다. 백제의 연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복종하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왕 4년에 마침내 자국(自國)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역대 중국, 만주 등 강대국들을 섬기는 데에 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궁예(弓裔)가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고려 태조 때 천수(天授), 광종(光宗) 때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모두 한때 참람하게 사용한 것에 불과했다.】 일본에서는 진덕왕 때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6년 전에, 곧 고토쿠(孝德) 천황 원년에 처음으로 다이카(大化)라는 연호를 세웠으며, 이후 계속해서 자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변함이 없었다. 최근 이조(李朝) 말기에 이르러 조선이 처음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건양(建陽)이라고 연호를 정했고 【메이지(明治) 29년】, 이어서 이를 폐지하고 다시 광무(光武)라고 연호를 정했으며 【메이지 30년】, 다시 융희(隆熙)라고 연호를 고쳤다. 【메이지 40년】

조선의 시호[편집]

고구려국 여러 왕들의 추호(追號)는 왕이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적도 있다. 【예를 들면 주몽(朱蒙)은 ‘동명(東明)’인데, ‘성(聖)’자를 붙여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했고, ‘유리(類利)’는 ‘유리(琉璃)’인데, ‘명(明)’자를 붙여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고 했으며, 혹은 ‘보장(寶藏)’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보장왕(寶藏王)’이라고 한 경우이다.】 혹은 문장의 뜻에 따라 그 왕의 특색을 나타내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 ‘장수왕(長壽王)’ 등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데 대다수는 능묘(陵墓)의 지명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동천왕(東川王)’, ‘봉상왕(烽上王)’, ‘고국원왕(故國原王)’, ‘소수림왕(小獸林王)’ 등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중국식의 시호를 붙인 경우는 전혀 없었다. 단지 장수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후위(後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내린 경우가 있을 뿐이다.

백제국 여러 왕들의 추호는 대체로 모두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무령왕(武寧王) 【제25대】 이래로 마지막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7대(代)만은 시호를 사용했다.

신라도 통일 전에는 대체로 모두 이름을 왕들의 추호로 썼지만, 통일되기 조금 전인 법흥왕(法興王) 원년에 선왕(先王)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지증(智證)’이라고 했다. 이것이 신라 시호의 시작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는 불법(佛法)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대였으므로, 지증(智證), 법흥(法興), 진흥(眞興), 진지(眞智), 진평(眞平), 선덕(善德), 진덕(眞德) 등은 모두 시호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를 숭상하는 왕의 덕을 찬양한 존호(尊號)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중국식 시호를 채용한 것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제29대】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