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6. 백제·고구려의 멸망
교수요지
[편집]본과(本課)에서는 전과(前課)에 이어서, 신라는 당나라에 가장 잘 복속했으며,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 고구려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백제와 고구려의 연합
[편집]전과에서 서술했듯이 백제는 국력이 일단 크게 쇠약해졌지만 그 후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 【제31대】 때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했으며, 또 얼마 전부터 적이 된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할 지경이 되었으므로, 신라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만하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를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동맹을 맺어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목을 막았으며, 또한 신라를 공격하여 30여 개 성을 빼앗았다.
백제의 멸망
[편집]이리하여 신라는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병력을 요청했다. 당나라는 전부터 원조를 약속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대총관(大總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신라의 무열왕(武烈王) 【제29대】 은 스스로 도성을 나와 밖에 진을 치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 등이 병력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를 도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은 진격하여 백제를 압박했는데 백제의 군대는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연합군은 바다와 육지로부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泚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현내면(縣內面) 부소산(扶蘇山)은 그 유적지이다.】 을 포위했다. 의자왕은 일단 몰래 도망쳐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공주】 으로 들어갔지만 버티지 못하고 나와서 항복했으며, 당나라 장수는 왕과 그의 일족, 대신, 장병, 백성 등을 포로로 잡아 개선했다. 백제는 이리하여 멸망했다. 이때가 사이메이(齊明) 천황 【제37대】 6년이다. 백제는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이때까지 31왕 678년이 지났다. 그런데 백제 왕의 일족이 일어나 나라를 되찾으려고 도모하여, 일본의 조정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세력이 매우 강했다. 일본은 원군을 보내 당나라 군대와 싸웠지만, 불행히도 우리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여, 백제의 잔당들은 모두 패배하여 항복하고,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때가 덴지(天智) 천황 【제38대】 2년이다.
고구려의 멸망
[편집]고구려는 그 국토가 만주 및 조선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당시 강국(强國)이 되었으므로, 전에 수나라와 싸웠지만 쉽게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전과(前課) 참조】 그 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자 고구려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의를 갖추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권신(權臣)들이 국정을 농단하여, 마침내 국왕과 여러 대신들을 살해하고 보장왕(寶藏王) 【제28대】 을 옹립했으며, 더구나 오랫동안 적이었던 백제와 화해하고 신라를 괴롭혔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때 당나라는 고구려에 명령하여 신라를 공격하도록 압박했지만 듣지 않았다. 따라서 당나라 태종(太宗)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그 후 다시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보장왕 19년에 이르러 당나라는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 기세를 업고 고구려를 정벌했으며, 이듬해에 신라에 병력을 요구했다. 이때 마침 신라에서는 무열왕이 사망하고 문무왕(文武王) 【제30대】 이 즉위했는데, 김유신 등을 대장(大將)으로 하여, 군대를 보내 당나라 군대를 도왔다. 문무왕은 바로 무열왕의 태자였던 법민(法敏)이다. 몇 년 후 당나라 군대는 마침내 평양을 포위했고, 신라 군대도 역시 거기에 집결하자, 고구려 왕은 나와서 항복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당나라 장수는 보장왕과 그 일족과 대신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개선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멸망했다.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나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8왕 705년이 지났다. 고구려의 멸망은 바로 백제가 멸망한 뒤 8년 만으로 덴지 천황 7년에 해당한다.
비고
[편집]김춘추[무열왕]
[편집]김춘추(金春秋)는 진지왕(眞智王) 【제25대】 의 손자이다. 그의 딸은 신라의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의 아내였는데, 품석이 백제의 침공을 막다가 전사하자 그의 아내도 역시 거기에서 죽었다. 춘추는 이때부터 백제를 매우 증오하여 맹세코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제27대】 11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정벌하려 했지만,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괴롭히던 때여서, 오히려 고구려에 붙잡혔다가 간신히 도망쳐 돌아왔다. 그는 또한 일본에 가서 볼모가 된 적이 있다. 【고토쿠(孝德) 천황 3년, 선덕여왕 말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춘추는 용모와 얼굴이 곱고, 말을 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어서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자 그는 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태종(太宗)을 알현하고 그의 힘을 빌려 백제를 공격할 계책을 정했다. 【같은 왕 2년】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덕망이 높아 천거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 그를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라고 한다. 그가 즉위하고 7년이 되자 마침내 당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켰다. 춘추는 왕이 되기 전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 등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다. 법민은 곧 문무왕(文武王)이 된다.
김유신
[편집]김유신은 대가락국(大駕洛國) 【가라국(加羅國)】의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의 증손자로, 아버지는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인 서현(舒玄)이고, 어머니는 만명(萬明) 【지증왕의 증손녀】 이다. 구형은 진흥왕(眞興王) 【제24대】 19년에 나라를 바치고 신라에 항복했는데, 유신은 진평왕(眞平王) 【제26대】 이후 문무왕(文武王) 【제30대】 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벼슬을 했으며, 문무왕 13년에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처음에 유신은 왕명을 받고 백제를 방어하여 싸웠는데,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무열왕 때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는 태자 법민과 함께 정예군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했으며, 문무왕 때 당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자, 그의 아우인 흠순(欽純) 및 조카인 인문(仁問)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스스로 당나라에 남아 나라를 지켰으며, 국가의 기둥으로서 신라 통일의 위업을 성취했다. 그뿐 아니라 유신의 누이는 태종 무열왕의 비(妃)가 되어 법민, 【문무왕】 인문 등을 낳았으며, 유신도 역시 무열왕의 셋째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따라서 무열왕, 문무왕 때, 그는 외척(外戚) 국구(國舅)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지위가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러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백제 멸망의 전말
[편집]무열왕 6년에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인문(金仁問) 【왕의 둘째 아들】 을 당나라에 보내 군대를 요청했다. 이듬해 7년에 당나라 고종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대총관(大總管)으로,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總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백제를 향해 출발했다. 도성[王京]을 출발하여 남천정(南川停) 【지금의 이천(利川)】에 이르자, 태자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들과 회동하도록 했다. 백제의 군대는 이들을 막지 못하여 패배하여 궤멸했으며, 당나라·신라 군대는 나아가 백제의 사비성(泗泚城)을 포위했다. 의자왕은 밤에 몰래 도망쳐 웅진성(熊津城)에 들어갔지만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태자와 함께 나와서 당나라 군대에게 항복했다. 소정방은 이에 왕과 그 일족, 대신(大臣), 장병[將士] 88명과 백성 1만 2천여 명을 도성으로 데려갔으며, 백제의 옛 영토에는 오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州)·현(縣)을 두어 다스렸으며,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남아서 도성을 지키게 하고 개선했다. 이리하여 백제는 멸망했으며, 의자왕은 후에 당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백제의 왕족인 복신(福信)이라는 자가 군대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국가의 부흥을 꾀했다. 이때 백제의 왕자 풍장(豐璋)이 볼모로 일본에 있었는데, 복신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또 왕자 풍장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으려 했다. 천황은 이를 들으시고, 백제를 위해 바야흐로 신라를 정벌하려고 규슈(九州)에 행차하셨지만, 불행히도 아사쿠라(朝倉)의 행궁(行宮)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이리하여 황태자는 소복(素服)을 입고 군사를 독려하셨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풍장을 호송하고, 칙령을 내려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복신은 이를 주류성에서 받들어 모시고,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일어나 그를 따랐지만,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갈라섰으며, 왕은 마침내 복신을 살해했다.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은 나아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우리가 구원군을 보내 방어하여 당나라 군대와 백촌강(白村江)에서 크게 싸웠지만, 불행히도 이기지 못하자 왕(王)인 풍장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돌아갈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역시 모두 항복하니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때가 덴지(天智) 천황 2년, 즉 신라 문무왕 3년이다.
당평백제비
[편집]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는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현내면(縣內面)에 있다. 5층 석탑의 제1층의 탑신에 글을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세워진 해는 당나라 현경(顯慶) 5년으로, 바로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된 해이다.
당유인원기공비
[편집]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는 충청남도 부여군 현내면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이 비가 세워진 신라 문무왕 3년, 즉 당나라 용삭(龍朔) 3년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주류성이 함락된 해이다.
고구려 멸망의 전말
[편집]고구려의 수도는 원래 5부(部)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동도(東都)의 대인(大人)으로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격이 매우 흉포했으므로, 다른 부의 대인들이 몰래 왕과 상의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새어나가 개소문이 부(部)의 모든 군대를 모아 계략을 세워 영류왕(榮留王) 【제27대】 및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왕의 아우인 자장(子藏)을 왕으로 세웠다. 그를 보장왕(寶藏王)이라고 한다. 개소문은 거리낌이 없었는데,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왕을 옹위하고 문무(文武)의 권력을 가진 사람】 가 되어 국정을 전횡했으며, 또한 오랫동안 적국이었던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혔는데,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았으며, 또 공격하여 신라의 33개 성들을 빼앗았다. 이렇게 되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제27대】 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당나라의 태종은 고구려에게 명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지만, 개소문은 명을 받들지 않고 오히려 당나라의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태종은 고구려의 임금과 대신을 죽이고, 백성을 잔학하게 다루고, 또 그의 명령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친히 정벌했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에 들어가 여러 성들을 항락시켰지만, 오로지 안시성(安市城)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부인 탕지(湯池)】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추위가 점점 닥쳐오고 군량이 곧 바닥나게 되자 명령을 내려 군대를 철수했다. 이때가 바로 보장왕 4년이다.
그 후 당나라는 여러 차례 원정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남생(男生)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두 동생들과 다툼이 일어나자 당나라로 달아나고, 남건(男建)이 대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이적(李勣)을 대총관(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 원정군을 통솔하게 했으며, 신라에 군대를 요구했다. 신라 문무왕은 도성을 출발하여 한성주(漢城州)에 이르자, 김유신으로 하여금 남아서 성을 지키게 하고,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아우】 김인문(金仁問) 【왕의 아우】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게 하여 이적과 만나 함께 한 달 남짓 평양을 포위했다.
족남
[편집]남건은 방어하여 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으며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보장왕 및 남건 등은 모두 사로잡혔다. 이적은 왕과 그 일족, 남건 이하 대신들, 그 외 20여만 명을 이끌고 개선했다. 고구려는 이리하여 멸망했다. 이때가 덴지(天智) 천황 7년, 신라 문무왕 8년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에 구도독부(九都督府)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州)·현(縣)을 두어 다스렸으며, 또한 평양에 안동도독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했는데, 대장군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安東都護)로 삼았다. 당나라는 처음에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여기에 이르기까지 24년을 소비했다.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은 백제가 멸망한 뒤 8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