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8. 고려 1
교수요지
[편집]본과(本課)에서는 고려의 건국부터 그 초기의 백 수십 년간의 정치 양상을 알려 주어야 한다. 즉 이 시기는 고려의 전성기였지만 밖으로는 항상 거란(契丹)에 복속되어 통제를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고려 태조의 업적
[편집]왕건(王建)은 많은 사람들에게 추대되어 궁예 대신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으며, 이듬해에 도읍을 송악(松岳) 【지금의 경기도 개성】 으로 옮겼다. 왕건을 고려의 태조(太祖)라고 한다. 태조가 즉위한 후 18년 만에 신라의 경순왕(敬順王) 【제56대】 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왔고, 이듬해 19년에 후백제 왕 신검도 역시 왕건과 싸워서 패하여 항복했으므로, 반도는 다시 고려에 의해 통일되었다.
성종의 내치
[편집]태조는 매우 관대한 정치를 펼치고 모든 일을 신라의 옛 제도에 의거했다. 그는 통일 후 재위 8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셋째 아들이 이어서 왕이 되었는데, 나라의 세력은 아직 떨치지 못하여 고려의 앞날이 걱정스러운 점들이 있었지만, 태조의 손자 성종(成宗) 【제6대】 이 즉위하자 현명하게 내치를 잘 함으로써 5백 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또 같은 왕 15년에 처음으로 철전(鐵錢)을 주조했다. 이는 조선의 역사에서 돈을 주조한 최초의 경우이다. 그렇지만 철전은 아직 일반적으로는 유통되지 않았다. 이처럼 성종의 치적은 평가할 만한 것이 있었지만, 같은 왕 때 처음으로 거란의 침입을 받고, 거란의 신하로 칭하여 속국이 되었다.
거란의 건국
[편집]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이미 망하고 다시 소란스러운 시대였다. 이때 만주 지방에 있던 거란이라는 종족은 원래 당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스스로 일어나 부근을 정복하고, 점점 강성해졌으며, 마침내 신라 시대부터 조선반도의 북쪽에 있던 발해국(渤海國)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거란 태조가 황제라고 칭한 것은 고려 태조가 즉위한 원년보다 2년 앞선 것으로, 거란은 후에 국호를 요(遼)라고 고쳤다. 이리하여 성종이 즉위하기 조금 전에 이르러 송나라가 중국 본토를 통일하고, 만주 및 몽고 지방은 요나라가 점령했다.
거란에 복속되다
[편집]처음에 고려 태조 무렵에는 거란이 아직 강성하지 않았는데, 성종 때에는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으므로, 고려는 이 왕 12년에 처음으로 그들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서희(徐熙)는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거란의 장수에게 말하여 다행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듬해에 왕은 거란에 대해 신하로 칭하고, 거란의 정삭(正朔)을 받들었으며, 이후로 120여 년간 【제17대 인종 때까지】 그들의 속국이 되었다.
강조의 난
[편집]목종(穆宗) 【제7대】 때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의 진장(鎭將) 강조(康兆)라는 사람이 군대를 일으켜 개성으로 침입해 와 왕을 폐하고 현종(顯宗) 【제8대】 을 옹립했다. 요(遼)나라 황제는 미리 고려국의 왕으로 하여금 친히 자기 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려 했으므로, 강조가 제멋대로 왕을 폐위하거나 옹립하는 것에 대해, 그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몸소 지휘하여 침공해 왔다. 강조는 나가서 그들을 막았지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요나라 군대는 나아가 개성을 함락시키고 불태웠으므로, 왕은 한때 남으로 피신하여 나주로 갔으며, 이때부터 10여 년간 요나라와의 화친은 깨져, 서북 지역은 여러 차례 요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강감찬(姜邯贊)이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 군대를 방어했는데, 귀주(龜州) 【지금의 평안북도 귀성(龜城)】에서 크게 무찔렀다. 강감찬이 개선하자 왕은 도성을 나와 그를 맞이하고 노고를 위로했다. 이어서 요나라에 화친을 요청하여 그 관계를 옛날처럼 회복했다.
고려의 전성기
[편집]이후, 2대를 지나 문종(文宗) 【제11대】 시대가 되었다. 왕은 현종의 셋째 아들인데 성종과 나란히 칭송되는 훌륭한 임금으로서 몸소 근검절약에 힘썼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치적을 크게 이루었다. 문종은 한편으로는 신하로서 요나라를 섬겼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송나라에 조공을 했기 때문에, 송나라와의 교류가 매우 왕성하여, 상업과 무역은 물론이고 문학(文學)과 의술(醫術) 등 갖가지 문화도 수입했으며, 공예의 발달도 역시 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70~80년 동안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고려의 문화는 이때가 가장 전성기였다. 그러나 문종 후 5대를 거쳐 예종(睿宗) 【제16대】 에 이르자 운세가 점차 변화했다.
최충
[편집]문종을 보좌한 사람은 최충(崔沖)이라는 현신(賢臣)이었다. 그는 이미 이전 4대의 임금들 밑에서 벼슬을 했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문종 때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는데, 왕의 재위 중 【같은 왕 22년】 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내려 문헌공(文憲公)이라고 했다. 거란이 여러 차례 침입해 온 이래 교육은 크게 쇠퇴했는데, 그것을 돌보는 사람이 없자, 그는 벼슬을 그만둔 다음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따라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송된다.
비고
[편집]왕건의 세계
[편집]왕건의 조상은 분명하지 않다. 할아버지를 작제건(作帝建)이라고 하는데, 용신(龍神)의 딸과 결혼하여 예성강(禮城江) 강변의 영안성(永安城) 【경기도 개성군】 에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융(隆)은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로서,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장(部將)이었다. 왕건은 아버지와 함께 궁예를 섬겼다. 태조부터 문종까지 법통이 전해진 과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왕건은 경순왕을 우대했다
[편집]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이름은 김부(金傅)】 은 사방의 영토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지만, 고립되고 나약하여 스스로 지킬 수 없게 되자,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할 것을 요청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특사를 보내 의위(儀衛)를 화려하게 하여 왕을 맞이했으며, 태조도 역시 스스로 성 밖에 나와 맞이하여 위로했다. 이어서 태조는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때 김부를 정승(政丞)에 임명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두었으며,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고 하여 김부의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태조는 이와 같이 평온무사하게 신라를 병합하고, 김부 이하 신하들을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녀를 김부의 아내로 삼았으며, 또한 스스로 김부의 백부(伯父)인 김억겸(金億廉)의 딸을 비(妃)로 맞이했다. 경종(景宗) 【제6대】 때에 이르러 또한 김부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때문에 김부를 상부령공(尙父令公)에 봉하여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김부는 왕[경종] 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종의 내치
[편집]성종(成宗)은 태조의 유업(遺業)을 이어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고려 왕조의 기초를 다졌으므로 기억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그중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행정기관
[편집]중앙에 3성(省) 6상서(尙書) 9사(寺)를 두어 각종 정치를 담당했으며, 지방을 10도(道)로 나누고 각 도에는 다시 목(牧), 부(府), 주(州), 현(縣)의 관직을 두었다.
군사
[편집]중앙에 좌우(左右) 군영(軍營)과 중추원(中樞院)을 두고, 지방에는 병마사(兵馬使)를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감독하여 변고에 대비했다.
농사의 권장
[편집]스스로 적전(籍田)을 경작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유민(遊民)들에게 직업을 주었으며, 병기(兵器)를 거두어 농구(農具)를 만들었다.
문교
[편집]공자(孔子)를 존숭하여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또 상하 모두 불교에 잠식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연등팔관회(燃燈八關會)의 잡기(雜技)를 중단하고, 집을 헐고 절을 세우는 것을 금지했다.
사회 구제
[편집]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을 만들어 노비를 점차 양민(良民)이 되게 했으며,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을 설립하여 비상시에 대비했고, 또한 선박을 만들어 지방의 물자를 운반했다. 그 밖에 물가평준법(物價平準法)을 규정하여 시가(市價)의 수준을 조절했으며, 혹은 철전(鐵錢)을 주조했다.
화폐 주조의 시작의 문화
[편집]조선에서 돈을 주조한 기록이 역사에서 보이는 것은, 『고려사(高麗史)』의 성종 본기(成宗本紀) 15년에, “여름 4월 신미(辛未)일에 철전(鐵錢)을 주조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최초의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돈인지는 알 수 없다. 후에 숙종(肅宗) 15년에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세간에서 사용했다. 돈의 명칭이 판명된 것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며, 그것이 현존으로 동전(銅錢)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과 고려의 관계
[편집]다이고(醍醐) 천황 엔기(延喜) 18년에, 고려의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19년이 지나 스자쿠(朱雀) 천황의 조헤이(承平) 7년에 고려 광평성(廣評省) 【후에 상서성(尙書省)이라고 했다. 모든 관료들을 모두 거느렸다.】 은 첩장(牒狀)을 바쳐 조공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묘의(廟議)에서는 그 청을 허락하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냈다. 덴교(天慶) 2년 【고려 태조 22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겠다고 청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자이후(太宰府)로 하여금 고려 광평성에 이첩하여 그 취지를 전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일본]와 고려의 국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양국 백성들의 사적인 교류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이루어졌다. 또 양국에서 표류민(漂流民)은 서로 송환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충렬왕(忠烈王) 【제25대】 때, 고려 군대가 원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 우리나라[일본]를 침입할 때까지 350년간 양국은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로운 가운데 사적인 교류를 계속했다.
거란
[편집]거란은 요하(遼河)의 상류 시라무룬강(西喇木倫河) 【동몽고(東蒙古)에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유목 종족이었다. 8부(部)로 나뉘어 각자 추장을 추대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지 않았지만,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사람이 모든 부락을 통일하여, 국가의 세력이 발흥하는 기운으로 나아갔다.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사방 국경으로 보내 점차 영토를 확장했으며, 마침내 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며, 도읍을 임황(臨潢) 【요하의 상류에 있는 몽고 땅】 에 정했다. 【다이고(醍醐) 천황 시대, 신라 신덕왕(神德王)(제53대) 5년, 고려 태조가 즉위하기 2년 전】 그를 거란의 태조라고 한다. 그 후 태조는 발해국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므로, 그 영토는 동쪽의 일본해로부터 서쪽의 천산(天山)에까지 이르렀으며, 만주와 함께 중국의 북쪽 일대의 땅을 전부 차지했다.
태종(太宗)이 이어서 즉위했다. 이때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五代)의 소란스러운 시기였으므로, 그에 편승하여 중국 본토의 북부를 차지하여, 한때 그 영토는 황하(黃河)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또 태종 때 국호를 요(遼)라고 고쳤다. 그 후 또 거란(契丹)이라고 고쳤다가 혹은 다시 요라고 하는 등 변화가 한 번이 아니었다. 고려는 거란과 영토가 인접해 있었으므로 성종(成宗) 【거란의 성종(聖宗) 때】 이래 여러 차례 침입을 당했는데, 특히 현종(顯宗) 때에는 수도 개경(開京)은 군대에 의해 불탔으며, 왕은 남쪽으로 난을 피했다. 그렇지만 고려는 성종 때부터 거란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속국(藩屬國)이 되었다. 이렇게 더없이 융성한 거란도 중세 이후에는 내분이 끊임없이 일어나 국가의 세력이 점차 쇠약해졌다. 제9대 천조제(天祚帝)가 즉위하자 술과 음식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이때 새로 일어난 여진(女眞)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협공함으로써, 일거에 수도를 함락시키고 천조제를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태조가 나라를 세운 때부터 9대 218년 만에 망했다 【스토쿠(崇德) 천황 시대, 고려 인종(仁宗) 3년】
서희의 업적
[편집]성종(成宗) 12년에 거란이 침입해 왔다. 왕은 친히 그를 막으려고 서경(西京) 【평양】 으로 행차했다.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대에 종사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은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왕은 이로 인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방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왕은 땅을 떼어 주자는[割地] 주장에 따르려 했지만 서희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거란의 진영으로 건너가 의견을 절충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손녕은 서희를 힐난하여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침략했다. 또 우리와 영토를 접하고 있는데도 그를 고려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라고 했다. 그러자 서희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바로 옛날의 고구려이다. 때문에 고려라고 부르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만약 경계를 논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도 역시 우리의 국경 안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침략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찾아가서 천자를 알현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서희의 말투가 매우 격렬했다.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가 구체적으로 상황을 아뢰었다.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이미 화친을 청했다. 군대를 철수함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마침내 그는 땅을 떼어 주지 않고 거란을 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서희는 목종(穆宗) 원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7세 때이다.
강조의 난
[편집]고려 제7대 목종(穆宗)은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모후(母后)인 황보씨(皇甫氏) 【천추태후(千秋太后)】 가 섭정했다. 모후의 외족(外族)으로 김치양(金致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모후의 총애를 받고 멋대로 권세를 부렸다. 마침 목종이 나이가 30세 가까이 되어도 아직 아들이 없었으므로, 치양은 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왕이 이를 알고 몰래 그의 뒤를 잇게 하려고 태조의 손자인 순(詢)을 맞이하면서,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인 강조(康兆)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도록 했다. 이때 유언비어가 성행하여, 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전해져 인심이 흉흉했다. 강조는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서경을 출발했지만, 중도에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현재의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로 뜻을 정하여, 별장(別將) 김응인(金應仁)으로 하여금 순(詢)을 맞이하도록 했다. 강조는 이에 왕에게 퇴위하도록 압박하고 순 【현종】 을 즉위시켰으며, 김치양 부자를 살해하고 태후의 무리들을 유배시켰다. 강조는 더욱 더 위세를 떨쳤는데, 몰래 사람을 보내 폐왕인 목종을 시해했다. 현종(顯宗) 원년에 강조는 거란의 침공을 받고 패하여 사망했다.
강감찬의 귀주의 승리
[편집]현종(顯宗) 9년에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침입해 왔다. 병력이 10만 명이라고 했다. 이듬해 정월에 거란 군대가 개성까지 진격해 왔지만, 전세가 조금도 유리하지 않자 퇴각했다. 고려의 장수 강감찬(姜邯贊) 등은 그들을 귀주(龜州)로 불러들여 격파했다. 하지만 승패는 아직 결판나지 않았다. 고려의 장수 송현(宋鉉) 등이 또한 지원을 왔다. 갑자기 폭풍우가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정기(旌旗)가 북쪽을 가리켰다. 고려의 군대는 이 틈을 타 용기백배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점점 더 급하게 추격했다. 얼어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인마(人馬)와 병장기(兵仗器)를 셀 수 없을 만큼 획득했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고작 수천 명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삼군(三軍)을 이끌고 개선하자 왕은 친히 나와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흥의역(興義驛)】에서 맞이했다. 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음악을 준비하여 장병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금화(金花) 8매를 머리에 친히 꽂아 주었으며, 왼손은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은 술잔을 든 채 위로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초기문화
[편집]고려는 개국하고 처음부터 옛 신라의 인재를 등용하고, 그 인재들이 제도와 문물 등을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 최초의 문화는 신라 문화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일어난 오대(五代)의 난이라는 50여 년간의 소란을 거쳐, 송나라가 점차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지만, 【송나라 태조 원년은 고려 광종 11년에 해당한다.】 국가의 기초는 아직 공고하지 못했으므로, 난을 피해 반도로 투항해 오는 자들이 많아, 문운(文運)의 진보에 기여했다. 따라서 송나라의 문화는 제4대 광종 무렵부터 반도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고려가 요나라와 금나라에 복속된 시대에도 은밀하게 송나라에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어 사신을 보냈으며, 양국의 상선(商船)도 활발하게 왕래했으므로, 송나라의 문화는 갈수록 반도에 많이 수입되었다.
고려 시대의 공예는 신라 시대에 비해 약간 뒤떨어진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건축과 기타 기술은 현존하는 사원(寺院), 발굴품(發掘品) 또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고려 인종(仁宗) 때 송나라의 노윤적(路允迪)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그 수행원인 서긍(徐兢)의 견문기(見聞記)이다.】 등에 따르더라도 상당히 발달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고려소(高麗燒)와 같은 것은 가장 정교하기로 유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