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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9. 고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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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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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전과에 이어 고려 중기 2백 수십 년간의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한다. 즉 이 시기에 고려는 안으로는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잡아 함부로 날뛰고 무신(武臣)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시대였으며, 밖으로는 금나라와 원나라에 복속되었는데 특히 원나라의 억압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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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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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제11대】 부터 5대가 지나 예종(睿宗) 【제16대】 이 즉위했다. 이 왕 때는 국가의 세력이 아직 강성했지만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외척 이자겸(李資謙) 【이자겸의 누이는 순종(順宗, 제12대)의 비(妃)이다.】 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자겸은 갑자기 권세를 얻어 그 일족의 대다수가 고위 관직에 올랐다. 예종이 죽자 그의 아들이 인종(仁宗) 【제17대】 에 즉위했다. 인종은 바로 이자겸의 딸이 낳았으며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즉위했을 때 14세였다.】 정사는 오직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수중에 들어갔고 왕실은 크게 쇠약해졌다. 이자겸은 권세를 믿고 횡포가 극심했으므로 후에 마침내 유배에 처해졌다.

금나라에 복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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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 무렵부터 조선반도의 북부와 만주에서 널리 일어난 여진(女眞)이라는 종족은 점점 강성해져 여러 차례 고려의 북쪽 국경을 유린했지만, 예종 때 【이 왕 10년】 그 추장은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으며, 인종 때는 그때까지 고려를 복속시킨 요(遼)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므로, 【이 왕 3년】 왕은 표(表)를 올려 그에게 신하로 칭했다. 【이 왕 4년】 때문에 인종 이후 백여 년간 【제23대 고종 때까지】 고려는 금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무인의 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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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때부터 고려의 왕실은 크게 쇠약해졌지만 그의 아들 의종(毅宗) 【제18대】 이 즉위하자 더욱 쇠약해졌다. 왕은 음탕한 짓에 탐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당시 문신(文臣)들은 일반적으로 무신(武臣)들을 업신여겼으며, 왕도 역시 그들을 경멸했으므로 무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장군인 정중부(鄭仲夫) 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왕이 절에 행차한 틈을 타 그를 구금하여 거제도로 유배시켰으며, 왕의 가까운 신하들과 기타 많은 문신들을 살육하고, 【이 왕 24년】 그 대신 모두 무인들을 채용했다. 그 이후 고려는 무신들이 발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몽고에 복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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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으로부터 5대가 지나고 고종(高宗) 【제23대】 시대가 되었는데, 이 왕 때 고려의 국내 사정은 또 한 번 변했다. 그것은 이 무렵에 이르러 몽고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고는 중국의 북방에서 일어난 강국이었는데, 사방을 침략하여 그 영토를 확장했으며, 세력이 맹렬하여 당해 낼 수 없었다. 금나라도 역시 몽고의 침공을 받아 크게 쇠약해졌으며, 고려도 고종 18년에 처음으로 몽고의 침략을 받았다. 고려의 군대는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었으니, 몽고의 군대는 도달하는 곳을 마음대로 약탈했으며 나아가 개성을 압박해 왔다. 이 때문에 고려는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신하로 칭했다. 그렇지만 왕은 권신(權臣) 【최이(崔怡)】 의 책략에 따라 난을 피하여 도읍을 강화(江華)로 옮기고 몰래 지키려는 꾀를 냈다. 이에 몽고는 계속하여 왕이 섬을 나와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셀 수 없이 침범하여 그 참혹한 피해는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28년이나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최 씨가 망하자 방침을 바꾸고, 왕 말년 【46년】 에 왕은 이미 늙었으므로 태자인 전(倎)이 대신 원나라에 가서 비로소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고려는 그 말기에 이르기까지 백 수십 년 동안 몽고에 복속되었다.

몽고와 고려 및 일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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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몽고는 고려를 굴복시켰으며,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태자인 전(倎) 【원종(元宗)】 이 몽고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세조(世祖)가 제위(帝位)에 있었다. 이때 몽고는 이미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되었으며, 국호를 원(元)으로 고쳤다. 원나라는 기세에 편승하여 다시 나아가 일본도 복속시키려고 했는데, 우선 고려 왕을 통해 국서(國書)를 올려 왔다. 그 국서의 글이 무례하여 일본은 단연코 그것을 거부했다. 원나라는 이에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의 군대와 함께 규슈(九州)를 침략했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원나라의 겐코[元寇]라고 부른다. 첫 번째는 원종(元宗) 【제24대】 때로, 우리의 분에이(文永) 11년에 해당하며, 다음은 충렬왕(忠烈王) 【제25대】 때로, 우리의 고안(弘安) 4년에 해당한다. 이 두 번의 겐코(元寇)를 우리의 장병들은 잘 막아 내어 싸웠으며, 또한 구풍(颶風)이 일어났으므로, 원나라 군대와 고려 군대는 모두 완전히 패배하고, 원나라는 이로 인해 오히려 그 국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 무렵은 바로 호조씨(北條氏)가 정권을 장악한 때이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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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의 말미에 간략히 서술한 겐코(元寇)에 관해서는, 『심상소학 일본역사』 권1 제20 「겐코」에서 상세히 가르쳐야 한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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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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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李資謙)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다. 그의 누이는 순종(順宗) 【제12대】 의 비(妃)였는데, 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자겸은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예종(睿宗) 【제16대】 때 다시 부름을 받아 둘째 딸을 비(妃)로 바쳤다. 이로부터 가문(家門)의 모든 사람들이 요직에 포진하여 정무를 자기 집에서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종(仁宗) 【제17대】 이 즉위했다. 이자겸은 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왕비로 삼게 했다.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 등은 왕이 이자겸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장군 오탁(吳卓)과 모의하여 몰래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했다. 어느 날 오탁 등이 궁중에 난입하여 이자겸의 패거리인 척준신(拓俊臣)을 살해했다. 척준신의 형인 척준경(拓俊京)은 보복을 하려고 궁궐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왕은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만류하는 자가 있어 중지했다. 이자겸은 왕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음식에 독약을 넣어 살해하려고 했지만, 왕비의 기지로 왕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척준경은 이자겸과 점차 멀어졌다. 왕은 척준경에게 설득되어 마음을 왕실에 의지했으므로, 척준경은 이자겸을 잡아 유배시키니, 점차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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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尹瓘)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여진을 정복했다는 것은 역사에서 유명하므로 여기에서 한마디 해야 한다.

윤관은 자(字)가 동현(同玄)이고 파평현(坡平縣) 【경기도 문산역(汶山驛)】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승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이때 여진(女眞)은 동북경(東北境) 【함경도】 에 자리 잡고 살아 변경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숙종(肅宗) 【제15대】 때 임간(林幹)을 장수로 삼아 여진을 토벌하려 했지만 오히려 크게 패배했다. 그리하여 왕은 윤관으로 하여금 대신 공격하게 했지만 다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관은 돌아와서 적군과 아군 병사들의 장단점을 깊이 살펴 새로 무반(武班)을 설치하고, 주(州)·현(縣)으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여러 해 동안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무기와 식량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리하여 예종(睿宗) 【제16대】 2년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이때 군대는 모두 17만 명이었으며, 도린포(道鱗浦) 【도련포(都連浦)로 정평(定平)의 북쪽에 있다.】에서 군함을 타고 원정길에 올랐다. 윤관 등은 여진 땅에 도착하여 그 소굴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등 9성(城) 【모두 함경남도 함흥 부근에 있다.】 을 쌓았으며, 비(碑)를 공험(公嶮) 【길주 부근】 에 세우고 경계로 삼았다. 또 국경 남쪽의 민호(民戶)들을 이주시켜 위의 진(鎭), 성(城)들에 살게 하고 개선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왕족으로 하여금 성 밖에서 맞이하게 하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윤관 이하 부하들의 관작(官爵)에 차등을 두어 진급시켰다. 그런데 여진의 추장 우야소(鳥雅束)는 이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침입했다. 윤관은 세 번째 명령을 받들어 여진을 토벌했는데 목숨을 잃은 장병들이 대단히 많았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9성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여진에게 돌려주기로 논의하여 결정했기 때문에, 윤관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윤관은 예종 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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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는 곧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인 우고나이(烏古迺)라는 사람이 모든 부(部)를 통일하여, 거란으로부터 절도사(節度使)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헤리보(劾里鉢), 포라슈(頗刺淑), 영가(盈哥) 및 헤리보의 아들 우야소(鳥雅束)는 연달아 직위를 세습하면서 점차 강대한 기반을 다졌다. 우야소의 동생 아골타(阿骨打)가 즉위하여, 요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진 기회를 틈타, 마침내 스스로 일어서 황제로 칭하고, 도읍을 회령(會寧) 【하얼빈의 남쪽】 에 정했으며, 국명을 금(金)이라고 했다. 【도바(鳥羽) 천황 시대, 고려 예종 10년】 그를 금나라 태조(太祖)라고 한다. 이때 요나라는 천조제(天祚帝)가 재위하고 있었는데, 금나라를 친히 정벌하려다 오히려 크게 패배했다. 이어서 금나라 태종(太宗)은 송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북 양쪽에서 요나라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고려 인종(仁宗) 3년】

요나라의 멸망은 대부분 금나라 군대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금나라 태종은 송나라를 매우 가볍게 여기고, 그 허약한 틈을 노려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시켰으며,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사로잡아 북쪽으로 돌아갔다. 송나라는 세력이 위축되어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도읍을 임안(臨安)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으로 옮겼다. 그것을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송나라는 국력이 더욱 쇠약해져 금나라와 싸울 때마다 크게 패하자, 많은 세공(歲貢)을 바치고 화의를 요청했으며, 마침내 금나라의 봉책(封冊)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발해와 요나라의 옛 영토를 점유했으며, 계속 남하하여 거의 중국 본토의 북반부를 차지하여, 송나라와 회수(淮水)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태조의 손자 치쿠나이(廸克乃)는 도읍을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北京)】 으로 옮기고, 단번에 송나라를 합병시키려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 원정에 나섰지만, 오히려 송나라 군대에 패하여 군대를 철수했는데 도중에 살해되었다. 세종(世宗)이 이어서 즉위하여 송나라와 화친을 맺고 오로지 내치(內治)에 전념했지만, 금나라는 이 무렵부터 국력이 점차 쇠약해졌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중국 북쪽에 강대한 몽고(蒙古)가 일어났는데, 마침내 그에 의해 멸망했다. 【시죠(四條) 천황 시대, 고려 고종(高宗) 21년】 금나라는 나라를 유지한 것이 모두 10황제 120년이다.

최씨의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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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毅宗) 【제18대】 때, 무관파(武官派)의 우두머리인 정중부(鄭仲夫)는 문관(文官)의 횡포에 분노하여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왕을 폐위하고 명종(明宗) 【제19대】 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문관과 무관의 알력은 점점 심해졌으며 또 무신들 사이에서도 서로 반목하여 분쟁이 항상 끊이지 않았는데, 최충헌(崔忠獻)은 일거에 권신(權臣)인 이의민(李義旼) 일족을 살육하여 그를 대신했다. 최충헌은 새로 왕의 동생을 신종(神宗) 【제20대】 에 옹립하고, 병사들을 사저(私邸)에 주둔하게 하여 변고에 대비했으며, 정령(政令)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병권(兵權)과 정권(政權)을 모두 잡고, 자손들에게 그 직책을 세습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일본]의 장군(將軍) 직책과 같았다. 그것을 영공(令公)이라고 불렀다. 신종이 세상을 떠나고 희종(熙宗) 【제21대】 이 즉위했다.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은 왕이 최충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승병(僧兵)과 몰래 연락을 취하여 최충헌을 살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최충헌은 크게 노하여 왕을 폐위하고 강화도로 축출했으며, 명종의 아들을 강종(康宗) 【제22대】 으로 맞이했다. 왕이 재위한 지 고작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최충헌은 고종(高宗) 【제23대】 을 즉위시켰다. 최충헌이 죽고 최이(崔怡) 【처음 이름은 우(瑀)였다.】 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아버지의 폭정을 매우 많이 개혁했다. 이때 몽고 군대가 침입해 왔으므로, 이 왕 19년에 최이는 왕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난을 피했다.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고, 만약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서슴지 않고 죽였다.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崔竩)가 뒤를 이었는데, 나이가 어리고 우둔했으므로, 이 틈을 타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과 도령낭장(都領郎將) 임연(林衍) 등이 최의를 살해했다. 최충헌이 무인의 말단 지위에서부터 능력을 발휘하여 국정을 전횡하고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4대 60여 년이 지나 최씨는 멸망했다.

고려의 강화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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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제23대】 19년에 최이는 왕을 받들어 몽고 군대를 피해 강화도로 갔다. 몽고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왕이 옛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몽고 군사들은 명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최씨가 망하자 고종은 태자 전(倎)으로 하여금 대신 입조(入朝)하게 하여 평화를 회복했지만, 아직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종이 죽고 태자 전 【원종(元宗)】 이 몽고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며, 이어서 다시 입조했다가 11년 만에 귀국하자, 몽고의 뜻에 따라 수도를 다시 개경(開京)으로 옮겼다. 고려가 강화(江華)로 수도를 옮긴 지 39년 만이었다.

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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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는 원래 오늘날의 외몽고(外蒙古) 지방에서 살던 종족으로, 항상 천막에서 살았으며 유목을 업으로 삼았다. 성질이 용맹하고 말을 잘 탔다. 고려 중기 무렵에 그들의 부장(部長)이던 테무친(鐵木眞)이 있었는데, 근방의 여러 부(部)를 병합하여 내몽고와 외몽고 땅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마침내 전체 부족에게 추대되어 대칸[大汗]의 지위에 오르고, 칭기스칸(成吉思汗) 【권력이 가장 강한 군주라는 뜻.】 이라고 불렀다. 【고토바(土御門) 천황 시대, 고려 희종(熙宗, 제21대) 2년】 칭기스칸은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고 황하(黃河)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서하(西夏) 【중국의 서북 지방】 를 멸망시키고 병합했으며, 다시 중앙아시아로 진격하여, 부장(部將)으로서 멀리 오늘날의 러시아 남부를 정복하고, 다시 군대를 돌려 금나라를 침입하다가 중도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를 원(元)나라 태조(太祖)라고 한다. 그 후 3대, 약 30년 만에 몽고는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의 북반부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남쪽의 안남(安南) 지방까지를 평정했으며, 또한 그 원정군은 폴란드[波蘭], 독일(獨逸) 등에도 침입하여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헌종(憲宗)이 세상을 떠나자 이때 송나라를 원정하고 있던 세조 쿠빌라이(忽必烈)가 강남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제위(帝位)를 계승한 것은, 고려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이다. 【일본에서는 가메야마(龜山) 천황의 분노(文應) 원년에 해당한다.】 이때 고려는 몽고에 완전히 굴복하고, 태자 전(倎)은 아버지 대신 입근(入覲)하고 몽고 조정에 있었는데, 세조는 전(倎)에게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했다. 그가 원종(元宗)이다. 원종은 몽고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태자를 몽고에 보냈으며, 자신도 역시 입조하여, 한결같이 공손한 정성을 표시했다. 이리하여 몽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단지 일본뿐이었으므로, 세조는 일본을 신하로 복속시키려고 고려를 통하여 국서(國書)를 일본에 바쳤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 대해 답서(答書)를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사신이 다시 오자 단연코 그를 처단하고, 규슈(九州)의 방비를 매우 삼엄하게 했다. 이어서 몽고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또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일본은 그에 답하지 않았으므로, 몽고는 고려 원종 15년 【일본 고다이고(後宇多) 천황 분에이(文永) 11년,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11년】 정월에 장수를 파견하여 전함(戰艦)을 만들도록 독려했는데, 6월에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했고, 같은 해 10월에 군대가 합포(合浦) 【경상남도 창원군】 를 출발하여 일본을 침략했다.

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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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나라의 원수(元帥)는 흔도(忻都)였고, 좌우(左右) 부원수(副元帥)는 유복형(劉復亨), 홍다구(洪茶丘) 두 사람이었으며, 고려군의 도독(都督)은 김방경(金方慶)이었다. 그 병력 수는 몽한군(蒙漢軍) 2만 5천 명, 고려군 8천 명, 뱃사공 6천 7백 명이었고, 전함은 9백여 척이었으며, 군량(軍糧)과 배의 자재는 모두 고려에서 징발했다. 연합군은 먼저 쓰시마(對馬)와 이키(壹岐)를 공격했으며, 나아가 지쿠젠(筑前)의 하카타(博多)에 접근했지만, 미리 방비를 삼엄하게 하고 있던 일본은 연합군을 물리쳐 격파했다. 때마침 큰 바람이 일어나 전함이 침몰하고,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었으며, 흔도, 김방경 등 장수들은 모두 합포로 도망쳐 돌아갔고, 돌아가지 못한 부하들은 1만 3천 5백 명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이듬해는 바로 고려 충렬왕 원년으로, 왕은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민력(民力)이 피폐하여 다시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고 읍소했다. 그 궁핍했던 상황은 상상할 만하다. 그러나 원나라는 평소의 뜻을 이루려고 충렬왕 원년과 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일본에 보내 국서(國書)를 가져왔지만, 그 국서가 무례했으므로 바쿠후(幕府)는 명령을 내려 사신들을 모두 참수함으로써 우리의 결심을 나타냈으며 더욱 방비를 삼엄하게 했다. 원나라는 이전의 패배를 갚지 못하자, 한편으로 고려에 명하여 급히 전쟁 준비를 가다듬도록 했지만, 때마침 충렬왕 5년에는 송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그 기세에 편승하여 일거에 일본을 굴복시키려고 하여, 같은 왕 7년 【일본 고다이고 천황 고오안(弘安) 4년, 원나라 세조 지원(至元) 11년】 에 다시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을 침략했다. 이때는 군대를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나누었는데, 동로군은 몽고족과 한족 병사 약 3만 명, 고려 병사 약 1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전함은 9백 척으로 흔도, 홍다구 등이 그 장수였고, 김방경이 고려군을 이끌었다. 또 강남군은 만족(蠻族) 병사 10여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전함은 3천 5백 척였는데, 범문호(范文虎) 등이 이들의 장수였다. 범문호는 바로 송나라에 항복한 장수였다. 동로군은 우선 합포를 출발하여 이키를 거쳐 지쿠젠으로 접근했지만, 일본군이 분전하여 원나라 군대는 거듭하여 패배했으며 또한 질병에 크게 시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범문호가 이끄는 강남군은 시기를 놓쳐 늦게 와서 간신히 합류했으며, 막 동로군과 함께 서둘러 나아가려고 했지만, 때마침 구풍(颶風)이 크게 일어나, 원나라의 함선들은 전복되기도 하고 파손되기도 하여,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여러 장수들은 도망쳐 돌아갔다. 원나라 군대는 죽은 자가 10만여 명, 고려군은 죽은 자가 7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원나라는 이후에 다시 군대를 일으켜 지난번의 패배를 갚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원사(元史)』·『고려사(高麗史)』·『동국통감(東國通鑑)』】

충렬왕 이후에는 대대로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원나라 이름을 사용했으며, 국왕의 폐위와 즉위도 역시 완전히 원나라의 뜻대로 했다.

원나라는 한때 대단히 강성했지만, 일본을 공격하여 대패하면서부터 국력이 차츰 피폐해져, 자타가 공인하는 대제국도 점차 분열되어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5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강남에서 일어나 금릉(金陵) 【남경(南京)】 에서 승리를 거두고, 같은 왕 17년에 마침내 연경(燕京)을 함락시켰으므로, 원나라 순제(順帝)는 막북(漠北)으로 도망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데 불과했다. 원나라는 태조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14대 왕 165년 동안 이어졌다.

고려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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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행정구역은 성종(成宗) 【제6대】 때 국내를 10도(道), 28주(州), 468현(縣)으로 분할했지만, 현종(顯宗) 【제8대】 때 4도호(都護) 8목(牧)으로 고쳤고, 후에 다시 5도(道) 양계(兩界)로 바꾸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契丹), 금(金), 몽고(蒙古) 등과 항상 북쪽의 강국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토는 때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그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하고자 한다.

거란 및 금나라와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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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서쪽으로는 거란과 압록강 하류를 경계로 삼았고, 동쪽으로는 여진(女眞)과 영흥(永興), 정평(定平) 방면을 경계로 삼았다. 때문에 고려는 서쪽의 압록강 하구부터 시작하여 비스듬히 반도를 횡단하여 함경남도 정평을 지나 동쪽으로 일본해 연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음으로써, 국경의 방비를 공고히 했다. 이 장성은 덕종(德宗) 【제9대】 2년에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쌓은 것을 시작으로, 정종(靖宗) 【제10대】 10년에 이르기까지 약 12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현재 압록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에 가까운 의주군(義州郡) 광성면(光城面) 성외동(城外洞) 고성(古城)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치 긴 뱀처럼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의 두 도를 거쳐 정평에 이르는데, 대체로 해안에 이르기까지의 그 궤적을 알 수 있다.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설치했을 때는, 한때 그 국경이 함흥(咸興)의 북쪽에 있는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렀지만,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오래지 않아 그 전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여진이 나라를 금(金)이라고 부르면서부터 금이 망할 때까지 국경에 변화가 없었다.

몽고와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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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제23대】 21년에 몽고가 금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땅은 모두 몽고가 차지하였다. 같은 왕 45년에 몽고가 장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화주(和州) 【영흥(永興)】 땅에 주둔했다. 이때 용진(龍津) 사람인 조휘(趙暉)와 정주 사람인 탁청(卓靑) 등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화주 부사(副使) 등을 살해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몽고에 종속시켰다. 이에 몽고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總管)으로 임명했으며,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아 자손이 각자 그 직위를 세습하게 했다. 이리하여 고려의 동북(東北) 국경은 금나라 시대에 비해 조금 밀려났다. 그 후 12년이 지나 원종(元宗) 【제24대】 10년에 임연(林衍)이라는 자가 극도로 흉포하여 왕을 폐위하고 왕의 동생인 우(瑀)를 옹립하여 정권을 농단했으므로, 같은 해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관리인 최탄(崔坦)이라는 사람이 임연을 살해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주(州)에는 그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탄은 서경(西京) 【평양】 유수(留守)와 그 밖의 여러 주의 수령들을 살해하고, 이듬해에 몽고에 복속하고 군대를 요청했다. 몽고는 이에 응하여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라고 고쳐 부르고,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경계로 삼고, 최탄을 총관으로 삼았다. 자비령은 대동강 유역의 남쪽에 있으며 황해도에 속했다. 그 후 최탄은 죄를 지어, 충렬왕(忠烈王) 【제25대】 16년에, 원나라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의 모든 성들을 돌려주었다. 때문에 자비성 이북의 땅은 원나라에 속한 지 20년 만에 고려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5년에 원나라가 쇠퇴한 것을 틈타, 유인우(柳仁雨)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했다. 유인우는 이자춘(李子春) 【이성계의 아버지】 의 은밀한 도움으로 그곳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므로, 고려는 이에 원나라에 표(表)를 올려, 정식으로 그 점령을 승인해 주도록 요구했다. 화주(和州)를 원나라의 치하에 빼앗긴 후 이때까지 99년이 걸렸다.

고려 말기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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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때, 동북 국경을 회복한 후 이씨(李氏)가 오랫동안 함흥 방면에서 임무를 맡아 변경의 여진 부족들을 진압했으므로, 여진은 점차 항복하여 귀순해 왔다. 그러므로 고려는 원나라의 위력이 실추된 틈을 타 점차 국경을 북쪽으로 옮겼는데,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때, 동북쪽의 단천(端川), 길주(吉州), 갑산(甲山), 서북쪽의 초산(楚山) 등은 모두 고려의 영토 내에 있었지만, 장진(長津), 강계(江界) 지방은 아직 고려의 영토에 편입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