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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1. 조선의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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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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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창업, 특히 즉위한 후의 사건에 관해 서술하고, 더불어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알려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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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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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름은 성계(成桂)】 의 아버지는 환조(桓祖) 【이름은 자춘(子春)】 이고, 어머니는 최씨(崔氏)라고 한다. 그의 조상은 원래 전주(全州)에서 출발하여, 일찍이 신라와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지만, 후에 함경도 방면으로 옮겨가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대대로 지방관을 지냈다. 환조(桓祖) 때 영흥(永興) 【함경남도】 에서 살았다. 같은 군(郡) 내의 순령면(順寧面) 흑석리(黑石里)는 그들의 옛 집이 있던 곳으로, 태조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최씨도 역시 영흥 사람이다. 태조는 성장하면서 체구가 거대하고, 힘이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또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고려 공민왕 5년에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영흥의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게 하자, 환조는 고려군과 내통함으로써 쉽게 그곳을 함락시킬 수 있게 하였는데, 태조도 역시 아버지를 도와 공을 세웠다. 이때 태조의 나이는 22세였다. 그 후 태조는 아버지에 이어,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동북 지방을 평정하였는데, 여진(女眞)을 진압하기도 하였고, 몽고를 정벌하기도 하였으며, 왜구(倭寇)를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 관직이 계속 높아져 문하시중(門下侍中) 【재상】 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고려의 많은 신하들이 추대하게 되어, 공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58세 때였다. 【일본 고고마쓰(後小松) 천황 겐츄(元中) 9년으로 다이쇼(大正) 10년으로부터 530년 전이다.】 그가 즉위식을 거행한 곳은 개성(開城)의 수창궁(壽昌宮)으로, 그 궁궐터는 지금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태조는 즉위와 함께 이름 [諱]을 단(旦)이라고 고쳤다. 또 태조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왕씨(王氏) 대신 왕위에 즉위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자, 명나라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국호·천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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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에 국호를 정하려고,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이 일을 주청(奏請)하였으므로, 명나라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허락하였다. 3년에, 태조는 도읍을 개성에서 한성(漢城) 【즉 지금의 경성】 으로 옮기고, 왕궁을 백악(白岳) 기슭에 건축하고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태조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요(瑤) 【공양은 추존호(追尊號)】 를 강원도에 머물게 하였으며, 그의 일족은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의 두 섬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그런데 태조는 왕 씨를 복위시키려고 모의하는 자가 나올 것을 염려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령을 내려 요와 그의 일족을 살해하였다. 【3년】 단지 요의 아우인 왕우(王瑀)라는 자는 태조의 왕자와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여 경기도 마전(麻田)에 사당을 짓고, 대대로 고려 왕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 사당을 숭의전(崇義殿)이라고 부른다.

정도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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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왕자가 여덟 명 있었다. 그 가운데 여섯 명은 한씨(韓氏)가 낳았지만, 한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며, 계비(繼妃) 강씨(康氏)가 나머지 두 아들을 낳았다. 강씨는 자기가 낳은 왕자를 왕이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왕은 마침내 여덟째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옹립하였다. 【2년】 정도전 등은 세자에게 붙어, 배다른 여러 왕자들을 멀리하고, 계책을 세워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새어나가 정도전 등은 오히려 방원(芳遠) 【태조의 다섯째 아들】 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세자와 그의 형 【계비 한씨 소생들】 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것을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 이른다. 【7년】

정종의 즉위와 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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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난으로 세자가 살해됨으로써, 태조는 다시 그의 둘째 아들인 경(曔) 【처음의 이름은 방과(芳果)】 을 후사(後嗣)로 세웠으며, 이어서 양위하였다. 그를 정종(定宗) 【제2대】 이라고 한다. 태조가 재위한 지 7년 만이다. 정종은 부왕을 존중하여 태상왕(太上王)이라고 부르고, 그의 동생인 방원을 세자로 삼았다. 재위한 지 겨우 2년이 되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그가 바로 태종(太宗) 【제3대】 이다.

태조의 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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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양위한 후 태상왕이 된 지 10년 만에 마침내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 8년】 명나라는 태조에게 강헌(康獻)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때부터 국왕이 즉위하면 명나라에 주청(奏請)하여 승인을 받았으며, 국왕이 죽으면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또한 매년 하정사(賀正使)를 보내는 등, 명나라를 공손히 섬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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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의 수업에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사정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제11과 「고려 4」를 참조해야 한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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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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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휘(諱) 한(翰) 신라에서 벼슬을 하여 사공(司空)이 되었다.

제2대 휘 자연(自延)

제3대 휘 천상(天祥)

제4대 휘 광희(光禧)

제5대 휘 입전(立全)

제6대 휘 긍휴(兢休)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다.

제7대 휘 염순(廉順)

제8대 휘 승삭(承朔)

제9대 휘 충경(充慶)

제10대 휘 경영(景英)

제11대 휘 충민(忠敏)

제12대 휘 화(華)

제13대 휘 진유(珍有)

제14대 휘 궁진(宮進)

제15대 휘 용부(勇夫)

제16대 휘 인(璘)

제17대 휘 양무(陽茂)

제18대 목조(穆祖) 휘 안사(安社) 처음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제19대 익조(翼祖) 휘 행리(行里)

제20대 도조(度祖) 휘 춘(椿)

제21대 환조(桓祖) 휘 자춘(子春) 다시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다.

제22대 태조(太祖) 휘 성계(成桂)

태조의 선조는 전주(全州)에서 출발하여,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신라에서 사공(司空)이 되었다. 그로부터 자손들이 이어져, 제17대 양무(陽茂)에 이르기까지의 사이는, 제6대 긍휴(兢休)가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한 것 외에는 그 사적(事蹟)이 전해지지 않는다. 18대 목조(穆祖)는 휘(諱)가 안사(安社)로, 역시 일찍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의주(宜州) 【지금의 덕원(德源)이라고 한다.】 지사(知事)가 되어 선정을 펼쳤다. 후에 강릉부(江陵府)의 삼척현(三陟縣) 【강원도】 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러는 동안에 또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남경(南京) 【간도(間島) 국자가(局子街) 부근】 에서 5천 호(五千戶)가 소속된 다루가치(達魯花赤) 【원나라 지방 관직명】 가 되었다.

목조의 아들 익조(翼祖)는 휘가 행리(行里)로, 역시 남경에서 천호(千戶)에 봉해졌지만, 여진(女眞)의 박해를 피해 두만강을 따라 내려와, 마침내 적도(赤嶋) 【함경북도】 로 들어왔으며, 후에 덕원부(德源府) 【함경남도】 로 돌아왔다. 익조의 아들은 휘가 춘(椿)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받았다. 그를 도조(度祖)라고 한다.

도조의 둘째 아들 자춘(子春)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받아, 역시 천호가 되었으며, 쌍성(雙城) 【함경남도 영흥】 땅에서 살았다. 후에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공민왕 4년에 처음으로 알현하였는데, 이듬해에 고려로부터 소부윤(少府尹)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에 고려 장수 유인우(柳仁雨)가 군대를 이끌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자, 자춘은 그와 내통하여 총관부를 함락시켰으며, 마침내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9년에, 삭방도(朔方道) 【훗날의 함경도】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에 임명되어 동북 국경을 진무하였지만, 4월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46세였다. 그가 곧 환조(桓祖)로서, 실로 태조(太祖)의 아버지이다. 【『고려사(高麗史)』·『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정릉비문(定陵碑文)」】

태조 이성계는 아버지에 이어 동북면(東北面)의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국경의 여진족을 진압하고 공을 세우고, 화령 부윤(和寧府尹) 【함경남도 영흥】 이 되었으며, 또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그들을 격파하여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였으며, 마침내 고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준원전과 수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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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원전은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동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순령면(順寧面) 흑석리(黑石里)에 있다. 이곳은 이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옛 저택이 있던 곳으로, 태조는 그 저택에서 태어났다. 태조 5년에 이 땅에 준원전을 지어 그것을 표시하였다. 수창궁(壽昌宮)은 고려 현종(顯宗) 이후의 왕궁으로서, 태조도 역시 이 궁의 화평전(和平殿)에서 즉위하였다. 【옛날에 궁궐 앞에 있던 궐문교(闕門橋)라고 불리던 석교(石橋)는 지금 개성 대화정(大和町)에 있으므로,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개성에는 태조의 저택인 목청전(穆淸殿)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에 다시 지었다.】 및 경덕궁(敬德宮) 【지금은 헐렸다.】 이 있다.

즉위의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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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것은 임신년(壬申年) 【일본 고고마쓰(後小松) 천황 겐추(元中) 9년,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25년】 7월 17일로, 곧바로 조반(趙胖)을 명나라 조정에 파견하였고, 이어서 또한 조림(趙琳)을 보내, 표(表)를 올려, 왕씨가 무도(無道)하였으므로, 백관(百官)과 더불어 인민들의 추대(推戴)에 의해 대신 통치의 임무를 맡게 되었음을 고하고, 그것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9월 12일에 그것을 허락하였지만, 아직 왕호(王號)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왕이라고 칭하였지만, 명나라에 대해서는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칭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마침내 고명(誥命)으로써 권지국사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고, 금인(金印)을 내린 것은 태종 원년 【개국 후 10년, 명나라 혜제(惠帝) 건문(建文) 3년】 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

국호의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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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즉위와 동시에, 나라 안에 왕의 명령을 발하여 새로운 정치의 큰 방침을 알리고, 국호(國號)는 아직 예전대로 고려(高麗)라고 칭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명나라에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택하여 국호를 고쳐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듬해 2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돌아와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또한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때문에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라.”라는 명령을 아뢰었다. 태조는 이에 명령을 나라 안에 발하여, 같은 날 이후 고려라는 국명을 폐지하고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한성에 도읍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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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즉위하자, 방대한 수도를 건설하고 그것을 옮기려고 하였는데, 곳곳의 땅들을 살펴보고, 마침내 오늘날의 경성(京城)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3년 10월에 백관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애초에 이 땅은 고려 숙종(肅宗) 때부터 남경(南京)이라고 불렀으며, 이궁(離宮)을 지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쳐 불렀으며, 폐왕(廢王) 우(禑)와 공양왕(恭讓王) 은 모두 한때 옮겨왔던 적도 있었다. 이리하여 태조는 개성부(開城府)로부터 천도하게 되었다. 태조는 천도한 후, 백악(白岳)의 남쪽 기슭에 경복궁(景福宮)을 지어 왕궁으로 삼았으며, 그 동쪽에 태묘(太廟), 서쪽에 사직(社稷)을 지었고, 5년이 되자 그 주위에 길이 4리(里) 정도에 이르는 성벽(城壁)인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정종(定宗) 【제2대】 원년 3월에 다시 옛 도읍인 개성부로 돌아갔다가, 이후 6년이 지나 태종(太宗) 【제3대】 5년 10월에 다시 새 도읍으로 옮겼으며, 그로부터 이후 5백여 년 동안 수도는 바뀌지 않았다.

한성과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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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명칭은 태조가 도읍을 정함과 동시에 한성부(漢城府)로 바뀌었다. 한성부는 행정상의 명칭으로, 일한병합(日韓倂合) 후, 즉 메이지(明治) 43년 10월 1일에 경성부(京城府)로 고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도성 즉 성벽(城壁) 안 【성의 내부(內部)】 과 그 주위 10리 【한리(韓里)】 의 땅 【성의 저부(底部)】 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 주요 부분인 도성은 보통 경성(京城)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서울 【경도(京都) 또는 경락(京洛)】 을 말한다.

고려 왕씨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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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즉위하자, 고려의 폐왕 요(瑤) 및 그의 아우 우(禑)를 함께 승진시키고 그 외의 왕씨 일족은 모두 강화(江華)·거제(巨濟) 두 섬에 분산시켰다. 아마 승진시킨 것은 태조에게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며, 우는 그의 딸이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방번(芳蕃)에게 시집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8월에 폐왕 요를 공양군(恭讓君)에 봉하고, 비(妃)와 세자와 함께 그를 원주(原州) 【요가 퇴위한 후 피신하여 살았다.】 에서 간성(杆城) 【강원도】 으로 옮기고, 우를 귀의군(歸義君)에 봉하고, 마전(麻田) 【경기도】 에 살게 하여 그곳에 사당을 세워 왕씨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태조 2년에 거제에 있던 왕씨 일족이 육지에 나오도록 명을 내렸으며, 또한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어질게 대한다는 취지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조 3년에 이르러 동래현령(東萊縣令) 김가행(金可行),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밀성(密城)의 맹인인 이흥무(李興茂)라는 사람에게 국가의 안위와 왕씨의 명운(命運)을 점쳐 본 사실이 발각되고, 그 일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 【비고 10 「일본과의 관계」 참조.】 가 연루되었다. 이 일로 이들은 모반을 꾀한 자들로서 모두 체포되고, 일단 육지로 나오는 것을 허락받은 왕씨 일족은 모두 거제로 돌려보내졌으며, 공양군 부자는 삼척(三陟) 【강원도】 으로 보내졌다. 이때 대간(臺諫)과 형조(刑曹) 등이 연서(連署)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 음모를 도모하는 자가 있는 것은, 공양군과 그 일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를 제거하지 않으시면…….”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것이 12차례나 되었다. 왕은 마침내 뜻을 정하고, 사람을 삼척에 보내 취지를 공양군에게 전하고, 공양군 및 두 아들을 교살(絞殺) 하였으며, 다시 강화와 거제에 보낸 왕씨 일족은 바다에 던져 죽였다. 【3년 4월】 또 명을 내려 대대적으로 왕씨의 나머지 싹을 찾아내어 모두 죽이고, 어느 누구도 성(姓)을 왕씨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이 태조는 왕씨 일족에 대해 단속을 엄격하게 하였지만 태종(太宗) 【제3대】 때에 이르러 왕씨 일족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마침 고려 종실의 서얼(庶孼)들 중 민간에 숨어 살고 있는 자가 있다고 고해 바치는 자가 있었지만, 왕은 “만약 이씨가 도(道)가 있다면, 비록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능히 우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가 아니라 할지라도 천명을 받아 대대로 흥하는 자가 없겠느냐.”라고 하여, 이후로 왕씨의 후예를 발각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를 용서하고 각자 그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으며, 【13년】 또한 전(前)의 폐왕 공양군을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16년】 앞에서 언급한 귀의군 왕우(王瑀)의 뒤로는 그의 아들 (珇)가 아버지에 이어 귀의군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그 이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문종(文宗) 【제5대】 원년에 명을 내려 왕씨의 후예를 찾았고 왕씨의 제사를 지냈으며, 또한 그 사당을 숭의전(崇義殿)이라고 불렀다. 왕씨가 관리에 임용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이 태왕(李太王) 4년에 대원군(大院君)이 개혁을 단행할 때 비로소 왕씨의 후예를 등용하였다.

태조의 왕자들과 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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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왕자가 여덟 명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대군(大君)은 적자(嫡子) 출신의 왕자에게 붙이는 호칭이고, 군(君)은 서자(庶子) 출신 왕자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2남 정종(定宗), 휘는 경(曔), 처음의 휘는 방과(芳果)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5남 태종(太宗), 휘는 방원(芳遠)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비(妃) 한씨(韓氏)가 낳았다. 한씨는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귀의군 왕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후에 살해되었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세자가 되었다. 후에 살해되었다.】

【이상은 계비(繼妃) 강씨(康氏)가 낳았다.】

정도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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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비 강씨는 그가 낳은 왕자를 세자로 옹립하려 하였으므로, 태조는 논의하여 여덟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정하였다.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은 세자의 편에서 배다른 여러 왕자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태조 7년에 왕이 병이 났다고 계략을 써서, 여러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거사를 단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략을 알아챈 사람이 비밀리에 방원에게 알렸다. 이에 방원은 무사들을 이끌고 정도전, 남은 등을 습격하여 그들을 죽였다.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역시 살해당하였다. 이를 ‘정도전의 난’이라고 부른다.

방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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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아들 방간은 방원의 영민함을 시기하였다. 마침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朴苞)가 벼슬이 낮은 것에 불만을 가졌다. 정종 2년에, 박포는 마침내 방간을 꾀어, 병사들을 이끌고 방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패하고, 박포는 죽임을 당하였으며, 방간은 유배에 처해졌다. 이를 ‘방간의 난’이라고 부른다.

계비 강씨는 정도전의 난이 일어나기 전, 태조 5년에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그를 깊이 애도하여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으며, 관련 기관에 명하여 도성 안의 황화방(皇華坊) 북원(北原) 【지금의 경성 정동(貞洞) 영국 총영사관의 위치】 정릉(貞陵)에 매장하였으며, 또한 능의 동쪽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태종 방원이 왕위에 즉위하고, 8년 5월에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정릉을 성 밖의 양주(楊州)로 옮기고, 이후 신덕왕후에 관한 전례(典禮)는 일절 살피지 않아 그 능묘도 역시 완전히 황폐화되게 방치하였다. 그 후 250년이 지나 현종(顯宗) 【제18대】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 능묘를 고쳐 만들고, 신덕왕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태조묘(太祖廟)에 함께 제사 지냈다. 정릉은 지금의 양주군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다.

퇴위 후의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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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7년 9월에 정종(定宗)에게 양위하였다. 정종은 부왕을 존중하려 상왕(上王)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상왕은 방석과 방번 두 아들의 난을 당한 후, 마음이 항상 편치 않았고 정종 원년에 금강산으로 들어버렸다. 그후 태종 원년 윤3월에 개성을 출발하여 새 도읍인 한성(漢城)을 거쳐 금강산으로 갔으며, 이어서 안변(安邊)으로 가서 한 달여 동안 살았다. 정종은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상왕을 수도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 2년 11월이 되자 상왕은 다시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고 동북으로 향하여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 로 갔다. 이에 왕은 승려 무학(無學)을 보내, 상왕이 속히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12월이 되자 수도로 돌아왔다. 그 후 6년이 지나 태종 8년 5월에 태조는 병으로 창덕궁(昌德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이조의 시법과 명·청의 시호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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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정의 중신(重臣)들이 그의 시호(諡號)와 함께 묘호(廟號)를 선정하고, 이어서 왕이 즉위한 후 그것을 올리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능을 완성하고 그 능의 이름을 정하였다. 이 밖에 특별히 종주국인 중국에 대해, 고부 겸 청시 청승습사(告訃兼請諡請承襲使)를 파견하여 국왕의 부음을 알리고, 시호와 새로운 왕이 왕위를 세습하는 것에 대한 승인을 주청(奏請)하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그러면 종주국으로부터는 반드시 두 자로 된 시호를 내렸다. 【예를 들면 태조에게 내린 시호는 강헌(康獻), 정종에게 내린 시호를 공정(恭靖)이라고 한 것과 같다.】 위의 내용은 명(明)·청(淸) 복속(服屬) 시대를 통틀어 결코 변한 적이 없었으며, 태조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는 명나라로부터, 인조부터 철종 【이 태왕(李太王)의 전대 왕】 까지는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폐왕은 시호 등이 없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에 독실하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국내에서는 그들이 내린 시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는 근세까지 사용하였지만, 광무(光武) 원년 【메이지(明治) 30년】 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칭하게 되자, 또한 그것도 폐지하였다.

일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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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일본 해안 근처의 주민들이 반도의 연안을 침략하였으며,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공민왕 때부터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안의 침입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시대 최초의 사신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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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가 즉위하고, 그 3년 5월에, 일본 회례사(回禮使) 김거원(金巨原)과 승려 범명(梵明)이 함께 포로로 잡혀왔던 남녀 659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이조(李朝)가 일본에 파견한 최초의 사절이다. 【지금 김거원이 조선을 출발한 연도와 월은 분명치 않다.】 이때 일본의 주방수호(周防守護)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도 역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으므로, 6년 12월에 태조는 전(前) 비서감(秘書監) 박돈지(朴惇之)를 회례사로 오우치씨에게 보냈으며, 또한 빙례(聘禮)를 아시카가(足利) 바쿠후(幕府)에 보냈다. 전 장군 요시미쓰(義滿)는 이를 기뻐하여, 특히 사절을 파견하여 특산물을 주고, 또한 포로 남녀 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이 무렵 바쿠후와 기타 사람들이 조선에 사신을 보낸 목적은 주로 대장경(大藏經)을 얻으려는 데 있었다.

태조가 쓰시마에 군대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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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해구(海寇)가 반도 연안을 침략하자, 조선에서는 이끼(壹岐), 쓰시마(對馬) 두 섬을 그 소굴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고려 공양왕 원년에 경상도 원수(元帥) 박위(朴葳)는 병선(兵船) 백여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 해구의 침략은 약간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태조는 5년 12월에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로 삼아, 병선을 이끌고 이끼, 쓰시마 두 섬을 정벌하였다. 김사형은 이듬해 정월에 수도로 돌아왔지만 결국 해상(海上)에 나가지 않았는지 그 행동을 기록한 것은 없다.

류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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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琉球)는 곧 일본의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사츠마(薩摩)의 남쪽에 해당하며, 바다에 있는 군도(群島)의 명칭이다. 그 섬의 사람들은 상고 시대에 일본에 귀화하거나 찾아온 바 있다.

류큐의 개국 시조는 덴손씨(天孫氏)라고 하며, 자손 대대로 국군(國君)이었지만, 25대에 이르러 권신(權臣)들에게 시해되었으므로, 우라소에(浦添) 안지(按司) 【안지는 류큐의 제후(諸侯)이다.】 는 의(義)를 부르짖으면서 그를 죽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되어 왕위에 올랐다. 【일본 고토바(後鳥羽) 천황 분지(文治) 3년, 고려 명종(明宗) 17년.】 그가 바로 슌텐왕(舜天王)이다. 슌텐왕은 이름이 손돈(尊敦)으로, 아버지는 일본의 무장(武將)인 미나모토 다메토모(源爲朝)라고 일컬어진다. 【다메토모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숙부이다.】 호겐(保元)의 난에서 패하여 이즈(伊豆)의 오시마(大島)로 유배되었다. 【호겐의 난은 『보통소학교 국사』 상권(上卷) 제7과 참조】 다메토모는 몰래 오시마를 빠져나와 오키나와 섬에서 살며 섬을 정복하고, 오사토(大里) 안지(按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손돈을 낳았다. 【후에 다메토모는 오시마로 돌아갔지만 손돈은 류큐에 머물면서 우라소에 안지가 되었다.】 그 후 나라에서 크게 난이 일어나 추잔(中山), 잔난(山南), 잔호쿠(山北)의 세 나라로 나뉘었고, 왕은 겨우 추잔을 소유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다마시로왕(玉城王)의 아들 세이이(西威)가 죽자, 국력이 점차 쇠약해졌으므로, 여러 안지(按司)들이 협의하여, 우라소에의 안지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가 곧 추잔왕(中山王) 치토(察度)이다. 치토 시기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중국에서 황제가 되었는데, 치토는 그의 초유(招諭)에 응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표(表)를 올리면서 신하로 칭하였다.

조선과 류큐의 교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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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홍무(洪武) 6년, 고려 공민왕 22년.】 이것은 류큐가 중국과 소통한 첫 번째 사례이다. 치토는 고려 폐왕 창(昌) 원년 8월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왜구에게 잡혀 온 사람들】 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창은 이에 전객령(典客令) 김원후(金元厚) 및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보내 답례하였다. 이것이 류큐와 조선 반도가 교류한 최초의 사례이다. 조선 태조 원년 7월에 치토도 또한 사신을 보내 우호를 전하고, 이후 거의 끊이지 않고 해마다 공물을 바쳤지만, 치토의 아들 부네이(武寧) 때, 명나라로부터 책봉사(冊封使)를 보내와, 추잔국왕(中山國王)으로 봉해진 두, 사시키(佐敷) 안지(按司) (巴志)는 군대를 일으켜, 세 나라를 통일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명나라는 그에게 쇼(尙)씨 성을 부여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쇼씨(尙氏)라고 불렀고, 조선 세종 13년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류큐의 방문으로 조선과 교류를 맺었는데, 거리가 멀고 나라 사람 중에 바닷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 많은 일본인 상인과 승려 등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신으로 삼았다. 당시 류큐는 일본에도 여러 차례 조공을 보내왔으며, 또한 효고(兵庫)에 와서 무역을 하였지만, 카키츠(嘉吉) 원년 【조선 세종 23년】 에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敎)는 일찍이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시마즈씨(島津氏)를 사츠마(薩摩), 오쓰미(大隅), 휴가(日向) 등 세 주(州)의 슈고시키(守護職) 및 남해(南海) 12섬의 지토(地頭)에 봉하고, 류큐를 시마즈 다다쿠니(島津忠國)에게 하사하였으며, 또한 훈시와 예물을 보내주었다. 이때부터 류큐는 번번이 사츠마에 사절을 보냈다.

분로쿠(文祿) 원년에 【조선 선조(宣祖)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은 명나라를 정벌할 군대를 일으키자, 류큐는 먼저 급히 사신을 보내 이를 명나라에 알렸다. 후에 게이죠(慶長) 14년 【조선 폐왕 광해군 원년】 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는 류큐가 에도(江戶)에 조공을 하라는 명을 받들지 않고, 그의 사신을 능멸한 것에 분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그를 정벌하고, 국왕인 쇼네이(尙寧)를 사로잡았으므로, 이후에는 완전히 치토에 복속되어, 형식상으로는 일본과 명나라 양국에 복속한 것으로 보였으며,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그 관계는 명나라 때와 다르지 않았다. 조선과의 교류는 분키(文龜) 원년 【조선 폐왕 연산군 7년】 까지는 직접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로는 류큐는 명나라에 오는 조선 사절을 통해 간신히 예물을 보냈지만, 그 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중단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세조실록(世祖實錄)』】

이씨 개국의 공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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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皇紀) 2052년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 겐추(元中) 9년】 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대신 왕위에 즉위하자, 이른바 개국공신으로서 그 공훈이 기록된 사람이 56명 있었다. 지금 아래에 일등공신 중 가장 저명한 사람 다섯 명을 선정하여, 약전(略傳)을 기록하고자 한다.

배극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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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양가(量可)이고 성주(星州)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승진을 거듭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씨 개국 초기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태조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태조 원년에 일등공신의 칭호를 하사받고, 5상(相) 중 한 사람으로 열거되었다. 배극렴은 일찍이 진주(晉州), 【경상남도】 상주(尙州) 【경상북도】 등에 목사(牧使)로 나갔으며, 모두 좋은 평판을 들었다. 그러나 무비(武備)에는 그가 뛰어나지 못하여, 고려 말에 해구(海寇)를 사근역(沙斤驛)에서 방어하다 크게 패하였다. 태조가 저이(儲貳)를 세울 때, 배극렴은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나이 어린 방석(芳碩)을 세우도록 주청하여, 스스로 그 공을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정도전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세종 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8세 때이다.

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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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당(松堂)이고 평양 사람이다. 어려서 큰 뜻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 공민왕 말년에, 부임하여 강원도로 갔으며,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행동하여 인심을 많이 얻었다. 이 태조(李太祖)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맞아들여, 크고 작은 일을 불문하고 그와 상의하였다. 조준은 크게 감격하여 알고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계책을 올리는 것이 매우 많았다. 이성계는 당시 가장 분란이 심하였던 전제(田制)를 개혁하여 민심을 얻는 데 조준의 힘에 의지한 바가 많다고 말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날 저녁에, 도통사(都統使)의 은인(銀印)을 하사하고, 5도의 병마(兵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고, 훈일등(勳一等)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조준의 개혁과 영달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정종(定宗) 때 처벌을 받을 뻔하였지만 방원(芳遠)의 청원으로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태종은 일찍이 조준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환담하였다. 조준은 『대학연의(大學衍義)』 한 부를 바치며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시면, 나라를 잘 다스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 5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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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峰)이다.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공민왕 11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司藝), 예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폐왕 우(禑) 초기에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지만 다시 기용되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위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때 시중 정몽주 등은 이성계의 위세와 명망이 나날이 왕성해지는 것을 꺼려하여, 먼저 그를 보좌하는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 이성계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정몽주의 일당에 의해 탁핵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는 남은, 조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즉위시켰다. 태조는 정도전의 공을 평가하여 봉화백(奉化伯)에 봉하고, 이어서 발탁하여 정승을 삼았다. 3년에 명을 받고 한양을 살펴보고 새로운 도읍을 정하였다. 궁전의 여러 문(門)들과 시가지의 거리 이름은 모두 그가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무릇 이씨 개국의 규모 있는 시설들은 대체로 그의 손에서 나왔다. 태조는 어느 날 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주연을 성대히 베풀었는데, 술이 얼큰하게 취하여 정도전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경(卿)이 힘을 썼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가 얼마나 태조에게 신임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芳碩)이 세자에 옹립되자, 정도전은 후에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남은(南誾) 등과 모의하여, 태조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모아, 일거에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계략이 탄로나 오히려 방원(芳遠)에게 살해되었다. 저서가 여러 가지 있지만, 『삼봉집(三峰集)』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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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이두란(李豆蘭)이라고도 한다.】 원래 여진(女眞)족 사람이다. 용맹하고 힘이 세며 활을 잘 쏘았다. 원나라 말기에 여진 부락이 크게 혼란스러워지자 집을 떠나 북청(北靑) 【함경남도】 으로 옮겨갔으며 마침내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다. 이지란은 항상 이성계의 남방 원정과 북방 정벌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이성계가 남쪽에서 극심하게 창궐한 해구(海寇)와 운봉(雲峰) 【전라북도】 에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둘 때 공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개국 초기에 공을 세워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비인 신덕왕후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나라 안팎으로 명망이 높았다. 정도전의 난 때에 처신을 잘하여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노후에 독실하게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이 72세였다. 태조의 묘정(廟廷)에 향배(享配)하였다.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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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宜寧) 【경상남도】 사람이다. 성격이 호방하여 사소한 일에는 구애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기묘한 꾀를 잘 부렸다. 폐왕 우(禑) 때, 해구(海寇)가 여러 차례 삼척군(三陟郡) 【강원도】 에 와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남은은 스스로 청하여 그곳에 가서 해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왕 14년에 요동(遼東) 원정에 나섰다. 이성계는 대군의 장수로서 진격하여 압록강 중류의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남은은 곧 조인옥(趙仁沃) 등과 모의하여, 이성계에게 권유하여 요동 공격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성계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마침내 군대를 회군하였다. 이때부터 이씨를 돕는 사람들과 이씨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서로 다투어 분란이 극에 달하였지만, 남은은 몰래 이씨를 추대하려고 이성계의 아들 방원 【 태종】 에게 그 뜻을 알렸다. 방원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입니다. 가볍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 4년에 정몽주 등은 대간(臺諫)을 부추겨서 이씨 무리를 보좌하는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하였다. 남은도 역시 관작을 삭탈당하여 먼 곳으로 유배되었지만, 정몽주가 횡사함으로써 다시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은은 조인옥, 정도전 등과 서로 모의하여, 이성계를 추대하여 즉위하도록 하였다. 공(功)을 세움에 따라 개국 일등공신에 올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태조는 일찍이 “만약 남은, 조인옥이 없었다면 어찌 대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태조 7년에 남은은 정도전 등과 모의하여 세자 방석을 위해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그 사실이 누설되어 오히려 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세종 때, 남은이 개국에 큰 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으며, 강무(剛武)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조의 묘정에 향배하였다.

정종의 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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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定宗)은 그의 아우인 방원(芳遠)의 겸양으로 태조에게 선양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방원 【후에 태종】 은 개국의 공이 커서 많은 신하들이 그에게 몰려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왕위를 차지하고 있으려 하지 않아 재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방원에게 양위하였으며, 후에 세종 원년에 세상을 떠났다. 상왕(上王)의 지위에 있은 지 19년 만이다. 그가 나라를 다스린 동안 있었던 중요한 사항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원년 3월.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이때 백관(百官)과 군민(軍民)은 모두 옛 도읍을 그리워하고, 상왕 【태조】 도 역시 그곳을 생각하며 애석해하였으므로, 종실 및 백관들과 협의하여, 이 달에 상왕을 받들고 개성으로 천도하였다.

2년 4월.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 등은 상소를 올려,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그들을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키도록 주청하였다. 고려 말기 이래로 나라에 1여(旅), 1오(伍)의 군대가 없었고, 군정(軍政)이 오로지 권세 있는 가문에 귀속되었으며, 장수(將帥)는 모두 사가(私家)의 장수였고, 사병은 사가의 군대였는데, 이에 이들이 상소한 것이다. 이리하여 왕은 세자와 협의하여 권근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것은 실로 당시에 대단히 현명한 결단으로, 개혁의 선구가 되었다. 또 이 달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정하고, 의정부(議政府) 및 삼군부를 정하였다. 의정부는 곧 행정의 수뇌로 삼고, 삼군부는 곧 군사(軍事)의 수뇌로 삼았다. 【제4과 비고 「중앙관제」 참조. 『정종실록(定宗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회통(朝野會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