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2. 태종 및 세종
교수요지
[편집]본과에서는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두 임금이 뒤를 이어 견고히 다지고 이룩한 사적(事蹟)에 관해 서술하였으므로, 안으로는 제도와 문물을 잘 정비하고 밖으로는 해구(海寇)와 여진(女眞)에 대해 방비할 방도를 강구한 사항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태종과 세종의 사업
[편집]정종(定宗) 【제2대】 은 그의 아우인 태종(太宗) 【제3대】 에게 양위하고, 태종은 재위한 지 18년 만에 그의 아들 세종(世宗) 【제4대】 에게 양위하였다. 세종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은 모두 총명하고 정치에 뜻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치세를 합친 50년 동안에 5백여 년간 반도를 통치할 기초를 능히 구축할 수 있었다. 주요한 내치(內治)의 업적은 갖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농사를 권장하였으며, 학예(學藝)를 장려하였고, 기타 조세를 줄였으며, 형벌을 가볍게 한 것 등이 주요한 것들이다.
쓰시마와의 수교
[편집]외교(外交)에 관한 업적은 다음과 같다. 해구(海寇) 【이른바 왜구】 는 고려 시대 중반 이후 발생하여 조선 시대 초기까지 여전히 끊이지 않아 오랫동안 반도를 괴롭혔다. 그러므로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해구의 근거지를 파괴하려고 태조 5년과 세종 원년의 두 차례에 군대를 보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때문에 세종은 그들에 대해 위무(慰撫)의 정책을 강구하여, 제포(薺浦),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모두 경상남도 해안에 있다.】 의 세 포구에만 한해서 쓰시마 섬 사람들이 일정 기간 와서 무역을 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하는 등, 그들을 매우 우호적으로 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왜구의 폐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어서 또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와 조약을 체결하여, 쓰시마에서 오는 무역선의 수를 1년에 50척으로 제한하고, 조선 정부는 도주(島主)에게 매년 일정한 양의 쌀과 콩을 주며, 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선박은 모두 쓰시마도주의 증명서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25년 계해조약(癸亥條約)】
북방의 영토 개척
[편집]반도의 북부인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유역은 고려 시대부터 여진의 소굴이었으므로 여진족은 항상 변경을 시끄럽게 하였다. 세종 때 【15년】 이 종족 안에서 분란이 일어난 틈을 타 김종서(金宗瑞)를 파견하여, 두만강 지방의 개척을 시도하였다. 김종서는 북쪽으로 가서 순차적으로 여섯 개의 진성(鎭城) 【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종성(鍾城)·온성(穩城)·부령(富寧)】 을 설치하고, 남쪽의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이들 진성을 일컬어 육진(六鎭)이라고 한다. 그 후 장수를 파견하여 압록강 상류 지방의 여진을 평정하였으므로, 【19년】 이로 인해 두 강 이남 지방은 비로소 조선의 통치로 귀속되었다.
비고
[편집]태종과 세종의 치세 중 중요한 사항
[편집]태종과 세종은 모두 정치에 뜻을 쏟아 농업을 장려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처리하였으며 유학(儒學)을 권장하였다. 특히 세종은 음률(音律), 역상(曆象) 등을 배우는 데에도 마음을 기울여 여러 시설을 만든 것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조(李朝)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킨 많은 업적들이 이 두 왕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실들 중 중요한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 원년.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에 통합하였다. 이 해에는 지폐를 제조하여 백성들이 활발히 사용하도록 하였다. 【의정부는 정종 2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문하부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으며, 제반 행정을 통솔하는 곳이다.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에 통합되었다.】
2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으며 모든 사람에게 호패(號牌)를 발급하여 출입할 때 반드시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호구(戶口)를 밝힐 것을 시도하였다.
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내부(內府)의 동(銅)을 가져다 활자를 주조하였다.
8년. 부녀자의 재가(再嫁)를 금지하고, 그 자손은 벼슬아치의 명부에 두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10년.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 주었다. 【호포는 고려 시대에 시행된 세금으로, 저포(苧布)를 거두어 군수(軍需)를 충당하였다.】
13년. 8도(道)의 경계를 정하였다.
세종 2년.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文學)의 선비들을 선발하여 채용하였으며, 또한 집현전의 북쪽에 장서각(藏書閣)을 지었다.
7년. 영의정(領議政) 유정현(柳廷顯) 등의 건의를 받아들어 관리들의 구임(久任)에 대한 법을 제정하였다.
8년. 의금부(義禁府)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에서 죄인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막기 위해 의금부 삼복(三覆)의 법을 제정하였다.
11년.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농업 기술에 관하여 늙은 농부들이 이미 체험한 기술을 물어서 듣게 하였고, 다시 총제(摠制)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그것에 토론과 검증을 더한 다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여 나라 안팎에 배포하였다.
12년. 태배(笞背)의 형벌을 금지하고, 또한 노인과 어린이를 감옥에 가두는 법을 폐지하였다.
15년. 처음으로 조제(朝祭)에 아악(雅樂)을 사용하고,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신경(新磬) 【악기】 을 만들도록 하였다.
19년. 조세법(租稅法)을 제정하였다.
20년. 도천법(道薦法)을 시행하여, 선비의 덕행이 탁월하다고 향리(鄕里)에서 소문난 사람이나 재능이 특별한 사람이 있으면, 각 도의 관찰사들로 하여금 수소문하여 찾아내도록 하였다. 이 해에는 또한 각종 천문(天文)에 관한 기계들을 제작하였으며, 또한 흠경각(欽敬閣)을 건립하였다. 【제4과 비고 「천문(天文)」 참조.】
21년. 녹과(祿科) 【봉급령(俸給令)】 를 제정하여, 백관(百官)의 정1품부터 종9품에 이르기까지를 18과(科)로 나누고,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24년.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였다.
25년. 별도 부서를 궁궐 안에 두고, 언문(諺文)의 제작에 관해 심의하였다.
26년. 전제(田制)를 제정하였다. 또한 노비를 때려죽이는 것에 관한 법을 개설하여, 노비가 죄가 있으면 그를 관청에 알리도록 하여 함부로 때려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30년. 8도의 전품(田品)을 개정하고, 대신(大臣)들을 그 관찰사로 삼았다.
쓰시마와의 관계
[편집]앞 과에서도 서술한 이른바 왜구(倭寇)의 침략은 일본의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엄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고, 조선의 수륙군대의 방비가 점차 정돈되고, 태조 이래로 평화의 정책을 위하여 점차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태종 때에도 여러 차례 사소한 침략들이 있었다. 특히 세종 원년 5월에는 충청도의 비인현(庇仁縣)에 왜구가 침입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황해도 해주(海州)를 침략하였다. 대개 이때의 왜구는 대대적으로 명나라 연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때문에 왕은 태종(太宗)과 협의하여 【당시 태종은 이미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하였지만 아직 군사 업무는 보고 있었다.】 쓰시마를 정벌할 군대를 일으키고, 6월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에게 함선 227척과 병사 1만 7천여 명을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쓰시마에서는 큐슈(九州)로부터 많은 장병들이 와서 힘을 합쳐 왜구를 막았으므로 조선군은 처음에는 우세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결전(決戰) 【6월 26일】 에서 패배하여, 편장(褊將) 박홍신(朴弘信), 박무양(朴茂陽) 등을 비롯하여 병사 백 수십 명을 잃었고, 이종무는 패잔병과 선박을 수습하여 7월에 헛되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쇼우코(稱光) 천황 오에이(應永) 26년에 해당하며, 당시 왜구의 침범을 몽고·고려·남만(南蠻) 연합군이 침략해 온 것으로 착각하여, 겐코(元寇) 이래의 가이코(外寇)라고 일컬었다.】 이 달에 조선은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을 쓰시마에 파견하여 화친을 논의하고,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는 이에 응하여 가신(家臣)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곧바로 예전대로 회복되었다. 이리하여 세종은 또 원래의 평화정책에 의지하였으며, 마침내 쓰시마인들을 위해 3포【제포·부산포·염포】 를 개항하고, 교역과 어업을 허락하였으며, 교역이나 어업이 끝나면 곧장 쓰시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제정하고, 일본 각지의 호족들이 파견하는 사선(使船)을 모두 접대(接待)하며, 귀환할 때에는 도해량(渡海糧)을 주는 등 크게 우대하였다. 【접대는 사신이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그 일행 모두에게 날짜 수에 따라 식량을 주는 것을 말하며, 도해량은 바다를 건너온 거리와 날짜 수에 따라 쌀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후 해구의 침략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많은 호족과 쓰시마에서 오는 사선(使船)의 인원 등은 매년 증가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선박 수와 식량을 제한할 필요를 느꼈다.
계해조약
[편집]세종 25년 계해년(癸亥年) 【일본 카키츠(嘉吉) 3년】 에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와 조약을 체결하여, 해마다 파견하는 선박 수는 50척으로 제한하고 【단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보고(報告) 등의 일이 있을 때는 예외의 특송선(特送船)을 허가한다.】 도주에게는 매년 쌀과 콩을 합쳐 2백 석을 하사하기로 하였으며, 또한 다른 사선(使船) 【바쿠후(幕府), 칸레이(管領), 부에이(武衛, 斯波), 오우치(大內), 시마즈(島津), 키쿠치(菊池) 등 거대한 종족들의 사선은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들은 반드시 쓰시마 도주의 도서(圖書) 【감합인(勘合印)】 가 찍힌 증명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이를 계해조약(癸亥條約)이라고 한다.
당시 쓰시마·이끼(壹岐) 및 큐슈(九州) 연해의 여러 종족들로서 약간의 특수한 공로가 있는 사람 가운데 이따금 조선의 관직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을 수직인(受職人)이라고 불렀고 이들에게 매년 한 차례씩 교류를 허용하였으며, 또한 접대를 받는 특전을 주었다. 그렇지만 사람을 파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에 관해 한마디 하자면, 매년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파견하는 선박은 사선(使船)의 명분을 가지므로 사신 일행은 위에서 말한 접대 등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는 공무역(公貿易)과 사무역(私貿易) 두 가지가 있었다. 사무역이란 즉 3포(浦) 지역에서 시장을 열어 서로 교역을 하는 경우를 말하며, 공무역이란 사선(使船)에 싣고 온 납(鑞), 구리, 단목(丹木), 흑각(黑角) 등을 조선 공부(公府)의 목면(木棉)과 가격을 정하여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얻은 목면을 다시 쌀로 바꿔 가지고 돌아갔다. 【『태종실록(太宗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통문관지(通文館志)』·『교린지(交隣志)』】
감합인
[편집]세종 때 처음으로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도서(圖書) 【인장(印章)으로 일본에서는 보통 감합인(勘合印)이라고 부른다.】 를 발급하여 교류의 증명으로 삼았으며, 또한 일본으로부터 교류를 원하는 사람은 설령 제후(諸侯)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도서를 날인한 증명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외는 비고 2 「쓰시마와의 관계」 참조.】 그 증명서를 다른 말로 문인(文引)이라고 한다. 또 소(宗)씨 외에도 간혹 조선과 특수한 관계로 도서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반드시 소(宗)씨의 문인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에서 소(宗)씨 및 기타 사람들에게 도서를 발급하는 경우에는, 그 도장을 종이에 찍어서, 예조(禮曹) 전교서(典校署) 및 3포(浦)에 그것을 비치해 두고, 사신 등이 올 경우에 증명서를 대조하여 진위(眞僞)를 검사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앞의 그림은 세종 때 조선에서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준 동인(銅印)으로, 사방의 길이가 1치[寸] 5푼[分] 남짓으로, 소(宗)씨 대에는 매번 고쳐 주조하여 보내주었다. 또 단종(端宗) 【제6대】 때 오우치(大內)씨에게 준 적도 있다. 아래 그림과 같다.
이 도장은 길이가 1치 8푼, 폭이 5푼 남짓 되는 동인(銅印)으로 무게는 43문(匁) 7푼이다. 세로로 “조선국에서 대내전에 내리는 통신의 오른쪽, 경태 4년 7월 일 만들다[朝鮮國賜大內殿通信右符景泰四年七月 日造]”라고 2행으로 새겨져 있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로, 그 4년은 일본 쿄토쿠(享德) 2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치(足利義政) 시대로, 즉 조선 단종 원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신부(通信符)라는 글자는 반으로 잘렸는데, 한쪽은 조선에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오우치 씨에게 준 것이다. 또 성종(成宗) 【제9대】 5년 【일본 분메이(文明) 6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 때】 에 통신부 10매를 바쿠후(幕府)에 준 적이 있다. 이것은 상아로 만들었으며, 둘레는 4치 5푼, 지름은 1치 5푼로, 한쪽 면에는 전서(篆書)로 조선통신(朝鮮通信)이라는 네 글자를 썼고, 다른 한쪽 면에는 성화 10년 갑오(成化十年甲午)라고 썼으며, 각각에 번호를 매겼다. 【1부터 10까지】 이것은 당시 조선과 교류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따금 바쿠후(幕府)의 사자(使者)라고 사칭하는 자가 있어, 진짜 사절과 판별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었으므로, 바쿠후의 요청에 따라 특별히 조선에서 준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통문관지(通文館志)』·『인국보기(隣國寶記)』·『조선교통대기(朝鮮交通大紀)』·『취고첩(醉古帖)』】
가짜 왜구
[편집]이른바 왜구(倭寇)는 반드시 일본인만이 아니었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언어와 풍속을 모방하고 왜구로 가장하여 나쁜 행위를 저지른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짜왜구[假作倭寇]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그 단초가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 왜구의 폐해가 가장 심하였다는 폐왕 우(禑) 14년에, 관련 기관에서 "화척재인(禾尺才人) 【백정(白丁)과 같은 비천한 사람】 은 농사짓는 일을 하지 않고, 산골짜기에 모여 왜적(倭賊)이라고 사칭(詐稱)한다.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폐해가 한층 심각하였던 것 같다. 특히 세종 25년에 쓰시마와 조약을 체결하고부터는 왜구의 폐해가 갑자기 사라졌지만, 【본과 비고 「쓰시마(對馬)와의 수교」 참조】 그에 반해 가짜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기이한 상황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조선 쪽의 가장 신뢰할 만한 사료(史料)인 『이조실록(李朝實錄)』에서 그와 관련된 서너 가지 예증을 살펴볼 것이다.
태조 3년에 명나라 사신은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나무랐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영해위(寧海衛) 【산동성】 가 조선의 노략질하는 강도[劫賊] 한 명을 잡았는데, 만호(萬戶) 김사언(金寺彦) 이하 259명이 7척의 배에 포(布) 560필을 싣고 탑승하여, 상업적 명목을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을 정찰하였다. 그 후 또 같은 목적으로 배 10척에 승조원(乘組員) 270명을 파견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러한 가짜왜적[假作倭賊]은 사단을 일으키는 자들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또 이듬해에 명나라 사신인 김인보(金仁甫)가 귀국할 무렵, 조선인이 왜구로 가장하여 요동(遼東) 및 산동성(山東省) 연안을 약탈한 변소(辨疏)한 상주문을 맡긴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짜왜구는 멀리 중국 연안 지방까지 진출하여 분쟁을 야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28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은 인민들 가운데 다른 도(道)로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다고 걱정하여, 호패법(號牌法) 【신분, 성명, 생년월일 등을 표시한 부절】 을 다시 시행하도록 세종에게 올린 글 가운데, “신(臣)이 듣건대, 이전 왕조 말기에 왜구가 왕성하게 활동하여 민생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 왜인(倭人)들이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국(本國) 백성들이 왜복(倭服)을 지어 입고, 무리를 이루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세조 2년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백정(白丁)의 잔인성을 말하면서, 이들을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도록 할 것을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이 가운데 “이전 왕조 【고려】 시기에 거란이 침입해 왔을 때, 가장 먼저 길을 안내하였으며, 또한 거짓으로 왜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강원도에서 일어나 경상도에서 만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도적들이 붙잡히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모두 이런 무리들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백정들이 가짜왜구가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던 범위가 얼마나 광대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성종 9년에 전라도에서 왜구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적이 있다. 영사(領事) 심회(沈澮) 등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달아난 자들이 간혹 왜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변경의 장수들로 하여금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지사(知事) 이광배(李光培)가 그 말을 반박하여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공을 세우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장수를 파견하여 왜적을 잡지 못하면, 곧 고기잡이하는 왜인들을 강제로 잡아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종 13년에 이의형(李義亨)이 올린 글에도 “제주도의 떠돌이 백성들은 대다수가 진주(晉州), 사주(泗州) 지역에 빌붙어 살면서 바다를 떠도는데, 왜인(倭人)의 언어와 의복을 하고서 침략합니다. 청컨대 본토로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상을 요약하면 이른바 왜구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약간 과장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왜구는 반드시 항상 일본인에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고 난폭한 무리들이 자주 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진과의 관계
[편집]압록강 상류 방면
[편집]고려 말에, 갑산(甲山) 【함경남도】 및 압록강 연안의 초산(楚山) 【평안북도】 은 이미 고려의 영토 안에 편입되었지만, 국경은 아직 강계(江界) 【평안북도】 에 이르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 점차 북방을 개척하여 태종 원년에 이 지방을 석주(石州)라고 불렀으며, 3년에 강계부(江界府)라고 고쳐 불렀고, 압록강 상류의 연안 지방은 모두 조선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 여진(女眞) 사람들이 자주 영토 안으로 침입해 왔으므로, 15년에 여연(閭延)과 강계 사이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에 평안도 절제사(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이 파저강(婆豬江) 【만주에 있으며, 지금의 통가강(佟佳江)】 의 여진족을 정복하였으며, 19년에 절제사 이천(李蕆)이 다시 그들을 정벌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상류 지방에는 여연, 자성, 무창(茂昌), 우예(虞芮) 등 4군(郡)을 설치하고, 이 방면의 지배를 완전히 이룩하였다. 그러나 후에 세조 때에 이르러 여진이 다시 발호하자, 결국 4군 땅을 포기하고, 그곳 백성들을 귀성(龜城) 【평안북도】 강계(江界) 두 부(府)의 경계 안으로 이주시켰다.
두만강 방면
[편집]고려 말부터 이씨는 이 지방에 있는 여진족의 위무(慰撫)에 힘을 쏟았으므로, 태조가 즉위한 초기에 이미 조선의 영토는 두만강 하류에 다다랐다. 태조는 이에 이지란(李之蘭)을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按撫使)로 삼아 이 지방에 파견하여, 여진을 조선의 습속에 동화시키고, 조선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였으며,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는 모두 편호(編戶)와 동등하게 해 주었으며, 갑주(甲州) 【함경남도, 지금의 갑산】 및 공주(孔州) 【함경북도, 지금의 경흥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옛 읍】 땅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설치여 그들을 다스렸다. 또 같은 해에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삼아 군현(郡縣)과 지계(地界)를 획정하였으며, 또한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으므로, 북쪽 변방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태조 6년】 그러나 태종 때에 이르러 여진 사람들이 자주 침입해왔으므로, 10년 4월에 태종은 논의하여 부(府)를 경성(鏡城) 【함경남도, 지금도 같은 이름이다.】 으로 물리고, 그 땅을 이 방면의 방어 요충지로 삼았다.
육진
[편집]세종은 이 방면의 통치 전략에 관해 진취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15년 10월에 여진족 내에 내분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삼아,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咸吉道) 【함경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등용하여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김종서는 점차 그 지역을 개척해 나갔으며, 마침내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종성(鍾城), 온성(穩城), 부령(富寧) 【이상 함경북도】 등 6진(鎭)을 설치하고, 보을(甫乙) 아래부터 훈융진(訓戎鎭)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아, 이들 진성(鎭城)을 연결하여 북쪽을 방비하였다. 이리하여 세종의 동북 통치 전략은 점차 효과를 거두고, 두만강 안쪽의 땅을 거둬들였지만, 그 상류 지역에 이르러서는 결국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김종서
[편집]김종서의 자(字)는 국경(國卿)이고, 호(號)는 절재(節齋)이다. 그는 전라남도 순천 사람으로 몸집이 왜소하였지만 지략이 풍부하였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나갔으며,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이때 두만강 연안 지역에 오랫동안 여진인(女眞人)들이 할거하고 있어서 항상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은 큰 뜻을 품고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김종서를 발탁하여 함길도 【함경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하였다. 김종서는 왕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에 감동하여, 마음을 다해 북방의 통치 전략에 임하였지만, 완강한 야인(野人)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였다. 조정의 의견은 이론(異論)이 쏟아져, 통치 전략을 중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김종서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회령, 경원, 경흥, 종성, 온성, 부령의 6진을 구축하였다. 진(鎭)들은 모두 산에 의거하고 물에 임하는 천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이 둘이 서로 호응하여 야인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또한 남쪽의 백성들을 6진으로 이주시켜 영구히 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북쪽 변경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세종은 일찍이 “비록 과인(寡人)이 있었지만, 만약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종서가 있다 할지라도 과인이 없었다면 이 일을 주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종서는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문종 때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고명(顧命)을 받고 어린 임금인 단종(端宗)을 보좌하였다. 이어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김종서는 지략이 풍부하고,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대호(大虎)와 같았다. 이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 은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일을 거행하려고 하면서, 먼저 김종서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수양대군은 친히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부하인 임예(林藝)로 하여금 기회를 틈타 불시에 그를 내려치도록 하였다. 다음날 김종서는 깨어났지만 수양대군 일파들에게 참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