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12. 대한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교수요지

[편집]

본과에서는 메이지(明治) 27, 28년의 전쟁 전후(前後),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에 관해 가르치고,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공공연히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이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지만 실력은 전혀 그에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

러시아와의 관계

[편집]

러시아는 점차 시베리아를 점령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영토를 빼앗아 이 태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점차 조선을 주시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후 조선은 러시아와 통상조약(通商條約)을 체결하여, 【메이지 17년, 이 태왕 21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 가 경성에 와서 주재하였다. 이 무렵은 임오정변(壬午政變) 후여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때였지만, 오히려 그 억압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제(交際)의 수완이 매우 뛰어났던 러시아 공사와 그 부인은 그에 편승하여 교묘하게 국왕과 왕비의 신임을 얻었으며, 궁정의 안팎에 친러파(親露派) 사람들을 만들어 점차 자국(自國)의 이익을 취하기에 급급하였다. 일청전쟁(日淸戰爭) 후 일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을 받고, 일단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청나라에게 할양(割讓)받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돌려주는 등의 일로 반도에서의 세력이 감퇴되었다. 이 틈을 타 러시아는 점차 그 야심을 드러냈다. 때마침 메이지 29년 【개국 505년, 이 태왕 33년】 2월에 강원도 춘천에서 폭도들이 일어나, 친러파와 친미파 사람들을 멀리한다는 명분으로 몰래 국왕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2월 11일】 국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옮겨간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국왕의 명이라고 칭하여 총리대신 이하 친러파와 친미파를 좋아하지 않는 중신(重臣)들을 붙잡아 살해하였는데 그 잔인함이 이를 데 없었다. 살해당한 중신들 대신 자기 당 사람들로 자리를 대체하였다. 바로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채굴하며 혹은 철도를 부설하는 등의 권리들을 러시아와 북미합중국 및 프랑스 등의 사람들에게 허가한 것은, 모두 같은 해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동안의 일들이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은 미국인의 운산(雲山) 금광(金鑛) 【평안북도】 경영이다.

대한

[편집]

일본은 이러한 형세를 묵과할 수 없어 곧바로 러시아와 교섭하여 협약을 체결하였으므로, 【6월】 이듬해 메이지 30년 【개국 506년, 이 태왕 34년】 2월 【20일】 에 국왕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월이 되자 조선은 예전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탈피하여 바야흐로 아무것도 고려할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고쳐 대한(大韓)이라 하였으며, 국왕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8월 12일】 조칙으로써 전에 세웠던 건양(建陽)이라는 연호(年號)를 취소하고, 새로 광무(光武)라고 연호를 정하였다. 【8월 16일】 이리하여 비로소 독립국의 체재(體裁)는 갖추어졌지만 그에 따른 실력은 없었으니, 정부는 오로지 러시아에 의뢰하여 러시아 사람들을 초빙하여 정치를 하게 하였다. 이때 한국에서 러시아의 지위는 마치 한때 사대당이 강성하던 무렵의 청나라와 다름없는 양상이었다.

갑오 이후의 진보

[편집]

이와 같이 반도의 정치에서 일본의 세력은 한때 러시아에게 빼앗긴 것처럼 보였지만, 반도의 문명적 시설들은 이 동안에도 점차 일본인의 손에 의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중 중요한 것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31년 【광무 2년, 이 태왕 35년】 에는 우편과 전신 제도도 대략 갖추어졌고, 메이지 33년 【광무 4년, 이 태왕 37년】 에는 경성과 인천 간의 철도가 처음으로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경부(京釜) 철도도 역시 같은 해 무렵부터 부설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비고

[편집]

러시아의 동방 침략

[편집]

서력(西曆) 제16세기 말엽 무렵에 우랄산맥 동쪽의 땅인 시베리아는 몽고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그 장(長)을 시비르 칸(汗)이라고 불렀다. 러시아인 에르마크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우랄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달아나, 코사크족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시비르 칸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에게 그 지역을 바치고, 또한 전에 지은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시아 황제는 이것을 받아들여 에르마크를 시비르 백(伯)에 봉하였다. 이때가 서기 1581년 【일본 오기마치(正親町) 천황 덴쇼(天正) 9년, 조선 선조 14년】 이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최초로 시베리아를 지배하여 통치한 것이며, 또한 아시아 북쪽 땅을 시베리아라고 총괄하여 부르게 된 기원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인들이 동쪽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은 해마다 크게 진전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시베리아 일대의 땅은 척박하여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광산물이 풍부하고 또한 고가(高價)의 모피가 산출되었으므로, 모험을 즐기는 러시아인들 특히 코사크인들은 속속 대오를 이루어 이주해 왔다.

러시아가 1600년대에 점차 흑룡강(黑龍江) 유역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손을 뻗치자, 야크사(雅克薩) 【흑룡강 연안의 알바진 성(城)】 및 닝구타(寧古塔) 【송화강 유역에 있다.】 등에서 러시아와 청나라 양국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기 1689년 【강희(康熙) 28년】 에 양국 사이에서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되어 외흥안령(外興安嶺) 및 아르군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기로 하자 다년간에 걸친 분쟁은 일소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결과 러시아는 완전히 흑룡강 지방을 공략하여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어 물러나 있은 지 160년이 되었다. 이때 무라비요프가 출현하여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되었다. 1847년에 무라비요프는 동부 시베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해군 사관(士官) 네빌스키는 흑룡강 하구를 순항하고는 비로소 가라후토(樺太)가 반도(半島)가 아니라 섬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마미야 린죠(間宮林藏)가 분카(文化) 5년에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의 명에 따라 흑룡강 하구를 탐험하여, 가라후토를 섬이라고 결정한 지 40년 후였다. 무라비요프는 대담하게도 직접 캄차카 반도를 탐험하면서 점차 통치의 발걸음을 내디뎌 흑룡강은 마치 러시아의 영토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흑룡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부 연해주 지방에서 러시아의 침략은 점차 심해졌으므로, 1858년 【청나라 함풍(咸豐) 8년, 조선 철종 9년】 에 청나라는 러시아와 경계조약(境界條約)을 체결하여, 양국은 흑룡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조소리강(鳥蘇里江)부터 동쪽 해안에 이르는 일대의 땅은 한때 양국이 공유하기로 정하였다. 때마침 영국은 아로호 사건 때문에, 또 프랑스는 그 나라 선교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연합하여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여, 서기 1860년에 마침내 그 수도인 북경(北京)을 함락시켰다. 이때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 이그나치프는 세 나라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여 점차 화의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령 연해주

[편집]

이 때문에 러시아는 그 보수(報酬)로 조소리강 동부의 양국민이 뒤섞여 사는 땅을 획득하였으며, 이 지방을 연해주(沿海州)라고 불렀다.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하고 맺은 이 조약을 북경조약(北京條約)이라고 한다. 이때가 서기 1860년 11월 【일본 만엔(萬延) 원년】 로, 청나라 함풍 10년에 해당한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비로소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실로 조선 철종 11년 때이다. 이듬해인 1861년에 코르챠코프 동시베리아 총독이 임명되어 취임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군항(軍港)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연해주에서의 러시아의 기초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선

[편집]

앞 항(項)에서 서술하였듯이 러시아의 동방(東方) 통치 공략은 크게 그 발걸음을 내디뎌 조선과 경계를 접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후 점차 이 방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도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아 국경의 관리를 맡게 하였으며, 조중협(趙重協) 【후에 중응(重應)이라고 개명하였다.】 을 변계시찰원(邊界視察員)으로 삼아 청나라 동부 및 시베리아 땅에 파견하여, 러시아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이러한 일은 메이지 16년 【이 태왕 20년】 부터 17년 【이 태왕 21년】 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다. 당시 조선의 정계(政界)에는 사대당(事大黨)이 세력을 얻고, 청나라의 위세가 반도를 압도하던 무렵이었는데 영국과 친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가장 꺼려하던 이홍장(李鴻章)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가 반도에 손을 뻗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문에 반도는 러시아와 청나라 두 세력이 경쟁하게 되어 정계에 수많은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메이지 17년 6월에 러시아는 오랫동안 북경 공사관에 있어 동양의 사정에 밝은 베베르를 한성(漢城)에 파견하여, 예전에 영국·미국의 여러 나라들이 체결한 것들과 거의 같은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메이지 17년 7월 7일, 러시아력 6월 25일】 메이지 18년 4월에 같은 조약의 비준과 교환을 마치고 베베르는 공사(公使) 겸 총영사(總領事)로서 경성(京城)에 주재하였다.

친러파를 낳다

[편집]

베베르가 이렇게 신속히 성공한 것은, 예전에 이홍장이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보낸 멜렌도르프와 가까이 지냈으며 멜렌도르프가 안에서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베베르는 재략(才略)이 풍부하고 인정(人情)의 낌새를 잘 알아채어 일찍이 왕궁 내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부인도 역시 영민하여 교제를 잘하였다. 따라서 왕비 민씨를 비롯하여 궁중의 신임과 총애가 두터웠다. 또한 당시 조선의 왕궁과 요로(要路)의 어떤 사람들은 청나라의 간섭으로 고통스러워하였으므로, 러시아의 세력은 서서히 한국 조정의 위아래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홍장은 조선이 점차 러시아에게 기우는 것을 보자 반도가 러시아의 보호 하에 들어간다면 자국에 대단히 불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급히 대원군을 귀국시켜 러시아의 세력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사이에 베베르는 조선과 육로통상조약(陸路通商條約)을 체결하여 반도 지배에 한 걸음 나아갔다. 이 조약이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1) 두만강 양안(兩岸)을 따라 조선 거리 단위로서의 백 리(里)를 러시아와 한국 사람들의 거주와 무역을 위해 풀어줄 것 (2) 부령(富寧)을 러시아인들을 위해 개시(開市)할 것 등이다. 만약 이 조약이 성립되었다면, 두만강 연안 백 리의 조선 영토는 물론 부령 부근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러시아의 이익선(利益線) 내에 편입되게 되어, 조선을 위해 간단치 않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에서 이 담판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두 가지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하나는 바로 메이지 18년 4월 【이 태왕 22년 2월】 에 발발한 거문도사건이고, 【제11과 비고 4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참조】 다른 하나는 이홍장이 자국(自國)에 불리하다고 인식하여 멜렌도르프를 소환한 것이다. 【제11과 비고 6 「갑신정변 후의 청나라와의 관계」 참조】

경흥조약

[편집]

그렇지만 베베르는 그로 인해 굴하지 않았고, 이홍장이 멜렌도르프의 후임으로 파견한 미국인 듀는 청나라를 위해 속임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언젠가 또 베베르 수중(手中)의 사람이 되어, 한국 조정에서 베베르를 위해 알선하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스스로 한 편의 헌책서(獻策書)를 조선 국왕에게 보내 러시아와 육로통상조약 체결이 불가하다는 것을 열심히 설득하였지만, 베베르는 기회를 보아 이 조약의 내용을 고쳐 메이지 21년 8월에 경흥을 개시(開市)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경흥조약(慶興條約)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 두만강 연안 백 리에 걸친 땅을 개방하는 대신 단지 경흥부(慶興府) 한 곳만을 개시하는 데 그칠 수 있었다. 그 후 베베르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한국 조정 내에 세력을 심고, 오로지 조선이 청나라에 병탄(倂呑)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을 주시하였다. 왜냐하면 청나라가 반도를 병합하는 것은 러시아가 남하하는 데 장애가 되고, 또한 영국 세력의 증강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27년에 일청전쟁이 일어나자 반도에서 러시아의 상대인 청나라는 추락하고 일본의 세력이 대륙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을 반환하게 함으로써, 사대(事大)의 생각이 강한 한국 조정이 러시아에 의지하게 하였다. 이에 친러파들을 결속하여 일청전쟁 전의 중국이 하였던 것과 같은 행동을 재연하였다. 그 때문에 갑오년(甲午年) 이래 점차 개진(改進)의 경지로 향하던 국운은 다시 역전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여 일본에 의뢰하여 러시아의 야심을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배출되어, 친러파와 친일파의 암투는 매우 격렬해졌다. 한 편이 다른 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존립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고, 결국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의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발하게 되었다. 왕후 민씨는 불행하게도 그 변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본과 비고 3 「을미사변(乙未事變)」 참조】 이후 친러파 및 친미파 사람들이 주(主)가 되어, 한때 국왕 및 왕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계속하여 반대파를 박멸하였다. 【본과 비고 4 「국왕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播遷) 사건」 참조】 이것은 모두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배후에서 획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이 러시아와의 협상에 힘을 기울인 결과, 국왕 및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지 약 1년 만에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베베르 공사도 역시 메이지 29년 1월에 전임(傳任)을 명받았다. 베베르가 전임의 명을 받았지만 당시 국교가 복잡다단하여 급히 경성 땅을 떠나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스페이에르 【Speyer, 사패야(士貝耶】 가 그의 후임으로 입성하자, 베베르는 비로소 멕시코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후 친러파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여전히 갖가지 경거망동을 획책하는 데 몰두하였다.

을미사변

[편집]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자, 사대의 풍습에 익숙한 조선은 러시아의 강대함을 알고, 그들에게 의지하려는 생각을 깊이 하여, 몇 년 동안 국운(國運)의 발전을 유도한 일본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이 다수의 인명(人命)과 거액의 재화를 희생해 가면서 반도를 위해 힘을 쓴 효과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메이지 8년 【이 태왕 을미년 32년】 9월에, 미우라 고소(三浦梧樓)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대신 공사가 되어 경성에 부임해 온 후에는 친러파의 교만 방자함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던 훈련대(訓練隊)를 해산하고, 다시 친일파를 소탕하려는 친러파의 계획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전부터 민씨 일파와 서로 양립할 수 없던 대원군은 이러한 형세를 방관할 수 없자 스스로 입궐하여 국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에 그의 부하들의 호위를 받아 성 밖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을 나와 왕궁으로 향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인사들이나 군졸들로서 대원군의 거동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를 따랐다. 대원군은 광화문에서 나아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자 왕궁 수위(守衛) 병사들은 그를 저지시키려고 하였지만 격퇴되었다. 국왕은 정무를 모두 대원군에게 맡기고, 민씨 및 그 무리들은 모두 파면되었으며, 내각은 경질되어, 김굉집(金宏集)은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유길준(兪吉濬)은 내부대신(內部大臣) 대리(代理)에 임명되어 국정을 장악하였고, 그 외의 같은 무리 사람들도 많이 채용되었다. 이때 왕후 민씨의 행방과 안위가 불명확하였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난중(亂中)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소식이 도쿄에 전해졌는데, 일본국 정부는 이 사건에 일본인이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고, 일본과 조선의 국교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사실의 공명정대함을 기하기 위해 정무국장(政務局長)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경성에 급파하고, 이어서 미우라 공사 이하 관계자들을 소환하여 심사하였다. 국왕은 사변 직후에 칙령을 내려 왕후 민씨는 그 일족과 함께 국정을 저해한 사람이므로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0일】 이어서 빈호(嬪號)를 부여하였지만, 【11일】 12월 1일 【음력 10월 15일】 에 이르러 비로소 왕후 시해의 사실을 발표하고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이어서 국장(國葬)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 【음력 11월 13일】 에 이르러 10월 8일 사건의 흉도(兇徒) 세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대원군도 점차 정계(政界)를 멀리하였으며 메이지 31년 【광무 2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국왕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 사건

[편집]

메이지 28년 11월 28일 【음력 10월 12일】 에 예전에 파면된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 등은 서양인 몇 명과 모의하여 국왕을 대궐 밖으로 꾀어내고 크게 위한다고 하여 왕궁에 침입하였다. 그런데 위병(衛兵)이 막아 나섰으며 참령(參領) 이도철(李道徹), 시종(侍從) 임최수(林最洙) 등이 체포되고, 그 잔당들은 일부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부는 미국 공사관으로 피하여 간신히 몸을 보전하였다. 이 음모는 10월 8일 사건에 대한 복수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정부와 내통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사건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국왕이 단발을 하다

[편집]

이에 앞서, 국왕은 백성들에게 솔선하여 스스로 단발(斷髮)하고 풍습 혁신의 모범을 보였으며, 이해 12월 【음력 11월 15일】 에 조서(詔書)를 내려 신민(臣民)에게 단발할 것을 장려하엿다. 같은 달에 또 칙령을 내려 태음력(太陰曆)을 폐지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시행하였으며, 건양(建陽)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정하여 11월 17일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제11과 비고 12 「개국(開國) 기년(紀年)」 참조】 관리들은 공을 세우는 데 급급하여 인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0월 이래 사변(事變)이 빈발하여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정부는 급속하게 혁신을 진행하려고 하였으므로, 인심은 더욱 험악해지고 포악한 무리들이 도처에서 출몰하여 소란을 선동하였다. 춘천·원주·제천 등 여러 지역에서 도적 무리들이 봉기하여, 의병을 칭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히고 강원도 관찰사 조인승(曹寅承)과 충청도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비롯하여 군수 등 살상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더군다나 새로운 정부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던 사람들은 단발령(斷髮令) 및 건원(建元)의 일 등에 대해 비난하자 여론이 들끓어 지방관(地方官)의 직책을 포기하고 귀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메이지 29년 【건양 원년】 1월에 정부는 관리를 강원도에 파견하여 선유(宣諭)하도록 하였지만 그 효과가 없었다. 도적 무리들이 곧 기전(畿甸)을 쳐들어갈 염려가 있었으므로, 경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인천에서 급히 수병(水兵)들을 불러들여 몰래 대비하였다. 이리하여 전년(前年) 11월의 사변에 실패하여 러시아·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하였던 무리들은 경성의 수비 병력이 적은 틈을 타 다시 국왕을 꾀어내려고 시도하였고 마침내 2월 11일 【음력 12월 28일】 에 국왕은 왕세자와 함께 왕궁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러시아 공사관 내에서는 이범진(李範晉) 등의 친러파·친미파 사람들이 정권을 잡자, 총리대신 김굉집(金宏集)과 농상부대신(農商部大臣) 정병하(鄭秉夏)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경복궁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갑자기 순검(巡檢)에게 체포되었으며 경무청(警務廳)에서 참살되었고 시체는 난민들에게 수모를 당하였다. 이 밖에 도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은 용인(龍仁)에서 살해되었고, 유길준(兪吉濬) 등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왕은 조서를 내려 예전에 발표하였던 왕후 폐위와 복위의 두 조서를 취소하고, 10월의 사변으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의 관작을 복직시켰으며, 전 정부의 잔당들을 처벌하고, 도피한 자들을 신속히 체포할 것을 명하였으며, 단발령과 기타 새롭게 고친 사항들의 철폐를 선언하는 등 정계의 분란은 극에 달하였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자, 정부는 사자(使者)들을 여러 방면에 파견하여 소란의 진무에 힘쓰게 하였다. 또한 갑오년 이후의 새로운 여러 시설들을 철폐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고, 내각도 의정부(議政府)로 고쳤다. 【제11과 비고 10 「관제(官制)의 개정」 참조】 외국 사신들 중 특히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의 공사들에게 접근하여, 이들 사신들에게 철도, 광산 등의 이권(利權)을 허락해 주었다. 이리하여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체재한 지 꼭 1년이 되었는데, 이 사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두 차례 협상을 거듭하엿고 그 결과 메이지 30년 2월에 국왕 및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의 수리·완성을 계기로 같은 달 11일에 이 궁궐로 돌아갔다. 【『일성록(日省錄)』·『러시아어 조선지(朝鮮誌)』 등】

외국인의 이권 획득

[편집]

국왕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播遷) 전후에 외국인들의 이권 획득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연월 획득 이권 인명(人名)
메이지 28년 8월 7일 평안북도 운산광산 채굴권 미국인 모스
메이지 29년 3월 경인철도 부설권 미국인 모스
메이지 29년 4월 함경북도 경원(慶源) 광산과 종성(鍾城)광산 채굴권 러시아인 니시첸스키
메이지 29년 7월 경의철도 부설권 프랑스인 그릴
메이지 29년 9월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의 벌목권 러시아인 그뤼네르
메이지 30년 8월 강원도 금성광산(金城鑛山) 채굴권 독일인 월터
메이지 31년 1월 경성 전차 부설권 영국인 콜브란
메이지 31년 3월 평안남도 은산광산(殷山鑛山) 채굴권 영국인 모르간
메이지 31년 9월 경부철도 부설권 일본인 사사키(佐佐木) 등

독립협회

[편집]

메이지 27〜28년 전쟁 후 일본의 세력은 급격히 감퇴하고 친러파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에 신진 인사들은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에 대항하려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세우고 그 기관지로서 영자(英字) 신문인 『독립(獨立)』을 발간하였다. 이 협회의 주도권을 쥔 것은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이었다. 서재필은 일찍이 오랫동안 미국에 있었으며, 결국 그 나라에 귀화하여 이름을 닥터 제이슨 【Dr. Jaisohn】 이라고 하였으며, 서양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윤치호는 중국과 미국을 두루 유람하여 몸소 해외의 풍물을 접하고 귀국하였으므로 역시 신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협회는 처음에 정부의 동조를 받았지만, 그 주의(主義)는 너무나 혁신을 서두르고 이상(理想)에 치우쳤기 때문에 점차 정부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메이지 29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재하자, 외국 사신의 요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삼림, 철도, 광산 등에 대한 많은 이권들을 외국인들에게 허가 해주었는데, 독립협회는 사사건건 그에 반대하였다. 한국 조정이 궁내부(宮內府) 고문(顧問)인 그레이트하우스 【Greathouse, 구례(具禮)】 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궁 수비를 위한 순검(巡檢) 30명을 상해(上海)에서 소집하자, 【메이지 31년 9월】 협회의 반항이 매우 심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해고하였으며 그 때문에 정부의 위엄은 크게 실추하였다.

이 무렵부터 정부와 협회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정부는 예전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 등이 조직한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보부상 단체에게 상무규칙(商務規則)을 허락하고, 몰래 그들을 사주하여 독립협회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보부상이란 조선 각지의 시장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래 독립협회원들 가운데에는 쟁쟁한 정부 관리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신진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름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일명 민회(民會)】 라고 고치고, 각종 협회의 회원들, 학생 생도, 하급 노동자, 맹인들까지도 규합하였다. 시민은 돈이나 곡식을 내어 그들을 원조하였으므로 그 기세는 매우 높아졌다. 때문에 윤치호가 그 회장이 되어, 헌의안(獻議案) 6조(條)를 의결하여 정부에 그 실행을 요구하였으며, 또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실정을 비난하고 공격하였다. 이렇게 공동회는 정부에 반대하고 억압하면 할수록 더욱 반항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마침내 공동회와 황국협회의 알력은 점점 격렬해져 치안을 해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는 둘 다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역부족으로 단행할 수 없었다.

보부상들과의 충돌

[편집]

그러나 메이지 31년 【광무 2년】 11월 하순에 보부상 수천 명이 예전에 폐지된 상리국(商理局) 【부상(負商)을 지배하던 관청】 의 부활을 청원한다는 명분으로 속속 도성에 모여들었다. 황국협회 회원은 만민공동회 회원들과 21일에는 인화문(仁化門) 【지금의 덕수궁 서쪽에 있는 문】 앞과 서대문 밖에서, 이튿날인 22일에는 남대문 밖에서 투쟁하였는데 쌍방 모두 많은 부상자들이 나왔고 파손된 가옥도 적지 않았다. 시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도피하는 등 성 안이 온통 소란한 거리로 바뀌었다. 이즈음, 21일 밤에 내각이 경질되었지만 새 정부는 시국을 수습하고 진압할 힘이 없어, 우선 민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상단(負商團)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밀지(密旨)에 따라 집합한다고 자칭하면서, 그 격앙은 점차 심해졌으며, 다시 한 번 큰 충돌을 보게 될 형세로 다가갔다. 이리하여 황제는 친히 나가서 양쪽의 싸움을 조정하기로 결정하고, 26일에 돈례문(敦禮門) 밖 【경운궁 서남쪽】 에 임시 건물을 짓게 하였으며 백관을 거느리고 거기에 나아가, 쌍방의 대표자들을 불러 따로 간곡히 타일러 점차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후 형세는 민회의 발달에 유리하지 않았으므로 민회는 점차 괴멸되게 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허버트, 『조선사(朝鮮史)』·『한반도(韓半島)』 참조.】

일러협약과 러시아 세력의 성쇠

[편집]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국왕은 일단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자, 한 나라의 정치적 명령이 외국 공사관에서 발령되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반도의 앞날은 매우 우려할 점이 있었고, 조선의 흥망은 일본의 안위에 관계되는 바가 컸으므로, 일본은 막연히 이웃 나라의 재난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고무라·베베르 각서

[편집]

1. 적당한 시기에 국왕에게 환궁(還宮)을 충고할 것.

2. 관대하고 인자한 태도로 내각의 신하들 및 신민들을 접할 것을 국왕에게 권고할 것.

3. 경성과 부산 간의 일본 전선(電線)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헌병 2백 명을 둘 것.

4.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위해 경성에 2개 중대, 부산과 원산에 각 1개 중대의 병력을 두고, 러시아도 역시 위의 각 지역들에 일본 군대의 인원을 초과하지 않는 병력을 둘 것.

즉 이 각서는 조선의 혼란스러운 시국에 대해 응급 대책을 강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고무라·베베르 각서라고 한다.

제1차 일러의정서

[편집]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과 러시아 간의 협정을 도모하여,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 29년 5월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자 후작(侯爵)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가 특파대사(特派大使)로서 거기에 참석하였고, 그 기회에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와 모스크바에서 만나 협상을 벌여, 6월 9일에 조선 문제에 관한 의정(議定)을 이루었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이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과 러시아 양국 정부는 조선의 재정(財政)에 관한 충언(忠言) 또는 원조를 제공할 것.

2. 조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군대 및 경찰을 창설하고 유지하게 할 것.

3. 일본은 현재 점유하고 있는 전신선(電信線)을 계속 관리하고, 러시아는 경성으로부터 그 국경에 이르는 전선 가설권을 보유한다.

4. 훗날 양국 간에 앞에 기록한 사항 또는 그 사항에 관한 상의가 필요할 때는 우호적으로 타협할 것.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청나라는 이홍장(李鴻章), 조선은 민영환(閔泳煥)을 대사로 참여하게 하고, 동아시아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여러 가지 조약들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였지만, 청·한 양국은 오히려 훗날 외교적으로 심한 곤경에 빠졌다.

그런데 러시아는 위와 같이 일본과 협약을 체결한 것과 무관하게 두루 자국 세력의 확장에 전념하여, 철도, 산림, 광산의 이권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래 조선 군대 훈련의 임무를 맡은 일본 사관(史官)을 해임하였으며, 일본식 군제(軍制)를 폐지하고 러시아 사관들을 육군 교관으로 초빙하여 채용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30년 7월에 다시 다수의 사관 및 하사관들을 경성으로 보내 조선 정부에게 그들을 채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앞서 국왕은 고무라·베베르 각서의 결과에 따라 메이지 30년 【광무 원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같은 해 9월에 베베르 공사는 멕시코 주재 공사로 전임하고, 스페이에르 【Speyer, 사패야(士貝耶)】 가 그의 후임으로 경성에 오자, 러시아는 한층 강경한 방침으로 한국과의 관계에 임하였으며, 나아가 그 재정상의 권리도 함께 거두어들였다. 아직 임기가 끝나지 않은 총세무사(總稅務司) 영국인 브라운 【Brown, 백탁안(柏卓安)】을 해직하고 러시아인 알렉세예프 【Alexeieff, 알력섭(戞櫟燮)】 를 그에 대신하도록 강요하자, 한국 조정은 11월에 결국 알렉세예프를 채용하여 도지부(度支部) 총고문관(總顧問官) 겸 해관총판(海關總辨)으로 삼았다. 이에 경성 주재 영국 영사 조르단 【Geordan, 주이전(朱邇典)】 은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영국 동양함대는 인천에 와서 위력시위를 벌였으므로, 한국 조정은 깜짝 놀라 브라운에게 관직을 내려 여전히 재정의 최고고문이 되게 하였다. 이렇게 방약무인한 러시아의 행동은 완전히 일·러 협상의 정신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세력과 충돌하고, 또한 미국의 동정(同情)도 잃었으며, 한국 내에서 반(反)러시아파 세력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31년 3월에 러시아에서 온 재무고문과 육군교관 등은 모두 해직되고 경성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미리 러시아가 기획한 절영도(絶影島)의 조차(租借)도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4월 경】 이에 앞서, 김홍륙(金鴻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함경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잘해 국왕과 러시아 사신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리하여 국왕에게 크게 총애를 받았으며 귀족원경(貴族院卿) 및 한성부윤(漢城府尹)의 요직을 받아 매우 위복(威福)을 누렸다. 그러나 메이지 31년에 러시아당의 세력이 갑자기 꺾이자, 그에게도 역시 통역사의 오류가 있었다고 하여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다. 【8월】 때마침 국왕과 황태자에게 독(毒)을 섞은 홍차(紅茶)를 바쳐 시해하려고 한 사건이 폭로되자, 그에 관련된 자로서 처형되었다. 【10월】 또 전 군부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는 사람을 모아 입궐하여 국왕을 겁박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등의 사건들이 있었다. 【8월】 이러한 일들로 미루어 당시의 정세를 미루어 알 만하다.

러시아가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다

[편집]

교활한 러시아는 조선에 심어놓은 자국 세력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방침을 바꾸어 만주의 지배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메이지 31년 【광무 2년】 3월에 곧바로 청나라에 대해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의 조차(租借)를 요구하였다. 스페이에르 공사도 역시 조선에 대한 위협 방침이 효과가 적었으므로 같은 해 4월에 사임하고, 마튜닌 【Matunine, 마주영(馬丢寧)】 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때부터 러시아는 만주 지배에 주력(主力)을 기울이게 되었다.

제2차 일러의정서

[편집]

이리하여 일·러 양국은 예전에 체결한 의정서에 기초하여, 31년 4월 25일에 외무대신 니시도쿠 지로(西德二郞)와 주일(駐日) 러시아 공사 로젠 사이에 도쿄에서 제2의 일·러 의정서(議定書)를 조인하였다. 그 개요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일·러 양국은 한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

2. 한국의 요구에 따라 훈련교관 또는 재정고문을 임명할 때는 일·러 양국은 미리 협상할 것.

3.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상공업이 우월하다는 것과 거류 일본인이 다수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일·한 양국 간의 상공업 관계를 방해하지 말 것.

이 협상으로 러시아는 과거의 실책을 반성하고, 점차 완화적인 방침으로 한국에서의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 대신 자국의 만주(滿洲) 지배에 대해 일본이 방해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려 하였다. 그러나 만주가 안정되지 않으면 조선의 보전은 기대하기 어려웠으므로 일·러의 관계는 더욱 진전되었다.

대한 국호 제정과 당시의 나라 정세

[편집]

메이지 27년에 일청전쟁의 시작과 함께 청나라에 의존할 생각을 중단한 조선은 일본의 지도에 따라 국정의 혁신에 착수하였다. 우선 종래 사용해 왔던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자국의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였다. 메이지 28년 1월 【이 태왕 31년 12월 17일】 에 국왕에 처음으로 대군주 폐하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종래 중국의 칙사(勅使)를 맞이하기 위해 지었던 경성의 영은문(迎恩門)을 철폐하였다.

메이지 28년 4월에 일·청 양국 간에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되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청나라에 의해 확인되었다. 국왕은 이러한 사실을 인민에게 알리는 조서(詔書)를 발표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기도 하는 등 국가의 외관을 꾸미는 데 급급하였다. 불행히도 국시(國是)는 일정하지 않아 어제의 친일주의(親日主義)는 갑자기 변하여 오늘의 친로주의(親露主義)가 되어, 결국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당시 독립론(獨立論)이 한 시기를 풍미하여, 독립협회의 최초의 제창에 따라 전에 파괴되었던 영은문 터와 가까운 곳에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여, 이번의 독립을 기념하였다. 【이 문은 독립협회의 최초 주창자인 서재필이 계획하였으며, 러시아 기사(技師)인 사바틴이 그를 도와 메이지 29년(개국 505년) 11월 21일에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광무 건원

[편집]

이어서 국왕은 이듬해인 30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운궁으로 돌아가자, 먼저 전년(前年)의 친일파 내각이 정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폐지하고, 【8월 12일】 새로 광무(光武)라고 건원(建元)하였다. 【8월 16일】 같은 해 10월 12일에 국왕은 백관(百官)과 서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환구단(圜丘壇)에 가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하였으며, 【13일】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12월 2일】 을 정하여 독립국가의 체재가 이로 인해 정비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여전히 친러파의 수중에 들어가고, 민간에서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와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알력 때문에 소란이 끊이지 않자, 국가 실력의 양성 같은 것은 아직 생각할 틈이 없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대동기년(大東紀年)』·『한국지(韓國誌)』·허버트, 『조선사(朝鮮史)』】

러시아 세력의 확장과 마산 조차 사건

[편집]

메이지 31년 1월에 독일은 청나라로부터 교주만(膠州灣)을 조차(租借)하고, 같은 해 4월에 영국은 위해위(威海衛)를, 프랑스는 광주만(廣州灣)을 조차하였다. 바로 이때 러시아는 조선에서 세력을 잃음과 동시에 주력을 만주 방면의 지배로 돌려, 31년 3월에 청나라로부터 여순(旅順) 및 대련(大連)을 조차하여 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의 해상(海上) 연락은 중요한 문제가 되어, 조선 반도에 중계소를 구할 필요를 느꼈다. 이것이 예전에 절영도(絶影島)의 조차를 조선 정부와 교섭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형세 하에서 러시아 공사 마튜닌은 경성을 떠나고, 파블로프 【Pavloff, 파우노후(巴禹路厚)】 가 메이지 32년 1월에 그의 후임으로 와서, 예전에 두세 차례 일러 의정서가 체결된 것에 관계없이, 러시아의 세력을 심는 데 힘썼다. 32년 3월에는 고래 어업의 기지를 한국 연안에서 획득하고,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울릉도 벌목권(伐木權)을 얻겠다는 뜻을 일본에 통지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 만주에 관동성(關東省)을 두고, 알렉세예프를 총독(總督)에 임명하여, 태평양함대를 통할하게 하는 등 차례로 야심의 손길을 뻗쳤다. 같은 해 10월에 함선(艦船) 정박지(碇泊地)로서 목포(木浦) 부근의 고하도(孤下島)를 조차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메이지 32년 5월경부터 마산(馬山) 부근의 땅을 조차하여 군사상의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움직였다. 마산은 30년 1월에 개항한 남부 조선의 요지로서,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일본과 조선 등에 대해 적지 않은 위협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그것을 간과할 수 없어 한국 정부에 권고함과 동시에 그 대항책을 강구하였으므로, 러시아는 결국 그것이 과도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율구미(栗九味) 【마산의 남쪽 약 1리 지점】 땅을 빌려 전관(專管) 거류지(居留地)로 삼고, 석탄 저장소 및 해군 병원을 두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러시아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심은 타올라 일·러의 총돌은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문명의 진보

[편집]

조선의 최근의 문명은, 메이지 9년에 일본과 수호조규(修好條規) 【강화도조약】 를 체결함에 따라 여러 외국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촉진되었으며, 메이지 27년 【갑오년】 의 혁신으로 일본을 모방하여 제도, 풍속, 습관 등의 개선을 이루어 한층 진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명 시설들은 많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실행되었다. 지금 그중 주요한 것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신문

[편집]

조선에서 최초의 신문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등의 지도로 발행되었다. 이노우에 가쿠오로는, 메이지 15년에 수신대사(修信大使)로서 일본에 건너온 박영효(朴泳孝)가 초빙하여 16년 1월에 경성에 왔다. 당시 조선 정부는 박문국(博文局)을 저동(苧洞)에 설치하고, 같은 해 11월에 신문 제1호를 발간하였는데 『한성순보(漢城旬報)』라고 이름을 정하고 정부와 국외의 사정과 상업 현황 등도 게재하였다. 이때 아직 인쇄기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철필판(鐵筆版)을 사용하여 등사(謄寫)하였다고 한다. 다시 후에 매월 3회 발간하였다. 메이지 17년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파괴되어 순보의 간행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19년 1월에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다시 간행되었는데, 당시 청나라의 위력(威力)이 강하여 압박을 심하게 받아 약 1년 만에 폐간되었다. 그 후 21년에는 인천에서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 【후에 『조선순보(朝鮮旬報)』로 고쳤다.】 25년에 부산에서 『조선시보(朝鮮時報)』, 28년에 경성에서 『한성신보(漢城新報)』 등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이듬해 29년에는 독립협회의 신문인 『독립(獨立)』이 간행되었다. 31년에는 『매일신문(每日新聞)』, 『시사총보(時事叢報)』 등이 모두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이어서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이 경성에서 간행되었으며, 39년에 통감부(統監府)가 개설된 후에는 경성 및 지방에서 신문이 간행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전신

[편집]

전신은 메이지 16년에 일한 양국 정부의 조약에 따라 덴마크(丁抹國) 대북부전신회사(大北部電信會社)가 나가사키(長崎)와 부산 간에 해저 전선을 가설하여, 17년 2월부터 통신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청나라는 18년 가을에 주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의주와 경성 간 및 경성과 인천 간의 전신 공사에 착수하여 11월에 완성하고, 국원(局員)으로 모두 청나라 사람을 채용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선의 동정을 즉각 청나라가 알게 되었다. 19년 11월부터 조선 정부는 영국인 핼리팍스 【Halifax, 해래백사(奚來百士)】 를 초빙하여 경성과 부산 간의 전선 가설에 착수하여 21년 7월에 준공하고, 24년 7월에는 경성과 원산 간의 전선도 역시 완성하였다. 당시 전신의 가설은 여전히 매우 느렸지만 이것을 통해 국내의 주요 부분들을 두루 연락할 수 있었다. 메이지 27〜28년 전쟁 때, 우리나라[일본]는 이들 전신을 모두 점령하거나 수용하여 군사적으로 사용하였는데, 29년 7월에 경성 이북의 전선은 모두 조선 정부에 돌려주고, 경성과 부산 간 및 경성과 인천 간의 전선은 여전히 우리나라[일본]에서 점유하고 군사용에 곁들여 일반 통신도 처리하였다. 38년 4월에 한국 정부는 통신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임하였으며, 이후 일본 정부에서 체신관리국(遞信管理局)을 설치하여 이 사업을 운영하게 하였다.

우편

[편집]

메이지 17년 4월에 조선 정부는 새로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전동(典洞)에 설립하고, 해외의 사정에 밝은 병조참판 홍영식(洪英植)을 우정총판(郵征總辨)으로 삼고, 일본에서 역체관(驛遞官) 오비 호죠(小尾輔助)를 고문으로 초빙하여 우편사무를 개시하고, 우편 우표는 도쿄인쇄국에 위탁하여 제작하였다. 그러나 17년 12월에 우정국 개설 연회을 개최할 때, 정변이 발발하여 홍영식은 살해되고 이 사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정변 후에 국정은 대체로 청나라가 좌우하여 문화의 개발은 퇴보하는 형세였으므로 우편사업과 같은 것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데 메이지 27〜28년 전쟁 후에 일본의 선도에 따라 개진(開進)의 기운이 갑자기 일어났으며, 교통통신 기관의 설비도 역시 급선무로 인식되었으므로, 28년 7월에 우체사(郵遞司)를 두고 일본인을 초빙하여 다시 우편사무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31년에 프랑스 체신성(遞信省) 직원인 클레망세 【N. E. Clemencet】 를 고용하여 고문으로 삼고, 33년에 만국우편연합에 가맹하였다. 이렇게 우편사업은 점차 발전하였지만 소포우편, 우편저금, 우편환 등이 시행되기에 이른 것은, 38년에 통신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임한 후의 일이다.

철도

[편집]

메이지 15년 【임오년】 변란 후에 일본인과 영국인 등이 철도 부설권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와 재정의 주요 업무를 장악한 독일인 멜렌도르프가 이를 거부하였다. 27년에 일청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일본인은 경인과 경부 두 철도의 부설권을 인정받았지만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29년 3월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할 동안 미국인 모스 【J. R. Morse, 모시(毛時)】 에게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허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7월 프랑스 사람 그릴 【Grile】 은 경의철도 부설권을 허가받았다.

경인철도

[편집]

31년 9월에 이르러 우리나라[일본] 사람 사사키 기요마로(佐佐木淸麿) 등도 역시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가진 모스는 공사에 착수하였지만, 진척이 매우 느려 그 성공이 의심스러웠는데, 마침내 권리를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철도 인수조합에 양도하여, 33년 【광무 4년】 7월에 경인철도가 준공되었다.

경부철도

[편집]

그리고 사사키 등이 경영하는 경부철도는 34년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38년 【광무 9년】 1월에 이르러 경성과 초량(草梁) 간의 개통을 보았다.

경의철도

[편집]

경의철도(京義鐵道)의 부설권은 처음에 프랑스인 그릴 등이 쥐고 있었지만, 정해진 3년 이내에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설권을 한국 정부에게 반환하였다. 그 후 여러 가지 경위를 거쳐 33년 【광무 4년】 9월에 한국 정부는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을 설치하고, 35년에 경성과 개성 간의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거의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일·러의 형세가 절박해지자 러시아 공사는 서북철도 부설권을 자국인에게 허가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37년 2월에 일·러 양국이 전쟁을 시작하게 되어 일본은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철도 건설이 시급함을 인정하여, 39년 【광무 10년】 4월에 군용철도인 경의선(京義線)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경원철도

[편집]

경원철도(京元鐵道)도 앞에서 기술한 서북철도국에서 건설할 뜻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메이지 37년에 이르러 일본은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그 부설권을 얻어, 메이지 44년에 용산과 의정부 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다이쇼(大正) 3년 8월에 경성과 원산 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 외에 호남선(湖南線), 평남선(平南線), 겸이포선(兼二浦線)·마산포선(馬山浦線) 등 여러 철도는 메이지 37년부터 다이쇼 3년까지 완성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