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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13. 통감부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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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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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먼저 일본과 러시아의 개전(開戰) 사정을 서술하고, 일본이 고작 십 수 년 간에 국운(國運)을 걸고 두 번에 걸친 일청전쟁과 일러전쟁은 하게 된 이유를 가르친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으로 강국들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어서 움직이기만 하면 그들에게 유린당하였으므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던 일본은 이웃 나라를 구하고, 또한 자국을 보호하려고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장래에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의 외교 사무를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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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의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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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 32년 【광무(光武) 3년, 이 태왕(李太王) 36년】 에 청나라 내에서 폭도들이 봉기하였는데 청나라 정부는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 관병(官兵)들도 역시 폭도에 가담하여, 북경(北京)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일본 공사관원들 및 독일 공사는 불행히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국이 파견한 군대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일본군을 중심으로 북경으로 향하여, 마침내 폭도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고 점차 각국 공사관을 구원하였다. 이 사변을 맞이하여 만주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사들도 역시 폭동을 기도하여 그곳에 있는 러시아인들을 습격하였다. 러시아는 곧 이 기회에 편승하여 대병력을 보내 만주의 요소(要所)들을 점령하였다. 대략 사변이 진정되었지만 러시아는 그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조선으로 들여보내 용암포(龍岩浦) 【압록강 하구】 및 그 부근을 점령하고, 더욱 야심을 드러냈다. 【메이지 36년 4월, 광무 7년】 그러나 만약 러시아가 만주를 병탄하면 한국은 끊임없이 그들의 압박을 받을 것이고 일본도 역시 그 피해를 대단히 크게 입게 되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없었다. 일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평화의 수단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여러 차례 러시아와 교섭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약 반 년이 걸렸지만, 러시아는 조금도 성의로써 받아들이지 않았고 회답을 미루었다. 그 사이에 러시아는 점차 육군과 해군의 군비를 정비하여 무력으로써 우리를 위압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다시 담판을 계속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메이지 37년 2월 【6일】 에 어쩔 수 없이 국교를 단절할 것을 그들에게 통지하였다. 국교가 한번 파기되자 일본군은 곧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중 한 함대는 곧장 여순(旅順)을 습격하였고 【8일】 다른 한 함대는 러시아 군함 2척과 인천 앞바다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다 【두 군함 모두 인천항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폭침하였다. 9일】 이리하여 세계에서 일찍이 없었다고 하는 일·러의 전쟁이 비로소 그 시작을 알렸다. 이때가 메이지 37년 【광무 8년, 이 태왕 41년】 2월이다.

일한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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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이 시작되자 그때까지 러시아를 과신(過信)하였던 한국 정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들과 갈라서고 오랫동안 일본과 친교를 유지하여 일본국 정부의 충언에 따라 국정의 개선을 도모하는 등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라고 부른다. 【2월 23일】 이것은 실로 일·한 관계를 확정하고 양국이 친선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그에 따라 두 나라의 종래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미 반도에 침입해온 러시아 군대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바다와 육지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하여 연전연승의 세력을 차지하였으며, 마침내 러시아와 강화(講和)하기까지 20개월이 걸렸다.

일한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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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본과 조선은 고작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서로 이해를 함께하고 안위(安危)를 함께하며, 이른바 입술과 이[脣齒]의 관계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두 나라는 협동하고 일치해야 비로소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선 반도는 그 지리적인 관계 등으로 인해 항상 북쪽 강국의 압박을 면할 수 없었으므로, 어떤 때는 일본과 친하였고 또 어떤 때는 일본과 멀어졌다. 특히 근세에 이르러 세계의 형세가 일변하여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은 모두 힘을 동양으로 뻗쳐, 그들과 교류하는 것이 마치 이웃 나라와 다름없는 때가 되었는데, 조선의 국력은 나날이 더욱 쇠퇴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청나라에게 복속되어 그들의 통제를 받았으며, 다음에는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 갑자기 러시아에게 억압당하는 등, 항상 외교에서 열세의 지위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이곳을 아래와 같이 정정해 줄 것을 요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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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일본은 국운을 걸고 십 수 년 동안 일청전쟁과 일러전쟁의 두 차례 커다란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장래에 또 한국이 미약한 것에 편승하여 열강들이 자국의 야심을 만족시키려는 경우가 있으면, 이는 오로지 반도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불행도 역시 그보다 클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을 보호하여 다시 외교적으로 실패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동양평화의 화근을 없애는 것은 당시 가장 급선무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메이지 38년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은 【9월 5일】 후, 더욱 일·한 양국의 관계를 친밀하게 함으로써, 두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양국 간에 협약을 체결하였다. 【11월 17일】 이를 일한협약(日韓協約)이라고 한다. 【제1차 일한협약은 생략한다.】

통감부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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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약의 결과 한국의 여러 외국에 대한 일체의 사무를 일본국 정부에서 행하고, 일본국 정부의 대표자로서 한 명의 통감(統監)을 경성에 두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새로 통감에 임명되어, 【12월 21일에 임명되어, 이듬해 3월 2일에 임지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메이지 39년 【광무 10년, 이 태왕 43년】 에 통감부의 사무를 시작하였다. 【2월 1일】

헤이그 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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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0년 【광무 11년, 서기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위원들이 서로 만나 세계의 평화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때 이상설(李相卨) 외 2명의 한국인들이 한국 황제가 파견한 위원이라고 칭하고, 갑자기 헤이그에 나타나 열강의 위원들을 방문하여 회의 참석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일한협약의 잘못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는 이미 일본국 정부가 장악하였으므로 네덜란드 정부가 확인해 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위원이 될 수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상설 등의 음모는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남기는 데 지나지 않았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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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38년의 전쟁을 가르칠 때에는, 보통학교(普通學校) 국어독본(國語讀本) 권6 제27과와 제28과 「메이지(明治) 37〜38년 전쟁」 및 같은 책 권8 제16과 「일본해(日本海)의 해전(海戰)」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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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7〜28년 전쟁 후의 청나라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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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7〜28년 전쟁이 종결 국면을 맞이하자 청나라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세 나라의 주선으로 요동반도를 보유할 수 있었지만, 이들 세 나라는 그 후 각각 청나라에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프랑스는 이에 앞서, 청나라와 싸워 안남(安南)을 취하여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고, 28년 6월에 안남의 북쪽 국경을 변경하여, 안남 철도를 청나라 국경 안으로 연장하고, 광서(廣西)와 광동(廣東) 지방에서 광산 채굴 예약권(豫約權)을 획득하였으며 그 세력을 청나라에 심었다.

러시아도 미리 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연락을 위해 시베리아 철도의 부설을 계획하였는데, 29년 9월에 청나라와 교섭하여 만주를 통과하여 철도를 부설할 것을 승낙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동청철도(東淸鐵道)가 그것이다. 30년 1월에 독일의 선교사 두 사람이 산동성(山東省) 곤주부(袞州府)에서 청나라 폭도들에게 살해되자, 독일 정부는 함대를 파견하여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도 역시 겨울철을 보내야 한다는 핑계로 배들이 줄을 이어 여순(旅順)으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독일은 31년 3월까지 청나라 정부로부터 폭도들의 흉악한 행위에 대한 보상금을 받고, 다시 산동성에서 철도 부설 및 광산 채굴의 권리와, 99년간 교주만을 조차(租借)할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25년간 여순과 대련(大連) 일대의 땅을 조차하고 동청철도의 지선(支線)을 부설하여 만주를 종단(縱斷)하며, 그 연도(沿道)에 있는 광산의 채굴권을 획득하였다. 이어서 프랑스도 역시 광주만(廣州灣)을 99년간 조차할 권리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의 세 강국들은 각자 극동에 유력한 근거지를 차지하는 큰 특권을 획득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일본]도 청나라에 대해 대만(臺灣)의 건너편 연안인 복건성(福建省)의 땅을 다른 나라에 할양하거나 조차하지 말 것을 약속하게 하여, 대만해협의 군사적 가치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은 우리 주둔군이 철수한 뒤를 이어 위해위(威海衛)를 조차함으로써 러시아와 대치하는 그 이권을 옹호하였다.

메이지 33년의 청나라 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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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청나라의 국력이 나날이 쇠퇴한 것에 편승하여, 열강의 압박은 더욱 강력해졌으므로, 그 국민들 간에는 점차 외국인을 혐오하는 생각이 생겨났고, 배외(排外) 사상을 품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백련교(白蓮敎) 【도교(道敎)를 본받아 밝히는 사교(邪敎)로서, 북중국 특히 산동성부터 북경과 천진(天津) 지방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였다.】 를 신봉하는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도적 무리들이 가장 위험하였는데 이들은 여러 차례 외국인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그들을 단비(團匪)라고 불렀다. 청나라 정부는 그들을 없애려고 메이지 32년 【광서(光緖) 25년】 에 원세개(袁世凱)를 산동순무대리(山東巡撫代理)에 임명하여 이들을 진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3년 5월에 단비들은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외국 종교를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크게 봉기하여, 직예성(直隷省) 협수현(浹水縣)에서 예수교회당을 파괴하고 선교사 및 교도(敎徒)들을 살육하였으며, 또한 철도를 파괴하여 북경과 천진 간의 연락을 끊고, 마침내 북경성(北京城) 안에 출몰하기에 이르렀다. 북경에 주재하던 여러 나라의 공사들은 형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고, 긴급회의를 열고, 곧바로 태고(太沽)에 정박하고 있던 여러 나라의 군함 15척에서 육전대(陸戰隊)를 편성하여 북경으로 가 공사관을 보호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비들이 성 안에 가득하자 서태후(西太后)는 청나라 조정의 대관(大官) 단군왕(端郡王) 등과 함께 몰래 그들을 도왔으며, 6월 10일에 외국인을 섬멸하도록 밀지(密旨)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우리 공사관원인 서기(書記) 스기야마 아키라(生杉山彬)와 독일 공사 케텔러는 잇따라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청나라 정부는 각국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칙을 포고하였으므로, 관병(官兵)과 단비(團匪)는 서로 합쳐 각국 공사관들을 포위하였다. 각국 군함들은 바야흐로 망설일 수 없게 되어 같은 달 17일에 태고(太沽)의 포대(砲臺)와 전쟁을 시작하자, 우리 육전대는 먼저 올라가 마침내 그를 점령하였다. 우리 정부는 다시 육군 소장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로 하여금 제5사단의 일부를 이끌고 가서 지원하게 하였다. 7월 13일에 우리 군대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 군대와 함께 천진성(天津城)을 공격하고 이튿날 새벽에 우리 군대가 앞장서 올라가 천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제5사단장 육군 중장 야마구치 모토아미(山口素臣)는 사단의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천진에 도착하였으며,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 증원군(增援軍)들이 도착하자, 우리 군대는 또한 중심이 되어 북경으로 향하였으며, 8월 14일에 마침내 북경을 함락시켜, 60여 일간 성 안에 갇혀 있던 각국 공사와 공사관원 및 인민들을 구조할 수 있었다.

청나라 황제 덕종(德宗)은 서태후와 함께 13일 새벽에 성을 나와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로 도망쳤으며,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으로 하여금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홍장(李鴻章)과 함께 강화(講和)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강화회의(講和會議)는 10월 8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 7일에 우리나라[일본]를 비롯하여 11개국의 위원들과 청나라 전권위원(全權委員)은 강화조약에 기명(記名)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12개 조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주요한 것을 들자면 (1) 청나라는 순친왕(醇親王)을 대사(大使)로 삼아 독일에 파견하여, 살해된 독일 공사의 살해를 애도하는 뜻을 독일 황제에게 전달하게 하고, 또한 공사가 조난된 곳에 기념비를 세울 것 (2) 호부시랑(戶部侍郞) 나동(那桐)을 특사에 임명하고 일본에 파견하여, 살해된 스기야마 아키라를 애도하는 뜻을 우리 천황에게 전달할 것 (3) 청나라 정부는 배상금 4억 5천만 냥을 39년 동안 나누어 지불할 것 등으로, 열국들은 공사관 호위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철수할 뜻을 밝힘으로써 사건은 결말을 고하였다.

메이지 37〜38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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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일본 제국 개벽(開闢) 이래 일찍이 없었던 큰 전쟁인 메이지(明治) 37〜38년의 전쟁의 원인은, 그 시초가 멀리 러시아의 동아시아 공략에서 배태되었다. 그리고 그 근인(近因)은 우리나라[일본]가 한국의 독립 및 영토 보전과 자국(自國) 방위를 위해 단호하게 궐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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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년 전쟁 이후 러시아는 한국에서 교묘하게 그 정부를 농락하여 친러파들이 요로(要路)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체재하게 되었고, 한국 정부가 러시아인들을 초빙하여 각종 이권들을 양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일본]는 여러 차례 러시아와 협상하여, 상호 양보의 정신에 기초하여 한국을 선도하고, 점차 제반 개혁을 수행함과 동시에 일·러 양국의 이권을 옹호하였다. 메이지 29년 5월에 주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각서, 같은 해 6월에 러시아 수도에서 우리 특파대사(特派大使)인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와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의 의정(議定), 31년 4월에 도쿄 주재 러시아 공사 로젠과 우리 외무대신 니시도쿠 지로(西德二郞)의 의정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제12과 비고 7 「일러협약(日露協約)과 러시아 세력의 성쇠(盛衰)」 참조】 그러나 러시아는 여러 차례 협상을 무시하고, 여순구(旅順口)와 대련(大連) 두 항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상 연락을 꾀하기 위해, 그 중계장(中繼場)을 조선 반도의 남부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32년에 러시아는 마침내 이 바람을 이루어, 마산에서 남쪽으로 약 1리(里) 떨어진 율구미(栗九味)를 조차(租借)하여, 전관(專管) 거류지(居留地)로 삼았다. 이것과 서로 전후하여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경상남도】 울릉도(鬱陵島), 【위와 같음】 목포의 고하도(孤下島) 【전라남도】 등 남부 조선 요지의 조차 문제는 러·한 양국 간에 빈번하게 나왔으며 외교 관계는 분규가 매우 심하였다. 【제12과 비고 9 「러시아 세력의 확장과 마산(馬山) 조차 사건」 참조】 러시아는 위와 같이 고립되고 나약한 한국을 압박하여, 수많은 지방을 조차하거나 혹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상업적인 시설로 삼거나, 혹은 목재를 벌채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 33년의 청나라 사변 이후에는 다시 압록강 방면으로부터 점차 반도를 침략하려는 정세가 분명해졌다.

만주 반환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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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변 때 우리 제국(帝國)을 비롯해 구미 열강들은 청나라에 출병하여 협동작전을 벌인 결과 비적들을 소탕할 수 있었는데, 곧바로 북경, 천진, 산해관(山海關) 방면에 소부대의 수비병들을 주둔시키고, 이어서 점차 그 철병(撤兵)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소란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만주 일대에 파견하였던 대군(大軍)을 철수시키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만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 문제는 각국이 주시하여 세상 여론이 요란하게 일어나자, 러시아도 약간 자성한 바가 있어 35년 4월 11일에 청나라와의 사이에서 만주(滿洲) 반환 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규정하였다. 그 주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국 정부는 만약 변란(變亂)이 일어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의 행동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만주 주둔 러시아국 군대를 철수할 것을 승낙한다.

(1) 제1기 철병으로서, 본 협약 조인 후 6개월 사이에 성경성(盛京省) 서남부와 요하(遼河)에 이르는 지방의 주둔병들을 철수하고, 또한 철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

(2) 제2기 철병으로서, 다음 6개월 사이에 성경성의 나머지 병력을 철수하고 길림성(吉林省)으로부터 퇴거할 것.

(3) 제3기 철병으로서, 그 다음 6개월 사이에 흑룡강성(黑龍江省)으로부터 퇴거할 것.

즉 러시아는 35년 4월 이후 1년 반의 기간에 만주 전체에서 주둔병을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약을 이행한 것은 고작 제1기 철병 기한인 35년 10월로서, 요서(遼西)의 병력을 요동(遼東)으로 이동시키는 데 그쳤다. 이어서 제2기 철병 기한인 36년 4월에는 이런저런 말로 핑계를 대면서 철병을 실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청나라에 만주 반환의 대가를 요구하였으며, 또한 만주를 개방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대저 우리나라[일본]는 예로부터 조선 반도와 지리적·역사적·경제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반도가 외국으로부터 당하는 재난은 곧바로 우리나라[일본]의 국방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을 정착시키고, 영토를 보전하는 것은 실로 우리나라[일본]의 천직(天職)으로,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주는 한국과 영토를 서로 접하고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만약 만주가 러시아에 병탄되면, 한국은 끊임없이 침략의 압박을 받아 그 독립을 유지하고 영토를 보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지 않으면, 동양의 평화도 역시 확립할 수 없는 형세였다.

일영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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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영국의 극동에 대한 정책을 보면, 현상의 유지와 전체적인 평화에 힘썼으며, 각국의 상공업에 균등한 기회를 주려고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일본]와 완전히 입장이 같았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는 35년 1월에 영국 주재 전권공사 하야시 타다스(林董)와 영국 외상(外相) 랜스다운 간에, ‘청(淸)·한(韓) 양 제국이 침략적 추세에 억제당하지 않도록 할 것을 천명하고, 또 다른 두 나라 이상이 연합하여 우리나라[일본] 또는 영국과 전쟁을 할 경우에는, 서로 협동하여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영동맹(日英同盟)이다. 이리하여 일본과 영국 두 나라는 러시아의 횡폭(橫暴)한 태도를 묵과할 수 없어, 함께 청나라에 경고하여 러시아의 교섭을 거절하게 하였다. 미국도 역시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항의하여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열국들의 제의를 무시하고 여전히 청나라에 강경한 담판을 계속하면서 철병을 승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로(歐露)로부터 더욱 많은 군대를 수송하여 만주의 요지(要地)들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적 행동은 만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한국 내에까지 미쳤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러전쟁(日露戰爭)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용암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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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제2차 철병 기한인 메이지 36년 4월 전후부터, 다수의 병력을 봉황성(鳳凰城) 방면에 집중시켰으며, 더군다나 그 지대(支隊)를 안동현(安東縣)에 주둔시켜 한국을 위압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러시아가 한국 조정에 경의철도(京義鐵道) 【경성·의주 간】 의 부설권을 요구하였다가 실패하였지만 용암포(龍岩浦) 조차(租借) 문제에서는 반드시 성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메이지 29년에 러시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 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 연안의 큰 삼림(森林)을 벌채하기 위해 회사를 창설하고, 자신이 경영을 맡았으며, 후에 대변인으로서 경성(京城)에 남작(男爵) 군스베르그를 체재하게 하였다. 36년 4월에 군스베르그는 한국 조정과의 비밀계약 하나를 체결하였다는 설(說)이 항간에 자자하자, 일반인으로 변장한 러시아 병사들은 대동구(大東溝) 【압록강 하류의 우측 연안의 청나라 영토】 에서 무기를 밀수하였으며, 또한 의주(義州)에 난입하여 조약(條約) 구역(區域) 밖인 백마산(白馬山)의 목재 벌채에 종사하면서 용암포 부근의 측량을 시작하였다.

용암포는 의주의 서남쪽 압록강 하류에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대동구에 대한 요충지였다. 36년 4월 중순 이래 러시아인들은 부근의 토지와 가옥을 매수하고 전선을 가설하여 광대한 땅을 고르게 하는 공사를 시작하는 등 영구적인 시설에 착수하였다. 한국 조정은 크게 놀라 경성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에게 여러 차례 항의하였지만 국력이 미약하여 그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양국이 빈번히 교섭을 거듭함에 따라 러시아의 요구는 더욱 급박해져, 용암포 조차는 마침내 사실이 되어 나타났다. 때마침 러시아 황제는 육군 대장 알렉세예프를 극동총독에 친히 임명하고 외교와 군사의 최고 권한을 부여하여 여순구(旅順口)에 주재하게 하였다. 동양의 여러 나라에 주재하는 러시아 외교관과 육군·해군 사령관 등은 이 땅에서 회합하여 만주 침략에 관한 모의를 꾸몄다. 이때 러시아 동양함대 전체는 여순구에 집결하여 육·해군 연합 대연습을 거행하였으며,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에서는 실탄 사격을 실시하는 등, 오로지 위력시위 운동에 급급하였다. 만약 이러한 정세대로 나아간다면, 만주는 완전히 러시아가 영유(領有)하게 되어, 한국의 독립은 기대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 땅은 실로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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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조선과 만주에서 일·러 양국이 서로 조화로운 이익을 추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자는 취지를 36년 7월에 러시아 정부에 통지하자, 러시아 정부도 찬성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8월 12일에 우선 담판 개시의 기초로서 하나의 협상안을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1) 청·한 양국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을 존중할 것 (2) 청·한 양국에서 각국 상공업을 위한 기회균등주의를 약속할 것 (3)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하고,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운영에 대해 러시아의 특수한 이익을 인정할 것 등 모두 5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정부는 다시 대안을 만들어 우리의 안(案)과 함께 담판의 기초로 삼겠다며, 10월 3일에야 가까스로 그것을 제출하였다. 이것에 따르면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의 존중에는 이의(異議)가 없지만 그것을 청나라에까지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또한 청나라 안에서 각국 상공업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자는 것의 승인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 및 그 연안(沿岸)은 완전히 우리나라[일본] 이익의 범위 밖에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한국에서 우리나라[일본]의 자유행동권에까지 갖가지 제한을 가하는 등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청나라의 영토 보전의 존중을 약속하지 않고, 만주 및 그 연안을 우리나라[일본]의 이익 범위 밖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들은 도저히 우리나라[일본]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 정부는 다시 수정안을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재고해 줄 것을 요구하자, 러시아 정부는 오랫동안 그 회답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만주에 관한 사항을 완전히 삭제하고, 한국에 관한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 성의를 가지고 러시아와 접촉하여 신속히 사태를 해결하기를 바랐지만, 러시아 정부는 일부러 그 회답을 미루고, 그 사이에 대군(大軍)을 만주 지방에 추가로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강력한 군함을 동양에 파견하고, 더욱 군비를 강화하여, 무력으로 우리를 압박하려고 하였다.

선전의 조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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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우리 정부는 37년 2월 6일에 러시아와의 국교를 끊고, 제국(帝國)의 기득권 및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유행동을 취하겠다고 러시아 정부에 통고하였다. 이어서 2월 10일에 선전(宣戰)의 조칙(詔勅)을 발표하였다.

일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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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한국에서는 여러 당파(黨派)들이 분립하였는데 여러 외국 세력들도 이에 가담하여 정국은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바야흐로 일본과 러시아의 위기가 닥쳐오자 구미(歐美) 제국(諸國)의 군대는 공사관 및 거류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속속 경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한국 정부는 그들의 거취에 곤혹스러워하다가 1월 23일에 갑자기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성명(聲明)하였다. 한국 정부의 이 성명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이 아직 선전포고를 하기 전이었으므로, 국제공법(國際公法)에서 이른바 국외중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2월 9일에 우리 주한(駐韓)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한국 외부대신(外部大臣) 임시 서리(署理) 이지용(李址鎔)에게 통첩하여, 제국 정부는 먼저 러시아에게 침해를 받은 한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선발대 2천 명을 상륙시키겠다는 것을 알렸다. 또한 한국 황제를 배알하고 우리나라[일본]가 한국에 출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러시아 군대가 경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경성 부근을 전장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이어서 우리 군대가 한국을 통과할지 헤아릴 수 없지만 일본 군대는 결코 폐하의 존엄을 해치거나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 등을 아뢰고, 황제의 승낙을 얻었다. 이어서 2월 23일에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를 체결하기에 이르러, 두 나라는 가까워져서 완전히 동맹의 모습이 되었다. 【다음 항 참조】

여순 포격과 인천 앞바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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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 전쟁의 서막은 해전(海戰)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국 태평양함대는 그 주력을 여순구(旅順口)에 두고, 해군 중장 스타르크가 함대를 이끌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쾌속력(快速力)의 순양함(巡洋艦) 4척과 수뢰정(水雷艇) 10여 척이 있었다. 또 인천항에는 순양함 와리야크, 포함(砲艦) 코레츠 등 2척이 정박하였다. 우리 해군의 주력은 3개의 함대로 이루어졌으며, 7개의 전대(戰隊)로 나뉘었다. 해군 중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은 제1함대, 【제1전대, 제3전대】 해군 중장 카미무라 히코노죠(上村彦之丞)는 제2함대, 【제2전대, 제4전대】 해군 중장 가다오카 시치로(片岡七郞)는 제3함대 【제5전대, 제6전대, 제7전대】 의 사령장관(司令長官)의 보직을 맡았다. 그리고 제1함대와 제2함대는 사세보(佐世保) 군항에 집합하고, 제3함대 【치요다(千代田)를 제외하고】 는 다케시쿄(竹敷要)항 및 오군(吳軍)항에 정박하여, 출동 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렸으며, 따로 순양함 치요다는 인천항에 있으면서 경비의 임무를 맡았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중장은 기함(旗艦) 미카사(三笠)호에 탑승하여, 국교 단절 다음날인 6일에 인천항 및 여순구의 적함대를 격파하였으며 또한 인천항에 육군을 상륙시킬 목적으로 사세보를 출항하였다. 전라남도 서남쪽 해각(海角)에 이르렀을 무렵에, 도고 중장은 제4전대 【아사마(淺間), 나니와(浪速), 니타카(新高), 쓰시마(對馬), 다카치호(高千穗), 스마(須磨), 아카시(明石) 등 7척 외에 수뢰정(水雷艇) 2척】 의 사령관 해군 소장 우류 소토키치(瓜生外吉)에게 명하여 인천항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4전대가 호위하는 3척의 운송선(運送船)에는 보병 제12여단장 육군 소장 키고시 야스츠나(木越安綱)가 인솔하는 육군 약 1개 여단을 가득 태웠다. 우류 소장은 8일 오전 8시 반에 베카도 【충청남도 아산만 풍도(豐島)의 서남쪽】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항해 중이던 치요다와 만났는데, 러시아 함선 2척이 아직 인천항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오후 4시 20분에 나니와, 니타카, 아카시 등 여러 전함들을 팔미도(八尾島) 【인천항 밖】 부근에 정지하여 항구 바깥을 경계하게 하였다. 이때 러시아 전함 코레츠는 출항하여 우리 수뢰정을 사격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로 돌아갔다. 한편 우리 운송선은 곧장 인천항에 정박하여, 해군의 엄호하에 그날 밤에 육군의 상륙을 완료하고, 이튿날인 9일 오전 6시에 본국을 향해 출범하였다. 9일 오전 7시에 우류 소장은 한 통의 봉서(封書)를 인천 주재 러시아 영사관(領事館)을 통해 와리야크호 함장인 루드니에프에게 보내, “오늘 오후 4시까지 인천항을 떠나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항구 안에 포격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또한 정박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군함 및 상선에게도 러시아 군함이 만약 출항하지 않을 때는 위험이 닥칠 것이니 오후 4시까지는 정박지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0시 10분에 2척의 러시아 군함이 출항하여 팔미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우리의 아사마호는 적군함이 약 7천 미터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포격을 개시하자 여러 군함들도 그를 따랐으며 적도 역시 곧바로 응전하였다. 교전한 지 45분 후에 와리야크호는 키가 잘리고 함교(艦橋)가 파손되어 눈에 띄게 좌현(左舷)으로 기울고 배의 복부를 관통당하여 함께 항구 안으로 달아났다. 우리 함대는 깊숙이 추격하지 않고 바깥 바다로 나와 경계의 임무를 맡았다. 오후 4시 20분에 러시아 군함 2척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상선(商船) 숭가리호와 함께 스스로 항구 내에서 폭침(爆枕)의 최후를 마쳤다.

당시 인천과 경성에 거류하고 있던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이 급박하다는 것을 전해 들었으며, 또한 한국 조정의 상하 관료들의 거취를 알 수 없었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여 안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천항 앞바다 해전이 대승을 거둔 날 키고시 여단이 경성에 입성하자, 인심은 갑자기 진정되고 한국 조정은 점차 우리나라[일본]를 신뢰하였다.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형세가 나날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경성을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12일에 하야시(林) 공사의 알선에 따라 우리 군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철도로 인천항을 나와 프랑스 군함 파스칼호에 탑승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므로, 한국 관민(官民)들의 향배(向背)는 비로소 정해졌다. 전쟁 시작 벽두에 우리 육군과 해군의 이처럼 기민한 행동이 전쟁 국면 전체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여순구(旅順口)로 향하던 도고(東鄕) 사령장관은 2월 8일 밤에 구축함대를 풀어 적 함대를 습격하게 하여, 레트비잔, 체사레비치, 팔라다 등 3척의 군함에 커다란 손해를 입혔다. 다음날 정오에 우리 연합 함대는 초조해진 적군에게 싸움을 걸자, 적은 육지 포대(砲臺)의 엄호 하에 응전한 지 약 1시간 후에 항구 안으로 숨었으며, 이후 깊숙이 칩거하여 오로지 손상된 함정을 수리하는 데 급급하였다.

평양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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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에 조선 서쪽 방면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는 의주 건너편 연안에 러시아 군대 4, 5천 명과 포(砲) 20문을 이끌고 왔으며, 그 척후(斥候)는 한국 내에 출몰하여, 기회를 보아 남하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당시 평양 이남의 각지에는 전진하고 있던 우리 병참부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키고시 소장은 곧바로 보병 제46연대 제7중대를 인천항에서 해로(海路)를 통해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때마침 제12사단장 육군 중장 이노우에 히카루(井上光)는 잔여 부대의 장수로서 한국으로 건너가, 제12여단장 육군 소장 사사키 타다시(佐佐木直)로 하여금 육로를 통해 경성에서 평양으로 진군하여 병참선(兵站線)을 엄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이 아직 적의 수중에 들어가기에 앞서, 보병 중좌(中佐) 기무라 노부아키(木村宣明)는 21일 오전 10시에 평양을 점령하고 북쪽 공격의 근거지로 삼았다. 같은 달 28일에 적 기병 14〜15명은 병현(竝峴) 【평양 북쪽】 부근에 온 우리 장교(將校) 척후를 추격하여 기자릉(箕子陵) 부근까지 왔지만, 칠성문(七星門)의 우리 소초(小哨)와 전투를 벌여 격퇴되었다. 이것이 일본과 러시아 육군이 충돌한 최초의 일로 보인다.

압록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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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시와 함께 한국 서북부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제1선(線)으로 만주에 침입할 제1군은 육군 대장 구라키 다메모토(黑木爲楨)를 사령관으로 하여, 근위사단(近衛師團), 【사단장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제2사단, 【사단장 육군 중장 니시 칸지로(西寬二郞)】 제12사단 【선발대로서 한국에 건너갔다.】 및 병참감부(兵站監部) 등이 차례로 우지나(宇品)항에서 승선하여, 진남포(鎭南浦) 【평안남도】 를 향해 수송을 시작하여, 3월 29일에는 모두 완결하였다. 구라키 사령관은 상륙 이후 오로지 적의 동정을 정찰하고, 도로의 수리와 건설, 군용 다리와 군용 전선의 가설 등에 힘썼다. 더불어 전군(全軍)으로 하여금 점차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소부대들을 몰아내면서 의주(義州) 부근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의주의 건너편 연안에서는 적의 보병 약 1만 3천 명, 기병 5천 명, 포(砲) 60문이 우리 군에 대비하였다. 군사령관은 먼저 압록강 안에 있는 구리도(九里島), 어적도(於赤島), 검정도(黔定島) 등을 점령하여, 적의 전초(前哨)를 물리치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오로지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4월 25일 밤에 우리 공병대(工兵隊)는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면서 구리도 서북쪽 및 그보다 약간 하류의 두 곳에 적 전방 가교(架橋)를 감행하여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전군은 이튿날인 5월 1일에 포병의 엄호사격 하에 모두 강을 건너, 곧바로 적진(敵陣)을 압박하자, 적은 구련성(九連城)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수구진(水口鎭)의 동북쪽으로부터 하류 멀리에 있는 안동현(安東縣)의 서남쪽에 걸친 전선을 형성하여, 진지를 쌓고 참호를 파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므로, 전투가 극도로 격렬하여 양쪽 군대의 사상자가 대단히 많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적이 패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우리 병사들은 힘을 얻어 돌격하여 마침내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더 나아가 북쪽으로 추격하여 합마탑(蛤蟆塔)에서 거의 그 주력(主力)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적은 전사자 614명, 부상자 1144명, 포로 613명을 낳았고, 따로 속사야포(速射野砲) 21문, 소총 1천여 정 등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의 사상자는 932명에 불과하였다.

러·한 양국 간의 여러 조약의 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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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러시아와 한국의 국교는 단절되는 형세가 되자, 러시아당은 크게 두려워하여 숨을 죽였지만, 한국 조정의 대관(大官)들조차 여전히 러시아 군대가 경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에 현혹되어, 불안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전투에서 이겼다는 결과는 한국의 위아래 사람들의 의심을 일소시켰다. 5월 19일에 관보(官報) 호외(號外)를 발행하여, 러시아와 한국 간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 일체를 파기하고, 또한 러시아가 침략하여 점령한 행위 때문에 그동안 획득한 여러 가지 특권들을 철회한다는 칙서가 공포되었으며, 이어서 러시아 수도인 성(聖) 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는 한국 공사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

여순구항의 폐색과 봉쇄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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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군은 적 함대가 수리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선(汽船)을 폭침(爆枕)시켜 항구를 폐쇄하여, 그 출동을 차단하고 육군의 대대적인 수송을 안전하게 하려고 하였다. 선발된 결사대(決死隊)는 여러 척의 폐색선(閉塞船)에 나누어 타고, 2월 24일 및 3월 27일의 두 차례에 걸쳐, 어둠을 틈타 항구로 돌진하였다. 유명한 해군 중좌 히로세 타케오(廣瀨武夫) 등이 전사한 것은 제2차 때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연합함대는 밤낮으로 항구 바깥을 순회하며 경계하거나, 혹은 항구에 기계수뢰(機械水雷)를 부설하여 적 함선의 탈출에 대비하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태평양함대가 쇠약해진 것을 개탄하고, 명장 마카로프 제독을 스타르크 중장을 대신하여 전 함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4월 13일에 제독은 기함(旗艦)인 페트로파블로스크호에 탑승하여, 우리 제3함대에게 싸움을 걸어왔지만, 우세한 제1함대가 지원해 오자 두려워하여 항구 안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기계수뢰에 부딪혀 침몰하여 막료(幕僚)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5월 2일 밤에 우리 해군은 12척의 기선들로 제3차 폐색을 단행하여, 대략 그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5월 26일에는 요동 반도 남부의 봉쇄를 선언하고, 국제법에 나타나 있는 일체의 수단을 동원하여 여순구(旅順口)와 국외중립국(局外中立國)들의 교통과 통신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황해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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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적 함대는 항구 안에 잠복하여, 파손된 전함을 열심히 보수하고 몰래 바다 속 장애물 제거 작업을 하여, 폐색선과 부설된 수뢰를 폭파하여 한 가닥 수로를 열었다. 그리하여 8월 10일에 기함인 체자레비치 이하 6척의 전투함, 4척의 순양함, 8척의 구축함 등 합계 18척은 일렬종대를 이루어 탈출하였다. 우리 연합함대는 이들을 여순구 항구 밖 30해리(海里)의 바다에서 함께 공격하여, 격전을 벌인 지 약 2시간 후에, 적장 비트게프트를 살해하였다. 이리하여 적 함대는 대형(隊形)이 혼란해져 통일성을 잃고, 야간에 우리 수뢰정대(水雷艇隊)의 습격을 받아 각 전함들은 분리되었다. 중립항(中立港)으로 달아나 숨는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전투함 체자레비치, 【교주만(膠州灣)】 순양함 아스콜드, 【상해(上海)】 순양함 노빅, 【소야(宗谷) 해협에서 격파되었다.】 순양함 다이나 【프랑스령 사이공】 외에 구축함 7척으로, 나머지는 모두 간신히 여순구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 함대도 역시 다소 손상을 당하였지만, 다행히 전투력에 지장이 초래되지는 않았다.

울산 앞바다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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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黃海)의 해전(海戰) 후 4일 만에, 우리 해군은 다시 한국의 경상남도 울산 앞바다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처음에 전쟁이 시작되기에 앞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속력이 빠른 로시아, 그로모보이, 포카치르, 류릭 등 4척의 순양함과 수뢰정 십 수 척을 배속하고, 일본해 방면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출몰하여 상선(商船)을 격침시키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쓰시마(對馬) 해협 경비의 임무를 맡은 우리 제2함대 사령장관 카미무라 히코노죠(上村彦之丞)는 적을 찾아내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이때 마침 짙은 안개가 끼는 철이어서, 시계(視界)가 가려 여러 차례 적 전함을 놓쳤다. 8월 15일에 울산 앞바다에서 적과 마주쳐 포격을 주고받았는데, 마침내 류릭호를 격침시키고, 로시아와 그로모보이 2척에 큰 손해를 입혔다. 이후 적 함대의 발호는 그 자취를 감추어, 해상권(海上權)은 완전히 우리 해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만주군총사령부의 성립과 요양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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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의 전쟁 국면은 점차 우리나라의 승리로 전개되자, 5월 5일에 제2군 사령관 육군 대장 오쿠 야스가타(奧保鞏)는 제3함대의 엄호 하에 요동 반도에 상륙하여, 금주(金州) 및 남산(南山)을 공략하고, 나아가 청니와(靑泥窪) 【대련】 를 점령하였으므로, 여순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그리하여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제3군의 지휘자로서 여순구 포위의 임무를 맡았고, 역시 육군대장인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는 제4군을 이끌고 제1군과 제2군에 연락을 취하면서 북진하였다. 6월 15일에 제2군은 득리사(得利寺)에서 적의 대역습을 물리치고, 또한 제1기 작전계획의 주요 목표인 요양(遼陽) 공격 시기도 다가왔으므로, 만주군총사령부(滿洲軍總司令部)를 두고, 원수 육군대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총사령관에, 육군대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적의 총수(總帥)인 크로파트킨은 요양에 주력을 집중하여 우리 군대를 저지하려고 하여, 전체 길이 10여 리(里)에 방어선을 쳤다. 우리 군대는 제1군을 우측 날개로, 제2군을 좌측 날개로, 제4군을 중앙에서 진격하게 하여, 먼저 고전(苦戰)하여 요새인 수산보(首山堡)를 탈취하고, 공격을 계속한 지 10여 일 만인 9월 4일에 완전히 요양을 함락시켰다.

사하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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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장군 크로파트킨은 후방의 증원군이 도착하면 물자가 충실해질 것을 기대하고, 요양 패전의 치욕을 되갚으려고, 10월 9일에 20여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세를 시작하였다. 우리 우측 날개인 제1군은 적의 공격의 초점이어서 며칠에 걸쳐 고전하였지만, 좌측 날개와 중앙의 제2군, 제4군이 기회를 보아 진격한 틈을 타, 전체 전선의 공격에 나섰으며, 마침내 우세한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 군대는 사하(沙河)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면서, 오로지 겨울을 날 군영 준비에 분주하였다.

여순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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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구의 요새는 러시아가 천연의 험준함에 의거하여, 몇 년의 세월과 수억의 군사비를 투여한 곳으로, 그 건설이 견고하고 무기가 뛰어난, 참으로 난공불락의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불릴 만하였다. 그러므로 포위의 임무를 맡은 제3군의 악전고투는 짐작할 만하였다.

노기(乃木)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제1, 제9, 제11 등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각 부대가 역할 분담에 착수함과 함께, 7월 25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小孤山)의 견고한 요새를 함락시키고, 8월 8일에 다시 적을 본방어선(本防禦線) 안쪽으로 격퇴시켜, 포위의 형세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8월 11일에 참모총장 원수(元帥)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천황 폐하가 “여순구 총공격에 앞서 성 안에 머물고 있는 비전투원들의 피난을 허락해 주었다.”라는 참으로 인자한 성지(聖旨)를 노기 사령관에게 전하였다. 사령관은 이에 같은 달 16일에 군사(軍使)를 적의 사령관 스텟세르에게 보내 성지를 알렸으며, 또한 항복을 권하는 문서를 교부하자, 다음날 적은 우리의 제의를 거절해 왔다. 이리하여 우리 군대는 8월 19일에 제1차 총공격에 나서, 강력한 습격을 가해 반룡산(盤龍山) 이하 두 진지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정공법(正攻法)의 준비를 갖추고, 갱도(坑道)의 굴착이 성공하였으므로, 9월 19일에 제2차 총공격을 가하여, 203고지 【이령산(爾靈山)】 를 점령하였다. 이곳은 여순구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항구 안쪽을 내려다보고 적의 급소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커다란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여러 차례 역습을 시도하여, 점차 이곳을 탈환하였다. 우리 공위군(攻圍軍)은 제7사단의 정예부대가 새로 가담하였으므로, 10월 26일에 제3차, 11월 26일에 제4차 총공격을 가하여, 여러 차례 격전을 거듭하는 동안 처참함이 극에 달하였지만 12월 6일에 마침내 제1의 목표인 203고지를 확실히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전쟁 국면은 급속히 진척되어, 항구 안의 바를라더, 베레스웨트, 포페다 이하 여러 전함들은 우리 해군 중포대(重砲隊)에게 격침되었으며,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전멸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12월 15일 이후 우리 군대는 적의 본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들인 계관산(鷄冠山), 이룡산(二龍山), 송수산(松樹山) 등의 여러 포대(砲臺)들을 함락시키고, 이번에는 단숨에 여순 시가지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적장(敵將) 스텟세르는 힘이 달리자 38년 1월 1일에 우리 군대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군의 위원들은 해군 진영에서 러시아측 위원들을 만나, 개성(開城)과 항복의 규약을 논의하고, 같은 달 13일에 요새(要塞) 이하 관유물(官有物) 전부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약 반 년에 걸친 포위전(包圍戰)은 종결을 고하였다.

여순구의 성문이 열리자 우리 군의 제1기 작전계획은 대략 완료되었다. 제2기는 따스한 봄을 기다렸다가 적의 주력을 분쇄하고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38년의 새해와 함께 적군 총수(總帥)인 크로바트킨은 열세를 만회하려고, 용맹한 장수인 미스첸코에게 기병단(騎兵團)을 주어 우장(牛莊)에서 기습하게 하였으며, 또한 흑구대(黑溝臺)에서 대규모 습격을 가하려고 하였지만, 모두 격퇴되어 실패로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군대는 봉천(奉天) 부근에서 러시아 군대와 사상 초유의 대회전(大會戰)을 벌여, 육전(陸戰)의 결정적 승리를 얻었다.

봉천 부근의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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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총사령관은 구로(歐露) 제4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육군대장 가와무라 카게아키(川村景明)에게 명하여 압록강군을 이끌고, 북부 한국으로부터 만주로 진출하여, 우리 군대의 가장 우측 날개로 펼쳐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크로파트킨은 이것을 알아채고, 우측 날개의 일부와 예비대(豫備隊)를 나누어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 여순구에서 온 제3군은 빈약한 적의 가장 오른쪽 날개를 우회하여 그 배후를 가격하였으므로, 적군은 크게 낭패를 당하여, 주력(主力)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전체 군대는 적의 동요에 편승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제2군과 제3군은 점차 적의 우측 날개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제1군과 제4군은 중앙에서 맹렬하게 적의 정면을 돌격하여, 기회를 보아 봉천의 동북쪽으로 나아가, 제3군과 함께 퇴로를 막았으므로, 적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흩어지고, 크로파트킨은 가까스로 몸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겨우 패잔병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실로 3월 16일의 일이다. 우리 군대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추격전을 계속하여, 철령(鐵嶺), 개원(開原), 창도(昌圖)를 점령하였으며, 선봉은 멀리 장춘(長春)에 도달하였다.

이 대전투의 서막(序幕)인 압록강군의 활동은 2월 중순에 있었으며, 적군과 아군의 총 병력은 85만 명, 포(砲) 2천 5백 문, 전선(戰線)의 총 연장은 50리(里)를 넘었으며, 3월 1일 이래 10일 밤낮을 끊임없이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우리 군대의 사상자는 약 5만 명을 웃돌았지만 러시아군은 16〜17만 명의 전투력을 잃었다.

일본해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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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개전 초기부터 여순구의 태평양함대가 항상 패전을 계속하여, 해상권(海上權)을 실추함에 따라, 발틱함대를 동쪽으로 가게 하여, 세력의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 함대는 37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잇따라 리바우 군항을 출항하여, 5월 상순에 프랑스령 안남(安南)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함선의 총 수는 38척으로, 해군 중장 로제스트벤스키가 전체 함대를 지휘하였는데, 쓰시마 해협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해 가려 하였다. 우리 연합함대는 여순구를 함락시킨 후, 해상(海上)의 봉쇄를 풀고, 한국의 진해만(鎭海灣) 【경상남도】 을 본거지로 하여, 일부분을 사세보(佐世保) 군항, 다케시쿄(竹敷要)항, 【쓰시마(對馬)】 유야만(油谷灣) 【야마구치현(山口縣)】 등에 배치하고, 오로지 사기를 북돋우면서 적이 북상(北上)하기를 기다렸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도고(東鄕) 대장은 5월 27일 오전 5시에 초함(哨艦) 시나노마루(信濃丸)호로부터 적 함대가 203지점 【나가사키현(長崎縣) 고도(五島) 부근】 에 보인다는 보고를 접하고, 기함(旗艦) 미카사(三笠), 시키시마(敷島), 후지(富士), 아사히(朝日), 카스가(春日), 닛신(日進), 【이상은 제1함대】 이즈모(出雲), 히데오(吾妻), 야쿠모(八雲), 도키와(常盤), 아사마(淺間), 이와테(巖手) 【이상은 제2함대】 의 주력함(主力艦) 이하 거의 우리 해군의 전부에게 출동을 명령하였으며, 또한 “황국(皇國)의 흥폐(興廢)는 이 일전(一戰)에 달렸으며, 각 대원들이 한층 분발하여 노력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우리의 장졸(將卒)들은 한번 죽음으로써 군국(君國)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 2시에 전투는 충도(沖島)의 동북쪽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적함 오스라비야는 화재가 나 전열(戰列)에서 벗어났으며, 스와로프, 알렉산더 3세, 볼로딘 등은 격침되거나 혹은 크게 파손되어 진열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일몰에 이르자 도고 사령장관은 구축정대(驅逐艇隊), 수뢰정대(水雷艇隊)에게 전투를 맡기고, 주력함대는 다음날 아침을 기해 울릉도 부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경쾌한 구축정대, 수뢰정대는 어둠을 틈타 동, 남·북의 세 방면에서 패잔한 적 함대를 습격하여, 나바린을 격침시키고, 시소이베리키, 나히모프, 모노마프 등 3척은 전투 항해력을 상실하였다. 다음날인 28일 아침에 울릉도 부근에서 네보카도프 소장이 이끄는 니콜라이 1세 이하 5척의 전함은 우리 함대에게 포위되어 달아날 길을 잃자 마침내 항복을 요청하였다. 사령장관 로제스크벤스키는 중상을 입어 구축함으로 옮겨 타고 북쪽으로 달아났지만, 우리 구축함에게 쫓기다 막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처음에 적함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크고 작은 것들을 합쳐 36척이었는데, 그중 격침된 것이 20척, 포획된 것이 5척, 나머지는 탈주하다 파괴되어 침몰하거나 혹은 중립항에서 무장을 해제당하였다. 용케 블라디보스토크로 도망쳐 들어간 것은 고작 소함정(小艦艇) 3척뿐이었다.

한국 북부에서의 러시아 군대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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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러시아 군대는 여러 차례 두만강을 넘어 한국 함경도에 침입해왔으므로, 육군 중장 미요시 나루유키(三好成行)는 38년 2월 17일에 후방 지원군인 제2사단 지휘자로서 함흥을 출발하여 북부 한국의 원정길에 올랐다. 사단(師團)은 연도(沿道)의 적군들을 소탕하면서, 성진(城津)을 거쳐 6월 20일에는 종성(鍾城) 및 수성(輸城)을 점령하였다. 이때 우리 제2함대는 두만강 부근으로 항해해 와서 웅기만(雄基灣)을 포격하고, 러시아령 포세트 지방으로부터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적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사단은 7월 23일에 부령(富寧)을 공격할 수 있었다. 적은 부령의 북쪽 백사봉(白沙峰), 오봉산(五峰山) 등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오래 방어하려고 하였지만 며칠도 지나지 않아 모두 격퇴되었다. 우리 군대는 여전히 북쪽으로 추격하였는데, 큰 비를 무릅쓰고 돌격하여 8월 3일에 마침내 회령(會寧)을 점령하였다.

화태도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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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日本海) 대해전(大海戰)에서 적함이 섬멸되자 우리 해군은 그 일부를 떼어 북견함대(北遣艦隊)를 편성하고, 육군 중장 하라구치 켄사이(原口兼濟)가 이끄는 화태(樺太) 【사할린섬】 원정군의 호송을 맡도록 하였다. 원정군은 남·북의 둘로 나뉘어, 남방부대는 7월 7일에 메레이(女麗)에 상륙하였고, 다음날 코스사코프 【대박(大泊)】 를 점령하였으므로, 적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으며, 한 달이 지나 남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북쪽 부대는 7월 24일에 아르코바 부근에 상륙한 후, 도청(島廳)의 소재지인 알렉산드로프스키를 함락시켰으며, 계속 진격하여 적군을 아노르에서 항복시키고, 같은 달 31일에 화태도(樺太島) 전체는 우리 군대의 소유로 돌아왔다.

강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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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일본]는 해군과 육군 모두 연전연승하였으며, 특히 봉천(奉天) 부근의 전투와 일본해 해전(海戰)은 러시아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북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러 양국에게 국가의 이해와 인도(人道)의 측면에서 강화(講和)를 권유하였다. 양국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합중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담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일본]는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합중국 주재 전권공사(全權公使) 다카히라 코고로(高平小五郞) 두 사람을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하였다. 러시아는 대장대신(大藏大臣) 윗테 및 전(前) 도쿄 주재 전권공사 로젠을 전권위원으로 삼아, 38년 8월 9일에 제1차 회견을 실시하였다. 다음날인 10일에 우리 위원들은 강화의 기초 조건 12개 조목을 러시아 위원들에게 제시하였으며, 이후 회견을 거듭한 것이 10회에 이르렀고, 반복하여 토의한 끝에 9월 5일에 강화조약(講和條約)의 조인을 마쳤다. 그 주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국은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비길 데 없이 우월한 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할 때 이를 방해하거나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1. 일·러 양국은 러·한 간의 국경에서 러시아국 또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침해하는 군사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에 동의한다.

1. 일·러 양국은 요동 반도 조차권(租借權)이 그 효력을 미치는 지역 이외의 만주에서 철군할 것.

1. 러시아국은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서로 용인될 수 없는 어떠한 특권을 갖지 않을 것.

1. 러시아국은 청나라 정부의 승낙으로 여순구(旅順口)와 대련(大連)의 조차권 및 장춘(長春)과 여순 간의 철도를 일본국에게 이전(移轉)·양여(讓與)한다.

1. 러시아국은 북위(北緯) 약 50도 이남의 사할린섬을 일본국에게 양여한다.

우리 천황 폐하는 10월 14일에 강화조약을 비준하였다. 2일 후에 평화 극복의 조서가 발표되자 이에 대전(大戰)은 종결되었다.

일한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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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 2월에, 만주 철군 문제에 따른 한국의 영토 보전 문제에 관해 일·러 양국의 의견이 충돌하여, 마침내 평화가 파괴되어 전쟁이 일어날 순간에 직면하자, 지금까지 러시아를 과신(過信)하고, 그 세력을 두려워한 한국 정부는 분명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 영구적인 친교를 맺기로 결심하고, 이때 외부대신(外部大臣) 임시(臨時) 서리(署理) 이지용(李址鎔)과 일본 주한(駐韓)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간에 하나의 조관(條款)을 협정하였다. 그것을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라고 한다. 그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및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 폐하의 외무대신 임시 서리 육군 참장(參將) 이지용은 각자 서로 합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 조관(條款)을 협정한다.

제1조 일·한 양 제국 간에 항구불변의 친교(親交)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한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하고 강녕(康寧)하게 보호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장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內亂) 때문에 대한제국이 황제의 안녕이나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은 신속히 그 시기에 맞는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부여할 것.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그 시기에 맞게 수용할 수 있도록 할 것.

제5조 양국 정부는 상호 승인을 거쳐 훗날 본 협약의 주의(主意)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정립(訂立)하지 말 것.

제6조 본 조약에 관련한 미비한 세부 조항들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무대신 사이에 그 시기에 맞게 협정할 것.

  메이지(明治) 37년 2월 23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광무(光武) 8년 2월 23일

        외부대신 임시서리(臨時署理) 이지용(李址鎔)

이 의정서는 메이지 37년 2월 23일에 체결되었으며, 같은 달 27일에 발표되어, 최근 일·한 관계의 바탕이 되었다.

일한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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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에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가 체결된 후, 같은 해 3월에 메이지 천황은 한국 황제에게 깊고 두터운 위문(慰問)을 전하기 위해 추밀원(樞密院) 의장(議長)인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대사가 귀국하자, 한국 황제는 답례로서 법부대신(法部大臣) 이지용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대동구락부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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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일·한 사절의 왕래는 양국의 국교(國交)를 더욱 원활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양 국민의 의지는 크게 융화되어, 마침내 대동구락부(大東俱樂部)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이 구락부의 목적은 양 국민 상호의 친목을 도모하고, 지식을 교환하는 데 있었다. 또 이 무렵에 윤시병(尹始炳),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을 수뇌로 하여 창설된 일진회(一進會)는 나아가 일본제국에 의지하여, 그 지도에 따라 폐정(廢政)을 개혁하고 나쁜 습관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 정치단체는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의 모든 도(道)에 걸쳐 수십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세는 이미 이와 같았다. 더구나 일본은 강적 러시아를 격파하였으므로, 한국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를 개선하고, 힘을 합쳐 더욱 그에 임하는 것이 당면한 급선무가 되었다. 때문에 일·한 양국 정부는 다시 다음과 같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한협약(日韓協約)이다.

 1.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무고문(財務顧問)으로 한국 정부에 채용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을 물어 시행한다.

 1.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외부(外部)에 채용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 업무는 모두 그의 의견을 물어 시행한다.

 1. 한국 정부는 외국과의 조약 체결과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特權), 양여(讓與), 계약(契約) 등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협의한다.

  메이지(明治) 37년 8월 22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광무(光武) 8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署理) 윤치호(尹致昊)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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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약의 결과, 대장성(大藏省) 주세국장(主稅局長)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재무고문으로 채용되어, 한국 재정의 정리(整理)와 감사(監査)의 임무를 맡아,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개혁한 것이 대단히 많았다. 외교고문에는 지난날 우리 외무성에서 직무를 받고 재미 일본 공사관에 채용되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그 임무를 맡았다. 그 후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는 경무고문(警務顧問)에,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는 학부(學部) 참여관(參與官)으로서 모두 한국 정부에 초빙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정부는 우리 고문이 세운 계획에 따라 재정, 외교, 경무(警務), 학제(學制)에서 순서에 따라 혁신의 기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제2차 일한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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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일본]는 동양의 평화, 한국의 영토 보전 및 자위(自衛)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는데, 19개월에 걸쳐 바다와 육지에서 연전연승하여 황위(皇威)와 국광(國光)을 빛내고,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하여 국면을 종결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우리나라가 한국에서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비길 데 없이 우월한 권리를 승인하였으며, 또한 필요한 지도·보호의 조치를 취하여 감히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8월 12일에, 일본과 영국 양국 간에 조인된 제2차 동맹 약관(約款)에도, 역시 우리나라[일본]는 한국에서 우월한 이익을 옹호·증진시키기 위해, 정당하고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 외에 여러 외국들도 모두 한국에서 우리나라[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다.

종래 우리나라[일본]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명한 정책으로 한국에 임하였으며, 오로지 폐정의 개혁에 힘썼지만, 한국이 여러 외국들과 중요한 외교 사무를 취급할 때에는 우선 미리 우리나라[일본]와 협의를 마치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협약을 무시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국의 외교를 현재와 같이 방임한다면, 반드시 한국이 약소(弱小)한 데 편승하여 야심을 드러내려는 나라가 출현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을 다시 일·러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이어서 우리나라[일본]를 끊임없이 불안한 지위에 놓이게 할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은 도저히 우리나라[일본]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장래를 위해 이 화근(禍根)을 근절하여, 일·한 양국의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 제2의 협약을 체결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일진회가 전 도(道)에 격문(檄文)을 보내, 단호히 외교는 모두 우방 정부에게 위임하고, 내치(內治)도 역시 선진(先進) 고문(顧問)을 선택하여 그에게 맡겨야 한다는 뜻의 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이때였다. 협약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정부 및 한국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가 공통된다는 주의(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의 부강(富强)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다음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거쳐, 지금 이후부터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서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를 맡고, 한국 정부는 지금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격의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統監) 【레지던트 제너럴】 을 두고,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京城)에 주재하여 한국 황제 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갖는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開港場) 및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 【레지던트】 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한국 주재 일본 영사에게 속하는 일체의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條款)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들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 유지하기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위 증거로서 아래 사람들은 각자 본국 정부로부터 합당한 위임을 받고 본 협약에 기명(記名) 조인(調印)하기로 한다.

  메이지(明治)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통감부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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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협약에 기초하여,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38년 12월 20일에 칙령으로써 통감부(統監府) 및 이사청(理事廳) 관제(官制)를 발포(發布)하고, 통감부를 경성(京城)에 두었다. 또 종래 조선 내 각지에 설치된 우리 영사관을 폐지하고, 경성, 인천, 부산, 원산, 평양, 진남포, 목포, 마산, 군산 및 성진(城津) 등 10개소 【후에 대구·신의주·청진 등 3개소를 추가하였다.】 에 이사청을 설치하고, 그 외에 필요한 곳에 이사청의 지청(支廳)을 두었다.

통감의 직권 중 주요한 것을 들자면 아래와 같다.

 1. 통감은 천황에 직속(直屬)하며, 외교에 관해서는 외무대신을 통해 내각 총리대신을 거치며, 그 외의 사무에 관해서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上奏)하거나 재가(裁可)를 받는다.

 1. 통감은 한국에서 제국(帝國) 정부를 대표하며, 제국 주재 외국 대표자를 경유하는 것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할함과 함께 한국의 시정(施政) 사무에서 외국인에 관한 것을 감독한다.

통감은 조약에 기초하여 한국에서 제국의 관헌(官憲) 및 공서(公署)가 시행해야 할 제반 정무(政務)를 감독하고, 그 외에 종래 제국의 관헌에게 속하던 일체의 감독 사무를 시행한다.

 1.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한국 수비군의 사령관에 대해 병력의 사용을 명할 수 있다.

 1. 한국의 시정(施政) 사무에서 조약에 기초한 의무의 이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통감이 한국 정부에 이첩하여 그 집행을 구하며, 단 급히 시행이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한국의 해당 지방관헌에게 이첩하여 그것을 집행한 후 이를 한국 정부에게 통보한다.

 1. 통감은 제국 관리(官吏) 및 그 밖의 자들을 한국 정부가 채용하는 것을 감독한다.

 1. 통감은 통감부령(統監府令)을 발령하여, 금고(禁錮) 1년 이하의 벌칙이나 2백 원 이내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1. 통감은 통할하는 관청이 명령 또는 처분으로 조약 혹은 법령을 위배하여 공익을 해치거나 권한을 침범한 바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그 명령 또는 처분을 정지시키거나 또는 취소할 수 있다.

통감의 밑에 총무장관(總務長官)을 두어 통감을 보좌하고 부(府)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다시 그 밑에 농상공무총장(農商工務總長)과 경무총장(警務總長)을 두어, 각자 그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통감부의 정원은 총 74명이었다. 이사청(理事廳)에 이사관(理事官)·부이사관(副理事官)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이사관의 권한은 아래와 같다.

 1.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감독을 받아, 종래 한국에서 근무하던 영사에게 속하는 사무와 더불어 조약 및 법령에 기초하여 이사관이 집행할 사무를 관장한다.

 1. 이사관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하다고 인정될 경우에, 통감의 명령을 요청할 여유가 없을 때는 해당 지방 주재 제국 군대의 사령관에게 이첩하여 출병(出兵)을 요청할 수 있다.

 1. 이사관은 한국의 시정(施政) 사무에서 조약에 기초한 의무를 위해 필요한 것에 따르는 사항으로 긴급을 요하여 통감의 명령을 요청할 여유가 없다고 인정될 때는 곧바로 한국 해당 지방 관헌에게 이첩하여 그를 집행하게 한 후, 통감에게 보고한다.

 1. 이사관은 이사청령(理事廳令)을 발령하여 10원 이내의 벌금, 구류(拘留) 또는 과료(科料)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토 통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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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官制)를 발포(發布)한 다음날인 21일에, 추밀원(樞密院) 의장(議長)인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황제가 친히 임명하였으며, 총무장관에는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농상공무총장에는 기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 경무총장에는 오카키 시치로(岡喜七郞)가 임명되었다. 한국의 외교권은 이미 우리나라[일본]가 감리(監理)하게 되어, 청나라,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각국은 경성에 공사를 주재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영국은 통감부령의 발포에 앞서 경성의 공사관을 철폐하고, 종래의 사무는 새로 영사관을 설치하여 취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각국들도 모두 영국을 본받았으며, 39년 2월 6일에 청나라 공사관의 철폐를 마지막으로 각국의 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다. 이어서 한국이 각국에 설치한 공사관 및 영사관의 사무는 모두 우리 정부가 계승하여 원활한 외교 사무를 하기에 이르렀다.

39년 1월 31일에, 경성의 일본 공사관은 철폐되고, 이튿날인 2월 1일에 임시 통감 대리 육군 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통감부 개청식(開廳式)을 거행하고, 사무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3월 2일에 이토 통감이 비로소 경성에 부임해 왔다.

일한협약 체결 후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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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 체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은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었다. 【메이지 38년 11월 28일】 이지용(李址鎔)이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이 학부대신(學部大臣), 권중현(權重顯)이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이 군부대신(軍部大臣), 민영기(閔泳綺)가 도지부대신(度支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법부대신(法部大臣)인 것은 과거와 같았다. 그러나 내각의 방침에 반대하고 외교권이 일본에게 위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궐에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여러 대신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기도 하면서, 백방으로 힘을 다해 협약을 파기하거나, 효력을 끝내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육군 부장(部將) 민영환(閔泳煥),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등 두 사람은 상소를 올리고 자살하였다.

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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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한국에서는 정치가 문란해지고 온갖 법률과 제도가 쇠퇴하여 실행되지 못하였으므로, 화적(火賊)이라고 칭하는 도적떼들이 곳곳에서 출몰하여, 재화를 약탈하고 포학한 행위를 자행하였지만, 경찰력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를 진압할 수 없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부근 일대는 곧 도적떼들의 소굴이 되어, 항상 그들이 끊임없이 횡행하였으며, 또한 무뢰하기 짝이 없는 무리들이 양민을 괴롭히는 일이 적지 않아, 때를 기다려 화란(禍亂)을 일으키려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일·러전쟁부터 계속 협약의 체결 등이 있었고, 일·한 양국의 관계는 구태(舊態)를 고칠 때마다 대세(大勢)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이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결코 적지 않았다.

민종식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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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충청남도 정주군(定州郡) 사람인 민종식(閔宗植)은 창의대장(倡義大將)이라고 칭하고, 메이지 39년 【광무 10년】 2월 이래 각지에서 출몰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5월 17일에는 남포군수(藍浦郡守)를 사로잡았으며, 19일에는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하여, 그 도당(徒黨)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우리 헌병 및 경찰관들은 한국 군대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쉽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리하여 통감(統監)은 군사령관에게 명하여, 보병 2개 중대 및 기병 1개 소대를 파견하도록 하였으므로, 토벌대는 곧바로 적을 격파하고 홍주성을 회복하였다. 이때 수괴(首魁)인 민종식은 몸을 피해 오랫동안 종적을 감췄지만, 11월에 체포되 사형에서 한 등급이 감해져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최익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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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충청남도 정산군(定山郡) 사람으로 면암(勉庵)이라고 불렸으며, 유생들 간에 명망 있는 노유(老儒)였다. 그는 신협약(新協約) 체결 당시에 경성(京城)에 있으면서 격문(檄文)을 전 도(道)에 배포하여 크게 반대론을 고취시켰는데, 39년 5월에 전라북도 사람 임병찬(林秉瓚)과 모의하여 그 무리 백 수십 명을 소집하고, 병기와 탄약을 비축하여 관아를 습격하고 세금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순창(淳昌) 【전라북도】 부근에서 관병에게 격파되어 최익현, 임병찬 이하 모두가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수괴 최익현을 감금(監禁) 3년, 임병찬을 감금 2년에 처하고, 최익현의 감금은 쓰시마섬(對馬島)에서 집행하였는데, 그는 이듬해에 병을 얻어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의 경우들 외에도 지방에 분산되어 있던 불량한 무리들은 배일(排日)의 명분을 빌려, 화적(火賊)들과 연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인명을 해쳐 도처에 경계(警戒)를 전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러한 형세가 되었으므로, 메이지 40년 【광무 11년】 5월에 박제순 참정대신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모두 그 직(職)을 사임하고, 이완용이 대신 참정대신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임선준(任善準)은 내부대신에, 이병무(李秉武)는 군부대신에, 이재곤(李載崐)은 학부대신에, 고영희(高永喜)는 도지부대신에, 조중응(趙重應)은 법부대신에, 송병준(宋秉畯)은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의정부를 고쳐 내각(內閣)이라고 부른 것은 이때였다. 송병준은 일진회(一進會)의 수령으로 성망(聲望)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각료의 반열에 올라 국정을 집행하게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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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0년 6월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그 이름이 보여 주듯이, 전쟁의 참화를 없애고 평화의 촉진에 공헌하기 위하여 열국(列國)의 위원들이 협의하는 회합이었다. 한국의 외교는 메이지 38년의 협약에 따라, 이미 우리나라[일본]에게 위임하였으므로, 평화회의는 우리 위원들이 출석한 이상, 한국 사절이 겹치게 파견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6월 29일에 한국 황제의 밀사(密使)라고 칭하는 자들이 갑자기 헤이그에 나타나, 평화회의에 위원의 대우를 받으려고 운동을 벌였다. 밀사는 예전에 협약에 반대하여 직위에서 면직된 전(前)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이준(李儁),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서기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이었다. 이상설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친히 신임장(信任狀)을 받은 후, 4월 20일에 이준과 함께 경성을 출발하여,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며, 거기에서 다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과 회합하여, 함께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그들을 도운 사람은 미국인 헐버트 【일찍이 경성에서 저술업(著述業)에 종사하였으며, 또한 한국 정부에 채용되어 교사가 되었던 사람】 였다. 세 사람은 한국이 평화회의 참석 통고를 받지 못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 참석의 권리를 얻으려고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각국 위원들을 방문하면서 호소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회의 참석을 통고할 특권을 가진 네덜란드 정부도 역시 단호히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들은 활발히 우리나라[일본]를 비방하였지만 한국 문제는 한 번도 회의의 의제(議題)가 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준은 병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이상설과 이위종 두 사람은 다른 방책이 없게 되자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