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08장
8. 신문에 넣은 쪽지와 돈뭉치
바로 그때였다.
신문을 다 팔고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오던 은주와 민구가 골목 안에서 벌어진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앗, 오빠가!”
은주는 다람쥐처럼 달려가, 지금 막 은철의 면상을 갈기려는 봉팔이의 벽돌 든 손목을 재빨리 붙잡았다.
“누구야?”
은철이의 배 위에 말 타듯이 올라탄 봉팔이가 고함을 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요 계집애가!”
봉팔이가 손을 휙 내젓는 바람에 은주의 몸은 지푸라기처럼 나자빠지고 말았다.
“민구 오빠, 빨리 우리 오빠를 좀 도와 줘!”
은주가 민구에게 애원하듯이 외쳤다. 그러나 벌써 민구는 봉팔이를 향해 비호처럼 날아 들어가고 있었다.
“이자식이, 사람을 벽돌로 쳐?”
민구는 봉팔이의 손목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아야!”
봉팔이는 하는 수 없이 벽돌을 내던졌다. 그러는 사이에 은철이는 재빨리 땅에서 일어나고, 싸움은 봉팔이와 민구 사이로 옮겨갔다.
“민구야! 미안하지만 잠깐만 그 자식을 붙잡고 있어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테니......”
은철이는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와 사람의 물결을 헤치면서 신사가 사라진 쪽으로 달음박질했다. 그러나 벌써 신사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돈암동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앗, 이 일을 어쩌나? 저 분을 놓치면 큰일이다! 저 분이 누군지, 어디서 사는지 알아야 해.’
은철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때마침 앞을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멈추어 탔다.
“운전사 아저씨, 미안하지만 지금 저 앞에 가는 택시를 놓치지 말고 따라가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저 차를 계속 따라가 주세요!”
은철이는 택시 운전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 차를 놓치는 날에는 영원히 한사람의 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신사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은철이는 자기가 훔친 2만 원이라는 돈을 갚으려고 해도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은철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사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택시는 이윽고 창경궁을 지나 혜화동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운전사 아저씨! 너무 바싹 따라가지 말고 이제부터는 천천히 따라가 주세요.”
골목 안에서는 차가 빨리 달리지 못했다. 두 대의 택시가 약 100미터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혜화초등학교 앞을 지나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앞선 차가 어떤 호화로운 2층집 앞에서 멈추었다.
“운전사 아저씨, 여기서 멈추어 주세요.”
은철이가 탄 택시도 멈추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차에서 내린 신사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주고 나서는 그 호화로운 양옥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얼마인가요?”
“500원인데, 그냥 400원만 내거라.”
“네, 고맙습니다.”
은철이가 택시를 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금을 내고 은철이는 차에서 내렸다. 옅은 황혼이 혜화동 일대를 덮기 시작했다.
은철이는 주춤주춤 양옥집으로 걸어가서 대문에 붙은 문패를 쳐다보았다. 문패에는 ‘이창훈’이라고 쓰여 있었다.
은철이는 문틈으로 넓은 정원을 들여다보았다. 정원에는 무성한 수목이 있고, 화초가 만발한 화단이 있고, 수목 사이에는 한 개의 벤치까지 놓여 있었다. 귀를 가만히 기울이니 양옥 2층에서는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소녀의 귀여운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저 노래는 은주가 잘 부르는, 홍난파 선생님의 〈봉선화〉가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그 유명한 곡조 ‘울 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되는 처량하기 그지없는 노래였다. 일제 시대에는 줄곧 금지를 당했던 어여쁘고도 구슬픈 노래, 삼천만 민중의 심금을 울린 그 유명한 노래를 은주는 지난번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부른 후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날 내빈으로 참석했던 음악 평론가 신채영 선생이 은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특별히 극찬을 했었다.
“참 훌륭한 소질을 가진 소녀다. 잘만 하면 너는 훌륭한 성악가가 될 것이다.”
유명한 음악 평론가로 알려진 신채영 선생은 그 날 은주의 천재적 재능을 칭찬해 주었다.
‘아아, 은주가 이런 집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은철이가 멍하니 2층을 쳐다보고 있을 때,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창으로 일곱 살쯤 된 초등학생이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아, 아버지!”
“오, 영민이냐?”
신사가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나 오늘 누나하고 택시 타고 종로 나가서 공책이랑 연필이랑 많이 사왔어요.”
“택시? 누가 택시를 타고 다니랬어?”
신사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가 자꾸만 타자고 해서 탔어요. 난 전차 타고 오자는데 누나가 자꾸만......”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영란이, 거기 있느냐?”
“네, 있어요.”
대답 소리와 함께 피아노 소리가 뚝 멎으며, 열너더댓 살 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은철이가 서 있는 대문 밖과 지금 두 남매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2층 사이의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은철이는 거기서 자기의 동생 은주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