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1장
11. 서글픈 거짓말
은주는 깜박 잊었던 신기한 사실―낮에 자동차 안에서 본 자기와 똑같이 생긴 그 여학생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참, 어머니.”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오늘 참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글쎄, 저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이 세상에 또 하나 있어요!”
은주는 어머니와 오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라고?”
어머니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얼굴을 들었다.
“글쎄, 제 얼굴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니까요.”
“에이, 거짓말 마!”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은철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빠도 참, 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거짓말이래?”
“어디서 봤는지 모르지만, 설마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을 본 것 아니야?”
은철이는 이제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 때 파리하게 여윈 어머니의 얼굴빛이 한층 더 핼쑥해지더니 핏기를 잃기 시작했다.
“너...... 너 그게 정말이니?”
어머니는 조용하게 물으셨지만, 그 한마디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어떤 커다란 감정이 숨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오늘 종로 4가에서 돈암동 쪽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은주는 오늘 낮에 자기가 보았던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쭉 했다.
어머니는 은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다시 자리에 누우면서 물었다.
“그래, 그 여학생도 너처럼 깜짝 놀라더냐?”
“네, 서로가 다 깜짝 놀라면서 멍하니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자동차가 휙 떠났어요.”
“음, 그래? 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
어머니는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 말처럼 똑같기야 하려고? 그저 좀 비슷한 데가 있겠지!”
“아니에요, 어머니. 정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쌍둥이처럼 똑같았어요. 그런데 어머니! 저 쌍둥이는 아니죠?”
은주는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저쪽 벽을 향한 채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은주의 궁금증을 싹둑 잘라 버렸다.
“얘도 참...... 별말을 다 묻지! 네가 쌍둥이면 내가 모르고 누가 알겠니?”
“어머니, 정말 저 속이시는 건 아니지요?”
“얘도 참...... 내가 왜 너를 속이겠니?”
어머니의 대답은 어딘지 분명치가 못하다.
“아니, 어떻게나 예쁜지, 정말 쌍둥이 언니가 있으면 좋겠어요! 요번에 중학교에 입학하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교복이 새것이던데요, 뭐.”
“돈이 있는 집 애인가 보지!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걸 보니. 후웃......”
어머니는 돌아누운 채 긴 한숨을 쉬고는 나직이 말했다.
“너도 새 옷을 입고 꾸미면 그 애처럼 예쁘질 못하겠니? 돈만 있으면, 학교도 다니고......”
그러자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은철이가 번쩍 얼굴을 들면서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러냐?”
“은주도 학교에 갈 거예요!”
은철이의 목소리가 힘차게 굴러 나왔다.
“글쎄, 은주가 어떻게 학교에 간다고...... 넌 자꾸 그렇게 우겨만 대면 제일이냐?”
은철이는 똑같은 말을 힘 있게 되풀이했다.
“학교까지 걸어만 가는 거냐? 다 가게 만들어 놓아야 가는 거지!”
“어머니, 은주는 학교에 갑니다! 내일부터 학교에 간다고요!”
은철이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어머니는 머리를 돌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미쳤니?”
“미치지 않았습니다! 은주는 내일부터 학교에 갑니다. 정말이에요.”
은철이의 음성이 점점 흥분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은주는 내일부터 학교에 갑니다! 동생 하나 학교에 못 보낼 내가 아니에요!”
“글쎄, 학교에 어떻게 보낸다고 큰소리만 치느냐? 난들 네 마음을 모르겠냐만......”
“은주가 학교에 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일부터 은주는 학교에 가기만 하면 됩니다. 은주가 오늘 자기와 똑같은 여학생을 봤다고 하지만...... 그건 은주의 환상입니다! 새로 만든 교복을 입고, 자기와 나이도 비슷한 그 여학생을 보는 순간 은주는 그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여학생을 자기 자신처럼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상에 똑같은 얼굴이 두 개 있을 리가 없잖아요.”
“으음......”
어머니는 대답을 못했다.
“오빠!”
은주는 오빠를 부르며 은철이의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의 마음 다 알고 있어! 나를 그처럼 귀여워해 주고 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 나도 잘 알아! 그러나 오빠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서까지 학교에 가고 싶지는 않아! 학교에 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오빠를 그처럼...... 그처럼......”
“응?”
은철이는 놀란 얼굴로 은주의 흐느끼는 두 어깨를 와락 부여잡았다.
“은주야! 너...... 너...... 봉팔이가 뭐라고 그러든?”
“난 다 알아! 난 다 알고 있어!”
그 때 밖에서 민구의 소리가 들렸다. 은철이는 민구를 불러들였다.
“민구야, 거기 좀 앉아.”
민구가 앉자 은철이는 천천히 말했다.
“민구야, 오늘은 미안했다. 그러나 봉팔이의 말을 전부 믿어서는 안 돼. 나는 돈 2만 원을 훔친 게 아니야. 그 신사가 잃어버린 가방을 돌려받게 되어 감사의 표시로 내게 준 돈이야. 나는 지금 2만 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았지만, 내 형편이 좋아지기만 하면 그 돈을 돌려줄 거야. 그래서 그 신사의 뒤를 따라가서 집을 알아 놓고 온 거고.”
은철이는 사실 반, 거짓말 반으로 민구와 은주에게 마음에도 없는 서글픈 말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은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에 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 그러면 그렇지!”
민구도 은철이의 말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어머! 2만 원을?”
어머니와 은주의 입에서 똑같은 감탄의 말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