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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무지개 뜨는 언덕/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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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착한 사람들

그날 밤, 돈암동 은주네 판잣집에서는 은주와 은철이 그리고 이창훈 씨 내외가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앉은 은철 어머니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황혼이 내리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은주가 홀로 두고 온 병든 어머니 생각을 하며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울어서 하는 수 없이 네 사람은 병원을 나와 돈암동 판잣집으로 온 것이다.

이창훈 씨 내외는 은철 어머니에게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주욱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두 내외는 은철 어머니에게 머리를 정중히 숙이며 말했다.

“이처럼 고생스러운데도 은주를 훌륭히 길러 주신 은혜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정말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댁의 귀한 따님을 보잘것없이 길러서 오히려 민망스럽습니다.”

은철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의 운이라는 것은 정말로 모를 일입니다. 은주도 일고여덟 살 때까지는 남부럽지 않게 길렀습니다만, 남편이 포목 사업에 실패하고 만주로 건너간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어 주지 않아서...... 제 아이라면 또 모르지만, 남의 귀한 따님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 못지않게, 행복하게 길러 보려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써 보았습니다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은주의 그 다사롭고 착한 마음씨야말로 모두가 다 어머니 되시는 분의 훌륭하신 교육에서 나온 것이라 믿습니다.”

이창훈 씨 내외는 진실로 은철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이 한없이 고마웠다.

“원, 별말씀을......”

은철 어머니는 은주의 몸을 한 번 껴안아 보면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무엇을 굳게 결심한 사람처럼 다시 눈을 슬며시 뜨면서 핼쑥한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지금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은철 어머니가 말했다.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이창훈 씨 내외는 똑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대했다.

“저는 어제 저녁 은주가 종로 4가에서 자기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보았다고 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을 결심했습니다. 집안 살림이 이 모양이 되고 보니 남의 귀한 자식을 기를 힘이 없어졌습니다. 애정으로만 생각하면...... 15년 동안 애지중지 기른 은주를 어찌 내 손에서 내놓고 싶겠습니까만...... 그러나 그것은 저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미련한 생각일 것이고, 은주를 위해서는 오히려 불행한 일이 될 것 아닙니까? 남과 같이 입히지도 못하고 먹이지도 못하고, 학교에도 못 보내는 은주의 장래를 생각할 때......”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어머니는 품안의 은주를 한층 더 꼭 껴안아 주었다.

“어머니!”

은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딸이에요. 저는 죽어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남과 같이 입지 못해도 좋고, 먹지 못해도 좋아요. 남처럼 학교에 안 다녀도 좋아요. 어머니만 계시면 돼요. 어머니, 제발 저를 보내지 마세요. 네?”

“아니다, 은주야!”

어머니는 상처 입은 은주의 머리를 자꾸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를 낳아 주신 친어머니가 여기 계시는데, 그런 말을 해서 네 어머니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면 못쓴다. 그리고 너는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아뇨, 저는 학교에 못 가도 괜찮아요. 오빠하고도 그렇게 약속했어요. 학교에 못 가도 사람은 산다고, 올바르게만 살면 된다고......”

그러는 은주의 말을 은철이는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참 좋은 말이다!”

그때 이창훈 씨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은주야말로 참 좋은 말을 알고 있구나. 올바르게 사는 길...... 그래, 사람에게는 그 길밖에 없단다.”

그러고는 곧 말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은주는 어디든 은주가 있고 싶은 데 있으면 된다. 구태여 은주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니까, 그 점은 조금도 염려 말아라. 더구나 어머님께 그처럼 효성스런 네가 병중에 계시는 어머님을 잘 보살펴 드려야할 게 아니니?”

이창훈 씨는 15년 전 은주를 남에게 맡길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이를 도로 찾아가지 않겠노라고 했던 그 약속이 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이창훈 씨 부인이 은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 때의 저희들 약속도 있고 해서, 이런 사정 이야기를 은주에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제가 정에 끌려 부질없는 말을 은주에게 한 게 잘못이었어요.”

“아닙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었으니 그것은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은주가 친부모님을...... 훌륭하신 부모님을 다시 만난 것이 한량없이 기쁩니다. 모두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 뜻을 저희들은 잘 받들어야 되지요.”

은철 어머니는 이렇게 엄숙하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울고 있었다.

“하여튼 속히 병이 나으시기만 바랍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또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창훈 씨 내외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은주에게도 한마디 했다.

“은주도 이처럼 평화스러운 가정에 사정없이 뛰어 들어온 우리를 그리 좋은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은주의 마음대로이니 조금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창훈 씨는 은철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부터, 아니 어제 저녁부터 은철 군을 누구보다도 믿음직하게 생각하네. 그러니 은철 군도 그렇게 알고 힘에 부치는 일이 생기거든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고 나를 찾아 주기 바라네.”

그제야 비로소 은철이는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어제 저녁부터 오늘 밤까지 저는 선생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입었습니다. 그 너그러우신 은혜는 뼈에 새겨 두겠습니다. 더구나 은주를 중심으로 선생님과 저희들 사이에 뜻하지 않은 그러한 인연이 맺어져 있단 사실을 생각할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그리고 은주의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볼 여유를 주십시오. 은주의 행복이 과연 어디 있는지, 저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철이의 대답은 열일곱 살 소년으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감정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를 함께 지닌 훌륭한 것이었다.

이창훈 씨는 감동한 듯 말했다.

“은철 군, 좋은 말을 해주어서 감사하네. 나는 은철 군이 한층 믿음직스러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