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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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새로 생긴 언니를 생각하며

은주는 어머니와 은철이 사이에 누워서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져 갔다. 길러 준 어머니와 낳아 준 어머니, 이 두 어머니의 얼굴 모습이 지그시 감은 은주의 눈 속에 번갈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제 저녁 택시 안에 있던 그 새침한 여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창훈 씨 내외의 말을 들으니, ‘영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그 여학생이 바로 은주의 쌍둥이 언니라지 않는가!

“언니!”

은주는 입 속으로 가만히 불러 보았다. 자기를 낳아 주었다는 이창훈 씨 부인에 대해서는 어머니라는 말이 통 나오지 않았지만,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영란을 언니라고 부르는 데는 쑥스럽다거나 싫다는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은주는 자기에게 언니가 하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고, 생각할수록 너무 기뻤다.

“언니!”

은주는 또 한 번 입 속으로 불러 보았다. 어쩐지 감미롭고 신기했다. 그리고 언니가 생겼다는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를 믿음직한 감정이 은주의 온몸을 감돌기 시작했다.

“언니!”

세 번째 그렇게 불러 보았을 때, 은주의 감정은 완전히 영란의 동생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오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지만, 새로 지은 교복을 입은 그 예쁜 여학생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만은 너무나도 기뻤다.

“언니, 같이 놀아.”

“그래, 은주야. 같이 놀자.”

“언니는 참 예쁘게 생겼어.”

“아이, 은주 네가 더 예쁘지 뭐?”

“아냐, 언니가 더 예뻐.”

“똑같이 생겼으니까, 둘 다 예쁘지! 하하하하......”

“하하하하. 언니가 참 좋아.”

“은주야, 넌 참 좋은 동생이야.”

은주는 영란이와 만나서 재미있게 노는 광경을 가만히 생각해 보며,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였을 때도 은주는 영란과 만나서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노는 꿈을 꾸었다.

은주의 머리 상처는 나날이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이창훈 씨 내외가 방문한 일이 있은 후부터 어머니의 병환은 하루하루 나빠져 갔다.

이창훈 씨는 날마다 은주의 판잣집을 방문했다. 은주의 약도 사 오고, 은철 어머니의 약도 사들고 왔다.

은철이는 어머니와 은주의 병간호로 일터에도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어머니와 은주 옆에 붙어 있었다.

영란의 어머니는 하루바삐 은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영란의 아버지인 이창훈 씨는 부인에게 서두르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너무 서두르는 것은 도리어 은주의 감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은주의 양모와 은철이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될 거요. 그러니 기회를 보아서 천천히 데려오는 게 좋을 것이오.”

한편, 영란은 어머니로부터 은주라는 동생이 하나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발끈 화를 냈다.

“아이, 더러워! 길거리에서 신문이나 팔던 것이 내 동생이야?”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지.”

“그런 동생, 난 싫어요! 아이, 그 더러운 옷하며 그 더덕더덕 기운 운동화며......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그런 애가 내 동생이면, 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란 말이에요. 게다가 얼굴이 똑같으니 동생이 아니라는 거짓말도 못하고...... 아이참, 어머닌 왜 하필이면 쌍둥일 낳았담!”

영란은 정말로 그런 동생이 생겼다는 게 무척 싫었다. 자기와 똑같은 얼굴이 이 세상에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싫고, 그런 아이와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는 것도 너무나 기분 나쁜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 학교까지 똑같담. 참 별것이 다 들러붙어서 사람 못살게 구네!”

영란이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아버지가 아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란아.”

“왜 그러세요?”

영란은 새침하게 대답을 했다.

“사람이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못쓰는 법이다. 불쌍한 동생을 위로는 못할망정 그처럼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나? 은주는 곧 우리와 같이 살게 될 거야. 그러니 너도 마음 곱게 먹고 동생을 귀여워하는 언니가 되어라.”

“나는 싫어요. 거지같은 애와 한 집에서 안 살 거예요.”

“안 살면 어떻게 할 테나?”

아버지가 팩, 소리를 질렀다.

“영란이는 동생을 왜 그렇게 미워하지? 통 모를 일이다. 더구나 너와 똑같이 생긴 귀여운 동생 아니니?”

“아니에요. 나와 똑같이 생긴 게 더 싫어요. 왜 나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어야 하느냐고요?”

“음, 정말 이상한 심리로구나.”

그와 같은 영란의 심리를 아버지로서는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너와 똑같은 사람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렇게 싫어?”

“싫어요.”

“왜 싫을까?”

“이유 없이 싫어요. 싫은 건 싫은 거지, 꼭 이유가 있어야 돼요?”

아버지는 하도 이상해서 어느 날 대학에서 심리학을 연구하는 친구 한 사람을 찾아가서 영란이의 그와 같은 이상한 심정을 물어보았다.

“그런 일이 때때로 있지. 더구나 똑같은 용모를 타고난, 소위 일란성 쌍둥이에게서 그런 독특한 성질이 가끔 발견되곤 한다네.”

그런 다음 그 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란이 자신도 분명히 말한 바와 같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을 무척 싫어할 수 있다네. 일종의 질투라고 할 수 있지.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하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자기와 경쟁을 하는 것 같고, 자기의 장점이 깎이는 것 같고, 상대방의 결점이 자기의 결점인 것처럼 생각되는 데서 그러한 독특한 심리 상태에 빠지기가 쉽지.”

교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당분간 은주를 데려오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러다가 영란이의 마음이 돌아서면 은주를 데려오기로 두 내외 사이에 약속이 되었다.

이창훈 씨는 우선 은주네 세 식구가 살 만한 아담한 집 한 채를 장만해 주려고 복덕방 영감님과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한편, 영란의 어머니는 은주의 교복 한 벌을 새로 맞추어 영란과 함께 은주네 판잣집을 찾았다. 그 날은 은주의 부상당한 머리가 완전히 나아서 내일은 학교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