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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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음악 선생님의 제안

“영란이는 어디 갔니?”

은주가 혼자 들어가자 오 선생이 물었다.

“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집으로 갔나 봐요.”

“집으로? 왜?”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더러 음악실로 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하고는 곧 돌아서서 뛰어나갔어요.”

“음......”

오 선생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히는 수 없다. 사람이란, 질투심이 너무 많으면 못 쓰는 거다. 더구나 은주는 영란이의 동생이 아니나? 처음에는 영란이를 콩쿠르에 내보내려고 생각했지만, 암만해도 은주가 영란이보다 실력이 앞서. 그래서 은주를 내보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영란이가 약간 서운해 할 것 같아서 너희 둘이 모두 나갈 수 있도록 이중창을 시키려고 생각한 것이다. 은주는 소프라노, 영란은 알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 선생은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러나 이젠 하는 수 없다. 영란이가 저렇게 자꾸 삐딱하게 나가면 어쩔 수 없지. 내일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은주 혼자 독창으로 나가는 수밖에......”

오 선생의 말에 은주는 고개를 확 들면서 힘 있게 불렀다.

“선생님!”

“응?”

“선생님, 저는...... 저는......”

“왜 그러느냐?”

“언니를...... 영란 언니를 내보내 주세요. 선생님, 저는 그런 데 나갈 자격이 없어요. 언니를...... 꼭 언니를 내보내 주세요!”

은주는 머리를 숙이고 간절히 청했다. 언니를 빼놓고 자기가 나간다는 것은 은주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 때문에 영란 언니의 마음이 더욱 비뚤어져 간다면, 은주는 그것이 더 괴롭고 무서웠다.

그뿐만 아니라, 은주의 지금 심정으로는 그런 화려한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부를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만도 분에 넘치는 행복인데, 그 이상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제발 선생님이 영란 언니를 내보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음, 그만하면 은주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제일 우수한 학생을 내보내는 것이 원칙이니까.”

“그래도 선생님, 저보다 영란 언니가 더 우수할 거예요.”

은주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노래를 부를 때 일부러라도 잘못 부를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은주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 과히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내일 영란이에게 한 번 더 물어보아서 이중창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싫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여튼 은주는 내일부터 방과 후에 남아서 노래 연습을 열심히 해야 되겠다. 그렇게 알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도 좋아.”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오 선생은 총총히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일이 왜 이처럼 자꾸 뒤틀려 갈까? 콩쿠르는 왜 또 있어 가지고...... 영란 언니가 오죽이나 마음 아플까?’

은주는 영란에게 무슨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난 다 들었어. 네가 정말 콩쿠르에 나가게 됐구나!”

밖으로 나오자 영순이가 서 있다가 은주를 반가이 맞이했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마음이 고우니?”

“아이, 애도 참!”

둘은 다정하게 교문을 나서 거리로 나왔다.


이튿날, 오 선생은 영란을 음악실로 따로 불러서 은주와 이중창을 하라는 말을 했다.

영란은 샐쭉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전 안 나가겠어요.”

오 선생은 영란이가 그렇게 대답할 줄 미리부터 짐작했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왜 안 나가려고?”

“그냥 나가기 싫어요.”

“왜?”

그러나 영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얼른 외면을 했다.

“너희 자매가 나가서 이중창을 하면 얼마나 좋겠니? 얼굴도 똑같고 노래도 둘 다 잘하고...... 그렇게 되면 아마 우리 학교가 제일 인기를 끌 거다.”

“저보다도 은주가 나으니까 은주를 내보내면 되지 않아요? 저 같은 것이 따라 나갔다가 입상을 못하면 학교 체면이 서겠어요?”

“영란아!”

오 선생은 부드러운 말씨로 영란을 설득했다.

“너희 자매간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니는 동생을 사랑하고 귀여워해야 할 게 아니냐? 그처럼 자꾸 틀어지면 어떡하니? 더구나 은주는 자기는 그만두고 영란 언니를 꼭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는데. 동생의 귀여운 마음을 영란이가 알아줘야 할 게 아니냐?”

“제가 몰라주는 게 뭐예요? 그러니까 저 대신 은주를 내보내 달라는 거 아녜요? 그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도 같이 나가는 게 싫으니?”

“싫어요.”

“왜?”

“그런 건 선생님, 물으실 필요 없어요.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은 거지, 특별히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오 선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묵묵히 앉아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음, 잘 알겠다. 내일 아버지든 어머니든 학교로 좀 와 주시면 좋겠다고, 집에 돌아가서 말씀을 드려라.”

“......”

영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알겠냐?”

오 선생은 따지는 듯이 물었다

“네, 가서 전해 드리겠어요.”

영란은 억지로 대답했다.

이튿날 아침, 영란의 아버지 이창훈 씨가 오 선생을 찾아왔다. 이창훈 씨는 은주의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영란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 관계였습니까?”

그제야 비로소 오 선생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영란이는 한번 싫다면 끝끝내 싫은 애니까, 부모의 입장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모두 다 부모의 잘못입니다. 선생님의 간곡하신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만, 영란이는 내버려두시고 은주만이라도 잘 지도해 주십시오. 영란이는 자기 스스로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이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두 아이의 성격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고는 또 한참 있다가 오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영란이도 음악에 대한 소질이 풍부한 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고집 역시 음악적 소질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해야 할지,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도 자유롭게 자라났기 때문에......”

“네,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애가 그처럼 거만하지는 않았는데...... 점점 커 가면서 한층 더......”

“말하자면 가정에서 너무 지나친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이창훈 씨는 면목이 없어 머리를 숙였다. 정말로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후 이창훈 씨는 가방에서 돈 20만 원을 꺼내어 오 선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은 은주의 학비로 당분간 선생님께서 좀 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약간 가정 사정이 복잡해서요.”

“잘 알았습니다. 제가 맡아서 적당히 처리하겠습니다.”

오 선생은 그렇게 할 것을 쾌히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