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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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진정한 예술가란?

영란은 귀에 멍이 들도록 타이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을 요즈음 매일 들었다. 그러나 본래 꽁한 영란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너희 두 자매가 같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좋겠니? 똑같이 생긴 너희 두 애가 다 노래를 잘 부른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어머니와 아버지는 입이 닳도록 타일렀으나 영란은 통 듣지를 않았다.

“둘이 다 잘 부른다는 게 아니에요. 은주가 더 잘 부른다는데, 어머니는 알지도 못하고......”

“그럼 어떠나? 은주는 네 동생이잖니?”

“그러니까 잘 부르는 사람이 혼자 나가면 그만이지, 못 부르는 나까지 덩달아 따라 나갈 필요가 어디 있어요?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는 대접인가요?”

“얘, 영란아, 글쎄 너도 좀 차근차근 생각 좀 해 봐라.”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대접 받긴 싫어요.”

영란은 뾰로통한 얼굴로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피아노 앞에 털썩 걸터앉아 악보를 펴놓고, 이번 콩쿠르의 지정곡으로 되어 있는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치기 시작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피아노에 맞추어 영란은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왜 그런지 영란은 자꾸만 서글퍼졌다. 영란은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날까지 그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는 영란이가 뜻하지 않게 자기 앞에 나타난 은주에게 지고 말다니...... 그것은 피아노와 성악에 모두 자신 있던 영란이에게 성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어른의 세계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본래 예술가란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영란의 자존심이 은주가 등장한 이후부터 여지없이 짓밟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콰앙― 우르릉―”

영란은 분하고 기가 막혀서, 피아노 건반을 손으로 쾅 내려치면서 피아노 위에 엎드려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떡하면 은주에게 이길 수 있을까?’

영란은 눈물 어린 얼굴을 들고 캄캄한 밤하늘을 들창 너머로 내다보았다.

‘은주는 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를까? 내일은 은주가 노래 연습을 하는 걸 꼭 한 번 들어 봐야겠다.’

영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은주가 정말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를까? 은주가 정말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른다면......’

영란은 뚫어질 듯이 밤하늘을 쏘아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면, 분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영란은 입술을 꼭 깨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거의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영란은 밤을 꼬박 새웠다.

‘오늘은 꼭 은주의 노래 연습을 지켜봐야지!’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을 품고 영란은 학교에 갔다.

학교에 들어가자 영란은 먼발치에서 은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13년이 넘게 애지중지 길러 주신 어머니를 잃은 은주의 얼굴빛은 한층 더 쓸쓸해 보였다.

‘내가 좀 너무한 것도 같아.’

영란은 그런 생각도 약간 들었다.

‘은주는 그처럼 나를 따르는데, 내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담장 옆에서 유난히 쓸쓸한 얼굴로 먼 하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은주의 모습이 무척 외로워 보였다.

자기가 한마디만 먼저 말을 걸어 주면 은주가 무척 기뻐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영란은 그러기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엊그제 거리에서 신문을 팔던 것이 주제넘게 노래가 다 뭐야?’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먼저 들었다. 그러다가 또 다음 순간에는, ‘어쨌든 네 동생이잖니?’ 하고 매일 타이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신당부가 불쑥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아무리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매라도 그처럼 갑자기 나타난 동생이 귀여울 리는 없잖아?’

그런 생각도 들었다.

바로 그때 오 선생이 가방을 들고 영란의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영란이 아니냐?”

영란은 화닥닥 뒤를 돌아보면서 아침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무척 쌀쌀한 인사였다.

“영란이가 왜 요즈음 나를 보고 그처럼 쌀쌀하게 대할까? 이상한 걸?”

그러면서 오 선생은 영란의 옆 얼굴을 기웃대며 들여다보았다.

“선생님도...... 제가 언제 쌀쌀했어요?”

영란은 외면을 했다.

“그것 보거라. 그게 다 쌀쌀하다는 증거야.”

“뭐가 말이에요?”

“나와 이야길 하면 내 얼굴을 봐야지, 외면은 왜 하지?”

오 선생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영란을 달래려고 해 보았다.

“아이, 선생님도! 아침부터 왜 절 보고 트집이세요?”

“트집은 무슨 트집?”

“트집이 아니고 뭐예요? 제가 뭐 못할 짓을 했나요?”

“영란아!”

그 때 오 선생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는 게 아니야. 영란이가 참다운 그리고 훌륭한 예술가가 되려거든 허심탄회해야 되는 거야.”

“허심탄회가 무슨 뜻이에요?”

“마음을 탁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야. 마음속에 갈고리 같은 것이 하나 걸려 있는 한, 절대로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없어. 훌륭한 예술가란 음악이나 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시나 쓰고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예술보다 먼저 인격이 앞서야 되는 거야. 다시 말하면, 사람이 먼저 돼야만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거야. 영란인, 내 말 알아듣겠니?”

그러나 영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타박타박 걷기만 했다.

“알아들었으면 오늘부터라도 음악실로 와서 은주와 함께 연습을 해라. 내일 모레가 콩쿠르 날이니까 아직 이틀이 남았어. 오늘은 점심시간에도 연습을 할 테니까, 음악실로 오너라.”

“싫어요! 얼굴이 같다는 이유로 대접받기는 싫어요!”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영란은 교실로 뛰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