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8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38. 몰래 엿들은 은주의 노래

오전 네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영란은 이 점심시간을 무척 기다렸다. 점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영란은 교실을 빠져나와 2층으로 살그머니 올라갔다. 그러고는 음악실 문 밖에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음악실 안에는 오 선생과 은주가 있었다. 오 선생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흘러나왔다. 영란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귀를 바싹 문틈에다 갖다 댔다.

“어머니를 여왼 것도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은주에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은주야, 알겠니?”

오 선생의 엄숙한 목소리였다.

“네.”

은주의 힘없는 대답도 들렸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지금 살아 계시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이 오늘 서은주의 갈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해.”

“네.”

“자식 된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 부모는 이 세상에 없더라...... 옛날 한시에 이런 말이 있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식 된 사람이 부모를 잘 모시려면 살아 계실 때 모셔야지,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리 효성이 지극해도 잘 모실 도리가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 은주에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돼.”

“네.”

“영란이와의 관계가 약간 까다롭겠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야. 영란이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후회를 하고 은주를 반겨 맞이할 거야. 영란이도 은주 못지않은 음악적 소질을 가진 아이니까. 다만 가정의 분위기가 너무 자유롭다 못해 방임해서, 도리어 탈이 된 거지. 영란이는 성악보다 피아노에 더 소질을 가진 학생이라고 나는 보는데......”

오 선생은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자아, 그럼 연습을 하자. 내일 모레니 이틀밖에 안 남았다.”

오 선생은 피아노 앞으로 가 앉으며 뚜껑을 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은주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은주, 어디가 아픈가? 얼굴빛이 별로 안 좋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뱃속이 약간......”

“뱃속이?”

오 선생은 이마에 주름살을 지으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면 시작하자!”

“네.”

은주는 참기름이 뱃속에서 자꾸만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피아노에 맞추어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누구나 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성스러운 멜로디가 맑은 샘물이 흐르듯 은주의 입으로부터 고요히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문 밖의 영란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긴장했다. 그러다가 긴장했던 영란의 얼굴이 이번에는 황홀한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부드러운 감격과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아아, 저 맑고도 거룩한 노래! 은주는 확실히 나를 이겼다!”

영란의 입 속에서 그 한마디가 조금도 서슴지 않고 흘러나왔다.

“나는 확실히 졌어! 은주에게 졌다.”

영란은 조금도 거짓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

예술가를 이기는 단 하나의 힘은 예술밖에 없다. 따라서 음악적 소질을 남달리 풍부하게 타고난 영란이를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음악밖에 없었다. 은주에 대한 그 혹심한 냉대와 무서운 영란의 질투심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은 힘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며, 또한 금력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 음악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은주의 그러한 아름다운 노래에 조금도 거짓 없이 감동할 수 있는 영란이 또한 훌륭한 음악가의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은주를 얕보고 비웃던 영란이가 아니었던가. 그 영란이가 지금 진심으로 은주의 노래에 취해 버린 것이다. 음악의 힘, 따라서 예술적 힘이야말로 온갖 미움과 질투를 초월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아닐 수 없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에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정확한 리듬과 맑은 음정의 엄숙한 멜로디 그리고 그 풍부한 성량은 도저히 영란으로선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노래였다.

질투로 인해 오 선생까지 좋지 않게 생각했던 영란의 날카로운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 마침내 왔다. 선생님의 말씀도, 부모님의 말씀도,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영란이가 마침내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은주의 아름다운노래 소리였다.

음악실 밖에서 영란은 눈물을 흘리면서 지난날의 자기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치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이 일시에 복받쳐 올라왔다.

영란은 마침내 손을 뻗쳐 꿈결처럼 손잡이를 잡아당겨 음악실 문을 열고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아, 영란이가 아니냐?”

오 선생은 피아노 앞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가운 얼굴로 영란을 맞이했다. 오 선생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의 기적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네 시간 전까지도 음악 연습을 거절했던 영란이가 아니었던가. 그 영란이가 지금 눈물을 흘리면서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언니!”

은주도 너무 기쁜 마음에 달려가서 영란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언니, 왜 울어? 누가 어쨌어?”

그러면서 은주는 영란의 손을 잡아 흔들었으나 영란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언니, 누구하고 싸웠어?”

은주의 착한 마음씨는 진심으로 영란의 울음을 걱정했다.

“은주야!”

그 순간, 영란은 갑자기 목 메인 소리로 은주의 이름을 부르며 은주의 몸을 꽉 부여안고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은주야! 내 동생 은주!”

영란은 은주를 부여안고 감격과 후회로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