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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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쌍무지개 뜨는 언덕

제2부 기악 부문이 모두 끝났을 때는 오후 세 시가 약간 넘었을 무렵이었다.

일곱 명의 심사 위원이 한데 모여서 엄격한 채점을 하고 있는 동안, 관중은 제법 흥분한 얼굴로 채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심사 위원 일동을 대표해 신채영 선생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이제부터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학교는 모두 열두 학교, 참가 인원은 성악부 열한 명, 기악부 아홉 명, 그 중 여학교가 여덟 학교, 남학교가 네 학교입니다. 이번 대회는 성악에서나 기악에서나 예년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하신 여러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 음악 예술의 꾸준한 향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채영 선생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신중한 음성으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럼 이제부터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제1부 성악에 있어서, 일등은 동신여중 제1학년 서은주 양, 이등은 명덕여중 제3학년 송경춘 양, 3등은 중앙남중 제2학년 김성식 군......”

그러나 은철이의 귀에는 더 이상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자꾸만 벅차고, 눈앞은 안개가 낀 듯이 뽀얗게 흐려졌다.

이윽고 심사 결과 발표가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일곱 명의 심사 위원이 쭉 무대 오른편에 나와 앉았고, 스무 명의 참가 학생이 왼편에 나란히 섰다. 은주의 키가 제일 작았다.

“제1부 성악부 일등, 서은주!”

키가 제일 작은 은주가 제일 먼저 불려 나갔다. 은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콩쿠르의 주최자인 태앙 신문사 사장 앞으로 걸어가 인사를 하고 일등 상장과 부상으로 금메달을 받았을 때, 박수 소리가 또 다시 터져 나왔다.

“잠시 이번 성악부에서 일등을 한 서은주 양과 피아노 반주를 한 영란 양을 위해, 동생 영민 군의 꽃다발 증정이 있겠습니다. 이영란 양, 앞으로 나오세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어느 틈에 올라와 있었는지 초등학교 2학년인 영민이가 꽃다발을 들고 왼편 참가자 출입구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아버지가 몰래 준비해 가지고 온 꽃다발이었다.

관중석에서 일단 멎었던 박수가 또다시 울렸다. 영민은 귀엽게 절을 하면서 두 개의 꽃다발을 들고 나와 누나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여기저기서 신문사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이리하여 영광의 시상식은 끝나고, 관중은 물결처럼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 사이, 확확 쏟아져 내리던 소나기가 멎고 거리는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기울어져 가는 태양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반만 드러냈다.

오 선생과 신 선생이 은주와 영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일행은 기다리고 있던 이창훈 씨 내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 선생, 축하합니다!”

오 선생과 신 선생은 무척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모두 다 오 선생님 덕택입니다!”

이창훈 씨는 기쁨에 넘쳐 악수를 했다.

“이 분은 유명한 음악 평론가 신채영 선생입니다. 은주의 소질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하신 고마우신 분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이후에도 은주와 영란이를 위해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천만의 말씀을...... 그런데 이 선생은 참으로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처럼 훌륭한 음악적 소질을 가진 따님을 둘씩이나 두셔서...... 은주의 노래도 훌륭하지만, 영란이의 반주도 참 좋았습니다. 영란이는 기악으로 성공할 충분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황송한 말씀, 뭐라고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창훈 씨는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 저는 좀 바빠서 실례하겠습니다.”

이윽고 신 선생은 그 자리를 떠났다.

“오 선생님, 은주와 영란이를 위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은 저희들과 같이 식사하시면서 은주와 영란이를 위해 축복의 말씀을 해주세요.”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만큼은 은주와 영란이의 앞날을 위해 같이 놀고 같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이리하여 모두는 자동차를 타고 소나기가 그친 밝은 거리를 혜화동 영란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은철 오빠!”

그것은 은주의 목소리가 아니고 꽃다발을 안은 영란의 목소리였다.

“아, 영란아!”

은철이는 얼굴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나의 오빠가 되어 줘. 나를 은주와 똑같은 동생이라고 생각해 줘, 응?”

“영란아, 고맙다! 이제부터 나를 오빠라고 불러다오!”

은철이는 조금도 거짓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 기뻐라!”

그때, 은주는 꽃다발을 안은 두 손으로 은철의 가슴을 꽉 부여안으며 꿈결처럼 외쳤다.

“은주야, 기쁘냐? 내가 더 기쁘다!”

은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은철 오빠, 이 꽃다발, 오빠 줄게!”

그 때, 영란이는 안고 있던 꽃다발을 은철의 무릎 위에 가만히 얹어 놓았다.

“오빠, 이 꽃다발도 받아!”

이번에는 은주가 또 꽃다발을 은철이에게 주었다.

“고맙다! 그러면 이 꽃다발은 내가 다 받을게. 아! 영란이의 꽃다발! 은주의 꽃다발!”

그 때 영민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야, 저기 쌍무지개가 떴다! 쌍무지개가!”

그 말에 일행은 다 같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동차가 원남동을 거쳐 창경궁을 지날 무렵이었다.

“아이, 어쩌면! 돈암동 언덕 위에 쌍무지개가 떴네요!”

영란이가 먼저 외쳤다.

“와, 참 예쁜 쌍무지개다!”

오 선생이 감동한 듯이 말했다. 은철이도 민구도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이창훈 씨 내외도 창밖의 쌍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은주의 집이 서 있는 그 언덕 위에 일곱 가지 색이 아롱진 두 줄기 쌍무지개가 동화책 속의 그림처럼 찬란하게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오오, 하늘에도 쌍무지개! 땅 위에도 쌍무지개! 오늘이야말로 축복받은 영광의 날이다!”

오 선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