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월하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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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일환아!

아버지는 위에 두 신라(新羅) 소년 부장의 충성된 죽음의 이야기를 하였거니와, 여기 또 한 개의 절사(節死)를 이야기하겠다. 즉 신라의 두 소년 부장의 죽음의 의의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의 신라와 백제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른 한 개의 죽음을 말하겠다. 당시에 백제라는 나라는 매우 강한 나라로서 자기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연해연방 신라를 침노하는 신라 땅을 얼마씩 떼어 삼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신라의 영토는 나날이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위에 이야기한 두 소년 부장의 충성된 죽음의 사건이 있기 조금 전의 일이다. 백제는 또 갑자기 신라를 침노하여 성(城) 수십 개를 빼앗았다. 그리고 대야성(大耶城)이라는 큰 성을 공략하고자 이 성을 둘러쌌다. 백제의 윤충(允忠)이라는 명장(名將)이 공격군의 총 지휘관이었다.

대야성은 신라에서도 크고 튼튼하기로 이름 높은 성이다. 윤충 장군은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막하의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한참을 토의하였다.

대야성 공격에 관한 모책을 끝낸 뒤에 막하 장수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도원수 윤충이 자리에 든 것은 밤이 꽤 깊어서였다. 백제 의자왕(義慈王) 십일년 팔월─ 거의 만월에 가까운 달은 공격군 도원수 윤충의 전에 고요히 내비치고 있었다.

자리에 들기는 들었지만 머리가 쇠락하여 얼른 졸음이 오지 않았다.

대야성은 소문 높은 웅성(雄城)이라 하나, 군사의 힘을 다하여 공격하면 함락할 것이 그만한 자신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군사는 꺾지 않고 성을 뺏을 재간이 없을까?

나라의 일이라 하는 것은 적잖은 것이다. 한 군사 개개의 생명까지를 고려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흙과 같이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 이 대야성을 뽑을 재간이 없을까?

「부시석!」

어디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겼던 윤충은 처음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시석 소리가 날 때는 알았다.

「?」

머리를 베개에서 들고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바야흐로 머리를 다시 베개에 놓으려 할 때에, 또 부시석하는 소리가 들렸다. 뿐더러, 그 뒤를 연하여 덜컥하는 소리도 들렸다.

여기 의아증이 생겨서 장군이 벌떡 몸을 일으킬 때에, 밖에서는 소란한 소리가 생겼다. 후닥닥, 툭탁, 지끈─ 몇 사람의 달리는 소리, 때리는 소리, 매맞는 소리, 그와 함께 횃불이 어른하는 그림자까지 보였다.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겨우 옷을 정제한 때에, 진 밖에 사람의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장군께 아뢰옵니다.」

모선 부장의 음성이었다.

「무에냐?」

「신라인(新羅人)인 듯한 사람 하나가, 장군 진 밖에 배회하는 것을 붙들었읍니다.」

이윽고 병졸 두 명이 횃불을 잡고 들어 오고, 그 뒤로 결박진 신라 백성 하나가 부장에게 끌리어 들어온다.

발길에 채여서 쓰러지는 신라 백성을 보니 서른 살쯤 되었을까 한 젊은이였다.

「불을 밝혀라!」

「네이!」

장군은 굽어 보았다. 백제군 통솔자인 자기 진 밖에 배회하더라는 괴상한 인물이라, 호걸풍이리라 하였던 예기에 반하여, 평범하고 소심하고 가득한 얼굴의 주인이었다.

「신라인이지?

「네이!」

「무얼 하러 여기에 배회했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그의 대답─

「장군님께 내통할 말씀이 있사와 왔읍니다.」

「내게? 이 윤충 장군에게?」

「네이!」

「무엇이냐? 어디 말해 봐라.」

「소인은 검일(黔日)이라는 백성으로서, 이 대야주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의 막하에 있는 사람이온데......」

「무엇?」

윤충은 그냥 계속하려는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네가 검일이냐?」

「네이, 소인이……」

「내 말에 대답만 간단히 해라. 네가 분명히 검일이냐?」

「그러하옵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네이!」

「내통이지?」

「네이!」

「그럼……」

장군은 백제의 장졸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자거라.」

이 수상한 신라 백성과 자기네 장군과 단 두 사람을 마주 남겨 둠에 대하여 불안증을 품은 장졸들을 윤충 장군은 돌려보냈다. 그리고 검일이라는 신라 백성과 단둘이서 마주 앉았다.


2[편집]

장군은 검일을 어떻게 만날 수가 없는가고, 일찍부터 벼르던 것이었다.

이 대야성을 정벌할 준비서, 일찌기 대야성에 잠입시켰던 밀정에게서, 장군은 대야성 안의 불평을 들었다. 대야성 도독 품석은 신라 왕족이며, 도독인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불의한 일을 많이 하는 중에, 자기 막하에 있는 검일이라는 사람의 아내의 자색을 탐내어 권력으로써 검일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래서 검일은 자기의 상관이자 또한 원수인 품석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나머지, 지금에 이르러는 그 원수를 갚을 수가 있다면, 제 나라도 배반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되었다.

이런 소문을 일찍부터 들은 일이 있는 윤충 장군은 이 검일을 어떻게 만날 수가 없을까고 혼자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

승부도 승부려니와, 검일을 향도자 삼아서 대야성의 허를 친다 하면, 혹은 한 군사도 꺾지 않고 목적을 달할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최후의 승리는 어차피 자기네 것이지만 할 수 있으면 곱게 대야성을 빼앗을 방책을 강구하고 싶던 중에 마침 검일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날 밤 달이 서천으로 넘기까지, 윤충 장군과 검일이 마주 앉아서 토의한 결과 그 방략은 섰다.

첫째로 지금 대야성 내에는 양식이 부족하다. 양식을 거두려 파견된 관원들이 금명간 모두 돌아올 터인데, 그 길을 지켜서 성내에 양식이 못 들어가게만 하면 저절로 함락될 것, 둘째로 성내에는 우물이 몇십 군데 있어서 이 우물이 유일의 음료수인데, 검일이 성을 빠져나오는 길에 우물에는 모두 독을 넣었다. 그러니까 성내에는 명일부터 음료수가 없는데, 이런 때에 성의 각 문과 성 밖의 개천만 단단히 군사로 지키면 목마르기 때문에 성은 저절로 함락될 것이다.

이 두 가지만 든든히 지키면 한 군사도 꺾지 않고 대야성을 뽑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

의논이 끝난 뒤에, 장군은 득의 양양하여 하는 검일을 굽어보면서 입을 열었다.

「방략은 이렇게 세웠지만, 네게 대한 보수는?」

「네이, 그 보수로서는, 무재하오나 대야주 도독을 제수합시도록 해 주시면 그 이상 없겠사옵니다.」

「대야주 도독이라?」

굽어보는 동안, 윤충 장군의 눈에는 차차 미소가 나타났다.

「야, 이 백성아 듣거라! 네가 일찌기 네 계집을 빼앗긴 원한으로 오늘날 네 나라를 팔았어. 네게는 혹은 큰 원한일지 모르지만, 너와 김품석 사이의 사사 원한으로 오늘날 나라를 남의 손으로 넘겨 주어? 사람의 일생에는 언제 어떤 일로 서로 원한을 팔고 사게 될지 예측도 할 수 없는 일, 오늘 네 공로로서 너를 대야주 도독을 삼으면, 장차 너는 다른 원한으로 어느 날 백제를 고구려에 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형세 불리해 가는 자기 입장에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여는 것을 윤충 장군은 그냥 내리 씌웠다.

「백제 장군 윤충은 공로를 몰라보는 사람은 아니다. 네 공로를 상 주는 뜻으로, 너를 백제 재상의 예에 의지해서 후히 장례를 치러 주마.」

악연하여 눈을 든 검일은, 윤충 장군의 추상같은 표정에 몸서리치면서 벌떡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일어서지 못하였다. 윤충 장군의 오른손 가까이 놓여 있는 손창(手槍)은 바야흐로 일어서려는 검일의 가슴에 가서 박혔다.


3[편집]

밝은 날 아침, 언약에 의지하여 군졸들의 경례 아래서 검일의 주검을 후히 땅에 묻은 뒤에 백제 군사는 대야성 포위의 새 전술을 폈다.

식량과 음료수를 성내에 들일 길을 막기 위하여 물샐틈없이 대야성을 포위하였다. 그런 뒤에는 싸움을 돋우지도 않고 그 진 태세대로 그냥 지구전의 채비를 대어버렸다.

양식 떨어지고 물 없는 대야성이라, 불일 항복할 것은 정한 일이다. 수삼 일만 이대로 지내노라면, 한 군사도 꺾지 않고 대야성을 넉넉히 얻을 것이다.

그 사이 김품석의 난정 때문에 군비가 아주 없는 대야성 안에서는 이 백제 원정군에게 대할 만한 장수도 병졸도 없었다. 그 낭패하여 돌아가는 모양은 성 밖에 포위한 백제 진에서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성 위에는 한 군사도 얼씬하지 않았다.

겁먹은 성민들이 몰래 엿보고는, 도로 도망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사흘간을 백제군은 대야성을 포위만 한 채 낮잠으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대야성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는 대야주 도독의 사자 한 명이 백제 진중으로 말을 달려왔다.

도독 김품석이 사자를 시켜서 백제 진에 통한 뜻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사자 서천(西川)이 윤충 장군에게 드린 말이란 것은,

「도독 이하 성민의 생명만 해하지 않으면 성을 들어서 항복하겠읍니다.」

하는 것이었다. 거기 대해서 윤충은,

「우리의 목적은 성을 얻는 데 있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지 않으니까, 성만 손에 들어오면 필요없는 살육은 안 하겠다.」

이렇게 대답하여 도로 돌려보냈다.

그 이튿날 어제 열렸던 성문은 다시 열렸다. 그리고 그 성문으로 많은 수레가 나와서 백제 진중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이 함락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수레가 성문 밖으로 나오기가 바쁘게 성문은 다시 닫히고, 성 위에는 높다랗게 신라 깃발이 올라서 바람에 펄럭인다.

진 고좌에 앉아서 이것을 바라보다가 윤충 장군은 의아하여 눈살을 찌푸렸다. 성문으로 나온 수레는 응당 품석 일행의 것일 게다. 도독이 우리 진으로 오는 이상 대야성은 당연히 항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문이 도로 닫히고 새로이 신라 깃발이 나부끼는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4[편집]

「신라국 대야주 도독 김품석은 대 백제국 윤충 대장군께 아뢰옵니다.」

김품석 이하가 장군 진에 이르러서, 뜰 아래 국궁하고 서서 이렇게 아뢸 때, 장군은 힐난하는 눈찌로 굽어보았다.

「인부(印符)는?」

「인부는 빼앗겼읍니다.」

「빼앗기단?」 5 「사지(舍地─|벼슬 이름)로 있는 죽죽(竹竹)이라는 어리석은 자가 반란을 일으켜서, 지금 대야성은 역적의 손 아래 들어갔읍니다.」

「그럼 항복이 아니오?」

「소관들은 항복하옵니다마는, 성은 죽죽의 위협에 못 이기어 어리석게도 천군께 대항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아까 그대는 자칭 대야성 도독이라 하는 모양인데, 인부 없는 도독이 어디 있겠소? 풍문에 듣건대, 도대체 그대는 도독으로 있어서도 임무에 충실치 못했어? 그대가 만약 도독의 임무에 충실하려면, 성을 베개 삼아 우리 화살에 목숨을 바치든가, 그렇지 않으면 성을 들어 항복해서 성내 백성의 곤란이라도 면하게 하든가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제 목숨만 살고 보려고 혼자 피해 나온 심사가 가증해. 백제 장군 윤중의 칼은 가증한 사람을 보면 저절로 날뛰니, 아마 그대로 보전하지 못할까 보오.」

이리하여 애걸하며 울며 부르짖는 김품석 이하 고관들은, 모두 백제 군사의 제물이 되었다.


5[편집]

성내에는 우물을 새로 파서 음료수의 곤액에서도 이젠 면하였다 한다. 성민들은 모두 일심 단결해서 자기네가 굶으면서도 죽죽과 그 휘하로 들어간 군졸들의 식량을 공제할 결심이라 한다.

말하자면 결사의 군졸과 결사의 성민들이었다. 이제는 쉽사리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뿐더러, 그날 권항사(勸降使)로서 부장(副將) 모선을 성내로 죽죽에게 보내 보았는데 죽죽은 거기 대한 대답으로서, 모선의 목을 잘라서 그것을 높이 성루(城樓)에 걸어서 백제 장졸에게 보였다.

여기서 윤충 장군도 마지막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병졸이라도 꺾이기가 싫어서 평화리에 항복을 받아 보려 하였지만, 죽죽의 기개를 보면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을 동안은 항복을 하지 않을 모양이다.

「내일은 총공격이다!」

백제 진중에는 드디어 공격령이 내렸다.


6[편집]

팔월 열엿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둥그런 밝은 달이 솟아올랐다. 그 사이 오래를 두고 공격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클클해하던 백제 군졸들은, 명일이 총공격이라는 바람에 떠들썩하였다. 명일의 공격을 위로하고, 겸하여 명일의 승리를 미리 축하하는 뜻으로 주육을 진중에 내려서, 이 밝은 달 아래서 백제 군졸들 사이에는 커다란 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가 한창 무르익은 때에 윤충 장군은 홀로 진을 빠져나왔다.

그사이 오래 감추어 두었던 투심을 명일은 펼 날이라고 야단하여 기뻐하는 자기네 진을 벗어나서, 윤충 장군은 홀로 이 달밝은 밤의 벌판을 대야성을 향해서 한 걸음 두 걸음 더듬었다.

저 맞은편에 푸르른 달 아래 고요히 누워 있는 대야성─ 지금 달 아래 평화로운 듯이 누워 있는 저 성 안에 대체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 내일은 총공격을 한다고 통고를 하였는지라, 그들도 각오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을 도망하고 싶은 자는 도망하라고 동문의 포위는 풀어 두었으나 얼마나 도망들을 하려는가?

우러러보매 가을 기러기가 하늘을 난다. 그 울음소리가 성내에도 들릴 테지! 큰 고난 아래 서 있는 성내 백성들에게는 그 소리가 얼마나 처량히 들리랴!

차차 차차 더듬는 동안, 어느덧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벌써 자기네 집에서는 꽤 거리가 먼지라, 군졸들의 환호성도 간간 바람결에 들려올 뿐이다. 돌아보면 멀리 자기네 진에서는 횃불들만 어지러이 펄럭일 뿐이다.

어디선가 이상한 음률이 들렸다.

「?」

장군은 귀를 기울렸다. 저(笛)를 부는 소리였다. 어느 얼빠진 자가 저를 불고 있나? 이 폭풍을 감춘 불길한 밤에 불길함도 모르고 저를 불고 있는 얼빠진 자가 어디 있나?

눈을 들어 보니 어느덧 그는 서문 가까이까지 이른 것이었다. 저의 소리는 서문 누각에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달 아래 부는 저─ 명일 이를 소란을 모르는 듯이 부는 저─ 더구나 백제진을 정면으로 향한 서문 누각에서|

장군의 발은 호기심에 끌려서 차차 서문 아래로 갔다. 아래 가서 우러러보니, 달빛 아래서 분명히는 안 보이나 신라기(新羅旗)와 함께 나부끼는 것은 분명한 죽죽의 깃발인 모양이고, 그 아래는 청년 장수 하나가 앉아서 저를 불고 있다.

그 저에서 울려나는 명랑한 음조에 윤충 장군의 가슴이 떨렸다. 밝는 날 이 성에 내릴 폭풍을 그인들 모를 까닭이 없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달밝은 한밤을 저를 불어 새우는 그 심경─

저에서 울려 나는 그 명랑한 음조는, 마음에 근심 있는 사람의 낼 바가 아니다. 저의 음조는 부는 사람의 호흡의 반영이라 가슴에 근심 있는 사람이 부는 소리는 탁음이 다분히 섞인다.

그런데 이 저에서 나는 소리는 물과 같이 맑고 물과 같이 거침이 없다.

누구일까? 보아하니 젊은 장수, 그가 과연 죽죽일까?

아까 김품석에게 죽죽의 일을 들을 때는 죽죽은 만용밖에는 없는 어리석는 무부로 알았다. 그러나 지금 저를 부는 장수가 죽죽이라 할진대, 그는 의기와 담력의 주인이라 안 할 수가 없다.

달 아래 들려오는 명랑한 저 소리에, 장군은 망연히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썩고 썩은 대야성 안에도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통절히 마음에 서리어진다. 진으로 돌아와서 대야성 망명민에게 물은 결과, 그 사람이 죽죽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튿날 공격군에게 내린 명령에는 기이한 주문이 몇 가지 섞이어 있었다.

─ 저항 안 하는 백성은 건드리지 말 것.

─ 적병(敵兵)이라도 할 수 있는껏 생금(生擒)을 목표로 할 것.

─ 우리 군사를 몇십 명 희생을 할지라도 적장 죽죽만은 반드시 생금할 것─ 이런 주문이었다.

이런 주문 아래서 투지만만한 백제 장졸들은 동서남북 문으로 물밀듯 대야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날 석양녘에는 각문 누각 위에 백제의 깃발이 하늬바람에 위세 좋게 휘날렸다.


8[편집]

대야성 함락의 첩보를 듣고, 윤충 장군은 막료들을 데리고 말을 달려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참 서문을 맡았던 장수가 달려오면서 보고하였다.

「신라 병졸 한 명도 생금을 못해 왔읍니다.」

「응? 왜?」

여기 대답하는 뜻으로, 그는 그 근처에 넘어져 있는 신라군의 시체를 손가락질하였다.

그 근처에도 넘어져 있는 몇 개의 신라군 시체─ 보매 그 모두가 사람의 고기덩이들이었다. 팔죽지에서 떨어져 내려진 팔들도 그냥 단단히 칼을 잡고 있으며, 한 몸에 살과 창과 칼을 맞고도 그냥 싸운 듯한 시체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의 목숨이 그냥 붙어 있는 동안은 적극적 반항을 계속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잠시 둘러본 장군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죽죽도 죽었겠구나?」

「네이, 장수가 누군지 군졸이 누군지 그것을 구별하려다가는, 우리 군사가 도리어 전멸당할 뻔하였읍니다. 상한 맹호와 같이 달려드는데, 그것을 가릴 수도 없고 신라 장졸은 한 사람 남기지 않고 모두 전몰했으니까, 아마 죽죽도 죽었을 줄 아옵니다.」

「그런가?」

가볍게 머리를 끄떡이었다. 그러나 입에서는 기다란 한숨이 나왔다.

윤충 장군은 적장 죽죽의 시체를 찾으라는 영을 백제군에게 내렸다.

죽죽의 시체는 어떤 한길에서 발견되었다. 그 참담한 시체에 백제 장졸은 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팔은 어디서 언제 잘렸는지, 그의 팔죽지에도 안 달리고 그 근처에도 안보였다. 칼은 아직 남은 왼손으로 잡고 그냥 단단히 잡은 채 죽음을 하였는데, 그 칼도 부러지고 그 위에 톱과 같이 이가 생겼다. 자빠져 누워서 죽었는데도 그의 갈라진 배에 비죽이 나온 밸에는 흙이 묻은 것으로 보아서, 밸을 밖으로 흘리고서도 그냥 넘어지며 엎어지며 싸움을 계속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의 치명상은 두개골 파쇄였다. 그것도 여러 사람의 칼을 일시에 받은 모양으로 여러 갈래로 칼 자리가 나서 부서졌다.

이 용감한 청년 장수의 죽음을 굽어볼 동안, 윤충 장군 이하 백제 장졸의 눈에서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금 악물고 있는 저 창백한 입술이 어젯밤 달 아래서 그렇듯 명랑히 저를 불었던가! 어제의 그 명랑하던 음률이 공중에 헤어져서 자취도 없어짐과 같이, 그때 그렇게 명랑히 달을 노래하던 그의 생명도 하늘에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하염없이 늙은 눈 좌우로 흐르는 눈물을 씻을 줄도 모르고 윤충 장군은 묵묵히 서 있었다.


9[편집]

백제 장졸 전체의 조상 아래, 신라 대야성을 죽음으로 지킨 용감한 장졸들의 주검은, 그로부터 사흘 뒤에 가장 엄숙히 가장 경건하게 한 구덩이 속에 들어갔다.

일환아!

자, 첫 번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 이야기에서 너는 어떤 감상을 느꼈느냐?

일환아!

두 소년 부장과 죽죽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의 이야기를 읽고, 너는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하였느냐?

혹은 거기서 용감스러운 행동에 공명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께 충성된 그 충성에 감격하였는지도 모른다. 태산이라도 움직일 만한 애국심에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든 좋다. 어느 것이든 그 이야기를 읽기 때문에 너의 마음에 얼마간 감동이라 하는 것이 생겼으면,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의 첫걸음을 밟은 것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차차 너에게 베풀 정서 교육의 그 첫걸음은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 정서 교육과 아울러서 여기 너에게 베풀 다른 교육이 있다. 그것은 품성의 정도(正導)라 하는 것이다.

정서가 성격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품성은 인격을 구성하는 것이다.

성격이 아름답고도 인격이 부족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모욕과 멸시는 늘 그의 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또한 인격이 완전하고 성격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 역시 절름발이가 될 것이다. 그는 마치 도금한 구리와 같을지니, 임시로는 성공한다 할지라도 언제든 도금이 벗어지고 낙오자의 지위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다.

성격이나 인격이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될지니, 아버지는 지금 너에게 여러 가지 재미스런 이야기로써 너의 성격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방, 또한 너의 인격을 구성할 품성 교육에도 게으를 수가 없다.

일환아!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록한 소년 장수들의 이야기에서 너의 품성을 장식할 어떤 점을 너는 발견하였느냐?

용기? 충성? 애국? 활발? 네가 그 이야기를 머리 속에서 다시 회상할 때에, 네게는 여러 가지의 대답이 생겨날 테지. 그리고 그것이 또한 모두 너의 인격을 구성하는 데 귀한 재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첫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너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사람의 의기(義氣)라는 것이다.

「죽음은 티끌같이 가볍고, 의는 태산같이 무겁다.」

이런 속담이 있다.

「의기는 돌이라도 뚫는다.」

이런 속담도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쳐나간 몇 사람의 소년이 있었기에 아직껏 백제에게 수모를 받고 있던 신라의 군사가 다시 용기를 얻지 않았느냐? 신라의 군사가 다시 용기를 얻었기에 아직껏 끊임없이 침노만 받고 있던 신라가, 스스로 나아가서 백제의 서울까지 침범하지 않았느냐? 이런 일이 있었기에 신라는 마침내 백제를 정복하여 자기 나라의 영토로 삼지 않았느냐? 그러면 이 몇 소년의 죽음은 얼마나 신라에게는 귀한 죽음이냐? 약한 신라로 하여금 장차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하여 대신라로 만들게 한 그 싹이 두 소년의 죽음에서 나지 않았느냐?

너는 의에 두터운 사람이 되어라! 의를 볼 때에는 너의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라! 용기, 애국, 충성, 우애─ 이 세상의 귀한 감정의 그 전부가 근원을 캐면 〈의〉 한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환아!

거듭 말하노니 너는 의에 두터운 사람이 되어라! 아무런 일에 있어서는 의가 마지막의 승리를 얻는 것이니! 신라에 의가 많은 몇 소년이 없었던들, 어찌 그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가 있었겠느냐?

일환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일환아! 너는 결코 의가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용맹? 용맹도 좋겠지! 그러나 의가 없는 용맹은 만용에 지나지 못한다. 열정? 그러나 의가 없는 열정은 사사로운 치정에 지나지 못한다. 믿음? 그러나 의기가 없는 믿음이 무엇에 쓸 데가 있으랴! 우리 인류의 생활에서 의기를 뽑으면 거기는 살풍경한 세상밖에는 남을 것이 없을 터이다.

의에 두터운 때문에 제갈공명은 아직도 그 이름을 남기었지, 그에게 의만 없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지금쯤 사라져 없어졌을 것이다. 의기가 없는 뒤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 어디서 나랴? 의기가 없는 뒤에는 형제의 화목이 어디서 나랴? 의기가 없는 뒤에는 동족애가 어디서 나랴? 의기가 없는 뒤에는 사람의 모든 아름다운 감정─ 사랑, 친애 존경, 애무, 화목, 의협심, 이런 것들이 어디서 나랴?

의! 의! 의는 사람이 공동생활을 경영하는 데 가장 귀하고 한 돌쩌귀가 되는 것이니, 너의 일평생을 두고 〈의〉라 하는 한 가지의 감정만은 잠시라도 너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너의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어서, 어떤 일을 당하는 〈의〉로써 임하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이 글을 씀에 임하여, 제일 첫 번에 의기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쓴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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