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제상
1
[편집]일환아! 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버린 토오마스의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을 기회삼아 이번에는 또한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버린 충성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우리 조선 역사 위에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아 있는 박제상의 충성을 네게 보여 주마.
신라 내물왕(奈勿王)이 즉위하신 지 삼십육 년째 되는 해다.
그 해에 왜국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 사신이 아뢰는 말이,
「신라와 왜국이 서로 친하기 위하여 왕자 한 분을 왜국으로 보내 줍시사.」
하는 것이었다.
왕은 별다른 생각 없이 당신의 세째 아드님 되시는 미해(美海)라는 열 살 된 이를 왜국으로 보내셨다.
왕은 무론 왕자를 왜국으로 보낸다 할지라도 곧 돌아오게 될 줄만 믿고 계셨다. 그러나 왜국서는 신라 왕자를 그냥 볼모로 잡아 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내물왕은 사랑하는 세째 아드님을 왜국으로 보낸 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위를 그 아드님 되시는 눌지왕(訥祗王)께 전하셨다.
새 왕이 등극하신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서 또 자신이 신라에 이르렀다.
「대왕의 아우님 되시는 보해(寶海)공은 문무에 다 훌륭한 분이라는 소문은 고구려까지 미쳤읍니다. 그분과 가까이 지낼 수가 있으면, 고구려의 행복은 이 위에 없겠읍니다.」
고구려 사신은 왕께 이렇게 아뢰었다.
당신의 아버님께 지지 않도록 마음 착하신 왕은 고구려 사신의 말을 좇아서 당신의 아우님을 또한 고구려로 보내셨다. 그랬는데, 웬일인지 고구려에서도 또한 왕제를 볼모로 잡은 뿐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또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 아우님은 왜국으로, 또 한 아우님은 고구려로 두 아우님을 다 잃어버린 왕은 적적하기 짝이 없었다. 고구려 쪽으로 왜국 쪽으로 매일 힘 없이 바라보시고는 돌아올 길이 없는 두 아우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한숨을 쉬곤 하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는 그 두 분 가운데 하다못해 한 분뿐이라도 돌아오게 할 방책이 없는가고, 늘 수심으로 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그 수심을 삭이기 위하여 왕은 흔히 연희를 여시었다. 잡술 줄 모르는 술을 늘 잡수셨다.
이리하여 잃어버린 아우님에 대한 근심을 잊으시기 위하여 술로써 생애를 모호히 하시던 왕은, 어떤 날 (그것은 보해를 잃으신 십년 째 되는 해) 역시 뭇 신하들을 궁중에 모으시고 또한 술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반감쯤 되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연회는 술 기운에 차차 흥이 나기 시작하였다.
2
[편집]그러나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왕은, 종내 견디지 못하여 술잔을 놓으셨다. 그때 왕의 뺨으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아우님은 사십 년 전에 왜국으로, 또 한 아우님은 십 년 전에 고구려로─ 이리하여 먼저 잃은 아우님은 그 모습조차 분명히 기억이 없지만, 없으면 없을수록 왕의 마음에는 아우님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더구나 부왕이 세상 떠나실 때에도 왕자의 일이 마음에 걸리어서 몇 번을 당부하고 당부하고 하던 생각을 하시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한 줄기로 시작된 눈물은 뒤를 이어서 뺨으로 흘러내렸다.
차차 흥이 돌아가던 연회였다. 왕의 흐르는 눈물을 보는 신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왕의 가장 가까이 앉았던 어떤 신하가 용안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왕의 이즈음의 근심을 잘 아는 그 신하는 곁에 앉은 사람을 꾹 찔렀다. 좀 조용하라는 뜻이었다. 곁 사람은 그 뜻을 알아보고, 또 자기의 곁 사람을 찔렀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연회는 조용하여졌다.
조용하게 된 연회에서 때때로 아우님을 생각하시는 왕의 탄식만 들렸다.
왕이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귀, 영화─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지만, 두 아우의 생각을 하면 차마 이 영화를 혼자서 누리지 못하겠소. 누구 짐을 위해서 두 아우를 그 나라에서 데려올 사람은 없소?」
그러나 좌중은 대답이 없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버릴 예산으로, 적국에 들어가서 왕제를 구해 내어 올 만한 용기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왕은 한참을 좌중을 돌아보시다가 또 다시 탄식을 하시었다. 이 많고 많은 신하 중에 왕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버리려는 충성된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녹봉을 주면 기뻐서 받고 술을 먹이면 즐거이 춤추는 이 좌중이로되, 왕제를 구하여 올 만한 충성된 신하는 하나도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매 왕의 마음은 더욱 불쾌하시었다.
눈물 어리운 눈으로 한참 좌중을 둘러보시던 왕은 불쾌하심을 참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시었다. 그리고 내전으로 들어가시려 하였다.
그때에 문득 왕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박제상(朴堤上)이었다. 어떤 곳에 태수로 보내어 둔 박제상의 지극히도 충성되고 지극히도 의롭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몸을 돌이키시려던 왕은 도로 좌중을 향하여 돌아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시종 한 사람을 부르셨다.
가까이 온 시종을 향하여,
「얼른 가서 박제상을 불러 오너라.」
이렇게 명하시고, 다시 불쾌하신 듯이 좌중을 둘러보시고 내전으로 들어가셨다. 이리 하여 신라 역사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충성을 남긴 제상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일환아!
아버지는 너에게 이제 그 이야기를 하여 주마.
3
[편집]왕명에 의지하여 제상은 말을 달려서 대궐로 왔다. 그리고 왕의 앞에 꿇어앉았다.
너무 급히 달려왔기 때문에 아직 숨소리조차 씨근거리는 제상을 향하여, 왕은 마음의 수심을 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귀한 책임을 제상에게 부탁하노란 말씀을 하셨다.
왕의 앞에 꿇어앉아서 그 말씀을 다 들은 제상은 조금 머리를 들었다.
「소신이 듣자옵건대, 상감의 근심은 신하의 큰 치욕이요, 상감께서 욕을 보시면 하는 죽어야 마땅하다 하옵니다.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을 가려서 행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요, 죽을 길인지 살 길인지 생각하고 가는 것은 용기가 없는 일이옵니다. 소신 비록 미련하오나, 상감의 하명에 좇아서 죽기를 한하고 이 일을 하여 보겠읍니다.」
이렇게 말할 때는, 제상의 눈에는 광채가 있었다. 왕도 감격하셨다.
다른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할 때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왜? 이 일은 목숨을 내어놓지 않고는 행하기 힘든 일이므로,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런데 여기 이 제상만은 결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첫마디로 승낙을 하는 것이었다.
왕은 손수 술을 부어서 당신이 절반을 잡수신 뒤에 나머지를 제상에게 주셨다. 그리고 제장이 그 술을 마시기를 기다리어 제상의 손을 끌어당기어서 힘있게 잡으셨다.
「경만 믿으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왕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제상은 궁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몸을 곧 장사아치로 차리어 가지고 보해공을 모시어 오려 고구려로 향하였다.
육로와 수로를 거듭하여 고구려의 서울까지 이른 제상은, 그렇지 않은 듯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해공이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밤이 들어서 사람이며 초목까지라도 모두 깊은 잠에 빠졌을 때쯤 제상은 보해공이 있는 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보해공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방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제상은 좀 물러서서 달빛 아래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십 년 전에 뵙고는 아직 못 그이지만, 달빛 아래 나타난 그의 얼굴에는 옛날의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틀림없는 보해공이었다.
제상은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공의 앞에 꿇어앉았다. 양 손으로는 보해공의 옷깃을 잡았다. 그 옷깃에 얼굴을 묻을 때는 제상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한없이 솟았다.
「제─ 제상이올시다. 제상이올시다.」
혹은 벌써 타계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심도 있던 이를, 여기서 다시 뵈올 때에 제상은 다른 말을 하지를 못하였다. 같은 말을 연하여 하면서 굳게 잡은 보해공의 옷깃에 자기의 얼굴을 문지를 따름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섰던 보해공도 마침내 제상을 알아보았다.
4
[편집]벌써 십 수 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산 설고 물 선 곳에서 만날 고국의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보해공은, 여기서 뜻밖에 형왕의 신하 제상을 만나니 기쁘기가 한이 없었다.
주종의 사이에는 비밀한 약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남의 눈을 기이며, 보해공에게 작별한 제상은, 나와서 배를 한 척 준비하여 어떤 곳에 숨겨 둔 뒤에, 어떤 날 밤 다시 보해공에게로 숨어 들어가서 달아날 날짜까지 약조하였다.
약조한 밤, 주종은 몰래 그 집을 빠져나와서, 미리 준비한 말에 몸을 싣고 고구려의 서울을 뒤로 하고 해안을 향하여 채찍질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 달아나지 못해서, 저 뒤에서 들리는 수십 기의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정녕코 고구려의 관리들이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주종은 말을 채었다. 말은 비호같이 달리었다. 그러나 말타기와 활쏘기로 유명한 고구려 관리들의 말발굽소리는 차차 가까와 왔다.
「휙!」
살소리가 났다. 살은 제상의 귀 곁을 지나서 저 앞에 가 내려졌다.
「휙!」
살소리가 또 났다.
「휙!」
「앗!」
살이 제상의 등에 맞았다. 그러나 이상타! 살은 비록 맞았을지라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휙!」
살이 하나 말 안장에 박혔다. 말에 능한 제상이 그 살을 뽑아 보니 살에는 촉이 없었다. 고구려의 군사들은 촉이 없는 살을 쏘는 것이었다. 아까 등에 맞고도 제상이 죽지 않은 것도, 그 살에 촉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보해공이 고구려 서울에 있는 동안, 그곳 군인과 관리들에게 흔히 하여 주었으므로, 그 관리들은 비록 나라의 명으로 보해를 쫓아오기는 하되, 촉이 없는 살을 쏘아서 슬며시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주종은 몇 대의 살을 맞기는 하였지만, 아무 곳도 상하지 않고 해안까지 피하여 왔다. 거기는 제상이 준비해 둔 배가 있는 것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배에 몸을 싣고, 순풍에 돛을 달고 이 원수의 나라 고구려의 해안을 떠날 때는 주종은 서로 마주 붙잡고 소리를 놓아서 울었다.
고국으로 고국으로, 그들이 탄 배는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흘러서 신라까지 돌아왔다.
십년 만에 만나는 형제가 서로 너무도 기뻐서 울던 광경을 나는 여기 쓰려 하지 아니한다. 용감스러이 고구려로 달려갈 만한 충성은 없었으되, 돌아온 보해공을 보고는 반가움에 날뛰는 뭇 신하의 모양도 쓰려 하지 아니한다. 생각하여도 그것은 짐작이 갈 일이므로─
이리하여 고국과 형왕을 떠난 지 십년 만에 보해공은 다시 사랑하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5
[편집]형 되시는 왕은, 제상의 덕으로 한 아우님을 만나셨다. 그러나 한 아우님을 보시매, 또 다른 아우님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셨다. 더구나 그 아우님은 지금부터 사십 년 전, 아직 열 살이라는 철없는 나이에 고국을 떠난 것이었다. 그 아우님은 언제까지 통하지 못하는 멀고 먼 곳에 가신 것이었다. 이래 사십 년, 때때로 들리는 풍문에 몸 튼튼이 지낸다는 소식은 있지만,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짐작도 못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지내나? 어떻게 변했나? 아아! 고국과 친척의 생각이 얼마나 나랴? 어린 때에 작별한 그 아우님 때문에 지금 다른 아우님과의 상봉을 즐기시던 왕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괴었다.
왕은 제상을 돌아보셨다.
「제상!」
「네?」
「사람에게는 눈이 둘이 있지?」
「네.」
「팔도 둘이 있지?」
「네.」
왕은 눈을 고즈너기 감으셨다.
「한 눈, 한 팔만 가졌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리고는 기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제상은 왕을 쳐다보았다. 쳐다볼 동안 왕에게 나타나 있는 비통한 안색으로, 제상은 왕의 마음을 짐작하였다. 잠시 왕을 쳐다보던 제상은 도로 머리를 수그렸다.
「소신이 왜국에를 갔다 오겠읍니다.」
제상은 황급히 일어나서, 왕께 고별의 절을 한 뒤에 궁을 물러나왔다.
왕은 궁문 밖에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제상의 길을 축수하셨다.
「경만 믿소, 경만 믿소.」
이렇게 당부하시는 왕께 다시 절을 한 뒤에, 제상은 자기의 집에도 돌아갈 틈이 없이 궁에서 곧 말께 올라서 말에 채찍질을 하였다.
고구려와도 달라서 물길 만 리, 물길 만 리의 왜국까지 가는 길이었다. 잠시 집에 들러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작별이라도 하고 싶었다. 다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이 길에, 한 번 처자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왕이 흘리는 눈물, 왕이 쉬시는 한숨, 왕이 하시던 당부를 생각할 때는 그런 사사로운 일은 돌아볼 여가가 없었다.
이리하여 제상은 그 길로 율포(栗浦)까지 달려가서 거기서 배를 하나 얻어 타고, 만 리 물길인 왜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6
[편집]제상이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궁에서 즉시 왜국을 향하여 떠났다는 소문이 집에 이른 때에, 제상의 아내의 놀람은 여간 아니었다.
「싸움 잘 하는 나라」
「칼 잘 부리는 나라」
「무서운 나라」
일찌기 이런 형용 아래 알리어져 있는 왜국으로 떠났다 하면, 그것은 영결에 다름없었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남편을 생각할 때에, 부인은 떠나는 남편에게 한 마디의 작별이라도 안 할 수 없었다.
그 소식을 안 부인은, 옷도 갈아입을 겨를이 없이 허망지망 뛰어나와서 자기도 말을 잡아 탔다. 그리고 어디로 그렇게 가느냐고 따라나오는 딸들과 가인들에게도 대답이 없이 말을 몰아서 율포로 향하였다. 그러나 율포까지 이르러 보매, 벌써 남편을 실은 배는 포구를 떠나서 창망한 바다로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는 즈음이었다.
부인은 말에서 내려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기 푸르른 바다 위를 갈매기와 함께 떠나가는 저 배─ 그 배에는 지금껏 수십 년을 같이 즐기고 같이 고생하던 남편이 타고 있다. 차차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그 배에는 다시 만날 길이 망연한 남편이 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는 부인은 그 근처에 나는 갈매기와 같이 날개가 돋치어 있지 못한 것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다만 한 마디라도 말을 사괴어 보고 싶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서로 마주보고 싶었다.
배는 차차 바다의 안개 속에 사라져 갔다. 차차 안 보이게 되어 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배는 마침내 안 보이게 되었다. 배가 안 보이는 것이 혹은 자기의 눈의 탓이 아닌가 하여 몇 번을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하였지만, 그래도 안보일 때에 부인은 더 참지 못하여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체면도 체모도 잊은 통곡성이 그 해안 일대에 울리었다.
하루 이틀을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고 난 부인은, 하릴없이 다시 발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올 길이 없는 남편을 생각할 때에 자기 혼자서 편안히 집에 묵어 있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집에서 눈물로 날을 보내던 부인은 이번은 자기의 세 딸까지 데리고 치술산(鵄述山)으로 올라갔다. 거기서는 왜국으로 통하는 창망 무제한 바다가 한눈에 죄 보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부인은 만날 왜국 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죽어 버렸다.
신라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애처러이 죽은 그 혼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 하여 그의 사당까지 세워서 그 혼을 위로하였다. 왕께서도 그 소문을 들으시고, 그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冊)하고, 훗날 그의 딸을 맞아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7
[편집]왕의 아우님을 왜국에서 빼어내려고 고국을 떠난 제상은, 운파 만 리를 건너서 대화라 부르는 왜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나라 왕께 가서 뵙고, 자기는 계림(鷄林)의 신하인데, 계림왕이 횡포하여 죄 없는 자기의 집안을 모두 잡아서 다스리므로, 자기는 거기서 도망하여 이 나라에 투신하려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왜국왕이라 함은 태수(太守)를 가리킴이다.
왜국 조정에서는 제상의 인물이 비범함을 보았다. 그 인물의 준수함을 보았다.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아까운 인물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쉽지 않은 인물이 스스로 자기네 나라에 뛰쳐들어온 것을 기뻐하였다.
왜국 조정에서는 이렇듯 아까운 인물이 자진하여 들어온 것을 다시 놓치지 않으려 제상을 후히 대접하고 녹봉을 주고 상당한 집까지 하나 주었다.
이리하여 왜국 조정의 신임을 얻고 있는 동안, 제상은 별별 궁리를 다하여 그 신임이 더욱 두터워지게 되도록 힘썼다. 바다에 가서는 고기를 낚아다가 왜국 왕께 바쳤다. 산에 가서는 짐승을 잡아다 바쳤다. 들에 가서는 새를 쏘아다 바쳤다. 왕의 어전에서 신라 가무를 보여 주었다. 자기의 능란한 문장과 필법을 보여 주었다. 자기의 학식을 알게 하였다. 활쏘기, 말타기, 칼쓰기 등 온갖 무술도 자랑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방면으로 신임을 사기에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다만 준수한 인물이라고 아껴서 맞았던 왜국서, 제상의 다방면의 학식과, 기예를 보고 더욱 귀히 여기었다.
이리하여 왜국 조정에서도 제상에게는 푹 마음을 놓을 만큼 되어서 어떤 날 제상은 왜국 신하에게 이런 말을 건네어 보았다.
「내가 본국 있을 때에 들으니깐 여기 본국 왕자가 한 분 와 계시다는 데 그게 참말이오?」
제상을 이미 신용하는 왜국 신하는 속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 분을 한 번 뵐 수가 없겠소?」
제상은 다시 물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이것이 왜국 신하의 대답이었다.
미해공과 제상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고국을 떠난 지 이미 사십여 년, 그때 수행하였던 박사람(朴娑覽)은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리하여 적적한 타국에서 외로운 그날 그날을 보내던 미해공은 고국 사람이라 할 때에 먼저 눈물이 앞서려 하였다. 제상과 만날 때는 벌써 쉰 살이 지난 늙은 눈에서도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딴 뜻을 품고 있는 제상은 다만 한낱 동국인으로 대할 뿐이었다. 나오려는 눈물, 호소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어버리고 평범히 만났다.
이리하여 왜국 조정에서는, 미해공과 제상과를 교제케 하여도 아무 탈이 없으리란 안심이 생기게 되었다. 한 번 두 번, 그 뒤부터는 제상은 남의 의심을 사지 않고 미해공의 저택에 출입하게 되었다.
8
[편집]제상은 미해공의 저택에 자유로 출입하였다. 그러나 미해공을 모시는 왜국 관원들이 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자기의 신분까지 미해공에게 알게 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기회는 없다 할지라도 언제 그 기회가 생겨서 언제 이 나라를 도망하게 될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제상은 아무 때라도 넉넉히 달아날 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그 기회가 이르렀다. 그것은 어떤 가을날이었다.
왜국 뭇 무장들과 미해공과 제상은 같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산에서 이리저리 짐승몰이를 하며 돌고 있을 때에 문득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왜국 무장들은 그 돼지를 잡고자 돼지가 달아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미해공도 그리로 말을 달리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껏 조용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제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활을 재어서 미해공이 탄 말의 발을 향하여 쏘았다.
멧돼지가 달아난 방향으로 따르려던 말은 한 번 껑충 일어섰다가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미해공은 말에서 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져서 넘어졌던 미해공이 다시 일어설 때에는, 그의 앞에는 제상이 와서 넙적 엎디어 있었다.
「형왕께서 비밀히 보내신 사신 박제상이올시다. 공을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하시기 위해서 몰래 보내신 박제상이올시다.」
오랫동안 사괴면서 나오려는 눈물, 나오려는 하소연을 참고, 또 참았던 제상은, 이 조용한 기회에 한꺼번에 다 풀어 놓았다. 미해공의 앞에 엎드린 제상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던 미해공도 차차 까닭을 이해하였다. 까닭을 아는 동시에 미해공도 와락 달려들어서 제상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얼굴을! 얼굴을!」
늘 보던 그 얼굴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빼내고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사람이라 할 때에, 미해공은 새삼스러이 제상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상은 얼굴을 조금 들었다. 그리고 눈물 어린 눈으로 미해공을 쳐다보았다.
「형왕의 신하 박제상이올시다.」
「얼굴을! 얼굴을!」
「공을 고국으로 모셔 가려 온 박제상─」
「얼굴을! 얼굴을!」
눈물 어린 두 쌍의 눈은 서로 겹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서로 눈이라도 깜박였다가는 이것이 꿈으로라도 변하리라는 듯이 깜박이지도 않고 서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조용한 기회를 이용하여 주종은 서로 의논하였다. 파수가 엄중한 이 나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나라를 피하여 달아날 일을─
이리하여 미해공과 제상의 사이에는 이 나라를 피하여 나갈 계획과 방법이 서로 의논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이 밤으로 결행하기로 하였다.
9
[편집]약한 자를 도와 주시는 하느님은, 미해공의 탈출에도 조력하여 주셨다.
그 밤은 안개가 몹시 끼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피곤함을 핑계 삼아서 제상도 미해공의 저택에 묵었다.
밤도 삼경이 지나서, 미해공의 저택 담장을 안에서 밖으로 후닥닥 넘어 나온 괴한이 하나 있었다. 그 괴한의 뒤를 따라서 괴한 하나가 또 그 담장을 넘었다. 괴한은 둘 다 보자기로 얼굴을 깊이 감쌌다.
담장을 넘은 두 괴한은 한 마디의 말도 사괴지 않고 사람의 이목을 기이면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빠져서 교외에까지 나와서 한 괴한은 발을 멈추었다.
「그럼 운파 만 리를 무강히 돌아가십시오.」
그것은 제상의 목소리였다.
묵묵히 앞서서 가던 복면도 돌아섰다.
「왜 굳이 이 나라에 떨어지려고 그러오? 초행길, 왜 길동무라도 안 해 주오?」
그것은 미해공의 음성이었다.
「저도 모시고 가고 싶은 생각이야 적겠읍니까만, 공이 가신 것을 단 일각이라도 감추기 위해서 도로 가야겠읍니다.」
「그렇지만......」
「아아, 일각이라도 어서 가십시오.」
「그렇지만, 여기 그냥 떨어졌다가는 반드시 생명에......」
「네, 미리 각오한 바, 아무 염려 마시고 어서 길을 채십시오. 그리고 상감께 뵙거든 제상은 상감을 위해 목숨을 바치었다는 한 말씀만 올려 주십시오.」
미해공은 제상을 같이 가자고 몇 번을 권하였다. 왕제의 권위로 명령까지 하여 보았다. 그러나 제상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미해공이 떠난 일을 왜국 조정에 내일 낮까지라도 감추어서, 쫓는 군사를 더디게 하기 위해서 제상은 미해공과 동행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자는 사람, 못 가겠다는 사람─ 주종은 한참을 다투었다. 그런 뒤에 하릴없이 미해공은 혼자서 고국의 길로 떠났다.
아아! 사랑하는 고국, 사랑하는 처자, 제상인들 얼마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랴. 그러나 왕께 받은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해 자기는 결코 미해공과 동행할 수가 없었다. 동행할 수 없으면 없으니만큼 그에게는 더욱 고국이 그리웠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차차 어두운 안개 속에 사라지는 미해공을 바라보면서, 제상은 고국과 처자가 그립기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해공의 그림자는 드디어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져버렸다. 미해공의 그림자가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더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던 제상은 눈물을 씻고 발을 돌이켰다.
다시 미해공의 저택까지 돌아와서 보매, 모시던 왜국 신하들은 아까의 사냥의 피곤 때문에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발소리를 숨겨 가지고, 제상은 자기의 임시 침소 (미해공의 침소의 앞 방)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만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극히 적 한 밥은 차차 새었다.
10
[편집]그 밤 한잠을 못 이룬 제상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미해공의 방 앞에 지키고 있었다. 왜국 시신들이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올 때에, 제상은 손을 들어서 설레설레 저었다.
「곤하게 주무시니까 조용히 하오.」
제상은 왜국 시신들이 가까이 못 오도록 하였다.
한 각이 지나갔다.
시신들이 또 문안 드리러 왔다. 그러나 미해공의 방 밖에 굳게 지키고 있는 제상은 또 손을 가로저었다.
「아직 주무시는 중이오.」
이리하여 한 각 두 각이 지나서 낮까지 되었다.
시신들의 얼굴에도 겨우 의혹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곤하기로 아직껏 잔다고는 믿기가 힘든 때문이었다. 낮에 또 다시 문안을 드리러 온 시신들에게 제상이 아까와 같이 손을 가로저었을 때에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네끼리 수근수근하였다. 한 사람이 제상의 앞으로 왔다.
「잠깐 한 마디만 여쭐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대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쳐다보는 동안, 제상은 벌써 사태가 틀린 것을 알았다. 그들의 의혹이 꽤 강하게 된 것을 그들의 표정으로 알아보았다.
한참을 시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제상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높이 쳐들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났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이 바보들아!」
이 뜻 안한 웃음과 행동에, 시신들은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그들의 손은 일제히 허리에 찬 칼로 갔다. 그러나 이런 일을 두려워할 제상이 아니었다.
제상의 입에서는 다시 벽력같은 소리가 나왔다.
「하하하하! 너희들이 찾는 미해공은 벌써 계림으로 떠나셨다. 좋은 동풍을 받아 가지고 지금은 뭍에서는 보이지 않을 곳에 넉넉히 가셨으리라. 자, 나나 잡아다가 너희 마음대로 해라!」
시신들은 제상에게 위압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갈피를 못 차리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참을 칼자루를 잡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들은 와락 제상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그들을 제상은 뿌리치지 않았다.
『나를 잡아다가 시원하도록 원수를 갚아라!」
한 마디 고즈너기 말한 뒤에,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 자리에 앉았다. 제상은 결박을 당하여 왜국 조정에 끌려갔다.
한 패는 즉시로 말과 활을 준비하여 가지고, 달아난 미해공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제상이 말한 바와 같이, 왜국 무사들이 해변까지 달려갔을 때는 미해공이 탄 배는 벌써 뭍에서 보이지도 않는 먼 바다 위를 고국으로 고국으로 길을 채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해공은 무사히 형왕께로 돌아왔다.
11
[편집]왜국 조정에서는 신라 왕자 미해공을 뽑아낸 죄로, 그에 대한 벌로 박제상을 죽였다. 그러나 죽음은 제상이 미리부터 각오했던 바로서, 제상은 왕께 받은 본래의 사명을 완전히 치른 것이다.
일환아! 이 어찌 장하지 아니하냐! 진실로 광휘 있는 죽음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