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류정
一[일]
[편집]서강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있는 정자 안류정(安流亭)에 기류하고 있는 이종성(李宗城)은 오늘도 조반을 마친 후에 점심을 싸 가지고 강변으로 나갔다.
동저고리 바람에 삿갓을 쓰고 낚싯대를 메고 가는 그의 모양은 누가 보든지 한 개 늙은 어옹에 틀림이 없었다.
와우산을 서남쪽으로 흘러 내려 강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조그마한 절벽과 몇 개의 바위가 홀연히 솟아 있었다.
이종성은 그 한 개의 바위 위에 가지고 온 점심 그릇을 곁에 놓고 낚싯줄을 늘였다. 위수에 곧은 낚시를 느리고 때를 기다린 태공 여상(呂尙)도 있거니와 이종성도 고기 잡히기를 고대하는 눈치는 없었다.
이때 대갓집 별배 같은 위인이 와서,
『대감, 소인 물러가겠읍니다.』
하고 노옹의 등 위에서 굽실하고 절을 하였다.
어옹은 강물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옮기지도 아니하고,
『왜 하루 묵어 간다더니.』
『대감께서 기력이 안녕하신 줄 아오면 곧 돌아가서 젊은 영감께 전갈을 올리는 게 지당하올가 해서 곧 물러가겠읍니다.』
『오냐, 가거라. 가서 나는 아무 별고 없다고 하고 서울 집에도 별일이 없더라고 해라.』
하고는 돌아다 보지도 아니하였다.
삿갓 쓴 어옹이 대감이라 불리우다니 이 과연 뉘인가?
이조 제 이십일대 영묘조(英廟朝) 때의 유명한 재상 영의정 이종성이다.
그런데 일국의 영상이 어이하여 안류정 별장에 기식하고 삿갓 쓰고 낚시질하기로 날을 보내고 있는가 거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조는 문소의(文昭儀)라는 간악한 궁녀에게 고혹하여 궁중에 있어서의 모든 처사가 그릇되어 가고 있었다.
왕세자로서 나중에 아버니 영조의 미움을 받아 참혹한 죽음을 한 사도세자도 이 문소의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인륜상의 참변을 당했을 리 없다. 그러나 조정에는 영의정 이종성이 있어 정치를 바로 잡아가고 있는 터이더니 문소의의 세력에 아부하는 소인들은 이종성의 존재를 눈의 가시처럼 싫어하였다. 그래서 그자들은 은밀히 간관(諫官)을 매수하여 엉터리 트집을 잡아 영상 탄핵의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에 우리나라 조정 전례가 대신으로서 탄핵에 대론(臺論)을 받으면 유죄 무죄간에 벼슬을 내놓고 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 대신도 그 전례에 의하여 즉일로 벼슬을 내놓고 곧 고향인 장단으로 내려갈가 하였지마는 요즈음 와서 문소의의 간악무쌍한 행동이 날로 심하고 조정에 그득한 소인배들이 나라를 그르칠 생각을 하니 안연히 장단 향저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서울 가까이 있어 몸은 비록 무관의 한 개 백성이 되었더라도 나라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충성을 다해 볼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강 친구의 별장 안류정에 묵고 있어서 몰래 서울과의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 와서 간악한 문소의는 배지 않은 아이를 배었다고 배에다가 솜으로 보탬을 하여 흡사히 포태한 양으로 사람의 눈을 속이고 영조의 귀염을 한층 더 받으려 한다는 비밀 정보가 이 대신의 귀에 들어왔다.
『해괴한 일이로구나, 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이다.』
이 대신은 이렇게 차탄하며 스스로 속 깊이 결심한 바 있었다.
영상의 자리를 떠난 이상 적극적으로 간신배를 숙청할 도리는 없지마는 소극적이나마 요녀 문소의의 간악한 행동을 제거하여 먼저 궁중을 숙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二[이]
[편집]해는 한낮이 훨씬 겨웠다. 키가 육 척이 가까운 장대한 중년 하나가 이즈러진 갓을 쓰고 조그만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짊어진 듯 만 듯, 무심히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대신의 등 뒤에 와서, 후유하고 한숨을 쉬며 대견한 듯이 쭈그리고 앉았다.
이 대신은 비로소 뒤를 잠간 돌아다 보아 그 위인의 행색을 살피는 듯하고는 다시금 강심을 내려다보았다.
『웬 사람인데 잡히지도 않는 낚시질 구경을 하는가?』
『지나가는 행객으로 다리를 쉬입니다.』
『어디서 오는 사람인데.』
『경상도 밀양서 옵니다.』
『밀양서 오는 사람이 서울로 가려면 곧장 문안으로 들어갈 것이지 왜 와우산 끄트머리를 헤맨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노수가 다 떨어져서 서강에 있는 친구에게 돈을 좀 얻을가 하고 왔더니 그 사람 역시 왕여마디로 골 가고 없구먼요.』
『그거 낭패로군 그런데 당초 길을 떠날 때 노수를 적당히 마련할 것이지.』
『서울 오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는 나왔지요. 그렇지만 주막에 들고 보니 한 상 밥 가지구야 요기가 됩디까. 그래서 한 끼에 두 상 씩을 사 먹으니 노수가 곱 들었읍니다.』
『어지간 하군. 그런데 서울은 무엇 하러 올라 온 길이야.』
『시골에 있어서 밥만 죽이고 있으니 뭘 하겠읍니까. 그래서 서울 와서 무변으로나 벼슬을 구해볼가 합니다.』
『음, 힘깨나 쓰는 겔세 그려.』
『네 시골서는 장사란 말을 들었읍니다마는.』
『오라!』
『이번에도 문경새재를 넘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혼이 났읍니다마는 다행히 그 놈이 내가 호통치는 바람에 달아가긴 했읍니다.』
『장사 소리 듣겠군 성명이 무언가.』
『손호관(孫浩觀)이라 합니다.』
『손호관. 밀양 손씨네 일문일세 그려.』
하고 이 대신은 그때야 비로소 다시 한번 손가의 얼굴을 돌아다 보며,
『점심이나 자셨나?』
『못 먹었읍니다.』
『이것이나마 자시게.』
하고 이 대신은 자기가 먹지 아니한 점심밥 그릇을 턱으로 가리키었다.
『염체 없이 먹겠읍니다.』
손가는 기실 그 밥이 퍽으나 먹고 싶었던 모양으로 밥그릇을 집어 들고 잡은 참에 밥풀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말끔히 맛있게 먹었다.
『잘 먹었읍니다.』
하고 손가는 밥그릇을 내려 놓았다.
이 대신은 돌아다 보지도 아니하고 또 다시 묻는 말이다.
『서울 가면 아는 사람이 있는가?』
『없읍니다.』
『배짱이 어지간 허이 그려. 그러나 누가 뒤를 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여간해서는 어려울걸. 내가 서울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무변 하나를 구하고 있는 모양이니 그리나 찾아가 보게. 그이는 설혹 자네가 무변 재목이 못 된다 할지라도 찾아 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사람이 아닌즉 며칠 밥야 안 먹여 주겠나.』
『어디오니까?』
『서울 북촌 안동으로 가서 이영 부사댁을 찾게. 주인 대감이 계시거들랑 서강 안류정에 묵고 있는 낚시질 하는 늙은이가 대감을 찾아 뵈오라고 일러 주더라고 하게. 해가 기울어져 가니 저녁 전에 빨리 들어가 보소.』
손호관은 그 어옹의 말이 진담도 같고 허탄스럽기도 하나, 설마하니 처음 보는 사람을 속일리야 있을가 하고, 어옹이 댓자곳자 허게를 붙인 태도에 불쾌도 느끼지 아니하고,
『그러면 말씀대로 곧 가보겠읍니다.』
하고 일어섰다.
『빨리 가 뵈옵게.』
하고 이 대신은 역시 돌아다 보지도 아니하였다.
三[삼]
[편집]손호관은 그 길로 바로 문안으로 들어가 안동에 이르러 이영 부사댁을 찾았다.
문간 수청방에 있던 별배는,
『대감께서 지금 아니 계신데요.』
『그러면 어느 때나 환택을 하신단 말요.』
『글쎄요, 종잡을 수 없소이다. 오늘 쯤은 한번 들어오실 듯도 허외다마는.』
『경상도 밀양서 일부러 찾아왔으니 좀 기다려보게 해주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 집의 하인들은 주인의 신칙이 엄하였던지 오는 손에게 극히 친절하였다.
『그러면 저 작은 사랑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하고 허락하였다.
손호관은 보따리를 끌러 놓고 그것을 베개 삼아 베고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마는 이미 해는 떨어진 듯하였다.
이때에 문득 귓결에 들리는 소리가 대감 환택하셨다 하는 소리였다.
손호관은 정신이 번쩍 나서 일어나 앉으며 문틈으로 큰 사랑 쪽을 바라보았다.
거무하에 큰 사랑 장지문이 열리며 노인 하나이 나타나서 마침 하배가 떠온 물에 발을 잠거 씻으려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손호관은 『앗』하고 소스라쳐 놀라며 부지 중 벌떡 일어섰다.
지금 대청 끝에 앉아서 발을 씻고 있는 주인 대감이란 꿈인가 생신가 천만 뜻밖에 서강 강변에서 낚시질 하던 어옹 그가 아닌가. 그러자 밖에서는 주인 대감이,
『여봐라 날 찾아온 시골 손이 없더냐?』
하고 하인에게 묻는 소리가 들린다.
『네 ── 소인 여기 있읍니다.』
하인 대신 손호관 자신이 이렇게 음성을 높이어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어 나와 댓돌 아래에 굴복하였다.
『소인이 식견이 부족하여 대감인 줄 몰라 뵙고 무례한 수작을 허온 죄를 용서합시오.』
하고 사과를 하였다.
주인 대감은 빙긋이 웃으며,
『삿갓 쓴 상공이 어디 있겠나, 자네가 몰라본 것도 실책될 것이 없지, 하여튼 이리 올라오게.』
하고 조금도 거만한 태도를 지으지 아니하였다.
주인대감 이종성은 서울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지마는 오늘은 특히 손호관을 먼저 들여 보내고 그의 뒤를 쫓아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손가가 힘이 장사요 성격이 순박하여 장차 자기의 계획을 실행할 만한 인물인 것을 간파하고 그와 하루 밤의 밀담을 하여 그의 결심 여하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대신은 손호관을 후하게 대접하여 저녁밥을 배불리 먹게 하고 특히 자기 방으로 불러 들이어 앞에 앉히고,
『내가 예조판서를 잘 알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네를 대궐 금요문(金曜門) 수문장으로 추거할 터이니 해 보겠는가?』
『황감하옵니다. 하다 뿐이겠읍니까?』
『벼슬을 구하러 온 사람이 쉽게 수문장을 시켜 준다기 반갑게 여길는지도 모르지만 기실은 자칫하면 자네의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리인데 그래도 해 보겠나?』
『글쎄올시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사온즉 어찌 그것을 염려하여 벼슬자리를 놓치겠읍니까?』
주인 대감은 그 대답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편지 한 장이면 내일부터라도 출사하게 될 것일세마는 오늘밤은 자네와 더불어 얘기를 하고 부탁도 할 일이 있네.』
하고 상노 아이를 불러 침실에다가 촛불을 밝히고 손호관을 그리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방은 으슥한 뒷방이라 여간 음성을 높이어 담화를 하여도 그 말 소리가 밖으로 흐르지 아니하였다.
그날 밤 이 대신은 궁중의 부패한 사태와 문소의의 간악한 흉계, 그리고 조정에 그득한 간신들이 현명한 영조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이 나라의 장래는 바야흐로 위태한 지경에 이른 것을 세세히 얘기해 들리고,
『일개 수문장의 벼슬은 미미한 자리에 불과하지마는 자네의 의리를 지키는 결심과 나라를 위하는 충성으로 목숨을 내놓고 단행할 일이 하나 있는데 자네가 그것을 능히 하겠는가?』
하고 손호관의 기색을 똑바로 바라다 보았다.
아까부터 주인 대감의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는 강개 비분이 흐르는 이야기와 나라의 일이 한 개 여자의 손에 그릇되어 감을 크게 분하게 여기고 있던 손호관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미미한 수문장의 지위로써 그러한 국사를 좌우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며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버린들 아까울 배 있으리까?』
『음!』
하고 이 대신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한자리 다가 앉으며 음성을 낮추어 한동안 무엇인가를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얘기를 다하고 나서,
『하겠는가?』
『하다 뿐이오리까.』
하고 든든한 대답을 하였다.
四[사]
[편집]이튿날 손호관은 이 대신의 추천으로 금요문 수문장이 되었다.
수문장으로 등청한지 닷새 후.
이날 손호관은 점심때가 지나서부터 몸소 금요문 옆문에 버티고 앉아서 특히 궐내로 들어오는 인물에 대하여 비상한 주의를 하고 있었다.
이 날이 바로 이 대신이 특히 지정한 날이고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대사를 단행하는 비밀 청탁을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보통 때이면 수문장이 직접 문에 나와 지키는 일은 없다. 수문지기들은 이상히 생각하여 자기들끼리 수군대긴 했지마는 손호관의 위엄에 눌리어 감히 그 이유를 묻는 자는 없었다.
간악무쌍한 문소의는 해산날이 가까웠다고 선언하고 몰래 소인배를 시키어 민간에서 갓나서 이삼일 밖에 안되는 어린 아기를 막대한 돈을 주어 사 가지고 그것을 큰 이남박에 담아 가지고 그 어린아이를 자기가 해산한 아이라고 하여 왕자 탄생의 총애를 기리 받고 왕자의 사친되는 권세를 써 보자는 것이었다. 천인이 용서할 수 없는 간악무쌍한 흉계라 아니할 수 없었다.
손호관은 이것을 처치하여 문소의의 흉계를 철저히 폭로 시키자는 것이었다.
어느덧 해가 떨어져 사면은 땅거미 질 무렵이 되었다.
손호관은 더욱 긴장하여 환도를 지팡이 삼아 짚고 대문 옆에 버티고 있었다.
이윽고 웬 젊은 여인 하나가 붉은 이남박을 식지로 덮어 머리에 이고 천연덕스럽게 금요문을 향하여 걸어오는 것이었다.
손호관은 속으로
『이게다.』
하고 한걸음 나서며,
『뉘냐.』
하고 탄하였다.
『내전에 있는 무수리올시다.』
『무수리가 대궐 밖에 무엇 하러 나갔던 거야?』
『문소의 마마의 사갓댁에 심부름 갔다 옵니다.』
『머리에 인 것은 뭐야?』
그 무수리는 그 말 한 마디에 안색이 싹 변하였다.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문소의 사갓댁에 생일 잔치가 있었는데 그 음식을 가지구 들어갑니다.』
『생일 음식을 그 큰 이남박에 담았을 적에는 상당히 먹을 만한 게 많겠구먼 몇 접시 수문지기 방에 내놓고 가지.』
『안 돼요.』
『왜?』
『소의 마마께서 그런 소리를 들으시면 어떠한 엄한 처분이 내리실는지 모릅니다.』
『사갓집 음식 좀 나누어 먹었다고 엄한 처분? 하여튼 몇 접시 내놓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못 들어가요 누가 막는 거예요.』
『내가 막어.』
하고 손호관은 비로소 눈을 부릅떴다.
『무수리가 궐내에 못 들어가요?』
『무수리 아니라 상궁이라도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
『아니 수문장을 며칠이나 해 먹으려고 이러세요?』
하고 무수리는 발악을 하였다.
손호관은,
『이년!』
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너 같은 년은 문소의와 함께 천벌을 받을 년이다.』
『무어 어째요?』
하고 무수리의 발악이 끝나기 전에 손호관의 손은 어느듯 번개같이 환도를 빼어 들고,
『천벌이닷!』
하며 무수리의 어깨로써 가슴에 걸쳐 후리쳤다.
무수리는 비명도 올리지 못하고 선혈을 내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물론 즉석에 절명이다.
수문지기들이 와아 하니 내달았을 때에는 금요문 앞에 선혈이 괴인 가운데에 무수리의 차디찬 시체와 이남박에 담겨 있던 영아 역시 한 칼에 절명하여 무수리 시체 위에 포개져 있었다.
손호관은 얼핏 피묻은 환도를 자루에 꽂아 들고
『얘들아 저 시체를 빨리 치워라.』
하고는 문 옆 청사 뒤에 매어 놓았던 말을 끌러 타고 바람같이 내달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