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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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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前夜[결혼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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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심은 유민호와의 결혼식이 한 주일 후로 결정을 본 어떤날 저녁, 영심은 아버지 오진국씨의 정중한 인사 편지를 가지고 안국동 임학준 교수를 찾아갔다.

그것은 십 일월 초순, 어떤 바람부는 날 저녁이었다. 져녁 무렵이면 임 교수가 집에 있으리라고, 일부러 그런 시각을 택했던 것이다. 혼사 일로 유민호는 부산으로 내려가고 없었기 때문에 영심은 혼자 찾아보기로 하였다.

고급 과자 한 상자와 와이샤쓰 한 벌을 사들고 『임학준』이라는 문패와

『임지운』이라는 문패가 나란히 붙어있는 임교수의 집 대문밖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있었다.

신진 작가인 임지운의 이름은 잡지에서도 몇 번 보아서 낯이 익다. 작품도 한 두 편 읽은 적이 있는 영심으로서는 문학적인 호기심 같은 것도 있어 어쩐지 다소 마음이 설레이기도 하였다.

예술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 그런 것과는 전연 딴세계에서 호흡하고 있는 유민호 변호사와 허정욱 중령 이외의 남성을 영심은 알지 못한다. 출세를 최대 이상으로 하고 있는 유민호의 세계와 국가의 간성으로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천명으로 여기고 있는 허정욱의 세계밖에는 영심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기질로 보아서나 학력으로 보아서나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영심으로서는 작가라는 임지운의 직업이 자기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한 개 초록별과도 같이 인생의 향기를 찾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늑해진다.

더구나 아버지와 아들이 다같이 이상의 추구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영심에게는 무한이 좋았다.

대문을 조심히 열며 들어서니, 반만큼 열려진 중문으로 화분이 두 개 놓여 있는 장독대와 부엌이 들여다 보였다. 계집애가 저녁상을 치우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침 좋은 시각에 찾아왔다고 영심은 생각하며 불렀다.

『선생님, 계신가요?』계집애가 부엌에서 나왔다.

『어느 선생님 말씀이세요?』

『저어 M여대에 나가시는 임선생님 말이야요.』

『어디서 오셨어요?』

『명륜동서 사는 오영심이라고 하는데요.』

『네, 잠깐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계집애는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운이가 있는 뜰 아래방으로 부르르 들어갔다. 그 방만 불이켜져 있고 안방과 건너방은 캄캄하다.

『아, 영심양이 오셨구려.』

그러면서 임교수가 방문을 열고 영심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어서 앉으시요.』

부인이 옆에서 영심을 앉히웠다.

『사모님, 처음 뵙겠읍니다.』

영심은 꿇어앉아서 조용한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한테 벌써부터 말은 듣고 있지요. 경사가 계신다고요?』

『아이, 사모님……』

영심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영심의 눈 아래 기름을 갓먹인 새하얀 장판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아이유, 선생님 말씀처럼 어쩌면 이렇게도 얌전할까? 선생님이 어떻게나 칭찬을 하는지……』

『아이, 사모님도……』

영심의 고개가 자꾸만 숙는다.

『우리집에도 경사가 있다우. 우리 아이들이 장가를 간답니다. 그래서 이처럼 방도 뜯어 고치고……안방과 건넌방은 오늘 기름칠을 했지요. 그래서 이처럼 한 방에 모였답니다.』

『아, 그럼 여기는 작은 선생님의……?』

『그렇답니다. 우리 지운이가 쓰는 방이지요.』

호기심에 찬 얼굴로 영심은 소설가의 방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소설가의 방이래야 별다른 것이 없었다. 책이 다소 많을 뿐, 그것도 사변통에 죄 도적을 맞고 책이 없어서 아들이 쩔쩔 맨다고 부인은 말했다. 미닫이를 열면 한 간 반 짜리가 달려 있는데 며느리를 맞아오면 책장은 죄 그리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무슨 책들이 들어 있는지 영심은 보고 싶었으나 파란 커어튼이 유리 안으로 느려져 있어서 볼 수가 없다. 맨밑에 조그만 설합이 세 계 달린 책장이었다. 그 맨오른쪽 서랍 안에 영심의 십년 묵은 꽃봉투는 얼마 전까지도 들어있었다.

그 꽃봉투를 태운 책상 위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임교수는 말했다.

『이런걸 뭘 다 사갖고 오셨소? 그러면 도리어 미안해,……』

영심이가 내놓는 과자와 와이샤쓰 상자를 보고 하는 말이다.

『제가 사 갖고 온 것이 아니고 저의 아버지께서……선생님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시며 몸소 찾아 뵙지 못한다고……이 편지를……』

모필로 ⌜임학준 선생, 친전⌟이라고 쓴 흰 봉투를 영심은 내놓았다.

『글씨가 아주 달필이시군!』

긴 두루마리에다 순 한문으로 쓴 편지였다. 편지에는 정중한 인사말을 하고, 생면부지의 인간이라도 이렇듯 인연이 있으면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한다는 말과, 쓸모없는 자식이 나마 일생의 대사이기에 선생 같은 진실한 학자의 손으로 혼례식이 이루워 진다면 이상의 요행이 없을 것이며 이를 기회로 하여 교분을 얻을 수가 있다면 이미 세상을 버린지 오랜 몸이나 여생의 대락(大樂)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 이러한 형식의 서한이었다.

『과분한 글월이요. 영심양이 나를 잘못 전달한 것이 분명한데……』

『아닙니다. 저의 아버지는 진심으로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영심은 아버지의 쓸쓸한 삶을 대략 이야기하고 저번날 밤의 광경을 설명하였을 때, 임교수는 적지않은 감동의 빛을 띄우면서,

『오선생이야말로 훌륭한 분이오. 애정의 길과 바둑의 길이 결코 다를 리 없다는 그 한마다는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가 없는 인간 철학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요.』

『그러니까 이처럼 얌전한 따님을 두신게 아니예요?』

부인은 석란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삼대 독자 외아들을 두었다가 하필 왜 그런 장모를 모시게 해야만 하느냐고, 장본인들이 좋다니까 하는 수 없지만 부인은 정말 영심이 같은 며느리를 맞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부인의 말에 임교수도 동감을 하며,

『그 아버지에 이 딸이 있는 것이요. 그러나 여보, 과히 염려할 것은 없소. 우리는 지금 며느리를 맞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아내를 맞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꼴을 당하면서도 승낙을 한게 아니요?』

『무어 그런 것 쯤 가지고……』

아무래도 임교수 내외는 아들의 결혼이 아쉬워서 못견딜 지경이다.

『그래 혼례식은 어느날이요?』

『이달 초 아흐렛 날이예요.』

『응?……초 아흐레?……』

『네.』

『어쩌면 우리와 꼭 같은 날일까?』

부인의 말이었다.

『그러셔요?……』

영심도 멍해졌다.

『음, 그날이면 안되겠는 걸! 장소는 어딘데?』

『엘·씨·아이예요.』

『어머나? 장소도 같구려!』

『음, 그 달은 새 달이 잡히면서 첫 길일(吉日)이라고 엘·씨·아이만 해도 다섯 쌍의 결혼식이 있다지 않소.』

임교수 내외의 결혼 삼십주년 기념일은 길일이 아니라고 마담로우즈가 반대를 하여 이날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거나? 그날은 선생님이 시간이 없을 텐데……』

『그래 영심양, 시간은?……』

『열 두 시래요.』

『아, 그럼 우리 바로 전이로군. 우리는 두 시부턴데……』

그러다가 임교수는 결심을 한 듯이,

『그럼 됐어! 시간을 내지요.』

『그래도 선생님……』

영심은 적지않게 황송해서 임교수와 부인의 얼굴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괜찮소. 그래야 내가 오선생도 만나 볼 수 있으니까 ──』

『황송합니다. 선생님! 아버지가 정말로 기뻐하시겠어요!』

『무슨 그런……두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까 무방하오.』

『아가씨가 이처럼 얌전하니까, 선생님이 성의를 내는 거지. 신랑되는 분이 홀딱 반했을걸 뭐.』

『아이 사모님도……』

영심은 또 얼굴을 붉혔다.

『대학을 나왔다면서도 아는 척하지도 않고……자기보다 부모를 먼저 내세우고…… 누구처럼 시아버지가 될 사람에게 꽃다발을 안기워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

『어, 허헛……사람이라는 것은 다 제각기 분복이 있는 거요. 팔자라는 것은 일종의 우연성을 말하는 것이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내가 당신을 못 만났더라면……』

『좀더 행복하게 살았겠지.』

그래서 부인도 웃고 영심도 웃었다.

『좀더라는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이니까, 당신이 좀더 잘 살았을 거라는, 바로 그 위치에 앉아서도 역시 또 좀더 라는 말을 쓰게 될 테니까. 그저 이만했으면 무던하다고 생각을 하시오.』

재미있는 선생님이라고 영심은 또 방글방글 웃었다.

『네네! 그래서 요정 마담한테도 그저 이꼴 저꼴 다 보고 사는 거 아냐요?』

말의 내용은 잘 몰라 보겠으나 평화스런 분위기가 이 가정에는 넘쳐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 영심의 마음이 더 아늑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우연성이라는 것이 지극히 중대한 것이요.』

『그래서. 우리 지운이만 해도 석란을 만나기 전에 이런 아가씨를 만났다면……누가 알아요? 어떻게 될는지.』

『거야 물론 모르지만……』

『당신도 부러울 거요. 이런 얌전한 며느리를 맞아보겠나요, 얼마나 별루 셨소?』

그러면서 부인은 영심의 손 하나를 잡아 쥐고 살뜰히 쓸어보며,

『손두 어쩌면 이렇게 고울까?』

모두가 다 석란보다 나아 보이는 임교수 부인이었다.

『부인은 그냥 영심의 손을 잡고서,

『시부모도 다 계시우?』

『벌써 돌아가셨대요.』『듣자니 돈이 많은 사람이라든데. 훌륭한 자가용차를 다 갖고 있구……』

『돈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것 같아요.』

그 소중한 것 때문에 일부러 불행한 결혼을 택한 것이다.

『옳은 말이야. 지운이가 들었으면 무척 좋아할 말인데……』

『지운 선생님, 그런 말씀 늘 하세요?』

『하는 것이 뭐유? 입만 벌리면 그런 말 뿐인데……』

『역시 작가니까, 그러시겠지.』

『지운이가 있었으면 이야기가 맞을 텐데……』

『어디 나가셨어요?』

『청첩 때문에 석란을 만난다고 하면서 아까 낮에 나갔는데…… 석란이라고, 그 애 약혼자 말이유. 저번날 왜 차를 같이 타고 왔었다면서……?』

『아, 그이세요?』

아무런 이유도 따져 볼 필요도 없었지만 영심은 공연히 호기심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때도 다소의 눈치 같은 것은 채고 있었지만 그 학생이 이 댁 며느리가 될 사람인줄은 모르고 있었다.

임교수의 연애강좌 때, 연애를 두 번만 하다가는 목숨 하나가 모자랄까 봐서 걱정이 된다던 그 학생, 그리고 임교수가 차안에서 소개를 해주던 그 학생…… 다소 지나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척 똑똑한 학생이라는 인상을 영심은 받고 있었다.

『참, 저희는 아직 청첩을 못 찍었어요. 선생님의 정식 허락을 받고 찍을려고…… 청첩이 되는대로 가지고 오겠어요.』

『먼 길에 또 올 건 없고……우편으로라도 부치시요.』

『아니예요. 또 찾아 뵙겠어요. 그럼 선생님 사모님, 실례하겠읍니다.』

영심은 인사를 하고 조용히 일어섰다.

『맛있는 과자가 생겨서 지운이가 돌아오면 잘도 먹을 테지.』

『단 것 좋아하시는 가요?』

『술도 좀 하는 모양이지만 단 것은 좋아한다오. 돌아올 무렵이 거진 됐는데……』

『그럼 안녕히……』

『어두운데 조심해 가시우.』

부인은 대문밖까지 나와서 영심을 전송하였다. 석란의 손은 한 번도 쥐어 보지 않은 부인이 영심의 손을 쥐어 봤을 만큼 대단한 호의였다.『조심해 가요.』

『네, 안녕히……』

캄캄한 골목을 빠져 나갈 때까지 부인은 대문밖에 그대로 서서 소리를 질렀다.

바람은 그냥 불고 캄캄한 밤하늘에 별들이 밝다.

『어디 있을까?……』

영심은 걸으면서 하늘을 우러렀다. 초록별을 한 번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그리 쉽사리 찾아지는 초록별은 아니었다.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요리조리 헤치면서 찾고 있을 때, 사나이의 검은 그림자 하나가 영심의 옆을 지나 골목으로 꺾어 들면서 임교수의 대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너 지금이야 오느냐?』

임교수 부인의 목소리가 멀리 어둠속으로 들렸다.

『아, 어머니세요? 난 또 누구라고?……깜짝 놀랐어요.』

『그래? 어찌나 캄캄한지……』

『누구 오셨댔어요?』

『응, 아버지더러 왜 주례를 서 달라는 색시가 있다지 않았어? 그 색시……』

모자는 안으로 들어가서 대문을 잠근다.

현재보다도 미래를 아름답게 생각하고 가까운 데보다도 먼 데를 꿈꾼다는 것은 인간이 공상할 수 있는 기능을 반드시 인간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진리라든가 이상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 언제든지 먼곳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오영심이 가 갖고 있는 마음의 초록별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애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인생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희망의 초록별을 사람들은 마음 한구석에다 모시고 사는데 무슨 행복 같은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 같은 것을 느끼는 바로 그 느낌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인 것을 사람들은 긍정하지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비극성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먼 곳에 있는 줄 알았던 마음의 초록별이 오영심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천국에 사는 줄만 알고 밤하늘만 골똘히 쳐다보던 행복의 초록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어둠의 장막이 가로 막히지만 않았던들 오영심과. 지운은 십년 동안이나 찾아헤매이던 행복의 정체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정체를 붙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두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누구가 단정할 수 있을 것이냐……그와는 정반대로 극심한 불행을 가져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비로운 조물주는 어둠의 장막을 내리어 두 사람의 불행을 구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 연대장이 제 결혼식에도 꼭 참석하겠다구요.』

영심이가 사온 과자를 먹으면서 지운은 어머니가 내준 편지 한 장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는 다 고맙지, 그 먼데서……』

『아, 어머니!』

지운은 돌연 외치듯 불렀다.

『왜 그러느냐?』

『언젠가 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연대장이 실연을 하고 고민한다는 이야기……』

『그랬었지.』

『자기가 실연을 한 바로 그 여자가 딴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그 결혼식에도 꼭 참석을 해야만 하겠다구요.』

『그만하면 사람도 무척 좋은 양반인 모양이다. 나같으면 분통이 터져서도 그런 결혼식엔 못 가겠다.』

『그런 작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대범하고 솔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인간이랍니다.』

『사내 사람들은 달라!』

『그런데 어머니, 그날은 정말로 길일이나 봐요, 초아흐레, 저희와 똑 같은 날입니다. 이제 찾아왔던 그 여자도 그날이라면서요?』

『그래서 글쎄 아버지가 어떻걸까 하고 망설이지 않았니?』

석달 전, 휴전 직후의 일선을 시찰하고자 국방부 주최로 문단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중동부 전선에 지운은 다녀왔다. 그때 지운은 ××연대장 허정욱 중령의 그 허심 탄회한 무게있는 성품이 마음에 들어 각별한 교분을 맺은 사이가 되었다.

허중령도 지운의 의젓하고 얌전한 성품이 무척 믿워졌는지, 어떤 달 밝은 날 밤, 둘이는 달빛이 창백한 황랑한 드넓은 뜰을 거닐면서 다음과 같은 실연의 고백을 하였다.

『국가의 흥망을 한 몸에 지닌 군인의 몸으로서 일개 여인에게 정을 두고 연연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요.』

연대장 허중령은 그런 말을 전제로 하고,

『어떤 여인을 오륙 년 동안이나 은근히 사모하다가 마침내 실연을 당했읍니다. 그 여인은 나와 중학 동창인 사나이와 약혼을 했지요. 그러나 그 여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나이보다는 나를 좀 더 존경하고 따르는 것 같았지만 어렇게 된 셈인지, 결국은 저편 사나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답니다. 존경만으로는 결혼이 안되는 것인지, 요즈음 신여성의 심리는 복잡해서 우리같은 단순한 사람에게 이해가 잘 안가서 탈입니다.』

거기서 지운은 대답을 하였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결국은 공리적인 타산에서 나온 행동이겠지요.』

『그럴까요? 하기야 저편에는 그만한 물질적 여유가 있으니까요. 변호사요, 상사 회사의 사장이랍니다. 또 여자의 가족이 그만한 물질적 혜택도 입었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선 군인의 몸이기도 하니까요.』

『요즈음에 흔한 예지요.』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허중령은 쓸쓸한 어조로 말하다가,

『그러나 임형,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만 되는 걸까요?』

하고 갑자기 열을 띠면서 물었다.

『임형은 작가니까, 우리 군인들 보다는 현대 남녀의 미묘한 심리를 잘 이해할 테니까 하는 말이지만요.』

『어떤 경우 말입니까?』

『내 직감으로서는 말입니다. 약혼자에 대한 애정이 그 여자에게는 별로 없읍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정략 결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본인이 좋아서 그리로 가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읍니다.』

『무언데요?』

『여자의 약혼자인 그 사나이로 말하자면 굉장한 이중 인격자지요. 아니, 이중 삼중의 백면상(百面相)과 같은 인격의 소유자지만요. 여자 편에서나여자의 부모들은 그런 사실을 통 모르고 있답니다.』

『허어? 전연 모릅니까?』

『전연 모르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나서서 그 가면의 사나이의 불미로운 행동을 폭로해도 무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모르는 척하고 내버려두느냐?…… 임형, 어떻거면 좋습니까? 나의 불타는 정의감으로 보아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여자에 대한 애정 문제와는 별개로 정의는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불의를 보고 눈을 감는 것도 역시 불의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열을 띤 허중령의 굵다란 음성이 달밝은 골짜구니를 우르렁 울렸다.

『임형, 잘못하면 남의 험구를 하는 교양 없는 사나이라고, 그 여자에게 인격적인 오해를 받을 것이 무서워서 꾹 참고 있기는 하지만요. 임형 같으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 같습니까?』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요.』

『역시 오해 받을 것이 무섭지요?』

『아닙니다. 오해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아무리 교묘한 이중 인격자라도 사람이란 몇 번만 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파할 만한 총명이 그 여자에게는 없으니까, 그런 소경 같은 여자라면……』

지운은 연대장의 심정을 생각하여 일부러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허중령은 그러고 나서,

『결코 총명하지 못한 여자는 아닌데요.』

그러면서 달빛을 등진 검은 산허리를 그 어떤 참을 수 없는 울분을 가지고 덤덤히 바라보다가,

『임형처럼 그렇게 점잖게만 생각한다면 결국에 있어서 정의라는 것은 한낱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고 그의 실천은 영영 있을 수 없겠지요. 우리 군인들은 문인들처럼 섬세한 정서의 세계는 잘 모르지만, 그 대신 감정의 무더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과격한 일면을 갖고 있답니다.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그 가열한 싸움터에 나설 수는 없지요. 총탄이 비오듯이 날아오고 포성이 울부짖는 싸움터에는 정서라든가 지성이라든가 하는 세계는 있을 수없으니까요. 오직 한 가지 정열, 감정의 무더기밖에는 없지요.』

『잘 알 것 같습니다.』

허중령은 얼마 동안 묵묵히 걷다가,

『나는 이런 생각을 때때로 가져 본답니다.』

『무슨 생각인데요?』

『그 여자의 결혼식에는 반드시 참석을 해야만 되겠다구요.』

『반드시 참석을 한다고……그건 무슨 까닭으로요.』

『기어코 축사를 한 마디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축사라고요?』

지운은 놀랐다.

『네, 참된 의미에서의 축사! 정의를 위하여 불의의 가면을 벗겨 놓는 축사 말입니다.』

『아, 그런 의미의 축사……』

지운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에 있어서 그 여인은 구제를 받을 것입니다. 나의 감정의 무더기는 지금 그런 것을 공상하고 있지요.』

생각만 하여도 그것은 너무도 비참한 극적 장면이었다.

『다소 점잖지 못한 행동이라고 임형은 생각할는지 모르지만요. 그러나 인간은 점잖아지기보다는 먼저 불의를 보고 눈을 감지 않는데서부터 구제를 받아야 할 것이어요.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광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지요.』

『좋은 말입니다.』

이리하여 연대장 허정욱 중령의 실연담을 들을 수가 있었던 지운이었고 그 후에도 한 두 번의 서신 왕래가 있었다. 그래서 거리와 임무 관계도 있고 해서 며칠 전 지운은 결혼식 날짜만을 미리 통지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장에게서 오늘 회답이 온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그러한 의미의 축사를 하겠다는 허중령의 마지막 한 마디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때문에 어머니는 지금 연대장의 사람 좋음을 나무랬었고 그러한 어머니에게 대하여 지운은 그런데는 대범한 위인이라고 연대장을 위하여 변명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허중령의 그러한 공상이 실현될 것 같은 예감에 적지않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 너 청첩은 다 냈니?』

『네.』

지운은 과자를 맛나게 먹으면서,『어머니.』

『응?』

『삼대 독자 외아들이 종시 장가를 들게 되어서 얼마나 기쁘세요?』

『하늘만큼 기쁘다.』

『그럼 한 턱 하세요, 내일 아침……』

『그렇지 않아도 네가 좋아하는 만두국을 끓이는데……』

『야아, 신난다!』

지운은 아이들처럼 표정을 크게 써 보였다.

『석란의 어머니는 재미있는 사람이야.』

셋이 나란히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을 때, 임교수는 혼잣말처럼 불쑥 말을 꺼냈다.

『자기 생활에 대해서 그만한 자신을 가지기가 힘든 일인데……』

『자격지심에서 하는 말이지 뭐가 힘들어요?』

어둠 속에서 부인이 감정을 가지고 대답을 했다.

『그것도 있겠지만……임학준 교수에게 철학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그만한 철학은 있다지 않아?』

『그거야 있겠지요. 누구나가 다 자기대로의 생활 철학은 갖고 있을 테니까요.』

이번에는 지운의 대답이다.

『음, 아뭏든 상당한 위인이야. 그런 자리에서 그만큼 대담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임교수는 도리어 마담로우즈의 생태(生態)를 어지간히 부러워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만큼 솔직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행복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니까 ──』

자기의 생각을 언제나 비판의 체로 걸르고 받아서야 표현을 하는 임 교수로서는 석란 모녀의 적나라한 표현주의적인 삶의 형태에 적지않은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요즈음에 와서 아버지는 그러한 적극적인 생활 태도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은데……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야요.』

『음 ──』『말하자면 그것은 아버지가 이때까지 지니고 온 철학의 전부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마담로우즈에게도 철학은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활에 관한 철학일 뿐, 인생에 관한 철학은 아니지요. 그들에게는 희망과 욕망은 있어도 이상은 없으니까요.』

『희망과 이상은 뭐가 다르니?』

부인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다르지요. 생활에 대한 희망이나 욕망을 진선미(眞善美)의 입장에서 비판을 받는 것이 이상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마담로즈우와 같은 적극성을 띄인 생활태도에 매력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이상을 손수 포기하고 단순한 욕망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살아보시겠다는 징조인데…… 대단히 위험한 징조야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철학이 타락을 하는 거지 뭐냐?』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대들이 무얼 안다고들……』

임교수는 항의을 했다. 그러나 임교수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지운이 네가 아버지 교육을 좀 톡톡히 시켜 드려야겠다. 잘못하면 아버지가 늦바람 피실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건 어머니 책임이지 제 책임은 아니예요.』

『그렇지만 어쩌다 또 곰곰히 생각하면 아버지가 약간 가엾어 보이기도 하더라.』

『왜요?』

『오 십 평생 바람이라고는 한 번도 못 피어 본 아버진데 한 번 쯤 피워 보도록 눈감아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애. 나를 뭐 내쫓기야 할라고?』

『어머니는 열녀시군요. 제가 어머니를 위해서 열녀문을 세워 드리지요.』

『잘들 논다. 사람을 마구 가지고 노는구나!』

임교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쾌히 흘러나왔다.

『얘, 정말로 간혹 가다 그런 생각을 해 보는 적이 있단다. 결혼 생활 삼십 년 동안을 꼬박 나를 위하고 가정을 위해서만 살아온 아버지가 아니냐?

한 번 쯤 바람좀 피워 보시라고 눈을 감아 드리는 것도 자비심이지, 뭐냐?』

『어머니가 먼저 그렇게 한 발을 더 뜨니까, 아버지의 인간성이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더 위하게 되는 거 아냐요?』

『그럴는지도 모르지만……』부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얘,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믿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런 것쯤 용서할 것 같은 생각이 가끔 들더라.』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하신가를 아셔야 할 거예요.』

『글쎄 누구가 행복하지 않대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 가정처럼 평화한 가정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다 아버지 덕택이지.』

『허어, 바람을 피라면서 피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는군.』

그러면서 임교수는 이 가정의 평화를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다.

황혼이 오기 전에 도대체 무엇을 바란다는 말이냐? 이러한 보배로운 아내와 가정보다 더 보배로운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욕망의 이상화(理想化)야말로 참된 의미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지나간 옛날,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바로 그 교훈을 임교수는 지금 반대로 그 아들과 함께 새삼스레 복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불타는 이 아들의 엄격한 삼 십 대의 채찍이 긴장이 풀려진 이 아버지의 오 십 대를 채찍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 잘못하다가는 석란에게 쥐어 살라.』

『쥐어 사는 것, 좋지 않아요?』

『안될 말이지. 가정은 역시 남편이 위어야 한다. 옛적부터 하는 말이,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라고, 여편네한테 쥐어 사는 사나이들 꼴은 구역질이 나서 정말 못 보겠더라.』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쥐지도 않고 쥐우지도 않으면 되잖아요? 민주주의적으로……』

『아이구 얘두 헛공부를 했구나! 민주주의 국가에도 정부가 있다는걸 알아야 한다. 그 정부의 수반이 역시 남편이 돼야만 한다는 말이다.』

『왜 아내가 되면 어때요?』

『글쎄 그렇지 않다는 밖에! 세상에선 남녀 평등을 부르짖지만도 본질적으로 남녀 평등은 될 수 없느니라. 역시 남자가 여자보다는 모든 점을 종합해 봐서 나으니까 도리가 없지 뭐냐?』

『그럴가요? 주먹은 다소 셀는지 몰라도……』

『그것 봐라. 그것부터가 벌써 평등이 될 수 없는 첫조건인 걸 어떻거니?』

『참, 어머니야말로 가장 민주주의적인 현모 양처예요.』

『모두 너의 아버지가 성실한 탓이란다.』『저도 석란을 어머니처럼 만들어 놓을테니까, 두고 보세요.』

『잘 안될 걸!』

『그래요?』

『아까 왔던 그 색시 같으면 모르지만도……』

『그렇게 얌전하던가요?』

『그런 색시 같으면 남편만 착실해서 적당히 지도를 하면 아주 훌륭한 주부가 될텐데……아깝더라!』

『괜찮아요. 석란이만한 여자도 드물답니다.』

『거야 그럴테지만……여자의 교양이란 그 태반이 남편에게서 받는 건데…… 아까 그 색시만 해도 네만한 남편이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색시도 파이다 파이야!』

그렇게 부산 말을 써서 남편과 아들을 웃기면서 부인은 이윽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