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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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敵[연적][편집]

1[편집]

이튿날 오후 한 시경, 을지로 이가 동일 흥신소(東一興信所)앞에 지이프차 한 대가 멎어 있었다.

군인인 젊은 운전수가 담배를 피워 물고 번거로운 거리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 일선으로부터 허정욱 중령을 태우고 부랴부랴 달려 온 지이프차였다.

사무실 안에서는 그즈음, 코밑에 조그만 수염을 기른 사십 대의 늠름한 신사와 군복을 입은 허정욱 중령이 마주앉아 있었다. 신사는 이 동일 흥신소 소장이었다. 소장 옆에는 민첩한 눈초리를 가진 삼십 전후의 젊은 소원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 열 시까지에 있어서의 유민호 변호사의 소행(素行)이 전부 기록되어 있읍니다.』

유민호 변호사에 관한 두꺼운 소행 조사 보고서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허정욱에게 젊은 소원이 하는말이다.

『수고가 많았읍니다.』

보고서에서 시선을 들며 허정욱은 대답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삼 주일 전에 허정욱은 생각 하는 바가 있어 유민호의 소행 조사를 이 흥신소에 의뢰했던 것이다.

『여성들과 접촉할 때는 태반 손수 자동차를 운전하기 때문에 운전수를 매수해봤자 별 효과가 없었지요. 그대신 비용이 상당히 들었읍니다. 유 변호사를 따라 다닌 택시 값만 해도……』

젊은 소원은 생색을 냈다.

『잘 알았소. 수고에 대한 보수를 절약할 생각은 없읍니다.』

『에헤헷……』

소원은 굽실하며 머리를 벅작벅작 긁었다.

『상당한 작자인 것 같은데……』

소장도 보고서를 잠깐 들여다보면서,

『송군은 우리 흥신소에서도 가장 우수한 소원이랍니다. 장래 대성할 소질을 가진 청년이지요.』

『소장께서 너무 비행기를 태우지 마세요. 그렇지만 단시일에 그만한 재료를 수집하기도 수월한 일은 아니랍니다.』

소장과 소원이 서로 주고 받고 하면서 생색을 냈다. 그러나 허정욱 중령은 그것이 조금도 불쾌하지가 않았다.

『보수는 얼마나 드리면 좋을까요? 이런 종류의 일에는 다소 소흘해서 ……』

『연대장께는 특히 서어비스를 해서 실비에다 약간……』

그러면서 소장은 일당 삼천환으로 계산해서 이십 일분 육만 환을 청구하였다.

『식사대와 거마비가 대부분이지요. 그렇지만 국가의 간성이신 허중령을 위하여 송군이 다소의 수고를 했다고 생각하면 되실 겁니다. 하하하……

소장의 이야기는 유창도 했지만 능란도 했다.

『수고가 많았소.』

허중령은 청하는 대로의 보수를 제공하고 두꺼운 봉투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시일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으면 좀더 상세한 보고서를 꾸밀 수도 있었 지만요. 다소 조잡해서 쇠송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오.』

허정욱은 그러면서 반석 같은 무게있는 걸음걸이로 걸어가서 소장의 사무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들고 미리부터 조사해 두었던 번호를 불렀다

『덕흥상사지요? 유민호 사장을 좀 대 주세요.』

『누구십니까? 내가 유민혼데요.』

『아, 유군인가? 나 허정욱인데……』

『오오, 허군, 언제 왔나?』

『오늘 아침 잠깐 볼 일이 있어서……유군도 좀 만나볼겸, 지금 그리로 갈까 하는데……』

『오오, 웰컴, 웰컴! 그럼 곧 오게.』

전화를 끊고 허정욱은 천천히 동일 흥신소를 나섰다.

『남대문통 덕흥상사로!』

『네.』

물었던 담배를 획 내던지며 젊은 운전수는 핸들을 잡았다.

2[편집]

허정욱 중령이 덕흥상사 사무실로 들어 섰을 때, 사무실 한 구석에는 두 사람의 사원이 청첩 봉투에 열심히 주소 성명을 쓰고 있었다.

허정욱은 내의를 통하고 사원의 인도로 사장실에 들어가면서 「유민호 소행 조사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박 미경이라는 여자를 한 번 보아 둘 요랑으로 타이피스트를 눈으로 찾아 보았으나 보자기를 쓴 타이프 앞 걸상은 비어 있었다.

『타이피스트는 어디 나갔읍니까?』

인도하는 사원에게 허정욱은 물었다.

『네, 오늘은 마침 결근인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이윽고 허정욱은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어, 허군, 이게 얼마만인가?』

영심에게 보내줄 청첩장 한 뭉치를 보자기에 싸고 있던 유민호가 손을 내밀면서 사무탁자 앞에서 일어섰다.

『대단히 바쁜 모양이로군.』악수를 하고 허정욱은 유민호와 마주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청첩을 보내려고 하던 참인데 잘왔네.』

『내일 모레가 결혼식이라면서 인제 보내 가지구야 일선지구까지 배달이 되겠나?』

『아, 하하……』

간단한 웃음 한 마디로 유민호는 허정욱의 항의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래 허군, 어떻게 일선에서 빠져 나왔나? 공용으로?……』

『군의 결혼식에 참석 할 목적으로 빠져 나왔으니까, 아마도 사용이 될 테지.』

『오오, 영광, 영광! 영심이 편에서 먼저 통지를 했었군 그래. 하옇든 잘 왔네.』

유민호는 담배 한 꼬치를 붙여 물며,

『이왕 온 김이니, 자네 내 둘러리나 좀 서 주게. 자네가 서 준다면 유민호 일대의 영광일테니까.』

『서도 무방하지.』

허정욱은 천천히 담배를 꺼냈다.

『그럼 됐어! 동창이란 이래서 좋은 거야.』

『그러나 실은 둘러리보다도 나는 축사가 한 번 하고 싶어서 온 것인데……』

『축사?……축사도 좋지만 우선 둘러리를 좀 서 주게.』

『들러리는 축사할 자격이 없어서 다소 곤란할 걸.』

그러면서 허정욱은 방안을 한 번 휘이 둘러보았다.

『축사할 사람은 많아. 그러니까 자네 축사라면 지금 들어도 좋고 후에 들어도 무방하다니까 ─』

『그렇게 되면 이십 일 동안이나 걸려서 준비한 축문이 수포로 돌아가는 걸.』

『이십 일 동안?……허어, 굉장한 축사를 준비해 갖고 왔네 그려.』

『음, 군의 결혼식에는 다소 성의를 갖고 있지. 이것이 이십 일 동안이나 걸려서 작성한 내 축문이네.』

허정욱은 군복 안주머니에서 배가 퉁퉁 부른 흰 봉투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유민호 소행 조사 보고서」였다.

『허어, 어디 좀 읽어 보세.』

손을 뻗치는 유민호를 막으며,

『그건 안돼. 축사란 반드시 결혼식장에서 낭독을 해야만 되는 거라네.』그러면서 허정욱은 다시금 봉투를 집어 안주머니에다 쓰러넣었다.

『그런데 박미경 양이 오늘은 결근이라지?』

『누구?』

『타이피스트 박미경 말이네.』

『아, 자네 박양을 아나?』

『안면이나 있지?』

『그래?……』

유민호의 표정이 다소의 당황을 보일 줄 알았었는데 여전히 태연하다.

상당한 작자였다.

『그래 명륜동 오선생 댁에는 들러서 왔겠지?』

유민호는 얼른 박미경의 화제로부터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곧장 이리로 왔으니까 ─』

『그래? 그럼 우리 같이 명륜동으로 오선생을 찾아 뵐까? 이 청첩도 전달할 겸……』

『천천히 찾아 뵙고, 우리 좀더 이야기나 해 보세. 이번 결혼에 대한 군의 감상 같은 것을 좀 들려 주게. 나도 어차피 결혼을 해야, 될 몸이니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인제 다 해보면 알지.』

『유민호군!』

허정욱의 어조가 갑자기 얼숙해졌다. 허정욱의 성미로서 그 이상 참을 수도 없었거니와 중심 문제의 주변을 그 이상 쓸데 없이 빙빙 돌 필요도 없었다.

『군은 이번 오영심과의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네.』

『응?……결혼을 단념하라고?……』

그제서야 비로소 유민호는 허정욱의 이 돌연한 내방의 진의를 알아 채렸다.

『단념해 주게. 그것이 오영심을 구하고 동시에 군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일세.』

모욕감과 분노로 말미암아 유민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으나 이런 경우에는 침착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 항상 현실적인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자기를 누르며,

『너무 돌연하고 너무 간단해서 자네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아무 말 말고 단념해 주게. 이 한 마디가 동창인 군에 대한 나의 자비심이네.』

『자비심……?』

상반신을 곧추며 유민호는 똑바로 허정욱을 바라 보았다.

『내 아내가 될 여성에게 대하여 짝 사랑을 하는 인물로부터 자비심을 받아야만 될 필요는 느끼지 않는데……』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나는 지금 군이 잠자코 오영심을 단념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애. 이것은 우리들의 삼각 관계로서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군인 정신에서 나온 말이다. 떠들지 말고 나의 조용한 충고를 받아 주는 것이 좋을 거야.』

『협박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 사생활에 관한 문제에 자네가 터치 할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군은 한 사람의 순결한 처녀를 모욕해서는 아니된다.』

『말을 똑바로 해라. 오영심은 자신의 의사로써 나를 남편으로 택한 것이다.』

『군은 오영심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행복은 군의 사회적 지위나 돈으로서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자네의 행복론은 이상일 뿐이다. 이상주의자는 미래에서 살아라. 오영심은 현실에서 살려는 것이다. 그 절실한 증거로 오영심은 군을 버리고 나를 택했다. 군이 제아무리 열렬한 정열을 가지고 오영심을 사랑해 봤댔자 영심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여성의 행복은 남성이 주는 애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여성이 지닌 허영심을 만족시킬만한 물질 생활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니, 좀더 정확히 설명해주마. 물질적 보장만 풍부하면 남성의 애정 같은 것은 없어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소위 여성들의 세계인 것이다. 여성의 애정이 없이는 살아나가지 못하는 남성들의 세계와는 다소 그 성질이 다르다는 걸 알아 두고 덤비는 것이 현명할 거야.』

그러면서 유 민호는 가방 속에 청첩 뭉치를 집어 넣어가지고 몸을 일으켰다.

『다소 바쁘니까, 나는 좀 나가 봐야겠네.』

허 정옥도 같이 일어섰다. 일어서서 문을 향하여 걸어가는 유 민호 앞에 우뚝 막아섰다.

4[편집]

보아하니, 자네는 오늘 내게 대해서 무슨 행패를 할 셈인가?』

우뚝 앞을 막아선 허 정욱을 눈앞에 노려보며 유 민호는 쏘아붙이 듯이 말했다.

『행패가 아니고 자비심이다. 군이 단념하지 않는다면 내 편에서 이 결혼을 파괴시킬 수 밖에 없다.』

허 정욱은 비로소 오랫동안 품고있던 한 마디를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파괴시킨다?……자네가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그 권총의 힘을 빌겠다는 말인가?』

『말을 삼가라!이 무기는 내 개인의 소지품이 아니고 국가의 것이다. 함부로 사용할 것이 못돼. 문제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모인 결혼식장에서 군의 결혼이 파괴 당하는 것보다는 지금 군의 자유 의사로써 결혼을 단념하는 편이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애?』

『무슨 말이냐?똑똑히 말을 해라!어째서 내 결혼이 파괴를 당해야만 한다는 말이냐.』

『모르겠으면 이야길 하마.─ 군은 지금 오선생 일가를 속여 이중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부산 대청동에는 군의 혈육까지 받은 김옥영이라는 부인이 있을 것이다.』

유민호는 그 순간 다소의 당황을 보이다가 곧 자신을 꿋꿋이 걷우며,

『그것은 전연 오해다. 김옥영과는 다소의 안면은 있지만 그런 관계는 통이 없다. 내 말이 믿워지지 않는다면 내 호적면을 조사해 보면 알 것이 아닌가? 이중 결혼이란 법률상의 아내를 가진자가 그것을 숨기고 다른 여성과 또다시 하는 결혼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어두운 군인일지라도 그만한 상식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그러니까, 다만 자네는 지금 내 결혼에 대해서 신사답지 못한 야만적인 질투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식도락」의 마담과의 관계는?……』

유민호는 또 한 번 놀랐다.

『군은 마담로우즈의 파트론이라고 들었는데?……』

『사업상의 파트론이 어째서 내 결혼을 방해한다는 말이냐? 모두가 다 자네의 그 추한 질투심에서 나온 일종의 행패일 뿐이다.』

『타이피스트 박미경에 대한 애정의 책임은 또 어떻게 처리할 작정인가?』

세 번째 놀라는 유민호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의 놀람이었을 뿐, 표정은 까딱도 없다.

『흥, 자네 아는 것이 대단히 많네 그려! 여성과 다소의 안면만 있어도 곧 색안경으로 보는 버릇을 자네는 가졌어. 더러운 상품이다!』

가방을 든 손으로 유민호는 탁 허정욱을 떠밀고 총총히 사장실을 나서며 운전수를 불렀다.

『명륜동까지!』

『네네.』

운전수의 뒤를 따라 유민호는 밖으로 나가 차에 올랐다.

『저 차의 뒤를 따라 주게.』

『허정욱도 지이프차에 오르며 운전수에게 당부했다. 이리하여 유민호의 고급차와 허정욱의 지이프차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일로 종로 쪽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퉁바리바위 위의 한 알의 사과!』

달리면서 허정욱 중령은 지나간 소년 시절, 고무총으로 사과를 떨어뜨리던 유민호 소년의 재치있는 솜씨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5[편집]

그보다 조금 전, 명륜동 오진국씨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잘 알았읍니다. 잘 오셨읍니다.』

울어서 빨개진 두 눈을 소그듬히 숙이고 영심의 옆에 타이피스트 박미경은 조용히 꿇어 앉아 있었다.

『유사장은 절더러 적당히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만……저는 아직 사람의 생명 하나를 제 손으로 없애 버릴만큼 불량하지는 못해요. 그렇다고 제가 유사장과 꼭 결혼을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예요. 남성들의 그 무절조한 애욕의 세계에 대항하여 나가기에는 저희들 여성의 애정이 너무나 이쁘고 순결해요.』

그러나 오영심의 얼굴에는 아버지 오진국씨처럼 분노도 없었고 괴로움도 없었다. 신문의 어느 사면 기사를 읽는 정도의 관심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미경씨는 지금도 순정을 가지고 유사장님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씀이죠?』

하고 물었다.

『사모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학생 시절에 품고 있던 그런 감정은 분명히 아니었으니까요. 유사장이 저를 귀엽다고 하니까, 거기서 비로소 상대에게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움직였을 뿐이예요. 여성이란 애정의 발견에 있어서도 생리적으로 수동적 태세를 취하는지 몰라요. 남성대 여성의 세계에 있어서 여성들이 언제나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그런데 원인이 있을 거라고 저는 요즈음 그걸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천사처럼 순결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어요.』

박미경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오영심의 표정 없는 얼굴을 가벼운 미소와 함께 찬찬히 바라보며,

『언니는 저보다 이쁘게 생겼어요.』

했다.

보통 여자로서는 감히 토하지 못할 한 마디를 박미경은 했다. 여성대 여성의 질투의 감정을 선망의 념으로서 표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동의 하나이다. 그 순정하고 고운 마음씨가 영심의 마음을 솔직하게 쳤다. 어딘가 영심 자신과 비슷한데가 있는 여성이라고. 영심은 박미경의 불행을 진심으로 동정하였다.

『제가 염치불구하고 이처럼 찾아온 건 언니의 결혼을 방해하고 싶어서는 절대로 아니예요. 그점을 오해하면 저는 슬퍼요.』

『잘 알것 같아요.』

『결혼까지 한다니까, 언니에게 대해서는 그렇지 않겠지만……무서운 사람이예요. 악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피도 눈물도 없어요. 사람의 생명 하나를 처리하는데 간단한 명함 한 장으로……』

그러면서 박미경은 핸드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적당한 처분을 앙망」한다는 유민호의 명함이었다.

『이건 날 좀 빌려 주시요.』

오진국씨가 명함을 들여다 보면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돌아가 계시요. 댁의 불행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손을 써 보겠읍니다. 생명은 귀중한 것이요 경솔히 서둘러서 천명에 어긋나서는 아니되오. 아직 어린 몸으로 심뇌가 많겠소이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찾아온 본위는 조금도……』

『알겠소. 알겠소. 보아하니 대단히 착하고도 총명하신 분이요. 유민호로 말하면 내가 아들처럼 믿어온 사람이었는데, 잘못 보았소! 음 ─』

이윽고 박미경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6[편집]

『영심아.』

박미경이가 돌아간지 한참만에 그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앉았던 오진국 씨가 딸을 불렀다.

『네.』

할머니는 식모와 함께 시장에 나가고 없었다.

『여러말 하지 않으련다. 그런 줄 알고 잘 생각해서 대답을 해야만 해.』

『너 유민호와 결혼을 단념할 수는 없을까?』

영심은 머리를 깊이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민호와의 결혼에서 오순도순한 행동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기에 그만한 것 쯤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영심이었다.

아니, 유민호의 행동이 불미로우면 불미로울수록 그만큼 오영심에게는 마음의 초록별을 자유롭게 그리워해도 무방하였다.

또한 그보다 못지않게 중대한 문제 하나가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인 유민호에게 대한 아버지의 의리 문제었다.

체면과 의리를 인생의 황금률(黃金律)로서 내세우고 살아온 오진국씨가 물질적인 원조를 꾸준히 받아온 유민호에게 대한 인간적 의리를 딸의 정략 결혼으로서 갚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같은 값이면 딸의 의향대로 유민호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영심이기에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리 간단히 단념할 수 있는 결혼도 또한 아니었다. 더구나 내일 모레로 박두한 결혼식이고 보면 이왕 택한 길이니 그냥 내버티고 싶었다.

『그만한 것 쯤 가지고 아버지 뭘 그러세요?』

한참만에 영심은 태연히 대답하였다.

『아니다. 제버릇 남 못준다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는거다. 그런 패륜의 종자를 내 사위로 맞아들일 수는 없어.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안 것이 다행이다. 음, 나쁜 놈 같으니라구!』

『그렇지만 그이에게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안돼! 의리도 의리지만 의리 때문에 딸을 팔아 먹을 오진국은 아니야.

빨리 가서 그놈을 전화로 불러 오너라!』

그러는데 자동차 소리가 들리며 가방을 든 유민호가 뚜벅뚜벅 들어섰다.

후다닥 놀라며 영심이가 몸을 일으키는데 그 뒤로 허정욱이가 들어왔다.

『일이 좀 바빠서 얼마 동안 못 뵈었읍니다.』유민호가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오진국씨는 유민호는 본척도 않고,

『일선에서 오늘 아침 떠나왔읍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허정욱을 향하여,

『음, 마침 잘왔네. 둘이 다 어서 거기좀 앉게.』

『선생님, 요즈음 건강은 어떻십니까?』

허정욱은 유민호와 나란히 앉으면서 물었다.

『덕분에 괜찮아. 음 ─』

영문은 모르지만 기분이 무척 나쁜 오선생을 허정욱과 동시에 유민호도 깨달았다.

『어디 편치 않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못하신데……』

유민호가 물었다

『응, 몸은 지극히 건강하지만 마음이 다소 편치못하네.』

이런 어조로 나오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아버지임을 영심은 안다.

영심은 가만히 일어나서 이층 자기방으로 올라갔다.

『아, 영심씨 청첩장이 돼 왔는데……』

『유민호는 가방을 들고 영심의 뒤로 따라 올라갔다.』

『유군, 곧 내려 오게. 이야기할 말이 있으니까 ─』

『네.』

유민호는 어디까지나 침착한 태도로 방을 나섰다.

7[편집]

오영심에 대한 끝없는 정열을 품고 일선에서 찾아온 허정욱이었다. 그 허 정욱에게 한 마디 인사도 변변치 못한 채 영심은 거북스런 자리를 피하여 이층으로 올라와 털썩 책상 앞에 앉았는데 유민호가 가방을 들고 따라 올라갔다.

『청첩이 돼 왔소.』

가방에서 청첩 뭉치와 함께 순금 목걸이가 들어있는 조그만 케이스를 유민호는 꺼냈다.

『이건 사소한 물건이지만 영심씨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사 갖고 왔지요.』

영심이 앞에 앉으며 유민호는 새빨간 레자케이스를 내놓았다.

영심은 가만히 그대로 앉아서 유민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허정욱의 독실한 침묵의 정열에 비하면 어딘가 다소 사교적인데가 있기는 하지만 박미경의 순정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유린한 사나이 같이는 통 보이지 않았다.

『대단히 우울해 보이는데……영심씨, 어디 편찮소?』

『아니요.』

영심은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가 일부러 택한 불행한 길이었기에 박미경의 이야기를 입밖에 낼 필요는 통 느끼지 않았다. 유민호의 행실이 방탕하면 방탕할수록 그것과 보조를 맞추 듯이 마음의 초록별을 마음대로 그리워해도 무방할 것만 같은 자유가 영심에게는 생기는 것이다.

자멸적이요 자학적(自虐的)인 이러한 독특한 인생의 계산법은 현실에서 살고 현실에서 죽기를 원하는 오늘의 젊은 세대의 방법론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오영심의 도덕률이 낡은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한 길 현실에의 타협을 끝끝내 거부함으로써 참되고 아름다운 이상의 추구 속에서 고독한 영혼 하나를 끝끝내 붙들고 살려는 가열하고도 처참한 투쟁의 자세일 따름이었다.

『영심씨, 우울하지 맙시다. 우리들의 화려한 인생의 출발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소?』

영심의 이 급작스런 우울의 원인은 허정욱의 돌연한 출현에 있는 것이라고 유민호는 생각하며,

『나는 자신이 있지요. 영심씨를 행복하게 만들자신이 있답니다.』

『저는 행복을 원하고 있지는 않아요.』

『옛, 무슨 소린데요?』

그러는데 아랫층에서 오진국씨가 유민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잠깐 가 보고 오지요.』

유민호는 아래로 내려와서 오진국씨 앞에 공손히 꿇어앉았다.

그때까지 허정욱은 유민호에 관한 이야기는 통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유민호가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기가 허정욱은 싫었다. 오진국씨 역시 마찬가지 심정에서 유민호에 대한 비방의 말은 한마디도 없이 일선지구의 상황을 몇 마디 묻고 나서는 화난 벙어리처럼 마주앉아서 유민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군에게는 지금까지 많은 신세를 졌어 내 능력으로는 일생을 두고도 갚을 가망이 없을거네.』

어지간히 성미가 급한 위인이었다. 다짜고짜로 오진국씨는 그렇게 말했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유민호는 힐끔 옆에 앉아 있는 허정욱을 쳐다보았다. 통찰력이유민호는 빠르다. 허정욱이가 뭐라고 고자질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오진국씨의 두서없는 그 한 마디에는 허정욱도 어지간히 놀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옛날 사람들처럼 그런 종류의 대가로서 딸을 내놓을 만큼 오진국의 머리는 낡아빠지지는 않았네!……』

『…………』

8[편집]

유민호는 대답을 못하고 시선만 들었다. 너무도 예고없이 달려온 한마디에 허정욱도 긴장했다.

『유군!』

『네.』

『영심을 아내로 맞을 생각을 단념하게.』

『선생님,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잠자코 단념하게 그리고 잠자코 물러가게!』하고 부동한 선고였다.

유민호는 조금도 떠들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에 올려 놓고 곧장 꿇어앉은 그대로의 단정한 자세로 잠깐 동안 그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러가라면 선생님 말씀이니 물러는 가겠읍니다만 물러가는 이유를 알으켜 주시면 좋겠읍니다.』

『잠자코 물러가는 것이 서로가 좋을 거네.』

오진국씨는 조용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지만 내일 모레가 결혼식인데……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도 청천벽력과 같아서……』

순간, 오진국씨는 눈을 번쩍 뜨면서 꽥 하고 소리를 쳤다.

『썩 내 앞에서 못 물러갈 테야?』

『선생님 이것은 인생 일생의 대사가 아닙니까?』

어디까지 유민호는 침착한 어조로,

『만일 영심씨가 물러가라면 애정의 소재가 분명하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물러갈 수도 있읍니다만……』

『무엇이 어째서?……?』

오진국씨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님은 이 결혼의 당사자는 아니올시다. 저는 선생님과 결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영심과 결혼하는 것입니다.유민호는 마침내 본 바탕을 내고야 말았다. 그는 이미 모든 사태가 삐뚜러진 사실을 민첩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골수에 사무치는 증오의 념을 가지고 유민호는 허정욱을 쏘아보았다.

『음, 자네 말은 어버이가 자식의 운명은 좌우하지 못한다는 뜻이겠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읍니다.』

『시대에 좌우될 오진국은 아니다! 오진국은 시대를 좌우할 것이다.』

『당랑(螳螂)의 도끼로 우마차는 멎지 않습니다.』

『내가 멈춰 볼까?……』

『영심씨가 혹시 멎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선생님의 인격은 파산을 당할 것입니다.』

『좋아! 어디까지나 법률가다운 형식 논리다. 그러나 군의 그 재치 있는 고무총은 퉁바리위의 사과는 떨어뜨렸으나 오영심은 못 떨어뜨릴 거야. 이건 분명 자네 명함일텐데……』

그러면서 오진국씨는 아까 박미경에게서 빌린 명함을 문갑 설합에서 꺼내 주었다.

명함을 보자 유민호의 표정이 후딱 어두워졌다가 다시금 태연히 사라졌다.

『아, 박미경이가 찾아 왔었군요.』

조금도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인제야 모든 것을 짐작할 수가 있읍니다. 이래서 선생님이 그처럼 노하셨군요. 이 문제라면 선생님 안심하십시오. 선생님의 오해는 제가 명백히 풀어드리겠읍니다.』

『어서 말해 봐.』

『한편 쪽 말만 듣고는 송사를 못한다는 말이 있읍니다. 선생님 앞에서 박미경과 직접 대면을 해야 겠읍니다. 지금이라도 가서 박미경을 데려 오겠읍니다만 우선 박미경이라는 여자가 어째서 이처럼 고의적이요 악질적인 의도를 품고 제 결혼을 방해하려는지 조리를 따져서 말씀드리겠읍니다.』

허정욱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영심은 벌써부터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듣고 뛰쳐 내려오다가 미닫이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