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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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慾[애욕]의 曲藝師[곡예사][편집]

1[편집]

유민호는 박미경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조리있는 어조로 설명하였다.

『선생님도 만나보셨으니까 아실테지만 박미경이란 여자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지요. 천사와 같이 얌전한 사람이지만 생각하면 가엾은 여성이랍니다. 이 박미경양에게는 벌써부터 청년 하나가 붙어 돌아다니는데 그 청년으로 말하면 소위 뒷골목의 깡패로서 박양의 얌전한 성품을 이용하여 여기저기서 상스럽지 못한 금품 편취를 꾀하고 있었답니다. 박양이 어떠한 약점을 잡혔는지는 모르지만 뱀 앞에 게구리모양으로 그 청년의 말이라면 도시 거역을 못하지요. 박양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박양은 그 청년의 씨를 받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들에게 그러한 악질적인 계획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유혹하는 대로 박양과 한 두 번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지요. 어떤 날, 저녁을 먹고 나서는데 그 청년이 골목에서 불쑥 나서며 하는 말이 왜 남의 계집을 빼앗아 갖고 다니느냐고 협박 공갈을 하여 소지품 전부를 강탈해 갔읍니다. 그때부터 나는 자기의 체면을 돌보아 박양을 경계하는 한편 퇴직을 시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박양은 나를 협박하여 자기를 내보내면 사장의 입장이 좋지 못할 것이라고요. 그리고 박양은 그때 임신 삼개월이었는데 그 청년은 거기 대한 책임을 내가 지지 않으면 고소를 하겠다고요. 이 뜻은 박양이 전해 왔지만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고 질책을 했더니만 박양이 하는 말이, 엉터리 없는 것이 뒷골목의 사회니까 돈 백만 환이라도 집어주면 무사하지 않겠느냐고요.』

거기서 유민호는 잠시 말을 끊고 전후 사정에 무슨 모순되는 점은 없는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저도 그런 사건에 여러번 변호를 선 경험이있지만요 이런 종류의 사건에는 도시 증인이 없는 만큼 흑백을 가릴 도리가 전연 없읍니다. 결국 양심에 맡겨야겠는데, 청년에게 약점을 잡힌 박양으로서는 그럴 힘이 전연 없읍니다. 그렇다고 백만 환이란 결코 적지않은 돈을 제공하기도 싫어서 그대로 내버려 뒀더니만, 바로 어제입니다. 박양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사장도 녹녹치 않는분이니까, 자기네의 말대로 될 것 같지가 않다고 하면서 불량배의 씨를 낳기도 싫으니 적당히 처리해 버리기로 결심했 다기에,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지요. 그래 박양은 어디 아는 병원이 있으면 소개를 해 달라기에 마침 종로 삼가에 아는 산부인과가 있다고 바로 이 명함을 써 주었답니다. 이 명함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러한 행패를 하려는 계획인 줄이야…… 』

참으로 유 민호는 천재에 가까운 두 뇌의 소유자였다.

이처럼 이론 정연한 허구(虛構)가 당장에 튀어 나올 수는 도저히 힘든 일이다.

이만한 답변이면 옆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유민호가 이 시끄러운 문제에 관해서 적어도 한 두 달 동안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심증(心證)을 갖게 할 것이다. 유민호에게 만일 좀더 시간의 여유를 주었던들 좀더 실감 있는 답변을 꾀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박미경 자신은 절대로 나쁜 여자가 아니랍니다. 천사와 같이 얌전하지만 마음이 약한 것이 탈이지요.』

오진국씨는 직접 박미경을 보았을 것이니까, 자기 답변에는 박미경을 악인으로 만든다는 것은 오진국씨의 선입감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답변의 허위성이 눈에 뜨일 우려가 다분히 있다.

그래서 박 미경의 인간성을 유민호는 옹호하는 구상을 꾀한 것이다.

이만한 구상이면 세상사에 어두운 오진국씨 부녀 앞에서 박미경을 대면하더라도 증인 없는 일인만큼 양심만 방해하지 않는한 흑백을 가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편집]

오진국씨는 반신 반의의 심정으로 있었다. 원체가 선량한 위인이라, 남의 말을 넘겨짚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화를 냈던 자신이 다소 부끄럽기도 했다.

『선생님이 그래도 저를 미심하게 생각하신다면 내일이라도 박미경을 데리고 오겠읍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그것은 오진국씨가 아니고 그때까지 일언반구도 었이 부처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허정욱의 분노에 찬 한 마디였다.

『이 이상 더 참는다는 것은 하나의 불의를 이겨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군을 위하여 이 자리에서 축문을 낭독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허정욱은 분연히 유민호 변호사의 소행 조사 보고서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실은 이런 종류의 축문을 낭독하지 않고 군이 이 결혼을 조용히 단념해 주기를 나는 진정으로 원했다. 그러나 군은 그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지금 또 전연 허위의 구상으로 자기를 변명했다. 이 이상 참을 수 있다는 것은 겸양의 미덕이 아니고 비겁을 의미할 것이다.』

허정욱의 전신은 글자 그대로의 단순한 정의감에 불붙고 있었다. 라이발(戀敵[연적])에 항거한다는 의식은 이미 없었다.

그러나 유민호는 잠자코 허정욱을 쳐다볼 분이다. 한 고비를 간신히 넘어 섰는데 또 무엇이 튀어나오려는고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 나갈 구멍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뭐고?』

오진국씨가 물었다.

『이 축사의 작성자는 제가 아니고 동일 흥신소올씨다.』

이 순간처럼 유민호의 얼굴이 빛을 잃은 적은 없었다. 흥신소라는 한 마디가 튀어나오는 순간 유민호는 이미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라고 각오를 하면서도 떠들 필요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어서 읽어 주게 동창생의 축사인만큼 훌륭한 찬사가 많을 줄 아는데 ……』

그리고 유민호는 다시금 침착한 어조로,

『그렇지만 동시에 군은 영심씨의 의사를 무시한 짝사랑의 고민자인만큼 나를 실없이 공격하는데 효과가 있을 훌륭한 문구도 많은 줄 알지만……』

그렇게 말하여 유민호는 오진국씨의 정당한 판단력을 미리부터 교란시키고 있었다.

허정욱은 읽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민호 변호사의 갖은 비행을 폭로하는 긴 보고서였다. 부산 송도원에서 자기 사원의 아내와 침실을 같이했다는 사실에서부터 대청동의 김옥영의 이야기, 마담로우즈와의 관계, 타이피스트 박미경의 이야기, 헤어졌다고 알려진 인숙 엄마와도 아직 손을 끊지 않고 있다는 경위, 그밖에도 모 접대부, 모 유한 마담 등……십여건에 걸친 유민호의 스캔들(醜聞[추문])이 어떤 것은 상세히, 어떤 것은 줄거리만 쭈욱 기록되어 있었다.

허정욱이가 보고서를 마지막까지 읽고 났을 때, 오진국씨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 흡사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앉았던 유민호가 얼굴을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축사는 감사히 들었네 흥신소와 자네 사이에 어떤 종류의 흑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멀지 않아 그 흥신소의 책임자와 자네는 명예훼손죄의 피고로서 법정에 서야만 할테니까 각오를 해두는 것이 좋아!』

『잔말말고 내 눈앞에서 썩썩 못 물러갈테야?』

오진국씨가 반신불수의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와락 소리를 치는데 미닫이가 열리며 영심이가 조용히 들어섰다.

3[편집]

『아버지 진정하셔야겠어요.』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아버지 옆에 가만히 꿇어앉으며 영심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군과 마주앉아 있으면 내 눈이 자꾸만 더럽혀져! 보기 싫으니, 빨리 물러가 주게.』

『아니올씨다, 선생님!』

유민호는 똑바로 오진국씨를 바라보며 반항의 태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못 물러가겠읍니다. 일이 이처럼 되어 버린 이상 이 누명을 벗기 전에야 어떻게 물러갈 수가 있겠읍니까?』

『자네 말대로 누명은 법정에 가서 벗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겠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너무 편벽된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되지요.

공평한 눈으로 저희들의 흑백을 가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사람을 모함한다는 것은……허군!』

유민호는 휙 허정욱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러나 군의 축사는 사람 하나를 잡아먹는 재료로서 다소 부족한 데가 있어 설사 그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한대로 오늘의 군의 그 추한 행동을 가지고는 영심씨의 호의를 살 수는 없을거야. 영심씨가 다행히 군의 축사를 듣지 못했으니까 말이지. 그것을 들었던들 군이 지닌 인격적 추잡만 폭로시켰을 거네.』

『저도 다 들었어요!』

영심이가 얼굴을 들며 허정욱을 대신하여 명확한 대답을 했다.

『영심아, 저녀석은 내가 결혼의 당사자가 아니니까 못 물러가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아, 그러면 그건 영심씨의 생각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의 의사를 존중해서 하는 말이 아니요?』

영심은 머리를 가만히 흔들며,

『틀림 없는 제 생각이예요. 돌아가시거든 이 목걸이는 채정주란 여자에게 돌려주세요. 제가 받을 물건은 분명 아닌듯 싶어서요.』

영심은 그러면서 쥐고있던 조그만 케이스를 유민호 앞에 가만히 밀어 놓았다.

『채정주?……』무슨 영문인지, 유민호는 통 알 수가 없다.

『영심씨, 무슨 말이요? 영심씨를 위해서 사 온 제 마음의 선물인데……』

『암말마시고 잠자코 가지고 돌아가세요. 그리고 이 약혼 반지도……』

영심은 왼 손가락에서 다이야 반지를 같이 빼 주었다. 유민호는 덤덤히 영 심의 표정 없는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앉았다가 얼른 목걸이 케이스를 집어들고 열어 보았다.

케이스 속에는 목걸이와 함께 종이조각 하나가 착착 접힌 채 들어있었다.

유민호는 얼른 그것을 펼쳐들고 읽어 보았다.

유선생의 호의는 감사하오나 제가 이런 물건을 받아도 무방할만한 마음의 태세도 서지 않았을 뿐더러 이것을 받는 다는 것은 사흘 후면 유선생의 부인이 되실 그 미지의 여성에게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하늘이 무서워집니다. 단지 은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애정 없는 결혼을 하신다는 유 선생의 불행에는 동정의 념을 금하지 못하는 바이오나 그것은 어디까지 유 선생의 자신이 개척할 문제이고 그 불행의 틈사리를 타는 것 같은 비겁한 행동을 저로서는 양심상 도저히 취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단순한 직무상의 보수인 줄로만 믿고 허심하게 받았던 이 선물을 도로 유 선생가방 속에 넣어두고 저는 지금 학교에 갑니다.

즉일 아침 ── 채정주 올림

4[편집]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셈인고?

유민호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옆에 놓인 가방을 끌어당겨 부리나케 손을 쑥쓰러넣어 보았다. 또 하나의 조그만 케이스가 손에 잡혔을 순간 유민호는 모든 것을 최후적으로 각오하고 다시금 본연의 자태로 침착하게 돌아갔다.

실로 뜻하지 않은 이러한 사무적인 착오가 자기 앞 길에 가로 놓여 있는 줄을 누가 알았으랴?……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채정주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그리고는 들고 나온 가방을 한 번도 들여다 보지 못한 유민호였다.

『이 청첩도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유선생에 대한 아버지의 의리 문제에 관해서는 미약하나마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적당히 보답을 하겠어요.』

『잘 알았읍니다.』유민호는 조금도 떠들지 않았다.

『허군의 축사도 그리고 이 채정주의 문제도 그렇고, 지금 당장에 뭐라고 설명을 했댔자 모든 것을 하나의 변명이라고 들을 테니까 그것은 후일로 밀고 여기서는 전연 터치하지 않겠읍니다. 그러나 영심씨의 의사가 최후적으로 그렇게 나왔으니까, 오늘은 조용히 물러가지요.』

유민호는 목걸이 케이스와 청첩뭉치를 도루 가방에 집어넣고,

『나를 하나의 패륜탕자로서 보아 주는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지껄여 보았댔자 아무런 효과도 없을 줄을 잘 알고 있지요. 설사 이 유민호가 그러한 패륜탕자라도 스승에 대한 의리는 끝끝내 지켜야겠읍니다. 영심씨는 인제 보답을 한다고 했었지만 나도 그것을 바랄 수 있는 몰상식한 인간도 아니며 또한 그러한 장사아치의 근성도 불행히 못가진 인간입니다. 이후에도 선생님의 가족이 경제적인 충분한 자립 상태가 설 때까지는 선생님을 모시겠읍니다. 원체 그것은 제 결혼과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문제였으니까요. 단지 한 가지 슬픈일은 제 직업이 학자나 군인처럼 단순한 것이 못되어 여성들과의 사교적인 접촉이 다소 있었던 것이 오늘날 이런 종류의 오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유민호는 약혼반지를 도로 영심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이것을 내가 가지고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영심씨의 냉혹한 심정이 원망스럽습니다. 내가 일단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들의 약혼은 취소된 것으로 치고 내가 존경하는 스승의 따님의 자격으로서 도로 받아 두시요.』

감정의 아우성을 열심히 억제하며 어디까지나 끈기있는 백년대계의 수법을 유민호는 썼다. 삼년 후에도 좋고 십년 후에도 무방하다.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수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지금부터 적당한 포석(布石)을 다시금 펴고 있는 것이다.

『아냐요. 갖고 가시는 것이 좋을 거야요.』

영심은 아주 똑 잘라서 말을 했다.

『정히 그렇다면 어쩌는 도리가 없지요.』

유민호는 반지를 집어 들자 냉큼 자리에서 일어서며 뜰로 면한 창문을 홱 열어 재쳤다.

『유민호는 사나이다! 사나이의 인격에 똥칠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외치자마자 멀리 앞 집 지붕 너머로 쥐었던 약혼 반지를 전신의 분노와 함께 돌팔매나 하듯이 힘껏 집어 던졌다.

『어머나?……』

영심은 놀랐다. 다이야 한 캐럿의, 당시의 시가로 이십 여만 환의 귀중품이 아닌가!

5[편집]

『영심씨, 존경하는 스승의 따님의 자격으로서도 못 받겠다는 그 더러운 반지는 이미 처분되었소! 사랑하는 이의 눈앞에서, 라이발의 눈앞에서 존경하는 스승의 눈앞에서 약혼 반지를 도로 받아 가지고 어정어정 걸어나가는 싱거운 사나이의 꼬락서니를 영심씨는 보고 싶다는 말이지요?』

영심은 시선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대답을 못했다. 행실은 어떻든 이 사나이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사실 웬만한 인간으로서는 생각 조차 못할 과단성 있는 행동이었다. 실로 이 사람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유민호의 조치에는 오진국씨와 허정욱도 적지 않은 마음의 충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이십 여만 환의 귀중품을 그처럼 아낌없이 포기해 버린다는 사실 하나의 허세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생각이라고, 선량한 인품인 오진국씨와 허정욱까지도 유민호의 그 절실한 심정에 이해가 갔다.

『그러나 영심씨, 그러한 싱거운 꼬락서니를 사랑의 원수인 허정욱에게 보일 유민호는 아니었소. 이렇게 함으로써 내 얼굴에 똥칠을 하려는 영심씨의 가혹한 눈물도, 피도 없는 냉혹한 조치로부터 나 자신의 체면과 인격을 간신히 붙든 것이요.』

유민호는 그러면서 분연히 가방을 들었다.

『내가 영심씨를 얼마나 소중히 여겨왔는가는 여테까지 약혼자인 영심씨에게 대해서 얼마나 점잖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것이요!』

그렇게 말하여 최후의 못 하나를 영심의 순진한 가슴 한 복판에다 견고하게 박아 놓은 후에,

『이것으로서 만사는 원하는대로 해결을 지었소. 영심씨 부디 행복하시요!

선생님도 건강에 항상조심하셔서.……』

유민호는 꿇어앉아 최후의 인사를 정중히 하고 일어서며,

『허군!』

하고 부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허정욱도 일어나서 청하는대로 유민호의 손을 잡았다.

『자네는 기쁠테지?』

『…………』

허정욱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자네는 승리를 했으니까 말이네.』

『잠자코 헤어지세 침묵이란 좋은거야.』

무뚝뚝한 표정으로 허중령은 간단한 대답을 했다.

『영심씨를 행복하게 할 자신은 물론 있을테지?』

『돈이 영심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도 이제부터 돈을 좀 모아보지!』

영심은 두 사람의 대립된 감정의 노출을 그 이상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허군!』

『어서 말을 하게.』

『이번에는 이 유민호가 자네의 결혼식장에서 읽을 축사를 준비해 둬야겠네!』

『좋아!』

『자네에게도 축사의 재료는 다소간 있을 거니까 ──』

『글쎄 좋다니까?……』

유민호는 탁 허정욱의 손을 놓고 총총이 밖으로 사라졌다.

6[편집]

인간 무대(人間舞臺)에 있어서 유민호는 실로 비범한 연출(演出)의 기능을 가진 곡예사였다. 사방 팔면으로부터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리는 이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혼반지 하나를 아낌었이 희생하여 사나이의 체면과 성의를 세움으로서 재치있는 통쾌한 종막(終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범인이 쉽사리 취할 인생의 연기(演枝)는 아니었다.

사실 이십 여만 환의 다이야 반지를 집어 던진 유민호의 곡예는 그의 원한에 찬 대사(臺詞)와 함께 영원히 오영심의 가슴에다가 못 하나를 박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종류의 무대 효과를 생각하며 곡예사 유민호는 시보레 오십 이년도에 몸을 싣고 경학원 마당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 약혼반지는 불가불 채정주의 손가락에 끼워 줄 수밖에……』

양복바지 주머니에서 유민호는 다이야반지 하나를 꺼내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심을 비롯하여 오진국씨와 허정욱에게까지도 그처럼 마음의 충동을 일으켰던 약혼 반지는 유민호의 양복 바지 주머니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착상도 좋았지만 생각하면 명연기(名演技)였어!』

집어던지는 흉내만을 유민호는 냈을 뿐, 반지는 그냥 유민호의 손아귀 속에 담아 있었다. 누구 하나 예상조차 못했던 돌연한 행동인데다 워낙이 조그만 물체여서 분노와 함께 내던지는 유민호의 소의를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노릇일 수밖에 었었다.

미리부터 곰곰히 계획을 했던 행동이면 누구에게나 수월한 일이지만 유민호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순간적인 창작이요, 순간적인 연기였던 것이다.

『남성에 대해서 여성의 생리 조직은 대국적이요 총괄적인 비판이 만족치 못하는 결함을 가졌다. 비록 내 행실이 아무리 불미로운 것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자기를 그처럼이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 유민호의 애정만은 영심의 소아적(小我的)인 자존심이나 허영심을 결국에 있어서는 만족시킬 것이다.』

꾸준한 경제적인 원조와 내버린 약혼반지와 영심의 가슴 속에 못 박아 놓은 사랑의 원학관 ─ 애욕의 곡예사요 인생의 마술사인 유민호가 끈기있게 이 세가지의 주문(呪文)만 되풀이한다면 그 어떤 강열한 행복이 영심을 붙들지만 않는 한,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손에 떨어질 영심임을 유민호는 자신하는 것이다.

『나쁜 사나이지만 내게는 좋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