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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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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福問答[행복문답]

[편집]

그러나 유민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토록 견고한 못이 오영심의 가슴 속에 박혀지기에는 유민호의 애욕의 곡예가 다소 지나치게 영심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단지 채정주라는 여자와의 관계만을 가지고 생각해 보더라도 유민호가 어떠한 위인이라는 것쯤은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현실의 불행 속에서 초록별의 행복을 찾으려던 영심의 계산법이 한낱 어린 소녀의 부질없는 꿈만 같이 생각키어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영심은 눈을 부볐다. 오영심이야말로 성실한 의미에 있어서의 인생의 곡예사를 지망했던 셈이되는 것이다.

『오늘의 내 행동을 영심씨는 아마 불쾌하게 생각할 거요.』그날밤, 이층 영심의 방에서 조그만 화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정욱은 오영심과 마주앉아 있었다.

『아니요.』

영심은 불 젖가락으로 불 티를 모아 올리고 있었다.

『질투의 감정처럼 추한 것은 없지요. 그래서 그런 감정을 억제하고 끝끝내 눈을 감아 버리려고 했지만 유군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는 것 같아서 ……』

『잘 하셨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결국 제가 잘못 택했던 길이었나 봐요.

정욱씨의 애정을 좀더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뉘우쳐져요.』

불 젓가락을 잡은 손을 멈추고 영심은 햇볕에 타서 까마특특한 허정욱의 무뚝뚝한 얼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침묵의 정열을 담뿍 감추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욱씨, 용서하세요, 저 때문에 마음 고생 많이 하신 줄 잘 알고 있어요.』

영심은 핑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육· 이오 동란이 발생하던 그날 그때의 생각이 뭉클하고 가슴에 왔다.

『제가 너무 마음이 꼬응해서……육· 이오 때만 해도……』

영심은 손가락 끝으로 눈시울을 한 번 꼭 눌렀다 놓으면서,

『제가 그때, 정욱씨의 뒤를 따라 전찻길꺼정 나갔던 것 모르시죠?』

『아, 그랬었어요?』

하정욱의 표정이 미소를 띠면서 번쩍 들렸다.

『트럭을 잡아 타고 뛰쳐 올랐지요. 그래서 제가 정욱씨를 부르면서 한길로 뛰어나갔어요 교통순경이 붙들지만 않았던들 미아리 고개까지라도 따라갔을 거예요.』

『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허정욱의 커다란 손길이 불 젓가락을 잡은 영심의 손등을 덮었다.

영심은 부끄러워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지나간 날 유민호에게 손을 잡혔을 적에는 그러한 부끄럼이 별반 었었던 사실을 영심은 생각한다.

불 젓가락이 쓰러지며 영심의 조그만 손이 허정욱의 완강한 두 손길 속에서 해변의 조갑지 모양 가만히 엎디어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무슨 이야기로 상대자를 기쁘게 해야 하는지를 허정욱은 모른다.

그저 커다란 감사의 념이 가슴속에 꽉악 충만해 있을 뿐이다.

『영심씨, 감사합니다.』그 이상의 웅변을 갖지 못한 자신을 허정욱은 슬퍼하였다.

영화나 소설 같은데서도 이런 장면을 많이 봤을 텐데 멋들어진 대사 한 마디 기억이 없다. 이럴 줄을 알았으면 그 수많은 아름다운 애정의 말들을 수첩에라도 적어 두었던들……

『나는 솔직합니다. 영심씨,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래서 그 한 마디를 되풀이하며 허정욱은 손길에 힘만 자꾸 주었다.

말이 모자라 영심의 손길만 어루만지며,

『돈을 벌지요. 유군의 말처럼 영심씨가 그것을 원한다면 나도 이제부터 돈을 벌겠읍니다.』

그 말에 숙였던 고개를 영심은 들며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오해하시면 슬퍼요. 없는 것보다는 날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 때문에 했던 약혼은 아니지요.』

『고맙습니다. 그 말이 내게는 제일 고마워요. 사실 말이지 돈을 벌 자신이 내게는 통히 없어요.』

영심의 손을 놓고 허중령은 무연히 얼굴을 들었다.

『무리를 하면 나도 남만 못지 않게 한 재산 만들 수도 있지만……그럴 생각이 아직은 없어요. 그러나 유군에 대한 선생님의 의리 쯤은 나로서도 지켜야 할테니까요.』

『건강만 더 악화하지 않으면 저로서도 그만한 것 쯤 어떻게 될 것 같으니까, 지나친 심뇌는 안하시는게 좋을 거예요.』

그러는데 아버지가 할머니의 부축을 받아 가면서 이층으로 올라 왔다. 아버지의 손에는 흰 봉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내일이라도 임교수를 찾아봐야겠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혼례식을 중지했다는 말과 이런 기회가 없어도 임교수와는 친교를 맺고 싶다는 의향을 잘 적어 놨다.』

『네.』

영심은 편지를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

『내일 아침 저도 같이 가 보겠읍니다. 영심씨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안 일이지만 임교수의 아드님과는 다소의 친분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찾아 볼까 했었으니까요.』『그러다면 더욱 좋고 ……』

영심의 성냥불로 오진국씨는 담배 한 대를 붙여 무며,

『인제 밑에서 할머니와도 상의한 일이지만 영심의 장래에 관해서는 자네가 적당한 시기에 책임을 져야겠네.』

허정욱은 단정히 꿇어앉아서 군대식 주목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할머니와 내 의향일 뿐 당사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하는 말은 아니네 다행히 그러한 의사를 둘이가 다 가졌다면 좋고 또한 그렇지도 못한다면 내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 주면 될테니까 ──』

『알아 모셨읍니다!』

엄숙한 어조로 분명한 대답을 허정욱은 했다.

『모르긴 하지만두……』

옆에서 조모가 뒤를 이어,

『애당초부터 그래야 했을 건데……혼사란 양편에 너무 처지면 못쓰는 법이라고…… 아버지의 똑같은 제자라도 어쩐지 민호에겐 정이 덜 가더라만……』

『고맙습니다, 할머니! 영심씨만 별다른 의향이 없다면 부족한 인간입니다만 제게는 분에 넘치는 요행입니다.』

『애가 원체 말이 없고 꽁해서 잘은 모르지만두 별다른 의향이 있을 것 같은 영심이 아니고……저번 육· 이오 때만 해도 자네를 떠나보내고는 하룻밤을 꼼박 울어 새웠다네.』

『할머니, 거짓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고 쥐었던 봉투로 입을 가리우면서 영심은 곱게 조모를 흘겼다.

『글쎄 어느 편이 거짓말인지, 알 사람은 알테지만……』

그래서 조모도 웃고 허정욱도 씨무럭하고 굳어진 표정을 비로소 풀어놓았다.

오영심은 이리하여 다시금 새로운 운명체의 주인공으로서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전통적 도덕률이 연대장 허중령으로 하여금 오늘의 이 감격에 찬 행복을 누리게 한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갖게 하였다. 그러한행복감을 한아름 품고 허정욱은 이층 영심의 방에서 운전수와 함께 하룻밤을 자면서 후방으로 배치가 되는대로 결혼식을 거행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영심은 조모와 함께 아래층 온돌로 내려와 자면서 오늘날, 이처럼 곡절 많은 운명의 주인공이 된 온갖 책임은 오로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고 비현실적이었던 자기자신의 인생의 척도(尺度)를 돌이켜 보며 허정욱의 무게 있는 정열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것을 마음으로 맹세하였다.

지금까지의 영심의 행복은 한낱 꿈과 같은 관념세계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 관념적인 행복의 공허가 오늘밤처럼 영심에게 절실히 느껴진 것은 없다.

『마음의 초록별을 깨끗이 추방하고 허중령의 정열속에서 행복을 찾자!』

생각하면 오영심이야말로 전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로맨티스트였다. 십년 전에 있어서의 행복체였던 곡절이 극심했던 십년 후인 오늘에 있어서 과연 옛날과 같은 하나의 행복체로서 자기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한낱 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영심이 하여 보며 연령에 비해 성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동화적(童話的)인 영혼의 세계가 차츰차츰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애정의 발견에 있어서도 여성은 수동적이나 봐요.』

아까 낮에 박미경이가 입에 담은 한 마디가 불쑥 생각키웠다.

유민호의 애정의 반사 작용으로서 박미경도 유민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영심은 자기와 허정욱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애정의 성질을 저울질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역사적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과거 수천 년에 걸쳐 우리의 조상인 태반의 여성들은 애정의 독창적(獨創的)인 발견을 꾀하지 못하고 언제나 피발견체(被發見體)로서의 애정만을 발휘하고도 평온하게 살아 왔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그랬고 할머니도 그랬다. 이 평범한 애정의 수입 태세(受入態勢)에서 그들은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일생을 평온하게 살다가 죽었다. 여성의 행복이란 도리어 그 평범한 결혼 형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애정의 안정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수동적인 애정의 진지한 발휘야말로 여성의 참된 행복을 의미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평범한 결혼을 하여 평범한 행복 속에서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죽기를 원하는 심정이 오영심은 되어 가고 있었다.

창경원의 그 중학생도 그렇고 오늘의 유민호와도 그렇고 그것은결코 평범한 인생의 길은 아니나. 자기의 인생이 높다란 낭떨어지 위에서 오직 하나의 기적만을 믿고 한들거리던 위험성을 깨닫고 가벼운 전률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임학준 교수의 소위 아름답고 진실한 연애로서 굳건한 부부애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한마디가 학교 교단 위에서나 문학 작품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한낱 고매한 논리일 뿐 그것은 잘못하면 학생들로 하여금 평범한 결혼조차 향유하지 못하게 할 우려가 다분히 있는 위험한 사상같이만 생각키웠다.

『어째든 내일 아침에는 아버지의 편지를 갖고 임교수를 찾아 봐야지만……』

영심은 불을 끄고 잠을 청할 셈으로 눈을 감았으나 하룻 동안에 급변한 자기의 운명이 자꾸만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영심은 임교수 내외분을 만나기가 부끄러워졌다. 내일이 결혼식이었는데 하룻동안에 남편될 사람이 허정욱으로 바뀌어졌다는 말을 영심 자신의 입으로서 도저히 꺼낼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사실 영심의 입장으로서는 남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허중령이 영심을 대신하여 혼자 지이프차를 타고 떠났다.

안국동에 다달았을 때, 임교수는 이미 학교에 출근한 후였다. 임지운과 임 교수 부인이 허정욱을 반가히 맞아 주었다.

『임형의 결혼을 축복하러 왔소.』

허정욱은 우선 축하의 인사를 하고 나서,

『오늘은 대단히 바쁠테니까 내일 식장에서 다시만나기로 하고 이 편지를 춘부장께……』

그러면서 허정욱은 오진국씨의 편지를 내놓고 영심의 결혼식이 중지되었다는 말을 하였을 때, 임지운 모자는 적지않게 놀랐다.

『아, 바로 여기 찾아왔던 그 여자가 허형의……』

『아, 하하……바로 그 여잡니다.』

허정욱은 유쾌한 대답을 했다.

『어쩌면……?』

부인도 반색을 하며,

『아이구, 그럴 줄이야 또 누가 알았소? 참말 세상이란 넓고도 좁지!』

『하하하……』

허정욱은 유쾌히 웃으며,『임형, 춘부장께 다시 한 번 주례를 부탁하러 오게 될는지 모르겠소. 그때는 좀 잘 부탁하오. 하하하……』

그리면서 허정욱은 권하는 대로 차를 마셨다.

『허형,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잘 모르지만 형의 다행한 앞날을 위하여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서로 축복해 가면서 살아 봅시다. 사정이란 별것 없고……내일 결혼식장에서 읽으려던 축문을 하루 앞서서 읽어 버리고 말았지요.』

『허형, 실로 통쾌한 거사입니다. 허형이 아니고는 감히 하지 못할……정의는 마침내 승리를 했었군요! 하하하……』

『하하하……』

두 사람은 실로 통쾌한 웃음을 폭발시켰다.

『글쎄 얘야, 어떻게나 얌전한 색신지, 내가 한 눈에 홀딱 반해 버렸단다.』

『아하하……사모님 감사합니다요!』

허정욱은 정말 고마워서 굽실하고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벅작벅작 긁었다.

『어머니는 남의 며느리만 칭찬 마시고 자기 며느리도 좀 칭찬해 주세요.』

그래서 또 일동은 한 바탕 명랑하게 웃었다.

『글쎄 석란일 나쁘다는 거냐? 그렇지만 정말로 얌전한 색시더라. 그런 며느리를 한 번 맞아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더라.』

『아이구, 사모님, 이거 큰일났읍니다.』

허정욱은 그저 기쁘기만 하다.

『생김새나 마음씨가 어찌나 오순도순한지……』

『아이, 어머니 석란의 앞에서는 정말 그런 말씀 좀 말아 주세요.』

『애두 내가 뭐 어린앤 줄 아느냐?』

그래서 또 웃었다.

『허형, 어쨌든 한 턱 잘 내야겠소. 어머니 눈에 그만큼이나 든 분이면 아마도 서울 장안에서는 최상급일 테니까요.』

『하지요. 자아, 나갑시다. 임형의 전축(前祝)을 겸해서……』

허정욱은 훌쩍 일어썼다.

『아이구, 집에선 술을 못 자시나?』

『아닙니다, 사모님. 임형이 오늘 다소 바쁘겠지만 장안의 술을 좀 마셔야겠읍니다.』

허정욱은 임지운의 팔을 끌고 나가자 기다리고 있는 지이프차로 밀어 넣었다.

그날밤, 지운은 통행금지 시간이 거의 가까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탁 놓고 우쭐한 기쁨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는 허중령을 상대로 술 추념을 하다가 헤어진 지운은 석란과 만나 내일의 준비를 지장없이 타협하고 식장 관계를 비롯한 기타 잔 자부런한 사무처리를 완료하였다.

『오늘은 일찌감치 자거라.』

『네.』

불을 끈 안방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소리가 중얼중얼 거렸다.

지운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고 웃을 벗었다. 잠옷으로 갈아 입고 일단 자리에 들어 보았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혼식은 될 수 있는대로 검소하게 하자는 것이 지운의 의사였다. 그러나 그러한 지운의 의사를 무시하고 마담로우즈는 대단한 호화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일 굶는 한이 있어도 일생에 단 한 번인 결혼식만은 호화롭게 하는 것이 석란의 추억을 위해서도 행복된 일이야.』

행복의 기준을 마담로우즈는 그런데다 두고 결혼식 비용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동래온천으로 하라고 마담은 벌써부터 연줄을 더듬어 호텔까지 정해 놓았다고 했다.

『배가 고프면 자존심으로 요기할 생각은 아예 말고 쌀먹을 생각을 해요.』

유민호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마담은 사위에게 전했다.

지운도 웃고 석란도 웃었다. 그러나 지운의 웃음에는 비판이 있었으나 석란의 웃음에는 등감이 있는 것 같았다.

지운의 마음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마음의 틈사리를 타서 창경원 연못가의 애인을 후딱 생각했다. 사람 하나 없는 고적한 절간에서 밥 한 그릇, 산나물 한 접시를 차려 놓은 결혼식의 주인공이 지운은 갑자기 되어 보고 싶었다.

그러한 쓸쓸하고도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가지고 돌아온 지운이었다.

지나간 날, 중학교 교장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다가 똥이 무서워서 비키는 줄 아느냐는 한 마디를 남겨놓고 학교를 사직하고 나온 지운이었다. 그리고 마담로우즈의 이 한마디는 석란의 동감의 미소와 함께 그러한 임 지운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지운은 잠자리에 누워서 석란의 그러한 미소가 결코 동감의 그것이 아니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빌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야말로 행복해야만 되고 또한 행복할 수도 있는 거야.

석란 알아 듣겠어?』

석란의 환영을 눈앞에 그리며 지운은 소리를 내어 가만히 물어 보았다.

그러나 천장 위에 그림 그려진 석란의 얼굴은 지운의 환영 속에서 언제까지나 정체 불명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운은 머리를 한두 번 휙휙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으로 걸어가서 유리문을 열고 눈앞에 주르르 꽂힌 「세계문화사 대계」제 삼 권을 빼들었다.

「愛人[애인]」의 두 글자가 씌어진 편지 한 장은 그냥 타다 남은 파란 손수건에 싸여져 있었다.

저번 말라빠진 은행잎과 꽃봉투를 태우던 이튿 날 아침 이 편지와 손수건마저 불살러 버리려고 했으나 지운의 예술가적인 꿈 하나가 끝끝내 고집을 하여 그냥 그대로 꽃아 두었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가난하고 약했다! 내 마음처럼 가난하고 약했다!』

지운은 다시 편지를 손수건에 싸서 책갈피에 끼워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임지운과 이석란의 결혼식은 마담로우즈의 화려한 준비 밑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新婚旅行[신혼여행] 그날밤· 여덟 시 반 차로 지운과 석란은 부산행 이등객실에 몸을 싣고 서울역을 떠났다.

『오늘 아침에 전보를 쳤으니까 내일 아침 들어 닿기만 하면 호텔 준비는 다 돼 있을 거다.』

차가 떠날 무렵, 마담로우즈는 상기한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임교수 내외를 비롯하여 전송 나온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차에서 내렸는데 마담로우즈만이 아직 내리지 않고 이것 저것 주문이 많다.

『아이, 어머니, 어서 내리세요. 누굴 어린애인 줄 아슈? 호텔을 못 정하면 길가에서라도 잔다는 밖에……』

그 말이 웃으워서 옆에 앉은 승객들이 빙글빙글 웃었다.『글쎄 문전걸식을 해도 둘이는 좋을 테지만 객지에 나가면 불편한 것이 좀 많은 줄 아니?』

동래 청운각 호텔의 마담과는 부산 피난 시절부터 안면이 많은 석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그 처럼 어린애 취급만 자꾸하니까 내 성장이 자꾸만 늦어지는 거야요.』

그래서 지운도 빙그레 웃었다.

『네가 어린애지. 무얼 안다고?』

『글쎄 나도 다 알긴 알고 있어요.』

그 말에 마담로우즈는 후딱 생각이 난 듯이 석란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무엇인가 속삭이면서 모녀가 킥킥 웃었다.

『글쎄 다 안다는 밖에……』

석란이가 얼굴을 붉히며 마담의 가슴을 떠밀어 냈다.

『아이고, 갓난애는 배꼽으로 낳는다고 떠들던 것이 언젠데……』

어지간한 마담도 그 말만은 목소리를 낮추어 했다.

『글쎄, 어머니, 빨리 내리세요!』

석란이가 뾰르릉 소리를 쳤다.

그러나 마담로우즈는 유쾌한 듯이 빙글빙글 웃고 섰다가,

『미스터 지운, 책임이 중해요.』

했다. 지운은 웃었다.

『아까 주례 선생 앞에서 뭐라고 했지? 내가 다 들었지. 일생동안 석란을 단 한 번이라도 구박만 해 봐라. 내 가만 안 있을란다!』

익살맞은 웃음과 함께 주먹 하나를 불끈 쥐어보이며 마담은 부산말을 일부러 썼다.

『네네, 잘 알아 모셨읍니다.』

지운도 유쾌히 웃으며 머리를 끄덕 숙여 보였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얕잡아 보았다간 코 다쳐! 내 성미 알지?』

『네네, 욕하고 싶을 때는 칭찬을 하고, 때리고 싶을 때는 쓸어 드리겠읍니다.』

그말에 마담로우즈는 깔깔깔깔 웃어대며,

『아이고 나이찬 신랑은 징그러워!』

했다.

『마담, 인제 그만해 두고 내려가세요.』

『마담이 뭐야? 어머니라고 그래 봐.』『아, 참 어머니! 다소 어색한 걸.』

지운은 머리를 긁었다. 석란도 웃고 마담도 웃었다.

『오늘부터 석란에 대한 주권(主權)은 제게로 옮아 왔으니까, 어머니의 여러 가지 주문은 단지 참고 재료 밖에 안되는 줄을 아셔야합니다. 』

그때 석란이가 냉큼 나서며,

『아이 내가 무슨 물건인 줄 아시나 봐? 주권 운운은 싫어. 어디가지나 부부는 동권이야.』

그러는데 종이 울리며 마담은 서서히 차에서 내렸다.

어수선한 차속 안이다.

신혼 여행답게 전등이 좀더 찬란했으면 하였다. 짐이라고는 선반에 올려 놓은 트렁크 하나 보스턴 백 하나 ── 트렁크에는 갈아 입을 옷벌이 들어 있고 보스턴백에는 마담 로우즈가 꾹꾹 눌러가면서 넣어준 과자류와 깡통류가 하나 가뜩 들어 있었다.

창가에 석란이가 앉았고 그 옆에 지운이가 앉았다.

『아까 축사를 한 무슨 중령이 있었죠?』

『아, 허중령……일선 연대장이야.』

『쑥이예요.』

『왜?』

『결혼은 두 사람이서 하는데 신부에 대해서는 이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신랑만 자꾸 칭찬 하잖아요?』

『아, 하하……신부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으니까 그랬겠지. 왜 서운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사람이란 다소 세련될 필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이예요.』

『지나치게 세련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편이 낫지. 알고 보면 진실한 사람이야.』

『아무리 진실해도 그런 위인 난 싫어.』

지운은 귀여운 듯이 석란의 다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럼 나는 어때?……』

하고, 무슨 감미로운 대답이라도 기대하는 심정으로 석란의 귀에다 속삭이었다.

석란은 힐끗 맞은 편에 앉은 중년 부부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무던하죠.』

했다.

『무던하다고……다소 서운한 걸.』그러면서 지운은 두 사람의 무릎을 덮은 흰 바탕에다 누런 줄이 굵다라니 뻗친 털 담요 밑으로 석란의 손가락 세 낱을 걸핏 쥐어짰다.

『무던하다는 말은 칠 팔 십점 밖에 안된다는 말인데 그래, 이래도 무던 밖에 안해?』

『아야야……백 점……백 이십 점……』

『그럼 그렇지!』

지운은 싱긋이 웃었다.

『막 폭력으로 애정을 강요하네요. 결혼식을 치렀다고, 막 주권을 부리고 폭력을 사용하고…….』

석란은 곱게 눈흘김을 해왔다.

『애정의 채찍질! 폭력은 일종의 애정을 의미하는 거야. 애정없는 곳에 폭력은 있을 수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괴변이예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여성의 애정에다 냉수를 끼얹는 효과 밖에 없다는 걸 아셔야 해요. 십년 묵은 애정도 단번에 식어버릴 거예요. 그래서 내가 뭐다고 했잖았어요?』

『뭐라고?』

『결혼조건 제 일 조에 뭐라고 했었죠?』

『아, 그것 말이야?』

『어디 한 번 외워 보세요.』

『아내를 절대로 때리지 말 것 ──』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 그래. 난 또 잊어먹으셨다고?』

지운의 손길이 또 석란의 세 손가락을 확대했다.

『아야야……그렇지만 그만한 폭력은 허용해 드리지. 감미로운 폭력이니까.』

담요 밑에서 실행되는 손가락과 손가락의 애정의 유희를 맞은편 중년 신사 부부도 물론 알길이 없었다. 그러한 비밀의 열락(悅樂)을 싣고 기차는 지금 광막한 황야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기차는 무슨 뚜렷한 의욕을 가진 거대한 동물인양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의 창조를 위하여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소란스럽던 기차의 소음이 이제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둘이의 다소 피곤한 몸을 상쾌하게 주물어 주는 것 같았다.

『손 좀 펴 보세요.』

석란은 쿳션에 기대인 채 두 눈을 가만히 감아버렸다. 남이 보면 피곤해서 그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기실 담요 밑에서는 손가락과 손가락이 감미로운 애정의 말을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지운이가 편 손바닥 위에서 석란의 손가락이 낙서(落書)를 시작했다. 그 는 한 자 한 자를 모아 보니,

『결혼 조건 제 이 조는 뭐랬죠?』

하는 의식을 구성하고 있었다.

지운은 맞은편 중년 신사의 얼굴을 후딱 바라보고 나서 행복한 미소 하나를 입가에 지으며 석란의 지극히 말랑말랑한 손길을 자기 무릎 위에 펴 놓았다. 그리고는 석란의 본을 따서 사랑의 낙서를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 씩은 꼭꼭 안아 드리겠읍니다. 석란부인!』

석란은 킥하고 웃었다. 「석란 부인」이라는 마지막 한 마디가 자기 감정과는 통히 어울리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벌써 부인이 됐어? 인생의 계단 하나를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멋도 모르고 훌쩍 뛰어오른 것 같은 허무하고도 맹랑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실 부인임에는 틀림 없다고, 낯설어하는 감정을 석란은 무마하는 것이다.

석란은 또 썼다.

『오늘은 언제 안아 주실 테야요?』

지운은 또 희답을 썼다.

『큰일났소. 안아 드릴 적당한 장소가 없군요.』

석란은 또 썼다.

『첫날부터 이행을 못하면 어떻게요? 그 책임은 오로지 남편되는 사람에게 있을 거예요.』

지운은 또 희답을 썼다.

『불가항력은 책임의 소재를 추궁할 수 없는 것이요.』

석란은 또 썼다.

『열 두시 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더 남았으니까, 벌써부터 불가항력으로 돌린다는 것은 책임의 회피가 아니면 성의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예요. 낙심 말고 잘 연구해 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지운은 썼다.

『부인, 정말 큰일났소. 오늘만은 부인의 관용을 빌어야겠소.』

석란은 또 썼다.

『안돼요. 절대로 안돼요. 첫날부터 이렇게 되면 후일이 염려돼요. 그것은 오로지 남편되는 사람의 무능을 폭로하는 것이니까.』

지운은 또 썼다.

『부인, 정말 한 번만 용서하시요. 소설 쓰는 능력은 가졌지만 이 수많은눈동자 앞에서 부인을 안아 드릴 용기는 불행히도 못 가졌읍니다.』

석란은 또 썼다.

『서양 사람들은 한길가에서도 포옹을 한다는데, 그만한 용기도 없다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치부를 하겠어요.』

지운은 또 받아썼다.

『부인, 불행히도 저는 된장찌개에 김치 깍두기를 먹고 자란 한국인이 올시다.』

석란은 또 썼다.

『정말 용기가 없다면 조약 위반이니, 당장에 이혼을 해요.』

지운은 또 썼다.

『이거 정말 야단났소. 포옹 대신에 악수나 하면서 어디 좀 천천히 기회를 타 봅시다.』

그러면서 지운은 석란의 손을 오그라지도록 꼭 쥐어 주었다.

마담로우즈가 정성껏 넣어준 맥주 깡통을 두개 따서 지운은 마셨고 석란은 오물오물 과와 초콜렛을 혀끝으로 녹이고 있었다.

대전이 거의 가까운 무렵이었다. 승객들은 태반이 가느스럼히 졸고 있었고 맞은편 중신사도 눈을 감고 부인의 턱을 어깨로 받쳐 주고 있었다.

『정주 언니, 종시 안 왔어요. 청첩은 분명히 전했는데.』

『안 오는 것이 당연하겠지.』

『동무 하나 잃어 버리고 말았어요.』

지운은 대답을 않고 깡통 하나를 또 땄다.

『아, 참 나 야단 난 것이 하나 있어요.』

석란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뭔데?』

『어제까지는 선생님이라고 불러 왔는데 오늘부터는 뭐라고 불러야 해요?

우리말 가운데는 적당한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이것은 벌써부터 작가인 지운에게도 큰 부담의 하나로 되어 있는 문제였다. 소설을 쓸적마다 부닥치는 문제이다. 그래서 뭐라고 호칭을 않고 그대로 어물어물 넘겨 버려야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외국 사람들은 남편의 성이나 이름을 부르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습성이 통 없잖아요? 지운씨 하고 부르면 남 같고, 지운 하고 부르면 어린애 같고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가끔 있으나 그건 구역질이 나고, 그렇다고 미스터 임이나 미스터지운 하면 빠다 냄새가 나서 싱겁고 당신이라고 부르면 늙은이들 같아서 정떨어지고……통 적당한 호칭이 없어서 선뜻선뜻말을 못 붙이겠어요. 정말 큰일났어!』

석란은 그러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어리광을 부린다.

『뭐라고 불러요?』

『참 딱한 노릇이야 작품을 쓸 때마다 부딪치는 문젠데……』

『나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안돼. 그건 내 편에서 싫어.』

『나보다 지식이 많고 나이도 위니까……』

『글쎄 싫다니까……』

『그럼 지운씨 해요?』

『아이고, 서먹서먹이야.』

그때, 석란은 돌연 킥킥 혼자서 웃어대다가 지운의 귀에 입을 대고 어린애를 부르듯이 낮은 소리로,

『지운아!』

했다.

『으아, 하하핫……』

지운의 웃음 소리가 커서 졸고 있던 중년 신사는 눈을 번쩍 떴고 석란은 허리가 끊어지게 깔깔깔깔 웃어댔다.

웃어대다가 이번에는 후딱 웃음을 거두고 아주 엄숙한 표정과 음성을 가지고, 다소 코에 걸린 능글맞은 소리를 중년 부인네들처럼 내면서,

『여보오!』

했다.

『으와……징그러워!』

지운은 손으로 귓전을 빽빽 씻어 내면서,

『적당한 호칭이 없으니까, 결국 야단났어. 이것도 하나의 민족적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도 어물어물 해 버릴 수 밖에……』

그러는데 다시금 석란의 익살맞은 목소리가 귀밑에서,

『당, 신』

하고, 악센트를 넣어서 부르면서 또 깔깔 웃었다.

『아이고, 인젠 손을 들었어! 여보고, 당신이고 다 집어치우고 우리 열심히 사랑해서 실속만 채우면 될테니까……』

『군더더기는 다 떼 버리고……』

『암 그렇지!』

지운은 명랑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 웃으워요.』유과를 씹고 있던 석란이가 밑도 끝도 없이 톡하고 뱉는 말이다.

『뭐가 그리 웃으워?』

총알처럼 흐르는 창밖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지운이가 시선을 옮겼다.

『웃읍지 않고 뭐예요? 듣도 보도 못하던 생면 부지의 남녀가 만나서 변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생을 같이 살다가 죽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곰곰히 생각해 봄 참 대담 무쌍해요.』

대담 무쌍하다는 말이 웃으워서 지운도 처음에는 웃었으나 다시 한번 씹어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실로 원숭이의 호도 까기와도 같은 일종의 모험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석란의 결혼관을 내심으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긍은 하면서도 자기 결혼에 대하여 그러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지운의 마음을 적지않게 쓸쓸하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인생의 한 모험일런지 모르지만 인간적인 의미에서 서로가 다 성실만 하다면 대담무쌍하게 생각키우던 그 모험의 고개를 다사로운 이해와 즐거움을 가지고넘을 수도 있는 것이 또한 결혼 생활의 한 속성(屬性)인지도 모르지. 우리의 조상들이 다그렇게 살아 왔으니까 말이야.』

사실 지운은 자기의 결혼 생활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온갖 성실을 다할 것을 깊이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야단 난 것이 하나 있어요. 서로가 다 일시에 싫어지면 모르지만 한 편만이 싫어지고 한편은 그냥 좋다는 경우엔 어떻게 해요.』

『그것 참 큰일인 걸.』

『백년해로의 맹세는 했는데……』

『그러니까 그건 말하자면 싫어지지 말자는 맹세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싫어지지 말자고 해서 싫어지지 않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걱정이예요.』

『석란의 마음, 다소 위험한 걸!』

지운은 불현 듯 정주를 생각했다. 채 정주의 차거운 이성과 석란과 자기의 결혼을 위험시하던 기억을 지운은 새롭게하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 보다도 앞날의 자기 자신을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요.』

이러한 의구심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단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석란이가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풍경을 조그만 음영(陰影)도 남기지 않고 개방해 버리는 석란의 습성이 문제일 뿐이라고 지운은 석란의 그러한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며, 앞날은 앞날이고, 오늘은 오늘이야. 앞날의 의구심을 가지고 오늘의 행복감을 위축시킬 필요는 없어. 이건 나보다도, 석란의 이론일 텐데……

『물론!』

그러는데 객실 안의 전등이 껌벅하고 꺼졌다.

그것은 대전을 출발한지 오분도 못되어서였다. 대전서 대구까지는 소위 위험 지대라 해서 기차는 온통 불을 끄고 달렸다.

캄캄한 차간 안에서 처음에는 어수선하던 승객들도 이윽고 조용해지며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고는 취객도 있었다.

지운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쳐 석란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머리에서부터 이마 눈 코, 입술, 턱……이렇게 하나 하나씩 더듬어 내려오는 지운의 손길을 석란은 부여잡고 자기 볼에다 가만히 부벼보았다. 그리고는 지운의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댔다.

지운은 이윽고 석란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자연스런 포오즈로 석란은 안기워 왔다. 입술도 왔다.

결혼 조건 제 이 조의 이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