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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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魚[인어]와 유모레스크[편집]

이튿날 아침, 부산역에서 내렸을 때, 석란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심장이 약한 석란은 잠을 자지 못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마음의 안정을 잃는 적이 많다. 둘이서 이내 택시를 잡아타고 동래 온천에 도착한 것은 늦조반에 알맞은 아홉 시 조금 전이었다.

청운각 호텔은 이 온천 한 복판에 자리를 잡은 이층 양옥이었다. 이층에는 양지바른 베란다가 있고 정원에는 감나무, 이깔나무, 사철나무, 소나무, 노가 지나무 등 속이 조그만 연못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고기 한 마리 없는 연못에는 새파랗게 이끼낀 물이 절반 쯤 차있었다.

『어서 좀 들어오시오. 어머니는 여전하신가?』

안주인은 수선을 떨면서 두 사람을 이층으로 인도하였다. 마담로우즈와 동년배인 두적 칼칼한 모습을 가진 여인이었다.

『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잘 드려야만 맛나는 것 많이 주신다고, 기차가 떠날 무력끼지 어머니는 신신 당부하였어요.』

거짓말이라고, 지운은 싱긋이 웃었다. 그러나 이만한 대꾸 쯤 할 수 있는 석란을 지운은 현실적인 의미에서 도리어 탐탁하게 생각하였다.

『오, 호호홋……뉘 집 따님이라고 내가 푸대접을 할라고? 여전히 술도 잘 먹고 계도 많이 하겠지?』

『아주머님께서 적당히 생각해 두심 돼요. 요즈음에는 몸이 나서 술은 좀 삼간다지만….』

『오, 몸이 났군 그래. 팔자 좋은 양반은 다르지.』

이층 삼호실 이 이호텔에서는 제일로 넓고 깨끗했다. 그것은 남쪽과 동쪽이 탁 터진 모진방이었다. 십 조 넓이는 충분히 되었다. 동쪽 창 밑에,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와 반대편 서쪽에는 의상, 소파, 소탁자 걸상, 그리고 남쪽 창가에 깨끗이 정돈( )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하루 온종일 볕이 드는 방이야. 모모하는 고관대작들만 모시던 방인 줄로만 알아요.』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소학생처럼 정중한 인사를 석란은 일부러 했다.

그래서 마담은 자지러들게 웃으며,

『어머니를 닮아서 녹녹지 않네요!』

그러는데 석란은 지운을 소개하며

『이이가 바로 그이예요.』『처음 뵙겠읍니다. 임 지운입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점잖은 분일까? 언니는 사위도 잘 맞았지. 소설을 쓴다면서?』

『아, 하하……』

지운은 머리를 긁었다.

『그러지 않아도 소설가가 오신다고, 우리 정임(貞妊)이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 )오. 저도 인제 여류소설가가 된다고요.』

『아, 따님이십니까.』

『네, 부산대학 삼학년이라오. 지금은 학교에 가고 없지만 선생님이 여기 계실 동안만( )라도 잘 좀 지도해 주십시요.』

『그렇지만 아주머니 너무 기대를 크게 가지심 안돼요. 아직 올챙이 작가니까, 인제 개구리가 돼봐야만 알아요.』

그래서 셋은 유쾌히 웃었다.

『자아, 그럼 목욕이나 하시고, 어서 조반을 자셔야지. 얼마나 시장들 하실까? 가족탕이 지금 비어 있으니까, 마침 잘되셨오. 자아, 어서 옷들을 훨훨 벗고, 원앙처럼 다정히 한탕하고 올라오시오.』

그 순간, 석란은 표정없는 얼굴을 일부러 지으며 얼른 지운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킥하고 둘이서 웃었다.

호텔 마담은 석란과 지운이가 마주 쳐다보며 쿡쿡웃는 양을 보더니만,

『웃기들은……그래서 신혼 여행이 좋다는 거고, 가족탕이 새가 나는 건데…… 처음엔 좀 서먹서먹 할런지 모르지만 한 두번 드나들어 보면…….』

『아이 싫어요, 아주머니!』

석란은 얼굴을 붉혔다.

『왜 부끄러워서…….』

『아주머닌 누굴 아담과 이븐줄 아시나봐?』

『그게 무슨 소리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따로따로 들어 갈 수 밖에 없지. 그렇지만 이담에 후회는 하지 말아요. 가족탕에도 못 들어가 본 신혼 여행을 후회할 시기가 꼭 올테니까 말이야. 어쨌든 시장할 테니까 빨리 들어갔다 나와서 식당으로 내려와요.』

『아, 이건 갖고 내려가세요. 어머니가 보낸 선물이예요.』

석란은 보스턴 백에서 고급과자 두 상자를 꺼내 마담에게 주었다.

『아이고, 언니도 인사성도 밝지!』

마담은 선물을 받아 쥐며,

『조반을 먹고 내려와서 놀아요, 심심할 리도 없겠지만…….』『네.』

『마침 서울서 정임이의 약혼자도 내려와 있으니까, 동무가 될거야.』

『아, 약혼을 했어요?』

『다소 이르긴 하지만 상대편이 하도 열심이어서 그래 해버리고 말았지.』

『몇 살이에요.』

『스물 둘이지만 어리디 어려서…… 그렇지만 여자란 손이 빨릴 무렵에 집어 치워야지 어물어물하다가 혼기를 놓쳐 버리는 날에는 구어도 못 먹고……』

『아주머니도……누가 뭐 생선인가요? 구어 먹고 지져먹고…….』

『오, 호호홋…….』

명랑한 웃음를 남겨놓고 마담은 내려갔다.

『어딘가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데가 있어요.』

『어쨌든 유탁한 분이야. 자아 먼저 탕에 들어가요.』

지운은 저고리를 벗어 걸면서,

『그 동안에 내 살림살이를 멋지게 차려 놓을테니까 ——』

그러면서 우선 트렁크을 열고 석란의 노랑 줄과 검은 줄이 쭉쭉 뻗친 파자마를 꺼내 소파 위에 던져 주었다.

『싫어. 난 나중에 들어갈테야.』

『여기는 호텔이니까, 서양식을 본따서 여존 남비의 의를 채려야 하는 거야. 마담 풀리이즈! (부인, 자아, 어서)……』

지운은 서양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고 손하나로 파자마를 입기를 권했다.

『그럼 나 갈아 입을 때까지 눈을 꼭 감고 있어요.』

『오우케이!』

지운은 눈을 감고 석란의 앞에 군대식으로 딱 차렷을 했다.

『여기 서 그 처럼 마주 서 있음 안돼요. 눈을 뜰 염려가 다분히 있으니까, 저리 저리 창가로 가세요.』

『아니올시다. 눈만 감으랬으니까, 눈만 감고 이대로 서 있겠읍니다.』

『노우 베리 데인져러스! (아냐요. 대단히 위험해요.)……』

그려면서 석란은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지운의 몸을 뺑 돌려 세워 가지고 들창가로 쭉쭉밀고 갔다.

『이렇게 창밖을 향해 서서……뒤는 절대로 돌아 보면 안돼요. 신사와 숙녀의 약속이예요.』

『싫습니다. 나는 신사가 되고 싶지 않읍니다.』

말로는 그렇게 항거를 하였으나 석란이가 소파 앞으로 돌아와 파자마로 완전히 갈아입을 때까지 지운은 끝끝내 신사가 되어 있었다.

멀리 금강원 마루턱 위에 헬리곱터가 한 대 한가스럽게 떠 있었다.

석란의 새하얀 발꿈치가 새파란 고무 슬리퍼를 끌며 객실 몇개를 지나 층층대를 밑 층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밤잠을 못잔 탓인지 머리가 좀 아팠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계단 하나를 잘못 밟아 한두번 석란의 두다리가 후둘거렸으나 욕탕에 들어가서 심신의 피로를 흐뭇하게 풀어볼 생각을 하니 마음은 지극히 상쾌하였다.

객 하나가 젖은 타월을 들고 석란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층계를 올라오는 것과 마주쳤다.

조용한 온천장의 늦은 아침녘이다. 밑층으로 내려서니 바이얼린 소리는 좀 더 분명히 들려왔다. 복도가 세 갈래로 나눠져 있어서 마담의 방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 석란은 모른다. 마담을 만나 석란은 뇌신 한 봉을 사다 달랠 셈으로,

『저 주인 아주머니는 어느 방에 계시죠?』

하고, 오른편 쪽 식당을 나서는 보이에게 석란은 물었다.

『아, 저기 마주 보이는 방 바로 옆입니다』

석란은 가리켜 주는대로 마담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바이얼린 소리가 흘려나오는 바로 옆 방이었다.

『아주머니, 계셔요?』

방문 밖에서 석란은 노크를 했다. 그랬더니 옆 방에서 들리던 바이얼린 소리가 얼른 멈추며 이윽고 문이 안으로부터 열려 졌다. 이 두 방은 안에서 미닫이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굴 찾으십니까?』

문을 열고 내다본 것은 스물 너댓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층 삼 호실에 들은 사람인데요. 아주머니 계심 뇌신 좀 사다 주십사 하고요…

그러면서 석란이가 불현 듯 시선을 드는데 웃음을 띄인 청년의 얼굴이 석란을 반가히 맞이하며,』

『아, 언젠가 뵈인 분이 아니십니까?』

했다.

『누구신지?』

어디선가 분명히 본듯 싶은 모습이었으나 석란의 기억은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 청년은 와이샤쓰바람으로 한손에 바이얼린을 들고 있었다.

『아, 생각이 잘 안 나실지도 모르겠읍니다. 들어오세요.』『아주머니 어디 나가셨어요?』

『삼 호실 손님을 위하여 특별 요리 차리신다고, 손수 부엌에 나가셨답니다. 어서 좀 들어오세요.』

『아냐요. 나 머리가 좀 아파서.』

『뇌신은 제게도 있읍니다. 들어오셔서 한 봉 자시지요.』

『그러세요? 그럼 죄송하지만……』

권하는대로 석란은 안으로 들어섰다.

팔 조나 되는 넓은 온돌방이었다. 석란은 청년을 따라 열려진 미닫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책이 꽂힌 테이블이 보이고 그 옆으로 칠흑의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마담의 딸 정임의 방임에 틀림 없었고 이 청년이 바로 서울서 내려왔다는 그의 약혼자일 것이다.

『저이를 어디서 봤을까?』

청년이 피아노 옆에 놓인 트렁크 속에서 뇌신을 찾노라고 부스럭거리고 있는 동안 석란은 과거의 기억을 열심히 더듬고 있었다. 한길가나 다방 같은 데서 동무들의 소개로 한두번 인사를 바꾼 청년은 대단히 많다.

그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석란은 생각하며 특히 음악을 하는 그룹의 얼굴을 하나씩 골라보았으나 기억은 통 터져나오지 않았다.

청년은 무척 친절하고 부드러운 데가 있어 보였다. 늠늠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손수 유리컵에다 물을 따라 가지고 내려와서 뇌신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석란은 뇌신을 먹고 나서,

『어디서 뵈었어요?』

하며 킥 웃었다.

청년도 빙그레 웃으면서 석란의, 조금도 미안해 할 줄 모르는 명랑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다소 모욕감을 느끼지만 부인처럼 어여쁜 여성 앞에서는 당연히 참아야 하겠읍니다.』

그말이 웃으워서 석란은 또 한번 킥하고 웃었다.

『제가 부인인 줄은 어떻게 아세요?』

『신혼 여행을 오셨으면 부인이시겠지요.』

『아주머니한테 들으셨어요?』

석란의 한 쪽 손이 피아노의 건반을 한두 번 똥땅똥당 치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청년은 거기 대한 대답이 없이 석란의 얼굴을 쏘는 듯한 눈동자로바라보며,

『사람이 예쁘다는건 좋은 일이예요.』

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다.

『무슨 말이예요?』

건반에서 석란은 시선을 들었다.』

『부인이 만일 예쁘게 생기지 않았던들 부인은 벌써 따귀 한 대 쯤 얻어 맞았을런지 몰랐으니까요.』

『따귀를요? 누구한테 말예요?』

『저한테……』

『어마?』

석란은 눈이 둥그래지며,

『내가 왜 따귀를 얻어 맞아요?』

그러나 청년은 싱글싱글 웃고만 섰다가,

『부인, 피아노 치세요?』

『자기 대답은 없이…… 나도 대답 안할 테야요.』

석란은 뺑하니 피아노 옆을 떠났다. 피아노 옆을 떠나 홱 얼굴을 돌리는데 테이블 위에 세워 놓은 여자의 사진틀 하나가 시야에 뛰어들었다.

아직 소녀의 티를 채 벗지 못한 모습이었으나 애련하게 고운 보드라운 정취가 풍기는 얼굴이었다. 이것이 이 청년의 약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석란은 갑자기 이유 모를 질투를 가볍게 느끼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왜 비웃읍니까? 부인보다 예쁘지 못해서 그러십니까?』

청년의 얼굴은 언제보나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지나치게 여유있는 태도에 석란은 일종의 압력을 느끼며 강렬한 반발심이 홱 가슴속에 뻗쳐 올랐다.

『실례예요! 남의 얼굴을 가지고 이쁘다 밉다하는 건…….』

『아니올시다. 나는 부인의 얼굴을 예쁘다고 그랬을 망정 밉다는 말을 한 기억은 전혀 없읍니다.』

『왜 남하고 자꾸만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가 아닙니다. 냉정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저 사진의 여성은 확실히 부인의 비웃음을 살만한 가치 밖에는 없으니까요.』

대단히 모호한 대답이었다. 말귀로 보아서는 석란이가 더 예쁘다는 결론 같기도 했지만 석란의 비웃음이 일종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대로 석란의 용모를 내려깎는 말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실례 막심이예요!』

석란은 손바닥 하나를 활짝 펼쳐 가지고 고음부 건반을 한꺼번에 꽝하고 눌러보이며 홱 돌아서 온돌방으로 깡충깡충 걸어나갔다.

『실례가 됐으면 용서하시요. 나는 다만 부인의 꽃다운 미모를 존경했을 따름이니까요.』

그말에 석란은 핸들을 쥐고 홱 돌아서면서,

『꽃다운 미모는 그 사진틀에 들어 있지 않아요.』

했다. 청년은 석란의 그러한 감정을 태연히 무시하고,

『심심하시거든 또 놀러 내려오십시요. 내가 지닌 온갖 성의를 가지고 부인을 환대하겠읍니다.』

『사진틀이나 열심히 들여다보고 계세요.』

『태양 앞에 달빛처럼 부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 사진은 이미 빛을 잃었답니다.』

『아이 누굴 시골뜨긴 줄 아셔? 에, 에! 다!』

어린애처럼 석란은 혀끝을 한 번 삐쭉 빼보이고, 나서 문을 탁 열고 나갔다.

가족탕은 거기서 토일릿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탈의장으로 들어서자 석란은 옷을 훨훨 벗고 거울 앞에서 사지를 한 번 쭉 펴본 후에 욕탕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을 쫘악 쫘악 몇 바가지 끼얹고 탕안으로 들어가서 또 사지를 쭉 폈다.

심신이 다 상쾌하다. 피로가 한꺼번에 확 풀리는 것 같은 흐뭇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이얼린 소리가 또 흘러 나왔다. 유모레스크였다.

『참 저이를 어디서 보았을까?』

석란은 다시금 의혹에 사로잡히며 다소 뻔뻔스럽기는 했으나 어딘가 지극히 여유를 가진 늠늠한 기품에 호기심 같은 것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여자란 자기의 용모를 칭찬해 주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나 봐.』

무슨 진리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석란은 유쾌하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상쾌했다. 주위의 모든 물체가 자기를 위해서 생겨났고 자기를 위해서 찬미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태양 앞에 달빛 처럼 빛을 잃은 아가씨! 후훗 ——』

그 한 마디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우선 참말로 들어두는 것이 생리적으로 기분이 좋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들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석란은 이 의혹의 인물인 미지의 청년을 하나의 ( )강체로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여자 교제가 상당히 많은 사람이야.』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태반이 석란을 처음으로 대할 때 석란의 시선에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으나 이 청년에게는 그것이 없다. 뻔뻔스러울 만큼 태연했고 자연스러울만큼 자기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어딘가 석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연령의 관계도 있겠지만 지운은 지나치게 점잖았다. 지운에게도 물론 재미 있는데가 많지만 그 재미가 언제나 고요했고 또 언제나 비판적이어서 마음을 탁 놓고 그 재미에 열중하지를 않았다. 재미는 중도에서 꼬리를 잘리운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다가 흐지부지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인어(人魚)처럼 탕안을 비잉 비잉 돌며 유모레스크의 경쾌하고도 흥겨운 멜로디에 저도 모르게,

『라라, 라라, 라라, 라라, 라라……』

하고 기분을 맞추었다, 그러다가도 얼른 생각이 나면,

『도대체 누굴까……』

하는 의혹에 석란은 연방 사로잡힌다.

그것은 실로 불행한 의혹이었다. 그 의혹이 풀리지 않는 한 석란의 머리에서 청년의 모습과 함께 청년이 뱉은 유혹적인 찬사를 떼어 버릴 수는 도저히 없다.

『내 따귀를 때린다고 했었지?』

자기가 따귀를 얻어 맞을 만한 깊은 관계가 청년 사이에 있을 성싶지는 않았다.

『확실히 낯이 익는데……』

석란은 점점 청년에게 대해서 호기심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만나면 꼭 물어 봐야지.』

저 편만이 자기를 알고 이편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적지 않게 불쾌한 노릇이다. 그러한 불쾌감과 호기심의 노예가 되어 훌쩍 일어서서 탕을 나서려는 데 현기증이 홱 왔다.

심장이 다소 약한 탓으로 목욕을 할 때면 이전에도 가끔 느끼는 현기증이었다. 그래서 대리석 테두리에 상반신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 있노라니까,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석란은 다소 공포를 느끼면서 얼른 탕 밖으로 나와 찬물을 홱홱 끼얹으며 비누질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