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31장
不運[불운]의 辯[변]
[편집]이튿날, 유 민호는 정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약속한 네 시에 을지로 아서원으로 갔다. 정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늦어지는 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전화로 예약해 놓고 제일 조용하고도 깊숙한 방으로 유 민호는 들어가서 정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 날짜를 오늘은 확정지을 셈으로 유 민호는 있는 것이다.
삼십 분 쯤 지나서 정주는 나타났다. 그러나 정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정주의 어깨 뒤로 석란의 얼굴이 해쭉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유 민호는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았다.
『불청객인데 괜찮겠어요?』
외투를 벗어 걸고 정주와 나란히 앉으며 석란은 웃었다.
『무슨 소리를……그렇지 않아도 석란양을 한 번 모시려던 참인데, 잘됐읍니다.』
『글쎄 잘됐음 좋지만…… 난 또 유사장은 젊은 여성을 모실 때는 따로 따로 모시는 줄로 알고서……』
『하하핫……여전히 석란양은 매운 소리만 하시는군요.』
『아직은 덜 매울 거예요.』
『에?……』
유 민호는 후딱 정주의 얼굴에 시선을 재빨리 던지고 나서,
『그보다 더 매웠다간 혓바닥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는 것 쯤 문제도 안 되지요. 심장이 덜컹덜컹 소리가 날 지경일 텐데요.』
『…………?』
유 민호는 얼떨떨해졌다. 서투른 대답을 하다가 뒷다리를 잡히는 것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오히려 났다.
『마담 로우즈와는 언제 쯤 결혼식을 거행하세요?』
『예, 뭐요?』
『아이, 유사장도 건망증이야! 「식도락」의 마담 장미 부인을 벌써 잊어 먹으셨어요?』
『무슨……석란양은 무슨 그런 말을……』
유 민호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이다. 도대체 어찌 된 셈이냐고, 들어서기가 바쁘게 매운 소리만 쏘아붙이는 석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유 민호는 아직도 채 모르고 있었다.
『오 영심이란 여자는 유사장 편에서 차 버렸다죠?』
『에……뭐요?……』
기관총처럼 터져나오는 석란의 이야기를 어지간한 유 민호로서도 막아낼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반대로 듣고 있지요. 정주 언니를 줄려고 약혼 반지를 도루 찾아 왔다지만, 소용 없이 된 반지를 정주 언니에게 물려 준 게 아냐요?』
이미 석란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어젯밤까지도 무관심하던 석란이가 이처럼 갑자기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를 유 민호는 재빨리 깨달아 보는 것이다.
정주와 약혼 관계를 오늘이야 비로서 안 석란임에 틀림 없었다.
정주는 아무 말도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유 민호의 정확성을 띈 추측과 같이 석란을 데리려 갔던 정주는 오늘이야 비로서 유민호와의 약혼 관계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언니를 단념하세요.』
『무슨 말이요?』유 민호는 비로서 적의를 품은 어조를 썼다.
『유사장에게는 마담 로우즈 쯤이 어울린다는 말이예요.』
『석란양이 무슨 상관이요?』
유 민호의 어조에는 노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애인이고 보니 내 아버지 벌이 돼서 하는 소리예요.』
『내가 언제 어머니의 애인이었다는 말이요?』
『어머니의 방을 제 방처럼 드나드는 양반에게 그런 말 쯤 쓰는 게 서툴렀다는 말이예요?』
호되게 날카로운 한 마디가 석란의 입술을 튀어 나왔다.
『………』
유 민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석란은 자기 핸드빽을 열고 반지와 목걸이가 들어 있는 케이스 두 개를 꺼내 조용히 내 놓으며,
『확실히 반환했읍니다. 생각이 계시거든 오늘밤 마담 로우즈에게나 갖고 가서 선물하시는게 좋을 거예요. 마담은 확실히 유사장과 결혼하고 싶어 하니까요. 자, 언니, 인제 가요!』
석란은 정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읍니다.』
정중한 인사를 하고 정주는 일어섰다.
『아, 채선생, 인숙이가 불쌍합니다.』
『돈만 있음 가정교사 쯤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그것은 정주를 몰아치듯이 앞세우고 나가는 석란의 대답이었다.
『그 방정맞은 년만 나타나 주지 않았던들……』
회오리바람 처럼 나타나서 독수리처럼 정주를 채가지고 간 석란이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너무나 돌연한 일이었기에 유 민호의 그 천변 만태의 능란한 변설을 논할 여지가 없었던 사실을 생각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허허!』
하고 유 민호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처럼 한 번 웃어보고 나니, 마음이 저으기 거뜬해 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소리를 높여 방이 떠나갈 지경으로,
『하하하핫……』
하고 통쾌한 웃음을 유 민호는 웃었다.
『채 정주의 몸뚱아리에는 금부치가 붙었나 은부치가 붙었나?……으아, 핫핫핫……』
그러는데 문이 열리면서 요리가 들어왔다.
『얘이, 이 놈들아, 그 많은 요리를 나 혼자서 어떻게 먹으라는 말이냐?
눈깔이 바로 백혔으면 기생들을 빨랑빨랑 왜 못 불러 오는 거야?』
호통을 하는 바람에,
『네, 네……기생 몇이나 부를까요?』
『한 서너 다아스 불러 와.』
『세 사람?……』
『이 놈아, 한 다아스는 열 두 명이다.』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보이에게,
『빨랑빨랑 못 불러와?……』
『네네 ──』
이윽고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접대부들이 대여섯 명 우루루 몰려들었다.
『어째 이리 모두가 다 박색들 뿐이야?』
자기를 중심으로 삥 둘러앉은 접대부의 얼굴을 유 민호는 훑어 보았다.
『아이구, 영감, 말 버릇도 곱다. 어서 술이나 들라요.』
유 민호는 술을 쭉 들고 나서,
『너 대동강 물 먹구 뼈다구가 굵었구나.』
『아즈반두 평양이로구만.』
『너두 삼팔 따라지구나. 불쌍하다. 얘, 한 잔 받아라.』
『거저 우리 오라반 무던하디.』
평양 내기는 술을 들었다.
『나도 한 잔 줘 보소고레. 그 형님만 고향 친굽네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둥굴 납작한 얼굴이 샘을 했다.
『너도 대동강 물이가?』
『련광뎡(練光亭)바우 아래서 배꼽 내놓구 멱 감으면서 요만큼 컸는데, 이거 왜 그럽네까?』
『예따, 그래라.』
유 민호는 찻종지에다 술을 부어 주며,
『배꼽 내놓구 멱 감다 죽은 귀신아, 어서 먹구 물러가라.』
그래서 한 바탕 꽃웃음이 피었다.
『나두 한 잔 주우다.』
옆에 앉은 두드라진 광대뼈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유 민호는 시선을 돌리며,
『너두 삼팔 따라지야?』
『삼팔 따라지가 앙이믄 이런 노릇 앙이 하겠수다.』
『아이구, 그러다 보니, 함경도 물 장수 딸이로구나.』
『그렁까나 미즈 쇼오바이로 나선 거 앙이요?』
『어째 이리 이북 내기가 많아?』
『여기 또 하나 있쉐다.』
광대뼈 옆에서 곱살한 얼굴 하나가 나적이를 집어 유 민호의 접시에다 덜어주며 하는 소리다.
『너두 경제리 출신이가?』
경제리는 평양의 기생촌이다.
『진남포 뱃놈의 딸이웨다.』
『그만 했으면 조상들이 모두 상당하다.』
『아이구, 아즈반, 말씀 좀 그만 두라구요. 이남 내기의 조상들은 모두 다항랑 할아버지에 안잠자긴 줄은 왜 모릅네까?』
『아이, 어쩌면……』
서울 내기인 코끼리 눈이 옆에 앉은 삼십 대의 노틀을 돌아다보며,
『언니, 정말 이북 내기들 수선을 떠는 덴 골치가 아파서 못 살겠어요.』
하고 응원을 청했다.
『얘, 이북 내기 욕하지 말아. 무섭더라 무서워!』
일동이 하하 웃는 데 배꼽을 내놓고 멱감던 친구가 홀랑 나서며,
『잘들 놀아 먹어다! 쾨쾨하게들 좀 그러디 말아 얘, 노린내 나구 메스끔 이 나서 골치를 앓는건 누군데 그러니?』
『아, 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의 폭발이 터지는데 유 민호는 노틀을 향하여 물었다.
『할머니는 경상도 문둥이요?』
『영감, 대접에 치어 사람 다치겠군요. 수째 송장이라고 불러 주시우. 고향은 절라두 강주땅이지만 그저 충청두라고 그래 두지요.』
『송장 할머니, 대꾸가 그럴듯 하오.』
그래서 또 유쾌히들 웃어댔다.
이 술잔 저 술잔을 받는 동안에 유 민호는 상당히 취했다. 채 정주의 몸뚱어리에는 금부치가 붙었느냐고, 일단은 무시를 하여 본 유 민호였지만 취기가 깊어 감에 따라 상상의 정욕은 한층 더 강렬해 갔다.
그렇다고 수두룩히 둘러앉은 여인들 가운데서 어느 얼굴 하나를 골라 볼생각은 이상하게도 없었다.
『인제 다 나가라! 보기 싫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유 민호는 호통을 했다.
『아이, 영감두……손님을 청해 놓고 무슨 망녕이슈?』
노틀 할머니가 있는 애교를 다 부리며 하는 말이다.
『손님?……그렇다. 너희들은 훌륭한 손님들이다. 자아, 어서 나가! 이북내기, 이남내기 다 필요 없다!』
거나한 얼굴로 유 민호는 파리를 좇 듯이 손짓을 했다.
『아이구, 아즈반, 왜 이럽네까?』
뱃놈의 딸이 유 민호의 손목을 잡고 만류하였다.
『뱃놈의 딸두 나가구 물 장수 딸두 나가구…… 똥파리 쉬쉬, 모조리 나가라!』
유 민호는 자꾸만 화가 났다.
『정주도 갔고 영심이도 갔다. 똥파리 쉬쉬, 모조리 가라!』
그러는데 발딱 일어선 것이 배꼽 내 놓고 멱 감던 친구가.
『이거 왜 그러는 거야? 누굴 보구 똥파리 쉬쉬야?』
딱 버티고 내쏘는 소리였다.
『너 보구 그랬다. 나가라면 나가지, 무슨 잔 수작이야?』
그러면서 거나한 눈을 유 민호는 들었다.
『자식 덜났다! 돈 몇푼 가졌다고 대가리 짓이야?』
『무엇이, 이 년아!』
주먹을 쥐고 일어서려는 유 민호를 서울 내기가 부여잡았다.
『이 년아?……누굴 보고 하는 수작이야? 주먹만 들면 꼼쩍도 못하는 너의 집 부엌 귀신더러 하는 입버릇이야. 얘, 술두 낟알 물이야. 처먹을 대로 처먹었으면 가만히 돌아가 자라 얘!』
『이 년 봐라?』
벌떡 일어서는데,
『아이, 글쎄 영감, 취하셨어요.』
서울 내기가 일어서지 못하게 유 민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어디 일어나서 사람 좀 때려 봐라! 내 몸에 손가락 하나만 댔다간 네 모가지는 당장에 떨어진다. 뭐나 해 처먹구 사는지 모르지만 쩡쩡 울리는 양반들이 내 뒤에는 수두록하다 얘.』
『허어?……』
유 민호는 저으기 감심한다는 표정으로,『그런 훌륭한 양반들이 너를 위해서 내 목을 벤다?……그처럼 한가한 양반들이야?…… 세상 꼴 잘 돼 나간다!』
『잘 돼 나가는 꼬락서니가 보고 싶거든 네 그림자나 들여다 보고 앉아 있어라 얘!』
그 한 마디를 최후로 접대부들이 우루루 밀려나갔다. 서울 내기가 혼자 남아서,
『영감, 취해서 어떻게 돌아가세요?』
정말로 혼자서는 돌아가기가 힘든 유 민호의 취한 몸뚱이었다.
『얘 내버려 둬라 얘, 넌 또 왜 그러니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러니?』
평양 내기가 나가면서 비꼬는 말이다.
『아이, 언니두! 딱하니까 그러는 거지, 뭐예요?』
하는 수 없이 서울 내기도 물러 나왔다.
『똥파리 쉬쉬, 잘들 없어졌다!』
방 한 가운데 번뜻 누워서 오랫동안 유 민호는 팔짓 손짓을 하고 있었다.
유 민호가 오늘밤처럼 취해 본 기억은 근래에 드물다. 영심에게 실패하고 정주를 놓친 것이 역시 마음의 타격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유 민호는 벌떡 일어나서 복도로 나섰다. 변소를 향하여 비틀비틀 걸어갔다. 한참 후에 다시 변소에서 나와서 방으로 휘청휘청 돌아오는데,
『아빠!』
하고 부르며 유 민호는 앞으로 마주 걸어오는 사내 아이 하나가 있었다.
『아, 인국이가 아니냐?……』
인숙이의 동생, 올해 여섯 살 먹은 인국(仁國)이가 삽살 강아지모양 유 민호의 팔목에 매어 달렸다.
『엄마는?』
『저기……저 방에 있어.』
『엄마 혼자서?……』
『아니, 아저씨 하구 같이 왔어.』
『아저씨?……』
『우리 하구 같이 사는 아저씨 말이야.』
『음 ──』
유 민호의 표정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유 민호는 인국을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무릎 위에 올려 앉히고 한 번 힘껏 껴안아 본 후에,
『너 더 먹으렴.』『많이 먹었어.』
인국은 자기 배를 쓸어 보이며,
『인숙 누나 안 왔나?』
『안왔다. 그런데 너 어디루 이사 갔니?』
『돈암동으로 이사 갔지.』
『같이 사는 아저씨 너를 귀여하드냐?』
『응, 무척……』
그 「무척」이라는 한 마디가 유 민호에게는 도리어 불쾌했다.
인국을 그처럼 귀여워 한다는 인국의 엄마는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유 민호는 갑자기 인국의 엄마가 보고 싶었다. 접대부들보다는 역시 인국의 엄마가 매력이 있다. 정주에게서 불태우던 상념의 불길이 그대로 고스란히 인국의 엄마로 옮아져 갔다.
『가서 엄마 좀 불러 온.』
『그래, 그래!』
인국은 홀랑 일어서서 복도로 뛰어나갔다. 유 민호는 술을 마시며 인국 엄마가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원체 싫어서 내보낸 인국 엄마는 아니었다. 유 민호의 방탕에 인국 엄마가 제발로 나가버린 것이다. 나간 후에도 유 민호는 창신동 집을 곧잘 찾았다.
『아저씨가 가면 안 된다구, 그래서 엄마 안 온대.』
한참만에 인국이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다. 이것 저것 합쳐진 오늘 저녁의 울분이 유 민호의 술 취한 감정을 야만인처럼 자극을 했다.
『자식이 뭣 때문에 큰 소리야?』
아빠의 한 마디가 무서워져서 인국은 가만히 유 민호의 무릎에서 내려 앉았다.
『아빠가 오라는데 아저씨가 무슨 잔소리냐고 가서 그래.』
인국 엄마의 소유권이 아직도 자기에게 있는 것 같은 생각을 유 민호는 법률가 답지도 않게 갖고 있는 것이다.
나갔던 인국이도 돌아오지 않고 인국 엄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만에 마흔살쯤 되어 보이는 신사 한 사람이 인국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 섰다.
유 민호보다 못지 않게 불쾌한 얼굴을 신사는 하고 있었다.
『인국 엄마를 찾는 것이 노형이요?』
그 어조가 대단히 침착하다. 정능 계곡에서 석란과 더불어 포옹의 윤리를 토론하던 신사였다.『그렇소.』
까치다리를 하고 식탁 앞에 앉은 그대로의 자세로 유 민호는 대답했다. 취기에 붉을대로 붉어진 유 민호의 얼굴이었으나 신사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국 엄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대신 들으러 왔소.』
『당신은 누구이기에 인국 엄마를 대표할 수가 있다는 말이요?』
『나는 인국 엄마의 남편 되는 사람이요.』
『인국이가 분명히 내 아들이고 보면 인국 엄마의 남편이 따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으오.』
『노형이 법률가랬지요?』
『그렇소.』
『악덕 법률가로군!』
『어쨌다고?……』
유 민호가 벌떡 일어섰다.
『남의 아내가 되는 사람을 강탈한 당신이 도리어 나를 악덕자로 불러?』
이렇게까지 해서 인국 엄마를 소유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유 민호였다.
아니, 소유라기 보다는 일시적인 점유욕(占有慾)이라고 유 민호는 법률적인 어휘를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취중에 울분까지 쌓였던 참이라 사태가 이렇듯 벌어져 놓고 보니 유 민호의 총명으로서 더 움칠래야 움칠 도리가 없다.
『내가 노형의 아내를 강탈했어?』
신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인국아, 네 아버지되는 양반이 이렇게도 훌륭한 분인 줄은 정말 몰랐다.』
신사는 진정으로 불쌍하다는 듯이 인국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신사 ── 이름은 황 일봉(黃一鳳)이라고 가진, 역시 이북 내기인 삼팔 따라지다. 일제 말기 원산 모 여중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 후에는 사상이 좋지 못하다하여 학교에서 쫓껴나와 사소한 밑천으로 제과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남한의 자유가 하도 그리워 꿈 길에도 종로 네 거리에 서 있는 단청(丹靑)의 종각을 여러번 보았고 종각을 바라보면 천국에 나온 듯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결이 가빠지곤 했다. 그러는데 일사 후퇴가 왔다. 데리고 떠난 아내와 열 살 먹은 사내아이는 일선을 지날 때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시체조차 변변히 거두지 못하고 구렁지 속에다 누인 후 흙 몇 덩어리를 덮어 놓고 솔나무 가지로 무덤을 쌓았다. 장천 근방에서 생긴 일이었다.
부산 국제 시장에서 판자집 하나를 빌려 가지고 막 과자 나부랭이를 만들어 파는 동안, 고향 유지들이 황씨의 인격을 존경하여 재단 법인을 만들어 순전히 피난민의 자재만을 상대로 한 야간 중학교를 용두산 기슭에다 세워 놓고 황 일봉씨를 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야간 중학이 환도와 함께 서울로 옮겨 온 것이다.
창신동에 거주하는 학부형 하나가 인국 엄마의 고된 신세와 얌전함을 눈여겨 보고 황교장의 배필로서 알선 했을 때 꿈에 그리던 자유 천지에 온 것만 해도 황송한 일인데 처자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찌 나 혼자만의 안 일을 추구할 수 있느냐고, 제삼 거절하는 것을 유지들이 나서서 마침내 성사를 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한 황교장이며 그렇게 해서 정식으로 황교장의 아내가 된 인국 엄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국 엄마를 만취가 된 유 민호는 탐을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인국을 그 처럼 사랑하오?』
황교장이 껴안는 양을 거나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유 민호는 비웃었다.
『적어도 노형보다는 내가 인국을 사랑할 거요.』
사실 황교장은 월남 도중에 한길 가에서 쓰러진 자기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인국이가 귀여워지는 것이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도 위선자와 같은 말은 그만 둬요.』
『위선자가 아니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나 노형은 알고 있소?』
『오늘?……오늘은 나에게 있어서 만사가 다 불운(不運)한 날일 뿐이요!』
허무하게 살아진 채 정주를 생각하고 배꼽을 내높고 멱감던 계집애를 유민호는 생각하고 있는 말이었다.
『무엇이 불운한 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인국의 생일이요.』
『응?……생일?……』
채 정주의 생일 만을 생각하고 있던 유 민호였다.
『술이 취한 모양이니 돌아가시요. 그리고 다시는 인국 엄마를 괴롭히지 마시요.』
그러면서 돌아서 나가는 황교장의 팔을 부여잡고 유 민호는 휙 잡아챘다.
황교장에게 손목을 잡히웠던 인국이가 먼저 펄썩 쓰러졌다.
『남의 유부녀를 간통한 자가 도리어 설교를 해? 나쁜 놈 같으니!』
그 말에 황교장이 휙 돌아섰다. 인국이가 발딱 일어서서 복도를 뛰어나갔다. 『엄마, 엄마!』
인국은 긴 복도를 뛰어 가면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문을 방싯하니 열고 복도를 내다보고 있었다.
『인국아, 왜 그러냐?』
『아빠하구 아저씨하구, 쌈 해!』
그러는데 멀리서 툭하는 소리가 나며 식탁이 쓰러지는 소리도 났다.
『어머나, 저 일을?……』
부인의 안색이 홱 어두워지며 인국의 조그만 몸뚱어리를 오그라지도록 꼭 껴 안았다.
누가 누구를 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유 민호도 그렇고 황 일봉도 그렇고 둘이다 완력을 사용할 위인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인들이 지금 완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국 엄마는 비로소 남성들의 세계를 눈앞에 보는 것 같아서 치를 부르르 떨었다. 한 사람의 여성과 두 사람의 남성 ── 거기에는 이미 정글 속의 맹수들의 세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적인 온갖 교양이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이 그 곳에는 있었다.
인국의 손목을 부여잡고 부인은 유 민호의 방으로 달려갔다. 보이들도 달려갔다.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까 그 아가씨들도 뛰어갔다.
『엄마, 아빠가 죽었어!』
인국이가 외쳤다.
양복 저고리의 주머니 하나가 너들너들 찢어져 나간 황 일봉씨가 돌부처처럼 문 안에 우뚝 서 있었고 쓰러진 식탁 옆에 유 민호가 길게 자빠져 있었다. 코피를 푸푸 뱉으며 허공을 향하여 손짓을 연방했다.
『……응, 응……어쨌든 운이 나쁜 날이라니까……사람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확실히 있기는 있거든 유 민호의 실력 부족과는 딴 문제라니까……응, 응……경숙이! 경숙은 어딜갔이? 내가 매맞는 걸 보고도 가만 있어?…… 나쁜 년 같으니라구!』
아가씨들이 쿡쿡 웃었다.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진 유 민호였다.
보이들이 들어가서 종이를 뭉쳐 유 민호의 코구멍을 막았다.
『아빠가 죽은 건 아니지?』
인국이가 또 엄마의 손목을 흔들면서 물어왔을 때 경숙(京淑)은 인국의 손을 놓고 보이들 뒤로 걸어 들어가는데 황교장이 조용이 막았다.
『내버려 두시요. 쓰러지면서 식탁을 떠받았을 뿐이요. 인국아, 이리 온!』 황교장은 인국과 경숙을 앞세우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오래간만에 사람의 몸에 손을 대 보았소. 서너대 얻어 맞고 한 대 응수한 것이 원체 취한 몸이라, 쓰러지면서 코를 다친 모양이요. 작자가 법률가답게 내일 아침 시청호적과로 가서 우리들의 호적 관계를 조사해야겠다고요.』
그러는데 또 유 민호의 혀 꼬부라진 말소리가 들려 나왔다.
『……경숙이! 내 사랑 하는 경숙은 어딜 갔어? 인국아, 엄마 대려 온! 그 놈이 제아무리 훌륭한 도덕가래도 소용 없어! 내 품 안이 제일이야, 내 품 안이……너는 그 놈에게 감사는 할런지 몰라도 나를 잊지는 못한다. 못해!
나가 난봉을 피운다고 홀랑 그 놈에게 옮아 앉아 봤댔자 허수아비다, 허수아비야!…… 너는 내 조강지처가 아니냐? 아무리 밉고 못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이라도…… 계집이란 처녀를 받쳤던 남편은 영영 잊지 못하는 생리 조직을 가진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만 한다. 백번 천번 시집을 가 봐도 소용없다, 소용없어! 응, 응……』
취중에도 유 민호의 애욕의 철학은 뚜렷한 바가 있는 것이라고, 얄밉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코피를 자기 손으로 닦어 주지 못하고 나온 것이 경숙의 마음에는 알끈했다.
황교장은 자기방으로 들어가서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고 나왔다. 계산을 하고 요정을 나서면서 인국의 머리를 쓸어 보며,
『자유라는 것이 좋긴 좋지요. 한길 가에서 부둥켜 안고 돌아가는 패덕의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정능 계곡에서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 민호와 같은 작자가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자유도 또한 있으니까요.』
그러나 황교장의 이 탄식의 소리는 경숙의 귀에 그다지 신통하게는 들리지 않았다. 자기를 영영 잊지못하리라는 유 민호의 호통이 경숙에게는 좀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소위 미운정인지도 몰랐다.
『허수아비……허수아비……』
돌아오는 길에 경숙은 쭉 그 한마디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여 보며 황 교장의 그 덕망있는 모습을 때때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