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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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慕[연모]의 書[서][편집]

1[편집]

자기방으로 돌아 온 지운은 어쩐지 심신이 다같이 피곤해서 원고 쓰기를 단념하고 자리옷으로 갈아 입고 말았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자리를 깔고 번뜻 누워서 담배 한 꼬치를 붙여 물고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았다.

『개인의 의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

천정을 바라보며 지운은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다.

『민족적인 운명, 국가적인 운명, 사회적은 운명 지역적인 운명, 기타 모든 우연성에 입각한 차안스의 운명이 겹겹이 씌운 여러가지 운명의 담벼락을 누구가 잘 개척하여 나갈 것인가?……』

지운은 석란을 생각했다.

『임지운이라는 사나이는 결국에 있어서 이 석란이라는 여자와 결혼할 운명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소년 시절로부터 임지운은 자기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여러 가지로 상상 하면서 영혼의 방황을 계속해 왔었다. 전지전능의 신이 만일 높은 데서 인간의 자태를 내려다 본다면 그 얼마나 보람있는 의욕이며 어리석은 행동임을 깨달을 것인가!

『운명을 사랑하자! 그리하여 석란을 열심히 사랑하자!』

그 어떤 종교적인 엄숙한 심정 앞에 지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운은 한 사람의 아내로서 석란을 성실하게 사랑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장점을 길러주고 단점을 바로 잡아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자기도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한 부부 생활에서 오는 평화로운 가정을 이룩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석란의 기질이 지나치게 명랑하고 다소 화려한 것을 아버지는 탓하는 것 같았으나 철학자가 아닌 한 사람의 예술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도리어 작가 생활에 있어서 기분전환을 꾀하는 하나의 정신적인 양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석란은 마침내 내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보다도 먼저,

『나는 마침내 석란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이 한 마디에서 오는 엄숙성이 좀더 깊이 지운을 쳤다.

그 순간, 지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층으로 된 유리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책장 맨 밑으로 조그만 설합이 셋 달려있었다. 그 셋 중 맨 오른편 하나에는 굳게 쇠가 잠겨져 있었다. 지운은 양복 주머니에서 열쇠 고리를 꺼내 들고 잠겨진 설합을 열었다.

깨끗이 거두어진 설합 속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장자리에 하얀 레이스를 두른 하늘빛 손수건에 싼 조그만 무슨 봉투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지운은 그것을 꺼내 들고 책장 머리로 돌아와 앉아서 파란 갓을 쓴 스텐드에 불을 켰다.

지운은 하늘빛 손수건을 풀었다. 꽃봉투 하나가 손수건에 싸이어 있었다.

코스모스가 그려진 빛깔의 꽃봉투였다. 봉투에는 앞이나 뒤가 다같이 주소 성명은 씌여 있지 않았다. 다만 봉함을 한 뒷등에 붓으로 「誠[성]」이라는 글자 하나가 조그맣게 씌어져 있었다.

지운은 봉투에서 편지를 끄집어 냈다. 편지는 단 한 장이었다. 그것은 두꺼운 장지를 적당한 넓이와 길이에 잘라낸 것으로서 손수 만든 종이었다.

개름하니 착착 접은 그 장지 속에서 마를대로 말라빠진 은행잎 하나가 바스락하고 책상위에 떨어져 내렸다. 장지에는 다른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그 새하얀 한지 한 복판에, ……愛 人[애인]……

─ 이라는 두 글자가 붓으로 씌어져 있을 뿐이었다.

2[편집]

「愛人[애인]」이라는 두 글자는 각각 한 치 사방 쯤 되는 넓이에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먹을 발라 모필로 쓴 글자였다.

글씨는 어려서 여물지는 못했으나 그 늠름한 필체와 간격이 째인 자체(字體)는 어딘가 예술적인 향기가 그윽히 흐르고 있었다. 글자만 좀더 크다면 새하얀 바탕에다 이 두 글자를 떼어서 액자(額子)로 걸어도 제법 어울릴 그러한 글씨였다.

은행잎이나 꽃봉투로 본다면 요즈음 흔히 보는 소녀 화보의 주인공 같기도 하지만 그 봉투의 알맹이가 한 시대 전의 것인 장지에다 모필이라는 사실은 또한 그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주고 있었다.지운은 오랫동안 말라빠진 은행잎과 함께 「愛人[애인]」이라는 두 글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손을 뻗쳐 창문을 열었다.

창밖은 달빛이 교교하다. 차거운 가을 달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도한 밤바람 한 오락을 볼에 느끼며 지운은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청랭한 공기가 폐부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지운에게는 상쾌했다.

지운은 라이터를 찾았다. 그러나 라이터는 양복주머니 속에 그대로 들어 있는 사실을 깨닫고 지운은 성냥갑을 더듬어 잡으며 한 손으로는 꽃봉투를 집어 들었다.

『님이여, 고요히 가시요!』

꽃봉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지운은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십년 동안에 걸친 연모(戀慕)의 정을 깨끗이 불살라 버리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너무도 괴로운 즐거움이었소.』

지운은 성냥불을 켰다.

펄럭펄럭…… 있는 듯 없는 듯, 지운의 불을 스치던 밤바람이 성냥불을 이리 저리로 희롱했다.

『사랑한다는 것이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또한 너무도 즐거운 괴로움이었소.』

봉투가 타기 시작했다. 절반도 못 탓는데 성냥불이 홱 꺼졌다. 지운은 또한 꼬치를 켜대며,

『밤바람은 무심히도 이 불을 끄려지만……』

『누구를 위한 이 부질없는 바람의 희롱이뇨?』

『바람아 그대 뜻이 있거든……』

이 불을 끄려고 들지만 말고 십년 묵은 꽃봉투의 그윽한 향연(香煙)이나마……

『님에게 전해다오!』

그러나 봉투는 두꺼워서 생각처럼 그리 쉬이 타주지는 않았다. 연기는 방 안에 자욱하고 지운은 한두 번 기침을 했다.

불이 또 꺼졌다. 밤바람은 무슨 의욕을 가진 생명체인 양 성냥불을 기어코 끄려는 것인가? 그러나 지운은 또 지운대로 성냥불을 켜 댔다. 기어코 켜 대야만 지운은 했다.

유리 재털이 위에서 꽃봉투는 또 펄펄 타기 시작하였다. 그 빨갛게 타오르는 조그만 불꽃 속에서 신기루처럼 떠오른 귀여운 얼굴 하나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었다. 흰 줄이 두 개 테두리를 두른 해군복 · 깃이달린 교복을 그 소녀는 입고 있었다. 양쪽으로 땋아 느린 짧막한 머리털이 깃 위에 달락말락 느려져 있었다.

불꽃 속에 나타난 소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연(戀) 십년, 실로 인간 임지운의 청춘을 서글픈 색체로 수 놓고 지나간 사랑의 역사를 지운은 더듬어 본다.

3[편집]

그것은 실로 기라(綺羅)와 같이 아름답고도 한편 그지없이 서글픈 사랑의 기록이었다.

서로 서로가 다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해 봄철부터 싹터 오던 둘이의 사모의 정은 나날이 자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 말기, 소년 임지운이가 청년기에 한쪽 발을 들여 놓은 一九四五[일구사오]년 봄철의 일이었다.

그때, 지운은 시내 모 중학교 졸업반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말기인지라, 학교에서는 매일처럼 근로봉사를 간다, 신궁창배를 한다, 군사 훈련을 한다, 하면서 학업은 젖혀 놓고 시국의 요청 이랍시고 겅중겅중 뛰어만 다녔다. 더구나 B二十九[이십구]가 서울 상공을 날고 있을 무렵이라서 방첩 주간 방공 훈련 등, 학생들은 글자 그대로 눈 코 뜰 사이도 없이 이리 저리로 동원만 되고 있었다.

시국의 요청이라는 학생 동원이 지운에게는 제일로 싫었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의 피로와 불쾌의 정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의미에서 자연을 찾아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녔다.

지운의 손에는 항상 시집이나 소설책이 쥐어져 있었다. 들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시 한 구, 소설 한 장을 읽는 맛이란 실로 이 어수선한 판국에 있어서는 지상의 천국을 의미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지운의 발길은 어느덧 창경원 신록을 자주 찾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달리 동물을 좋아하는 지운으로서는 원숭이의 우리 앞에서 어린애들처럼 해를 지우는 수가 일수 많았다. 동물원과 식물원을 비롯한 유원지나 춘당지(春塘池) 연못가는 고독한 소년 임지운에게 있어서는 고요하고도 아늑한 심신의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

그렇다. 서로 서로가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귀여운 소녀와 지운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연모의 정이 나날이 자라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무렵의 일이었다.처음에는 식물원 유리집 안에서 그 소녀를 지운은 만났다. 그 다음에는 비스켓이나 군밤을 코끝으로 말아먹는 코끼리 우리 안에서 소녀를 만났다. 그리고는 유원지 그네 옆에서, 혹은 명정전(明政殿) 뒷뜰 돌탑 앞에서 두 소년 소녀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만났다가는 헤어지곤 하였다. 그러다가 두 소년 소녀가 마지막으로 다리 쉬임을 하는 것은 금잉어가 늠실거리는 춘당지 연못가였다.

그것은 명정전에서 벚나무가 주렁주렁 서 있는 완만한 비탈길이 끝나는 연못가 초입이었다. 그 초입에 벚나무 한 그루를 등진 벤치 하나가 있었다.

그 벤치에 소녀는 홀로 앉아서 금잉어를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그 벤치에서 조금 꾸부러져 들어간 연못가 사이로 건너 맞은편 숲 사이에 사람이 하나 들어앉을 만한 틈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바위 틈 사이에 소년 임지운은 시집이나 소설책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다.

지운은 검은 교복을 입고 있었고 소녀는 흰 줄이 두 개 가장자리를 두른 커다란 해군복 깃이 달린 곤색 여학생복을 입고 있었다. 짧막하니 자른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느린 그 소녀의 나이가 기껏 보아서 열 일여덟 안팎이었다.

4[편집]

매 일요일마다 사오 간 길이의 간격을 두고 두 소년 소녀는 마주 앉는 것을 무슨 일과처럼 하는 그 시각이 대개는 다 열 두 시 전후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정오의 사이렌이 아앙하고 불면 소녀는 그것이 무슨 신호나 되는 것처럼 벤치에서 살며시 일어나 창경원 정문을 향하여 걸어나가곤 하였다.

소녀가 창경원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든지 꼭 일요일이었고 언제든지 꼭 열두 시 전이었다. 벌써 월여에 걸친 경험으로 보아서 소년 지운도 일요일만 되면 만사를 젖혀 놓고 무슨 철석 같은 약속이나 한 사람처럼 그 시간에 꼭꼭 대어 갔다. 소녀가 먼저 와 있는 때도 있고 지운이 편에서 먼저 가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편에서나 단 한 번도 그러한 일과를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

이리하여 두 소녀와 소년은 벌써 여러 번째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서로의 얼굴을 대하건만 여태껏 단 한 마디의 말조차 바꾸지를 못한 채 헤어지곤, 헤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소년 임지운은 무한히 행복하였다. 한 시간내지 삼십분 동안에 걸친 그 행복을 지운 소년은 자기의 일생과 바꾸드라도 아깝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소녀는 항상 파란 손수건에 무슨 약병 같은 것을 싸 갖고 있었다. 얼굴 모습이 갸름하고 알린알린 들여다보일 것같은 맑고 흰 살결을 소녀는 갖고 있었다. 까만 살눈썹이 그린 것처럼 길고 두 눈동자가 언제든지 꿈꾸는 사람 모양 젖어있었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빛이 무슨 신병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것이 맨처음, 다양한 식물원 유리집 속에서 지운 소년이 거스름 없이 받은 인상이었다.

춘당지 못가에도 벚나무는 주룽주룽 서 있었다. 그 벚나무 사이를 누비듯이 전나무, 소나무, 잣나무, 이깔나무, 단풍나무들이 조그만 바위 무더기와 함께 풍치있게 널러져 있었다.

소녀가 앉아 있는 벤치 바로 옆에 선 벚나무도 아름드리는 채 못되어도 상당한 연륜(年輪)을 갖고 있었다.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야무진 꽃봉오리가 이삼일 후에는 활짝 피어날 그러한 무렴이었다.

지운은 한일 자로 꽉 입술을 다물고 그 굵다란 눈썹을 들어 머나먼 하늘만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시선이 옮겨질 때면 그 타오르는 두 눈동자는 무슨 완강한 인력에 끌리는 것처럼 소녀의 모습을 무섭게 붙들곤 하였다.

『후우 ─』

지운은 꺼질 것같은 긴 한숨을 연못 위에 내뿜으며 이유 모를 몸부림을 치곤 했다.

그러다가도 소녀가 무심코 시선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이면 둘이다 무슨 커다란 죄나 짓고 있는 사람모양 표정을 죽인 얼굴이 금방 되면서 둘이가 다 후딱 외면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듯 소년도 소녀도 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벌써 여러 번째 마주치는 둘이의 눈동자건만 그 마주치는 시선을 굳세게 받아들일만큼 대담하지도 못했고 불량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정오의 사이렌이 앙하고 불면 소녀는 파란 손수건에 싼 약병 같은 것을 소중히 들고 창경원 정문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나가곤 하였다. 지운은 그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았다가 이윽고 소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무렴이면,

『아아, 오늘도 또 그냥 헤어졌다!』

그러면서 지운은 언제나 늘상 하는 버릇으로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시집에 다 얼굴을 탁 묻어 버리며 격렬한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나는 왜 이처럼 마음이 약할까?…… 아아, 안타깝다!』

지운 소년은 울었다.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 영혼의 오열(嗚咽)이었다.

5[편집]

그렇듯 안타까움을 지운은 상대편에게 표시할 용기가 도저히 없었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말을 못하지만 저이는 왜 또 아무 말도 없을가?

……』

지운은 소녀 편에서 이야기를 걸어오기만 진심으로 바랬다.

『저이는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필시 그럴 거야!』

그렇게 단정하고 나면 소년은 자기의 일생이 그지없이 애처러워지는 것이었다.

『또 한 주일을 기다려 보자! 이번에는 꼭 말을 해 봐야지!』

늘상 하는 버릇으로 지운은 똑같은 한 마디를 또 다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창경원 벚꽃이 성장한 여왕처럼 활짝 피었다가 구슬픈 봄비에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는 무렴이 왔다.

지운 소년의 어여쁜 사랑의 싹은 무럭무럭 자라서 마침내는 탐스러운 봉오리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연모의 봉오리는 좀처럼 피어날 줄을 모르는듯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봉오리는 그저 봉오리대로의 수집음과 안타까움을 지닌채 가슴속 깊숙히 파묻혀 있었다.

이리하여 그처럼 골똘히 기다리던 한 주일은 또 지났다. 세 주일도 또 지났다. 오월이 지나고 유월이 지났다. 녹음의 바다로 변해버린 창경원 연못가에서 거꾸로 비치는 자기의 안타까운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며 소년 임지운은 매주일처럼 울었다.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는 그 소녀도 역시 일요일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연못가에 나타났다. 왜 그처럼 한 번도 빠짐없이 자기 앞에 나타나는지, 지운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저이도 나처럼 몹시 수집어 하는 것일까?』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어쩌다가 서로 마주치는 소녀의 얼굴을 언제나 한결같이 새침하고 무심했다. 그 무관심한 얼굴을 보는 순간, 이번에는 꼭 말을 걸어 볼려던 한 주일전의 맹세는 운무처럼 헤실프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지 지운의 마음이 약하다는 데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님을 지운 자신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의 불꽃은 확실히 지운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적마다 그 어떤 자존심같은 것이 뾰족한 가시처럼 자기의 행동을 항상 제지하고 있음을 지운은 그때서야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조그만 자존심은 용감하게 버리자!』

저편에서 먼저 이야기해 오기를 바라는 심정은 확실히 지운 소년의 예술가적인 자존심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또 한 주일을 기다린 지운 소년은 역시 자존심보다도 수집음이 앞서고 마는 똑같은 결과를 보았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지운은 마침내 소년다운 한 가지 방법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것은 칠월 하순, 여름 방학때의 어떤 토요일 저녁 무렴이었다.

지운은 창경원으로 갔다. 여학생이 앉는 벤치는 다행히도 비어 있었다.

지운은 벤치에 걸터 앉기가 바쁘게 주머니에서 연필 깎는 조그만 나이프를 끄집어냈다. 저녁 무렵이다. 근방에 사람의 그림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문을 닥치는 직전의 시간을 택했던 것이다.

바로 벤치 옆에 서 있는 벚나무 껍질은 캄캄한 흙빛이었다. 아름드리의 절반은 넉넉할 벚나무였다.

지운은 칼 끝으로 벚나무에 무슨 글자를 아로새기기 시작하였다. 어른의 주먹 만큼씩 한 넓이를 가진 글자 두자를 목각장이들처럼 하얗게 파내기에 열중하였다.

사람이 지나가면 동작을 멈추었다. 멈추었다가는 또 열심히 칼끝을 놀렸다. 이리하여 약 이십 분이 지났을 무렵, 캄캄한 흙빛깔 벚나무 위에 하얗게 도려 내인 두 글자는 ……

……愛 人[애인]……

─ 이었다.

6[편집]

그날밤, 지운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속이 울렁거려 견딜수가 없었다.

『내일 열 두 시만 되면 그 여학생은 필경 그 두 글자를 눈앞에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만……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이 안타까운 마음의 고백인 줄을 알아 줄는지?……』

지운은 그것이 또 걱정이 되었다.이튿날 지운은 열 한 시경에 창경원으로 갔다. 소녀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지운은 마음이 자꾸만 떨린다.

열 한 시 반이 좀 지났을 무렵에 소녀는 역시 그것이 무슨 마음의 행사(行事)인 것처럼 식물원 쪽으로 조용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걸어 내려오면서 소녀는 멀리 지운이 앉은 쪽을 한 번 바라다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녀는 곧 시선을 돌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벤치로 걸어왔다.

바람이 이나보다. 못 위에 파들파들 가는 파문이 그려진다. 책 한 권을 움켜쥐고 지운은 그 가느다란 파문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서도 시야를 조금 넓혀 소녀의 일거 일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보았다!』

지운은 마음 속으로 불현듯 외쳤다.

그렇다. 일단 벤치에 걸터앉았던 소녀는 약병 같은 것을 싸 쥐인 파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꼭꼭 찍어 내다가 그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동작을 갑자기 멈추었다.

벚나무 밑동에 아로새겨진 새하얀 두 글자 「愛人[애인]」이 머리만 약간 돌리면 지극히 쉽사리 발견 할 수 있는 그러한 거리에서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마에서 손을 거두며 소녀는 후딱 머리를 들어 지운을 바라 보았다. 사오 간 남짓한 거리였기 때문에 그 순간에 있어서의 소녀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 것이 지운에게는 한이었으나 그러나 소녀의 태도는 확실히 그 무슨 마음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저으기 당황해 있는 것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지운이었다.

지운은 머리를 대담하게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물결을 이루고 있는 연못 위에서 두 소년 소녀의 시선과 시선이 억세인 파문을 일으키며 부딪혀 버렸다. 소녀는 직각적으로 그것이 지운의 마음의 고백인 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다.

지운은 획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운 생각이 물밀처럼 전신을 습격해 왔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소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어쩐지 무서웠다. 누구한 사람 보는 이는 없건만 얼굴이 확확 달아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모양, 지운의 사지는 가느다랗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대로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지운은 불쑥 몸을 일으키었다. 그리고는 소녀가 항상 하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을 억지로 지으며 사철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를 걸어 저편 언덕길로 획 올라가 버렸다.그 언덕길은 연못을 삥 돌아 수정각(水亭閣) 옆으로 빠져 나가면서 식물원과 유원지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 녹음이 짙은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지운은 여러 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럴 적마다 소녀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가지고 「愛人[애인]」의 두 글자가 아로새겨진 벚나무와 오랫동안 마주 서 있는 자태를 지운은 발견하였다.

『그렇다. 저 여학생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소녀는 끝끝내 지운을 따라 오지는 않았다. 지운이가 못을 삥 돌아 유원지까지 다달았을 무렵에 소녀는 이윽고 벚나무 앞에서 몸을 돌려 창경원 정문을 향하여 감실감실 사라져 갔다.

『아아, 저 여학생은 결국에 있어서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지운 소년은 어린애들이 오구구 뛰노는 유원지 한구석 잔디밭 위에 힘 없이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7[편집]

소년 임지운은 마침내 절망을 느꼈다.

『그 여학생은 내 마음의 고백을 빤히 알면서도 그대로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절망의 한 주일 동안에 지운 소년이 수 없이 되풀이한 한 마디였다.

『다음 공일에는 꼭 오지 않을 거야. 내가 그처럼 불순한 마음을 가진 줄은 인젠 알았으니까…… 나를 속으로 무척 욕할 거야. 나를 불량한 학생이라고 경멸할 거야.』

지운은 그렇게 생각키우는 것이 제일 무섭고 슬펐다.

『학생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무슨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한담!』

소녀는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이 지극한 심정은 과연 불량한 까닭에 생기는 것일까?……』

지운은 성적도 우수했지만 온건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조행(操行)에는 언제나 우를 맞아 왔다.

『그렇다면 나는 소위 이중 인격자였던가? 겉으로는 얌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지운은 차츰차츰 자기 자신이 몰라져 갔다. 정녕 그렇다면 자기는 이담에 커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인이 될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일이라고 지운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음 일요일이 또 닥쳐왔을 때, 지운은 여전히 창경원 연못가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자기의 불량한 마음을 한없이 미워하고 슬퍼하였다.

그것은 무더운 팔월 초순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소녀 편에서 먼저 와 있었다. 꼭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소녀가 먼저 와서 벚나무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지 않는가!

『아, 왔다!』

지운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의 꼬리를 또 부끄러움이 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그부끄러운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서 지운은 또 무표정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벤치 옆을 지나면서 문득 바라다 본 소녀의 얼굴도 역시 자기의 그것처럼 무심하고 태연하다. 그래서 지운은 또 가슴속이 덜컹 내려 앉았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그러지만, 이 여학생은 왜 좀더 나를 아는 척 해 주지를 않을가?』

그것이 다시금 지운을 서글프게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왔다!

『응?……』

지운 소년이 숲 새를 빠져 바위로 내려가 앉으려 했을 때였다. 자기가 앉아 있던 바로 그 바위틈 사리에 파란 손수건에 싼 무슨 엷은 물건이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아, 이 파란 손수건……』

그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소녀가 늘상 약병 같은 것을 싸 갖고 다니던 바로 그 손수건만 같아서 지운은 문득 소녀 쪽을 바라 보았다.

『아, 역시……』

과연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소녀의 손에는 흰 약봉지 하나와 조그만 약병 하나가 달랑 쥐어져 있을 뿐, 소녀는 멀리 주정각 지붕 너머로 푸른 하늘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

지운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풀었다. 꽃봉투 하나가 싸쁜하고 무릎 위에 떨어져 내렸다. 주소 성명은 하나도 씌어지지 않고 다만 뒷등 봉함을 하는 선위에 붓글씨로 조그맣게 「誠[성]」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지운은 봉함을 뜯었다.

편지는 단 한 장, 뚜꺼운 한지를 적당히 잘라서 만든 것으로 우선 연두색 은행잎 하나가 착착 접은 종이 갈피에서 톡 떨어져 나왔다.

……愛 人[애인]……

그 두꺼운 한지 한 복판에는 단지 이 두 글자만이 모필로 씌어져 있을 뿐이다.

8[편집]

『분명히 저 여학생의 회답이다!』

지운의 전신이 후들후들 경련을 일으켰다. 눈앞이 감자기 환해지면서 무지개인 양, 지운의 행복은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점령하였다. 지운은 불현듯 머리를 들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자기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바라 보고 있던 소녀임에 틀림 없었다. 그 소녀가 휙 얼굴을 들어 달려오는 지운의 시선을 피하며 먼 하늘을 무심하게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왜 그처럼 모르는 척하는지 지운은 소녀의 심정을 통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 편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소녀의 심정에는 어딘가 자기의 마음과 비슷한 대목이 있는 것도 같았다.

소녀는 좀처럼 고개를 들리지는 않았다. 무슨 천문학자처럼 언제까지나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팔월 초순, 뜨거운 하늘이었다.

지운은 떨리는 손길로 편지를 다시금 손수건에 싸들고 후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소녀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소녀는 조금도 알은 척하지를 않고 멀리 수정각 지붕 위로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다. 지운이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고개 하나 까딱 없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소녀의 옆얼굴이 지운 소년에게는 성스러울만큼 청초하고 예뻤다.

『저……』

꽃봉투를 싼 파란 손수건을 손으로 읍하듯이 공손히 쥐고 지운은 부끄러워서 머리를 수그리었다.

『저……』

목소리가 자꾸만 떨린다. 꾸중을 받으러 온 소학생처럼 지운의 사지는 자꾸만 굳어져 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지운은 몰랐다.

그래도 소녀는 지운의 편을 한 번도 돌아 봐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운은 수그렸던 고개를 가만히 들어 소녀를 바라 보았다. 무심히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었으나 그러나 그 얼굴이 귀밑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는 양을 지운은 보았다.

『저…… 편지는 …… 분명히 …… 분명히 받아 보았읍니다.』확확 닳아 오는 얼굴과 무섭게 두근거리는 가슴의 동기가 지운 소년의 말을 자꾸만 중도에서 끊어 놓는다.

그래도 소녀는 대답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점점 더 짙은 홍조만이 소녀의 옆얼굴을 덮어 씌우고 있었다.

『나는 그만 …「誠[성]」자 하나를 빼 먹었읍니다. 요다음 일요일까지는 꼭…… 이 벚나무에 「誠[성]」자를 새겨 놓겠읍니다.』

그 순간, 소녀는 후딱 머리를 돌려 지운을 쳐다 보았다. 알린알린 들여다 보일 것처럼 희고 갸름한 얼굴이 한층 더 빨개지며 젖은 것 같은 두 눈동자가 긴 살눈썹 밑에서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소녀는 잠시 지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발딱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사람들이봐요. 우리학교 선생님이 오셨는 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소녀는 휘이 한 번 사방을 돌아다보다가 유원지 쪽에서 내려오는 중학생 패거리를 한 무더기 발견하자 당황한 어조로,

『나는 가겠어요! 다음에…… 다음에 또……』

그 한 마디를 남겨놓고 쏜살같이 정문을 향하여 사라지는 소녀의 등뒤에서 지운은 말했다.

『그럼 꼭 다음 일요일에……』

9[편집]

행복의 문은 마침내 열렸다. 진실로 이 한 주일 동안에 있어서의 소년 임 지운이야말로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화려 찬란한 마음의 왕자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깊이 생각해 본다는 것이 어째 이처럼도 기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소위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일까?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정체를 좀처럼 헤아리지 못한 채 지운 소년은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 속에서 한 주일 동안 흐뭇이 젖어있었다.

토요일 저녁 무렵에 지운은 다시 창경원을 찾아가서 「愛人[애인]」이라는 두 글자 위에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글씨로 「誠[성]」이라는 글자 하나를 더 새겨 놓고 돌아왔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이튿날은 일요일이건만 하루 진종일을 기다려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지운에게는 불가사의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빠져 본 적이 없는 소녀가 아니었던가!『어디가 아파서 갑자기 누워 버린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면 그럴는지도 몰랐다. 소녀는 항상 약병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문 직전까지 지운은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넋을 잃고 터벅터벅 돌아왔다.

『갑자기 무슨 사고가 생겨서 못 나온 것이 아닐까?』

이튿날은 월요일이다. 마침 방학이어서 지운은 창경원을 또 찾았다. 무슨 사고로 못 나왔다면 월요일에라도 나와서 저번처럼 편지로라도 무슨 연락이 있을 것만 같이 생각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도 소녀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화요일에도 가 보았다. 수요일에도 가보았다. 마치 무슨 꿈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선녀를 보았던 것처럼 지운은 허무해졌다.

『갑자기 병이 덫혀서 죽은 것이나 아닐까?……』

어쩐지 지운에게는 그 생각이 더한층 절실히 왔다.

『그렇지만 다음 일요일까지는 꼭 나타날테지! 그처럼 철석 같은 약속을 했었는데……』

그런데 그 다음 일요일이 오기 전에 삼천리 강토를 뒤집어 버린 팔·일오 해방이 왔다. 세상은 바뀌어지고 희망의 꽃은 민중의 가슴속에서 활짝 피었다.

흥분한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다가도 지운은 연방 창경원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다음 일요일에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음 일요일에도, 그리고 또 다음 일요( )에도.

지운은 울었다.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이건만 지운은 문을 꼭꼭닫고 자기 방에 들어앉아서 어머니 몰래 울었다. 그러다가도 생각만 나면 미친 사람 모양 창경원으로 달려가서 정성껏 아로새긴 「愛人[애인]」의 두 글자를 어루만지면서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있곤 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이 못가에 나타날 거야 그처럼 굳은 약속을 했는데……」 죽지만 않았으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도 소녀는 영 나타나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요일에는 꼭꼭 창경원을 찾았건만 소녀는 없었다.

『거짓말장이!』

울먹 울먹, 지운은 눈물을 먹음고 소녀를 거짓말장이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자기의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씩 위로해 보기도 했다.

10겨울이 가고 봄이 또 왔다.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것은 실로 어수선한 겨울이요 봄이었다. 그 해에 지운은 대학에 들어갔다. 전공은 영문학이었다.

『분명히 그 여학생은 죽은 것이다.』

지운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루의 희망을 품고 지운은 창경원을 줄곧 찾았다. 벚나무 밑등에 아로새긴 「愛人[애인]」의 두 글자는 모진 비바람에 빛깔을 잃고 이미 꺼멓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지운은 희망을 끝끝내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도 그 나이 또레의 여학생만 보면 마음이 공연히 두군거렸고, 그러다가 따라가서 얼굴 모습을 들여다 보고는 한숨을 지었다.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사는 처소도 모른다.

『왜 그때 용기를 좀더 내서 학교 마아크라도 못보아 두었던고……?』

마디 마디가 한 뿐이요, 가지 가지가 후회일 따름이다.

거기서 지운은 시내의 온 여학교나 여자 대학을 찾아다니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정문 앞에 우두머니 서서 봄 한철 동안을 두고 그 여학생의 얼굴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 모두가 다 허사일 뿐, 지운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점점 더 우울해 졌다. 고독하고 서글퍼지면 지운은 곧잘 창경원을 찾았다. 그러다가 심신이 지치면 글방에 들어 베겨서 파란 손수건을 풀었다.

또 일 년이 지났다. 그 일 년을 지운은 하루처럼 소녀를 마음속에 고요히 그리면서 지냈다. 결혼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부모는 귀찮도록 권해 왔으나 지운은 일생을 두고 자기는 결혼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 일 년이 지나고 이태가 지났다. 소녀의 소식은 바람결에도 못했다.

春草年年綠(춘초는 연연록이요) 王孫歸不歸(왕손은 귀불귀라) 사 년이 지난 봄, 창경원 벚꽃이 또다시 만발했을 무렵 지운은 손수 이 유명한 오언소시(五言小詩) 한 귀를 모필로 써서 글방에 걸었다. 「王孫[왕손]」을 「愛人[애인]」인라고 마음속으로 고쳐서 지운은 읽는 것이다.

『봄 풀은 해마다 푸르건만 한 번 가고는 영영 돌아올 줄 모르는 오오, 님이여, 애인이여!』

대학 시절부터 지운은 시나 소설 같은 것을 학교 잡지에 발표했고, 그것이 문단 일부의 인정을 받아 잡지에 가끔 실리게 되어 지운의 고독과 우울은 문학에의 정열로 변모를 하였다. 창경원 연못가에서 움트고 자란 서글픈 사랑의 노래를 지운은 읊었다. 행여나 자기의 시가 그 소녀의 눈에 띄어 부랴부랴 자기를 찾아 와 주는 그런 종류의 로맨스를 청년 지운은 그 얼마나 꿈꾸어 보았던가!

『그러나 님은 영영 와 주지 않는다!』

창경원을 찾는 도수가 점점 떠져 갔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 인제는 도리어 창경원을 찾는 것이 괴로움으로 변해 버렸다. 될 수만 있으면 창경원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지운에게는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잊어버리자! 창경원도 연못도, 벚나무도, 애인도 모두 다 망각의 피안(彼岸)으로 정배를 보내자!

지운은 차츰차츰 소녀에의 환상을 잊어버리기로 작정을 하였다. 대학을 나와 시내 모 중학교에 봉직을 한 바로 그 해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 지운 일가가 부산으로 피하면서부터 창경원과는 영영 작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